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
마르께스「콜레라 시절의 사랑」
민용태 / 고대교수
우연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증후처럼 작년과 올해에 읽은 소설들이 또다시 사랑을 테마로 하는 서반아어 권의 소설이다. 그 하나가 노벨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최신작 "콜레라 시절의 사랑"이라는 작품이고 다음이 작년 서반아의 대소설상 쁘라네따 수상작, "꿈이었다고 말하지 말아요", 즉 떼렌시모익스의 소설이다. 셰익스피어로부터 유명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을 다룬 이 뒷 작품이 오늘의 붓으로 다시 채색 된 것.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콜레라 시절의 사랑」
사랑이 다시 문제가 되어야 하데는 "너무 많은 사랑이 차라리 사랑의 부재처럼 사랑에는 나쁜 것"을 우리가 깨닫기 시작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말은 "콜레라 시절의 사랑"의 주인공이 한 말지만 우리 시대의 고독과 모순을 대변하는 말 같이도 들린다. 영화에도 텔레비전에도 만화에도 교과서에도 사랑 타령뿐이고 쇼에도 잡지에도 비디오에도 나체뿐인 너무나 많은 사랑의 시대는 사실 우리의 내부사랑의 욕구를 너무 외롭게 따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
르네상스와 낭만주의 시대는 우리에게 지겹도록 사랑의 느낌과 사고를 강요했다. 그 그리움이나 안타까움, 꿈과 광란의 뮤즈는 이제 벌거벗고 육박하는 현실이 되었다. 술집을 가도 이발소를 가도 무조건 들이 미는 섹스의 얼굴. 디스코텍의 귀찢어지는 소음속에 땀에 젖어 뒹구는 살덩이, 살덩이. 우리 모두 그것을 찾고 좋아하기에 스스로 망쳐버린 우리 마음의 한구석. 그래서 구라파는 이미 70년대부터 유치하리만큼 안타깝고 중요한 사랑의 감정을 흘러간 유행가 가락처럼 우리 가슴에 끼워 넣고 있다.
마르께스의 소설은 늘 사랑의 문제에 무관하지 않았다. "백년간의 고독"이 바로 사랑 부재의 긴 역사에 대한 패러디다. 근친상간과 삶이 주는 끝없는 좌절은 체바퀴돌듯 나를 나속에 돌게 하는 지극한 고독의 역사였다. 그런 역사가 산출하는 미래는 무정난이거나 돼지 꼬리 잘린 기형의 괴물. 이 또한 절대고독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렇게 속에 숨어있던 마르께스의 사랑 테마는 이제 다시 현대인의 고독에 찌들은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역시 민주와 보수의 체바퀴, 살아있는 것과 인습, 타성의 횡포속에 우리의 사랑은 나이만 들어가고 무기력에 이른다. 시간은 그음의 소용돌이속에 인간자신조차헤어날 수 없는 죽음의 구멍을 파는 역설의 현장. 이 소설에는 유서 하나 없는 수많은 자살과 이유 하나 없는 유령들의 출현이 우릴 더욱 고독하게 한다. 거기 득실거리는 것은 인간 흉내를 내는 개들과 인간의 말을 되풀이하는 앵무새들 뿐이다. 이들 동물의 죽고 삶이 또 자체가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그 시간이 피부로 하는 우리 사후의 종교와 인습과 반복의 나날들. 그것들은 또다시 우리의 삶을 썩게하고 사랑을 고독 속에 썩게 한다. 마르께스의 "콜레라 시절의 사랑"은 바로 우리의 시간이 썩게 하는 너와 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콜레라는 인생이라는 강물에 띄운 배의 깃발에 쓴 경고다. 이 배가 뜬 강물의 주위는 온통 콜레라의 위험이 있다고 선장이 꾸며댄다. 그러나 마침내 선장 자신조차도 자신이 꾸민 이 연극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한 아무 의미가 없음은 짐승이기에 더욱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현대 사회속의 인간의 소외, 타성의 노예들의 행진 소설 속의 한 여인은 중얼거린다.
"참 믿을 수가 없어요, 그 오랜 세월 동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거짓말과 우스게 짓으로 고민하면서 사실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고 말이죠."
삶이라는 강은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 그러나 거기에 우리는 콜레라를 퍼뜨린다. 우리 스스로의 삶의 양상, 타성과 원한과 편견, 관계 등등이 병균이 된다. 페르미나 다사라는 여인은 남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속에 슬픔 하나 없이 눈감은 남편. 그 죽음은 끝내 미궁으로 남지만 공식적으로는 자연사다. 그러나 그녀를 50년이 넘도록 사랑해온 남자가 있다. 수많은 수난 끝에 마침 그 둘은 이 콜레라가 만연한 강을 통과하는 배에 오른다. 둘의 사랑은 이미 육체조차 말을 듣지 않는 계절에 이루어진다. 이루어지기 보다는 엉거주춤 머문다. 그는 마침내 "차라리 죽음보다 삶이라는 것이 끝이 없는가 보구나 생각하면서 놀란다. 오십 사세, 칠 개월 열 하루 날을 낮이나 밤이나 지속해온 타성의 길. 이 무섭도록 단조로운 반복이 그를 소름끼치게 한다.
마르께스의 소설이 현대인의 사랑 부재와 고독을 테마로 한 것이라면 떼렌시의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을 다룬 소설은 그 현대인에게 바치는 위안과 꿈의 잔치다. 둘 다 인간 숙명에 눈을 준 것은 비슷하나 심미적인 취향이 사뭇 다르다. 미르께스가 중남미 소설의 상표인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좀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이끈 흔적이 있다면 떼렌시는 오히려 19세기 낭만주의에서 유행하던 소설을 연상케 한다.
■ 떼렌시모익스「꿈이었다고 말하지 말아요」
고띠에는 "이국 취향"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나는 지리적으로 먼 것에 대한 동경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적으로 먼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겹칠 때 "이국취향 문학은 완성했다. 즉 "옛 일본 여인"따위가 구설수에 많이 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떼렌시는 그 먼 시대의 중동 알렉산드리아에 무대를 둔다.
떼렌시의 소설 앞에서 우리는 서반아 문학에 70년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캄프"취향을 만난다. 수산 손타그가 "문학의 해석에 반대하여"에서 언급한 인공적이고 이국적인 요소에 대한 관심 말이다. 독서나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은 옛 이야기에 대한 지식이 작품의 테마로 쓰이는 것을 우리는 요즘 흔히 본다. 물론 보르헤스의 "문학의 문학화"의 기법도 주로 책에서 읽은 테마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하지만 호세 마리아 까스테옛이 "9명의 최신 시인들"(바르셀로나, 1970)에서 언급한 점이 또 이런 점, 독창성에 병든 오늘의 문학에 또 다른 도전이기도 하다.
어떻든 이것이 소설일 때 우리는 19세기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는 리얼리즘에 대한 권태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 때도 있다. 오늘까지의 소설은 리얼리즘과 1차대전 이후 카프카, 헨리 제임스 푸르스트, 포크너 등의 형식주의적 실험 소설의 천국을 이루어 왔다.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도 따지고 보면 사실주의와 실험 소설의 결합에서 비롯된 것, 70년대 이후의 소설이 읽어버린 "이야기 하기"에 대한 구미를 다시 찾고 이런 낭만주의의 냄새나는 이국 취향의 주제를 사용한 때 우리는 복고주의라고 할 수 없겠지만 우리의 소설이 사실주의의 굴레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만 할 것같다.
떼렌시는 소설의 첫 부분부터 카다피의 향수에 젖은 싯귀절을 인용하고 있다.
"한 밤중에 눈에 안 보이는 가장 무도회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을 때.
그 신비스런 음악, 커다란 목소리,
기우는 너의 운수, 설계한 너의 작품들
결국 잘못 끝난 너의 삶의 계획들이
함께 섞여 나의 귀에 들려 올 때,
부질없이 울지 말라. 오래 전부터 이미 만들어져 온 사람처럼
사나이답게
멀어져가는 알렉산드리아에 작별을 고하라.
속지말라
"꿈이었다고 말하지 말라"
그런 헛된 희망은 받아들이지 말라.
오래 전부터 이미 만들어져 온 사람처럼
사나이답게
그런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존엄성을 잃지 말고
굿굿한 걸음 걸이로 창문에 다가가
감격스럽게 약자처럼 통곡이나 애걸은 하지 말고 마지막 도락처럼
듣도록하라, 그 소리들을 그 신비스러운 가장무도회의 아름다운 악기들의 소리를.
그리고 그대가 영원히 잃어가는
알렉산드리아에 작별을 고하라.
-카다피의 "신이 안토니오를 버리다"에서
그리고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가장 고독하고 섬세했던 인종의 마지막 증인"이었다는 포스터의 "알렉산드리아"라는 책의 한 귀절을 앞에 내놓는다. 로마의 장군 안토니오를 사랑했던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떼렌시의 소설은 안토니오가 여왕을 버리고 로마로 돌아가는 시절부터 시작한다. 로마에서 인내심 많고 교양있는 옥타비아와 결혼한 사실. 그 사실을 안 클레오파트라의 질투, 분노, 고뇌, 복수심이 많은 페이지를 물들인다. 온 나일강이 그녀의 고통으로 얼룩진다. "아, 이 강이 나의 뿌리를 씻어 내리는구나, 온 바다가 나의 사랑을 씻어 내리듯이! 그것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난 알고있어. 목숨보다 더 큰사랑, 아무 것도 거칠 것 없는 사랑. 이집트의 대여왕이 어떻게 달리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안토니오는 옥타비아와의 사랑과 로마의 평화속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그는 동양을 정벌하러 다시 원정을 떠난다. "나의 꿈은 너무 커 ! 이집트에만 남아 있지도 못해. 동방의 먼먼 수평선 끝까지 가고도 남아. 내 꿈은 나의 삶보다 커. 꿈을 부르기만 하면 온 길이 열리고 대양이 펼쳐지고 숲과 밀림이 활개를 쳐. 꿈이 펼쳐갈 더욱 많은 공간을 보기에 모든게 행복에 차. 꿈같은 도시들, 상상도 못할 보물들, 우리가 이름조차 모르는 신들이 우릴 기다려. 나의 꿈의 영토를 잴 순 없어 !"
이집트의 현자 라모세는 안다. "시란 향그러운 기름같은 것이어서 그 성질은 우리를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치지" 안토니오의 꿈도 역사가 이야기해 주듯이 완전한 자기 패망의 길로 이끌어간다. 그는 물론 그 먼 원정의 길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다시 만난다. 그러나 그 사랑도 또 그 원정의 꿈도 모두 라모세의 시가 된다. 오직 아픔과 실의만을 안겨주는 비극을 자초한다. 클레오파트라 편에서는 많은 사랑의 철학을 몸으로 배운다. 사랑은 만남의 행복만이 아니라 이별의 아픔 속에서 오히려 여무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사랑은 비극에 처한 연인 앞에서 더욱 굳세고 이해스러운 모습을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안토니오와의 재회에서 더욱 깊어만 간다. "어쩌면 사람의 본질이란 그 순간 순간의 임시성 자체에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사랑의 절정은 우리의 눈길의 잠깐의 마주침, 어딘가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의 그 뜨거운 불길에 대한 기억에 있었을 거야." 그러나 안토니오의 전쟁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옛 애인의 품에 돌아온 안토니오: "클레오파트라, 내 이제 하나의 거지가 되어 당신 곁에 왔구려. 불멸의 사랑은 한 순간의 결핍에서 오는 것일까…."
이집트에서 안토니오는 환락과 술독에 빠진다. 신에게 버림받은 안토니오의 자포자기는 클레오파트라를 더욱 아프게 한다. 한편 로마의 대 황제 옥타비오는 이집트를 치러 온다. 사랑 때문에 나라까지 잃게 된 여왕. 전기에 의하면 그녀는 피라밋속의 무덤에 홀로 들어가 숨졌다는 이야기, 나중에 안토니오가 그 속을 찾아가 같이 숨졌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이 소설의 한 대목은 포위 당한 안토니오의 자살을 그린다: "- -동방이여 ! - -그는 소리쳤다 - - 모든게 안토니오가 헛되이 그리던 꿈이었으리.
하면서 그는 단 칼에 배때기에 칼을 박았다. 그의 입술은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뇌까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알렉산드리아는 멀리 지워지고 있었다. 지워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마침내 꿈조차 아닌 어떤 먼 기억처럼 끝내 혼돈의 심연 속에 녹아들었다. 이 세상의 근원 속으로."
결론적으로 떼렌시의 소설은 하나의 서사시에 가깝다. 기법 면에 있어서도 각 상황의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사랑과 인생 행로에 촛점을 맞춘 시적 긴장 속에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실험 소설에서부터 자취를 감추었던 작가 자신의 상상과 감정이 소설의 이 곳 저 곳에 고개를 내민다.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서사시인은 이야기의 감동에 못 이겨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섞는다.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설교적인 문구들. 그것에 대한 사념의 파편은 설명도 없이 들어선 작가 자신의 성찰의 목소리다.
떼렌시 모익스는 이 소설에서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향수에 젖는 눈으로 그린다. 그러나 지나간 사랑의 이야기를 하면서, 들으면서 꿈과 야망과 실패로 얼룩진 오늘의 삶에 반추해 나간다. 기술적으로 현실을 들이미는 수법이 아니다. 목소리가 오늘의 목소리요 영원의 목소리다. 인간은 영원한 이야기의 오늘의 주인공이면서 나만의 이야기로 나의 사랑을 산다. 사랑이 순간을 통한 영원의 구현이라면 떼렌시의 소설 기법은 오늘 쓴 것이면서 오늘이 영원 속에 자리한 위치를 느끼게 한다.
우주가 혼돈이고 너와 나의 운명이 판가름할 수 없는 미궁을 향해 있다면 나와 같이 운명의 장난에 시달리고 웃고 즐기고 괴로워했던 시간 속에서 안토니오 같은 먼 형제를 느끼는 마음은 지금 밟고 있는 땅이 갑자기 한치쯤 붕 뜬 것처럼 현묘하게 생각된다. 오늘에 시달리고 나만의 문제로 급급해온 삶이 얄팍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다. 현실과 과거가, 아니면 현실과 꿈이 만질 수 없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것인데 왜 어떤 것은 사실 같고 어떤 것은 허황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떼린시의 사랑의 소설은 이런 뜻에서 우리에게 꿈과 사랑이 얼마나 절박하게 너와 나의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인가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