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臺戱와 處容舞와 儺
서연호 / 제공
조선의 곳곳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민중오락은 그 종류가 적지 않다. 그 형식이나 성질을 조사하여 보면 각 지방에서 유행되고 있는 것이 같지 않다. 그 조직에는 실내 적인 것과 야외 적인 것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발달되지 못한 채 고대 자연적인 시대의 부분적인 생활에서 이루어진 소규모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래를 검토하여 보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외래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토속적이고 본래적인 것이다. 여자의 그네·널뛰기·바둑 등은 전자에 속하고 畿湖지방에서 하는 윷놀이, 남쪽지방에서 하는 소싸움 줄다리기, 서쪽지방에서 하는 씨름 등은 후자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산대희는 일명 山臺都監이라 하여 연극적인 형식을 지닌 대규모의 놀이로서 계급의 상하에 관계없이 애호되고 성행하였다. 이것을 한번 거행할 때에는 준비에 막대한 경비가 요구되었으며 민중이 운집하여 구경하였다. 이 놀이가 유명한 까닭에 연구를 시도한 사람은 많이 있다. 산대희의 조직은 극히 복잡다단하여 구체적인 설명이 곤란하므로 그 일부를 설명해 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먼저 그 유래는 어떤 근거에서 발생된 것인가를 본고에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산대희에 관하여 그 장면이나 내용을 서술한 문헌은 전혀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연구의 단서를 잡기는 몹시 곤란하다. 그러나 그 戱劇에 들어 있는 장식을 보면 많은 가면이 사용된다. 이렇게 보면 高麗史에서 자주 눈에 뜨이는 가면희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가면희의 조직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막연하여 알 수 없으나, 이조시대 궁중에서 성행하던 소규모의 가면희인 處容舞가 그 계통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본래 이조의 문화는 거의 고려제도를 계승하였으며, 그 오락물에 있어서도 창업 초에 鄭道傳이 慣習都監의 장관이 되어 일반 음악이나 오락을 정리할 때 전대의 가면희도 그대로 전래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이조시대의 가면희는 처용무와 산대희 밖에 없다. 이 두 가지는 당대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전대의 것을 이용하여 소규모로는 처용무, 대규모로는 산대희가 된 듯하다. 그러므로 처용무와 산대희는 분리하여 볼 것이 아니라 동일시하여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이 두 가지는 분리시키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칭하여 왔다. 고려 李檣의 牧隱集에는 산대잡극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가 보인다.
山臺結綴似蓬萊 獻果仙人海上來
雜客鼓鉦轟地動 處容衫袖炐風廻
長竿奢漢如平地 瀑化動天似疾雷
欲寫太平眞氣像 老臣簪筆鬼非才
〔산대를 꾸민 것이 봉래산 같고 과일 바치는 선인은 바다에서 온 듯하다. 놀이꾼들이 울리는 북과 징소리는 지축을 흔들고 처용의 소매는 바람 따라 휘돈다. 긴 장대 위의 놀이꾼은 평지인 듯하고 터지는 불꽃소리 천둥같이 울린다. 태평스런 참모습 그리려 하나 늙은 신하 글솜씨 없음을 부끄러워 하노라.〕
이상에서 산대가 보이고 그 내용에 처용무를 설명하고 있어 산대극이 곧 처용무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본래의 두 가지를 산대극에 합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대극의 내용에 처용무가 주장되어 온 것은 사실이 되어 왔다. 이조의 소위 처용무는 물론 呪神的 舞劇으로 祭禮用이었고 오락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관례로는 본래의 제식용만이 아니라 보통 오락에서도 통용된 적이 허다하다. 이것은 樂學軌節의 규정에 처용무를 오직 12월 그믐날 귀신을 쫓는 의식에 공연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嘉禮儀軌에 보면 수년 이래의 궁중 대연에서도 이것을 흥행하는 것이 상례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처용과 산대는 동일한 것임이 분명함과 아울러 처용무에 의하여 산대희의 근거를 찾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처용의 전설은 三國遺事 제2권의 처용랑조에 게재되어 있고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 인용은 생략함, 역자) 신라 憲康王때, 즉 고려가 건설되기 전 50년경에 생긴 전설인데, 그 내용은 신화로 된 것이다. 왕이 개운포에 행차하였다가 환궁하려 할 즈음 갑자기 햇빛이 어두워지고 길을 잃게 되었다. 왕은 크게 놀라 좌우의 신하에게 방도를 물었더니 日官은 용의 조화라 하면서 절을 지을 것을 주상하였다. 왕은 그것을 받아들여 즉시 절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그 명령이 내리자 날씨는 갑자기 쾌청해지고 龍神은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춤과 노래로써 감사를 표시하였다. 당시 용의 한 아들이 왕의 행차를 따라 서울(*경주)에 들어 왔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은 그에게 관직을 주고 미녀로 아내를 삼아 주었다. 그때 疫神이 그 처를 흠모하였는데 처용이 외출한 사이를 틈타 그녀와 정을 통하게 되었다. 처용이 마침 귀가하여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으나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노래를 부르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어 역신은 처용의 관대함에 감동하여 그 이후에는 처용의 모습이 걸린 문 안으로는 들지 않겠노라 맹세하였다. 이 전설에 의해 민간에서는 처용의 화상을 문에 붙여 질병을 막는 부적으로 삼게 되었다 한다. 이 전설이 널리 알려진 고려시대에는 劇詩로 된 일종의 무용극이 연출되어 처용무는 오락제에서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 樂學軌節에 의하면 극의 조직은 儀仗童 10명, 處容假面 5명, 狹舞 4명, 妓生 16명, 樂工 3명, 樂師 2명과 70여명의 배우로 구성되었다 고려시대에 무용극이 성행한 사실은 여러 文集에서 산견된다.
開雲浦詩(稼亮集)
地勝仙遊密 雲開世路通
依給羅代兩仙翁 曾見畵圖中
舞月婆娑白 簪花爛漫紅
欲尋遺迹杳難窮 須喚半帆風
〔지세가 하도 좋아 신선놀음 은근하고 구름 걷히자 환하게 세상길 트이네.
희미하나마 신라의 두 처용 늙은인 일찌기 그림 속에서 만나 보았다.
달밤에 춤추는데 세상 환해 비녀같은 꽃송이 붉게 빛나.
흔적을 찾고자 하나 아득해 찾기 어려워 모름지기 돛에 스치는 바람 부른다.〕
小樂府(益薺集)
新羅昔日處容翁 見設來從碧海中
見齒熟唇歌夜月 鳶肩紫袖舞春風
[그 옛적 신라의 처용 늙은인 바다에서 왔노라 말을 하면서 붉은 입술 하얀 이로 밤달을
노래하고 솔개 어깨 붉은 소매로 춘풍을 춤추었다.〕
處容歌(陶隱集)
夜久新羅曲 停盃共廳之
聲音傳舊譜 氣像想當時
落月城頭近 悲風樹撿柺
無端懷抱忍 功益亦呵爲
〔밤새도록 들려오는 신라의 노래 술잔을 멈추고 함께 듣는다.
성조가 옛 곡조 그대로라서 기상이 당시를 생각케 하네.
지는 해는 성머리에 가깝고 쓸쓸한 바람은 나뭇가지에 운다.
공연히 회포만 사나워지니 부귀공명 더해서 무엇하리오.〕
그런데 이 전설을 기재한 삼국유사는 正史가 아니라 野史이므로 전설의 근원이 분명 신라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고려 초기에 날조된 것인지 의문시 되어 왔다. 그러나 三國史記 新羅本記 헌강왕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三月巡幸國東州郡 有不知所從來四人 詣駕前歌舞 形用可駭 衣巾궤
異 時人謂之山海精靈 註 : 古記謂王郞位元年事
〔삼월에 동쪽의 州郡을 순행하는데,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4명의 사람이 나타나 수레 앞에 나와 노래를 하며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습은 괴이하고 복장도 이상스러웠는데, 사람들이 산과 바다의 精靈이라고 하였다. 註, 古記에는 王郞 즉위 원년의 일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과 대조하여 보면 헌강왕이 동주변 즉 개운포에 순행하였을 때 기묘한 사람들이 가무를 한 적이 있고, 그 때 사람들은 그들을 山海神이라 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이 전설은 전연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 듯하다.
전설의 근거가 신라시대에 생겼다 하더라도 설화 전체가 신라 고유의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극히 애매하다. 왜냐하면 대체로 전설은 언제 생겨든 그 각색은 시대에 따라 다른 이야기에 의해 윤색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산대희의 주요 내용인 처용무의 진면목을 알아 보자면 그 전설 내용의 실상을 검토해할 것이다.
여기서 전설의 내용을 해석해 보면 먼저 지적한 龍神이나 佛寺의 어의적 맥락은 불교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또 여러 책에 보면 소위 羅候와 처용을 혼동하고 있으나 그것 역시 불교설화이다.
樂學軌節의 처용가에는,
新羅聖代昭聖代 羅候德處容아바
以是人生애 常不語하시란듸
라 하였고, 東國歲時記 上元條에는, 男女値羅侯直星者造 靈 方言謂之處容
〔남녀가 나후직성(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 해의 운수를 맡아보는 아홉 直星의 하나, 즉 제웅직성. 9년만에 한 번씩 돌아 오는데, 남자는 10세 여자는 11세에 처음으로 든다)에 들면 靈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 즉 제웅. 제웅직성이 든 사람의 옷을 입히고 그 안에 푼돈을 넣고 성명과 출생년의 干支를 적어 정월 14일에 길가에 버리면 그 해의 액운을 막는다고 한다)을 만든다. 이것을 방언으로 처용이라고 한다.〕
이라 하였다. 여기서 直星이라는 명사는 불교의 宿曜經에는,
丹日月直星 沒犯守逼命胎之宿 此人是厄會之時也 宣修功德 待眞言念誦 道場以槆之
夫七曜日月五星也 基精上曜於天 基神下直於人 所以司善 惡而主理吉凶也
[무릇 日月直星이 운명의 별자리를 침범하면 그 사람의 액운이 드는 때이다. 공덕을 닦고 주문을 念誦하며 道場에서 그 액을 물리쳐야 한다.
七曜星은 해와 달과 5개의 별이다. 그 精은 위로 하늘에서 빛나고 그 神은 아래로 인간에게 미쳐 선악을 맡고 길흉을 다스린다.]
라 하였다. 직성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서 인생의 行年을 天文에 비추어 점성술을 演作한 것은 불교의 숙명론이다. 그러므로 羅侯라고 하는 것은 梵語의 라후(Rahu)의 별로서, 이 별의 성질은 불경에서,
羅侯交會侯神也 (大日經琉 )
[라후는 교회식신이다.]
羅侯計都 此星在隱位不見 逢日月蝕號曰蝕神 (聿斯經)
[라후성과 계도성은 그 위치를 숨겨서 눈에 보이지 않는데 해와 달을 만나면 먹어 버린다.]
고 하였듯이 日蝕神의 별이다.
이상에서 이 별과 처용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 헌강왕 때에 햇빛이 암흑으로 변한 것을 龍이 한 소행이라 하고, 그 용을 처용이라 한 것을 함께 고려한다면 당시의 사건은 日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처용전설의 내용을 당시의 일식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미신적인 전설이었고, 그러한 전설이 佛說에 의해 윤색되어 일종의 문학으로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렇듯 전설의 일부는 불설화되고, 또 일부에서는 전술한 대로 처용과 역신의 관계로 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불교와 관계가 없으며 다른 방면의 이야기를 혼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에는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만사를 신에게 위탁하거나 摩力에 짓눌려 전률하는 정신적 표현이 많다. 동양의 고대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신을 숭상하는 사상이 강하고 그로 인해 占術, 巫祝 등이 발달하였다. 근대의 학자들은 이것을 샤만(Shaman)이라고 하고 있다. 전염병 등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악신의 소행으로 보고 선신을 시켜서 악신을 쫓게 하는데 이러한 의식을 儺라고 한다. 周 이전, 일찌기 발생하여 세상에 성행하였으며 孔子도 鄕人들이 儺를 행할 때에는 계단 아래 서서 祖神의 警動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행하는 방법은 後漢書志의 第五의 先獵條에 상술되어 있다.
先獵一日 大儺 謂之遂疫. 其儀 選中黃文子弟年十歲以上
十二以下 百二十人爲辰子. 皆赤瓔旱製 執大鼓. 方相氏
黃金四目 蒙態皮 玄衣朱裳 執戈揚盾. 十二獸犬有衣毛
角. 中黃門行之 穴從僕射將之 以遂惡鬼干禁中 夜漏上
水 朝臣會特中 尙書 御史 曷者 虎賁 羽林郞將 執事 皆赤
瓔階衛 秉輿御前殿 黃門令奏曰 「璞子備 請遂疫」 於是
中黃門倡長 子和 曰 ‥‥‥(中略)‥‥‥因作方相與十二獸
舞. 權磣 周備前後省三過 特呓火 送疫出瑞門 (下略)
獵日 하루전에 大儺禮를 행하는데, 이를 역귀 쫓는다고 한다. 그 의식은 다음과 같다. 中黃門의 자제 중에서 11세 이상 12세 이하의 아이들 120명을 선발하여 玠子 하는데 모두 붉은 두건으로 머리를 싸매서 노비처럼 꾸미고 大鼓를 가진다. 方相氏는 황금색으로 눈 4개를 만들고 곰가죽을 뒤집어 쓰고 검은 저고리와 붉은 바지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들며, 12 짐승의 모양을 꾸며 中黃門을 돌아다니고 穴從僕射가 그들을 거느리고 궁중의 악귀를 쫓는다. 시각이 上水에 이르면 朝臣들이 모여서 시중·상서·어사·알자·호분·우림랑장집사가 모두 붉은 두건을 쓰고 호위를 하여 가마를 타고 전각에 이르면 黃門今이 "玠子가 갖추어졌으니 역귀 쫓기를 청합니다"라고 주청을 하고, 황문령이 선창을 하고 진자가 화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中略) 그리고 방상씨와 12짐승이 춤을 추며 환호하고 前後省을 세번씩 지나며 횃불을 들고 역귀를 瑞門으로 내보낸다.]
의식을 요약해서 말하면 1백 20명의 아동이 小鼓를 들고, 한 사람의 方相氏는 황금 四目의 가면을 쓰고 검은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고 창과 방패를 든다, 12마리 짐승의 가장물을 만들어, 이로써 하나의 단체를 조직한다. 이 한 패가 섣달 그믐날밤에 궁안에 모여서 방상씨는 疫神을 쫓아내는 동작을 하고 별도로 12명의 아동들은 12惡神을 食殺하는 주문을 낭송한다. 그리고나서 북을 치면서 문 밖의 물 가운데로 가서 역신을 빠뜨려 죽이는 형용을 한다. 마지막에는 桃梗·鬱幘·위교 등을 베푼다. 울뇌는 神人으로서 凶鬼를 축출하는 직무를 띠고 있는데 黃帝때부터 그 화상을 문 위에 붙이게 되었고 나례의 끝에는 이것도 겸하여 행한다.
日本에서는 이 儺를 시작한 것이 慶雲 2년 (*A.D 705)이었고 후세에 이르러 연중 행사가 되었다. 그 방식은 掌中曆上의 歲時條, 內囊式中의 十二月大儺式條, 西官記 十二月條 등에 기재되어 있는데 黃書에 있는 방법과 같다.
周나라의 나례와 처용무를 대조해 보면 틀림없이 같다고 판단된다. 즉 儺에서 역신을 축출하고 울뇌를 문 위에 걸어 흉악한 귀신을 쫓아버리는 것은 처용이 가면을 쓰거나 처용의 상을 문 위에 걸어 역신을 쫓는 것 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처용 전설의 일부는 나례에서 윤색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고려시대의 나례 의식에서는 주로 처용무를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李檣의 牧隱集에 실린 驅儺行詩에서 알 수 있다. (원문 인용은 생략함, 역자)
시의 내용을 보아도 儺와 처용의식의 내용미 동일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三國史記 중에는 儺戱가 중국에서 유입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처용무와 나례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할 사람이 있겠으나 그 해답은 同書 樂志 중 崔致遠의 五時의 하나인 大面時에서 찾을 수 있다.
黃金面色是基人 手抱珠儺役鬼神
疫步徐橘呈雅舞 寃如丹鳳舞卉春
[황금 가면을 쓴 바로 그 사람 방울 채를 들고서 귀신을 쫓네.
빠르게 느리게 한바탕 춤을 추니 너울너울 봉황새가 날아드는 듯]
여기서의 大面은 곧 가면이고 黃金面色이라 함은 나례의 黃金四目의 가면과 같은 것이다. 또한 手抱珠儺役 疫鬼神의 귀절은 역신을 쫓는 형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삼국시대에 일찌기 나례가 행하여졌음이 판명된다.
儺戱가 처용무가 되고 처용무가 산대가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산대희는 나희였던 처용무가 주축인 동시에 그 발생은 멀리 삼국시대의 日蝕사건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결론이다.
이상에서 서술한대로 산대희는 단순한 것이 아니고 매우 복잡한 것인데, 전적으로 나희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 중에서는 여러 가지 잡극이 들어 있어 소위 百戱라고 할 수 있는데, ?나라 때에 성행하였으며 신라에 유입되었다. 즉 백희는 주로 나례에서 행하여졌으나 후일 백희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다만 나례로 칭하거나 일명 산대희라 일컬어 왔다.
虛白堂集 驅儺行時에도,
秘殿春光泛彩 棚朱衣嚘亂縱橫
丸眞以宣僚巧 步索還同 燕輕
小室四旁鬼儡 長即百尺舞壹坒
[그윽한 전각에는 봄빛이 울타리에 화사한데 알록달록 옷을 입고 어지럽게 춤을 춘다.
구슬놀리는 솜씨는 친구처럼 교묘하고 걸음을 나란히 돌아오니 제비처럼 가볍다.
방산의 사방에는 허수아비를 감추고 백척장신이 술잔앞에서 춤을 추네.]
이라 하여 나희에서도 여러 가지 잡극(소위 百戱)을 해 왔음을 알수 있다. 즉 산대희는 變體的인 儺戱를 주로 하는 百戱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所載 : 朝鮮(201號), 朝鮮總督府, 1932. 3 89 ∼ 97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