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해외예술

아르헨티나시의 오늘




민용태 / 고려대 교수

눈빛은 계절을 제일 많이 탄다. 올 봄엔, 올 여름엔‥‥‥하다가 올 가을을 만나기도 한다. 오늘은 어떤 뮤즈가 어떤 옷차림으로 오실까, 아르헨티나에 가면 어떤 여인을 만날까 하는 것이 또한 나의 색안경의 습벽이다. 안경 멋대로 색이 선명하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구가 공전을 거꾸로 하는 일도 없다. 제일 시끄러운 것이 외화 도피고 수천 억의 탈세나 고층 빌딩에서 떨어져 죽기. 사실 마음 속 광장은 늘 조금은 어두운 채로 조용하다 .

아르헨티나의 시선집

최근 아르헨티나의 시선집 두 권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또한 그렇다. 무슨 희한한 여인의 허리라도 움켜잡을 양으로 호들갑을 떨던 여행 계획과는 달리 돌아올 때는 몇 낱의 사랑스러운 기악과 고독과 내가 있을 뿐이다.

항상 새로우면서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정경. 사람은 몇 번이고 나고 죽어도 슬픔과 회한만은 매번 같은 의상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세기말, 즉 20세기 말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흡사 일생이라는 것이 한 세기를 두고 초년, 중년, 말년이 있듯이 1987년쯤이면 말년이라는 편리한 착상 말이다. 여름이 되면 대개 해수욕 복이 생각나듯 세기말이 되면 모두들 조금은 허탈해지고 퇴폐적이 되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이제 야단스럽지 않고 조금은 서로 따뜻해져서 말없이 양지 켠에 앉아 해나 쪼이고 있는 군상들의 아무 것도 아님, 그 허탈함.

오늘과 세기말 풍조

지 난 번에는 중남미와 서반아 소설의 방향 전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19세기 초 중기의 낭만주의적 감성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했다. 소설이 금세기에 위대해진 건 사실주의 덕택이다. 이제 그 대단원의 막을 정리하고 실험을 끝내고 다시 아련한 그리움의 눈길로 되돌아 선 게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에는 나의 눈빛 탓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도 마르크시즘도, 사실주의도, 누보로망도 그저 그런 나이에 접어들었다면 19세기말처럼 데카당이든지 심미주의든지, 하여튼 세기말 풍조 같은 게 나타날 법하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른 탓인지 선이 불분명하다. 아직 금세기가 쌓아올린 시법의 공적이 매력과 빛을 잃은 채로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중남미 시에는 보르헤스나 환 라몬히메네스의 시가 부리를 준 「순수시」풍이 살아 있고 「실존주의」적 테마, 사회참여의 계열인 해방시가 네루다의 50년대「홍가요집」때부터 명맥을 이어나간다. 또한 여기 세사르 바예호나 옥타비오 빠스 계열의 슈펀레알리즘과 실험시가 살아 숨쉰다.

■ 시인과 시풍의 가치

여기에 칠레의 반시의 기수 니까노르 빠르라, 창조주의 시인 비센떼 우이도브로를 합치면 중남미 시는 그 공적만으로도 금세기에 있어서 먹고 살 식량이 충분한 지도 모른다. 그만큼 서로 다르고 다양한 시풍이 개발되고 꽃을 피웠던 게 20세기의 중남미 시였다. 그러나 여기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들 위대한 시대의 장본인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점. 그들이 개척한 시의 가치가 사라진다기 보다는 사람이 가고 있다. 네루다가 갔고, 꼬르따사가 재작년, 보르헤스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

시인이 간다고 곧바로 한 나라의 시풍이 바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뭔가 몇 가지의 시법들이 열기가 덜하고 퇴색하고 있는 느낌이다. 오늘 아르헨티나 시는 중남미 시 중에서 가장 위대한 보르헤스를 낳았고 시인이며 소설가인 훌리호 꼬르따사르, 리까르도 물리나리, 알포시나 스또르니를 산출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민중서정시라고 할 수 있는「탱고」나 「밀롱가」 스타일의 신민요풍의 시도 기세를 올렸다. 시인 가수가 인기를 얻고 즉흥 민요시인이 그 텁텁한 목소리로 무대를 장식한 것도 금세긴 아르헨티나 서정의 승리였다. 엊그제까지 쟁쟁한 어린 목소리들이 오늘은 「탱고」보다 더욱 우수에 젖고 어떤 사고보다는 회의와 허무에 떨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시조명

80년대 이후 발표된 아르헨티나 시를 중심으로 조감해 보면 전후 세대라고 하는 「40 년대」 시인들의 고전적 스타일과 애수가 오히려 신선감을 더해준다. 요절한 사랑의 시인 마리아 아델라 아구도가 요즘 재출판되어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오늘 아르헨티나 시의 행방을 말해준다.

이 먼 광장이

이 멀고 신비로운 광장이

나의 밤이다. 한 세기 동안

한 번도 울어 본 일 없는 나의 밤.

대지의 누이벌 되는 고독 밑

아카시아꽃 사랑 밑

산새의 고뇌 밑에 자란 밤.

나는 오늘밤 바다 위에서 울고 말았다.

내 항상 지니고 다닌 모든 것, 그러나 없는,

번번히 항상처럼 이 빈 벤취 속에 나를 몰아 넣던

이것 때문에.

숭엄한 하늘 아래

안개로 얼룩진 색유리창 사이

나는 고개를 숙인다.

그 보드라운 파동이 눈뜬 불빛을 재우고

야자나무 잎사귀도

영원히 재로 만든 부채가 되어사라져간다.

물의 영혼.

느리고 물기에 젖은 피부.

눈먼 나의 핏줄 위에 세워진

기둥 가득한 사원이여.

안또니오 알리베르띠의 「연인들」도 시간이 가져다 준 고뇌 속에 신음한다 .

유체를 쉬고 연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다른 먼 곳에서 세월의

하염없음을 가져온다.

둘은 문득 놀란다.

갑자기 늙어버린 거울 앞에서 자신의 옆모습을 보고.

무언가 그들 늘 앞에서 부서지고 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그는 꼼짝 않은 채

망명을 시작한다.

그러나 사랑은 고뇌에 앞서 사랑이다. 오늘 아르헨티나 사랑의 시는 사회와 문명이 마모시켜버린 신선한 사랑에 대한 경이를 되찾고 있다.

봄의 시

그녀는 몸이 하늘거린다.

비로 짠 스카프

(중략)

그녀는 사랑을 안다

원초의 오랜 춤을

두 마술사가 벼루는 불더미

아들 낳기 마술.

하지만 또 더러는 배에서 내려야 하는 일도 있다는 걸 안다

손은 그녀의 피부 위에서 열락에 취하고

그럼 우린 또 시가 되리라 위험과 위험을 무릅쓴.

- 까를로스 엔레 께

실베르떼르에게 삶은 「이 형편없이 쪼그라진 몰골이지만 그토록 사랑스러운 것 그리고 우리에겐 긴 긴 장래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네루다의 「총가요집」 이후 사회와 일상에 관한, 노동자와 사회 정화에 대한 테마가 아직 살아있는 예다.

사랑의 행복과 순간성에 대한 찬양, 라파엘 펠리뻬 오또리뇨시의 매력이기도 하다. 삶의 관습성을 거슬리고 시간의 횡포에 저항하며 솟아오른 「작은 풀줄기 하나」가 라파엘의 사랑

이다 .

작은 풀줄기 하나를 잡아요.

작은 불줄기 하나를 잡아요.

굳은 흙으로 감싸요.

비오듯 쏟아진 풀뿌리들을 상하지 않도록.

여름이 오기를 기다려요.

참으라고 해요,

죽음 속에 자라나선 안 되니까,

그리고 꽃봉오리를 열라고 해요 바람 한 자락 손길에,

어디를 향해 피는 거냐고 묻지 말라고 해요,

누구를 향한 거냐 묻지도 말고.

그 「풀줄기」는 프란시스꼬 또맛-기도의 심장에서는 「폭풍」이 되고 주어진 삶의 행방, 즉 「무덤을 닫는 신비의 자물쇠」가 되기도 한다. 그는 사랑과 고통이 삶의 흔적이고 인생이라는 자유로운 강에서 빠져나온 가장 무거운 부피」라고 생각한다.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짐승의 포효. 이것이 또맛-기도의 숙명이다.

숨어사는 짐승 족속의 왕자, 나는

너의 머리칼 속에 욕망의 계절풍을 휘몰아쳤다.

희생물을 씹어먹는 성 난 아침식사,

우정스런 조화를 섬기는 위대한 성전.

우리는 폭풍의 거울이었다. 무덤을 닫는

신비의 자물쇠, 시간의 보석함에

털어 넣은 삶.

일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강탈한 강탈하여 먹어버린 아름다움의 연극.

「욕망의 계절풍」에

오늘 아르헨티나 시의 또 하나의 가장 빈번한 테마가 있다면 사회 정의와 실의에 대한패러디 스타일의 시풍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네루다의「총가요집」 계열의 민중 의식이 팽배한 작품들이 이들이다.

세상은 고통과 한 뿐이다.

굴종과 소름끼치는 빈곤이 있다 고문대 위에 떨어진 개기름 섞인침

폭군의 구두는 무겁고 무거운 발길질.

끝없는 정치와 사회의 악순환과 용광로처럼 들끓는 이데올로기의 시험장 중남미는 아르헨티나만 경험했던 최근 포트랜드 패전의 쓰라린 상처를 안는다. 수 십년만에 경험하는 민정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심한 진통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이 아픈 시절의 기억은 악몽처럼 아직 아르헨티나 시인들의 망막을 헤집는다.

망명의 의무를 잊지 말 것

그것은 망명을 잊지 말 일

망명을 햇고질하는 혓바닥을 햇고질할 것

망명을 잊지 말것 그러니까 땅이라는 걸

그러니까 조국이라든가 우유라든가 손수건이라든가

우리가 어린애이었던 곳, 어린애로 가슴 떨렸던 고장

망명의 이유를 잊지 말 일

군사 독재

과오들

그대 조국을 위해

그대 조국을 등지며

우리가 태어난 땅, 그러나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땅

우리의 발길 밑에서 변해버린 얼굴 여명처럼 펼쳐진 우리의 발길 밑에

그런데 그대 조국

어느 아침 망각으로

마추 볼 내 사람들아

잊지 말아다오, 망각을 잊어버린자가 되지 말아다오

― 환 헬만의 「망명」에서

그러나 안또니오 빠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숙명과 비극을 서사시적 비전으로 재정리한다. 마르께스의「백년간의 고독」에서 처럼 이야기를 빌어 쓰진 않는다. 「자유 광장」이라는 부에노스 아이에스의 역사적 지명 하나를 소재로 1780년부터 오늘에 이르는 피와 땀과 한의 멜로디를, 그 진한 절망과 고독의 냄새를 파헤친다.

망각의 웅변은

오랜 족보를 끌어낸다

그 열에 떨던 분지를

그러나 그 분지 가장자리에는

이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멀리

우리의 두 손이 다가오는 아침을 만진다

너를 멈출 수가 없구나

눈먼 방의 투우여

성난 뿔을 앞세우고 곧바로

칼을 향해 치닫는

태양이 반짝이는 것은

너의 피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영원을 향하여 펼쳐진

총체의 하늘이

끝없이 밤과 낮을 잇는다

그 높은 군형을 빌어

우리의 눈은 본다

이 세상에 있다는

이 투명한 착각을

우리 눈만이 잠든 신들을 보고 있는 증인이다.

물론 이들 서사시인들의 언어는 슈레알리즘이나 기타 아방가르드 시표현의 어느 것도 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논리와 윤리와 상식을 떠난 상황이 붓끝에 잡힌다고 생각하고 있다. 흔히 서사시 풍이 갖는 고리타분한 이야기 패턴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강한 시적 긴장감 속에 응축된 언어들이 마디마디마다 무서운 폭력으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새로운 여명을 바라는 마음

결국 이쯤 해서 우리는 오늘 아르헨티나 시의 여행에서 돌아 올 때가 되었다. 갈수록 사회가 여물지 않으면 시도 별 수 없이 시달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10여년 뒤에 다시 찾은 조국에서 나의 잊어 버렸던 피묻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던 때처럼 또 나라가 복잡하면시도 복잡해 지는구나 하는 서글픔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오늘의 시는 그 사회가 겪는 오늘의 아픔 때문에 아직 새로운 여명을 바라고 있을 시간이 없다. 사랑도 너무 도피적이고 꾀죄죄하게 보이는 시절이있다. 사회의 발걸음이 너무 빠르고 소란스러울 때다.

버들가지처럼 물오른 여인의 허리나 만져볼까 하고 떠자던 아르헨티나 여행은 이렇게 조금은 후덥지근해서 돌아온다. 돌아와보니 한국도 벌써 여름인가? 날씨가 굉장히 후덥지근하다

( Fundacion Argentina parola Pcesia : Poesia Argerltirla Contemporana, vols.9, 10, Brenos Aires,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