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연 연극 실태분석
-1966년부터 1982년까지-
이강렬 / 극작가·부산대를 거쳐 일본대대학원을 나왔으며「창고극장」에서 연극활동의
대전대 등에도 출강. 역서로<메소드 연기> <가면의 민속학> 등이 있다.
■서언
일반적으로 연극은 그 고전적인 발생동기가 현재의 삶보다 나은 상태를 갈구하는 인간의 모방심리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있어 끊임없는 또 다른 삶의 유형을 향한 모방심리야말로 우리의 삶과 생존을 윤기 있게 하는 문화의 저변을 이루어 왔다. 이 모방이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확대시키고, 이 확대를 통해 삶의 진실을 높이고자 하는 열망은 결국 스스로만의 삶의 확대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계속적인 교류를 통한 새로움을 받아들이고 서로간의 영향력을 주고 받음으로써 구성원들간의 진정한 이해는 물론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램을 추구하여 왔던 것이다.
이처럼 창조적인 모방을 통해 시대적인 갈등의 표출과 삶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질적인 향상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온 연극공연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초기의 연극운동단계에서 오늘날의 전문화·직업화의 추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변동을 겪어 왔다.
이 글은 20년대의 일본 유학생들을 통한 초기 서구의 리얼리즘극 소개와 함께 시작된 이른바 신극운동을 근간으로 하여 좀더 발전된 양상을 띠고 있는 6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공연된 우리나라 공연작품들의 현황을 분석해 봄으로써 우리나라 연극계의 공연실태 및 연극환경을 살펴 볼 수 있는 기초자료를 마련하는데 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의 연극계를 알아보는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신극의 형성시기인 1920년대부터 50년대까지의 연극 상황을 개괄적이나마 전제해 놓지 않으면 안된다.
1920년 당시 동경 유학생이었던 김우진(金祐進)을 비롯한 몇몇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리얼리즘극 도입을 제창하면서 <극예술협회 (劇藝術協會)>라는 일종의 서클을 발족시켰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순회극단을 조직하여 신파극 일변도의 당시 기성극계에 새로운 연극운동을 주창하면서 태동되었다.
이들이 순회극단을 통해 서투르게나마 시도했던 사실주의적인 희곡과 연출기법 무대장치 등은 침체해 있던 연극계에 신선한 자극을 불러 일으키는데 충분했다. 그러나 이들의 운동도 연극적 의식과 이념을 실현해 볼 수 있는 극장공간 하나 제대로 마련해 보지 못한 채 좌초하고 말았다.
물론 당시의 우리나라 연극계란 사실주의적인 서구리얼리즘 연극을 이해하고 수용할 만한 진보적인 인식을 지닌 연극인이 없었음은 물론, 대다수의 일반인에 있어서도 연극이란 개념이 생소하기만 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대에 들어와서 역시 동경 유학생들에 의해 <극예술연구회 (劇藝術硏究會)>가 만들어짐으로써 서구의 리얼리즘 극을 번역, 소개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들의 연극정신은 17세기말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소극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념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그들은 소극장 하나 마련해 보지 못한 채 공회당 등을 전전하다 그나마 식민지하에 일제의 탄압에 의해 8년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물론 20, 37년대의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있던 시기에 리얼리즘에 입각한 소극장 정신의 전개란 사실상 척박한 땅에 뿌리는 씨앗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미미하나마 소극장 정신을 도입하고자 했던 당시 연극인들의 노력과 몸부림은 그 맥이 꺼질 듯 이어져 해방을 맞음으로 다시 극협(劇協)과 여인소극장(女人小劇場)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후 극협은 1950년 국립극장이라는 대극장이 설립되면서 신파극을 대체한 사실주의 연극의 대중화를 감당함으로써 새로운 우리나라 연극의 한 주류를 마련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소극장 정신은 여인소극장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여인소극장도 극장공간을 가져 보지도 못한 채 6.25전쟁으로 인해 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이어졌던 소극장 없는 소극장 운동도 그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끈질긴 연극인들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신파극의 퇴조와 함께 리얼리즘에 입각한 서구극의 자연스러운 수용과 정통적 현대극의 점진적인 토착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의 리얼리즘극 토착화 속에서 설립된 원각사는 공연장 불모지대의 연극계에 활발한 공연무대를 가능하게 한 한 단초가 되었다.
화려한 개관공연을 벌렸던 원각사는 총 3백 6석의 극장으로 무료대관을 원칙으로 하였다.
애초에 전통적인 민족예술의 보존과 전승에 그 취지를 두었으나 그때까지도 전문적인 극장을 가지지 못했던 연극인들은 원각사의 출현으로 새로운 연극적 실험과 현대극 소개에 가슴을 설레었고 이때부터 새로운 극단들의 출현과 함께 연극계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래서 1958년 12월 개관하여 1960년 12월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원각사 무대를 통해 한국의 현대극과 함께「칵테일 파티」(T. S. 엘리옷 작), 「유리동물원」(테네시 윌리암스 작) , 「뜨거운 양철 지붕위의 고양이 」(테네시 월리암스 작), 「지평선 너머」(유진 오닐 작) 등 서구의 유명 현대극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원각사 무대를 통해 등장했던 극단들은 그 동안은 유명무실하였던 신무대 실험극회, 제작극회, 업 선 스테이지, 횃불극회들이 활기를 띠었고, 4월 극회, 중앙예술극회, 원방각 등의 새로운 극단의 출현도 원각사를 통해서였다.
이들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던 유명 서구극들은 그후 우리나라 대중들의 연극적 취향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 극단들의 출현으로 우리나라 연극활동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제작극회(制作劇會)의 활동은 고무적인 것이었다.
1956년 창단된 제작극회는「참된 현대극 양식」을 표방하면서 대성빌딩 강당에서 홀워씨 홀작, 차범석 연출의「사형인(死刑人)」으로 창단 공연을 가진 이래 간이장소를 전전하며 공연활동을 계속해 오다 원각사를 통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 3월「돌개바람」(金玆林)과「사랑을 찾아서」(박현숙 작)를 공연했으며 본격적인 전위극인 「성난 얼굴로 돌아다 보라」 (존 오스본 작)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국립극장의 신협에 대항하여 반기성주의 연극을 의식적으로 벌였다
극연 (劇硏)의 활동을 기점으로 리얼리즘극이 우리나라 연극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리얼리즘극이 기성연극화 되자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에 걸쳐서는 제작극회나 실험극장에 의해 반리얼리즘극 소극장운동도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만 2년동안 우리나라 연극계의 동맥이 되었던 원각사의 화재로 인해 또다시 극장공간 불모지 시대로 되돌아가게 된다.
■ 60년대 이후의 한국연극 환경
우리나라에 있어서 극장을 가진 상태에서 연극이 본격적으로 활동 가능하게 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극단 실험극장, 민중극장, 산하, 자유극장 등의 창단에 의해 극단쪽이 활기를 되찾음과 함께 공연활동이 활발해지긴 하였으나 각 극단들은 자체의 전용극장은 물론, 연습장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절박한 상태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동인제 형식의 대표적인 단체인 실험극장(實驗劇場)이 창립공연을 부조리 작가 이오네스코의「수업(授業)」을 허규 연출로 동국대 소극장 무대에 올리는 등, 이 시기에 새로운 연극을 위한 실험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1962년 4월 개관을 본 드라마센터는 극단의 자체 극장 설립의 효시가 되었는데 셰익스피어 작「햄릿」을 유치진 연출로 공연한 이래 실험연극의 소개와 연극인구 저변확대에 큰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다.
그 밖에도 동인제 극단들인 산하, 민중극장, 자유극장, 광장, 여인극장, 가교 등이 일년에 2, 3회씩의 공연을 가짐으로 신협 독주의 미국 연극 일변도에서 구라파쪽의 연극도 다수 상연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주요무대는 대체로 명동의 국립극장이나 드라마센터였는데 공연장의 부족과 극단의 영세성으로 임시방편으로 임대 활용하는 공공장소나 영업장소가 공연장으로 활용되기 일쑤였다.
이처럼 극단들은 자체극장은 물론 전문적인 배우수업을 거치지도 않은 연극배우들에 의해 충분한 연습을 가지지도 못한 채 서구의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게 된 것이다.
전쟁을 기점으로 신파극이 그 자취를 감추고 그나마 활기를 띤 연극정신을 기반으로 극단들에서 공연하는 번역극이란 연극적 기반이 채 다져지기도 전에 수용되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연극이라는 단어를 생경하게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연극적인 전문적 기량을 가진 사람도 극소하였다.
대학생 위주로 구성비율을 이루었던 고정관객이 채 만 명이 되지 못했던 당시에 서구의 부조리 연극은 일반관객을 위한 연극이라기보다 단지 척박한 문화현실에서 연극공언을 하고자 한 연극인들이 자족감을 얻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연극운동이란 서구의 현대극이나 부조리 연극을 소개하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소극장 활동과 함께 번역극 공연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같은 환경 속에서 자유극장에 의해 충무로 2가에 문을 연 순수한 공연장 형식이기보다는 차를 파는 극장식 카페였던 (카페 떼아뜨르)는 원각사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소극장이었다.
1969년 4월 이오네스코의「대머리 여가수」(김정옥 연출)로 개관공연을 가짐을 시작으로, 자유극장의 취향에 입각하여 이오네스코, 핀터, 퀸테로스, 머레이시스칼 등 전위적인 번역극과 윤대성, 오태석 등의 창작단막극, 대학극, 대중보급을 위한 인형극, 판소리, 탈춤 등 민속극을 선보임으로써 신진 작가와 연출가, 연기자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한때 일제시대의 잔재인 공연법에 의한 소방법, 위생법 등의 처벌규정으로 폐쇄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개관 7년만인 1975년 과중한 세금과 공연법 등의 압력, 그리고 누적되어 온 경영난으로 스스로 문을 닫을 때까지 수백 회의 공연을 하면서 80여 석의 다방극장에 불과했던 카페 떼아뜨르는 연극인구의 저변확대에 많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 30석 규모의 에저또 소극장, 실험소극장, 카페 빠리, 창고극장, 중앙소극장, 공간사랑 등이 문을 열고 여러 실험연극 조류를 수용하였지만 극심한 재정난으로 얼마를 지탱하지 못해 문을 닫기가 다반사였다.
특히 75년의 명동예술극장과 카페 떼아뜨르, 에저또의 폐쇄는 연극계에 큰 상처를 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소극장이란 것은 극단의 영세성에서 착안되어진 작은 공간이란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 서구의 소극장정신과는 엄밀하게 말해 별개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70년대를 기점으로 탄생되어진 극단자체의 소극장은 공연장의 절대부족에서 나온 비전문성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공연물 자체도 서구에서 펼쳐졌던 반기성극을 표방하기보다는 역설적으로 말해 간이무대에 가까운 공간을 활용하여 서구의 상업적 번역극에 치중된 공연물들이 자연히 공연될 수밖에 없었다.
즉 흥행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실험정신을 내세운 공연을 기획하기에는 극단 재정이 영세할 뿐만 아니라 관객도 극소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70년대 중반국립극장을 비롯하여 세종문화회관 대·소극장·별관 등에서 행해졌던 일련의 대형작품들과 함께 실험극장, 연극인 회관, 창고극장 등이 본격적인 활동을 벌임으로써 연극공연은 급격하게 양적인 팽창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신진작가들이 대량으로 등용되기 시작했다.
그 중요한 한 이유로는 정부의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이라는 지원정책으로 극단들이 지원금을 받게 되었고, 일부 극작가는 창작지원금을 받아 작품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사회적 변동상황으로는 60년대의 경제부촌정책으로 국민소득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조성된 사회환경과 문화에 대한 민중들의 욕구를 들 수가 있다. 한편으로는 저급한 대중적 오락물들이 사람들을 자극시켰고 이와 함께 고급문화의 욕구확산도 일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1975년 가을, 실험극장의「에쿠우스」공연을 그 예로 들 수가 있는데 우리 현실에서는 보기 드물게 3개월간의 장기공연에 3만여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였다는 점이다.
이 공연은 그 동안의 고정 관객 층이었던 대학생층 뿐만 아니라 일반 지식층을 대거 흡수함으로써 공연문화에 밝은 조짐을 던져주었다.
급속한 양적 팽창을 본 70년대 연극은 3.1로 창고극장을 비롯해서 세실극장, 공간사랑, 엘칸토예술극장, 76소극장 등 소극장의 양적 확대와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문예회관 등 일련의 대형극장 설립에 따른 공연장 증가를 보게 되었다.
모처럼의 대중들의 고급문화를 향수하고자 하는 욕구를 양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극단들이 서구의 상업적 번역극으로 대중들의 취향을 맞추기보다는 실험성을 겸비한 다양한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노력들은 몇몇 극단에 그친 채 다수 극단들은 흥행을 우선한 유명 작가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공연 양상은 80년대까지 계속되어지고 있다.
여기서 잠시 <한국공연윤리위원회>에 공연허가를 받기 위해 접수된 공연물들을 집계한 기초 자료를 토대로 하여 1966년부터 1982년까지의 17년간 서울 시내에서 상연되어진 연극 공연을 분석해 봄으로써 70년대를 중심으로 한 보다 구체적인 우리나라 연극 공연의 실태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표 1>
1966년부터 1982년까지 서울시내에서 공연된 연극작품 수
년 도 |
총 편 수 |
창 작 극 |
번 역 극 |
원작불명 |
1966 |
36 |
16 |
18 |
2 |
1967 |
45 |
27 |
18 |
· |
1968 |
57 |
25 |
32 |
· |
1969 |
89 |
40 |
42 |
7 |
1970 |
46 |
20 |
24 |
2 |
1971 |
77 |
37 |
40 |
· |
1972 |
68 |
39 |
29 |
· |
1973 |
68 |
38 |
29 |
1 |
1974 |
135 |
76 |
59 |
· |
1975 |
229 |
125 |
104 |
· |
1976 |
188 |
74 |
113 |
1 |
1977 |
155 |
41 |
113 |
1 |
1978 |
179 |
64 |
111 |
4 |
1979 |
247 |
92 |
152 |
3 |
1980 |
238 |
94 |
138 |
6 |
1981 |
199 |
92 |
101 |
6 |
1982 |
183 |
65 |
90 |
28 |
(표1)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17년간 서울 시내에서 상연되어진 연극의 작품 총 수는 2,239편이며 그 중에서 창작극이 965편이고 번역극이 1,213편 그리고 원작 불명인 작품도 61편이나 된다.
통계로 잡은 이 자료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에 공연 신고 접수된 연극 대본을 중심으로 자료 처리한 것이기 때문에 보관상의 문제로 누락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신고 미비로 인해 기록되지 않은 공연작품도 상당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처리된 자료 중에서도 상당부분 제외시킨 것이 있는데 그것은 특히 60년대의 공연물 신청대상 중에서 쇼, 악극, 인형극, 농악, 국악 등도 일괄하여 처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통계자료를 통해 보면 60년대 후반은 전반적으로 창작극과 번역극 모두 공연실적이 저조한 편이다.
그러나 7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창작극이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다가 다시 7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번역극이 더 많이 상연되고 있다.
<표 2> 최다공연 원작자 및 작품편수
국내작가 |
국외작가 |
||||
원작자 |
작품편수 |
공연회수 |
원작자 |
작품편수 |
공연회수 |
이근삼 이재현 오태석 주평 차범석 최인훈 이강백 이현화 윤조병 |
19 18 12 16 14 6 9 6 5 |
32 29 22 21 17 17 16 10 9 |
세익스피어 T. 윌리암스 몰리에르 T. 와일더 아라발 이오네스코 F.뒤렌마트 H. 핀터 S. 베켓트 N. 사이몬 장.폴.사르트르 M. 쉬스갈 유진오닐 G. 푸치니 A. 크리스티 |
18 12 16 7 12 9 10 10 5 8 7 3 8 6 6 |
60 35 29 27 25 24 21 17 16 16 13 13 13 13 13 |
<표 3> 최다공연 작가의 작품 및 공연회수 외국작가
원작자 |
제목 |
공연회수 |
세익스피어 (총18편, 60회) |
오셀로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드 십이야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밤의 꿈 실수연발 리어왕 쥬리어스씨저 결혼중매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하멸태자 겨울이야기 리차드 3세 뜻대로 하세요 |
9 8 7 5 5 5 4 3 3 2 2 2 이하 각 1회 |
T. 윌리엄스 (총12편, 35회)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리동물원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 고해 지난 여름 갑자기 올페의 후예 이구아나의 밤 별난 로망스 목화마차 크리넥스를 한 아름 훌로라 작은 선박에의 해상경보 |
10 8 6 2 2 이하 각 1회 |
몰리에르 (총16편, 29회) |
수전노 귀족수업 기분으로 앓는 사나이 팔자좋은 의사선생 통일이여 오라 아가씨 길들이기 쇠뚝이 놀이 강제결혼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 위선자 따르뛰프 사랑과 위선의 흥정 망나니 행진곡 몰리에르 희곡집 유별난 부부 스까뺑의 간계 초우속의 파트너 |
7 4 2 2 3 이하 각1회 |
원작자 |
제목 |
공연회수 |
T.와일더 (총7편, 27회) |
우리읍내 결혼중매인 즐거운 여행 프랑스의 여왕들 흥겨운 90년간의 만찬 사계절의 황홀한 파티 The skin of our teeth |
11 9 3 이하 각1회 |
F.아라발 (총12편, 25회) |
환도와 리스 기도 장엄한 예식 싸움터 산책 월부로 산 목마 자동차 묘지 미궁 질투심 많은 무희 까바노자를 위한 예식 건축사와 아씨리 황제 두 사형집행인 도스또옙스끼란 이름의 거북이 |
6 4 2 2 2 2 2 이하 각1회 |
E.이오네스코 (총9편, 24회) |
대머리여가수 수업 왕은 죽어간다 헛소리 Victimes du Devior 의자들 베랑제1세 사라지다 코뿔소 아메데 |
8 4 3 2 2 2 1 1 1 |
F.뒤렌마트 (총10편, 21회) |
로무르스 대제 노부인의 방문 황혼녁에 생긴 일 미시시피씨의 결혼 더불맨 천사 바빌론에 오다 물리학자들 유성 분신 알수없는 노릇이군 |
4 4 4 2 2 이하 각 1회 |
H.핀터 (총10편, 17회) |
생일파티 T. 타임의 정사 덤 웨이터 관리인 가벼운 통증 귀향 밤풍경 방 그리운 옛시절 콜렉숀 |
4 3 3 이하 각 1회 |
원작자 |
제목 |
공연회수 |
S.베켓트 (총5편, 16회) |
고도를 기다리며 마지막 테이프 대사없는 연기 나는 아니야 Theater II |
11 2 1 1 1 |
N.사이몬 (총8편, 16회)
|
별을 수놓는 여자 최후의 뜨거운 연인들 헌팅소동 맨발로 공원을 2번가의 죄수 이상한 부부 캘리포니아 호텔 444호실 션샤인 보이스 |
6 4 이하 각 1회 |
J.P.싸르트르 (총7편, 13회) |
출구없는 방 무덤없는 죽음 연인 안나 존경스러운 창부 에리뉴에스 구토 벽 |
3 3 2 1 1 1 |
M.쉬스갈 (총3편, 13회) |
사랑 타이피스트 호랑이 |
6 4 3 |
E.오닐 (총8편, 13회) |
밤으로의 긴 여로 느릎나무밑의 욕망 위험지역 카디후를 향하여 동으로 고래 지평선 넘어 안나 크리스티 십자가 표시가 있는 곳 |
4 3 이하 각 1회 |
G.푸치니 (총6편, 13회) |
라보엠 라토스카 쟈니스스키 수녀 안제리카 춘희 나비부인 |
4 3 2 2 1 1 |
A.크리스티 (총6편, 13회) |
쥐덫 열개의 인디언인형 오리엔트 특급살인 검찰측증인 춤추는 욕망 쥐새끼들 |
6 3 이하 각 1회 |
최다공연 작가의 작품 및 공연회수 국내작가
원작자 |
제목 |
공연회수 |
이근삼 (총19편, 32회) |
동물원의 호박꽃 수렵사회 아벨만의 재판 거룩한 직업 일요일의 불청객 원고지 국물 있사옵니다 유랑극단 미련한 팔자대감 몽땅 털어놉시다 실과 바늘의 악장 30일간의 야유회 왜 그러세요 피서지에서 생긴 일 꿈먹고 물마시고 위대한 실종 이상무의 횡재 마네킹의 축제 요지경 |
4 3 5 5 2 2 2 2 이하 각1회 |
이재현 (총18편, 29회) |
제10층 어느 몽유병 환자 엘리베이터 춘향전 꽃샘 신시 비목 병사들의 합창 한중록 님의 침묵 대한 하늘아 무엇을 더 말하리 전범자 포로들 화가 이중섭 못잊어 하얀집 미국에 산다 |
4 4 4 2 2 이하 각1회 |
오태석 (총12편, 22회) |
로라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 약장수 유다의 닭 초분 태 웨딩드레스 1980년 5월1일 자 1122년 환절기 이식수술 정미소 춘풍의 처 |
5 4 2 2 2 이하 각1회 |
원작자 |
제목 |
공연회수 |
주평 (총16편, 21회) |
콩쥐팥쥐 백조의 날개 알라딘 요술등잔 냇물 풀잎각시 새마을 저금열차 개미와 베짱이 밤나무골의 영수 요정의 숲 마법노예들 바위성 왕자와 수정공주 유쾌한 요술장이 구두장이 한스 승무 외밭골 아이들 숲속의 요정 |
2 2 2 2 2 이하 각1회 |
차범석 (총14편, 17회) |
산불 순교자 이차돈 왕교수의 직업 일심교 오판 화조 묘지의 태양 약산의 진달래 위자료 새야 새야 파랑새야 셋이서 왈쯔를 소낙비 구름에 달 가듯이 학이여 사랑일레라 |
2 2 2 이하 각1회 |
최인훈 (총6편, 17회) |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 놀부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달아달아 밝은 달아 둥둥 낙랑둥 봄이오면 산에 들에 |
5 4 4 2 1 1 |
이강백 (총9편, 16회) |
결혼 셋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사흘간의 파수꾼 미술관에서의 혼돈과 정리 갯뿔 내마 쥬라기의 사람들 족보 |
4 3 3 이하 각1회 |
이현화 (총6편, 10회) |
누구세요 산씻김 카덴자 안개 오스트라키스모스 공, 구일칠(0,917) |
4 2 1 1 1 1 |
윤조병 (총5편, 9회) |
농토 딸꾹질 술집과 한강 산울림 음악시극 코하나 눈둘 |
3 2 2 1 1 |
이 중에서도 가장 많이 공연된 원작가 및 공연편수를 <표2>, <표3>을 참고해 보면 국내 작가로는 이근삼, 이재현, 오태석 등이 압도적이고 국외 작가로는 셰익스피어, 테네시 월리암스, 몰리에르 등이 주종을 이뤄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창작극 작가들의 대거 등장과 활발한 작품활동도 70년대 한국 연극의 가장 특이할 만한 현상이며 작가는 비록 소수이지만 작품의 양산 폭은 매우 넓다고 보아진다. 예를 들어 이근삼의 총 19편의 발표 희곡 중에서 <동물원의 호박꽃>은 무려 4번이나 공연을 거듭했으며 <수렵사회>, <아벨만의 재판>, <거룩한 직업>, <일요일의 불청객>은 각 3번씩이나 상연되어졌다. 그리고 이재현도 그의 대표작인 <제 l0층>), <어느 몽유병환자>, <엘리베이터>는 각 4번씩이나 상연되어졌으며 그 외 18편의 희곡이 발표 상연되어졌다. 오태석의 총 12편의 발표작 중에서도 모노드라마였던 <로라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는 무려 5번씩이나 상연되어졌으며, <약장수>가 4회, <유다의 닭>, <초분>, <태>가 각각 2회이지만 70년대가 낳은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되었다. 5번씩이나 상연되어졌던 또 한 사람의 작가 작품으로는 최인훈의 (옛날옛적 훠이 훠이)로 그는 총 6편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놀부전>이 4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가 4회 등 일련의 작품들이 대부분 관객의 절찬을 받은 문제작이었음을 실감케하여 준다.
또한 모두 14편의 희곡을 발표한 차범석은 <산불>이 2번, <순교자 이차돈>이 2번, <왕교수의 직업>이 2번이며 그 외에는 각기 1번씩 상연되어졌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참고로 아동극은 작가 주평 한사람에 의해 대부분 집필되어진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그는 <콩쥐팥쥐>, <백조의 날개> 등 총 16편의 아동극을 발표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아동극단의 활동도 폭은 넓지 않았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셰익스피어가 총 18편의 작품에 60회의 공연을 함으로써 한국 연극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작가였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오셀로>가 9회, <햄릿>이 8회, <로미오와 줄리엣>이 7회 그리고 <멕베드>, <십이야>,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각각 5번씩 공연을 가졌다. 테네시 월리암스는 총 12편의 작품 중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10회로 가장 많이 상연되어졌으며 <유리동물원>이 8회,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가 6회, 무대에 올려졌다. 그밖에 이오네스코가 9편의 작품을, 아라발은 모두 12편의 작품이 무대 위에 올려졌다.
그러나 가장 인기 있었던 국내외 작가 작품으로는 오태석의 <로라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와 최인훈의 <옛날옛적에 훠이 훠이>가 각각 5번씩 상연되어졌고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로는 모두 19편의 희곡을 발표한 이근삼이다.
외국의 작가로는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네>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각각 11번씩으로 가장 많이 상연되어졌으며 가장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로는 총 18편의 작품이 소개된 셰익스피어가 단연 선두이다.
그러나 이 통계에 의해 보여지는 다수의 번역물 공연과 앞서 열거한 유명 원작자 위주의 공연 현상은 앞으로 우리 극단들이 지양해 나가야 할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보여진다.
새로운 실험성보다는 유명작가 위주 대표작품 위주의 재공연 실태는 연극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보다 구체적으로 원작자별 작품공연 성향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데 이를 통해 유명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17년간 공연일수를 가장 많이 차지한 장기 공연작품이 된 셈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60여 회라는 가장 많은 공연을 가진 셰익스피어는 물론 고전의 명작이며 장중하고 진지한 희곡이란 점에서 연극이 단순한 오락물로써가 아닌 인간의 근원과 삶의 보다 진지한 편린을 접하고 싶어하는 성격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준 예라고 볼 수 있다.
세칭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손쉽게 재공연으로 무대에 올려지는 일이란 매우 손쉬운 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통성을 지닌 사실주의 연극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사적 고증이나 무대장치, 의상 등 부수적으로 따르는 많은 제작비를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극단으로서는 여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전 명작의 작품들이 많이 상연 되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시사하여 준 일례이다.
한편 위의 통계에서 보여지는 유명 번역극의 다수 재공연에 비해 동일한 작가의 작품이라도 창작극은 비교적 고르게 기획 공연되었음은 양적 팽창과 함께 70년대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인 전통적 문화 유산에 대한 재인식 고조와 한국인의 자의식을 재발견하려는 왕성한 욕구, 그리고 이를 현대적 연출로 표출하기 위한다양한 노력들로 보여진다.
이는 서양 연극이 지닌 한계를 절실히 인식하고 한국적 현대연극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였다. 민족적인 정서를 근간으로 하는 창작극들은 재 공연되는 번역극에 비해 새로운 연출기법이 우리 식으로 시도되어졌음은 물론, 서구 극을 무대화시키는 축적된 기량 위에서 조심스럽게 시도된 한국적인 실험성들은 무엇보다도 대중들에게 연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 리얼리즘의 퇴조와 이제까지의 대본위주의 연극에서 연출가 중심의 연극으로의 변신을 피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작업을 선도해 나왔던, 20편 이상의 공연물을 기획했던 극단들의 공연편수와 70년대의 실험성을 대표할 만한 재창조되다시피 한 번역극 2편과 일련의 창작극들을 <연극평론> '79년 겨울호를 인용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최인훈 작 ① 김정옥 연출 ② 자유극장「공연 결과 흥행면에서는 참담할 지경이었다‥‥‥‥국문학의 시적 감각을 연극을 통해 체험했다‥‥‥‥극시처럼 사로잡던 대사의 마력과 그 대사를 따라가며 스스로 눈을 감고 상상력으로 키워 나갔던 무대형상은 감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상일)
<초분 (草墳)>
오태석 작 ① 유덕형 연출
「<초분>은 신화를 극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작품의 소재나 전체적 짜임새, 특히 극형식은 완전히 제의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관객들에게 원시제의의 마당에서 느끼는 감동을 안겨 주었다 ‥‥‥연기자들의 몸짓과 발성, 여럿이 모여서 이루는 형태, 무대미술, 조명, 이 모든 것을 그저 감탄하는 자세로 보았다. 한 작품이 관객을 숨돌릴 새 없이 사로잡았다는 것은 그 작품이 그만큼 열심히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반)
<태 胎>
오태석 작 ① 안민수 연출
「인간 내면의 심연과 외부 세계의 일상성에 소통의 가교대를 놓았다‥‥‥‥ 작품을 통해 작가는 내부를 알리기 위해 외부를 빌려오는 방법, 숨기면서 동시에 알리는 방법, 의미를 조절하고 확대하는 방법, 특정한 경험으로 다른 영역의 경험을 언급하는 방법 ,풍부하고 다양한 것을 내포하면서도 확실한 것에 뿌리를 내리는 방법 등을 활용하고 있다.」 (이태주)
<춘풍의 처>
오태석 작·연출
「특유의 요설, 객설, 사설이 푸짐하고 북치고 창하고 뛰고 뒹굴고 춤추고, 그야말로 한 마당 신들린 굿거리 같은 연극‥‥‥ 극의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감각과 의식으로부터 도출해 내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정진수)
<에쿠우스>
피터 세퍼 작 ① 김영렬 연출 ② 실험극장
「이 작품의 종교적 의미, 문명 비판적인 요소, 무의식적 인간 행동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 생에 있어서의 파괴와 그 초월 등은 참신한 희곡 형식과 함께 연출가와 연기자들에게 커다란 연극적 과제를 안겨 주었다. 실험극장은 이 과제에 도전해서 우렁찬 개가를 올렸다고 보아야 한다.」 (이태주)
<아일랜드>
아돌 후가드 작 ① 윤호진 연출 ② 실험극장
「<아일랜드>는 어두운 70년대를 보내면서 정의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하던 젊은이들의 막힌 상황 속에 어떠한 빛을 던져준 작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을 유희기능으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예술이게 했다.」(이반)
이와 같이 70년대의 연극은 극단들의 자생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 속에서 시도되었으며 또한 70년대 말 창작극 발굴과 함께 우리의 토양에 맞는 연극의 생성과 발견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생긴 관 주도의 대한민국 연극제는 창작극 부흥에 한 윤활유가 되었다.
흥행에는 실패하는 창작극의 악순환을 감수하면서 선뜻 기회공연을 하기에 영세한 극단들은 망설이게 되던 현실에서 이 연극제를 통해 많은 창작극들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이러한 현상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나마 우리 연극을 토착화시켜 보려는 큰 뜻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가의 반복된 출현 등의 획일성과 단조로움이 가중되어 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실험성과 자유분방함이 전제되어야 하는 연극이 어떤 식으로든 규범화 · 정형화된다는 것은 한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창작극 작가의 발굴과 극단의 활성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노력과 성과는 큰 것이었다.
아쉬웠던 점들이 점진적으로 수정 보완을 진쳐 진정한 민간주도로 이양되어 애초에 연극제가 의도했던 전통을 재발견하려는 우리 적인 연극의 생성과 창작극 발굴이 다양한 수용자세를 통해 뿌리 내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연극제를 통해서 민중적 정서에 그 뿌리를 내리고 이 시대를 사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공연물들이 진지하게 시도되어질 때 보다 많은 연극 인구의 저변 확대가 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대형극장이나 다수의 소극장을 통한공연물의 팽창 속에서도 창작극에 대한 관심은 작은 극장 공간을 통해 양적 증대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연극에 있어서 전통은 매우 중요시되어야 한다 연극에 있어 전통이란 바로 고유한 민족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70년대의 급격하게 양적으로 팽창한 번역극과 관 주도의 연극제에 의한 창작극 개발과 몇몇 극단들에 와해서 꾸준히 기획 공연되었던 일련의 희곡, 그리고 소극장운동은 기존의 공연장만으로는 부족한 현상을 심각하게 대두시켰다.
여러 극단들의 절실한 공연장 부족난은 '81년 공연법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부터는 소극장이 급격히 생기기 시작했다.
소극장에 대한 규제 조치가 완화된 데 기인한 이런 소극장의 개관, 증가추세는 다양한 연극실험을 가능하게 해 연극문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80년말까지 서울 시내에는 11개의 소극장이 있을 뿐이었는데 '86년 1월말현재 24개로 늘어나 서울의 전체공연장 37곳의 67%에 이르게 되었다. 개관한 소극장들은 경제적인 자생력을 위해 주로 도심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나 적자를 메우며 경영해 나아가기에는 아직도 태부족인 상태다.
공연물 팽창에 따른 필연적인 공연장확대로 가장 손쉽게 생겨난 이런 소극장의 증가로 미루어 우리나라에 있어 펼쳐지는 소극장운동이란 상업주의 연극에 대한반발과 실험정신에서 생겨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현실 속에서 소극장 무대에 올려지는 공연물들은 흥행을 생각하치 않을 수 없었고, 자연히 오락적 기능을 배제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수한 연출가들에 의해 창작극들이 기획 공연되거나 재창조 되다시피 한 번역극들이 무대에 올려지기도 하였지만 우리나라 연극 현실이 고려되지 못한 일방적인 기획의도로 좌초하기 일쑤였다.
과거 공연법 규제 이전에는 우리나라 극단의 동인제 체제로 인해 신진 연출가의 기용이나 진보적 인 젊은 작가의 작품이 무대화 하기는 참으로 어렵고 두터운 연극계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은 상태는 전문 연극인들의 양산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런 동인제 체제 속에서 그동안 10편 이상의 작품을 연출한 연출가들로는 정진수 29편, 김정옥 27편, 김도훈 26편, 강유정 23편, 김효경 27편, 허규 18편, 표재순 17편, 이진순과 방태수가 각각 15편, 김상열 14편, 이원경과 박용기가 각각 11편씩이다. 물론 이 숫자는 재공연을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연출 작품 편수와는 무관한 것이란 점을 부기해 둔다.
<표4> 최다 연출자
연 출 자 |
편 수 |
정 진 수 |
29편 |
김 정 옥 |
27편 |
김 도 훈 |
26편 |
강 유 정 |
23편 |
김 효 경 |
20편 |
허 균 |
18편 |
표 재 순 |
17편 |
이 진 순 |
15편 |
방 태 수 |
15편 |
김 상 열 |
14편 |
이 원 경 |
11편 |
박 용 기 |
11편 |
※재공연 숫자를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연출편수와 관계없음
<표 5> 최다번역자(각색포함)
번 역 자 |
편 수 |
신 정 옥 오 화 섭 박 영 희 이 진 수 김 정 옥 이 근 삼 정 진 수 구 희 서 민 희 식 차 범 석 김 의 경 |
73편 40편 32편 30편 28편 22편 21편 18편 17편 13편 13편 |
※ 공연회수이기 때문에 번역작품수와 일치하지 않음
<표 6> 공연단체의 공연편수
극 단 |
공 연 편 수 |
자 유 극 장 실 험 극 장 창 고 극 장 민 중 극 장 민 예 극 장 극 단 에 저 또 극 단 광 장 여 인 극 장 동랑 레퍼터리 현 대 극 장 극 단 산 하 극 단 신 협 극 단 맥 토 극 단 고 향 극 단 대 하 극 단 은 하 |
69편 68편 68편 67편 64편 41편 40편 39편 39편 36편 34편 32편 31편 23편 22편 20편 |
※ 20회 이상 공연한 단체를 선정한 것임(공연숫자 속에는 재공연도 포함될 수 있음)
그리고 번역작품(각색을 포함) 가운데 10편 이상이 공연된 사람들로는 신정옥이 73편으로 외국 작품을 소개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였고 오화섭 40편, 박영희 32편, 이진수 37편, 김정옥 28편, 이근삼 22편, 정진수 21편, 구희서 18편, 민희식 17편, 차범석과 김의경이 각각 13편씩이다.
물론 이 통계에는 한 작품이 여러 다른 극단에 의해 재공연되었던 경우 모두를 단위공연으로 포함시킨 결과이기 때문에 번역 작품의 숫자로 보기보다는 공연횟수로 보아야 한다.
그밖에 가장 많은 공연을 한 단체로는 자유극장이 69편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실험극장과 창고극장으로 각각 68편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극장이 67편, 민예극장이 64편, 극단 에저또가 41편, 극단 광장이 40편이지만 이 역시도 공연 숫자속에는 재공연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상연작품 편수로서는 약간의 변수가 작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현상은 상기한 극단들 중에서 60여편 이상 공연 실적이 있는 단체는 각기 자체 소극장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얼마동안 소유경험이 있는 단체들인데 이 극단들은 자체 소극장에서 소단위 공연물을 쉽게 만들 수 있었으며 큰 재정적, 시간적 부담 없이 수차 재 공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공연 단체는 횟수와 관계없이 연륜이나 또한 상연 작품의 주류를 통해 극단의 독창적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극단의 질적 수준의 수치를 재는 자료로는 별반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 끝을 맺으며
그러나 극단이 자체 소극장을 가지거나 또는 공연법 개정 이후 많은 극장의 개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절대수의 공연장 부족과 창작극 빈곤 그리고 전문 연극인의 부족, 전통 연극의 현대화 과제 등 연극계가 지양해 나아가야 할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다.
문화인식의 변화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연극인들의 창의적 정신과 전통의식이 대물림으로 축적될 때 무대를 통한 진정한 인간탐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20∼50년대의 서구 리얼리즘 연극의 도입과 60년대의 창작희곡 부재 상황에서의 소극장운동 전개, 그리고 서구 유명 번역극 공연의 활기, 70년대의 경제적 향상과 사회 전반의 서구 지향주의적인 분위기가 가져다준 연극 붐은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등의 대형극장 설립과 함께 대중적 취향에 발맞춘 번역극의 양적 팽창,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설립과 함께 창작극발굴을 위한 정책적인 지원에 의한 연극제 등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성숙한 단계에 돌입하여 오늘날 그 개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 우리의 연극계 현실은 내외적으로 많은 변동을 보았다. 신극운동과 반기성극과 실험성을 표방했던 연극운동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추구와 결실을 맺어왔다. 그 속에서 새로운 한국적 공연문화가 재창조되어 중앙에서의 전국적인 확산이 아닌 지방마다의 향토적이며 고유한 문화운동으로 공동체의식 형성의 중심체로써의 역할이 과제로 남아 있다. 이것이 극복·승화되어질 때 좀더 나은 공연예술의 토착화가 가능해 질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