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예술공간의 개발과 문화적 삶

새로운 이미지를 위한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건축, 도시공간과 환경조형예술




이상호

■건축과 생활환경으로서의 문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역사적, 일상적, 종교적 체험을 예술로서 표현하려는 모색은 언제나 존재하여 왔다. 생애에서의 체험을 탐구하고자 하는 욕구의 연속으로 새로운 관찰,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인지가 있어왔고, 이를 조형이라는 수단으로 형상화하였다. 자연에 대한경외심, 종족의 존속본능, 영역에 대한 확인 등 잠재적 의도를 형상으로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세력의 과시와 도시의 발달, 지적수준 및 미에 대한 가치향상과 소유욕구로 보다 많은 조형물의 실현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양에서 뿐만 아니라 규모도 대형화해가게 되었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에는 도시광장의 점적 연결이 도시를 구성하였던 고대광장 Piazza 의 잔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유적에서 광장과 조형이 목적하는 바를 충분히 인식하게 된다. 광장이 형성되는 성격은 몇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종교적 건물이 독립됨으로써 이루어진 광장, 시장광장, 귀족의 저택 전정 등 어느 것이나 그 성격에 따라 종교적, 또는 역사적 모뉴멘트, 지방의 명사요인상에 고도의 예술적 힘이 발휘되고 있다.

공공적 의의의 기능성과 광장주위의 기념비적 건축과의 자연스런 관계가 충실하였던 고대그리스, 또는 로마시대 이래 도시내의 공공예술은 지역적 차이점은 있으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왔음은 이영역이 무한함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화는 조형예술로서 또는 건축과 생활환경이라는 양자와 함께 정신적 욕구와 실용성을충족시켜 왔으며 공공예술 Pubic Art 이라는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환경을 형성하는 모든 단계가 현대예술의 표현대상이며 생활의 즐거움과 흥미를 희구하는 현대인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환경개선의 창조적 요소와 관련이 있음은 고대그리스, 또는 로마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고대의 공공시설물이 그 시대의 대중에게 정신적 , 기능적 충족을 주어왔던 것처럼 현대인에게도 동질의 문화적 가치를 부여함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늘날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많은 요소들이 상호영향을 주는 양상은 도시, 또는 건축공간에 보다 많은 조형적 환경조성에 대하여 정책적 차원의 후원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조형예슬의 상호연계성과 의미

문자와 고도로 정교하고 신속한 통신방법, 기계지향성, 또는 논리적 규제와 속박 속에 사는 현대보다 오히려 옛날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도시의 예술적 발전에 유리하였을지도 모른다. 고대그리스나 로마시대에는 공공의 접촉이 욕탕, 광장, 주락 등에서 이루어지고 공지가 있어 왔으나, 오늘날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대중의 생활을 점점 공공광장으로부터 분리시켜 왔기 때문이다.

근년 도시계획의 예술성이 건축, 그밖의 형상미술의 진전과 동질적이지 못하다는 견해가 많다. 이미 르네상스나 바로크시대, 또는 그 이전 시대에는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양상으로 변모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호간에 이탈현상을 빛고 있는 것이다. 도시가 성장해 가면서 도로와 광장은 일체가 되어 커가고 건물은 높고 확대되어 왔다. 층수가 많아지고 창문이 연속됨으로써 건물의 예술적 인상이 어려워졌다. 가령 거대한 건축구조물을 요구하는 시대성은 물리학이나 역학이 건축의 디자인을 속박함으로써 건축과 도시공간 조성에 있어예술성보다 공학과 기술에 보다 우위성을 두게 되었다.

또한 경제적 관점에서 토지를 주최하고 분할하는 토지구획 및 도시개발사업은 오늘날 결과적으로 우리들에게 살벌한 도시를 만들게 하고, 예술미를 파괴하고 말았다. 토지의 가치, 특히 건설용지의 가치는 커졌고, 이에 따라 지가상승이 불가피하여 개인이나 행정능력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영역성을 확실하게 하려는 공간에 대한 개념의 변화도 도시가 예술로부터 이탈하게 하였다.

완전히 해체되고 재구성된 공공공간과 사유공간의 좁은 사이에 있어서 인간의 도시에 대한생활체험이 안락할 리 없고, 공공과 사적 공간의 상호침투하는 의외성의 드라마를 체험할 수도 없는 것이다. 도시가 해체된 것은 이와 같은 사유공간에의 흐름현상과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페쇄성에 최대의 요인이 있다.

고전건축에서 미술과 건축의 경계는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일의적인 것이었다. 광장주변건물은 하나의 점에 집중되어 있는데 분수, 모뉴멘트, 조상 등이 그 중심이 되어 당대의 역사적 기억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이 광장은 공공의 축제가 이루어지고 공식적 의식이 열리며, 법률이 공포되는 공동체의 장이있다. 유럽의 도시공간에 있어서는 건축은 도시에 폐쇄적이며 생활과 교통은 일찍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그때문에 건축은 도시에 이어지는 계급제도 Hierarchy로서의 여러 가지 스케일의 광장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 광장에는 지역적 의미나 방향성을 부여하는 조형들이 있을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도시공간과 주변건축구조물과 조합된 예술형태는 모두가 점적 공간에 놓여짐으로써, 분산되어 시각적 변화의 연속이 가능하였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공공예술에 대한 체험은 소극적이었다. 불상과 토속적 오브제들로 한정되며 예술적 대상이라기보다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왔고, 공공성보다 사적, 집단적 소유개념이 강했다. 동양의 도시는 건축이 길에 대하여 열린 공간을 가지고 건축과 도시가 처음부터 동일의 것으로 용해되어 폐쇄적인 점적공간의 연속이 아닌, 한 촌락이 혼합된 공간으로서 해석된 것이기 때문에 한 구획을 한계짓는 명확한 장소성과 상징성을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광장은 구심성을 가져야 하므로 경계표 land-mark 요구되었으며 이들은 종교적, 교훈적, 교도적 기능을 가져왔던 것이 대부분이다. 즉 종교적 또는 기념적 사실이나 인물의 초상을 통한 상징성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공간에서의 조형예술이란 예술의 대중화 Public Art 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도시를 변모시키고 구성하는 여러 인자가 도시의 예술성을 파괴시키고 있다고 앞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공공예술이라는 개념으로서 또는 환경예술로서 건축 및 도시환경 구축을 뜻할 때 현대 도시계획에서도 예술의 모티브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환경예술은 그것이 놓여 있는 공간을 심미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데에 그 원초적 가치를 둔, 다시 말해서 기념비적인 것에서 시각적 만족을 주는 것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적 예술기초에 접한 사상과 민족혼 속에서 발생하고 이어졌던 개개의 고유성이 엷어지고 공통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현대에는 건축, 광장의 성격, 도시공간개념이 동질화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각각의 지역에서 나름대로 문화의 아이덴티티 Identily 가 다시 반복되면서도 국제적으로는 그들의 이질적인 문화의 가치기준이 충돌하여 영향을 받으면서 각개의 독자적 문화가 형성되어가는 시대로서 자기 문화의 아이덴티티를 통하여 국제적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지금 세계는 다원적 문화의 가치기준이 재구축되고 있는 시기에 있다.

오늘날 도시계획분야에 있어서 예술적 가능성의 한계는 지난 날과다른 각도에서 질과 양을 가늠하여야 한다. 우리들에게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따위의 고도로 세련된 예술작품을 창조한다는 것은 어려우며, 또한 의미의 절대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도로에 면한 건물의 파사드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매일 대하는 것으로서 심미적 고려를 할 가치가 있으므로 그 자체에 예술성을 부여할 이유가 있다는 판단에서 환경예술이 출발할 수도있는 것이다.

환경조각의 예술성 장소성

일상적인 보행공간 속에서 조형물이 자유로이 위치하여 벤치, 가로수 등의 요소와 함께 쉽게 공존하고, 가로환경이 구성되며 환경은 섬세하게 기회된 디테일의 요소로부터 전체의 공간차원까지 풍부한 환경성을 만들도록 종합적 코오디네이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애초에 조각이라는 것은 순수조각,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환경조형으로서 출발하였다. 순수한 의미에서 환경조각의 범주는 환경 자체가 조각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조각이 장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형식을 정확한 의미에서 환경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환경조각의 주요 기능은 환경의 예술화라고 할수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인물들이 아니다. 일반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일상적인 도시 가로에서 무의식적인 조각과의 만남이 이루어짐으로써 시각적 접촉의 도시생활, 그 자체가 환경조각이다. 따라서 환경디자인의 기본형식과 오브제는 연대되어야 하며, 이는 오브제 역시 궁극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환경디자인의 총체 속에서 부분이라는 의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건축이 예술과, 또는 예술이 건축과 어떠한 통합점을 찾을 수 있는가. 그 출발과 목표는 아름답게 표현되어서 그 주위를 돋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순수한 조형적 가치가 환경요소로서 시각적인 면과 미학적인 면에 기여하도록 되어 있다. 예술을 보다 대중에게 깊이 전달하기 위해서는 도시와 건축공간이 보다 미적 체험을 가깝게 줄 수 있어야 한다. 거대한 스케일로 드러나는 도시의 구조물은 적극적으로 조형화하는 공공적 투자가 의미있으며, 새로운 도시의 개발이라는 이미지와 연결되는 과감한 환경예술이다.

건축구조체의 규모, 공간의 크기, 건축구조체 및 공간의 형식, 오브제의 시각적 질량이 총체적으로 형성하여 환경예술이 조작되어 간다.

조각의 스케일에 있어서 휴먼 척도와의 자유로운 배치는 이 환경조각이 가장 적극적인 대중과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오브제의 스케일은 즉 시적이고 동적인 시각상의 척도이므로 소형의 구상조형은 환경조각으로 설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도시환경을 장식한다는 개념으로서 수경요소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환경적으로 적극 대응한다는 의미보다는 공간을 장식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것이다.

조각이 단순하게 시각적 대상으로 남지 않고 공간적으로 용해되는 수법은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장소성의 공간을 수평적으로 확대할 때 공간자체가 조각의 범위이자 소재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길과 계단의 의미를 보다 다양하게 확대하여 동선의 변화에 따라 사람이 느끼게 되는 시각적 즐거움과 어린이들의 놀이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담는다든가 또는 조각이 놀이의 장소나 기구가 될 수도 있다.

다양한 개인 또는 그룹의 야외조각전은 작가의 입장에서는 자기전달의 수단이며, 공공공간에서 투자없이 시민과 예술을 접속시키는 것도 환경예술 조작행위의 한 가지 방법이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한 상태에 있어서는 내재한 인간의 미적 욕구의 다양한 표출로 생각되어지면서, 상대적으로 빠른 이해와 수용도 이루어질 수 있다. 외부환경에서 구상미술보다 추상미술 선택의 적극성이 필요한 것은, 추상미술 쪽이 보다더 보는 이가 자산을 가지면서 그의 미적 체험을 스스로 간직해 나갈 수 있으며, 도시공간이 거점영역으로서 보다 충분히 인식적 공간으로서 작용하며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도시의 가로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이라는 것이 대체로 순간적이며 동적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도시의 환경요건은 거주자라는 시민을 위한 일의적 의미 하에서 갖추어지는 것이지 기념적이거나 역사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시에서 공동체의 영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기능은 큰 의의가 없으며, 경관을 구성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현대도시와 건축사상에 있어서 질서의 계급성을 공간에 대한 구조의 우위성, 서브스트럭쳐에 대한 인프라스트럭쳐의 우위성, 사적 공간에 대한 공공공간의 우위성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러한 논리를 따를 때 미술은 단순히 시각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촉각적으로 출입될 수 있는 개념에서 형성될 필요가 있게 된다. 환경과 조각이 보다 적극적으로 화합되며 행위를 수용하고 서로의 자유로운 조형의지로서 이해될 수 있다면 오히려 주제면에서보다는 규모나 형태가 환경과의 종합적인 조형으로 이루어지지 못할 때에 대중의 이해도에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새로운 차원, 새로운 공간의 부여 그 자체가 환경조형물의 심미적 기능이자, 미술의 실용적인 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 환경예술의 가치와 의미

환경미술의 소재는 건축 자체, 나아가서는 물, 불, 바람 등 매우 광범위한 영역의 기능성들이 있다. 따라서도 시설계 또는 건축설계 단계에서부터 그 의지가 담겨져 가야 하며 이는 전적으로 관계전문가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행단계와 실현에는 다양한 집단 또는 개인적인 지원과 협조체제가 요구된다.

예술기회을 공공공간에서 전개하는 경우는 물론, 사유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일지라도 공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공사업의 차원으로 간주하여, 공공부문 투자는 단순히 재정적 여건뿐만 아니라 그 기획과 관리에 이르기까지 보다 진취적인 의사를 포함하여야 한다.

집행과 관리의지가 공공사업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조형작업행위 및 작가의 선정권과 코오디네이션의 주체는 건축가, 도시계획가, 조경설계자에게 있을 때 즉 투자가나 공공기관은 후원으로서만이 충실할 때 조형물은 환경예술로서 가치와 의미를 발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