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낭송 실태분석과 그 전망
윤성근 / 시인
시낭독 시대의 도래
시가 낭송되고 있다. 일시적으로 낭송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면서도 거듭 발전적인 모색 속에서 시가 낭송되고 있다. 아직까지 외형적으로 드러난 그 성과가 미미한 편이라 하겠으나 독자와의 사이에 쌓인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시와 시인이 직접 독자를 찾아 나섰다는 점에 시낭송 운동의 제일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시낭송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나오고 있는데 금년에 나온 것만으로도 『문학사상』3월호의 「한국 시문학의 발전적 과제」중 유한근의 「현대시는 왜 큰 감동을 못 주는가」는 한국시의 문제점을 애송시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으며, 『시문학』7월호 및 8월호에서 송현은「시낭송에 문제 있다」와 「시낭송의 실제」를 통해 시낭송회의 실제적인 문제점들을 열거한 후, 올바른 시낭송의 길을 제시해 보이고 있고, 『현대문학』9월호에서는 <80년대 시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대담을 통해 최하림·홍신선·최동호 제씨가 낭독과 시의 전달 및 수용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실로 오랜만에 나오는 시낭송에 대한 논의들이다. 그리고 너무 오랜 시간동안 시의 낭송 문제는 도외시되어 왔다는 느낌이다. 일반적으로 현대시가 점차 음악성을 상실해간 배후에는 E·파운드를 정점으로 하는 상징주의 시의 위용과 초현실주의 및 다다이즘 시운동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규정되어 왔다. 즉 보여주는 시의, 회화성 강조가 은연중에 묵계됨으로 해서 시는 활자 저편에 놓여 있기만 하는 되는 것으로 치부되어 온 것이다.
물론 시에 있어서 회화성이 강조되게 된 배경에는 고전적인 여러 시의 규범들에 대한 저항(가령 자구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 시어를 골라야 했다든가, 운자의 제약 밑에서 작업을 했던 19세기 이전의 시인들을 생각해 보라), 활자매체 및 복제술의 발달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은밀히 작용하고 있지만 좀 개념을 확대해서 묵독도 일종의 낭독의 형태라는 것을 감안할 때, 혹은 시의 언어의 단절이 그 시의 울림의 단절을 가져오는 것이 보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시에서 읽는 즐거움을 배제할 때 시의 존재가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최근 활발한 이 시낭송 운동은 미국시에서는 앨런 긴스버그의 장시『울부짖음』으로 시작된 고백시 운동을 연상케 한다. 우리들과는 다른 그들 특유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로르카나 딜런 토마스 이후 시낭송만으로 갑부가 된 시인을 낳았다는 범속한 사실에서도 혹은 폭발적인 대중의 호응과 호흡의 일치, 울림의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점에서도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또 우리는「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비디오쇼에 출연하여 흡사 광인처럼 시종 흥얼거리는 그를 보고 언어를 떠난 어떤 전율한 체험을 가지고 있거니와 바야흐로 들려주는 시의 시대의 도래를 예감케 한다.
그러나 이런 다소 거칠게 살펴본 낙관적인 견해와는 달리 현실은 시를 들려주는 행위 자체에서부터 시인과 독자(여기에서는 청중)와의 교감을 어렵게 하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어느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시작하는 조심스런 발언을 들어보면,
저는 낭독에 워낙 재능이 없어 그런지, 시낭독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 시가가 모두 吟誦이나 가락에 얹혀 수용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낭독이 꽤 오랜 역사를 갖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또 국문학으로서의 우리시는 운과 율격이 정교하지도 못했고요. 제일 회의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낭독이란 형식으로 전달되다 보면 자칫 시가 현장의 1회용 소비품으로 전달될 것이 아닌가 싶군요.
- 『현대문확』 '86년 7월호 P.47
이러한 회의는 아직도 유효하다. 시가 독자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들려주는 방식을 채택할 때에는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평면적인 반복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여겨지는데, 과연 이럴 경우 1회용 소비품으로 전략할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 또 많은 시낭송회에서 낭송되는 시들이 투철하게 시낭송을 목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작품이 태반이라는 현실을 염두에 둘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림에도 불구하고 들려주는 시의 위상을 정립해보자는 최근의 많은 시낭송회와 일련의 논의들은 시를 하나의 소통이론 체계 속에서 생각하고 있으므로 정당하다. 아드르노를 위시한 현대의 많은 비평가들이 우려하는 바와 같이 문화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거짓화해에 놓여 있는데, 진정한 소통·대화 속으로 이끌어오기 위해서 예술작품이 기여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당하다. 근래에 이루어지는 시낭송 운동이 카셋트나 비디오를 이용하는 것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마이크도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육성을 이용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또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훌륭한 예술작품인 시를 통해, 청중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시낭송의 요체이다. 앞으로 이 글은 이러한 시낭독의 현황과 모색의 지평을 열어 보기 위해서 몇 개의 통계자료와 분석을 앞세운 뒤 시낭송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최근3년간의 시낭송회의 분석
<표1>
횟수연도 |
월 |
계(괄호안은총계)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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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
9 |
7 |
11 |
6 |
8 |
8 |
5 |
6 |
8 |
8 |
5 |
8 |
89 |
'84 |
6 |
6 |
5 |
6 |
6 |
8 |
6 |
3 |
7 |
4 |
6 |
8 |
71 |
'85 |
5 |
4 |
2 |
4 |
6 |
5 |
4 |
6 |
7 |
8 |
12 |
9 |
72(232) |
<표1>은 지난 '83년, '84년, '85년 3개년간의 시낭송회 횟수를 월별로 누계한 것이다. 이 통계에 의하면 지난 3년 동안 매년 70회 이상의 시낭송회가 계속해서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는 특히 각 일간 신문을 중심으로 작성한 것이므로 홍보의 부족이나 기타여건의 제약으로 보도되지 않은 소규모의 시낭송회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지난 3년간 많은 횟수의 시낭송회가 지속적으로 열렸음을 알 수 있다.
또 월별로 볼 때도 큰 편차가 없어 연중 계속해서 꾸준히 시낭송회가 개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점 조금 뒤에서 살펴보기 되겠지만 시낭송회가 개최된 장소가 전부 실내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는 정례적으로 열리는 시낭송회 못지 않게 단 한차례 시집 발간 축하연 때, 기념으로 예식장 등지에서 열렸던 시낭송회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시낭송회 구성 주체 측에 많은 편차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시낭송회가 이루어질 것임을 전망할 수있다 하겠다. 지난 '83년부터 '85년까지 3개년간 이루어진 시낭송회의 전체 횟수는 232회이다. 앞으로는 이런 추세와 함께 질적으로도 수준급의 시낭송회가 많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장소 장소 |
다방 |
강당 |
예식장 |
소극장 |
도서관 |
기타 |
계 |
'83 |
47 |
14 |
7 |
12 |
8 |
1 |
89 |
'84 |
44 |
8 |
5 |
7 |
7 |
|
71 |
'85 |
35 |
10 |
1 |
9 |
7 |
10 |
72 |
<표2>는 시낭송회가 벌어진 장소별 유형화 통계이다.
이 통계를 볼 때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시낭송회가 가장 많이 벌어진 장소가 다방이라는 사실이다. '85년의 경우만 절반이 되지 않을 뿐 '83년, '84년에는 다방이 시낭송회의 장소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50퍼센트를 훨씬 상위 한다. 그 다음으로 시낭송회가 많이 벌어진 곳은 강당, 소극장, 도서관, 예식장, 기타 순이다.
밝혀둘 것은 다방 항목 속에 카페를 포함하였고 강당의 항목에는 소극장보다 규모가 큰 공공회관, 즉 시민회관이나 도민회관 혹은 YMCA의 강당 등을 포함하였다. 기타의 항목에는 화랑·갤러리와 영화상영용 목적을 가진 극장 등이 포함 되었다.
지난 3년 간 시낭송회가 이루어진 장소들의 추이를 살펴보면 점차 다방의 비중이 작아지고 기타 항목(참고로 '85년 화랑·갤러리에서 이루어진 시낭송은 5회, 극장에서는 2회이다)의 비중이 커진 점이다. 또 눈에 띄는 것은 예식장의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퍽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장소별 유형으로 볼 때는 점차 시낭송회가 뚜렷한 방향을 정립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 외 시낭송회를 하기에 좋은 장소인 소극장이 크게 비중이 늘지 않아 안타까움을 던져준다.
이 통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시낭송회의 개최지 분포를 보면 주로 서울, 대구, 전주, 속초, 마산, 부산, 대전, 광주, 제주, 강릉 등 대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점은 문화의 요충지 역할을 하는 대도시에서 역시 시낭송회가 많이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풀이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청중과의 호흡 문제와 시낭송회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일면 생각하면, 이들 대도시 외에도 시낭송회가 그야말로 방방곳곳 확산되었으며 하는 바램이 앞선다. 그리고 야외에서 이루어진 시낭송회가 없었던 것은 운동장과 같이 큰 장소에서 시낭송회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 시낭송회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
동인회 |
동호인회 |
문인기관 |
문예지주관 |
기타 |
횟수 |
31 |
12 |
4 |
1 |
2 |
<표3>의 통계는 지난 3개년간 시낭송회를 주관한 50개 시낭송회 주최측의 성격별 유형을 분류한 것이다. 여기에서 동인회와 동호인회를 구분할 것은 시낭송을 하는데 있어, 전문 시인들만의 시낭송회인가 아니면 시 지망생이나 학생 등이 포함된 시낭송회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위 통계를 볼 때 시낭송회를 주관하는 주최측은 압도적인 비율로 동인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의외로 문예지나 문인 기관에서는 시낭송회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 문단에서 차지하는 문예지의 비중을 생각할 때 문예지들이 보다 시낭송회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이 요청된다 하겠다.
<표4>의 통계는 30개 시낭송회의 낭송회 개최 주기별 분류이다. 통계 중 격월간은 연간 2회 이상, 6회 미만 시낭송회를 한 시낭송회를 포함한 것이다.
위 통계에서 볼 수 있듯 이들 시낭송회들은 반수가 조금 못 미치는 비율로 월간 1회씩 시낭송회를 개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타의 항목은 불규칙이거나, 한차례만 시낭송회를 개최한 시낭송회이다.
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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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월간 (13) |
공간 |
공간사랑,바탕골소극장(60회이후) |
시인회의 낭송회 |
카페 설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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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소리 |
신촌 베이스캠프 음악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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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통한 사랑의 대화 |
영등포 진선미 예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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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하우스 |
여의도 오페라 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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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
주원다방.카톨릭학생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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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리판 |
시립용산도서관 |
|
밤과 꿈과 시 |
한국시집도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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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방 |
서울,후박 |
|
바다시 |
강릉, 강릉다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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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아 시낭송회 |
글로리아고전음악실 |
|
문학과 독자의 만남 |
마산. 백자화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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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주관) |
하트케리 숍 |
|
격월간 (1년미만 2회이상6) |
미래시 |
타임커피숍 |
청소년 시신랑 모임 |
서울 YMCA |
|
질문과 선택 |
대구 동아문화센터 |
|
아미문화공간 시낭송회 |
대구.아미문화공간 |
|
소리 그리고... |
마산.소극장우주공간 |
|
포에지 시낭송회 |
대구.코리스다방 |
|
연간 (6) |
형상 |
대구.형상동인회 |
오늘의 시 |
대구 하이마트 음악감상실 |
|
민족시 낭송회(부산시조문학회) |
부산 새부산예식장 |
|
백 전 |
대구 카톨릭문화센터 |
|
시운동 |
광화문라인(외) |
|
한국 여성시 동인회 |
부산 카톨릭 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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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5) |
나태주 시낭송의 밤 |
광주. 알레그레또 찻집 |
마산의 시낭송의 밤 |
진주.분도소극장 |
|
예전사랑 시낭송회 |
서면.예전다방 |
|
시험동인 시낭송회 |
대전 뮤즈 |
|
해인시 동인 시낭송회 |
강릉.다방 갤러리 |
이 통계를 볼 때 많은 시낭송회가 꾸준히 정례적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낭송회가 정례적으로 열리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준비가 철저하지 못한 가운데 어떤 타성에 젖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이상의 지난 3년 간 시낭송회 추이를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시낭송회 규모와 횟수의 제약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례적으로 시낭송회를 실시하는 곳이 많은데 고정 청중은 많지가 않거나 대부분이 여성이며, 또 아주 작은 액수의 입장료(다방의 경우에는 찻값)를 받는 것이 그것이다. (시낭송회가 제 궤도에 올라 있다면 입장료를 이 정도만 받지는 않을 테니까.)
이 통계들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시낭송회의 전체적인 규모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면밀하고 준비가 철저한 시낭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용 소극장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례적으로 시낭송회를 개최하고 있는 주요 단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무순)
주요 시낭송회의 현황
■ 공간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시낭송회로서는 가장 오랜 연륜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979년 4월부터 공간 소극장에서 열리고 있는 이 낭송회는 최근 바탕골 소극장으로 옮겨 지난 8월 27일 제74회 시낭송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 낭송회의 상임시인은 구상, 박희진, 성찬경, 조정권 등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이 낭송회는 시낭송을 기조로 하여 시와 백병동 등의 현대음악 작곡가들과의 만남, 또한 효과적 전달을 위한 소도구의 사용 등 다양한 낭송법을 보여주고 있다. 상임시인과 초대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독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시작의 문제들을 토론하는 등 다양한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 시를 통한 사랑의 대화
영등포 진선미예식장에서 매월 개최되고 있다. 조완호 등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이 낭송 모임은 주로 젊은 계층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매달 열리는데 김규화, 이옥희, 정의홍, 한병호, 임보, 임영희, 최은하, 신규호, 윤강로, 정운협, 조석구, 김경미, 김계덕, 윤석산, 윤재천 등이 참석하였다.
■ 오페라 하우스
서울 여의도 오페라하우스에서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이 모임은 작곡가 변훈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임의 특징은 시뿐 아니라 성악, 기악의 부분이 서로 어울리는 구성을 지니고 있어 대단히 독특한 변모를 보여준다. 그 표제를「노래와 시와 그림과의 모임」이라 표방하고 있어 서로 분야가 다른 유관예술의 상호협력과 조응을 이 모임은 이루고 있다.
■ 보리수
시의 생활화 혹은 대중화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있는 이 낭송회는 '82년 말부터 서울 보리수 다방에서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다. 주로 시단의 중진 시인들이 축을 이루는 이 낭송회에는 서정주, 황금찬, 정공채, 김후란, 강계순, 신세훈, 전재수, 김남조, 김지향, 유경환, 박희진, 김춘수, 함혜련, 정진규, 이근배, 김윤희, 성권영, 박진환, 박현령, 이수화 등이 참여하였다. 시인과 독자들이 보다 가까운 자리에서 상호의 공감대를 넓혀 나가려는 작업이다.
■ 글로리아
시인 채수영, 박영우, 윤석산, 조완호, 황도형 등이 상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초대시인과 함께 시낭송을 실시하고 있다. 글로리아 고전 음악실에서 시낭송회를 개최하고 있다.
■ ꟁ우방
시인 윤강로가 상임시인으로 이끌어 나가는 이 모임은 주로 젊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시와 시작동기 등을 같이 말하고 질문과 토론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태준, 성찬경, 김요섭, 한분순, 윤강로, 이생진, 정건섭 등이 이 모임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젊은 독자층들과 시인들이 어울려 세대를 넘어선 예술의 세계를 펴나가는 것이 이 모임의 의의이다.
■ 토요일 오후와 시
「시인회의」동인들에 의하여 서울 카페 설파에서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는 모임이다. 명동의 문학시대를 향유했던 중진시인들이 이끌고 있는 이 낭송회는 독자들과의 대화나 낭송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 시와 육성
전재수, 신규호, 유승우, 이수화 등의 상임시인에 의하여 원효로 영일다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시낭송뿐 아니라 초청인사의 문학강연, 초대시인의 낭송, 비디오 방영 등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 형상
대구 형상동인회에서 주최하는 이 모임은 시낭송, 문학강연 등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구석본, 이진흥, 박재열, 이구락, 이재훈 등 대구를 중심으로 동인활동을 펴고 있는 이들 동인들이 구심체가 되어 이끌어 가고 있다.
■ 미래시
『월간문학』출신 시인의 동인인 미래시에서 주최하는 시낭송회이다. 주로 서울 타임 커피숍에서 열리고 있는데, 동인들의 시낭송, 외부 초대 시인의 낭송 등으로 진행되고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지방으로 원정 시낭송회를 가진 바 있으며 가장 많은 수의 시인들이 참여하는 시낭송회로 알려져 있다.
■ 승려시인 시낭독의 밤
박진관, 석성일, 이청화 등 승려시인들에 의하여 조계사 불교회관 등에서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는 시낭송회이다. 이들은 성춘복, 김지향, 김초혜와 같은 시인들을 초빙하여 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 시창작을 하는 승려들이 모임을 이끌어 간다는 특징을 지닌다.
■ 민족시 낭송의 밤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에서 주최하고 있는 모임이다. 이 모임의 특색은 시조시인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것인데, 김어수, 이복숙, 이기라, 김동준, 신순애, 이승은, 홍준오, 황순구, 공석하, 황몽산, 지성찬, 민경헌 제씨가 참가하고 있다.
■ 물소리
이성신 시인의 주도로 열리고 있는 이 낭송회는 강릉, 양양, 속초 등에서 개최되었다. 시낭송과 시강의 그리고 독자와 시인과의 대화 등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이성선, 최명길, 이언빈, 박기동, 조영수, 구영주, 안경원, 박수찬, 박동규, 황금찬, 강우식, 이근배, 전상국 제씨가 초대되었다.
■ 바다시
강릉에서 젊은 시인 이언빈, 박기동, 신승근 등이 주도하고 있다. 박두진 등의 시인이 초대시인으로 낭송하였으며, 시낭송, 음악감상 등의 순서도 가지고 있다. 독자들은 주로 강릉 지역의 대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 청소년 시사랑 모임
YMCA 종로회관 친교실에서 열리는 이 모임은 시노래 부르기, 초대시인과의 대화, 시낭송 감상 또는 시공동 낭송 청소년 자작시 낭송 등으로 다채롭게 벌어진다. '85년 12월 23일부터 28일까지 4회, '86년 1월 20일부터 29일까지 4회 등 모두 8차례이 모임을 가졌다. 홍윤숙, 황금찬, 성춘복, 유경환, 이민근, 김광규, 마광수 제씨가 초대되었다.
이상의 시낭송회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대부분 초대시인의 낭독과 상임시인의 낭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많은 시낭송회들이 개최되고 있음에 지면 관계상 다 소개하지 못함을 밝힌다.
좋은 시낭송이 가능할려면
시낭송에 있어서 낭송자와 청중의 관계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것과는 다르고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브라운관을 통해 그저 보고 듣기만 하는 관객과는 다르다. 따라서 좋은 의상이나 무대 매너로 화려한 조명 밑에서 노래하듯, 또 청중들의 측면에서도 그저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낭송되는 시를 바라보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시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낭송회에 참가해보면 대부분의 독자가 흡사 대본(?)으로 내준 시원고를 뒤적여 보고 있고 또 그 시의 기초적인 이해도 없이 시낭송자와 마주하고 앉은 청중들이 많이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데 있어서는 깊은 내적인 요인이 게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이윽고 시 낭독이 시작되었다.
그는(긴스버그) 언제나처럼 월리엄 블레이크의 시로 서두를 장식했다. 그가 낭독한 시는 블레이크의 「타이거」였다. 긴스버그는 손때가 묻은 낡은 아코디언을 꺼내 연주하며 블레이크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했다. 그의 음성은 정확했으며 음성 역시 크고 명료했다. 한마디로 노래의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다음으로 긴스버그는 자신의 시집『카디쉬』에서 몇 페이지를 골라 낭독했다. 1956년 정신병원에서 죽어간 자신의 모친 나오미를 위해 쓴 추모시들을 읽으면서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분위기는 감동적이 되었다. 그가 「그대 나오미여, 죽음 속에서 복이 있으라!/축복받은 죽음이여!/축복받은 죽음이여!」라고 절규할 때엔 장내의 분위기조차도 숙연해지는 것이었다.
…시 낭독을 마친 후 긴스버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언덕들이 응답하네」라는 민요를 다같이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시인과 천여 명의 청중들이 모두 함께 한마음이 되어 부르는 것으로 앨런 긴스버그의 시낭독회는 끝이 났다. 어느 비평가가 표현했듯이, 긴스버그는 진정 하나의 시작가라기 보다는 차라리 영적 교류의 한 기구 같은 느낌을 주었다.
-김성곤 저『미로 속의 언어』 P.340 (상점 필자)
이것은 미국의 시인 앨런 긴스버그의 시낭송회의 모습이다. 시낭송회의 전경을 예를 들기 위해 장황하게 인용한 것이다.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을 인용해본 이 부분만으로도 시낭송회에서 시인이(또는, 시낭송자가) 청중들과 호흡을 일치시켜 가는 과정을 명료하게 추출해 볼 수 있다. 상점 부분에서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시낭송자는 시를 낭송할 때 그가 비록 그 시의 창작인이라고 해도 시를 매개로 하여 새로운 효능(시에 나타나 있는 정서와 공감대의 형성)을 펼쳐 보여야 할 하나의 기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에 대한 이해의 투철성과 청중과의 소통 방식의 모색이다. 단적으로 말해 시낭송자는 청중과의 교감 없이는 시를 낭송한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긴스버그의 시낭송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위대한 시적 비전을 제시하는 탁월한 시인이든 아니면 그저 히피들의 우상 정도이든 청중들을 향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시낭송에 있어서도 무엇보다도 선결 과제는 시가 얼마나 낭송에 적합하게 창작, 혹은 선택되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낭송에 적합한 시를 유형화시킨 다음 경우를 보자.
첫째, 행과 연의 끝이 명사로 끝나는 경우가 적은 시
둘째, 시적 내용의 전개가 평면적 일관성이 있는 시
셋째, 내용을 듣고 그 정황이나 상황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시
넷째, 행과 연의 끝이 모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시
다섯째, 행과 연의 끝이 「니다」,「하라」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시
여섯째, 시의 내용이 철학적 사변보다 구체적 사실을 노래한 시
일곱째, 시의 전개가 점층법으로 구성된 시
여덟째, 시의 내용이 사랑, 기쁨, 슬픔, 환희, 애수, 절망 등을 노래한 시
아홉째, 그 밖
----------- 송현, 「시낭송에 문제 있다」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시로서 송현은 스스로 11편의 시를 한국 현대 낭송 최적 시로 꼽고 있다. - ⸁바다(서정주) ⸂해바라기 비명(함형수) ⸃즐거운 편지(황동규) ⸄별헤는 밤(윤동주) ⸅낙엽(김남조) ⸆금강(신동엽) ⸇가을 산문초(윤재걸) ⸈장미의 의미(전봉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양성우) 목마와 숙녀(박인환) ⑪호명(고은) - 주로 서정적이고 행간 사이에 감정의 움직임과 연상이 크게 개입하는 시, 혹은 누구를 외쳐 부르는 듯 격앙된 시, 혹은 우리가 어느 가수의 낭송으로 잘 알고 있는 <목마와 숙녀> 등이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을 철저히 구비한 시도 낭송자 자신이 잘 소화해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겠다. 또 청중들이 한번 낭송을 통해 들어서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난해한 시는 무용하다. 그래서 여덟째 항목으로 보편적인 정감에 호소하는 시를 삽입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필자는 이러한 조건을 구비한 시를 프랑스어로 씌어진 작품 가운데 한 편 찾아보았다. 이 시는 폴 엘뤼아르의 <자유 Liberte>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白紙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둥우리 위에 金雀花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驚異 위에
日帝의 흰 빵 위에
약혼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하늘빛 옷자락 위에
태양의 녹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해
그리고 그늘진 風車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멋없는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鍾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위 시는 단조로운 듯 하면서도 그 주제의 반복과 강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전체 14연의 좀 긴 듯한 시이다. 구체적인 비유와 신선한 분위기의 환기를 통해 평면적인 진술이 입체적인 느낌으로 가 닿도록 환기작용을 하고 있다.
시낭송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그렇다면 좋은 시낭송이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이제까지의 많은 시낭송이 다방에서 소규모의 제한된 환경 속에서 소기의 타목적만을 충족시키는 가운데 청중들과의 진정한 교감 없이 이루어졌던 것은 반성되어져야 한다. 최근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낭송회의 다수가 이런 실정임을 직시할 때 우리는 올바른 시낭송의 길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위에서도 예를 보였지만 무엇보다도 좋은 시낭송이 이루어지려면 작품이 시낭송에 적합하도록 씌어져야 한다. 이 전제 조건 없이는 시낭송은 백번 한다 해도 청중들과의 호흡의 일치를 기대할 수 없다. 기왕의 시낭송회가 시인이 독자를 찾아나서는 능동적인 행위라면 무엇보다도 시 자체의 변혁이 들려주는 시로 전환되어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처음에는 노래였으니까. 시가 노래라는 것은 오늘날의 예술이 근원적으로 보면 원시종합예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진실이다. 노래되지 않는 시,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 시는 생명이 짧다. 60년대 이후 한국시가 난해의 늪에서부터 헤어나기 위해 애쓰는 것도 시의 낭송, 혹은 애송에 대한 깊은 신념 없이는 치유가 불가능하다. 정보전달의 효능을 갖는 시들이 많이 씌어지고 있지만 시는 정보전달의 기능을 발휘하는데 뛰어나지 못하다. 그것도 철학이나 과학에 비견할 때 더욱 그러하다. 시는 교감이 되어야 하지, 소통되어 독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시는 무용하다. 물론 이 경우 소통이란 것의 개념은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로 파생할 수 있겠지만 이 글의 지향과는 벗어나므로 상술하지는 않겠다. 다만 시가 교감이 되지 않고 그야말로 말 그대로 활자 속에 박혀 읽혀지지 않을 때 시의 생명과 생동감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는 점만 강조해 둔다. 따라서 시인이 시를 창작할 때나 낭송할 때에는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시낭송에 적합한 시를 창작해서 낭송에 임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또 지엽적인 문제 같지만 신작의 경우, 시낭송회에 따라서는 청중들에게 인쇄물을 내주는 경우가 있는데 독자들이 모두 인쇄물도 쳐다보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가령, 공간 시낭송회에서는 시인이 육성으로 시를 낭독하는 외에 따로 인쇄물을 내주지 않는데, 회원제를 도입해서 그곳에서 나올 청중들에게 사전에 시를 우송해서 청중들이 어느 정도 시를 이해하고 나오는 것도 한 방법이 될 듯하다.
이제까지는 낭송에 적합한 시 자체의 요건만을 피력하였다. 그렇다면 시, 낭송에 좋은 시만 들고 있으면 낭송자측에서 준비해야 할 요건은 완료된 것일까. 대담은 물론「아니오」이다. 많은 시낭송회가 시 자체보다는 지금 말할 배경음이나 기계장치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계장치라 함은 고성능마이크나 좋은 음질을 가진 앰프 및 스피커의 동원 등을 지칭한다.
시낭송에서 쓰이고 있는 음악은 대부분 경음악이 보통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경음악이 영화음악이거나 잘 알려진 가사를 가지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음악과 경음악의 가사는 모두 다 시낭송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방해한다. 가령「러브스토리」의 주 제가만 들어도 남녀가 눈덮힌 언덕에서 굴러 내리는 장면을 연상하는 청중이 있을 수 있고, 가사가 있는 낯익은 곡조가 들려오면 시낭송자의 음성을 따라 전해지는 시를 가기보다는 그 노래의 가사를 따라가서 시낭송회가 산만해질 우려가 있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시낭송자의 발성이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대목은 뒤에 전문적인 시낭송자가 나와야 한다는 점과도 연결되는 사항이지만 무엇보다 첫째 시낭송자의 음성이 잘 들려야 교감이 가능한 것이므로 육성으로 충분치 않은 큰 장소라면 기계장치의 깊은 배려가 있어야겠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좋은 시낭송을 위해 실제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청중들의 수준 문제이다. 만약 여성들이 운집한 곳에서 시낭송을 할 때라면 여성들의 생활 방식이나 환경, 혹은 정감에 어필할 수 있는 주제를 골라야 할 것이며, 시낭송회가 학원에서 이루어진다면 비어나 속어가 계속해서 나열되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청중들 수준에 이해하기 어려운 현학적인 어휘가 계속 튀어나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청중들의 수준에 대해서도 반드시 연구해 두어야 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공통분모를 가진 청중들에게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선택해야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들고 싶은 것은 시낭송은 전문 시낭송자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문 시낭송자가 많이 육성, 배출되어야겠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시낭송 전문가는 시낭송 선진국이라 할 프랑스에서도 그 숫자를 헤아릴 정도로 많지 않다고 하는데 우선 시를 잘 안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서라도 전문적인 시낭송자가 많이 나와서 시는 시인이 짓고 낭송은 낭송 전문가라는 토양이 마련되어야 하겠다.
그 외에도 시낭송의 그 미묘한 울림을 청중들과 전정 함께 하기 위해서는 여러 부면의 연구가 모색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시론에 지나지 않는다. 시낭송이 공간적, 시간적 제약을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뛰어난 낭송을 통해 들은 시는 두고두고 우리들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다. 시는 읽혀지고 들려져야 한다. 시낭송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볼프 비어만의 시 한편을 읽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도록 하자. 이 시를 인용하는 것은 이 시 속의 노래라는 단어를 시라고 바꿔놓는다고 해도 전체 시의 인상이 크게 빗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진실의 쓴 액즙을 마시지 않고 결코 목말라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목은 <가수의 취임연설>이다.
한때는 기관총 앞에서도 늠름한 태도를 견지했던 사람들이
내 기타 앞에서 벌벌 떠네
내가 입을 열면 깜짝깜짝 驚氣를 하고
내 노래를 듣고자 청중들이 가득 모이면
정치국 巨人 들의 콧잔등에는
송글송글 공포의 땀방울이 맺히네.
정말이지 나는 무슨 괴물이나 페스튼 게지.
정말이지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에 한 마리 공룡이 나타난 것이겠지.
그러나 그것은 雷管이 달린 시한폭탄인 거야.
책임을 가장 무서워하는 책임자들의 살찐 목에 걸린
딱딱한 가시야!
자, 그대들은
그대들의 이 하부구조를 깨끗이 씻어주지는 않고
그래 그냥 잘라내어 버릴 텐가?
그대들은 내 진실의 쓴 액즙을 마시느니
차라리 목말라 죽을 텐가?
참말로 그대들이여! (安三煥 譯)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