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오페라 공연실태 조사
-1945년이후 통계자료에 의한-
박선희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음악학과 이론전공졸업.
1985 월간「객석」 예술평론상「양악부문」 당선.
서 론
86년은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체육제전과 더불어 많은 대규모 문화행사가 있었던 한 해였다. 대형, 대량의 문화예술하면 음악분야의 오페라장르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고, 예외 없이 올 한해에 무대에 올려진 작품은 21편에 이르러 한국 오페라 공연사상 1986년은 오페라 최다 상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1편중 창작오페라는 8편이나 되었고 그중 초연작품은 5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페라 풍년 현상은 오페라와 오페라란 장르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새로운 반성에 의해 여과되어지지 않는다면 주목거리가 될 수 있는 그 자체의 힘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오페라라는 제품을 생산하는 전문(음악)가들에게나 그것의 소비자로서의 대규모 감상자들에게도 오페라는 하나의 맹목적 애착의 대상을 넘어 진지하게 존재가치를 규명 받아 본적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최근 오페라계 또는 음악비평계 일각에서 도대체 오페라라는 형식은 무엇인가라는 용기 있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 근본적 도전은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 그리고 연극적 구성과 동작이 음악에 종속된다는 두 가지 상징을 가진 기존의 오페라 개념에 제동을 걸고, 보다 창조적인 총체예술로 가는 밑거름적 시각을 제공해준다는 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울러 현재의 공연작품들에 대한 신선한 재해석과 오페라공연상의 운영의 묘를 살리는 일과 재능 있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 등의 현실적 문제도 오려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오페라의 현황을 알아보고 그것의 나갈 길을 제시하는 작업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기존 창작오페라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분석, 외국 오페라상연에 관련된 사회학적 구조에 대한 심도 있는 비평, 한국 오페라의 사적(史的) 조망, 또는 무대상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분야, 음악, 연극, 미술, 문학, 의상 등의 기술적 문제에 대한 전반적 검토가 그러한 방법의 예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어떤 오페라들이 언제 무대에 올려졌는가 하는 공연 기록에 의한 공연실태 조사를 통하여 오페라 활동 상황의 전체적인 전망을 수립하고 현명한 진단을 내리는 일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되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이 글은 그간의 공연 기록에 비춰진 한국인의 오페라에 대한의식을 점검해 보는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먼저 한국 오페라 공연 약사를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한국 오페라 공연略史
한국에서 최초로 오페라가 공연된 것은 1937년 5월 부민관에서의 '나비부인'이었다. 이후 1940년에 역시 같은 장소에서 '카르멘'이 공연되었다. 그러나 이 공연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한국 오페라 사에서의 최초의 공연은 1948년 조선 오페라협회 (국제오페라사의 전신, 이인선이 주재 )가 무대에 올린 '춘희'로 여겨진다. 두 번째 레퍼토리는 구노의 '파우스트'로 한불문화협회가 주관한 것이었다. 해방 후 40년대 후반에 이뤄진 이 두 공연은,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일제 강점기였던 탓으로 억제돼 있던 우리 음악인들의 무대예술에의 꿈을 실현시켜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또 한편 이 공연들은 그 이후 오페라 공연 레퍼토리의 획일성을 암시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사실 당시 한국 음악인들에게 비쳐진 오페라관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오페라 수용의 초창기부터 오페라가 하나의 형식으로 작곡가들에게 보여진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 50년의 현제명 작곡 '춘향전'은 그런 뜻에서 의미 깊다. 그 외에도 50년대에 상연된 창작 오페라는 김대현의 '콩쥐 팥쥐'(51년과 59년), 현제명의 '왕자호동'(54년)이 있다. 50년대 초반이 전쟁의 와중이었음에도 오페라 공연이 창작오페라로 연맥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50년대 후반에는 '춘희'외에 '카르멘' '리골레토' '토스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팔리아치' '라보엠' 등이 레퍼토리로 추가되었다. 이것들은 80년대의 오페라 레퍼토리로서도 살아 남았다. 50년대 후반의 특기할 만한 사실 하나를 꼽는다면 많은 오페라 단체의 활동이다. 서울 오페라단, 한국 오페라단, 프리마 오페라단, 고려 오페라단 등이 창단, 비교적 활발한 공연 활동을 했다. 1958년 서울 오페라단의 제2회 공연 '리골레토'는 로이 해리스의 연출로 기억되는 공연이라고 한다.
60년대는 국립극장의 재출발과 더불어 창단된 국립오페라단의 활동 시작으로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단체의 제 1회 공연은 장일남의 '왕자 호동'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열린 서울국제음악제의 '피델리오' 공연에 의해 그것은 관심이 약화됐다. 62년 국립 오페라단의 창단은 50년대 후반의 민간 군소 오페라단의 발전적 해체를 불러 왔다. 61년 이후 이들 단체의 활동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레퍼토리는 전시기에 비해 많이 확장되었다. 모차르트의 작품 '돈 죠반니'가 상연되었고, '일 트로바토레' '세빌리아 이발사' '오델로' '사랑의 묘약' '루치아' 등이 무대에 올랐다. 소규모 오페라는 대학의 오페라단(서울대, 이화여대)에 의해 공연되었다. 글룩, 메노티, 요한 스트라우스, 퍼셀, 스메타나의 작품이 그러하다. 68년 창단된 김자경 오페라단은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민간 단체로서 국립 오페라단과 함께 70년대 오페라계를 주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에 들어서면 연간 공연 횟수도 평균 8회로 늘어나 양적 증가의 실상을 드러낸다. 각 대학에서의 오페라 공연도 활성화되었다. 이 시기에 공연된 대학 오페라공연은 19회로서 상대적으로 몇 개 되지 않은 기성 오페라단과 좋은 대조를 보였다. 물론 기성 오페라단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국립 오페라단과 김자경 오페라단 외에 1975년에 서울 오페라단이 결성, 현재 15회의 공연 기록을 가지고 있다. 70년대의 오페라 공연은 이 세 오페라단의 활약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할 만한 공연은 74년의 바그너 작곡 '방황하는 화란인' (국립오페라단)이었다. 그러나 바그너 오페라(악극)는 아직도 우리 오페라 계의 벽으로 남아 있다. 79년의 지방 오페라단(부산, 인천)의 활동 시작은 지방문화 육성이란 측면에서 환영받을 만한 것이었다. 61년과 74년에 각각 부산오페라단의 공연이 있었으나 그것은 추진력으로 작용하지 못했었다.
80년대의 두드러진 변화는 오페라 상설무대와 소극장 운동이었다. 대규모 지향적인 오페라를 소규모화로 시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는 이 현상이 내실을 기하에는 아직 시일이 걸릴 것이고 그 자체의 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는 오페라에 대한 경직된 사고를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지 모른다. 소극장용 창작 오페라에서는 그랜드 오페라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극적, 음악적 소재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80년부터 현재에 이 시기까지 연평균 공연 회수는 101회이다. 이 시기에는 광주, 대구에도 오페라단이 발족했고 민간 오페라단과 관영 오페라단의 활동도 적극적이 되었다. 그러나 오페라 레퍼토리에서의 별다른 변화는 눈에 띠지 않는다. 레퍼토리의 개발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기존 레퍼토리에 대한 진지한 재해석과 음악과 기타예술이 결합된 보다 창조적인 총체극의 창작이 근본적인 숙제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의 오페라단체
오페라공연 작품의 기록을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공연 과정과 오페라 활동의 조직성 및 참여도를 점검하기 위해 오페라단의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페라 공연의 주체인 오페라단의 현황은 다음 도표에 나타나 있다.
<표 1> 한국의 오페라단체
성 |
격 |
오페라단 |
창단연도 |
초연작품 |
총공연회수 |
관영 |
|
국립오페라단 |
1962년 4월, 현존 |
장일남, 왕자호동 |
48 |
서울시립오페라단 |
1978년 10월 |
풋치니, 라보엠 |
1 |
||
1985년 3월, 현존 |
죠르다노, 안드레아 세니에 |
2 |
|||
민간 |
서울 |
국제오페라사 |
1948-50년 |
베르디, 춘희 |
3 |
서울오페라단 |
1957-59년 |
베르디, 춘희 |
5 |
||
한국오페라단 |
1958-72년 |
풋치니, 토스카 |
5 |
||
프리마오페라단 |
1959-68년 |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4 |
||
고려오페라단 |
1959-65년 |
김대현, 콩쥐팥쥐 |
3 |
||
김자경오페라단 |
1968년, 현존 |
베르디, 춘희 |
35 |
||
서울오페라 아카데미 |
1969년 |
풋치니, 라보엠 |
1 |
||
대한오페라단 |
1970-72년 |
비제, 카르멘 |
3 |
||
서울오페라단 |
1975년,현존 |
풋치니, 토스카 |
16 |
||
수도오페라단 |
1982-83년 |
풋치니, 토스카 |
2 |
||
국제오페라단 |
1984년, 현존 |
풋치니, 나비부인 |
3 |
||
중앙오페라 아카데미 |
1984년 |
|
|
||
지방 |
부산오페라단 |
1974년 |
|
|
|
대구오페라협회 |
1975년 |
베르디, 춘희 |
|
||
부산오페라단 |
1979년, 현존 |
베르디, 춘희 |
4 |
||
인천오페라단 |
1979년, 현존 |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1 |
||
나토얀오페라단(부산) |
1980년, 현존 |
풋치니, 라보엠 |
4 |
||
대구오페라단 |
1980년, 현존 |
풋치니, 토스카 |
2 |
||
광주오페라단 |
1984년, 현존 |
베르디, 춘희 |
1 |
||
영남오페라단 |
1984년, 현존 |
풋치니, 토스카 |
1 |
||
대학 |
|
서울대음대 오페라단 |
1950년 |
|
13 |
이대 음대 |
1961~68년 |
|
4 |
||
연대 음대 |
1970년 |
|
4 |
||
한양대 음대 |
1973년- |
|
6 |
||
경희대 음대 |
1974년- |
|
4 |
||
계명대 |
1977년 |
|
1 |
||
효성여대 |
1970년 |
|
1 |
||
단국대 |
1975년 |
|
1 |
||
조선대 |
1985년 |
|
1 |
||
원광대 |
1977년 |
|
1 |
||
성심여대 |
1969년 |
|
1 |
||
숙명여대 |
1975년 |
|
1 |
||
중앙대 |
1975년 |
|
1 |
우선 성격상 세 종류, 즉 관영, 민간, 대학으로 나누어 보았고 민간 오페라는 다시 서울과 지방으로 세분했으며, 각각 연대적으로 정리 되어있다. 아울러 창단 연도, 초연작품, 총공연 회수를 병기했고 현존하는 단체에는 창단 연도난에 현존이라고 부기 하였다. 그리고 대학의 오페라 공연은 단회 공연인 경우가 많아 초연작품은 생략했다.
<표1-2>
순위 |
단 체 |
공연회수 |
1 |
국립오페라단 |
48 |
2 |
김자경 오페라단 |
35 |
3 |
서울 오페라단 |
16 |
4 |
서울대음대 오페라단 |
13 |
5 |
한양대음대 오페라단 |
6 |
도표에 의하면 가장 많은 공연 회수를 기록한 단체는 국립 오페라단으로 48회이고 그 다음은 김자경 오페라단의 34회, 그리고 서울 오페라단의 15회가 차례로 기록된다. 이는 70년대 이들 오페라단의 두드러진 활동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50년대 후반에 생긴 오페라 단체들은 3∼5회의 상연에 그쳤고 공연의 수준도 훌륭한 것으로 짐작되지 않는다. 연대별로 오페라단 창단수를 살펴보면 4, 50년대에는 5개, 60년대는 3개, 70년대는 7개, 80년대는 8개 단체로 증가 추세이다. 현존하는 오페라단의 수는 관영이 2개, 민간이11 (서울이 5개, 지방이 6개)개이고 대학 오페라단으로서 서울대, 한양대, 연세대가 비교적 지속적 활동을 보였다. 특히 서울대 음대의 오페라공연은 초창기 오페라공연에 기여한 바 컸다.
국립 오페라단은 62년이래 꾸준한 공연을 계속했는데 최근에는 소극장용 창작 오페라를 위촉, 공연하여 창작 오페라 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한 계기로 작곡된 작품은 박재열의 '초분', 공석준의 '결혼' , 백병동의 '이화부부'들이다. 시립 오페라단은 1978년 창단 공연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활동은 없었고 85년에 이르러 새로 창단되어 매년 창작오페라 한편을 선보이기로 공약한 후 86년에 박준상의 '춘향전'을 공연했다.
민간 오페라단의 경우 지방은 상대적으로 서울에 비해 미약한 실정이다. 이는 독자적인 지방문화를 형성하는 데 장애가 된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의 지방 오페라단의 창단은 서울 오페라단의 뒤쫓기가 아니라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페라 아카데미'란 이름의 두 단체는 일반 오페라단과는 달리 소규모 지향적인 듯하다. 69년의 서울오페라 아카데미는 단회 상연으로 이후 활약이 전무하고 84년의 중앙오페라 아카데미는 오페라 아리아의 밤으로 초연 공연을 대신했다.
각 오페라단들의 초연 작품을 살펴보면 흥미 있는 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민간 오페라단의 거개가 한국 오페라 공연기록에서 최다공연으로 기록되는 몇 개 작품의 범주 안에서 초연 공연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춘희' '토스카' '라보엠'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카르멘'의 5개 작품은 공연 자료의 통계수치에 의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오페라( ? )'로 운위될 만하다. 오페라 공연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레퍼토리 편향도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다. 초연 작품의 성패가 오페라단의 사활에 관련된 것이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현상은 전체 공연 작품의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창작 오페라를 초연 작품으로 선정한 오페라단은 국립 오페라단과 고려 오페라단이었다. 80년대에 창단된 두 오페라단은 예외적으로 '나비부인'과 '안드레아 세니에'를 공연했다.
한편 각 오페라 단체의 창작 오페라 공연회수, 초연 외국 오페라의 수, 초연 창작 오페라의 수를 도표화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표 2> 각 오페라단의 창작품 공연 및 외국작품 초연회수
오 페 라 단 |
창작품초연 |
창작품재연 |
외국작품초연 |
국립오페라단 |
6 |
5 |
10 |
시립오페라단 |
1 |
· |
1 |
김자경오페라단 |
3 |
2 |
10 |
서울오페라단(1975) |
1 |
3 |
4 |
서울대음대오페라단 |
3 |
· |
4 |
대한오페라단 |
1 |
· |
· |
고려오페라단 |
1 |
· |
1 |
서울오페라단(1957) |
· |
1 |
2 |
한국오페라단 |
· |
· |
3 |
국제오페라사 |
· |
· |
2 |
프리마오페라단 |
· |
· |
4 |
이대음대오페라단 |
· |
· |
4 |
연대음대오페라단 |
· |
· |
1 |
숙대음대오페라단 |
· |
· |
1 |
기 타 |
2 |
5 |
6 |
계 |
16 |
16 |
53 |
가장 많은 창작품을 초연한 단체는 국립 오페라단, 김자경 오페라단, 서울대 음대 오페라단순이고 여기서 서울대 음대 오페라단의 공연 내용은 50년대 전반의 공연을 가리킨다. 한편 60년대에 활동한 이대 오페라단의 공연은 모두 외국작품 초연이어서 눈길을 끈다.
연도별 공연회수
이제 한국 오페라 공연의 연도별 공연회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3> 연도별 공연회수
1948 |
2 |
1960 |
3 |
1970 |
8 |
1980 |
9 |
1949 |
1 |
1961 |
|
1971 |
5 |
1981 |
5 |
1950 |
2 |
1962 |
4 |
1972 |
5 |
1982 |
6 |
1951 |
2 |
1963 |
3 |
1973 |
6 |
1983 |
8 |
1952 |
· |
1964 |
2 |
1974 |
6 |
1984 |
14 |
1953 |
· |
1965 |
4 |
1975 |
11 |
1985 |
15 |
1954 |
1 |
1966 |
4 |
1976 |
6 |
1986 |
20 |
1955 |
1 |
1967 |
2 |
1977 |
3 |
|
|
1956 |
· |
1968 |
5 |
1978 |
12 |
|
|
1957 |
2 |
1969 |
6 |
1979 |
14 |
|
|
1958 |
3 |
|
|
|
|
|
|
1959 |
5 |
|
|
|
|
|
|
위 표에 의하면 총 206회 공연이 있었고 일반적으로 증가 추세임을 알 수 있다. 52년과 53년, 56년은 일회 공연도 없는데 이는 전쟁의 영향으로 인한 물질적 빈곤이 그 요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중에 54년과 55년에는 창작 오페라가 한 편씩 상연됐다. 50년대 말(57-59년)에는 군소 오페라단의 활동을 짐작케 하고, 68년 이후의 공연 횟수는 5회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75년에 11회를 기록한 것은 광복 30주년으로 문화행사가 활발했던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있으며, 78년, 79년의 다회 상연은 세종문화회관의 개관에 즈음한 것이었다. 80년∼83년이 그것을 전후한해의 횟수보다 적은 이유는 80년대 초반의 정치적 변화가 야기한 경제, 사회적 동요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 추측되며, 84년 이후의 증가는 각종 범세계적 체육행사유치와 더불어 대규모 문화행사에 대한 관심증대가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면 공연된 작품을 편의상 외국작품과 창작품으로 나누고 다시 세분화한 분석을 시도해 보기로 하자. 오페라의 총공연 횟수는 206회이나 일회에 두 편을 올린 경우도 있어 오페라작품을 중심으로 보면 모두 211회의 공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창작 오페라는 34회의 공연을 한 것으로 나왔고, 외국작품은 176회로 산정되었다.
오페라 작품의 공연실태
외국 작곡가 작품은 모두 53편이었다. 비교적 많은 작품 수를 보여준 작곡가는 베르디, 푸치니, 모차르트의 순이었다. 물론 이들은 오페라작품을 많이 남긴 서양 공통관습시대의 작곡가들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특정 작곡가 작품에 대한 편향성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먼저 전체적인 조망을 위해 다음의 <표 4> 작곡가별 공연작품 목록을 보자.
<표4> 작곡가별 공연작품 목록
작곡가 |
작품, ( )안은 공연회수 |
베르디 |
춘희(16), 리골렛토(7), 아이다(6), 오델로(3), 일트로바토레(2), 가면무도회(2), 운명의 힘(1), 돈카를로(1) |
풋치니 |
토스카(13), 라보엠(13), 나비부인(8), 쟈니스키키(4), 투란도트(2), 마농레스꼬(1), 수녀안젤리카(1) |
모짜르트 |
피가로의 결혼(6), 돈 죠반니(4), 마적(3), 코시판투테(2),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2) |
도니젯티 |
사랑의 묘약(6), 루치아(3), 돈 파스칼레(1) |
바그너 |
방황하는 화란인(1), 로엔그린(1), 탄호이저(1) |
메노티 |
전화(1), 무당(1), 노쳐녀와 도둑(2), 아말과 크리스마스밤(1) |
구노 |
파우스트(4), 로미오와 줄리엣(3) |
마스카니 |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3) |
레온카발로 |
팔리아치(5) |
롯시니 |
세빌리아의 이발사(4) |
비제 |
카르멘(11) |
벨리니 |
노르마(1) |
폰키엘리 |
라지오콘다(1) |
죠르다노 |
안드레아 세니에(1) |
페르골레지 |
마님이 된 하녀(3) |
글룩 |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1) |
플로토 |
마르타(1) |
마스녜 |
마농(1) |
생상 |
삼손과 데릴라(2) |
베에토벤 |
피델리오(1) |
베버 |
마탄의 사수(1) |
요한시트라우스 |
박쥐(2) |
스메타나 |
팔려간 신부(2) |
퍼셀 |
디도와 에네아스(1) |
브리튼 |
피터그라임즈(1) |
제임스웨이드 |
순교자(2) |
로버트워드 |
마녀사냥(1) |
오펜바하 |
호프만의 이야기(1) |
<표 4>는 한국에서 공연된 서양작곡가의 오페라작품의 전체 목록이다. 그런데 이 표는 공연의 질적 수준이나 청중의 호응도와 같은 중요한 다른 상황을 보여주지 못하고, 모든 공연을 공연 그 자체의 의의로 평가한 것이다. 이를테면 초청된 외국 오페라단에 의한 공연, 또는 한불, 한독, 한이 합작 공연까지 포함되었고 합창단에 의한 불완전한 무대 조건에서의 공연도 함께 고려되었다. 뿐 아니라 관객의 지속적 관심을 보여준 (물론 이것이 진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나 는 다시 고찰될 성질의 것이다)레퍼토리와 형식적인 정기공연의 레퍼토리는 다른 수준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레퍼토리 목록을 살펴보는 데 있어 그러한 외적 요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에 소개된 서양의 오페라 작곡가는 총 28명이다. 그 중에서 최다작품이 소개된 작곡가는 8편이 소개된 베르디이고, 단일작품으로 최다공연 횟수를 기록한 작품도 역시 베르디의 오페라 '춘희'이다. 한편 가장 많은 공연 횟수를 보유한 작곡가는 7편의 41회 공연이 기록된 푸치니이다. 단일 작품만으로 많은 공연기록을 가진 작곡가는 마스카니와 비제로서 각각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카르멘'으로 13회, 11회의 공연 횟수를 보여준다. 그러면 <표 4>에 의거하여 작곡가별 공연작품수 및 총공연회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5>. 그리고 10회 이상 공연 횟수를 가진 작품의 총회수를 나타내는 도표를 만들어 보면 <표 6>과 같이 된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 작곡가는 푸치니와 베르디이며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는'춘희' '라보엠' '토스카' 등이다
<표 5> 작곡가별 공연작품수 및 총공연회수
작곡가이름 |
공연작품수 |
총공연회수 |
베르디 |
8 |
39 |
풋치니 |
7 |
41 |
모차르트 |
5 |
17 |
도니젯티 |
3 |
10 |
메노티 |
4 |
5 |
바그너 |
3 |
3 |
구노 |
2 |
7 |
마스카니 |
1 |
13 |
레온카발로 |
1 |
5 |
롯시니 |
1 |
4 |
비제 |
1 |
11 |
<표6-1> 10회이상 공연된 작품의 총공연회수
춘희 |
16 |
라보엠 |
13 |
토스카 |
13 |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13 |
카르멘 |
11 |
그러므로 한국인의 오페라 취향은 19세기 이태리의 비극적 그랜드 오페라를 애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작품은 이태리 오페라에 비하면 비교적 적은 공연 횟수를 나타내고 있지만 작품들간에는 고른 공연 횟수를 보여준다. 베르디, 푸치니 다음으로 대중적인 이태리 작곡가는 도니젯티라 할 수 있고 마스카니는 유달리 국내에서의 높은 공연율을 보였다. 바그너의 작품은 그의 수많은 악극들을 고려한다면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로엔그린'은 합창단의 공연이었고, '방황하는 화란인'과 '탄호이저'는 국립오페라단의 노작이었지만 후속작품의 무위로 영향을 주지 못했다. 바그너 작품자체의 연주, 해석, 공연절차 상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계속되는 시도가 요망된다.
국내의 오페라 취향의 성격을 좀 더 자세히 음미하기 위해 미국의 음악사회 학자 로잔느 마르토렐라가 그의 1982년 저서인 <The Sociology of Opera)에서 통계자료로 제시한 미국내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와 오페라작곡가의 공연횟수를 비교해 보기로 한다. 이 자료는 1966년에 1972년간의 통계이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참고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표6-2> 1966∼72년 사이의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들
작 품 이 름 |
공 연 수 |
라보엠 |
1023(회) |
세빌리아의 이발사 |
870 |
피가로의 결혼 |
800 |
트라비아타(춘희) |
759 |
나비부인 |
707 |
<표 6-3> 1966∼72년 사이의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공연된 작곡가들
작 곡 가 이 름 |
공 연 수 |
풋치니 |
3228(회) |
모차르트 |
2564 |
베르디 |
2254 |
롯시니 |
1187 |
도니젯트 |
1029 |
구노 |
442 |
오펜바하 |
411 |
페르골레지 |
358 |
마스카니 |
359 |
레온카발로 |
299 |
바그너 |
261 |
마르토렐라가 제시한 미국내의 오페라 취향 통계자료에 의하면 5위까지의 대중적 오페라들에 희극이 2편(세빌리아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국내의 자료에는 한편도 없는 것과 비교하면 특징적인 면이다. 또 이 통계에 의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인에 비해 모차르트의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나라 사람의 오페라 취향은 이태리 지향적, 비극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까지는 한국 오페라 공연기록을 작곡가 중심으로 작품공연수를 살폈는데 그러면 1945년이래 현재(1986년)까지 시기를 넷으로 구분하여 연대별 공연 횟수를 알아보자. 작품은 3회 이상 공연된 것을 대상으로 했다.
<표7> 연대별 작품 공연 회수
연도 작품 |
1948-59년 |
1960-69년 |
1970-79년 |
1980-88년 |
총회수 |
춘 희 |
2 |
1 |
8 |
5 |
16 |
토 스 카 |
1 |
2 |
6 |
4 |
13 |
라 보 엠 |
1 |
2 |
2 |
4 |
13 |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1 |
3 |
4 |
4 |
12 |
카 르 멘 |
3 |
2 |
3 |
3 |
11 |
나비부인 |
|
|
4 |
4 |
8 |
리골렛토 |
1 |
1 |
4 |
1 |
7 |
아 이 다 |
|
1 |
3 |
2 |
6 |
사랑의묘약 |
|
1 |
2 |
3 |
6 |
피가로의결혼 |
|
1 |
3 |
2 |
6 |
팔라아치 |
|
|
3 |
2 |
5 |
돈죠반니 |
|
1 |
2 |
1 |
4 |
세빌리아의 이발사 |
|
1 |
2 |
1 |
4 |
파우스트 |
1 |
1 |
2 |
|
4 |
마 적 |
|
|
1 |
|
3 |
루 치 아 |
|
1 |
1 |
1 |
3 |
자니스키키 |
|
1 |
1 |
2 |
4 |
오 델 로 |
|
1 |
1 |
1 |
3 |
로미오와 줄 리 엣 |
|
1 |
1 |
1 |
3 |
<표7>은 각 공연 작품의 공연(횟수)의 연대적 추이를 시사한다. 10회 이상 상연된 다섯 작품과 '리골레토'와 '파우스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이 60년대 이후에 소개되었고, '나비부인' '마적' '팔리아치'의 세 작품은 70년대 이후에 소개된 작품이다. 10회 이상 공연된 다섯 작품에 한해 살펴보면 우선 '춘희' '토스카' '라보엠'은 70년대 이후에 공연 횟수의 현저한 증가를 보였다. 그리고 '카르멘'은 오페라 초창기부터 시기별 고른 상연수를 나타내는데 이는 달리 말해 물량적 여건의 개선을 염두에 둔다면 잠재적 감소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총 공연작 53편을 작곡된 시대별(즉, 음악사의 시기)로 구분하면 <표8>이 된다. 당연히 오페라의 전성기였던 낭만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바로크시대 작품으로는 '마님이 된 하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더도와 에네아스'였고, 현대작품은 이태리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작곡 활동을 한 메노티와 영국의 브리튼, 그리고 미국 작곡가 제임스 웨이트(김은국 원작인 '순교자'를 작곡)와 로버트 워드의 오페라들이다. 브리튼의 '피터 그라임즈'는 79년 로열 오페라단의 내한공연이기에 사실상 오페라라는 작품의 사회학적 전달 구조에서 볼 때 '소비'측만이 고려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현대 작곡가 중 메노티의 것은 상대적으로 다회 공연인데 그 이유는 이 작곡가가 푸치니 계열을 이은 전통적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메노티의 작품은 앞에서 본 바처럼 미국 오페라 레퍼토리에서도 대중적이다. 고전주의 시기에는 모차르트 작품이 포함되어 있으나 고전시기는 낭만시기에 비하면 훨씬 낮은 상연횟수를 보인다.
<표 8> 외국작곡가 공연작품의 시대별 분류
음악사의 시기 |
작곡가 수 |
편수 |
바 로 크 |
3 |
3 |
고 전 |
2 |
6 |
낭 만 |
19 |
37 |
현 대 |
4 |
7 |
시대별 분류와 함께 나라별 분류도 가능할 것이다. <표9>는 총53편의 나라별 분류를 나타내고 있다. 역시 가장 많은 편수를 보인 나라는 이태리였고 그 다음이 독일, 프랑스 순이었다. 기타에는 스메타나와 미국의 두 작곡가가 포함됐다.
<표9> 외국작곡가 작품의 나라별 분류
나 라 이 름 |
작 곡 가 수 |
편 수 |
이태리 |
11 |
29 |
프랑스 |
6 |
7 |
독 일 |
6 |
12 |
영 국 |
2 |
2 |
기 타 |
3 |
3 |
계 |
28(명) |
53(편) |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오페라 작품은 낭만주의 시기의 이탈리아 오페라임이 자료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리고 특정 작품 몇 편은 좋게 말하면 변함없이 나쁘게 말하면 고정적으로 무대에 올려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레퍼토리 편중 현상은 서양음악에 대한 폭넓고 올바른 이해에 방해가 된다. 이 현상을 낳은 중요한 배경을 생각하건대, 그것은 오페라 장르가 대규모 감상층의 대중적 욕구의 충족과 화려한 무대를 꿈꾸는 성악인들의 기술의 실현장 이상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그 동안 국내 오페라계 현실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참신한 창작 오페라를 양산시켜가야 하겠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창작 오페라의 현황을 알아보자.
한국의 창작오페라 현황
한국적 전통을 가진 한국 작곡가가 서양 음악적 그릇인 서양 음악의 형식으로 작품을 작곡할 때 부딪히는 어려움은 참으로 지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작곡가들에게 그것은 다소 가려져 있는 형편이다. 70년대에 들어 현대어법적 기악음악을 중심으로 이끌어져 온 한국작곡계에서 그 문제는 '한국적' 음악이란 이름으로 종종 거론되었다. 기악음악에서 언급되어지는 '한국적이란 어의의 불투명성에 비해 그러나 오페라 같은 형식에서 그것은 훨씬 실질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한국 오페라가 얼마나 한국적인가라는 논제는 이 글과는 별개의 주제가 되겠지만, 한국 창작 오페라 작품 및 공연 상황을 검토함에 있어서 우리는 창작 오페라의 지향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창작오페라는 모두 18편이 34회 공연되었다. 오페라 공연 초기부터 창작 오페라에 대한관심은 과소한 것이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최초의 창작 오페라는 1950년 국립극장에서 서울대 음대 오페라단에 의해 초연된 현제명 작곡 '춘향전'이었다. 이 작품은 한국 창작 오페라사상 최다 공연기록을 갖고 있는데 7회의 재공연이 이루어졌다. <표10> 은 한국 창작오페라의 작품목록을 시대별로 정리한 것이다. 연대별로 보면 50년대에 3편, 60년대의 오페라 초연작이 증대된 현상은 86년의 대형문화행사 붐과 더불어, 이 원인도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재공연 역시 80년대에는 부쩍 늘었다. 80년대에 재연된 오페라들은 현제명의 '춘향전'외에 장일남의 '춘향전', 김달성의 '자명고', 장일남의 '원효', 박재훈의 '에스더', 홍연택의 '논개', 공석준의 '결혼'이다. 이 중 '결혼'은 85년 초연 후 같은 해 재 공연되었고(물론 국립극장의 기획공연이었지만)86년에도 재연되는 등 창작 오페라 치고 좋은 반응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70년대까지의 창작 오페라의 소재는 대부분 고전이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었다. 그것은 오페라 장르가 한국 작곡가들에게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19세기의 서양음악사에서 민족주의를 전개한 대표적인 나라인 러시아에서 오페라를 통해 그러한 에너지를 분출시켰던 것을 돌이켜 보지 않더라도, 오페라는 어느 나라의 작곡가에게도 손쉽게 사담(私談)을 전개시킬 형식으로 비치지는 않는 듯 보인다. 한국 작곡가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80년대에도 계속적으로 그러한 같은 소재의 작업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 한국인의 자긍심을 잃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전, 역사를 소재로 한 오페라를 나름대로 독창적으로 해석, 소화한 성공적 오페라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리고 좀더 실험적인 창작 오페라를 위해서는 그런 전통적 소재의 짐을 어깨에서 내리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고전과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든, 현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든, 어찌되었건 그 소재가 우리들의 현실적 삶을 왜곡시키지 않고 훌륭히 재창조한 것이며 풍요로운 정신유산으로 보존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환영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창작 오페라를 그 소재에 따라 분류하면 아래와 같은 표를 만들 수 있다.
(표11)에서 대략 다섯 가지로 구분해 보았는데 현대극 작품이라고 한 난에는 현대 희곡작가가 쓴 비교적 현대가 시대 배경인 극작품으로 다른 네 항목에 속하지 않는 것을 포함시켰다. '시집가는 날'은 여기서 예외적으로 여겨질 수 있겠으나, 이것이 민담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는 더욱 없다. 또한 한국사의 사건이나 인물을 배경으로 했더라도 극작가의 희곡(대본)에 기초한 작품이 '있었으나(예를 들면 자명고, 원술랑 등) 편의상 역사에 포함시켰다.
같은 소재가 다른 작곡자들에 의해 작곡된 예도 나타났는데 '춘향전' '왕자 호동' '심청전'이 그것들이다.
<표12> '춘향전'과 '심청전'은 전통음악의 판소리에도 있는 레퍼토리이어서 가장 친밀하고 흡수력이 높은 소재로서 작곡자들에게 인식된 것 같다. 춘향전은 50년대, 60년대, 80년대에 각각 1편씩 초연되었다.
작곡가별로 보면 장일남이 3곡, 현제명 2곡, 홍연택이 2곡, 박재열 2곡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3회 이상 상연된 작품은 현제명의 '춘향전', 장일남의 '춘향전', 공석준의 '결혼' 등 세 작품뿐이다.
<표 10> 한국창작오페라 작품목록(공연작품에 한함)
연 대 |
작품명 |
작곡가명 |
초연 연도 |
장소 |
단체 |
재공연 연도 |
50년대 |
춘향전 |
현제명 |
1950년 |
국립극장 |
서울대음대 오페라단 |
1951년 |
1958년 |
||||||
1965년 |
||||||
1970년 |
||||||
1976년 ‘대춘향전’(오케스트라 편곡) |
||||||
1983년 |
||||||
1984년 총8회 공연 |
||||||
콩쥐팥쥐 |
김대현 |
1951년 |
서울시공관 |
서울대음대 오페라단 |
1959년 |
|
왕자호동 |
현제명 |
1954년 |
서울시공관 |
서울대음대 오페라단 |
|
|
60년대 |
왕자호동 |
장일남 |
1962년 |
국립극장 |
국립오페라단 |
|
춘 향 전 |
장일남 |
1966년 |
국립극장 |
국립오페라단 |
1981년 1986년 '대춘향전'으로 공연 |
|
자명고 |
김달성 |
1969년 |
시민회관 |
한국음악협회 |
1985년 |
|
70년대 |
원효대사 |
장일남 |
1971년 |
시민회관 |
김자경오페라단 |
1984년 |
에 스 더 |
박재훈 |
1972년 |
시민회관 |
대한오페라단 |
1986년 |
|
논 개 |
홍연택 |
1975년 |
국립극장 |
국립오페라단 |
1980년 |
|
심 청 전 |
김동진 |
1978년 |
세종문회회관 |
김자경오페라단 |
|
|
80년대 |
초 분 |
박재열 |
1983년 |
국립극장 |
국립오페라단 |
|
심 청 가 |
박재열 |
1983년 |
세종문회회관 |
김자경오페라단 |
|
|
결 혼 |
공석준 |
1985년 |
국립극장 |
국립오페라단 |
1985년 12월 1986년 |
|
춘 향 전 |
박준상 |
1986년 |
세종문화회관 |
서울시립 오페라단 |
|
|
원 술 랑 |
오숙자 |
1986년 |
세종문화회관 |
서울오페라단 |
|
|
시집가는날 |
홍연택 |
1986년 |
세종문화회관 |
|
|
|
이화부부 |
백병동 |
1986년 |
국립극장 |
국립오페라단 |
|
|
부산성의 사람들 |
이상근 |
1986년 |
|
|
|
<표 11> 한국창작오페라 소재분석
소재의 종류 |
작 품 |
한국사의 인물 또는 한국사적 사건 |
왕자호동(자명고), 원효대사, 논개, 원술랑 부산성의 사람들 |
민담 또는 전래동화 |
콩쥐팥쥐 |
한국고전(고대소설) |
춘향전, 심청전 |
현대극작품 |
초부, 결혼, 시집가는 날, 이화부부 |
성서이야기 |
에스더 |
<표 12> 2인 이상이 작곡한 소재
작 품 |
작 곡 가 |
춘 향 전 |
현제명, 장일남, 박준상 |
왕 자 호 동 |
현제명, 장일남, 김달성(자명고) |
심 청 전 |
김동진, 박재열(심청가) |
오페라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창작오페라의 수준을 음악적으로 살펴보는 데에서 공연 횟수의 통계자료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한국 창작오페라의 음악적 내용 수준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보다 치밀한 실제 자료의 축적 (악보 및 공연 녹화물)이 요구된다. 또 이를 위해서는 공연관계 자료관이나 연구소의 설립과 활동이 기초되어야 한다. 이 같은 제도적 뒷받침 하에서의 조직적인 연구·분석이 활성화된다면 피드백 과정에 의한 창작오페라의 수준향상을 점칠 수도 있는 일이다.
창작오페라의 공연 횟수가 외국 오페라 작품의 그것에 비해 상대도 안될 만큼 왜소화되어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이유는 20세기 창작음악이 갖는 공통된 숙제 (청중 소외)일 수도 있고, 한국 오페라 작곡가들의 어법적 미숙함(한국어에 맞는 선율의 창안이 아직은 요원한 것)때문일지도 모르며, 서양음악에 젖어 있는 대부분의 한즉 음악 청중의 몰개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 기울어진 저울대를 바로 잡는 일이 음악인의 관심 밖의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의 오페라 공연 실태의 분석 과정을 통해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할 수 있다. 1) 외국오페라 작품에 비해 창작오페라의 공연이 열세에 놓여 있다는 점. 2)외국 오페라 작품 공연에 있어 레퍼토리 개발과 기존 레퍼토리 재해석이 요구된다는 점. 3)외국오페라작품이나 창작 오페라를 보는 시각에서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 등으로 크게 세 가지로 생각된다. 이러한 내용은 글을 전개시켜 오는 중에 누차 언급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 개선을 위해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인가.
우리나라 오페라계의 건전한 풍토 조성을 위해서 문제 개선의 논의는 개념적 측면과실제적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개념적 측면이라 하면 오페라 장르에 대한 부단한 이론적 반성을 거쳐 이 형식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보통사람의 구체적 삶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릇으로 전환되도록 노력해 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총체적 음악문화가 무엇일가를 질문하는 자성적 기반이 모든 실제적인 시도에 앞서 이루어져야 하리라 믿는다. 이론에 의한 정신 무장이 된 후에는 실질적 노력이 요구된다. 여기서는 크게 4가지 문맥에서 검토될 수 있다. 첫째는 음악 구조적 문맥에서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음악작품으로서의 우수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이는 작곡가개인의 기법적 문제이겠고 독창성의 영역에 관련된 것이며 연주자들의 훌륭한 연기력과음악성이 좌우하는 것으로 생각될 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사회제반 여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음악교육, 창작, 연주의 질을 높이는 것이 이 맥락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종합예술의 장르로서 오페라는 음악 외의 다른 분야에서의 질적 발전도 함께 이루어져야한다. 두 번째는 타예술 관련적 문맥에서 개선점을 고려해야한다. 문학, 연극, 무대미술, 의상, 조명 등의 영역에서 철저한 기술 및 예술적 이해가 선결되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총체극으로서의 오페라의 균형있는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다음은 사회학적 문맥에서 오페라의 기획, 운영, 청중과의 관계 등등을 면밀히 조사, 분석하여 공연상의 효율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분야의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고 전문지식의 보급이 절실한 문제로 대두된다. 네 번째는 행정적 문맥에서의 개선책이 마련되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민간 단체에서 체계적으로 이뤄지기 힘든 자료 관리나 이론적인 연구지원은 행정적 차원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뿐 아니라 관영 오페라단과 부대시설을 진정한 오페라 발전을 위한 전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단체와 시설로 활성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개선점들도 하나의 시안에 불과한 것이다. 오페라라는 장르가 동시대인과 보다 진실된 호흡을 같이 할 수 있기 위해서 대개 위와 같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그러나 언제나 거시적으로 음악을 보고, 오페라를 보는 태도가 병존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부언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듯이 음악 사회 안에 사는 것만은 아닐 것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