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창작희곡의 경향분석과 전망
-개화기∼1985년까지 발표된 희곡을 중심으로…
김성희 / 희곡작가
■ 머리말
한국연극의 부진이나 침체를 거론할 때, 여러 요인 중에서도 제 일 먼저 꼽히는 것은 희곡의 빈곤 현상이다. 개화기에 접어들어 서구연극 형식을 받아들인 한국 근대극이 1911년에 시작된 이래 신극사 70여년 동안 연극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끊임없이 부각되어온 것이 바로 희곡의 양적, 질적 빈곤현상인 것이다.
희곡이 연극의 모태를 이룬다는 점과 연극이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시대는 반듯이 위대한 극작가의 출현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희곡문학의 정립을 위한 노력은 바로 보호·육성해야 하는 연극예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극에 대한 지원이나 육성정책은 희곡문학에 대한 지원 또는 극작가 육성을 집중적으로 벌이지 않고서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문학으로서의 희곡을 생각할 때, 시나 소설에 비해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엄청나게 뒤떨어진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의 문학교육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희곡문학의 부진현상의 원인으로 보통 우리나라의 희곡적 전통의 부재를 들기도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근대문학의 세 장르 (시, 소설, 희곡) 중 유독 희곡만이 아직도 문학적 정립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엄밀한 분석을 요한다. 우리나라의 근대문학이 개화기에 서구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또 출발 자체가 형식적으로는 전통의 단절로 보일 만큼 새롭게 출발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문학의 세 장르가 비슷한 시기와 비슷한 여건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시나 소설문학은 세계적 수준에 이른 데 비해 희곡문학은 아직도 문학의 사생아 취급을 받거나 혹은 주변적 존재로 머물러 있음은 어떠한 이유에서 인가.
희곡이 문학으로서 정립되지 못하거나 질적, 양적으로 뒤떨어지게 된 이유는 우리의 희곡 상당수가 활자매체에 의해 남겨지지 않는데 그 큰 원인이 있다. 희곡이 단순히 공연 대본으로서만 여겨져 온 신파극 시대의 구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또 희곡이 문학인 동시에 연극의 기본요소라는 이중적 성격 때문에 문학계에서는 희곡을 연극 쪽으로 밀고, 연극계 또한 희곡의 활자화 책임을 문학계 쪽으로 서로 전가해 버린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출발한 시나 소설은 꾸준히 문예지에 발표되고 또 단행본으로 발간되면서 문학적 전통을 축적해가고 독자층을 꾸준히 형성해 가는 동시에 그 독자들도 하여금 미래의 시인이나 소설가로 키워내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 질과 양에 있어서 출발기보다 엄청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희곡은 출발기부터 문예지나 기타 잡지에 겨우 지면을 얻어 발표가 됐고, 또 발표가 됐다 하더라도 공연의 기회를 얻지 못해 희곡의 문학성과 연극성을 아울러 발전해 나가는 훈련을 쌓지 못했으며, 공연된 희곡은 그것대로 활자화되지 못하여 희곡문학의 발전에는 조금도 기여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희곡이 활자화되지 못하고 단행본으로 발간되지 않으니 독자층이 형성될 수 없고, 따라서 미래의 훌륭한 극작가를 키워낼 수 없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문제점은 번역문학에 관련된 것인데, 외국의 훌륭한 시나 소설이 무척 많이 번역되어 한국의 시나 소설문학에 자양분이 되어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희곡에 있어서는 외국의 훌륭한 희곡번역이 너무나 희소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고려해보면 한국의 희곡이 시나 소설분야에 비해 뒤떨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런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희곡문학의 정립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시인이나 소설가가 줄잡아 3,000명이라는 사실과 극작가는 불과 60명 정도라는 사실을 대비해 보면 더욱 단적으로 한국희곡의 빈곤현상을 깨닫게 된다. 물론 외국의 경우에도 시나 소설에 비해 장르의 특수 성격상 희곡이 양적으로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처럼 기형적인 빈곤현상을 보이지는 않을 뿐더러 질에 있어서는 거의 동등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희곡문학의 정립과 연극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희곡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정책이 필요하다. 신춘문예나 기타 장막극 모집으로 신인 극작가를 발굴하는 것이 연례적인 행사로 되어 있지만, 일단 발굴한 뒤엔 연극계에서나 문예지에서 적극적으로 양성하거나 또는 지면을 제공하지 않음으로 해서 희곡 창작에서 손을 떼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외국의 경우엔 연극전문지가 여러 개 있어서 희곡을 게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엔 현재 연극전문지가 하나밖에 없으므로, 각종 문예지에서 희곡들을 게재함으로써 극작가를 양성하고 동시에 희곡 독자층도 형성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연된 희곡들의 경우에는 희곡문학의 육성이라는 정책적 차원에서 단행본 출간 지원을 해주어야 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문학분야에서 시나 소설만이 발전하고 희곡문학이 뒤떨어져 있을 때. 그 나라의 문학이나 문화수준이 성숙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문인들이나 독자들, 잡지사, 출판사나 문예정책당국, 연극인들이나 학자들 모두가 희곡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문학적 정립을 위해 노력할 때, 한국문학은 비로소 성숙한 모습을 가지게되는 동시에 세계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개화기에서부터 1985년까지 거의 75년에 이르는 동안에 지상(紙上)을 통해 발표된 희곡과 공연을 통해 발표된 희곡을 조사해서, 희곡의 주제 및 경향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창작희곡이 시나 소설 분야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낙후되었다고 하는 현상진단에 대한 실증적 접근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희곡집의 발간현황을 조사하고, 또 지상에 발표된 희곡을 대상으로 주제, 경향별 흐름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창작 희곡의 현위치와 주된 경향 및 희곡문학의 당면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료로는 필자가 개별적으로 조사한 자료 외에 「한국 예술지」「문예연감」「현대희곡론」「한국근대희곡론」「대한민국연극계희곡집」등의 했다.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지상에 발표된 희곡과 공연으로 발표된 희곡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고, 조사가 되었더라도 빠진 것이 많았다는 점이다. 어느 한 기관에서 일괄적이고 책임 있는 정리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문예연감」의 경우에도 각 잡지에 실린 시, 소설의 색인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희곡의 경우엔 아예 항목조차 없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국문학, 문화계 전반에 걸친 희곡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홀대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희곡문학에 있어서는 기초 자료 정리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필자가 조사한 바의 분석내용에 대한 완벽성을 기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도로 근사치를 뽑아보려고 노력했다.
■ 개화기∼ 1985년까지의 창작희곡작품 편수 통계 분석
우리나라 창작희곡의 최초의 작품은 1912년에 조일제 (趙一齋)이다. 매일신보에 발표한 「병자 3인 (病者三人)」이다. 보다 근대적 성격을 가진 희곡으로서 이광수(李光洙)의 「규한(閨恨)」(1917)을 한국 근대희곡의 효시로 꼽기도 하지만, 대체로 조일제의 희곡을 한국희곡의 효시로 꼽고 있다. 1910년대에 발표된 희곡들의 주제가 전통인습과의 갈등이나 신여성의 여권 (女權)문제, 혹은 자유결혼에 대한 찬반의 견해를 표명하고 있는데,「병자3인」이나 「규한」역시 그러한 계열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은 당시 희곡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신파희곡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지극히 신파적이다.
<표 1> 과 <표 2> 는 각각 개화기부터 해방, 해방 후부터 1985년까지 발표된 희곡 작품 수를 연도별로 나타낸 것이다. 희곡이라는 장르의 성격상 신문, 잡지 등 지상에 발표된 희곡과 활자화되지는 알았지만 공연을 통해 발표된 희곡을 묵어서 통계를 뽑았다. 공연을 통해 발표된 희곡의 경우 공연기록에 의거했으나 번안, 각색 등의 신파희곡은 제외했고 1920, 30년대의 대중적 신파희곡은 범주에 넣었다. 희곡의 수준은 어떻든 지간에 당시 대중이 즐겨 보았던 연극이므로 제외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공연기록이 완전히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방 각지로 순회공연 다니던 군소 유랑극단들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연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표 1> 에 나타난 것보다 실제로는 더 많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표 1> 을 보면 지상을 통한 희곡 발표와 공연을 통한 희곡발표가 324 : 270으로 신문, 잡지를 통해 희곡 발표가 왕성하게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지상을 통해 발표된 희곡이 공연되는 경우, 공연을 통한발표 통계에서 제외한(사실 이 숫자는 미미하다) 외에도, 당시 일제시대의 연극이 전국을 순회하는 흥행극단들에 의해 거의 이루어졌고, 이들 흥행극단들은 주로 외국작품의 번안·각색 극을 공연했고, 창작극의 경우 희곡이라기보다는 연극의 초보적 각본이라 할 수 있는 대본으로 공연들을 했기 때문에 이처럼 통계숫자가 낮은 것으로 보인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지상으로 희곡이 발표되는 경우가 54.5%를 차지하고 있는 바, 비교적 양호하다고 볼 수는 있으나, 작품 발표가 공연으로 이어지지 못해서 연극제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습작단계의 미숙성을 드러내고 있는 희곡들이 대부분이어서 공연과 연결되지 못했고, 또 희곡을 발표한 문인들 역시 공연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마추어적 기분으로 써서 발표한데도 원인이 있다. 1920, 30년대에 가장 왕성하게 희곡이 발표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1921, 22년의 극예술협회, 토월회 등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극단체가 신극운동을 벌인 연극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1930년대에는 지상·공연을 통한 희곡 발표가 아주 왕성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신극단체를 중심으로 한 활발한 창작극 공연과 당시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대중극이 활발히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표 2>를 보면, 지상을 통한 발표와 공연을 통한 발표와의 대비가 701 : 1168로서, 각각 37.5% : 62.5%로 나타난다. 해방직후부터는 지상을 통해서보다는 공연을 통한 발표가 압도적으로 많아짐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공연된 희곡이 마치 소모품처럼 연극의 대본으로서만 인식되고 활자화되지 못한 상황을 드러내 보여준다. 46, 47, 48년도에 창작희곡공연이 많은 걸로 나타난 수치는 바로 해방직후 일제시대의 민족수난과 독립운동을 그린 창작극이 대거 등장하여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과, 좌·우 이데올로기의 분열 속에서 번역극보다도 창작극을 더욱 많이 무대에 올린 사실, 그리고 신파극이 주종이 된 대중극이 융성했던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1950, 60년대에 창작희곡발표가 부진한 것을 6.25로 인한 전쟁의 상처와 연극계의 부진, 또 상대적으로 번역극의 융성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표2> 연도별 창작희곡(해방∼1985) 작품편수 통계
연도 |
지상 |
공연 |
계 |
1945 |
4 |
34 |
38 |
1946 |
17 |
78 |
95 |
1947 |
7 |
92 |
99 |
1948 |
6 |
92 |
98 |
1949 |
9 |
15 |
24 |
1950 |
5 |
10 |
15 |
1951 |
2 |
13 |
15 |
1952 |
5 |
14 |
19 |
1953 |
5 |
15 |
20 |
1954 |
3 |
35 |
38 |
1955 |
7 |
28 |
35 |
1956 |
19 |
12 |
31 |
1957 |
16 |
10 |
26 |
1958 |
19 |
9 |
28 |
1959 |
22 |
14 |
36 |
1960 |
9 |
12 |
21 |
1961 |
9 |
12 |
21 |
1962 |
15 |
29 |
44 |
1963 |
11 |
27 |
38 |
1964 |
10 |
17 |
27 |
1965 |
15 |
33 |
48 |
1966 |
21 |
29 |
50 |
1967 |
15 |
11 |
26 |
1968 |
11 |
22 |
33 |
1969 |
21 |
41 |
62 |
1970 |
24 |
15 |
39 |
1971 |
27 |
16 |
43 |
1972 |
17 |
13 |
30 |
1973 |
34 |
18 |
52 |
1974 |
16 |
48 |
64 |
1975 |
35 |
38 |
73 |
1976 |
43 |
24 |
67 |
1977 |
44 |
21 |
65 |
1978 |
42 |
23 |
65 |
1979 |
31 |
31 |
62 |
1980 |
24 |
33 |
57 |
1981 |
12 |
30 |
42 |
1982 |
26 |
36 |
62 |
1983 |
9 |
27 |
36 |
1984 |
8 |
20 |
28 |
1985 |
26 |
71 |
97 |
계 |
701 |
1,168 |
1,869 |
<표 3> 개화기~ 1985년 창작희곡 총편수
연 도 |
지상 |
공 연 |
계 |
개화기∼1944 |
324 |
270 |
594 |
1345∼1985 |
701 |
1,168 |
1,869 |
계 |
1,025 |
1,438 |
2,463 |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지상·공연 양쪽의 창작희곡 발표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특히 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괄목할 만한 숫자상의 증가를 보이는 것은 각종 문예지가 다소나마 문호를 개방한 사실과 70년대에 높아진 우리 것 찾기·전통탐구의 열기, 창작극 선호도를 반영한 결과라 볼 수 있다. 특히 85년도에는 번역극 공연과 창작극 공연이 거의 1 : 1을 이룰 정도로 성장을 보이지만 잡지를 통한 발표는 거의 늘지 않고 있다. 현재 신문, 잡지 등 희곡에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신춘문예 당선희곡의 신문게재와 현대문학, 월간문학, 소설문학, 한국연극 등 4개 잡지에 불과하다.
이 통계를 뽑으면서 느낀 문제점은 신춘문예 당선 극작가들에 대한 문단, 연극계의 무관심으로 대부분 후작을 발표하지 못하고 사라진 경우가 않다는 점과, 또 지상을 통한 희곡 발표와 공연이 마치 분리된 장르처럼 별개의 것으로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잡지에 발표된 희곡이 공연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물론 연극성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연극계가 순수한 창작물을 작가와의 토의를 거쳐 다듬어 무대에 올리는 작업보다는 안이하게 기성극작가에게 의뢰하거나 또는 무대에 히트할 대작만을 찾고 있지 않기 때문인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그보다도 역시 큰 이유는 잡지사가 장막극 게재를 기피하기 때문에 잡지에 게재되는 희곡들이 거의가 단막극이라는 사실이다. 단막극은 작가에게 있어 실험성을 살릴 수 있는 이점은 있지만, 역시 장막극 상연을 선호하는 연극계에 있어선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에 발표되는 희곡이 공연과 연결되지 못함으로써 이 나라 연극이나 문학에 다같이 기여하지 못하는 현실이 개선되려면 문예지가 더욱 지면을 개방하여 장막극도 장편이나 중편소설을 분재 또는 전재하듯이 실어주는 풍토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고. 이에 대한 특별한 지원정책도 따라야 한 것이다. 또 한가지 지적되는 문제점은 극작가의 태도에 관련된 것으로, 극작가가 은연중에 잡지에 발표하는 희곡은 공연과 무관하게 생각하고 창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공연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레제 드라마로 쓴 희곡, 혹은 연극성이 부족한 희곡은 잡지에 게제하고, 공연할 만한 야심작은 극단으로 가져가는 이원적 의식구조가 싹트지 않았는가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가지 문제점-이원적 풍토와 이원적 의석구조 - 어느 것이 먼저 이루어져 나머지 결과를 자초했다 할지라도 극작가나 연극인 모두가 반성하고 적극적으로 잡지에 발표된 희곡을 무대위로 올려야만 희곡문학의 위치는 확고해 질 수 있다.
그리고 공연으로 성공을 거둔 희곡들은 반듯이 잡지게제든, 단행본 발간이든간에 활자화 작업을 거쳐할 것이다. 공연기록을 조사할 때 확인된 문제점은 우리의 창작희곡이 거의가 초연과 동시에 망각속에 사라진다는 점이다. 재공연된 작품은 불과 20여 편 내외였고, 초연과 동시에 무대에서 사라지는 작품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희곡적 전통이 축적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가뜩이나 빈곤한 희곡문학이 소비재처럼 유실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연극인들은 자꾸만 신작을 찾을 것이 아니라, 초연 때 발견된 미비점을 보완해 나가면서 또 새로운 해석과 접근방법으로 재공연함으로써 희곡을 예술적으로 다듬어 나갈 수 있고 동시에 희곡문학을 더욱 성숙하게 살찌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 창작희곡집 발간현황 분석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집은 1922년도에 김영보(金泳拯)가 펴낸「황야에서」이다. 해방 전에 발간된 창작희곡집은 모두 10권인데, 그중 2권 (「황야에서」와 윤백남(尹白南)의 희곡집「운명」)이 각각 다른 해에 다른 출판사에서 발간되었기 때문에 기실은 8권의 창작희곡집이 나온 셈이다. 또 그중「아동극집」2권」을 제외하면 실제로 희곡문학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는 6권이 발간된 것이다. 해방직후부터는 희곡집이 꾸준히 발간되지만 시나 소설의 연간 발행량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숫자를 보이고 있어, 희곡문학의 낙후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표 4> 창작희곡집 발간현황 연도별 통계
연도 |
개인희곡집 |
공동희곡집 |
연도 |
개인희곡집 |
공동희곡집 |
1922 1923 1930 1933 1934 1938 1939 1940 1945 1946 1947 1948 1949 1951 1952 1953 1954 1955 1957 1958 1959 1960 1961 |
1 3 1 1 1 1 1 1 5 3 1 2 3 1 2 2 2 2 3 5 1 3 |
1 1 1 1 1 |
1962 1963 1964 1965 1967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
2 1 5 3 3 2 3 4 3 2 10 4 5 4 9 5 5 12 2 1 4 |
1 1 1 1 3 5 1 3 2 3 6 3 2 2 2 4 1 |
계 |
134 |
46 |
|||
총계 |
180 |
<표 4> 에는 표시하지 않았지만, 번역희곡집 발행량도 극히 미미하여, 해방전까진 총 12권이, 해방이후 164권이, 도합 176권이 나왔다. 창작희곡집 대 번역희곡집의 비율이 178 : 176거의 1 : 1의 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번역희곡집도 거의가 셰익스피어 작품에 한정되어 있고(같은 작품들이 여러 출판 또는 보급판, 문고본 등으로 나왔다), 테네시 월리암스, 오닐 등의 작품들이 대부분으로서, 외국의 세계적 희곡들이 균형 있게 체계적으로 소개되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시나 소설의 번역작업이 매우 활발하며 독자층을 광범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조해 보면, 희곡문학은 출판사나 번역가, 독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훌륭한 희곡들을 많이 읽지 못함으로써 극작가들은 드라마트루기를 계발시키지 못하고, 또 극작가 지망생들이 희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표 4> 를 보면, 75년에 걸친 우리의 희곡집 발간현장이 시나 소설의 한 해동안의 발간현황에도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에 이르러 희곡집 발간이 부쩍 늘어난 현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창작극 공연의 열기와도 관련되지만 무엇보다도 예니 등의 연극전문 출판사에서 대본용으로도 쓸 수 있는 한 문고본들을 발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예진흥원에서 희곡지원사업을 펼쳐서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집 발간 및 개인 희곡집들에 대한 지원을 펼치고 있는데 에도 큰 요인이 있다. 앞으로도 문학분야에서의 희곡이 균형 있는 발전과 성숙을 위해 보다 집중적이고 처인 지원이 요청된다. 출판사에서 책이 안 팔린다는 이유로 희곡집 발간을 기피하는 이상 어느 정도까지는 문예정책 당국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표5> 최다 희곡집 발간 작가
순 위 |
작 가 |
권 수 |
1 |
유 치 전 |
10 |
1 |
김 용 락 |
7 |
1 |
오 태 석 |
4 |
1 |
창 범 석 하 유 상 강 성 희 이 동 진 |
3 3 3 3 |
<표 5>를 보면 개화기∼1985년까지의 기간 동안희곡집을 3권 이상 발간한 극작가들을 일별할 수 있다. 유치진이 10권으로 1위지만, 그러나 그의 희곡집은 같은 작품들이 여러 출판사에 의해 문학전집의 하나로 출판되었기 때문에 최다 숫자를 기록한 것이지, 작품량이 최다인 것은 아니다. 작품량에서 최다작가는 김용락으로 볼 수 있으며, 오태석의 경우 많은 작품의 공연을 통해 발표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한 희곡집은 1권 외에 나오지 않았고 대본 성격의 문고본들이 나왔다. 「이강백전집」처럼, 한 극작가의 작품세계를 알 수 있도록 발표 연도에 따라 체계적으로 묵는 기획태도가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공연된 우수희곡들을 모아 희곡집으로 발간하는 작업이야말로 한국희곡의 정립과 연극계의 발전을 위해, 또 극작가들의 작업화와 희곡 독자층의 형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다. 지금도 무대 위에선 많은 창작희곡들이 올려지고 있지만 1주일 정도의 공연기간 이후엔 새롭게 다듬거나 재해석될 여지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오늘의 풍토가 바로 한국희곡의 빈곤을 부채질하는 요인인 것이며, 일부 극작가들이 희곡문학에서 떠나는 요인인 것이다.
■ 창작희곡의 주제·경향별 분석
우리의 창작희곡이 어떠한 경향을 띠면서 쭉 흘러내려 왔는가 하는 것을 조사하는데는 많은 어 따랐다.
<표6> 개화기∼해방까지의 창작희곡의 주제·경향별 통계
주제 ·경향 |
작품편 수 |
현실소재극 역사·시대극 촌극 국책극 동극 종교극 가극 시극 우화 |
248 28 19 11 8 7 1 1 1 |
계 |
324 |
<표 7> 해방후∼85년까지의 창작희곡의 주제·경향별 통계
주제·경향 |
작품편 수 |
리얼리즘희곡 역사·시대극 전통소재 희곡 우화 시극 서사극 종교극 모노드라마 마당극 판토마임 |
590 36 35 15 10 4 4 3 3 1 |
계 |
701 |
우선 분류상의 문제인데, 소재별로 나눌 것인가, 주제별로, 혹은 형식별로 나눌 것인가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또 몇몇 작품은 여러 스타일이 혼합된 것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곤란했다. 필자는 분류기준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을 우선으로 삼았고, 주제, 소재, 형식을 망라한 분류를 했다. 그리고 지상에 발표된 희곡만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실 활자화되어있지 않은 희곡을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해방이후엔 공연대본으로는 상당수 남아 있겠지만 자료입수의 어려움 때문에 부득이 제외했다). 전체 희곡문학의 주제나 경향 파악에는 미흡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공연되지 않는 희곡은 아무리 문학으로서의 희곡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해도 희곡의 본래적 성격과 가치를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결과 공연된 희곡의 주제, 경향의 전체적 윤곽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우리의 공연 창작극에 있어 리얼리즘이 주류를 이룬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인데, <표 6>과 <표 7>을 보면 역시 리얼리즘계열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표 6>의 현실소재극은 리얼리즘을 말하는 것이지만, 10, 20년대의 희곡이 동시대 현실의 객관적 표현이라는 리얼리즘의 정의에 미흡하기 때문에 현실소재 극이라는 분류방법을 썼다. 그러나 식민지시대 전체희곡들 중 76.5%가 침실을 드러내고 비판하고 발언하려 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리얼리즘계열에 있을 것이다. <표 6> 에서 역사, 시대극의 전체 희곡의 8.6%로서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은, 당시 상황이 식민지였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억압당한 사실과 관련된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역사 시대극이 많이 발표되는데, 이는 일제(日帝)의 엄격한 희곡검열과 탄압 때문에 현실을 정공법적으로 그리지 못하고 지나간 역사나 과거를 빌어 현실을 우회적으로 그리려 했던 극작가의 의식을 보여준다.
5.9%에 달하는 촌극은 원고지 2, 30장 미만이 짧은 희곡으로서, 특히 채만식(蔡萬植)이 많이 발표했다. 현실풍자와 위트감각을 보여주는 희곡양식으로서, 현대에는 TV 코미디의 촌극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드라마로서도 계발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표 6>의 국책극은 1939∼1944년도에 발표된 친일 어용극으로서, 가혹한 시대상황과 작가의 대응태도의 상관관계를 일깨워 준다.
<표 7>에서 보면, 해방이후 87년도까지 발표된 희곡 중 리얼리즘계열이 84.2%로서, 압도적으로 희곡문학의 주류임이 드러난다. 해방이전의 76.5%보다 더 높은 수치를 기록함으로써 리얼리즘희곡의 토착화를 보여준다.
특히 전통소재희곡이 5%를 차지하고 있다든지, 서사극, 마당극, 모노드라마 등이 등장하고 있는 현상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에 걸쳐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인바, 우리 희곡문학이 고 소재적, 형식적 접근방법을 다양하게 넓혀가고 실험하는 증거라 볼 수 있다.
또 리얼리즘계열의 희곡에서도 구체적 현실상황을 밝히지 않고 현대인의 내면심리나 애정의 갈등, 불안, 소외 등을 탐구하는 현대극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해방전의 리얼리즘계열이 외부적 현실만을 그린 경향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이후의 리얼리즘희곡은 근대적 사실주의로부터 벗어나서 표현주의적, 전위극적, 부조리극적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현대인의 내면적 진실을 그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점이 큰 특색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문제점은 그런 경향의 의식과잉이 오히려 작품이 난해하게, 또 논리적 필연성의 결여로 끌고 간다든지, 연극성이 부족하여 공연하기엔 힘든 작품들을 양산하는 결과로 끌어갔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앞에서도 얘기한대로, 외국의 우수한 희곡들의 번역 소개와, 우수 창작극의 작품집 발간을 통해 극작가들이 드라마트루기에 능숙해지게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 연극제 희곡의 주제 ·경향별 분석
1977년에 제 1회 대한민국연극제가 시작된 이래 86년까지 10번 개최된 연극제는 문예진흥원이 창작극의 진흥과 연극지원의 목표 아래 구상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연극제가 개최되면서 매해 20편 정도의 장막희곡이 쓰여졌고 이중 심사를 통과한 8∼10편이 연극계와 문화계의 관심 속에 공연되고 또 공연이 끝난 후「대한민국연극제희곡집」으로 발간되어 희곡이 활자화되는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심사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긴 하지만, 연극제에 공연된 희곡은 대체적으로 수준작이라고 볼 수 있고, 우리 창작희곡주제와 경향을 어느 정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겠기에 하나의 모델로서 분석대상으로 삼겠다.
<표8>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의 연도별 ·주제·경향별 분류
연 도 |
리얼리즘 |
전통소재극 |
역사·시대극 |
서사극 |
마당극 |
전위극 |
묵 극 |
뮤지컬 |
집단창작 |
'77 |
8 |
1 |
|
|
|
|
|
|
|
'78 |
6 |
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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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79 |
4 |
3 |
|
1 |
|
|
1 |
1 |
|
'80 |
2 |
2 |
3 |
|
|
1 |
|
|
1 |
'81 |
7 |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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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 |
5 |
|
1 |
1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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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
6 |
|
1 |
|
|
1 |
|
|
|
'84 |
5 |
1 |
1 |
1 |
|
|
|
|
|
'85 |
4 |
1 |
1 |
2 |
|
|
|
|
|
계 |
47 |
12 |
8 |
5 |
1 |
2 |
1 |
1 |
1 |
총계 |
78 |
<표 8> 을 보면 연극제의 희곡이 다양한 경향과 형식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역시 그 주류는 역시 리얼리즘희곡으로서 전체의 60.3%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극제의 희곡이 어느 정도 다양한 면모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연극제의 발전적 양상인 동시에, 한국희곡의 소재접근방식이나 예술적 형식의 계발의 노력을 드러내고 있다고 풀이된다.
특히 연극제가 시작된 4년간은 전통소재 희곡의 양적 증가를 보여주는데, 이는 70년대 말의 특징적 양상전통 탐구 열기와 관련해 풀이될 수 있고, 또 70년대 말의 특징적 양상인 전통 탐구 열기와 관련해 풀이될 수 있고, 또 77년 연극제의 대통령상 수상작인「물도리동」으로서 전통소재희곡 성공과도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전통소재극은 전체의 15.4%를 차지하고있는데, '86아시아축전 연극제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명제 아래 전통소재극을 많이 공연했고 앞으로도 '88올림픽이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전통소재 극은 늘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미소한 숫자이기는 하나서 서사극, 마당극, 묵극, 전위극, 뮤지컬 등이 공연된 것은 연극제의 다양성과 관객의 호응을 위해 퍽 고무적인 일이라 볼 수 있고, 극작가나 연출가들의 구태의연한 리얼리즘기법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적이고도 예술적인 정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 맺음말
이상에서 개화기부터 85년까지 75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발표된 희곡들의 총편수와 희곡집 발간현황, 그리고 희곡들의 주제, 경향별 분석, 대한민국연극제 희곡들의 주제, 경향별 분석을 해보았다. 여기서 지상에 발표된 희곡이 공연된 것은 몇 %인가를 밝혀 보지 못한 점과 또 공연된 희곡에 있어서 재공연된 것은 몇 %인가를 통계수치로 밝히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적 작업과 분석을 통해 우리 희곡문학의 위치와 당면과제가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희곡문학의 발전은 문학과 연극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지원정책은 우선 창작희곡의 진흥에 우선 점이 두어져야 한다. 그리고 문학계에서도 시, 소설, 희곡 세 장르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고 또 균형 있는 교육을 시켜야만 세계문학속에서의 한국문학의 성장과 원숙함을 가져올 수 있다.
문학으로서의 희곡이 정립되지 못한 문제점으로 몇 가지 요인을 들어보면, 첫째, 축적된 희곡문학 전통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지상에 발표된 희곡은 거의 공연되지 않고, 또 공연된 희곡은 활자화되지 않는 이원적 모순구조 때문에 한국의 희곡문학이나 연극계는 가뜩이나 빈약한 희곡유산을 유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희곡을 단순히 무대세트처럼 연극대본으로서의 소모품적 관념으로 대하기 때문에 신극사 70년동안 그처럼 많은 창작극이 상연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변변한 희곡집도 남아 있지 않고 발간된 희곡집이 채 200권도 못되는 것이다.
그리고 희곡 상당수가 활자화되지 않음으로 해서, 또 단지 공연기록으로만 남아 있음으로 해서 문학이나 학문대상으로서의 희곡분야를 취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료조사가 시나 소설에 비해 월등하게 뒤떨어지고 불충분하게 되어 있음도 포함된다. 이처럼 실증적 토대가 취약하기 때문에 학문연구도 따라서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원 학위논문을 쓰고자 할 때도 시나 소설분야는 단행본으로 나와 있어서 자료 조사에는 시간과 노력을 그다지 들이지 않아도 되지만, 희곡 연구에 있어선 일일이 묵은 신문과 잡지들을 뒤쳐 봐야 하는데 논문 준비기간의 2/3를 써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희곡분야나 연극에 관련된 기초 자료조사가 한 책임 있는 기관에 의해 일괄적이고 체계적으로 행해져야 함은 소망만으로 끝나야 할 것인가.
두 번째로 문예지나 잡지에서 희곡게재를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대부분의 문예지는 시나 소설만을 실을 뿐, 희곡을 어쩌다 한편씩 싣는 잡지는 불과2, 3개밖에 되지 않는다. 문예지면의 확보, 그리고 장막극에 대한 지면확보야 말로 희곡 독자층의 형성과 또 극작가의 직업화를 위해 선결되어야 찰 문제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출판사에서도 번역희곡집이나 창작희곡집 발간을 기피하지 않을 수 있는 경제상의 배려가 뒤따라야 할 일이다.
세 번째로 희곡문학에 대한 비평의 무관심도 희곡의 문학적 정립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다. 외국의 경우 문학비평가나 학자들은 시, 소설, 희곡의 각 장르를 넘어선 비평,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시, 소설의 비평가나 학자는 유독 희곡에만 담을 쌓고 있다. 비평이 부재한 문학이나 예술은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연극비평이 아닌, 희곡문학에 대한 비평이나 작가론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에 있다.
네 번째로 희곡작가의 직업화, 전문화 문제이다. 그리고 작가와 극단의 접촉과 토의가 원활히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희곡의 문학성, 연극성을 높이는 작업을 해 나가야만 한국의 희곡과 연극예술은 같이 발전할 수 있다. 또한 초연으로 끝나는 공연태도를 바꾸어서 여러번 재공연하면서 작품으로서의 완성을 기하는 제작 태도야말로 극작가에겐 가장 창작의욕을 고취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다섯 번째로 신인극작가들에 대한 집중적 양성책을 문학계나 연극계가 동시에 펼쳐야 할 것이다. 조사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난 것이지만 작품 1∼3편 정도를 발표하고 희곡계에서 떠나 극작가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바, 문예지면의 제공이나 극단측이나 범 연극계의 작가양성기구 혹은 극작 워크샵 등이 절실히 요청된다.
이상의 몇 가지 문제점들이 선결되지 않고서는 한국 희곡의 문학적 정립은 요원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극작가의 출현으로 희곡문학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라지만, 역사상, 시대적, 문학적 여건이 성숙했을 때만 출현했다는 것을 상기할 때, 시대와 사회의 거울인 희곡은 결코 황무지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희곡문학은 막 싹이 돋아난 시점에 있다. 이 싹을 잘 키워내기 위해서는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