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테크놀로지와 연극
김철리 / 연출가·현대극단
■ 예술과 과학
「예술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이다」 그 유명한 연극이론가이자 극작가에 연출가 노릇까지 한 다재다능한 연극인 에릭 벤틀리의 이 말은 예술로서의 연극을 논할 때 흔히 얘기되어지는 문구이다. 짧고도 멋있으며 그럴듯하고, 반박의 여지도 없고, 기억하기도 쉬운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예술사를 통해볼 때 감성이 더 중요시 여겨지던 것 같은 혹은 이성이 더 중요시되던 것 같은 시대가 각기 독특한 성격을 꽃피워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과거를 분석적으로 구획지어본 것이지만, 어떻든 이성과 감성 양자중 어느 한쪽이 완전히 불필요하다거나, 완전히 제거되었던 것은 아니며, 지나치게 감성에 치우친 시대에는 그 반동으로 이성의 중요성이 역설되어 결국 감성의 시대의 몰락을 가져왔고, 또 지나친 이성의 시대에는 감성의 소중함에 대한 부르짖음이 튀어나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이는 인간은 끊임없이 이성과 감성을 조화롭게 합일시키기 위해 노력해왔음을 의미한다. 이성과 감성의,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적 분리 파악 역시 양자의 조화를 추구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에 해답을 얻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 바로 그것이다.
예술과 과학은 이 노력을 대변해왔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예술과 과학의 목표 인식에 크나큰 오류가 발생되었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언제나 과학기술이 존재했음에도 그 발달속도의 격렬함이 혼돈을 야기시킨 것이다. 과학은 이성의 산물로서 차갑디 차갑기만 한 것이요, 예술은 감성의 산물로서 따뜻하고도 따뜻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당연히 이질적인 것으로, 도저히 섞여질 수 없는 양극에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란 혼란 되게 보여지는 이 대자연의 세계에서 하나의 법칙과 원형을 찾아가는 작업이요 예술 역시 그렇다할 때, 또한 과학은 무한한 의문을 눈앞에 두고 계속 파헤쳐 들어가는 과정이요 예술 역시 그렇다할 때, 양자 모두 미의 탐구요, 추구요, 구도의 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서양연극의 모태이며 고향이라 불리우는 그리스의 연극도 그 시대의 예술과 과학이 어우러져 빚어내어진 산물이다. 그들은 아름답고 풍부한 대리석을 사용하여 원형극장이라는 독특한 구조물을 만들어냈으며, 지중해의 맑은 태양 빛을 천연의 조명으로 활용했으며, 멀리 떨어진 관객에게 표정을 보이기 위해 가면을 생각해 냈으며, 많은 관객에게 대사를 제대로 전달키 위해 가면의 앞부분에 일종의 마이크겸 스피커 같은 역할을 하는 장치를 고안해냈던 것이다. 이처럼 극장, 가면 등 연극예술을 위한 모든 요소들 속에 그 시대의 과학정신이 깃들여져 있다. 물론 현대의 과학기술은 인간을 기계부속품처럼 만들고, 개개인을 원자화시킨다는 분석은 당연히 타당하지만, 과학기술 그 자체가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것이라는 단선적인 사고방식을 마치 현대기술문명에 대한 판단의 바이블인양 맹신함은 그것이야말로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기계화에 대한 우려는 기계문명의 급속한 발달의 조짐이 보일 당시 이미 채플린의 「모던타임스」같을 영화에서 표현되듯이 누누히 지적되어왔으며, 어제 그러한 바탕 하에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치 않으면 도리어 연극예술이 설 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혹 과학기술에 적의요소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인간을 위해 적을 알고 적을 이용토록 하는데 머뭇거릴 필요가 무엇인가? 하이테크를 휴먼테크로 이행시킴이 바람직한 것 아닌가? 더구나 연극의 생명은 무대 위의 인간들과 무대 뒤의 인간들, 무대아래의 인간들의 교류로 이어지는 것이며, 이 인간들 모두가 하이테크를 삶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현대연극의 과학화
1960년대 이후 서구의 극장에는 크나큰 변화가 나타났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자매체의 등장에 따른 인간의 감각과 인식의 변화이다. 마샬 맥루한은 1차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인쇄매체 대신 전자매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됨에 따라 현대의 관객들은 다양한 자극을 바라게 됐다고 얘기한다. 따라서 느린 템포로 전개되는 연극공연은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들도 시간과 공간의 변환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극을 쓰게됨에 따라 거대한 사실적 무대장치의 퇴조를 가져왔고 조명과 음향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소위 멀티 미디아(Multi-Media) 또는 믹스트 미디아(Mixed-Media)공연이라는 양식을 탄생시켰다. 멀티 미디아 공연이란 살아 움직이는 연기자들과, 슬라이드나 영화화면, 다양한 조명, 스테레오 사운드, 춤 등 다른 매체에서 차용해온 요소들이 혼합된 형태의 공연을 말한다. 이 여러 요소 중 무엇보다 색다르고 독특하게 여겨졌던 것이 슬라이드와 영화의 활용이었다.
이 멀티 미디아 공연의 대표적인 인물은 체코 출신의 죠제프 스보보다(Josef Svoboda)로서, 1958년 두개의 환등기를 이용한 공연이 첫 번째 시도였다. 관객으로부터 각기 다른 거리에 위치하도록 여러 개의 스크린을 무대 위에 설치한 뒤, 각 스크린에 각기 다른 영상을 투사시켜 놓고 그 앞에서 사람이 직접 움직이게 한 실험이다. 1959년 스보보다는 이 실험의 경험을 연극작업에 활용키 시작했다. 그 이후 그는 극의 전개와 내용의 변화에 따라 빠른 시간 내에 영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놓고, 영상의 크기, 모양,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였다. 이 작업은 무대를 완전히 탄력성 있고 융통성이 무한한 장소로 만들어 주게 되었다. 그는 영사기의 사용은 물론 이동식 스크린과 이동식 플랫폼도 개발해냈다. 멀티 미디아공연의 초기에는 세계의 유명극단들에 스보보다가 초빙되어 작업을 행했으나, 이제는 멀티 미디아공연은 그의 전유물이 아닌 보편적인 연극형태가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빠른 속도로 슬라이드를 바꿔 줄 수 있는 환등기와 여러 방향에서 소리를 내보낼 수 있으며 또 음량이나 음질도 각기 다르게 조절할 수 있는 스테레오사운드가 개발되었고, 70년대에는 TV카메라와 TV수상기도 무대 위에 등장하였다. 또한 다양한 특수효과 등을 만들어내는 등 조명에도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바로 이 조명분야야말로 하이테크가 제일 많이 활용되고 있는 분야이다. 연극의 여러 분야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앞서가고 있는 분야가 조명인 것이다. 현대기술문명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컴퓨터도 도입되고 있어 단 한 명의 조명담당자가 스위치보드 앞에 앉아 버튼을 누름으로써 무대 위의 수많은 조명기가 자동적으로 작동될 수도 있다. 조명변화의 「큐」를 공연전에 정확하게 계산하여 컴퓨터에 입력·기억시키는 방법이다. 조명변화가 복잡한 공연의 경우(뮤지컬이나 셰익스피어의 극 같은)는 조명 큐만 75-150개 이상이나 된다.
여기서 큐란 암전(모든 조명이 동시에 꺼지는 상태), 페이드(fade, 조명이 서서히 꺼지거나켜지는 상태), 크로스 페이드(cross fade, 무대 한쪽은 꺼지면서 다른 쪽이 들어오는 상태)가 있는데 이 큐의 종류는 물론 각 큐마다 시간까지 정확하게 정해줄 수 있어 「몇 초 동안에 크로스 페이드」하라고 까지 컴퓨터에 명령할 수가 있다. 「대충 이정도」라는 말은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공연시 조명 진행은 버튼을 누르는 작업만으로 완벽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트린드베르히 (August String-berg)의 「드림플레이 (Dream Play)」에는 수없이 많은 장면 변화가 있다. 꿈의 상태직후에 관객의 눈앞에서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극의 한 장면을 보면, 「딸」이라는 역의 젊은 처녀가 교회의 오르간 앞에 앉아있다. 스트린드베르히는 지문을 이렇게 쓰고 있다. 「딸이 일어나 변호사에게 다가가면서 무대는 어두워진다 조명변화에 의해 오르간이 작은 동굴의 벽으로 바뀐다. 파도와 바람소리의 하모니 속에서 현무암 기둥사이로 바닷물이 스며들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다」
이러한 조명변화의 큐가 단지 버튼을 활개 누름으로써 거대한 교회는 사라지고 조명은 작은 동굴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오직 버튼을 하나 누름으로써 심지어는 조명플랜을 컴퓨터에 기억시켜 놓은 뒤 공연시작과 동시에 스위치만 작동시키면 끝날 때까지 계속 진행되어 가는 정도까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야말로 아무리 정확하게 연기를 한다고 해도 기계에 인간이 끌려가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이것이 기계가 갖는 비인간적인 차가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첨단과학이 큰 영향을 끼친 분야가 음향기기 분야이다. 1950년대 말에 발명된 트랜지스터는 전자장비의 발달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까지의 장비개발노력은 진공관의 특성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아왔었다. 진공관은 열소실, 내구성 그리고 크기라는 문제점들을 지녔기 때문에 만능이면서도 간결한 장비를 고안해 내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이러한 불편한 문제점들이 해결되었으며, 이제는 트랜지스터보다 더 작고 쓸모가 많은 IC(집적회로)가 탄생되어 전자산업은 그야말로 황금기를 맞고있다. 그리고 현대의 극장들은 이에 맞는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시스템들은 하루가 새롭게 구형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연극에서 녹음된 소리의 사용, 마이크의 사용은 아직 제한적이기는 하나 무조건 연극은 전체가 생소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란 오래된 관념이 무너져가고 있으며, 첨단과학의 발달에 따른 음향기기의 활용이 관객에게 어떠한 효과나 충격을 줄 수 있겠는가는 무한히 열려져 우리의 손이 와 닿길 기다리는 미지의 세계일 수도 있다. 음향기기의 발달이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음은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음악이 바로 그것이다. 음악이란 수공적인 악기들이 소리를 내는 것으로만 여겼던 생각에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과학과 음악의 만남이 새로운 음악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실은 과거의 악기들이 하나씩 틴생할 때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기쁨이나 당혹감과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이제 연극도 전자음향기기는 물론 전자음악 활용의 시대로, 신디사이저 음악 ·컴퓨터 음악 활용의 시대로 돌입한 것이다.
컴퓨터는 무대디자인에도 바람을 일으켰다. 컴퓨터 그래픽스는 이미 영화, CF등의 제작에 이용되어 상업미술, 광고미술에서 응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입체적인 조감이 필요한 각종제품의 설계분야에도 도입되어 있다. 컴퓨터가 계산기만의 역할을 뛰어넘어 그림을 그려내는 작업에도 쓸 수 있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미 컴퓨터 미술이라는 말이 귀에 설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컴퓨터 그래픽스의 경우는 디자인작업의 혁명을 가져왔으나, 레이저광에 의해 실제무대장치의 새로운 시도도 행해지고 있다. 레이저광을 이용해 홀로그램(Hologram)이란무형의 입체 상이 무대 위 허공에 맺어질 수 있게된 것이다. 종래의 영사방법에는 스크린이 필수적으로 필요했으나, 이 홀로그램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입체적인 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도 신기루처럼 거꾸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세워진 모습으로. 그러나 손으로 만지려면 아무 것도 닿지 않는 유령과 같은 것으로 무대장치를 사실적으로 활용하는 공연에는 적합치 않은 약점도 있기는 하다.
조명, 음향, 무대는 하이테크가 적극적으로 접목되는 분야이기는 하나, 이를 모두 수용하고 있는 극장이야말로 하이테크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물론 게릴라연극처럼, 해프닝처럼 하는 경우에는 극장이 따로 필요 없겠으나, 일단 극장의 형태가 갖추어지고 더욱이 극장규모가 커질수록 하이테크가 필요하게 된다. 관객과 무대의 거리감이 커지기 쉬우며, 따라서 일체감이 감소될 위험이 증대하기 때문이다. 건축공학에 있어서 하이테크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대사전달의 문제, 관객의 시각 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무대와 객석이 조절되어야만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공학뿐만이 아닌 심리학까지도 동원되어야 할 것이 자명하다. 그냥 무대와 객석이 있는 건물을 한 채 짓는 작업이 아닌 건이다.
하이테크는 연극예술을 제작·판매(?)하는 연극경영·행동에도 깊숙이 영향을 주고 있다. 작게는 티켓 판매와 수금에 컴퓨터가 이용됨은 물론 공연관계자료의 수집 및 분석, 연극관계자의 신상명세수록, 정보화시대에 발맞추어 컴퓨터단말기를 이용한 공연안내 등 전자매체의 활용이 연극의 모든 분야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 새로운 시도
지금까지 살펴본 현대연극의 과학화와는 정반대의 작업을 하고 있는 연극인이 그로토우스키 (Grotowski)이다. 우리에게 많이 소개된 바 있는 그는 폴란드 실험극단의 연출자로 「가난한 연극(Poor Theatre)」을 주장한다. 그는 연극의 가장 중요한 두 요소라고 여기는 연기자와 관객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작품에 따라 무대와 객석을 재배치하고, 조명효과는 사용치 않으며, 분장을 피하고, 순수하게 기능적인 면을 위한 것 외에는 의상까지도 최소화시켜 버린다. 역의 변화를, 지위의 변화를, 심리적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의상을 갈아 입히지도 않는다. 소품은 경제적으로 여러 용도에 쓰일 수 있는 것이 선택된다. 전통적인 의미의 무대배경도 사용하지 않는다. 연기자들은 손을 두들겨 소리내거나, 목소리를 내거나, 직접 악기를 다루어 음악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연기자는 자기 자신의 재능과 노력의 덩어리로만 내던져질 뿐 그 외의 어떠한 것의 도움도 받지 못 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연기자의 훈련이 중요시된다. 심리적인 집중의 훈련과 더불어 격심한 육체적인 훈련이 요구된다. 목소리를 내는 훈련도 병행된다. 연기자들은 일반인들로서는 해낼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내어 관객을 압도하고 일종의 마술적인 분위기까지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들은 일간의 육체와 정신을 다루는데 있어 하이이테크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 그로토우스키의 연극이야말로 연극의 원형이라고, 혹은 시대에 너무 뒤떨어지고, 동떨어진 것이라고 단정지어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기계화·물질화 되어가는 사회에 대해, 연극에 대해 위험을 경고하는 고발자임은 분명하다. 인간능력의 극대치를 뽑아내고자 하는 그의 작업의 의미는 소중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예술작업인 연극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저렇게 하는게 옳은 것이다 라고 쉽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세상이 지금 어떻게 달려가고 있는가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또 그 속에서 숨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같이 해야만 예술로서의 연극이 가능하리라는 사실이다. 무서운 스피드로 나아가고 있는 과학기술에 무관심한 것이 보다 인간적인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없음과 동시에 과학기술의 발전만이 곧 인간의 발전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없음은 같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