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찬과 음악감상실 르네쌍스
이광복 / 작가, 르뽀라이터
한국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고전음감상실 르네쌍스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기증되었다. 르네쌍스의 설립자 박용찬씨는 아무런 조건없이 르데쌍스에 소장되어 있는 음반 일체와 기재는 물론 자신이 수집 애장하고 있는 음악관계 전문서적 희귀본 수백 권을 문예진흥원에 기꺼이 기증하였다. 내 소유, 내 재산이라면 터럭 하나라도 생명처럼 여기는 이 각박한 현실의 마당 위에서 박용찬씨는 평생토록 모아온 '삶의 궤적과 그 편린'들을 모조리 사회에 내놓은 것이다. 더구나 6.25전란의 와중에서 문을 연 르네쌍스는 이 나라 음악의 요람으로서, 또 문화예술이 항상 살아 숨쉬는 본거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온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전란 중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서 전화(戰禍)에 상처받은 지식인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환도 후에는 음악 애호가와 지성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꿈과 낭만의 르네쌍스…. 또한 뿌리 깊은 연륜을 쌓으며 음악의 전당으로서 숱한 애환을 간직한 르네쌍스는 이제 개인의 소유에서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으로 존속케 되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기꺼이 내놓은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점점 인정이 고갈되어 가는 작금의 현실에서 자신의 전부를 송두리째 바친 박용찬씨의 일대와 르네쌍스의 전부를 적는다.
■ 호남갑부의 막내아들로 출생
이제 점차로 르네쌍스의 내력과 전모가 드러나겠지만, 이 고전음악 감상실의 설립자 박용찬은 1916년 11월 29일(음력 10월 17일) 전북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이미 일제에 의한 국권강탈이 있었으므로 그가 태어날 때 이 나라 이 강토는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일제에 의한 민족말살 음모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거족적 항일운동인 3.1만세 시위가 서서히 내연하던 시절, 그는 첫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난 것이다.
비록 일제하이긴 했으나 그의 가정은 유복했다. 일찌기 부친 박순직(朴辯直) 공은 중추원 (中權院) 의관(讓官)을 지낸 분으로 고향에서 1만적을 거둬들인 대지주였고 모친은 인자하기 이를 데 없는 오운엽(吳雲燁)씨 였다. 박용찬은 박공과 오씨 사이에서 여섯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던 것이다. 위로 나란히 형님 세 분이 있었고, 그 아래로 누님 두 분이 있었으며, 박용찬은 귀염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나 온갖 호강을 하며 성장했다.
후일 박용찬이 레코드를 수집할 때 결정적으로 뒷받침을 해준 장본인이기도 했지만, 박용찬에게 쏟아 부은 모친의 사랑은 실로 극진하였다. 모친은 귀염둥이 막내 아들을 위하여 아끼는 것이 없었다. 오죽하면 모친은 박용찬에게 돌솥밥만을 먹였다. 통상 대지주들은 가마솥에 박을 지어 여러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모친은 이 막내 아들을 위하여 특별히 돌솥에 밥을 지었다.
남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만큼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라난 소년·박용찬은 향리에서 임실 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부호의 자제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던 박용찬에게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보통학교 6학년이었던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 그해, 소년 박용찬은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바이얼리니스트 계정식(桂貞植)씨의 연주회를 관람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바이얼린 선율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박용찬 소년은 자신도 장차 훌륭한 바이얼리니스트가 될 것을 결심한 것이었다. 연주회를 보고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힌 박용찬은, 그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바이얼리니트가 되느냐 하는 것이 그날 밤 박용찬이 체험한 고민의 전부였다. 당시로 보았을 때 박용찬에게는 별로 아쉬울 것도, 또한 두려을 것도 없었지만 부모님의 뜻을 잘 아는지라 나름대로 깊은 번민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용찬은 그 이튿날 학비로 받은 2원 50전을 털어 바이얼린을 사고야 말았다. 부모님, 특히 부친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박용찬은 바이얼리니스트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독단으로 바이얼린을 구입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년 박용찬은 부친으로부터 호된 노여움을 샀다. 이른바 양반이며 대지주로서 완고하기만 했던 그의 부친은 이 막내 아들의 '해괴한 장난'에 대번 노발대발하는 것이었다. 부친의 말씀인 즉, 바이얼린이나 켜는 일은 양반의 자제가 할 일이 아니요. 그 따위 '깡깽이'는 딴따라 패거리들이나 주물러야 한다는 호령이었다.
결국 박용찬의 바이얼린 구입은 부친에게 큰 실망을 안겨드리는 꼴이 되었다. 이미 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경, 보성 고등보통학교에 다니고 있던 박용찬은 이로써 새로운 고민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바이얼린 연주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부친이 워낙 완강하게 만류하게 되자 그는 참으로 진퇴양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박용찬은 고집을 꺽지 않았고, 어느 일본인 음악가를 찾아다니며 바이얼린 연주를 사사받게 되었다. 그러자 부친은 박용찬의 큰형님과 합세해 이를 집어치우도록 설득하였고,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자 학비 송금을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렸다. 그 따위 '깡깽이'나 들고 다니는 녀석에게는 더 이상 공부를 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부친과를 형님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는 부친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박용찬은 이래저래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또 다른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 일본 땅으로 도망가다
열네 살 때 부친을 여윈 박용찬은 자신의 몫으로 당당 5백석지기의 땅을 물려 받았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였으므로 재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바이얼린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궁리했다. 하지만 뾰족한 묘방이 나오지 않았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 큰 형님의 호령은 추상같기만 하였다. 인자하기 짝이 없던 모친은 그래도 이 막내아들의 뜻을 다소나마 이해하는 편이었지만 큰 형님한테는 자신의 뜻이 통할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박용찬은 일본으로 건너갈 뜻을 굳혔고 열여섯 되던 해 모친이 가지고 있던 1백원을 훔쳐 일본으로 떠났다. 부산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임실경찰서에 들러 간단한 출국 절차를 마쳤는데, 워낙 세도가 당당하던 부호 가문의 자제였으므로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하였다. 그는 그 길로 부산으로 내려가 연락선에 몸을 실었고 난생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지금은 1백원이 우스운 액수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에 있어서의 1백원이란 여간한 사람이 구경할 수도 없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박용찬은 거금 1백원으로 배삯을 내고, 현지에 도착해서는 바이얼린도 샀다. 그리고 나서 몇 달을 버티자 그 돈은 물거품처럼 녹아버렸고 낮선 땅에서 영낙없는 거렁뱅이가 되었다.
그때부터 박용찬의 앞길에는 고생문이 열리게 되었다. 유년시절 이후 남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호의호식하고 지내온 그에게는 삶의 쓰라림이 찾아들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몸이 건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용기가 넘쳐난다 해도 몸이 부실하면 배겨낼 재간이 없었겠지만, 그는 건강한 육신을 밑천삼아 신문배달도 하고 구두닦기 노룻도 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복싱에 입문, 샌드백을 난타하며 울분을 달랬다. 그러면서 나고야에 있는 5년제 상업에 입학하여 학업에의 길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박용찬은 졸업도 못한채 교오또로 떠나 양양(兩賜)중학 4학년에 편입하였다. 열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해에는 박용찬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획기적인 일이 있었다. 열여섯 살 때부터 다듬은 주먹으로 중부일본 권투선수권대회에 출전, 라이트급 왕좌에 오른 일이었다. 한다 하는 일본의 강자들을 차례로 누이고 라이트급을 석권하게 되자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었으므로 박용찬으로서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박용찬의 도일을 전후해 고향에서는 큰 형님과 둘째 형님 사이에 조그만 언쟁이 있었다. 큰 형님은 절대로 학비를 보내줄 수 없다는 것이고, 작은 형님은 아우의 사정을 이해한 나머지 학비만은 보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두 형님들 사이에서는 심심찮게 마찰이 일어나곤 했는데 중부일본 권투선수권대회 라이트 석권한 박용찬의 이름이 신문에 나오자 큰 형님도 많이 누그러지게 되었다. 아우 박용찬이 일본에서 거렁뱅이로 전락한 줄 알았던 큰 형님은 그때부터 그의 잠재력이라고나 할까 가능성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박용찬의 일본 생활은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고향으로부터 학비가 송금돼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용찬은 고향에서 송금돼 오는 돈을 학비로 충당하기 보다는 레코드 수집에 더 많이 털어부었다. 최초의 생각대로라면 마땅히 바이얼린 공부에 열을 올려야 했겠지만, 그는 어느 사이엔가 전혀 다른 인생이 되어 있었다.
이미 권투로 단련된 거친 음으로는 바이얼린을 다룰 수가 없었다. 굳은 살이 단단하게 박혀 있는 손으로는 바이얼린을 켤 수 없다고 단정한 박용찬은 본격적으로 레코드 수집에 몰입하고 있었다.
■ 음반을 제2의 생명으로
그러나 박용찬이 그때부터 레코드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이전인 보성고보 재학시절에 이미 축음기를 장만한 바 있었다. 그는 부친에게 바이얼린을 빼앗긴 이후 시골에서 보내주는 학비로 축음기를 샀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만한 부자도 갖기 어려웠던 측음기를 학생 신분으로 장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워낙 거부의 아들이었으므로 이에도 선뜻 축음기를 살 수가 있었다.
박용찬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보성고보에 다니던 시절 충무로에 악기점 두 곳이 있었고 그곳에서 음반도 취급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행가가 성행하고 있었을 뿐 고전음악에 대한 인식을 일반화되지 못한 사정이었다.
박용찬은 그러나 계정식의 바이얼린 연주회를 보고 음악에 심취한 터라 일찍부터 전통 음악에 눈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도 유행가보다 명곡이나 기악곡, 특히 바이얼린곡에 빠져 있었다.
고국에 있을 때부터 일찌기 레코드에 도취했던 박용찬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더 많은 음반과 접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일본 국민들 사이에는 음악애호가들이 많았고 그들은 유행가가 아닌 고전음악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애당초 음악적인 소양과 자질을 타고난 박용찬은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마음껏 고전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고향으로부터 학비가 송금되어 오자 그는 내키는대로 고전음악 레코드를 사 모았다. 학생의 학비가 20원이나 30원할 때 그는 레코드 구입을 위해 50원이나 1백원도 기꺼이 지불하였다.
유년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탓으로 돈에 대해서는 별로 애착이 없었다. 웬만한 학생들은 학비를 아끼고, 쪼개고, 절약에 절약을 거듭하는 세상이었지만 박용찬에게는 거칠것이 없었다.
돈은 쓰기 위해서 있는 것,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언제나 음반을 사모았다. 그는 교복을 입어도 세비로가 아니면 입지를 않았다. 세비로 교복에 머리칼은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학교에 다녔으니 청년시절의 그가 얼마나 멋장이였는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악이나 들으며 멋진 춤을 추고, 아름다운 처녀들과 연애를 즐기는 꿀맛 같은 세월이 남의 나라 일본에서 흘러갔다. 고향에서 돈이 송금되어 와도 언제나 모자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그의 귀족적 취미랄까 생활방식은 저절로 돈의 씀씀이를 크게 하였다. 그래서는 넉넉한 학비가 도착해도 집으로 전보치기에 바빴다. 돈이 모자라 야단났으니 더 보내 달라는 긴급 전문은 그의 고향집으로 빗발같이 날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박용찬의 모친은 거금을 꾸려 일본에 있는 막내아들에게로 송금해 주었다. 이처럼 박용찬이 레코드에 심취해 온갖 고전음악음반을 수집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모친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따랐다.
그리고 박용찬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하는 동반자가 있었다. 지금은 벌써 유명을 달리했지만, 일본에서 함께 생활한 부인이 바로 그 인물이었다.
■ 레코드에 빠진 감동의 순애보
젊은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던 박용찬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멋장이로 이름은 날렸다. 교복을 입어도 세비로가 아니면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레코드를 듣고 춤이나 추러 다녔다는 사실이 그것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하겠다.
때문에 그는 일본 유학시절 탱고왕으로 통했고 화려한 연애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주변엔 항상 아름다운 미녀가 있었고, 개중에는 일본 귀족의 딸도 끼여 있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재벌 2세 만큼이나 화려한 생활을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박용찬은 명치(明治) 대학정경학부 재학중이던 1938년에 일시 귀국, 양가 친지들을 모신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부호의 막내아들 결혼식이었므로 박용찬 부부의 탄생은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신부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관춘리 옥매는 밑에 살던 대지주 정영철 (鄭永徵) 공의 맏딸 정순례 (鄭漏讓)씨 거둬 들이던 대지주였고, 신부는 박용찬보다 한 살 연하의 재원이었다. 신부는 당시 이화전문 가사과를 나온 신여성으로 어디 내놓아도 모자람이 없는 미모의 지성인이었이다.
박용찬은 그녀를 만나 조선호텔에서 약혼식을 올렸고, 당시 예장동에 있떤 서울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부호 사이에 맺어지는 혼사였던만큼 약혼식과 결혼식은 성대하기만 하였다. 초례청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던 당시의 일반적 관행이랄까 풍습을 연상해 본다면 박용찬·정순례 부부의 탄생은 확실히 전위적(?)이라 할 수 있었다.
박·정 부부는 결혼식을 올린 직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하여 박용찬은 학업을 계속하였고 부인은 뒷바라지에 온통 심혈을 기울였다.
부인은 특히 요리전문학원에 다녀 좋은 음식을 만들어 남편의 건강을 도와 주었다. 본래 가사과를 나온 데다가 요리학원까지 나왔으므로 부인은 주부로서 만점이었다. 이를테면 부군을 하늘처럼 받들어 섬기는, 전통시대에 있어서의 현모양처의 귀감이었다.
더구나 박용찬에게는 이미 병환의 조짐이 나타고 있었다. 일본에 건너간 직후 돈이 떨어져 고생을 한데다 권투를 하느라 매 아닌 매를 많이 맞았으므로 그의 몸은 거의 만신창의가 되어 있었다.
그럴즈음, 박용찬에게는 부인이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부인은 오로지 박용찬을 위해 있는 힘을 다했고, 더구나 음반 수집에 있어서도 훌륭한 내조자가 되어 주었다.
고향 본가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아 쓰면서도 박용찬은 경제적으로 노상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생활비라든가 학비는 제쳐 놓고 우선 레코드 구입에 너무 많은 돈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부인은 부군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아니, 군말은 커녕 도리어 음반 구입에 늘 목말라 하는 남편을 도와주지 못해 절치부심하는 것이었다.
박용찬은 본가에서 부쳐오는 돈도 모자라 부인과 처가에도 많은 신세를 졌다. 그는 부인을 시켜 처가에 송금 요청을 한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그쪽에서도 거절하지 않고 거금을 챙겨 보내 주었다.
이와 같이 박용찬은 완전히 레코드에 탐닉해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결혼까지 한 몸으로 본가나 처가에 손을 내밀 수가 없었겠지만 워낙 레코드에 미치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돈으로 박용찬은 기악곡과 성악곡을 가릴 필요도 없이 레코드를 수집해 음악을 들었다. 바하와 모짜르트와 헨델과 멘델스죤은 물론 세계 음악사에 획을 그은 음악가들의 작품을 거의 빼놓지 알고 들었다.
그리하여 대학을 마치고 1940년 부인과 함께 향리인 임실로 돌아올 때에는 빅타전축 48형 2대 이외에도 한장 한장 사모은 레코드가 8천여매를 헤아렸다. 당시 빅타48형 전축의 한 대 값은 무려 5백원을 헤아렸으니 그가 레코드에 쏟아 넣은 돈은 이루 헤아리기 힘든 액수였다.
■ 부인의 극진한 내조
그러나 박용찬은 성한 몸이 아니었다. 그는 패결핵과 늑막염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었다. 오늘날에는 폐결핵이나 늑막염 따위를 가볍게 보아 넘기지만 1940년대에는 참으로 무서운 병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의학이 발달해 있지도 못했고, 명의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일제 말기여서 각종 의약품이 이만저만 귀하지 않았다.
박용찬은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년에서 공기 맑은 산속으로 들어가 요양생활을 하였다. 이때에도 부인은 그의 병상을 지키며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극진히 간호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부인 정씨는 가사과와 요리학원을 나왔으므로 식이요법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병마 퇴치에 좋다는 음식이면 어떤 것이라도 구해왔다. 항상 좋은 음식이 머리맡에서 떠나지 안을 만큼 정씨는 박용찬을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다가 부군의 병세가 다소라도 악화될 조짐을 보이면 부인 정씨는 산속에서 시오리길을걸어나가 기차를 타고 전주 도립병원장을 모시고 왔다. 임실에서 전주까지는 장장 70리길이었지만, 부인은 한마디 불평이나 불만도 없이 뻔질나게 내왕하였다.
그런가하면 부인은 직접 박용찬의 대소변을 받아내기도 하는 등 그 갸륵한 정성은 눈물겹기만 하였다. 그러나 박용찬의 병세는 쉽게 호전되지 않았으므로 임실과 처가가 있는 해남을 오가며 요양을 계속하였다. 특히 처가가 있는 옥매산 아래 관춘리는 공기 맑고 풍광이 수려해서 결핵 환자가 요양하기로 안성맞춤인 고장이었다.
박용찬은 병세가 호전될 무죌 옥매산 밑으로 오양처를 옳기면서 아예 민적까지 그곳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일제에 의한 징병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기 하였다.
박용찬은 그곳에서도 오래도록 투병을 하였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명의 조헌영 (趨憲泳)씨를 자택으로 초빙, 후한 접대를 하며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참고로 밝히자면 조헌영씨는 저 유명한 조지훈 (趙芝薰) 시인의 부친으로 제헌국회에 이어 제 2대 국회의원으로 활약하다가 6 ·25때 납북되었다.
어쨌든 박용찬은 긴 세월을 병마와 싸우며 지내야 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권투를 할 때 얻은 일종의 후유증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은 쉽게 낫지 않았으므로 부인의 고통이 컸다. 물론 모친의 병구완도 극진했는데, 박용찬의 병이 워낙 중병이어서 투병 기간도 그만큼 길 수밖에 없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줄곧 2년여를 헤맨 끝에 그는 겨우 소생의 기미를 보였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모천과 부인의 정성어린 간병이 없었던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암울한 세월이 흩러갔던 것이다.
병세가 호전되자 박용찬은 1943년 부인과 함께 서울 삼선교로 옳겨와 살았다. 삼선교는 그가 보성고에 다닐 때 하숙을 했던 곳이어서 전혀 낮설지 않았다. 동네에는 드문드문 초가집이 있었고 우마차가 짐을 실이 나르던 시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혜화동까지 나오려면 밋밋한 고개를 넘어야 했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한편 박용찬은 서울로 솔가를 하면서도 레코드만은 모조리 운반하였다. 당시에는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았고 교통수단도 형편없었지만 레코드는 이미 그의 분신처럼되어 있었다. 아편 중독자가 아편을 떼어놓고 살 수 없듯이 그는 이미 레코드를 뗄래야 뗄 수 없을만큼 음악속에 깊이 함몰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박용찬은 서울 상공에 나타난 B29를 목도하였다. B29가 비행운을 남기며 선회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이상한 조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상공에 B29가 나타났다는 것을 연합군과 일제의 일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박용찬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다시 살림살이를 정리하였고, 부인과 함께 임실로 내려갔다. 연합군이 일제를 무찌르기 위해 서울을 폭격한다면 무슨 참화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이때에도 그는 레코드를 모두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한번 짐을 옳길 때마다 파손이 많았다.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본래 SP판은 약하기 때문에 아무리 소중하게 다루어도 파손되는 것을 막기 어려웠고, 특히 도로 사정이나 차량의 쿠견이 안 좋았던 시대였으므로 파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박용찬이 임실로 돌아간 직후 급기야 일제가 패망하였고, 이 땅에는 마침내 광명의 새 날이 밝아왔다. 그러나 광복 직후 박용찬 개인에게는 쓰라린 불행이 닥쳐왔다. 부인과의 사별이 그것이었다.
■ 피난지에서 르네쌍스 설립
1945년, 그렇게나 사랑했던 부인을 잃은 박용찬은 그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도 고마웠던 부인은 차라리 생명의 은인이었다.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박용찬을 살려 놓은 부인 정씨는 부군 대신 먼저 세상을 떠난 셈이었다.
박용찬은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병 들어 신음할 때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므로 더욱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슬퍼할 수 만은 없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갔다. 물론 이때에도 자신의 분신인 레코드를 서울로 가지고 왔다. 비록 부인을 잃은 몸이긴 하지만 레코드 없이는 도저히 살 수 가 없었다. 아니, 부인을 잃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레코드가 더 소중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1950년, 이 땅에는 또 한차례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미처 조국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6·25전란이 발발한 것이었다.
전세는 불과 며칠만에 급격히 악화되었다. 별안간 수도 서울이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국군이 후퇴를 거듭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박용찬은 레코드 때문에 엉뚱한 수난을 당해야만 되었다.
레코드의 쟈켓에는 영문이 많이 들어 공산군으로부터 이른바 '미제의 앞잡이' 로 몰릴 소지가 다분했던 까닭이었다. 박용찬은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영문이 많이 박힌 레코드를 스스로 없애버리는 아픔을 맛보아야했다. 레코드를 부숴 없앨 때의 아픔은 차라리 자신의 팔을 잘라내는 아픔과도 견줄만한 것이었다.
그랬건만 박용찬은 레코드 때문에 봉변도 여러 차례 당했다. 무식한 공산당원들이 집에 쌓아둔 레코드를 보고 친미파로 몰아세우는 바람에 모진 심문을 당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총알 속을 피해 다니며 레코드 수집을 멈추지 않았다. 포연을 헤치고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을 헤치며 레코드를 찾아다닐 때 그는 꼭 약병을 들고 다녔다. 만일 불행한 사태가 닥치면 병자로 가장하기 위한 일종의 계략이었다.
비록 전란중이기는 했으나 서울시내 곳곳에는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레코드가 심심찮게 퍼져 있었다. 특히 레코드가 많이 나와 있는 곳은 시장이었는데, 박용찬은 약병을 손에 들고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영등포시장, 신촌시장을 갖고 다녔다.
도처에 공산군이 깔려 있을 때 그는 오로지 레코드 수집을 위하여 엄청난 모험을 감행한 셈이었다. 수집광 치고도 상식을 초월한 수집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충무로 벌판의 한 노점에서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12권 가운데 제6집을 발견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2권 중 다른 것은 모두 구해 놓고 있었으나 제 6집을 구하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터에 그것을 발견한 것은 엄청난 수확이 이었다.
욕심은 나지만 그러나 수중에는 돈이고 없었다. 그렇다고 벌판에서 만난 초면의 노점상에게외상으로 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날 같으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레코드 구입에 필요한 만큼 돈을 가져 오도록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전란중인데다 전화마저 없어 그럴 처지도 못되었다.
더구나 노점상이 자리잡고 있는 충무로 부근의 허허로운 벌판이었다. 박용찬은 그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제6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봐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당장 삼선교까지 갔다. 오면 돈을 마련할 수도 있었으나 그 사이 다른 사람이 레코드를 사가면 낭패가 아니겠는가. 그는 영하 15도의 혹한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그 레코드를 지켰다. 오후 3시에서부터 10까지 장장 7시간을 지키고 서 있자 노점상도 귀가를 서둘렀는데, 다행히도 그때까지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제 6집은 팔려 나가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서야 안심하고 돌아선 박용찬은 그 이튿날 새벽같이 달려가 기어이 그 레코드를 사고 말았다. 이렇듯 레코드에 쏟은 그의 집념은 대단하였다.
이와 같이 초인적인 집념으로 레코드를 한 장 한 장 수집한 박용찬은 1951년 1·4후퇴가 시작되자 서울을 떠나 대구를 향했다. 이미 공산치하에서 쓴맛을 본 박용찬은 피난민의 행렬에 뒤섞여 피난을 서둘렀는데, 이때에도 레로드만큼은 제 2의 생명으로 여겼다. 다른 살림살이는 모두 팽개쳐 둔 채 레코드만을 트럭 두 대에 나눠 싣고 피난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구에 도착, 대구역 앞 행촌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쌍스를 설립하였다.
■ 전란 중에도 음악은 살아 있다.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얘기지만 피난살이라는 건 마음의 불안과 시국에 대한 공포와 살림에 대한 시달림으로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버린 맥빠진 생활 그것이었다. 그때에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해서 나는 나의 레코드를 고달픈 이웃들 앞에 공개하기로 했다. 피난살림에 지치고 시달리는 그런 생활의 주인공들끼리 모여 위안을 찾는다는 것 또한 결코 무위 (無爲)한 일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음악실 르네쌍스의 탄생이었다.
이 글은 훗날 박용찬이 술회한 한대목을 옳겨 적은 것이지만, 전란의 와중에서 일반 다방도 아닌 음악감상실을 연 것은 불가해한 일이었다. 더우기 박용찬이 레코드에 탐닉한 것은 이와 같은 음악감상실 창립을 염두에 두고 한일이 아니었다. 분명하고도 확실한 사실은, 레코드 수집이야말로 '그저 좋아서' 한 일일뿐 누구의 상찬(常證)이나 칭송을 듣기 위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더구나 음악 감상실을 열기 위하여 레코드를 수집한 것도 아니었건만, 르네쌍스의 설립을 계기로 그의 일생을 완전히 행방을 결정짓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레코드 수집은 허영도 사치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꿈꾸던 바이얼린 공부가 좌절되자, 음악에 대한 열과 향수가 레코드 수집으로 흘렀을 뿐이었다. 오로지 듣고 싶어서 레코드를 샀고, 다만 그 수단만이 그의 실망과 좌절감을 달래주는 유일한 방도였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 사이엔가 레코드 수집의 포로가 되어 있었고 명치대 정경학부 재학중에는 강의가 어떻게 시작했고, 또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를 만큼 마음을 쓸 여유가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그 무렵에는 자신의 앞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바가 없었고 오로지 레코드에만 집착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쌍스의 개업은 그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고, 때마침 전란중이었으므로 어떻게 보면 황당무계한 일면까지 지니고 있었다. 지금에와서 돌이켜봐도 전란중에 음악감싱실을 연다는 것은 잘 이해가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용찬이 르네쌍스를 열게 된 배경에는 시인 전봉건(全鳳建)씨와 만남이 중요한 대목으로 작용하였다. 6·25전란중 '음악'이라는 시를 발표했던 전봉건씨는 1951년 이른 봄 중동부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대구에 내려와 있었다.
마산에서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전씨는 당시 어느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돼 있을 가족들을 찾아 대구의 낯선거리를 방황하다가 사변 전 서울에서부터 다소 안면이있던 박용찬과 해후했다. 전봉건씨는 실로 딱한 처지에 있었다. 부상을 입고 퇴역한 그에게는 가족을 찾는 일도 시급했지만, 우선 의식주를 해결하는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을 알에 된 박용찬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달포 가량 숙식을 제공하였다. 이때 전봉건씨는 박용찬의 레코드를 정리해 주며 다방이라도 처려 호구지책을 삼자고 제의하였다
생계를 잇기가 어렵던 시대였으므로 그러한 제의는 설득력이 있었다. 박용찬은 셋방에 쌓아두었던 레코드를 행촌동으로 운반, 실의와 좌절에 휩싸인 대중에게 감료수와도 같은 음악을 들려주기에 이르렀다.
플레이어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전봉건씨가 맡았다. 문을 열고 첫 테이프를 끊은 곡은 바하의 마태수난곡이었다. 당시 전씨는 바로 이 곡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판자집에서 좌석 32개를 놓고 문을 열었지만, 르네쌍스에는 항상 음악의 물결이 그들먹하게 넘쳐 흘렀다. 이로써 이 나라의 음악문화와 다방문화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전선에서는 폭격기의 광음과 포성이 난무하고 있었으나 르레쌍스에서는 언제나 음악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자칫 인간의 감정이 황폐화되기 쉬운 전란속에서 이같은 음악감상실이 문을 열었다는 것은 가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 그것은 곧 전란중이라 할지라도 이 나라의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비록 허름한 음악감상실이었지만 르네쌍스에서 터져나오는 베토벤, 바하, 모짜르트를 비롯하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당시로서는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듣기도 어려웠던 곡들이 많았다.
■ 실의에 찬 지성인들의 안식처
르네쌍스가 문을 열자 전쟁의 북새통에 지친 당대의 기라성 같은 시인 묵객들과 음악애호가들이 이곳을 찾았다. 당시 르네쌍스의 터주대감으로는 대구출신의 시인 박훈산(朴薰山), 신동집(申瞳集)씨를 비롯해 장만영(張萬營), 김요섭(金耀燮), 전봉래(全鳳來), 신동엽(申東燁), 박영준(朴榮濬), 김동리(金東里), 김종문(金宗文), 김종삼(金宗三), 홍성유(洪注格)씨 등의 문인과 나운영(羅運榮), 김만복(金萬福), 임원식(林元植), 오현명(吳鉉明), 김생려(金生麗), 김희조(金熙祚)씨 등의 음악인들이 있었다. 또 화가들도 르네쌍스를 자주 찾아 김환기(金煥基), 윤중식(尹仲植), 권옥연(權玉淵)씨와 건축가 김중업(金重業)씨 등이 이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연극배우 장민호(張民浩)씨, 영화인 신상옥(申相玉) , 최은희(崔恩姬), 김희갑(金照甲)씨도 단골손님었다.
그밖에도 르네쌍스의 단골손님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시인 양명문씨는 여류극작가 김자림씨와 열애에 빠져 있었고, 음악인 나운영씨는 멀리 부산에서부터 도시락을 싸들고 매 일 개근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화가 변종하(卞鐘夏)씨는 직접 르네쌍스의 포스터를 그려 주었으며, 이문희 (李文熙)씨를 비롯한 맞은 작가들은 아예 원고지를 싸들고 들어와 이곳을 집필실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르네쌍스가 전란중 지성인들의 안직처로 사랑을 받게 되자 일본 산업경제신문은 르네쌍스를 특별 취재하여 '전화(戰禍)의 한국에 음악은 살아있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그것은 전란의 와중에서 음악을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문화의식을 높이 평가한 외국인의 찬사인 동시에 한국의 희망을 시사하는 사항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사항으로 당시 르네쌍스에는 내국인 분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발길이 잦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 박용찬은 르네쌍스에서 여러 외국인들과도 친교를 나누었다.
당시 대구에는 각국에서 모여든 유엔군과 종군기자들이 들끊고 있었는데, 그들은 주말이나 일요일을 이용해 르네쌍스를 찾았다. 그들은 소위 국제어(國際語)로 일컬어지는 음악을 통해 타국에서의 고달픈 향수를 풀었다.
대구 시절 박용찬은 아세아재단에 근무하던 하비와 핸톤, 피아니스트 시몬 번슈타인, 바이얼리니스트 골든, 기독교 아동복리회 소장 호스텔러, 서울 근교에 주둔했던 맥코믹 대령 등과 각별한 우의를 나누었다. 그중에서도 그는 제 2차대전 때 부인을 잃은 매코믹과 아주 각별하게 지냈다. 때문에 훗날 그는 귀국한 다음에도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레코드를 보내주기도 했으며, 미국의 유수한 정기 간행물에 르네쌍스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르네쌍스는 미국의 음악 전문지 에듀트에도 보도 되었다.
그 무렵 박용찬은 이루 형언키 어려운 희열을 맛보았다. 한 개인의 비장 수집품이 르네쌍스라는 광장을 통해 동호인 상호간에 교환(交歡)하는 기쁨을 피부로 체험했다. 따라서 그는 일생의 사업으로 음악감상실을 운영해 나가고자 마음을 굳혔다.
■ 인사동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
대구역 앞에서 최초로 문을 열었던 르테쌍스는 그 이듬해 도청 근처로 옳겼다. 이때에도 단골손님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그 다음해인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이 사회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피난민들은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환도를 서둘렀다.
그해 겨울, 박용찬도 그 많은 레코드를 정리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당장 음악감상실을 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사회가 아직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박용찬은 돈암동 집에 레코드를 쌓아둔 채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대구에 있을 때 뭇 지성인들의 시름을 달래주던 르네쌍스는 서울에서 필요하였다. 당시 서울시장이어던 김태선(金泰善)씨는 박용찬을 찾아와 다시 서울에서 르네쌍스를 열도록 간청하였고 마땅한 장소까지 물색해 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를테면 르테쌍스는 이제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닌, 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민의 위락시설이라고나 할까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1954년 가을, 박용찬은 낙원동 63번지에 르네쌍스를 다시 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낙원동이지만 사실상 그곳은 인사동 골목이었다. 이로써 르네쌍스의 인사동시대가 개막되었는데, 이는 대구 피난지에서의 르네쌍스 가족들의 열망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인사동 르네쌍스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실내는 어두웠으며 의자도 대구 시절처럼 32개 뿐이었다. 그러나 이 좁고 길다란 음악감상실에는 대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인 묵객들과 음악인, 그리고 영화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구에서의 개근 손님들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은 물론이고 젊은 대학생들까지 찾아들어 르네쌍스는 성황을 이루었다.
…르네쌍스의 인사동시절은 좀 과장하면 서울의 한 시대를 특징지을만한 곳이었다고 믿어진다. 예술인이라든지 문화인임을 자칭하는 사람치고 이곳을 출입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우리 학생들은 막걸리나 꿀꿀이 죽으로 허기를 채우고도 르네쌍스에 들러 자기를 맡기는 따위의 허세를 곧잘 부렸다. 그 음악을 알고 모르고는 둘째 문제였다. 전화로 찌들고 상처받은 마음들을 치유하고 덥게 하는데는 이만한 곳도 없었던 것이다. 겨드랑이에는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타임지를 끼고 모짜르트를 아는 체 드뷔시를 아는체 껍적대면서 연인을 물색하던 장소. 그것이 또 르네쌍스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곳은 명동의 돌체다방과 함께 기구한 50년대를 산 장년(壯年)이나 초로(初老)에 접어든 사람들의 가난하면서도 따뜻한 기억들이 묻어 있는 곳이다.
작가 최일남(崔一業)씨의 이와 같은 지적처럼 인사동시절의 르네쌍스는 분명 서울의 한 시대를 특징 지을만한 명소로 떠올랐다. 인사동 시절의 초기에는 주인 박용찬이 직접 주방에 들어가 차를 끓여 내기도 했는데, 연세대 화공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규태 (李圭泰)씨가 플레이어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씨는 현재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저명한 언론인이 되었지만 대학에 다니면서 이곳 플레이어로 명성( ? )을 날렸던 것이다.
당시 르네쌍스의 단골손님으로는 시인 김규동(金圭東), 이봉래 (李奉來), 신동엽, 정공채(鄭孔采), 최원(崔元)씨가 드나들었고 소설가 이문희, 이호철(李浩哲)씨도 빼놓을 수 없는 터주대감이었다. 문학평론가 이철범(李哲範), 홍사중(洪思重)씨가 새 손님으로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었고 대구 시절의 황운헌(黃雲軒) ,전봉건씨는 프랑크의 비리에이숑에 심취해 있었고 시인 김종삼씨는 여전히 모짜르트에 반해 있었다.
그밖에도 조선일보 문화부의 정영일(鄭英一)씨와 몇몇 기자들이 새 손님으로 합석하였고, 대학교수로는 이화여대의 이진구(李鎭求), 박이문(朴異汶) 교수와 연세대의 박두진(朴斗鎭), 정희석(鄭熙錫) 교수가 자주 자리를 지켰었고 연극인 이낙훈(李樂黨) , 김동훈(金東勳)씨, 그리고 무용가 임성남(林堅男), 송범(宋范), 주리(朱莉)씨도 간간이 다녀가곤 하였다. 그러므로 인사동 시절의 르네쌍스는 단순한 음악감상실의 차원을 넘어 각계의 문화예술인들이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모임의 장소'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 꿈과 낭만의 전당으로 승화
그러다가 르네쌍스는 1959년 가을 종로1가 영안빌딩 4층으로 이전하였다. 인사동 시절의 단골들이 이쪽으로 고스란히 옮겨 온 것은 물론이지만, 세칭 새 세대로 일컬어지는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괄목할만한 일이었다. 박용찬은 이곳으로 옳겨오면서 좌석을 1백 50석으로 대폭 확장하였고 매킨토시 진공관 앰프와 JBL스피커 시스팀으로 고객들을 맞이 하였다.
월간지 사상계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싸르트르와 까뮈의 논쟁에 이어 실존주의 이론이 젊은이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을 때, 르네쌍스는 음악을 통하여 지성인들의 갈증을 유감없이 풀어주었다. 1만여장의 SP와 3천여장의 LP른 음악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언제나 촉촉한 단비를 뿌려주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인사동 시절의 단골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고객들의 세대 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마악 독일에서 돌아온 전혜린(田惠鱗)을 비롯하여 이덕희(李德姬), 이제하(李祭夏), 황동규(黃東圭), 김하림(金夏林), 고은(高銀), 김영태(金榮泰), 마종기(馬鐘基), 송상옥(宋相玉), 김승옥(金承鈺), 오태석(吳泰錫)씨 등의 문인들이 들락거렸고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안호상(安浩相) 박사와 이범석(李範奭) 장군의 출입도 잦았다.
화가 송수남(宋秀男)씨도 단골이었는가 하면 후일 세계적 바이얼리니스트로 명성을 날리게 된 정경화(鄭京和)씨와 정명훈 (鄭明薰)씨 남매도 부모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출입했다. 이와 같이 르네쌍스는 음악의 보고(拱考)로서, 일찌기 이 나라 음악을 살찌우고 문예를 부흥케 하는 토양이 되었다.
그리고 1960년 10월 22일 이곳에서는 윤이상(尹伊幹) 작품발표회가 열렸다. 무명 시절의 윤이상 씨는 르네쌍스의 빼놓을 수 없는 단골이었는데, 그가 서독 1SCM에 입선하자 '윤이상 재독(在獨) 입선작품 감상회'가 르네쌍스에서 열린 것이었다.
서독 방송국의 녹음 테이프로 열란 이 날의 감상회눈 임원식, 계정식, 박태현(朴泰鉉)씨를 비롯한 국내 저명 음악인들이 대거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의 감상회는 임원식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윤이상씨 부인 이수자(李水子)씨가 부군을 대신해 인삿말을 하였다.
60년대 이후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종로1가 영안빌딩 시절의 르네쌍스는 그야말로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인사동 시절의 후광을 받으며 넓은 장소로 이전한 것도 그렇지만 매킨토시 진공관 앰프와 JBL 하스필드 스피커시스팀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자랑할만한 시설이었다. 르네쌍스에서는 항상 가장 원음에 가까운 음악이 흘러 나왔으므로 음악 전문가일수록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용찬은 언제부턴가 가장 원음에 가까운 음악을 들려주지 않고서는 르네쌍스의 존재가치가 없다고 고집 해왔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사실 박용찬이 SP레코드를 아끼는 것도 이와 같은 철칙 때문이었다. 레코드의 역사를 1백년으로 보았을 때 SP판이야말로 가장 원음에 가깝기 때문인 것이다. 오디오 시스팀이 발달하면 할수록 취입 과정에서도 기계에 의한 조작이 가능하지만 SP판은 결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연주회에 있어서의 오리지날과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분명하고도 확실한 박용찬의 소신은 곧 르네쌍스의 혼이요 생명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만복씨나 임원식씨 등은 직접 스코어를 가지고 서울 시향과 국향의 단원들을 이끌고 와서 콘덕터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 계승되어 음대 학생들이 스코어를 보면서 음악을 경청하는가 하면, 성악곡이 나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청을 한껏 돋구는 음악도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심퍼니가 흘러나올 때 앞에 나서서 열정적으로 콘덕터 실습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영화사나 방송국에서는 효과음악을 이곳에서 발췌해 가기도 하였다. 따라서 살아 있는 음악, 가장 원음에 가까운 음악은 이 나라 문화발전에 있어서 기름진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 세계 제일의 레코드 수집가
박용찬은 인사동에서 영안빌딩으로 옮겨 오던 날, 새 음악감상실에서 보물인 1908년 미국 빅타레코드사 제작의 판소리 '적벽가'와 그리그가 직접 연주한 그리그 피아노소나타 및 '활라'를 비롯, 진본 중의 진본으로 마리안 멜바가 부른 '리라꽃 필 무렵'을 틀었다. 특히 쇼숑 작곡의 '리라꽃 필 무렵'은 1903년 영국 HM레코드사가 제작한 것으로 세계에 5장밖에 남아있지 않은 보물로 알려륣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수 윤심덕 (尹心悳)이 1926년 일본에서 취입한 '사(死)의 찬미'도 그의 레코드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다. 이와 같은 보물중 레코드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지만, 박용찬은 평생토록 레코드를 수집해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다. 개인이 이처럼 많은 레코드를 수집한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며, 르네쌍스에 갖추어진 오디오 시스팀은 동양 최고의 수준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죽하면 일본에서도 르네쌍스 동경지사를 개설해 달라는 청탁이 들어왔을까.
박용찬은 한때 르네쌍스 동경지사를 설립할 구상을 세우기도 했었고, 빌딩을 지어 콘서트 홀로 남길 계획까지 했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뒷받침 등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그 꿈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가정적으로 형언키 어려운 곡절이 있었다 1945년 첫 부인과 사별하고 1950년에 재혼을 했으나 그는 7년만에 파탄의 쓴잔을 맞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좌절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을 통해 얻어진 '인생의 수련'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처음 바이얼리니스트에의 꿈을 접어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권투선수로 활약했는가 하면 길고 지루한 투병생활을 하며 재생의 길을 걸어나왔듯 그의 생활은 후반에 들어와서도 파란만장하게 얽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용찬은 파탄을 맞은 지 12년만인 1967년 다시 결혼했다. 새로 맞이한 부인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미국 대사관에 근무했던 김소정(金小晶)씨 박용찬은 이 부인을 맞이하면서 가정적인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고, 삶에 있어서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부인 김씨는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박용찬에게 둘도 없이 성실한 내조자인 동시에 진실한 반려가 되어 주었다. 더구나 김씨는 음악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 분야에 조예가 깊어 부창부수(夫娼婦髓)로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르네쌍스는 전혀 엉뚱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태가 그만큼 바뀌어 르대쌍스는 어느덧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시민들의 생활은 그만큼 바빠졌고, 각 가정마다 오디오 시스팀의 보급이 일반화되면서 르네쌍스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박용찬이 르네쌍스를 설립한 때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적자 경영으로는 더 이상 지탱할 여유가 없었다. 애당초 박용찬 자신이 음악을 지독하게 좋아했으므로 세계적인 레코드 수집가가 되었고 오래도록 국내외 동호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르네쌍스는, 그러나 박용찬 임의로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1983년 봄, 르네쌍스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지상에 보도되자 박용찬에게는 수통의 한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항의 내용 또한 강력한 것이었다. 르네쌍스는 박아무개 개인의 소유가 아니므로 주인 마음대로 문을 닫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항의는 전화로도 빗발쳤다. 모두 르네쌍스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항의라고 생각하니 박용찬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박용찬 자신도 르네쌍스의 문을 닫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르네쌍스를 하루 아침에 문을 닫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뼈아픈 일이었다 . 그래서 박용찬은 르네쌍스의 폐쇄야말로 곧 자신의 폐쇄라고 단정, 르네쌍스를 영원한 추억의 장소로 만들고자 부심하였다. 그것은 바로 오랜 세월을 두고 르네쌍스를 사랑한 사람들에 대한 특별 배려이기도 하였다.
그럴 즈음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비롯한 몇몇 기관에서 르네쌍스 기증을 희망하는 조심스런 교섭이 들어왔다. 박용찬은 오래도록 심사숙고한 끝에 1987년 가을 르네쌍스를 문예진흥원에 기증키로 마음을 굳혔고, 부인 김소정씨도 이에 선뜻 동의하였다. 박용찬의 나이 고희(古稀)에 내린 값진 결단이었다.
■ 음악의 보고로서의 르네쌍스
한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문화발전연구소로 사용케 될 덕수궁 석조전에 르네쌍스의 음반과 관련 기재 및 서적들을 고스란히 옳겨 '박용찬 음악자료관'을 꾸미기로 하였다. 한편 덕수궁은 박용찬의 부친 박순직공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헐하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웃 주민들들에게 공덕을 많이 쌓아 고종황제로부터 '효청(孝淸)'이란 청호를 하사받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르네쌍스가 덕수궁으로 옳겨져 음악자료관으로 영구히 남게 된 것은 박용찬으로서도 이만저만 의미있는 일이 아니다. 문예진흥원은 석조전 1층을 개수, '박용찬음악자료관'을 낸 뒤 일반인과 음악인들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인데, 그렇게 되면 르네쌍스야말로 음악의 보고(拱庫)로서 이 땅에 영원히 남게 된다. 아울러 문예진흥원은 박용찬이 기증한 음반, 기재, 서적을 목록으로 작성하여 길이 보존할 방침이다.
이러한 오늘에 이르러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은 파손된 레코드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임실→서울→임실→서울→대구→서울을 왕래하는 동안 그 보배로운 레코드들이 수천장이나 파손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6·25전란 당시 공산도배들의 광란으로 파손된 레코드까지를 염에 둔다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박용찬의 위대한 결단에 대하여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야 한다. 만고풍상는 겪는 가운데 가산을 기울여 평생토록 모은 '자신의 전부'를 사회에 내놓는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밝히면 박용찬에게는 2남2녀의 혈육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장성해 가정을 이루었고 음악과는 무관한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해온 숱한 레코드와 관련 자료들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선뜻 사회에 내놓은 박용찬의 그 정신은 이 나라 문화사와 함께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