전통의 현장

봉산탈춤




서연호 / 고려대교수

1. 놀이의 성립

오늘날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봉산탈춤의 전승지는 황해도의 봉산구읍으로서, 행정구역으로는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 해당된다. 봉산은 고려초기의 鳳州에서 유래된 지명으로서, 현종 초기에는 한 때 이웃인 黃州에 예속되었고 충렬왕 때에는 다시 봉주가 되었으며, 조선조 태종 13년에 봉산군이 되었다.

예부터 봉산에는 탈놀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하여 왔다고 한다. 고려조 말엽 어느 절(萬福寺라 한다)에 萬石이라는 늙은 도승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세인으로부터 生佛이라 할 정도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의 知人중에 醉發이라는 방탕한 처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술책으로 도승을 타락시켜 세인의 조소를 받게 하고자 하였으나, 만석은 좀처럼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취발은 마침내 미녀를 통하여 유혹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도승은 파계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 어느 志士가 불교의 장래를 염려하고 일반인들의 풍습이 퇴폐 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여, 이 탈놀이를 案出하게 되었다.

萬石은 曼碩 혹은 曼釋으로 표기된 중으로서, 흔히 고려 말의 辛旽을 지칭하며 일설에는 黃眞伊가 파계시킨 知足禪師라고도 한다. 작품내의 등장인물로 보면 노장을 설정하게 된 배경을 말해 주는 것이다. 醉潑은 노장에 대립하는 인물인「취발이」의 한자 표기이자 성격 설명이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醉髮(취하여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醉潑(취한 무뢰한)·醉跋(취하여 비틀거리는 사람)이라는 다른 표기가 오히려 적당하나 문제는 한자식 표기가 아니라 등장인물이 실존인물이었다는 현실성의 강조에 있다. 아울러 놀이의 목적은 불도의 타락과 풍습의 쇠퇴를 경계하고자 하였다는, 그 주제에도 주목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유래설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양주탈놀이의 그것과 같다. 두 탈놀이가 같은 근원에서 성립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설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립에 관한 증거자료로서는 객관성이 희박하다.

봉산탈춤은 양주탈놀이와의 유사성을 전제로 한다면, 일단 산대놀이의 한 분파로 볼 수 있겠는데, 宮庭 주변의 산대놀이와는 달리 지방의 관아에서 산대놀이를 하였다는 기록은 매우 희귀하여 입론을 구체화시키기에 애로가 크다.

⸁ 禮曹에 전지하기를, 지금 각도각방에서 신임 監司를 환영하기 위해 綵棚 儺禮를 할 때 군인(인부)을 동원하는 것은 금할 것.

⸂ 平壤·黃州에 모두 鰲山棚을 설치하고 百戱로서 환영하였으나 한양에서의 연희가 그중 뛰어났다.

앞에서 채붕, 오산붕은 모두 山臺를 지칭한다.

世宗이 내린 ⸁과 같은 傳旨는, 지방의 관아에서 산대를 설치할 때 주민들을 대거 동원하여 생업이나 생산에 지장이 많았음을 알게 해 주는데, 그만큼 산대놀이가 각 지방에서도 성행하였음을 반증해준다. 成宗 19년(1488)에 중국 사신 董越이 관극한 ⸂의 자료에서는 ⸁의 경우를 보다 구체화시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궁정과 지방의 산대놀이를 비교 추론할 수 있게 해 준다. 신임 감사의 부임을 환영하는 이외에도 한양과 중국을 관통하는 南北直路에서는 사신이 來朝하는 경우 별도로 산대놀이를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당대의 사정과 함께 ⸂에 들어 있는 黃州라는 지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황주의 남쪽에는 봉산군이 연이어 있고 읍과 읍 사이의 거리는 40리 (16km)에 불과하며, 앞서 언급했듯이 한 때에는 봉산이 황주의 屬縣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황주와 함께 봉산에도 일찍부터 산대놀이가 공연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가능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봉산관아의 산대놀이가 곧 오늘과 같은 탈놀이로 보기는 어렵다. 궁정의 산대놀이가 조선조의 후기에 이른바 산대탈놀이로 변모·변화하였듯이, 봉산의 경우에도 수도권문화의 영향에 힘입어 후기에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관한 몇 가지 방증자료를 검토해 보기고 하자.

① 약 2백년 전까지는 木製의 탈을 사용하였던 것인데, 그때의 봉산의 史屬 安草木(첫목의와전이가?) 외 1명이 전남의 어느 섬으로 유배당하였다가 귀향하였다. 그 후 그들은 탈춤상에 많은 개변을 가하였다. 탈을 紙탈로 한것은 그중 현저한 개변이라 하겠다. 이 놀이의 연기는 安 이전에는 어떠한 계층의 사람이하였는지 미상하나 安의 귀향 이후로는 이속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② (먹중Ⅱ)…난양공주 진채봉이, 세운 같은 계섬월과 심효연 백능파와 이 세상 시일토록 노니다가 서산에 일모하여 귀가하여 돌아오던 차에 마침 이곳에 당도하여…

③ (말둑이)…양칠簡竹 紫紋竹을 한발아웃식 되는 것을 사다가…

④ (미 얄)…춘향이와 이도령 만나 노듯이 업어도 주고 안어도 보며…

⑤ (영 감)…땜쟁이 통을 사서 걸머지고 다녔드니 하루는 산대도감을 만나서 산대도감에 말이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어디 있으며, 산대도감 모르는 땜쟁이가 어디 있드냐…

①에서 안초목의 생존연대는 조사시기(1936년)를 기준으로 하면 18세기 중엽이 된다. ⸂의 먹중대사는 <구운몽>에서 인용된 것이므로 작품 제작연대(1689년)이후, 일반에게 널리 애독되던 시기에 인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의 대사에는 담배 혹은 담뱃대가 유행하던 시기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수용시기(17세기 초엽)보다 훨씬 뒤의 화제로 볼 수 있다. ⸄는 <춘향전>에서 인용되었으므로 빨라도 晩華本 춘향전(1754년) 이후일 것이다. ⸅에는 산대탈놀이가 민간에 널리 유행하던 시기가 반영되어 있다. 산대탈놀이의 유행은 궁정의 公儀로서 산대놀이가 폐지된 이후로 볼 수 있으므로 빨라도 인조 12년(1634년) 이후의 일이 된다.

이상의 단편적인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18세기 중엽 이후에 현재와 같은 양식의 탈놀이로 성립된 것임을 대체로 확인 할 수 있다. 우리 역사상 18세기는 서민문학이나 광대예술이 왕성하게 발전되던 시기다.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봉산탈춤도 하나의 연행예술로 성숙·정립되었고,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2. 놀이의 환경

황해도 각지에 전승되는 탈놀이 중에서도 봉산탈춤이 특히 예능적으로 우수한 품격을 갖추게 된 환경적 요인은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첫째는 단오놀이 중에서도 대표적인 종목으로 전승됨으로써 일반인의 호응이 높았던 요인을 들 수 있다. 알려진 대로 북쭉지역의 세시풍습으로는 일년 중 단오절이 가장 큰 행사이다. 농업생산이 위주가 되던 과거에는 곡식의 씨앗을 심고 나서 아직 모내기가 시작되기 이전의 잠시 한가한 시기가 단오였으므로, 그만큼 일반인의 참여가 높았다. 단오절이 되면 봉산에서는 競秀臺 아래 마당에 놀이판을 펼치고 낮에는 그네와 씨름의 경연을 벌였고, 밤에는 탈춤을 하는 것이 오랜 관행이었다. 1915년경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고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기게 되자, 봉산은 구읍이 되고, 새로 사리원의 경암산 아래에 놀이마당을 펼쳤으며,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낮밤의 놀이가 진행되었다. 봉산군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관중을 이루었고, 탈놀이는 그네와 씨름이 예선·본선·시상을 치루는 동안 4∼5일 계속되었다. 놀이꾼들만이 탈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각자 탈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 이곳저곳에서 저희들끼기 탈판을 벌일 정도로 탈놀이는 성행하였다. 탈을 쓰고 나면 남녀 노소 신분상에 차이가 없어지므로 봉산의 놀이마당은 그만큼 신명이 오르고 흥청거리는 분위기를 이루었다.

둘째는 경제적인 여건이 유리했던 요인을 들 수 있다. 예부터 단오놀이를 위해 봉산의 각 지역 군민들은 일정한 비용을 헌납하는 것이 관행이었고, 부자나 상인들은 특별한 기부금을 내주어, 항시 놀이에는 큰비용이 소요되었으나, 경비의 부족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었다. 상인들은 단오절 경기를 이용하여 왔으므로 상대적으로 놀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테면 시장경기의 활성화에 탈춤이 큰 몫을 한 셈이 된다. 기부금을 낸 상인들 가운데 일부는 놀이마당 둘레에 다락을 매고 음식을 팔아 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2층으로 된 다락은 섯가래를 이용하여 골조를 만들었고, 그 위에 수숫대 엮음과 볏짚·화문석 등을 차례로 포개어 깔아 관중석으로 이용하였다. 상인들은 다락 밑에서 음식을 팔았고, 다락에 오른 관중들은 그들에게서 술·떡·묵·부침개·엿·국수 등을 사 먹으면 자연히 입장료를 지불하는 셈이 되었다.

셋째는 놀이꾼들은 관아의 이속이 주축이 되었으므로 놀이의 전승에 유리한 요인이 되었다. 조선조의 이속(아전)은 지방행정제도에 따른 것인데 官(목사·부사·군수·현감)은 중앙정부에서 임명하고 자주 바뀌는데 반하여, 이속은 세습적이고 영구적이었다. 이들은 지방의 유력자로서 실제의 지방행정권을 장악하여 왔기 때문에 탈놀이의 진행이나 연출, 연기면에서도 유리한 입장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그러기에 그 기량이 더욱 세련되고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행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중앙정부와의 문화적 교류나 정보습득, 악사들의 동원, 비용의 갹출 등이 모두 쉽게 가능하였을 것이다.

넷째는 관아의 악사청의 지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명문화 된 기록은 없으나 악사가 없는 탈놀이는 불가능하므로, 격식을 갖춘 삼현육각(피리·젓대·북·장고·해금이 주가 되고 때로 꽹과리와 징이 추가된다)의 지원은 분명한 사실로 인식된다. 유독 탈춤의 악사에 관한 기록은 아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봉산군조에 「곳곳에 등 밝히고 管絃을 연주하네」, 「雅樂이 오랫동안 흩어졌으니」등의 편린이 남아 있음을 고려하면, 봉산에 음악이 발전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섯째로 황해도 지역끼리의 탈춤경연도 발전의 한 요인으로 들 수 있다. 해주 감영에서는 매년 5월 단오절을 전후하여 각처의 탈놀이패를 초치하여 경연을 베풀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잘한 놀이꾼에게는 감사가 관기 하나를 상으로 하사하였는데, 이러한 행사를 통하여 탈놀이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해주의 東海州지역에서는 봉산탈춤을 초청하여 가끔 놀았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환경적 요인은 봉산탈춤의 발전에서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놀애패와 놀이꾼

앞에서 봉산탈춤은 이속들의 놀이로 전승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이속은 外衛前 즉 鄕吏를 일컫는데, 탈춤의 내용이 다른 지방과는 현격하게 한문고사나 한시, 고전작품 등의 인용이 많고 난해하게 되어있는 점에서 당대 지식층인 향리들의 개입이 분명하게 여겨지나, 향리 출신 놀이꾼으로 실제로 알려진 인물은 극소한 실정이다.

봉산탈춤의 중흥자로 알려진 안초목은 이속출신으로서 귀양갔다 돌아와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꾼 놀이꾼으로 알려져 있다. 「초목」이라는 이름은 첫먹중 즉 初目僧·初墨僧 등에서 연유된 것으로 흔히 이해된다. 그가 귀양에서 돌아와 탈을 바꾸고 놀이를 개변시켰다는 전언은 곧 봉산탈춤이 다른 지역의 영향(산대탈놀이가 아닌가 한다)을 받아 발전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첫먹춤의 명수이고 모가비(놀이패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이성구(19세기 중엽)는 執事를 지낸 인물이라 한다.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놀이꾼으로는 1830년경의 이익보(말뚝이역)·김여집(양반)·배학림(취발이), 1850년경의 갈부손(취발이), 1870년경의 안일조(노장)·이춘강(노장·취발이), 1910년대 전후의 임재현(노장)·정순조(먹중·신장수)·김봉학(먹중·상좌)·정세길(丁錫一, 사자·미얄할미)·남학진(상좌·소무) 등이 있다. 이들은 봉산탈춤의 전승 과정으로 보아 대체로 이속출신이거나 그 후예들일 가능성이 짙다.

봉산탈춤은 1936년 8월 31일 사리원 경암산 아래 마당에서 百種節 공연을 베풀었고, 당시 경성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공연에 출연한 놀이꾼들은 이동벽(감독역)·김경석(노장·양반·남강노인)·이윤화(취발이·첫먹·말뚝이·사자앞·미얄할미)·이명화(상좌)·김난심(상좌)·정월선(상좌)·정운선(상좌)·임덕준(둘째먹·거사·영감)·김수정(세째먹·거사)·한상건(네째먹·거사·신장수·도령·덜미리집)·김진옥(다섯째먹·거사)·김태혁(여섯째먹)·나운선(여덟째먹·거사·서방)·양석현(일곱째먹·홀아비거사)·안연홍(사당)·김채선(소무)·정영산홍(소무)·김선선(원숭이) 등이었다. 악사로는 김춘학·김학원·김성진·방영환·정덕붕·김명근 등이 참여하였다.

이동벽(살았으면 1백여세, 70세에 작고)은 당시 사리원기생조합장이자 금광을 하여 유력한 지방인사로 행세하였으나 다리를 약간 저는 관계로 춤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가 모가비노릇을 하였기에 수하의 기생들이 상좌·사당·소무·원숭이역에 대거 출연하게 되었다. 김경석(1884∼?)은 노장춤의 명수였고, 상업을 하였다. 이윤화(1890∼?)는 모든 춤에 두루 뛰어났고 농사를 하였다. 임덕준은 건달이자 한량으로 소리도 잘 하였다. 한상건(1892∼?)은 취발이춤도 잘 추었으며 농사를 하였다. 김진옥(1894∼1969)은 이발소를 경영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탈판을 따라 다니며 춤을 익혔다. 김경석 대신에 노장을 추었으며 첫목·사자춤에도 뛰어났다. 나운선(1894∼?)은 팔먹을 잘 하였고 상업을 하였다. 이밖에도 당시의 놀이꾼으로는 이성구의 아들인 이장산(첫먹·취발이역)·경기도 출신인 박천만(1889∼?, 팔먹·마부) 등이 있다.

기생들이 그들의 예능과 미모를 자랑하기 위해 역할을 맡고, 때로 탈을 벗은 채 직접 연기를 해 보인 대담한 참여는 다른 지역의 탈놀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지금까지의 男性女役에서 여성들이 직접 자신들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비단 妓業의 흥행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의식면에서 중대한 변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탈춤의 연극적 발전이라는 면에서는 기여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대로 봉산탈춤의 놀이꾼은 이속·반농반상인·기생·한량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관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봉산탈춤은 1930년대 말까지 단오놀이로서 전승되다가 시대적 상황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놀이는 광복이후, 혹은 6. 25이후 월남한 일부의 놀이꾼들에 의해 계승, 복원된 것으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4. 탈과 기본춤

봉산의 가면이 안초목에 의해 나무탈에서 종이탈로 바뀌게 되었다는 앞서의 기록은 일찍부터 나무로 만든 信仰가면이 전승되어 오다가 종이로 만든 藝能가면으로 전환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그에 관한 확증자료는 아직 찾을 수 없다.

봉산 구읍에서는 단오 1개월여 전에 탈춤의 준비를 하였다. 읍에서 10여 리 떨어진 白雲庵에 연습장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탈, 의상, 제도구 등을 준비하면서 합숙·연습하였다. 사리원에서 놀게된 이후에는 매년 인근의 적당한 장소를 택하여 준비를 하였다. 한 번 사용한 탈은 놀이가 끝나면 일단 불태워버렸으므로 매년 새로 장만하여야 하였다.

과거에 탈을 만들어온 방법은 다음과 같다. 기왓장 위에 진흙으로 탈의 모형을 빚어 놓은 후, 물기가 꾸들꾸들 마르면 그 위에 신문지나 한지를 여러 겹 바르고, 흙이 굳기 전에 파낸다. 기왓장을 이용하는 것은 건조를 잘 시키기 위한 이유로 보인다. 종이틀이 완전히 마르면 칼로 코와 입을 뚫고 눈구멍은 쇠붙이를 달구어 뚫는다. 색깔은 물감이나 단청을 사용하였으며 갑풀(아교물)을 위에 발라 오늘날 리스의 효과를 내었다. 이렇게 하여 종이탈은 완성되었다.

봉산가면의 제작법은 월남한 놀이꾼 김진옥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현재는 김기수가 대표적인 제작 작이다. 1962년부터 제작법을 익혀 온 김기수는 현대적인 도구나 기술을 응용하여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먼저 시도된 것이 진흙틀과 종이틀을 쉽게 분리시키기 위한 비누물의 사용이었다. 진흙틀 위에 종이를 바르기 전에 비누물을 많이 발라 종이가 모형 위에 붙지 않도록 함으로써 분리가 용이하게 되었다. 1964∼5년경부터는 탈의 모형을 석고로 만들어 고정시켰다. 진흙으로 모형을 만들어 말린 후 그 위에 석고를 붓고 흙은 파내어 영구적인 틀을 완성시켰다. 석고틀은 일종의 암컷틀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속에 먼저 비누물을 바르고, 그 위에 한지와 공업용마분지를 여러 겹 발라 말리면 수컷틀인 종이탈의 모형이 완성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원형의 변형 없이 필요한 대로 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종이는 반드시 손으로 찢어 붙이고, 탈의 가장자리는 한약방에서 사용하는 작두로 자르며, 눈·코·입 등의 구멍은 수술용 매스(11·12호)로 자르므로 써 정교한 효과를 낸다. 탈의 표면에는 피지를 발라 견고성을 한층 높인다. 풀에는 방부제를 섞거나 수성본드를 사용함으로써 鼠害나 곰팡이를 방지한다. 색채는 광택을 없애기 위해 페인트에 카세인을 섞어 칠하며, 金紙의 사용은 金粉으로 대치하였고, 머리카락으로 사용하는 五方觸紙는 모두 염색하여 사용한다. 사자의 털은 예전에는 한지로 하다가 월남 이후에는 인조섬유로 바뀌었고 66년 이후에는 화학섬유로 대치되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탈은 가볍고 견고하여 2년 정도의 수명을 가지며, 탈 한개의 완성에는 10여 일이 소요된다. 월남 이후의 공연에서는 탈을 불태우는 관습은 없어지게 되었다.

봉산탈의 전반적인 특징은 기본 재료인 종이를 매우 폭넓게 활용하여 형태나 색채면에서 조형감각이 뛰어나게 구성되어 있으며, 아울러 연극적인 상징성이 풍부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상좌(4개)·소무·샌님·서방님·영감 덜머리집·무당·남강노인·원숭이·사자 등은 사실성을 기조로 한 형태이나 이 이외의 먹중(8개)·노장·신장수·취발이·말뚝이·도련님·미얄할미 등은 기이하고 무서운 느낌을 주는 鬼面性이 강하다. 특히 얼굴에 큰 혹(7∼8개)과 굵은 주름이 있는 먹중, 유독 두터운 입술을 지닌 노장, 이마에 7가닥의 굵은 주름이 있는 취발이탈 등은 종이를 이용하여 입체적이고 회화적인 조형미를 창출해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그밖에도 익살스런 느낌을 주는 말뚝이와 미얄할미탈 등도 괄목할 만한 특이로움이 있다.

선의 구사에 있어서도 다른 지역의 탈에서 찾기 어려운 대담성이 보인다. 먹중(8개)·취발이·말뚝이·신장수탈 등의 눈썹은 흑색·백색의 선을 교차시키면서 위로 길게 늘여 놓았는데, 특히 취발이의 눈썹 길이는 안면 전체 길이의 절반을 넘는다. 불거진 눈두덩이 주변의 희고 큰 눈자위와 굵은 검은 선의 모습은 강한 생동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대담한 선의 구사는 탈을 크게 보이게 함은 물론 움직일 때 활달한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다.

색채에 있어서도 五方色에 대한 의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대담하게 표현된 경우에 속한다. 흑·백·적·청·황 등 오색에서 붉은색은 주황색·연갈색으로, 푸른색은 짙은 남색·초록색으로, 노란색은 연노랑·황금색 등으로 변이되어 있기는 하나, 안면색이나 종이로 만든 머리카락, 얼굴반점, 안면선 등에는 오색에 대한 조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요컨대 봉산탈은 이상과 같은 형태나 선, 색채 등을 조형적으로 조화시켜 개개의 탈이 지닌 성격적 특징을 보다 강렬하게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고 있다.

봉산탈춤은 물론 종합적인 연행예능이나 춤이 위주가 되기에 탈춤이라 한 것이 분명하다. 춤은 삼현육각이 연주하는 염불·타령(긴 타령·잦은 타령)·굿거리(잦은 굿거리·아주 잦은 굿거리)·만신가락 등에 맞추어 추는데, 8먹중들이 추는 것을 기본춤으로 삼고 있다. 그 춤사위는 불림(1장단)·고개잡이Ⅰ(2장단)·고개잡이Ⅱ(1장단)·무릎올리기(2장단)·황소걸음(1장단)·불림(1장단)·외사위(3장단)·겹사위(2장단)·양사위(2장단)·외사위(1장단)·앉아뛰어외사위(2장단)·앉아뛰어겹사위(2장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삼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한삼을 경쾌하게 뿌리면서 두팔을 굽혔다 폈다 하고, 발은 높이 뛰면서 활달하게 추는 춤이다.

이 이외에도 연풍대·까치걸음·물결사위·게걸음·가제걸음·활개펴기·개구리뛰기·물레방아돌기·도리깨질사위·만사위·상우리·합장재배 등 의 춤사위가 있고, 취발이의 깨끼춤·말뚝이의 두어춤·미얄의 궁둥이춤·노장의 판토마임 등이 유명하다. 사자춤은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잘 채며 추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찍이 놀이꾼 이근성웅은 봉산탈춤은「무겁게 끈적끈적하게 활발하게 추는 춤」이라 하였다 한다. 몸 전체로 크게 공간을 확장해 가면서 추는 춤으로는 봉산탈춤을 능가할 것이 없다는 것이 세인의 보편화된 인식이라 하겠다. 봉산탈춤의 춤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 학계의 큰 과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5. 봉산탈춤보존회

서울 강남구 삼성동(112의 2)의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는 봉산탈춤보존회(이시장, 김기수)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봉산탈춤의 전승은 1958년 8월 월남한 놀이꾼 김진옥·민천식·이근성 등이 한국봉산가면극연구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가능해졌다. 1960년 8월부터 현재까지 정규·비정규공연을 해 오고 있고, 1961년 10월 전국민속경연대회부터 이후 수차 경연대회에 참여하였으며, 1967년 6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됨으로써 전수·공연활동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국내의 공연은 물론 해외공연을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개·보급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 동안 해외공연으로는 미국의 하버드대학 등 20개 대학 순회공연(1977, 3∼5), 일본 조일신문 초청공연(1977, 5), 유럽 벨기에 등 6개국 순회공연(1978, 6∼9), 香港 및 대만 순회공연(1979, 9), 유럽 프랑스 등 6개국 순회공연(1980, 5∼7), 일본 문화재단 초청공연(1983, 6), 84년 미국 L. A문화올림픽 및 캐나다와 일본 순회공연(1984, 7), 일본 한국청년회 탈춤지도(1985, 11), 캐나다 EXPO '86세계예술제 참가공연(1986, 5) 등이 있었다.

그 동안 봉산탈춤의 전승·발전에 기여해 온 놀이꾼으로는 앞서 지적한 사람 이외에도 김용익·최경명·김유경·윤창석 등이 있다.

김진옥은 앞서 밝힌 대로 어린 시절부터 고향 사리원에서 탈춤을 익혀 왔으며 이윤화·박천만에게 사사 받기도 하였다. 춤사위·놀이의 진행·가면제작법 등을 전수시켜 주었으며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민천식(1898∼1967)은 사리원 출신으로 평양 숭실중학과 李王職舞踊部에서 수학한 지식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탈춤을 추었고 이윤화·박천만에게서 사사 받기도 하였다. 월남하여서는 인천국악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주로 소리꾼(놀량창)으로 유명하였다. 이근성(1895∼1978)은 송화군 출신으로 해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고, 15세부터 해주에서 오순옥·이치호 등에게 탈춤을 사사 받았다. 부잣집 외아들로서 금융조합이사를 역임한 바 있으며, 한량같이 놀기를 즐겼다. 먹중·취발이·사자 등을 하였고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김용익(1907∼1979)은 사리원 출신으로 김진옥의 이발소에서 이발사로 있으면서 56년부터 김진옥에게 춤을 사사 받았다. 사리원보통학교 졸업생으로 취발이·먹중·거사·마부 등을 하였고,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최경명(1912∼1985)은 신천 출신으로 뛰어난 소리꾼이었다. 배따라기·초한가·공명가·배뱅이굿 등을 잘 하였고, 해금·피리에도 능통하였으며 탈놀이에서는 말뚝이·취발이역을 하였다. 71년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김유경(1906∼ )은 사리원 출신으로 사리원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7년 신천에서 이무연에게, 57년 김진옥에게 춤을 사사 받았다.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말뚝이 사자앞머리 등을 하였다. 윤창석(1900∼1970)은 봉산군 구연면 출신으로 평양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57년부터 김진옥에게 사사 받았다. 먹중·사자역 등을 하였다.

현재의 보존회는 예능보유자·이수자·전수자 등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연활동과 전수·보급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보유자에는 양소운·김선봉·윤옥·오명옥 등이 있고. 이수자에는 김기수·장용일·김종엽·박상운·조운용·최창주·정혁조·장준석·김성해·김종해 등이 있다.

양소윤(1924∼ )은 재령군 출신으로 해주권번무용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황해도 소리와 춤에 두루 능통하다. 소무·사당·마얄·무당역을 할 수 있다. 김선봉(1922∼ ) 사리원기생조합장이던 이동벽의 양녀로 그곳에서 수학하였으며, 상좌·소무·무당역을 할 수 있다. 윤옥(1925∼ )은 앞서 윤창석의 딸로서 兼二浦藝妓組合에서 수학하였으며 상좌·무당역을 할 수 있다. 오명옥(1906∼ )은 서울 출신으로 본래 황해도 음악인이 아니었으나 피리·해금 등에 능통하여 봉산탈춤에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기수(1936∼ )는 83년 이후 이사장직을 보고 있으며, 노장·첫먹·양반역 등을 맡는다. 장용일(1946∼ )은 상임이사로서 취발이·먹중역 등을 맡으며, 국립극장 무용단원이기도 하다. 김종화(1947∼ )은 먹중·영감역 등을 맡으며, 연극인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박상윤(1948∼ )은 먹중·신장수·양반역 등을 맡으며,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조운용(1949∼ )은 첫먹·사자역 등을 맡으며, 서울예술전문학교 서무주임이기도 하다. 최창주(1950∼ )는 먹중·사자·마부역 등을 맡으며, 서울시립 가무단원이기도 하다. 정혁조(1951∼ )는 먹중역을 맡으며, 수도공업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장준석(1952∼ )은 상좌·소무역을 맡으며, 가정주부이다. 김성해(1952∼ )는 먹중·사자역 등을 맡으며 국립국악원 무용단원이기도 하다. 김종해(1952∼ )는 먹중·사자역 등을 맡으며 국립극장 무용단원이기도 하다.

악사는 오명옥·김호석(1957∼, 피리)·박용호(1947∼, 대금) 등과 김선봉·윤옥·양소운 등, 다른 놀이꾼들의 협연으로 구성된다.

현재 보존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지적된다. 첫째는 전속 연희 자들의 생계비 문제로서,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도 탈춤공연만으로 생활이 가능할 때 예능에도 발전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현행의 보유자지정과 단체보조비에 관한 제도적 재검토가 요청된다. 둘째는 독립된 연습장과 기념관의 필요성이다. 삼성동의 무형문화재전수회관은 여러 단체가 들어 있고 연습장도 하나뿐이어서 각자의 연습에 지장을 초래함은 물론, 다른 예능을 자연스럽게 답습하게 되어 서로 비슷비슷해지는 단점이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셋째는 2백 석 정도 규모의 전천후·연중 무휴 상설 공연장이 요청된다. 공연장의 시설은 마당의 분위기를 내도록 설계되어야 하며, 일반인들에게 전승놀이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한 교육장으로서 활용되어야 한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긴 여름·겨울기간을 이용하여 공연을 보여 줄 수 있도록 전천후 시설이 요청된다. 생활문화의 확대와 전통문화의 올바른 계승·보급·발전을 위한 투자가 절실히 요청된다.

6. 놀이본의 채록

봉산탈춤의 놀이본은 1936년 9월 1일에 처음 이루어졌다. 그 해 8월 31일은 음력 백중날이었는데 단오에 놀지 않은 탈춤을 백중에 놀게 됨으로써 이튿날 놀이본의 채록도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날인 백중날의 공연은 당시 조선총독부 당국자의 권유가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이며, 사리원의 유력자인 이동벽의 주도에 의해 행사가 진행되었다. 때마침 총독부에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해 전국의 민속을 폭넓게 조사하고 있었는데 그 사업을 돕고 있던 촉탁 吳晴은 이동벽에게 탈춤의 전승을 역설한 바 있다고 한다.

공연은 31일 낮과 밥 2회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낮에는 총독부 文書課에서 영상필름을 제작하기 위한 공연을 하였고, 밤에는 경성중앙방송국(J. O. D. K)의 제2방송(아나운서 이혜구)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되는 공연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하면 당국의 공연권유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당국자로는 오청 이외에도 일인촉탁 村山智順이 촬영을 지도하였다. 한편 누구의 소개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스웨덴의 조류학자 베르그만은 낮공연을 대상으로 자신의 영화기제로 촬영을 하였다. 그는 백두산을 조사·답사하기 위해 내한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宣川의 信聖學校 교원이었던 임석재는 공연소식인 신문기사를 보고 사리원 현장으로 갔었는데, 그곳에서 송석하와 오청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튿날 즉 9월 1일, 이 탈춤의 주재자 이동벽씨의 협조와 명연기자 김경석·나운선·이윤화·임덕준·한상건·제씨의 각별한 호의에 의하여 그들의 구술한 바를 송석하·오청·임석재의 3인이 각기 몇 장씩 분담하여 필기하고 그것의 최후 정리를 임석재가 담당하였다. 정리에 당하여 대사 중에 나타나는 의미 불명한 것의 해명, 한자음 같은 것의 표기는 임석재의 아는 범위 내에서 정확을 기하였다. 그러므로 착오 미비가 있다면 그것은 전혀 임석재의 책임에 돌릴 것이다.

이렇게 하여 채록된 봉산탈춤의 놀이본은 임석재본 오청본 송석하본 등으로 각기 발표된 바 있는데, 세 편의 내용이 조금씩 각기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최상수본이라는 것도 있으나, 이는 송석하본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므로 독립본으로 인정할 수 없다. 임석재에 의해 하나로 정리된 놀이본의 내용이 그 후에 약간씩 바뀌게 된 까닭은 세 사람이 각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때 그 나름대로 가필·수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총독부 관방문서과에 보관된 오청본과 그가 《조선》지에 발표한 번역본조차도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확언할 수 있다. 당시, 오청은 임석재의 정리본을 받아 가지고「프린트본」을 만들어 발표한 일이 있는데, 양본 사이에 벌써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 한다. 그러니까 송석하는 그 프린트본을 그 나름대로 다시 수정하였음이 분명하다. 당시 촬영한 영상필름 중 총독부 보관용은 현재 확인할 수 없고, 베르그만이 찍은 것은 수년 전 강문봉대사의 수소문 끝에 입수되어 현재 임석재옹의 소장품이 되어 있다.

봉산탈춤의 놀이본은 월남한 놀이꾼인 김진옥·민천식 등의 구술에 의해 1965년 8월 이두현이 채록한 것이 있다. 문화재지정을 위해 새로이 채록된 이 놀이본에는 법고놀이 장면이 추가되었고, 그밖에도 이전의 놀이본에 상당한 보완이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놀이본의 연구는 별도의 지면을 필요로 하기에 여기서는 이만 줄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