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과학의 변증법
김문조 /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 르네상스의 시대정신
중세 서구사회를 暗黑時代라고 규정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기본이나 부르크할트로 대표되는 이들은 중세 기독교문명을 光明의 르네상스에 대비하면서, 향후 서구사회를 거점으로 한 일련의 역사적 전개는 신학적 교의가 아닌 이성의 힘을 바탕으로한 근세라는 새로운 시대의 장을 창개시켰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직설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중세 천문학체계를 뒤엎은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행성운동론, 이것은 훗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용어까지 탄생시킨 사건이 되었다. 물론 이같은 지식의 발전이외에도 종교개혁이라든가 민족국가의 형성. 또는 봉건적 경제질서의 와해나 산업혁명 등과 같은 세기사적 사회변동은 성서적 전위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던 즉, 근세로 접어들면서 적어도 인간성이나 세계에 관한 관념이 획기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다른 일군의 학자들은 중세에 절정에 이른 위대한 기독교문명에는 사실상 근대적 가치와 상관된 요소들이 적지 않다는 점, 그리고 연속적인 역사과정을 순간을 경계로 明暗 짓는다는 일은 지나친 독단이라는 점을 들어 "중세는 곧 암흑시대"라는 도식적 명제에 반론을 제기한다. 예컨대 중세 스콜라 학자들은 결코 선대의 유산을 경시하지 않았으므로 르네상스를 망망한 어둠을 관통하는 뜻밖의 섬광과 같은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숙된 기독교 문물을 흡수·병합한 역사적 소산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부흥"이 나 "재생"이라는 말 자체 가 함축하듯 고대희랍 및 로마의 고전문화가 없었다면, 르네상스가 어찌 가능했겠으리오마는, 선대의 유산이 1000여년간 사멸되었다가 중세말기에 갑작스럽게 개화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믿기 힘든 비현실적인 가정에 불고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맹아는 AD 1300년이라는 연대기적 시점을 훨씬 앞지르는 시기부터 존재하였던 고로 중세와 르네상스시대 간에는 모종의 연속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반론 역시 그것을 지지하는 주장을 추려 모으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기록을 검토해 볼 때 르네상스인 들은 중세인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회의적, 물질적이며 개인주의적이었던 반면, 중세인들과 마찬가지로 다분히 종교적 의식에 충실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예컨대 교황의 정치활동에 반대했던 단테는 결코 마키아벨리와 같은 반교회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오늘날의 표현대로라면 단지 정교분리 정도만을 원하는 선량한 기독교신자였다. 뿐만 아니라 중세기 프랑스 음담을 수집해 데카메론이라는 작품을 펴낸 보카치오 역시 반기독교론자라기 보다는 성직자의 부정을 혐오한 기독교적 이상주의자였다. 따라서 중세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진 르네상스란 중세적 제 가치의 철저한 부정이 아닌 부분적인 개혁내지는 수정이었다고 봄이 보다 마땅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 1300년에서 1600년대에 걸친 르네상스의 시대사적 의의는 결코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 대다수의 르네상스 연구가들은 르네상스적 시대정신을 흔히 "藝術至上主義"및 "科學至上主義"라는 두 가지 사항으로 압축하고자 한다.
르네상스시대의 예술가들 중에는 분명 신의 영광을 위해 작업에 임했던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예술적 상상력이나 해석은 작업동기와는 달리 다분히 몰신앙적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마돈나, 성자탄생, 그리스도의 죽음 및 기타 기독교 관계의 주요 소재를 거듭 그렸으되 그것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과거와는 판이한 태도나 기법에 의존했던 것이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서 기하학적 구도기법을 활용했음과 더불어 인간성이나 인물의 표현에 각별히 노력했다. 즉 그는 중심상인 그리스도를 구심점으로 하여 주위에 사도들을 네 사람씩 네 집단으로 나누어 배열시킴과 동시에, 같은 주제를 다룬 전시대 화가들과는 달리 유다를 다른 사도들로부터 떼어내지 않고 섞어놓은채 주로 얼굴과 몸의 동정으로써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고 있다.
■ 과학적 탐구방법과 예술
한편 과학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과학적 탐구방법은 대체로 문예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가 막을 내리는 17세기에 갈릴레이나 뉴우톤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따라서 배실리우스나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전세대 과학자들의 공헌은 과학혁명의 정초나 서곡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과학적 업적과 결합을 예시해주는 대표적 인물로는 다빈치를 들 수 있다. 자연에 관해 열정적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천문학 분야를 제외하고는 당대 과학적 활동의 주요부분인 기술과 발명, 해부와 의학에까지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천품을 부여받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과학적 공헌을 남겼다. 즉, 그는 펌프, 선반, 무기, 헬리콥터 등 수 많은 발명품을 안출하였다. 하지만 현대 과학자들처럼 지식을 체계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여러 기발한 고안들은 거의 전부가 공상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중세화 르네상스시대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이 상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중세는 종교, 과학 및 예술의 삼요소가 주로 종교를 중심으로 일체화되어 있던 기간이었던 반면 르네상스기에 와서는 세속주의가 강력히 대두되면서 종교적 역가는 크게 쇠퇴, 결과적으로 예술 및 과학이 자체적 정당성이나 논리를 확립하게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예술사회학의 태동
중세기의 종교란 세상만물을 이해하는 유일무이의 기준이며 척도였다. 즉 우주는 신으로부터 탄생되었으며 자연질서나 사회질서 역시 신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사회체계를 설명하는 으뜸원리는 다름 아닌 기독교 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신중심의 사고, 즉 신학적 세계관(Religious Weltanschauung)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그 효력을 크게 상실, 종교는 차츰 예술 및 과학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초월적 영역에서만 권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다빈치라는 전형을 통해 알 수 있듯, 예술과 과학은 종교적 계율이라는 공통의 적에 대한 대응체로서 한동안 서로 이렇다할 갈등이나 대립 없이 개인이나 사회 내에서 상호 공존했다. 단, 위대한 인본주의의 승리로서 귀결되고 있는 르네상스기에 관한한 예술은 과학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추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 17세기 초과학혁명이 성숙될 때까지, 또 예술분야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이성에 대한 낭만주의의 저항이 유효했던 19세기초까지는 지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든 낭만파 작가 괴테의 時論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예술과 과학의 분화가 촉진되기 이전의 예술론은 예술의 과학적 이해에 다름 아니며, 또 그것을 굳이 예술사회학이라고 이름해도 별 이의가 없으리라 본다.
세속적 가치의 발견과 창조를 지향하는 예술과 과학이 상호간 궤적을 달리해 양자간의 밀월이 깨어지게 된 거시적 원인은 앞서 언급한 16, 7세기의 과학혁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정적인 계기는 19세기말의 지성혁명과 그에 수반한 실증주의 방법론의 대두라고 할 수 있다.
지성혁명은 계몽사상의 유산인 단순하고도 정태적인 이성관 및 낙관주의적 자연법사상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아윈의 "종의 기원"은 바로 지성혁명을 촉진한 대표적 업적으로 꼽히곤 한다.
다아윈의 진화론은 예상대로 창세기를 고집하는 일부 신학자들에게 격렬한 저주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와 많은 개신교 교파들은 대체로 다윈주의에 대해 공격적 태도를 유보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르네상스이후 신학으로부터 분절되어 나간 세속세계를 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물학적 현상을 놓고 제기된 다아윈의 진화론, 그 중에서도 특히 적자생존의 원리에 대한 강조는 정치·경제·사회적 문제에 관한 고찰에 즉각 전용되어 자유방임의 이론에 기초한 고전경제학이나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같은 관점을 대두시켰다. 특히 그것은 뉴우턴 역학이론이나 경험주의사상 등과 결합해 사회현상에 관한 설명 역시 자연과학적 기준이나 방법에 준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 정신을 잉태시켰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통일과학적 이상이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세계에 과한 탐구에 보편화되면서부터 사회현실의인과적 법칙 규명을 이상으로 하는 과학과 감성을 중시하는 예술은 자연히 이별을 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흔히 과학기술시대, 또는 첨단과학시대로서 표현되는 오늘날의 세계는 중세나 르네상스시대와는 판연히 다르다. 지식의 누적성을 구가하는 과학은 오늘날 늘상 같은 소재나 주제에 탐닉하여온 예술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과학에 대한 신뢰는 비단 물질적 또는 제도적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관념세계에 있어서 조차 뚜렷하다. 그것은 흔히 기술결정론 혹은 기술중심사상 등으로 체현되어 르네상스 이래의 인문학적 전통에 가차없는 압력을 가하고 있다.
■ 예술사회학의 이론적 당위성
물론 거기에 대한 인문주의적 대응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의 일부 작가들은 과학주의적 태도를 일부 수용해 사실주의나 자연주의들은 같은 표현양식을 개척하였던 것이다. 대다수의 19세기 사실주의자들은 낭만파의 이상이나 복고주의적 소재에 집착하였으며 또 귀족이나 영웅과 같은 고귀하고 극단적인 인물 대신 평범한 보통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곤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표현의 정확성에도 크게 신경을 써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 및 정황에 부합되는 언어를 고르는데 부심하기도 했다. 게다가 에밀 졸라와 같은 자연주의 작가는 주변생활의 정확한 묘사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생활에 개재된 모종의 발전법칙 같은 것을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는데, 이는 분명 과학혁명에서 연유한 실증주의적 태도의 일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학적 사고를 수용한 예는 비단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회화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즉 마네나 모네와 같은 프랑스 인상파화가들은 사실주의적 작가들이 보여준 것보다 훨씬 정묘한 양태로서 창작활동에 과학적 사고를 접합시켰다. 당대 화단의 주류를 차지하던 예술원파의 묘사적 기법에 반발했던 인상주의자들은 빛이란 단선적인 것이 아니며 또 우리 눈은 다양한 자연의 반사광을 하나로 수렴시키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복잡한 기관이라는 점을 물리학자들로부터 배웠다. 따라서 이들은 풍경이나 정물을 묘사함에 있어 그것을 수천 개의 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해서 가까이서 볼 때는 지리한 점의 모임에 불과한 작품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였을 때는 마치 빛이 수렴되듯 함빡한 물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예술의 간극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 과학과의 접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던 예술인들조차 이제 그것은 이렇다 한 기대를 걸 수 없는 이상임을 깨닫고, 다시 본연의 인문학적 입장에서 과학주의의 독단성이나 야만성, 또는 그 몰가치성이나 무목적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일이 많아졌다. 따라서 자연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한 실증주의가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한 예술과 과학의 단절은 어차피 극복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전망되는데, 이러한 현상 자체는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예술사회학 연구는 다름 아닌 그 구성요소인 과학과 예술간의 갈등과 대립에 의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미적가치의 탐닉을 본령으로 하는 예술활동이나 작품을 과학으로 분석해야 하는 예술사회학자는 분명 실증주의적 인식의 테두리 내에서 거개의 현상을 진단·분석할 수 있는 인구나 계급 연구가들과는 달리 사실과 가치, 탐구와 탐미, 또는 과학주의와 인문주의 등 현 시점에서는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이중적 사고양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딜레마는 사실상 원하든 원치 않든 과학과 예술이 종교라는 상위체계에 포섭되어 있던 중세, 또는 양자가 미분화 상태에 놓여 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결코 심각한 양상을 띠지 않았던 현상이라고 하겠다.
물론 오늘날의 사회학이론이 온통 실증주의적 사상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개중에는 개인의 주관적 의미나 가치, 또는 상황적 맥락 같은 것을 중시하는 상호작용 이론이나 현상학적 사회학, 또는 민속학적 방법과 같은 것이 이론계의 일맥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같이 연륜이 비교적 일천한 관점들은 이론적 골격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을지 모르나 정상 과학적 위치에 서서 각개 특정분과를 폭넓게 다루어 본 적이 거의 없다. 때문에 특히 예술사회학과 같은 문제제기적인(Problematic) 탐구과제나 영역을 놓고는 대부분 사회학자들은 지금까지 상용 패러다임으로 즐겨 활용하여온 실증주의적 관점으로 회귀, 스스로 분석적 한계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분업이 적극 권장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실증 과학과 예술의 교합을 기대하기란 실로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양자는 기본전제나 논리구조에 있어 서로 섞이기 어려운 요소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실증과학은 사실, 객관성, 합리성, 설명, 증명, 인과성 등을 중시하고 있는 반면 예술은 미, 상징, 주관성, 해석, 통찰, 의미 등과 직접적으로 상관되어 있다. 이같이 실증주의의 융성과 함께 과학적 인식은 점차 예술적 활동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점은 교양지식인과 과학자들간의 상호이해가 점차 약화되어 지식인층은 서로 이질적인 소위 두 개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C.P. 스노의 강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과학이 멈추면 예술은 떠나리라"(where science stops, there art begins)라는 언명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두개의 이질적 부문을 애써 동시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시 말해 힘들여 예술사회학을 행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당위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관한 답변은 분명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학제간의 연구활동이 적극 권장되고 있다는 학문세계의 유행 때문만이 아니다.
■ 예술사회학의 과제
예술사회학의 학문적 필요성은 첫째, 사회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체험은 결코 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으로 명확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 연유한다. 즉 우리가 항용 강조하는 진실은 사실상 사고와 느낌, 또는 理과 氣라는 유기적 경험의 통합체로서, 결국 지적 요소와 정적 요소를 분리해 낸다는 발상은 곧 진실 자체의 왜곡을 뜻한다. 우리는 "이론이 매우 우아하다" 거나 "그 작품은 매우 효율적이다"라는 말을 이상하다고 느낄는지 모른다. 물론 이들은 문장의 호응관계를 엇바꾸어 효율적인 이론이라든가 우아한 작품이라고 해야만 자연스럽게 들림직하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자체가 과학과 예술간의 단절이 우리에게 습관화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예컨대 삼단논법이 우리에게 그렇게 친숙한 논리구조가 된 것은 마치 정삼각형을 연상하듯 간단명료하기 때문이다. 즉 명제들의 결합이 상호 수미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편 효율적인 예술작품의 대표적 예로는 로댕의 조각작품을 들 수 있다. 로댕의 독창성은 작품에 운동성을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을 창안했다는데 있다. 즉 그는 신체의 각 부분을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묘사하여 작품에 역동성을 부가시켰다. 예를 들어 작품 "세례자 요한"에서 머리는 동작의 시초를 그리고 팔은 동작의 끝을 표시하는 식으로, 따라서 과학과 예술은 통념적으로 인식되고 있듯 화합이 불가능한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일련의 내적 화해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해야 함이 마땅하다.
예술사회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상기한 인간경험 자체의 속성에서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변동과정으로부터도 추론할 수 있다. 말하자면 흔히 탈산업사회, 또는 후기산업사회라는 산업화가 고도로 촉진된 상태 하에서는 자기성장이나 자아실현과 같은 주체에 대한 관심이 고조, 사람들은 개인적 선호나 가치의 다양성에 보다 큰 중요성을 부과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데, 이러한 새로운 전개는 분명 고답적인 실증과학적 접근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응키 어려운 것이다.
예술사회학에 관한 전망이 이럴진대 우리는 비록 작업이 지난할지라도 과학주의와 인문주의의 이원론을 초월해 가슴과 머리로서 동시적으로 느끼고 사고하는 새로운 예술사회학적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새로운 예술사회학적 패러다임은 실증과학적 결정론이나 획일성, 그리고 인문주의적 이상주의나 절대주의 모두를 지양해 진실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어야 하는데, 그 성격은 한마디로 과학적으로 타당하고(scientifically valid)동시에 인간에게 유의미한(significantly humane) 것이어야 한다.
새로운 예술사회학적 관점의 전개는 비단 해당 분야의 요원들에게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과학 및 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큰 의의를 지니리라 본다. 예를 들어, 과학은 산문이나 시와 같은 보다 발달된 언어예술로부터 설득력을 높이는 표현기법이나 형식성을 전수 받을 수 있고 또 음악·미술 등의 예술카테고리로부터는 색감(tonal quality)과 같은 새로운 타당성 항목을 도입하여 실험해 볼 수 있다. 반면 예술가들은 올바른 예술 과학적인 상위관점(meta perspective)의 맥락 하에서 독단적 임의성이라는 고질적인 과오를 지양, 부적절한 편협성이나 파당주의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