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한국현대예술사/ 그 현장을 찾아서

산기 이겸로와 서사 통문관




이창경 / 한양대 강사

머리말

어느 때건 인사동 골동품상 골목을 걸어 통문관에 들르면 古書를 읽거나 혹은 수선하고 있는 山氣 李謙魯선생을 만날 수 있다 . 이제 고희를 넘긴 노구임에도 매일 이곳에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책에 쏟는 그의 열정은 남다른 데가 있고, 이 열정이 오늘의 통문관과 山氣선생을 있게 하였다.

전문적인 고서수집가가 아니라도 우리는 통문관을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통문관은 해방이후 이 나라의 출판문화를 지켜온 출판계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으며 더구나 고서분야에 있어서는 아직도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있다 . 이것은 통문관이 출판업과 고서판매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山氣선생 은 藏書家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수장하고 있는 전적은 대략 2만여 책을 헤아리며 이 중에는 보물로 지정된 전적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우리나라 출판문화를 이해하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연구자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전적수집과정에서 터득한 서지에 관한 그의 식견은 남다른 데가 있다.

이처럼 우리 출판 문화사에 있어서 통문관의 위치는 묵과할 수 없으며 고서적에 쏟은 山氣선생의 집념은 우리의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려는 한 표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하여 70평생을 오직 책과 함께 외길을 걸어온 山氣선생의 역정을 살펴보고, 문화공간으로서의 통문관의 역할과 고서수집에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山氣선생과 통문관

서점 점원으로 첫출발

山氣선생은 1909年 10月 10日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주림리 경방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李斗璜과 어머니 金李元사이에서 4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일합방이 되기 바로 한 해 전인 어수선한 시기였다. 京坊이라는 마을은 全義 李氏 약 40호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 李斗璜은 소규모로 농사도 지으며 포목상을 경영하였고, 어머니 金李元은 따스하기 이를 데 없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였다. 지금도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고 山氣선생은 회상한다. 경제적으로는 그리 넉넉치 못하였으나 유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태어난 그 이듬해 아버지가 갑자기 타계하였다 이때 맏형의 나이 열 여섯, 그 밑으로 세살 터울의 6남매를 남겨 놓고 세상을 뜨신 것이다.

이후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6남매를 길러내는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가정적 어려움 속에서 맏형에게서 한자를 익혔고 열 살이 되던 1918년 봄에는 삼화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맏형은 입학을 반대하였으나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간신히 입원서에 捺印하였던 것이다. 이 보통교는 4년제였는데 옛 관아의 東軒을 교사로 쓰고 있는 고색 창연한 학교였다. 4년간의 수기간중 그에게 의욕 잃지 않도록 격려해준 선생님은 申선생이라고 하는 분이었다. 이분은 맏형의 만류로 4.5일간 학교를 계속결석하고 있을 때에 집에까지 찾아와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하여 업을 계속할 수 있게 이끌어 주셨다.

어렵게 보통교를 졸업한 그는 여기서 중단할 수 없다는 지식의 충동을 느꼈다. 그리하여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꿈꾸게 되었다. 학비를 대줄만한 재정적인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홀어머니와 형제들의 곁을 떠나 맨몸으로 수학의 길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무모한 짓이고 낭만적 환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학문을 접해보고 싶었고 지식에 대한 동경이 그를 묶어두지 못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고민한 끝에 고난의 길을 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간신히 여비만을 마련한 채로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때가 1925년 열 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부산에서 경찰관에 의해 강제저지를 당하여 일본에 갈 수 있는 배를 타지 못하였다. 이때는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일본인이 한국인을 보는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고 민족감정 또한 날카로워져 한국인의 일본출입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유학의 길이 좌절되자 열 일곱 살의 李謙魯는 앞길이 막연하였다. 일본으로 간다고 해도 뚜렷한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일본 땅에 발길 한번 들여놓지 못하고 예서 포기해야 한다고 하니 허무하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아득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며칠 동안 부산에서 배회하다가 서울에 가서 성공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서울에 올라와도 역시 그는 혼자였다. 이곳저곳 다니며 무엇부터 착수해야할 지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친구 李泰植을 우연히 노상에서 만났다. 李泰植은 보통교 동창생으로 나이가 두어 살 위였다.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李泰植은 書肆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혈혈단신 타향에서 고향친구를 만나게된 것은 어린 나이에 마음에 큰 위안을 주었고 書肆라하면 많은 책을 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선뜻 응낙하였다. 이것으로 李謙魯는 처음으로 書店과 인연을 맺게되었다. 이 서점은 인사동에 위치한「선문옥」이라는 상호를 가진 책방으로 그리 큰 서점은 아니었으나 다행히 이곳에서 각 방면의 서적을 대할 수 있었고, 「선문옥」과의 인연은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은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서가에 진열된 책들을 틈틈히 읽으며 동경유학에의 좌절에서 오는 안타까움을 해소할 수 있었다.

통문관의 전신 금항당서점

선문옥에서 낮에는 서점의 일을 돌보며 그 분야의 물정을 익혔고 밤늦도록 책들을 읽어 서적에 관한 전문적 지식의 폭을 넓혀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그의 가슴속에는 「내 손으로 전문적인 서점을 이룩해야 되겠다」는 강한 의지가 타오르기 시작하려다. 「그리고 이 서점 경영을 밥벌이로만 생각하지 말고 내 생의 뜻을 찾아보자」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감래하면서 청춘을 걸었다.

이와 같이 10여 년을 서점 점원으로 지내면서 꿈을 키워오던 끝에, 1934년 3월에 관훈동 37번지(지금의 수도약국자리)에 金港堂이라는 상호로 4평 남짓한 소규모의 책방 문을 열게되었다. 이 때가 李謙魯의 나이 26세 이었다. 그때 인수받은 책은 중교 교과서와 참고서 등이 고작이었고, 서가도 낡아서 무거운 책을 얹어 놓으면 와르르 무너질 판이었지만 그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끼니를 걸러가며 고생한 보람으로 혈혈단신 상경하여 갖은 고생 10년만에 내 소유의 서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여간 기쁨에 넘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수하기 전의 서점이름이 금문당이었는데 책방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던 중 금할당서적이란 상호로 간행한 서적이 언뜻 눈에 띄었고, 새로 간판을 할 필요 없이 금문당이라고 쓰인 간판의 「文」子만을 港으로 고쳐 쓰기로 하였다. 이만큼 그에게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당시 관훈동, 인사동에 걸쳐 있었던 서점으로는 翰南書林, 文光書林, 廣東書局, 三中堂, 東光堂, 杏林書院, 漢城圖書, 選文屋 등이 있었는데, 金港堂이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인들 서점은 지금의 충무로에 많았는데 새 책방으로 대판옥서점이 가장 컸고, 다음으로 日韓書房, 양서를 전문으로 하는 마루젱 (丸善)이 있었으며, 고서점으로는 文光堂, 郡書堂, 至誠堂, 勉强堂, 金鋼堂, 文明堂 등의 書店이 있었는데 상권은 대부분 日人들의 손에 있는 형편이었다. 해방이후 日人들은 모두 쫓겨갔고, 한국인들이 경영하던 서점들도 대부분 사라져 갔는데 서점들도 통문관(당시 金港堂), 三中堂(출판사로 전향), 杏林書院(의서전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초기 金港堂에서 취급했던 서적으로는 소위 딱지본이라고 하는 육전소설류와 교과서들이었다. 밑바닥에서 출발한 그는 오직 성실과 근면으로써 고객을 대하였고 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이 길이 그가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고 여기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서점은 점차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고 단순한 책장사가 아닌 문화사업으로 서점을 경영해야 되겠다는 의지도 굳어졌다.

金港堂서점을 경영해오기를 10여 년,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을 맞은 후 일차로 그간 써오던 상호에 대하여 불만도 있고 해서 상호를 변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金港堂은 서점다운 인상을 풍기지 못하였고 金港堂이라는 전당포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金港堂이라는 간판을 떼어내고 통운관이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국민들 사이에 고서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편이어서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수집 보존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을 느꼈고 한편으론 출판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6.25와 통문관신축

해방의 기쁨도 잠시 뿐이었고, 출판을 통하여 민족성을 회복하는데 이바지하려는 뜻도 전쟁의 와중 속에서 꽃피울 수 없었다.

6.25가 발발하자 이로 인하여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각 분야에서 피해를 보았던 것은 헤아릴 수 없다. 서적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중요한 전적들이 약탈당하고 화제로 인하여 소실되는 등의 비운을 겪게 되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山氣선생은 책방을 지키고있으면서 당시 원남동 네거리에 있었던 苑南書院과 科學書院이 폭격을 받아 잿더미로 화해버린 것을 목격하였다. 또한 관훈동 18번지에서 고서전문으로 유명했던 翰南書林은 창업주인 心濟 白斗鏞이 작고한 후 澗松 全螢弼이 인수하여 李淳璜게 넘겨주었는데 이 책방의 고서들도 6.25동란 때에 흩어져버려 대구시장 바닥에 산더미같이 쌓여 밝히고 찢어지고 흩어지는 모습을 목도하기도 하였다.

山氣선생은 1.4후퇴때 李弘植博士의 호의로 용인군 기흥면 지곡리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도 안전한 곳은 못되어 李弘植박사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웬만한 가재도구는 다 팔아 양식과 바꾸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고서간행회에서 1908연에 간행한 朝鮮群書大系 1질 8책을 메고 출발하였다. 부산에 도착하여 이 책을 처분하여 생활할 작정이었으나 학교나 개인이나 모두가 피난생활에 쪼들려 책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미대사관 문정관으로 있던 슈바하(한국명 설백 )가 이 책을 1백 20만 환에 사주어 생활할 수 있었다. 또한 설백은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도강증을 미국회도서관 도서수집원의 신분으로 발급해 주어 폐허속에서 다시 재기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서울에 돌아와보니 도적들이 빈집에 남아 있는 문화재 전적 등 가재도구를 닥치는 대로 부산 대구로 빼돌리는 밀무역을 자행하여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山氣선생의 서포 통문관에 있었던 2만여 권의 전적들도 오간데가 없었다. 그럼에도 관훈동 18번지 翰南書林자리에 집에 남아있던 책을 약간 꽃아 놓고 고객도 없는 서점을 계속하였다. 도시락을 싸들고 서점에 나와 문을 열고 있었으나 무슨 경황에 책이 팔리겠는가.

이렇게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서점을 계속 지켜오며 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감정하고 구입을 하고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적당한 구매자를 알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차근차근 서점을 경영해 오면서 1967년에는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다. 그 때의 서포가 너무 낡아 있어서 바람만 세차게 불어도 부서질 듯한 판자집이었으며 관훈동 18번지의 건물도 2층이었지만 노후해서 비스듬히 누워 금방 쓰러질 듯한 목조고가였다.

이러한 고가에서 書肆를 계속하고 있으니 친구나 고객들로부터 「여보 돈을 벌어서 무엇하오. 집이나 하나 새로 짓지」하는 야유심인 말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건물을 새로 지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고서수집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67년 초에 姜周鎭 국회도서관장의 도서에 대한 형안으로 선현들의 간찰 1천여 점, 대한제국때부터 6.25전란까지에 발행된 각종 잡지류 1천여 책, 부편 교과서류 문서류 등을 몇 차례에 걸쳐 양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통문관신축의 시발이 되었다. 그해 5월에 공사가 착수되었는데 대지 19평 총건평 70평밖에 안돼는 작은 건축물이었지만 1백만 원 남짓한 예산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시작한 공사기 때문에 중단할 수도 없는 실정이어서 사채를 끌어들여 그해 10개월에 준공할 수 있었다. 준공기념으로 우리나라 고지도와 고문서 전시회를 개최하여 성황리에 끝냈다. 그러나 큰 문제는 고액의 부채였다. 허리가 잔뜩 휘도록 걸머진 채무를 청산하는 것이 당면한 문제였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매달 15만원씩 지불해야되는 액수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종로2가에서 2대째 계속해온 덕흥서림이 상가 주택자금의 명목으로 은행융자를 받아 고층빌딩을 지어놓고 끝내는 부채 때문에 주인도 서점도 함께 사라진 것을 직접 보았고, 이밖에도 이러한 예는 흔히 목도한 사실이었기에 더욱 초조하였다. 그러던 68년 2월 하순께 서강대학교의 李光隣·李基白·金烈圭 세 교수가 찾아와 학교 도서관에 도서구입비로 특별예산을 세워 놓았으니 비장해둔 장서를 양도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왔다. 다급한 때여서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세 교수가 연 사흘동안 집에 와서 가려낸 책이 2천 7백 17권이었다. 소중히 간직해 온 애장서를 처분한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기도 하였으나 책이 어디에 있든지 보존이 잘되고, 널리 이용될 수 있다면 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고, 자금사정도 다급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것으로 현 통문관 건물이 존재할 수 있었고, 통문관의 제3기라 할 수 있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통문관 건물 앞에는 목판에 「통문관」세글자가 새겨진 현판이 있는데 이것은 검여의 글씨라고 한다. 검여는 생전에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겨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유일무이하게 우수로 좌서한 것은 「통문관」세자와 좌수로 좌서한 「六經一琴」 세 폭은 後日談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한창 통문관 신축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劍如·靑溟·白江·山氣 등이 모인 자리에서 통문관의 현판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거론 되었는데 白江이 검여의 글씨를 대리석에 刻하여 書肆前面에 붙박이로 붙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의견을 내놓아 모두 동의하였다. 글씨 쓰기에 임박해서는 검여나 山氣는 전통에 따라 우서할 예정이었는데 청명이 말하기를 해방 이후에는 한글이나 한자를 막론하고 횡서는 좌서하기로 되어있는데 우서할 것 같으면 다음 세대에 혼동을 줄 것이므로 좌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 또한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기 때문에 우수로 좌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검여 생전에 유일하게 한족의 우수좌서를 남기게된 연유이다.

이후 1년뒤 검여는 애석하게도 뇌출혈로 우반신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좌수로 글씨를 써서 서도인들로부터 경이와 讚嘆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검여의 생애에서 최후의 절필작이 된 좌수좌서 「文經一琴」은 全南 康津 茶山草堂에 걸려 있는 원당의 파격적 좌서라고 하는 목현판을 검여가 사진을 보고 임서한 역작으로 불연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일시에 삼폭을 임서한 역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李恒寧 宋在萬 鄭圭斌 등이 각자 한 폭씩을 收藏하고 있다 한다.

첫출판물 聖雄 李舜臣

일제의 태평양 전쟁으로 패망에 임박한 수년동안은 물자의 궁핍으로 출판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점마다 서가가 텅텅 비어 있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일인들이 비장했던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고 새로 출발하는 출판사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해방이후 국내의 첫 간행물로는 1945년에 正音社에서 간행한「朝鮮史」였다. 이 책은 權惠奎가 쓴 「朝鮮留記」를 개명한 것으로 해방전의 낡은 지형을 그대로 쓴 것이었으나 그해 재판을 찍을 만큼 많이 팔렸다.

통문관에서도 1946년 2월에 첫출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桓山 李久宰의 「聖雄 李舜臣」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1931년에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초간 하였던 것을 재간한 것으로 爲堂 鄭寅普가 序文을 쓰고 面扉 뒷면에 文一平 李殷相 白樂濬 兪珏卿 등 간행에 도움을 준 이의 이름이 적혀 있다. 책의 크기는 4.6판으로 서문·목차·본문을 합하여 80면정도에 이르는 소책자이다.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동기는 桓山선생의 사위 金炳濟와 큰아들 李元甲과의 해방 전부터 지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당시에는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각종 물자가 귀했고 더욱이 인쇄용 종이를 얻기란 극히 힘들었으며 종이 값이 날로 앙등하는 바람에 서적을 간행하기란 극히 어려운 시기였다. 「聖雄 李舜臣」의 정가는 9원이었고, 著者 兼 發行者는 廣州郡 中垈面 芳荑里 李之甲, 印刷人 徐銅奉, 印刷所는 서울市 中區 武橋洞 七一白榮堂印刷所, 發行所는 通文囥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1946년 재판하였고 1976년 2월에는 忠武公紀念事業會에서 이 책을 대본으로 복사출판하기도 하였다.

이후로 46년 8월에 新文庫 제 1호로「靑丘永言」을 영인 출판한 것을 비롯하여 星州本 松江歌辭(1955) . 初刊本 杜詩諺解 4冊(1955) 訓民正音(1957) 月印千江之曲(1961) 梁琴新譜 韓國美術史及美術論故(1963) 등과 같은 국학관계 서적을 주로 간행하여 초창기의 국학발전에 기여하였다.



月印千江之曲의 影印

통문관에서 간행한 책 중에서 기억될 만한 것 중의 하나가 「月印千江之曲」이다. 이 책은 보물 제398호로 지정된 陳琪洪 所藏本을 底本으로 1961년에 영인한 것이다.「月印千江之曲」은 국립도서관 소장 「釋譜詳節」卷6에 끼어 있던 落張板心에 「月印千江之曲 上」, 卷9에 「月印千江之曲 中」이라고 쓴 落張板心이 끼어 있어 상·중·하로 이루어진 것만을 알 수 있었으나(교정본 釋譜詳節속에는 15장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음) 원본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중 1960년 말경 零本 1冊이 光州 陳琪洪씨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陳琪洪씨는 곧바로 통문관에 장거리 전화로 연락하였고, 山氣선생은 즉시 영인 복간할 것을 제의하였다. 본래 이 책은 來蘇寺 白鶴鳴禪師의 비장이었는데 金性連師를 거쳐 鞠默潭 宗正이 입수 간직하던 것을 陳琪洪씨가 입수하게 되었다 한다. 初刊 年代는 世宗 29년 (1447)이나 늦어도 동왕 31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활자는 한글은 목활자(一說 銅活字)이고 한문소자는 세종 16년에 주조한 甲寅字이다. 訓民正音 創制 후에 간행된 正音文獻의 最古本의 하나라는 점, 한자음의 종성표기에 종성이 없다는 점, 모음자의 자형변천 과정을 알 수 있다는 점, 15세기 국어 연구의 풍부한 자료가 된다는 점 등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책이다.

이러한 책을 영인하게 된 통문관에서 최대한의 성의를 다하는 원본을 재현시키고자 하였다. 종이는 全州製紙에 특별 주문한 楮紙를 썼고 인쇄는 옵셋인쇄로 하였으며 冊衣도 옛스럽게 蓮花紋菱花板에 밀었고 제본도 아래 위 모서리를 藍色 비단으로 싸고, 실주멍은 보통 고서가 다섯 구멍인데 아래 위 모서리에 한 구멍씩을 더하여 일곱 구멍을 뚫어 철하였으며 冊匣까지 곁들였다. 간행은 2백부 한정판으로 하였는데 제작비만도 당시로 1백만환 가까이 들었다고 한다. 한 책을 간행하면서 이렇게 엄청난 경비를 투자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山氣선생의 깊은 애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염낭본「靑丘書畵家名·字·號譜」

염낭본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든 소형책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통문관에서 「靑丘書畵家名·字·號譜」를 刊行하면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과거 우리나라 출판물에는 袖珍本·懷中本 등이 있어 주머니 혹은 옷소매에서 넣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있었으며 宋나라에서는 망건 통에 들어갈 만한 작은 책이라는 뜻의 巾箱本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문고본이라 하여 소책자가 간행되고 있지만 이는 책의 규격에는 적당한 표현이 아니며 袖珍本·懷中本·巾箱本이란 명칭은 외래어인 까닭에 영낭본이라 하였다 한다. 책의 크기는 10×13㎝로 역대 예술인들의 字·號·名을 수록하여 필요한 때에 수시로 찾아보도록 하였다. 孟寅在가 편하였으며 1978년에 간행하였다.

朝鮮王朝實錄의 領布

朝鮮王朝實錄은 1천 8백 93권의 8백 88책으로 된 朝鮮朝의 정사이다. 朝鮮王朝實錄의 영인 간행은 1930년 초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30질을 발행하였고, 해방후 1946년에 정음사에서 영인에 착수하였는데 1947년 太宗恭定 大王實錄까지 간행하고 중단하였다.

그 후 1952년 일본 학습원 동양문화연구소에서「李朝實錄」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을 통문관에 판매 위탁를 의뢰해와 국내 저명자들에게 배본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산기선생은 내심으로 우리의 국보적인 문헌이 일본에 의하여 간행되고 있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55년 초쯤에 東滄 元忠喜가 찾아와서 일본간「李朝實錄」을 보고서 깜짝 놀라며「이형 이 실록이 어디서 나오는 거요」하고 물었다. 산기선생은 그렇지 않아도 못마땅하고 생각하고 있던 터이라 「큰일났소 우리 실록을 일본인들이 간행하게끔 되었으니」하고 한탄조로 말하니 동창도 분개하며 관계요로에 진정을 해 보겠다고 하며 한 권을 빌려 가지고 갔다. 그후 드디어 1955년 말에 우리 손에 의하여「朝鮮王朝實錄」이 떳떳하게 간행되었다. 아마도 동창의 진정이 실록 간행의 동기가 되지 않았나 한다.

韓國出版文化史資의 寄贈

山氣선생은 1975년 출판문화회관의 준공기념으로 평소 고출판문화에 관심을 갖고 수집해 오던 귀중한 출문문화사자 380종을 출판문화협회에 기증하였다. 이 자료는 冊版·活字·菱花版·高麗木版本·活字本·新式鉛活字本·朝鮮後期本版本·坊刻本·矬本·地圖類 등으로 우리나라 출판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 자료는 출판문화회관 전시실에 진열되어 있는데 우리의 출판문화를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종류별로 대표적인 것을 들어본다.

1.冊板

前燈新話(明 ?佑 撰) 下卷 第23·24面 1張(朝鮮後期 刻)

2.活字

中·小·細字 3種 200개(19세기 경에 제작된 本 活字)

3.菱花版

冊衣用菱花版 5종 3張(朝鮮後期 刻)

4.高麗木版本

大盤岩波羅密多經(唐 玄裝 奉詔譯)零本 1冊, 高麗 高宗25年(1238)刻

5.活字本

高麗鑄字本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影印本 下卷 1冊

癸末字本

十七史纂古今通要(元 胡一桂 撰, 1412年 刊)

卷16 斷葉 額子 1개

甲寅字本

唐柳선생 集(唐 柳完元 撰, 1434年 刊)卷10 1冊

丙辰字本

資治通覽綱目(宋 朱熹 撰, 中宗朝 刊)卷1下 1冊

庚牛字本

詳說古文眞寶大全(元 黃堅 編, 1451年 刊)後集 卷9 斷葉 2張 額字 2개

乙亥字본

三國史節要(盧思愼 等 奉命撰, 1476年 刊) 散葉聚合 1冊

成寅字本

易字啓夢要解(宋 朱熹 撰, 1458年 刊)斷葉 1張 額子

乙西字本

文翰類選大成(明 李伯王 撰, 1486年頃 刊)卷32 1冊

甲辰字本

保閑齊集(申叔丹 撰, 任亂以後 申辰字 覆刻本)1冊

癸丑字本

新增東國與地勝覽(李荇 等 增修, 1530年 刊)卷54 1冊

丙子字本

朱字語類(宋 朱熹 撰, 宣祖初期 刊)卷54·55 1冊

再鑄 甲寅字本

梅月堂詩集(金詩習 撰, 1583年 刊)卷10 1冊

再鑄 乙亥字本

小學諺解 斷葉 2張 額子 1개

印經本活字本

六祖大師法寶壇經(唐 惠能 撰, 1496年 刊)斷葉 1張 額子

宣祖實錄字本

戊申字本

戰國策(漢 劉向 撰, 簫宗朝 刊)卷9·10 1冊

韓構字本

盛明五大家律詩抄 卷3 上·中 下 1冊

再鑄 韓構字本

奎華名選(朝鮮 講製文臣 編)1冊

校書囥印書體字本

農巖集(金昌協 撰, 1710年 刊)1冊

壬辰字本

耆相佩印?載錄 1冊

丁西字本

朱書白選(正祖御定編, 1794年 刊)卷1∼6 2冊

整理字本

太學思杯詩集(正祖御定編, 1798年 刊)券1·2 1冊

再鑄整理字本

國語 券4∼8 1冊

聚珍字本

金陵集(南公轍, 1815年頃 刊)卷3 1冊

箕營活字本

五山集(車天로, 1792年 刊)券7·8斷葉 2張 額子

全史字本

耳溪集(洪良活, 1843年 刊)券13·14 1冊

觀象監本活字本

大韓光武11年歲次丁末明詩曆 1冊

學部印書體 木活字本

朝鮮歷代史略 2卷 1冊

整理學體 木活字本

雲庵集(朴文一, 1900年代 刊)권 11 1冊 외 2종

全史字本 木活字本

東里詩集(金照, 1933年 刊)卷3·4 1冊

筆書體 小木活字本

詩宗西集(張混 編, 1801年 刊)1冊

名種 本活字本

關里誌(1846年 刊)券5 1冊

陶活字本

經史集說(19세기경 刊)卷2·4, 1冊

匏活字本

論語集註大全(19세기경 刊)券8, 1冊

6.新式鉛活字本

內閣烈傳(玄映運 譯 1886年 刊)

7.朝鮮後期 本板本

內閣板本(論語諺解, 1820年 刊) 1冊 등

8.坊刻本

京板本 簡牘精要,(1869年 刊, 單券), 完板本 화룡동(1900年頃 刊, 上·下·合本), 私家板 孔子通經, (1903年 刊 3冊), 石版印刷本 院堂拓量 1928年 刊單卷)

9.矬本·地圖類

溪海東故眞鑑禪師碑(單券 1冊, 887年 建,1725年 再矬本)

山氣선생의 古典籍收集

山氣 선생은 스스로를 書履라고 말한다. 책벌레라는 말이다. 70평생을 책과 함께 생활해 왔으니 적절한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고서적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별의별 약을 다해도 좀처럼 근절되지 않은 書履의 생명력은 오로지 이 한길만을 걸어온 山氣선생의 끈질긴 집념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山氣선생은 누구보다도 서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책을 하나의 생명체로 파악하고 그 속에는 선인들의 무한한 사색과 고뇌가 숨쉬고 있음을 잘 안다. 책갈피 하나하나, 활자의 모양, 심지어는 그 속에 쓰인 낙서와 메모에까지 그의 눈이 머무르지 않는 곳이 없다. 깊은 애정으로 책을 쓰다듬으며 책을 지켜왔고 자신을 지켜왔다. 전시용이나 돈벌이로써의 책이 아니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이 책속에 번져 있는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山氣선생이 古書 收集을 시작한 것은 그의 서점개업과 함께 출발한다. 1930년대 중반이었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여러 종류의 책을 대할 수 있었던 것도 원인이었겠지만 우리의 중요한 전적들이 일인들의 손에 의하여 마구 유출되어 나가고, 또는 무지한 사람들에 의하여 파손되는 것을 적지 않이 지켜봤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우리 민족유산을 그대로 내던지는 것과 같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책이 나타나면 선뜻선뜻 인수할 만큼 재력이 풍부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오직 부지런함과 근검, 그리고 신용과 사명감으로 전적을 수집해왔다. 李圭景은 「五州衍文長炽散稿」에서 책의 10액을 들었는데 그중 갖은 전란과 화재 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아서 책을 환지로 쓰거나 뜯어 벽을 발라 없어지는 것, 장서가들이 혼자만 비치해 두고 내놓지 않아 쥐와 좀이 훼손하고 하인배들이 훔쳐다 팔아 완질이 없게 되는 것 등을 들었다. 이 점은 山氣선생도 수십년동안 고서를 수집해 오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 중의 하나이다.

수년동안 모아왔던 고서들은 2만여 책을 헤아린다. 1970년대 국학에 관한 관심이 점고 됨에 따라 각처에 산재한 개인소장 전적을 파악하기 위하여 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姜周鎭 千惠鳳 등을 중심으로 한국학자료 보존회에서 山氣선생 소장 고서를 「한국전적종합목록」제1호로 1974년에 간행되었다. 여기에는 1600여종 정도의 고서가 수록되어 있는데 전소장도서 의 1/3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山氣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고서 중에는 「周易淺見錄」「禪宗永嘉集」「詩淺見錄」 「書淺見錄」「家山和尙法語略錄」「詩用鄕樂譜」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고서와 함께 살아오는 동안 책에 관하여 남다른 체험을 갖고 계신 분이 山氣선생이다. 책에 얽힌 그의 일화 몇 가지를 뽑아 본다.

詳定禮文

詳定禮文은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프랑스 국립도서관 藏)보다 130여년이나 앞서 간행된 주자본이다. 「東國李相國集」의 '新印詳定禮文跋尾'에 '고려가 강화로 천(1232)한 뒤 예관이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詳定禮文」을 李奎報가 가져온 것에 의하여 주사로 28부를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禑王 3年(1377) 7月에 淸州興德寺에서 찍어낸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보다 그 간해이년대 앞서기 때문에 인쇄 발달과 書誌的인면에 있어서 상당한 관심이 쏠리는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만 발견되면 그야말로 국보중의 국보가 될 수 있는 책이다.

하루는 낯선 젊은이가 통문관에 찾아와 고서목록을 내놓는데 그 중에 「詳定禮文」2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격을 물으니 쌀50가마를 요구하였다. 50가마라야 당시 돈으로 40만원밖에 안돼는 액수였다. 곧바로 책을 보러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머뭇거리며 당장은 안되고 며칠 후 같이 가기로 굳게 약속하고 돌아갔다. 그후 가슴 조이며 기다려도 그 사람한테서는 다시 연락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목록을 가지고 7·8차례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꼭 살테니 실물을 한번 보자고 제의했지만 대답은 전과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古家에 책은 있는데 시가를 알기 위하여 탐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후일에 安東市에서 고서를 취급하는 모씨의 손을 거쳐 대구의 모장서가의 수중으로 들어 갔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허위로 날조된 것 같지는 않으며 섣불리 공개했다가 말썽이 나지 않을까 하여 극비에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覆刻本 春秋左傳

태종 3년 癸未(1403)에 동활자를 주조하여 인쇄한 계미자본은 「十七史纂古今通要」「東萊선생校正北史詳節」「宋朝名臣百家播芳大全文粹」등 수 종이 있다하며「春秋左傳」은 癸未字로 간행되었던 것 중에 하나다.

山氣선생이 소장하고 있는「春秋左傳」은 단종 2年에 복각한 것인데 전질 70권 17책이다 이 완질을 구하기 까지는 곡절이 있었다.

6·25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서울에 돌아오는 도중 대구에 들렸다. 그때는 미처 가지고 가지 못했던 책들이 대구·부산 쪽으로 마구 밀려들어오던 때였다. 그런 까닭에 락질이 대부분이었고 파손이 심하였다. 여기에서 「春秋左傳」3책을 사들고 올라왔다. 그후 얼마 지난 어느날 고물행상으로 부터 고서 한짐을 사들였는데 이것을 정리하다가 전날 대구에서 구한 「春秋左傳」과 똑같은 판본의 것을 몇 책 발견하였다. 이를 전에 것과 맞추어보니 그래도 몇 책의 次帙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또 전부터 알고 지내던 灘隱 金孝植이 춘추를 소

개하였는데 역시 같은 단본이었다. 이로써 수년만에 3차례에 걸쳐 17책 전질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소장하였던 것으로 6·25 동란 때 뿔뿔이 흩어졌다가 다시 한사람의 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더구나 춘추는 經檏所藏本, 癸未字本, 覆刻本, 再覆刻本, 補刻本 등 여러 종이 있는데, 복각본 전질이 흩졌다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寄綠이라 하겠다.

退溪선생 文集 重刊詩 日記

이 책은 全 28張의 筆寫本으로 憲宗2년(1836) 10월에 參判 李泰淳과 士林들이 文集重刊에 대한 發議로부터 憲宗 8년 (1843) 윤7월 24일 문집의 간행이 끝날 때까지 문집간행에 관한 세부사항을 기록해 놓은 일기이다. 退溪集 重刊의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인데 우연한 기회에 山氣선생의 손에 들어왔다.

1975년 12월 오후 인사동 今蘭 金同圭의 골동품가게「仁和堂」에 찾아갔다. 가게에 들어서자 누더기가 다된 고서뭉치가 눈에 띄었는데 종이의 고색으로 보아 반듯이 쓸만한 책이 있으리라는 육감이 들었다. 다짜고짜로 흥정을 하였다. 그러나 김동규는 이미 다 뒤져 보았지만 다 쓸데없는 휴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미련을 지을 수가 없어 끈덕지게 졸랐다. 그러자 할 수 없다는 듯 金同圭는 자기가 산값에 얼마를 남기고 넘겨주었다. 책뭉치를 갔다놓고 일말의 기대를 갖고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먼지뿐인 휴지조각들이었다. 그러던중 얄팍한 책들이 똘똘 말린 채로 꾸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눈을 크게 뜨고 펴보니 바로 退漢선생 文集 重刊日記 28장이었다. 이렇게 꾸겨진 채 있었으니 金同圭의 눈에 띠지 않았던 것이었다. 책을 오래 마루다 보면 이러한 육감도 작용하는 것인가 보다.

靑丘永言

靑丘永言은 海東歌謠·歌曲源流와 함께 우리나라 3대가집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金天澤이 영조 3년(1727)에 그때까지 전해오던 시조를 수집하여 鄭潤卿의 서문을 받고 자신의 권말지를 붙여 편찬한 것이다. 간본은 없고 一石本·가람본·六堂本·李家源本 등의 필사본만 전해지고 있다.

山氣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靑丘永言」은 南波巨士라는 장인이 찍혀 있는 편자의 자필원고본으로 유일본이다. 천여 수의 시조를 곡조에 따라 분류 배열하려고, 初中大葉에서 初數大葉의 첫 수까지는 작자가 밝혀있지 않으나 그 뒤부터는 연대순으로 작품을 편차하고 작자의 성명과 간단한 약력을 기록했다. 고려말로부터 당시대까지 국왕·관료·문인·기녀 등 다양한 계층의 작품이 망라된 시가사상 최초로 시조의 정리에 공헌한 책으로 1948년에 朝鮮珍書刊行會에서 이를 저본으로 간행되기도 하였다.

본래 이 책은 吳璋煥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6·25가 발발하자 吳璋煥은 수장하고 있던 책과 가족을 남겨둔 채 월북하였다. 1953년 봄 1·4후퇴로 피난을 갔다가 입경하여 통문관에서 계속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吳氏의 장인이 찾아와 자기 사위의 장서를 인수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吳璋煥과 山氣선생은 전에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여서 성의껏 가격을 쳐서 일괄 인수하였다.

그러나 천하의 고본인 「靑丘永言」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의 부인이 「주인이 점심을 굶어가며 이 책을 입수하시고 무척 아끼셨는데 다른 책만은 다 팔아도 이만은 꼭 간직하였다가 후일 그이를 만나는 날 내보여주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고 하며 팔지 않겠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후 1년이나 지난후 장인이 다시 찾아와 사위를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의 딸이 책을 어루만지며 눈물짓고 있으니 차라리 팔아치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인수를 제의해 왔다. 그리하여 그때 돈 1만 5천환을 지불하고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梁琴新譜

「梁琴新譜」는 국악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데 광해군 2년 (1610) 梁德壽가 그의 친구 任實縣監 金斗南의 譜法을 임실에서 刊行한 것이다. 김두남의 跋文에서 '余謂師 日善彈琴 又能文作謂傳法史 琴道不絶非師責耶'라 하여 刊行한 까닭을 말하였고 세조악보 육대강에 합자보와 내보로써 기보하였고 평조·우조·우조계면조로 9곡의 속악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국내에 5책 미만인 희귀본이다.

1955년 5월 초순 통문관을 지키고 있다가 고서화예 조예가 깊은 灘隱 金孝植이 무엇인가를 옆에 끼고 안국동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에 그를 불러들여 가지고있는 물건을 보자고 하니 「이거 양금신보인데 값이 비싸서 살수 있을까」하며 國樂院에 팔러 가는 중이라 하였다. 값을 물어보니 5만환을 요구하기에 4만5천환으로 절충하여 구입하게 되었다.

1959년에 통문관에서 이를 저본으로 영인간행되었는데 序는 李秉岐, 解題는 李惠求, 跋은 張師勛이 썼고, 뒤에 咸和鎭의 「韓國音樂小史」를 첨부하였다.

五經淺見綠

五經淺見綠은 權近 (1352∼1409)의 著書로 五經 중에서 의심스러운 구절에 대하여 註解論述한 책인데 五經중 예기천견록은 太宗5년 (1405)에 계미자본으로 인출되었고, 그후 1418년에 아들 도가 癸未字本을 복각 간행하였으며, 숙종31년 (1704)에 제주목사 宋延奎가 중간하여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다. 그러나 易·書·詩·春秋에 대한 淺見綠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陽村이「禮記淺見綠」만을 撰述했을 뿐이라고 하거나, 5經에 대한 津見綠을 모두 撰述했으나 「禮記」만 刊行되었고 나머지는 未刊으로 원고가 유실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1891년에 한국 유학생으로 내한하여 통감부와 총독부의 통역관 생활을 하다가 1911년에 귀일한 서지학자 判問恭作 (1868-1942)도 「'陽村行狀' 의 撰者는 陽村의 四書五經의 口訣을 정한 사실과 禮記淺見錄의 찬술을 혼동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어느 사이에 五經에 대해 각각 淺見綠을 撰한 것처럼 전하게 된 것은 오전이며 큰 착오이다 (古鮮冊譜 3)」 하여 四經의 淺見錄 撰述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汹齋叢話에 '陽村定四書五經口訣 又作淺見錄 入學圖說等書 羽翼江力不小'라 하였고 「海車雜錄」「增補文南大備孝」등에도 나타나 있는 책이다.

이렇게 실물이 발견되지 않아 추측만 하던 책이 1966년 봄, 山氣선생에게 들어오게 되었다. 어느 대학생이「周易淺見錄」을 사줄 것을 요청해 왔다. 책을 보니 서·발과 간기는 없었지만 紙質·板式 등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간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등록 때나 월동준비 때에는 간혹 가치있는 서화나 전적들이 나올 경우가 있었다.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입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고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李相殷박사, 성대도서관장 李丙燾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朴種鴻박사 등에 보였더니 다들 그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후 1971턴 8월 보물 제556호로 지정 받게 되었다.

그후「詩經淺見錄」과「書經淺見錄」을 구입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들었다. 모서점에 이 두책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값도 엄청났지만 三經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주인이 훗가하는 대로 한푼도 깎지 못하고 인수하였다. 이로써 五經淺見錄중에서 춘추만이 빠지는 사경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간행 연대는 세종년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언젠가는 「春秋淺見錄」 마저 입수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石南藏書와 北史詳節

1963년 7월 하순 어느날 황씨라고 하는 사람이 5·6권의 낡은 책을 가지고 퉁문관에 찾아왔다. 황씨는 이 책은 판이 이상한데 무슨 판이냐면서 먼저 1책을 내놓았다. 책이름은 「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로 落帙本이었다. 서체는 歐陽詢體로 눈에 익었으나 확인할 수가 없었다. 책의 보관상태가 안 좋아 파손되어 있었다. 저녁에 「北史詳節」을 놓고 자세히 검토해 보니 태종 3년 계미에 주조한 동활자로 인쇄할 계미자본이 틀림없었다. 계미자로 인쇄한 것은 「禮記淺見錄」「眞西山讀書記乙集上大學衍義」「十七史纂古今通要」「音註全文春秋括例始末左傳句讀直解」「宋朝名巨五百家播芳大全」등 수종에 불과하며 「直指心體要節」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금속활자본으로 최고의 정상을 차지하던 것들이다. 現傳하는 것으로는 「十七史纂古今通要」 「北史詳節」 「宋朝名臣五百家播芳大全」은 3종으로 零本이 약간 있으니 癸未字本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쁜 마음에 몇 날 동안을 책을 해체하여 들러붙은 부분에 물을 적셔놓고 한장한장 떼어내어 배접을 다시 하고 수선하여 판본에 가까울 정도로 복원하였다. 이 책을 가지고 몇 대학에 소개하였으나 허사였고 마지막으로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이었던 一汕 金斗種박사를 찾아갔다. 一汕선생은 이 책을 보고 이런 귀중한 책이 지금도 나올 수 있느냐고 기뻐하며 도서관에서 구입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책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책값이 왜 그렇게 비싸냐고 하며 본래 일산선생의 책인 것을 통문관주인을 대리로 비싼 값에 도서관에 납품하였다는 불미스러운 풍문이 들려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심만을 믿고 있었다.

그러던 10월 어느 날 고대도서관장 李弘植박사로부터 학교로 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찾아가니 「北史詳節」을 팔고간 황모씨가 도서책임자로 있으며 몰래 그 도서의 일부를 빼돌렸다는 것이다. 당시 李弘植박사는 ○○중고교의 이사로 있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東濱 金痒基박사를 찾아갔다. 이분 역시 ○○ 중고교 재단 이사였으므로 대책을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두부는 가급적이면 문제를 확대시키기 않고 내부에서 수습하려 하였으나 黃은 막무가내로 잘못을 뉘우침이 없었다. 그리하여 법정문제로 확대되어 결말이 났다. 결국「北史詳節」은 다시 회수하여 학교도서관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一汕선생과의 풍문도 자연 해결되게 되었다. 그런데 본래 「北史詳節」은 석남 宋錫夏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1948년 石南이 작고한 뒤 澗松 전형필씨가 이를 인수하여 보관해 오던 중 이러한 에피소드가 발생했던 것을 늦게 알게 되었다.

永嘉大師南明泉禪師繼頌과 杜詩諺解

단종3년(1455)에 姜希顔의 글씨를 字本으로 주조한 乙亥字(銅活字)로 成宗13年 壬寅(1482)에 간행한 「永嘉大師南明泉禪師繼頌」(諺解 上下)이 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의 가람문고, 고대도서관, 山氣선생정도가 소장하고 있는 희귀한 문헌에 속한다. 그런데 수년전 여름방학 때 모대학 교수로부터 이 책을 꼭 보게 해달라는 간청을 받고 책을 가지고 가서 보여준 후 집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택시를 탔다. 집 근처에서 택시에서 내려 얼마를 걸어가다가 문득 책을 놓고 내린 것을 깨달았다. 아찔한 순간 뒤를 돌아다보니 운전수가 가계 앞에 차를 세워놓고 음료수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杜詩諺解」의 경우는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 중의 하나였다. 「두시언해」는 성종 12년(1481)에 「永嘉大師繼頌」과 같은 乙亥字로 초간 되었고, 임란후 인조때 목판본으로 중간되었다. 初刊本은 全25卷 19冊인데 1·2·12권을 제외한 나머지가 현전한다. 중간본도 흔하지 않지만 을해자본은 극히 희귀한 책으로 통문관(3·8·9·10·16·17·19·20·21·22·23권), 가람문고(5·6·8·15·25권), 李能雨(10권), 全瀅弼(13권), 趙參衍(14권), 鄭輝萬(15권), 李寬求(25권), 서울대 중앙도서관(5. 11권), 연대도서관(6권), 동대도서관(20·21권)등에 분산되어 보존되고 있다. 두시를 연구하는 石田 李丙疇교수는 두시에 관한 여러 물적을 거의 빠짐없이 구비하고 있으나 杜詩諺解의 초간본을 갖고 있지 못하여 늘 양도해 줄 것을 요청해 왔는데, 하루는 石田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松江歌辭」(星州刊本)에 5만원의 웃돈을 더하여 「杜詩諺解」권 25와 교환하기로 결정하였다. 石田선생은 그렇게 갖고 싶던 「杜詩諺解」를 갖게 되었고, 山氣선생은 전공자에게 책을 넘긴다는 것이 기뻤다.

그뒤 石田선생이 찾아와서 그 애지중지하던 「杜詩諺解」를 잃었다고 탄식을 하였다. 까닭은 소중한 책이기에 비단으로 冊衣를 입혀 보관하고자 관훈동의 모 표구점에 맡기고 며칠뒤 찾으러가니 주인이 모호한 태도로 이미 찾아가지 않았느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아직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맺음말

通文囥에 들어서면 '積書勝金'이란 편액이 걸려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山氣선생의 平生信條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으로 삶의 만족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일 게다. 山氣선생은 70평생 적서의 길을 걸어온 그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통문관을 세워 눈앞의 이익을 생각치 않고 國學關係 書籍을 出版함으로써 이 분야 발전에 기여한 것이나, 전쟁의 포염속에서도 고전적을 찾아 헤매며 수집한 결과 전적의 유실을 막고 보존케 했다는 것은 이러한 그의 신념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선생은 1970年에 民學會를 창립하여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있다. 民學會는 전통을 바탕으로 올바른 우리 자신을 찾고, 나아가서는 인류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한 백성들의 모임이라 한다.

요즘에는 그간 발표했던 서지관계의 글과 수상을 모은 「冊房秘話」의 간행을 준비하고 있다.

선생의 이러한 노력과 함께 통문관은 그 자리에 그렇게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