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리뷰/ 인문과학

북 리뷰

김종길「시에 대하여」




김용직 / 서울대 교수

■ 시론집 「시에 대하여」

金宗吉교수의「시에 대하여」는 모두가 490면의 부피를 가진 詩論集이다. 이 책은 크게「詩의 言語」<詩의 解釋>, <詩人論>, <韓國詩批判>, <韓國詩의 位相>등 다섯 부로 이루어져 있다. <시의 언어>에는 근대 이후의 시가 지닌 언어상의 성격과 韻律·구조 등이 거론되었고, 이미지와 기타 시의 요소에 대한 설명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2부에 해당되는 <시의 해석>, 에서는 우리주변의 몇몇 문제작들에 대한 김종길교수 나름의 해석이 가해졌다. <詩人論>에서는 李陸史·柳致環, 金顯承, 朴木月, 趙芝薰, 金春洙, 金丘庸 등과 閔在植, 成贊慶, 黃東奎, 金榮泰 등의 시인들이 다루어져 있다. 또한 <한국시 비판>에서는 그간 우리 시단이나 평단에서 활약해온 시인들의 작품 경향이나 비평태도 논리 등이 검토, 비판된 글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5부에 해당되는 <한국시의 위상>에서는 <한국시에 있어서 비극적 황혼>, <당대의 한국시와 그 미래>, <동양시와 서양시>. 9편의 글들이 담겨져 있다.

■ T .S ·엘리엇 詩 와의 관계

도합 46편의 비평들이 실린 「시에 대하여」를 접하면 얼핏 우리는 T·S·엘리엇의「시와 시인에 대하여」를 연상하게 된다. 그 까닭은 두가지 각도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우선 엘리엇이 그랬듯이 김종길교수 역시 시작과 비평을 병행시킨 분이다. 뿐만 아니라 김종길교수의 전공은 현대 영시와 비평들이며 그런 연유에서 그는 엘리엇의 장시「荒蕪地」의 번역, 소개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경력의 소유자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엘리엇이 편비평이론의 수용에도 남다른 솜씨를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사유들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시에 대하여」를 읽으면 우리는 그 여러 갈피에서 참으로 시에 대해 깊은 소양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발언들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 바닥에 깔린 교양이라든가 문화감각에 공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의 모습에 엘리엇의 그림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까닭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엘리엇은 전문적인 입장에서 비평을 쓴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내건 전통의 이론이라든가 形而上學派 詩論, 객관적 상관물설은 英美系의 현대 비평에서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 되고도 남을 만한 것이다. 그런데 「시에 대하여」에도 그에 비견될 만한 몇 개의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 그 정신의 단면으로 보다도「시에 대하여」와 「시와 시인에 대하여」사이에는 친족관계같은 것이 검출된다. 우선 논지의 전개에 있어서 엘리엇은 철저하게 실증적 입장을 취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때 제시된 증거는 대개가 작품이나 문학현상 자체다. 그런데 김종길교수 역시 그의 대부분 글에서 철저하게 이에 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그는 그의 가설을 논증해 가는 과정에서 반듯이 작품을 보기로 들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차분하게 논지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 두 비평가는 문예평론의 정신적 축을 전통에 대한 감각이라든가 知的인 것을 중심으로 편 점에서도 공통된다. 엘리엇이 휴옴의 흐름을 이은 나머지 반낭만주의 고전파의 입장을 취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대로다. 그에 대해서 김종길교수 역시 그의 모든 글에서 철저하게 시인의 무분별한 자아 방출을 배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의 창조적 차원개척을 문제삼는 것과 거의 엇비슷한 비중으로 전통의 감각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글에서 철저하게 시인의 무분별한 자아 방출을 배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의 창조적 차원개척을 문제 삼는 것과 거의 엇비슷한 비중으로 전통의 감각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런 면이「시에 대하여」를 특히 돋보이게 해준다.

評壇과 學界에 快報

김종길교수의 「시에 대하여」가 나오기 이전 우리 주변의 시론은 대개가 인상비평이거나 재단비평, 또는 강단비평의 유형에 드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들 유형에 속하는 비평에도 제나름의 의의가 아주 없지는 알았다. 인상비평은 잡담하는 태도로 문제의 핵심을 파헤칠 수가 있다. 그리고 재단비평은 제나름의 논리적 토대를 갖고 시작한다. 또한 강단비평은 학구적인 입장에 부수되는 폭과 깊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유형에 속하는 시론에는 그 나름의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우선 강단비평에서는 터무니없이 거창한 이론의 틀이 동원되어 왔다. 그에 비해서 성과는 별로 오르지 못한 실정이었다. 한편 재단비평이라면 아직도 우리는 카프카로 대표되는 프로문학의 악몽이 생생하다. 그리고 인상비평은 하나의 전제가 확보되었을 때 비로소 그 차원이 확보될 수 있다. 그것이 시를 제대로 알아보는 안목 내지 슬기를 바닥에 간직하고 있어야 되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 주변에서 이런 국면이 타개된 예는 별로 많지 못했다. 그리하여 시론에 있어서 넉넉하게 일정 수준이 확보된 예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에 대하여」에는 이들 현안의 문제가 어느 정도 타개된 경우다. 이런 경우의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는 것이 서정주의 <행진곡>에 가해진 해석이다.

잔치는 끝났드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루고,

재를 남기고

詩의 韻律을 말하는 자리에서 김종길교수는 <行進曲>의 이 부분을 문제삼았다. 그에 따르면 이 부분의 첫행이 길어지고 또한 그 가운데 종지부가 한 문장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주 의도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 된다. 그것으로 잔치가 끝난 자리의 어수선한 모습이 어느 정도 형태화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또한 둘째 줄에 나오는 <빠알간불 사루고>에 대한 배려의 결과이기도하다.

잔치의 마지막 장면의 묘사가 잔치가 끝난 다음의 장면과 같은 위화감을 자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중 피어리어드를 가진 이 행은 행말에는 구두점이 없다. 이것은 이 행의 리듬을 다음 행의 끝까지 끌고 나가게 함으로써 잔치의 마지막 장면의 부산함과 국밥을 마시는 동작을 암시하고 또<빠알간 불>의 불빛의 강도를 죽이기 위한 배려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 전공자가 독서를 통해 얻은 문학적 안목이 어떻게 작품 해석의 새 차원을 구축해 내었는가 하는 실례를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문자 그대로 시의 쉼표나 종지부에까지 자세한 생각을 미치게한 한 비평가의 진지하고 성실한 정신자세를 읽을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흔히 시의 운율이 작품의 행이나 연의 구분 또는 거기에 쓰인 말씨와 구두점에 밀착되는 개념이라고 이야기 해 왔다. 그게 실제 어떻게 적용, 이야기될 수 있는 가를 밝혀낸 예는 별로 없었다. 이렇게 보면 「시에 대하여」는 우리 詩論의 한 西部를 개척한 글이 포함된 경우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김종길교수를 엘리엇과 대비시키고 이야기를 해봤다. 그러나 이런 어세가 곧 우리에게 「시에 대하여」를 현대영미비평, 또는 신비평의 흐름에 편승한 亞流라는 이야기를 가능케하는 것은 아니다. 그 비평이 매우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김종길교수에게는 분명히 엘리엇의 개념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그만의 몫이 있다. 그 단적인 보기가 되는 것이 이 책에 나타나는 東洋文化에 대한 감각, 특히 漢詩에서 얻어낸 知的 素養이다. 김종길교수는 올바른 시의 이해가 우리 주변에서 오래 뿌리를 내려온 전통 문화감각을 밑받침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듯 보인다. 그런 요량에 따라 그는 漢字의 품격과 결구에 대해서도 상당한 안목을 길러 왔다. 그 구체적 증거가 이 책에서 피력된 梅泉論이나 陸史論, 芝薰論을 통해서 드러난다. 특히 육사의 <曠野>를 밑받침하고 있는 선비정신이 매천의 것과 같은 줄기에서 나온 것이라는 지적은 이 책의 압권인 동시에 서구의 현대비평가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발언이다. 물론에도 부분적으로는 난점으로 생각되는 발언이 전혀 없는 것 아니다. 그러나 그런 티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이다. 총체적으로 보아「시에 대하여」는 우리가 갖게된 유쾌한 축배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