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한국현대예술사

세창서관과 딱지본

⼗세창서관과 신태삼




이창경

■ 세창의 60년 역사와 그 애수

종로3가 피카디리 골목으로 몇 미터 걸어가다 보면 세창서관(世晶書館)이라고 쓴 낮익은 간판이 눈에 띈다.

이곳이 오직 서적출판과 보급에 평생을 보낸 신태삼(申泰三)이 1984년 타계하기 전까지 그의 전 생애를 바쳐 지켜온 그 세창서관이다. 종로 3가 13번지 덕수빌eld 3층. 이곳에는 아직도 그의 지나온 생애를 말해주는 듯 번화한 종로거리와는 걸맞지 않게 누런 종이에 인쇄한 한문서적들이 진열되어 있고, 간혹 고대소설이란 표제가 붙은 원색표지의 색바랜 딱지본들도 눈에 띄었다.

딱지본. 우리 할아버지들이 호롱불 심지를 돋우며 목청좋게 읽어 내려가던 그 이야기 책들이 아니던가. 이제는 세월에 밀려 이곳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그의 세째 아들인 신호균이 대를 이어 세창서관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님요 ? 고집으로 살아오신 분이죠. 돌아가시는 그날도 이곳에 나와책을 지키고 계셨읍니다. 그분의 고집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읍니다.」

40을 넘긴 그는 창밖으로 시커멓게 밀려오는 소나기 구름을 바라보며 지긋이 눈을 감는다. 60년 역사에 비하면 일종의 애수마저 느끼게 하는 세창의 오늘을 생긱하는듯 했다.

신태삼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고집으로 평생을 뜨겁게 살아온 인물이다. 아직 출판기술이 현대화되지 못하여 필사나 목판에 의하여 서적이 간행되던 1910년대 14살의 어린 나이로 이 분야에 뛰어들어 서적출판과 인연을 맺은 이래 84년 77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60년이 넘는 세월을, 책을 찍어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사업을 벌려온 한편 종로를 떠나본 적이 없는 종로의 터줏대감이기도 하였다.

그의 생전에 간행한 책은 1천여 종류에 이른다고 하는데 진열대에 꽃혀있는 책들을 살펴보니 천자문(千字文), 원본비지 논어집주(原本備旨 論語集註), 통속국해 맹자집주(通俗國解 孟子集註), 상해무쌍 명심보감(詳解無雙 明心寶鑑), 현토주해 격몽요결(縣吐註解 擊蒙要訣), 상밀주석 통감연해(詳密註釋 通鑑諺解), 정본비지토해 주역 (正本備旨吐解 周易)등의 한문서적과 국한영일문신옥편 (國漢英日文新玉篇) , 국한문신옥편(國漢文新玉篇), 전초삽도, 국한신옥편(箋艸揷圖·國漢新玉篇)등의 사전류, 춘향전, 흥부전, 두텁전, 서동지전 등의 고소설. 강명화외 애사, 동정상애, 그 여자의 애정 등 이른바 신파소설. 신구 아리랑타령, 신구 노래가락타령, 무당노래가락, 시행잡가 등의 민요 가사집 등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초판간행년대는 1920·30년대가 대부분이고 전고대방(典故大方) 같은 서적은 81년 9월에 25판을 찍어 낸 판권이 붙어있었으며 고대소설 적성의전(狄成義傳)은 본래의 딱지본 모습 그대로 인데 1963년 12월 30일이 발행일로 되어 있었다.

「그분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후회하시는 걸 못보았어요. 요즈음 인쇄기술이 얼마나 발달됐읍니까? 좋은 종이도 많이 나오구요. 그런데도 자신이 아니면 이러한 일을 누가 하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실제로 요즈음도 간혹 딱지본을 찾는 외국인이나 대학원생들이 있으니까요.」

우리나라 초창기의 출판사들이 대부분 사라져 간 가운데 오직 세창서관만이 살아남은 이유와 세창서관이 있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서적간행과 보급에 바친 한평생

신태삼은 1908년 경기도 화양리에서 평산신씨 (平山申氏)의 5대독자 신덕용 (申德用)과 강순념 (姜順念)의 5남 1녀 중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덕용은 海公(申翼熙)과 5촌간이며 어머니 강순념은 대한제국의 조폐창격으로 엽전을 만들어 나라에 납품하던 집안의 규수였다. 덕용은 당시 지식계층과 교유가 두터웠던 구한말의 꼿꼿한 선비였는데 5대독자의 몸에서 아들을 내리 셋이나 낳았으니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한다. 그리하여 세째 아들의 이름은 태삼(泰三)이라 지어주셨다. 이렇게 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태삼은 남달리 총명한데가 있었고 외할머니의 사랑이 대단하여 어린시절을 대부분 외가에서 보냈다.

당시 외숙 강의영은 중국인 왕세창(王世昌)과 함께 종로 3가 84번지에서 영창서관(永晶書館)을 경영하고 있었고, 어린 태삼은 이곳에 자주 드나들면서 일을 도왔는데 이것이 출판업과 관련을 맺게되는 인연이었다. 외숙은 영특한 태삼을 누구 보다도 아끼고 이끌어 주려하였다. 그리하여 태삼을 아예 영창서관에 취직시켰다. 이것이 태삼의 나이 14세 때의 일이다.서점이래야 목판으로 찍어낸 몇 종 안되는 서적을 좌판에 벌여 놓고 요령을 울리며 고객을 불러들이는 행상에 불과하였다. 어린 태삼은 「다량으로 인쇄하여 싼 값으로 공급할 수는 없을까」,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찍는 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외숙에게 갔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제게 10원만 주세요.」쌀 한가마에 4원 50전하던 시절 이었으므로 10원이면 큰 돈이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하도 진지하여 10원을 내주었다. 10원을 받아쥔 태삼소년은 그 길로 목판하는 가게로 달려갔다. 천자문을 새기려 하였던 것이다. 첫 판이 완성되자 이것을 받아들고 외숙에게 달려왔다. 「이것이 천자문이예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팔릴 수 있는 책이 무엇일것 같아요?」 어린 태삼은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 책으로 천자문을 생각했던 것이다. 태삼의 생각에 탄복한 외숙은 당시 신동이라고 불리던 오세창(吳世晶)의 글씨를 받아 목판본 「世昌 千字文」을 간행하였다. 이것이 1923년의 일이었다. 천자문은 날개가 돋친 듯이 전국적으로 팔려 나갔고, 이에 용기를 얻은 태삼은 이천자문(2千字文), 3천자문(3千宇文),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편(啓蒙篇) 등 기초 한문교육서적을 계속 발간하였다. 이러한 책들은 일반독자 뿐만 아니라 서당의 교재로 많이 팔려 나갔다.

이렇게 간행하는 책들이 성공을 거두자 외숙에게서 독립하여 세창서관을 차렸다. 이때가 1926년, 그의 나이 열일곱되던 해였다.

어린 나이로 사장이된 태삼은 그해 일본의 출판시설을 돌아보기 위하여 여행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5개월정도 머물면서 청년사장 신태삼은 많은 것을 깨우쳤다. 첫째는 「고단샤」 인쇄부를 견학하고 일본의 발달된 인쇄기술에 놀랐다. 이미 그들은 지형을 떠서 대량으로 책을 공급하고 있었다. 수공업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의 현실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또 하나는 그들의 독서열의였다. 저녁무렵 서점에 들러보면 많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국민들의 독서열에 있음을 절감하였다. 이들을 앞지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서를 대량공급하여 국민들을 계도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렇다. 이 일을 내가 기어코 해내고 말것이다.」 탠삼은 몇 번이나 가슴에 이말을 되새겼다. 일본여행은 신태삼이 걸어가야 할 바를 확고하게 결정지어준 계기가 되었다.

결심을 단단히 하고 돌아온 태삼은 목판인쇄 방식을 버리고 당시 화동에 있던 동아일보사와 공무제휴를 맺고 대량인쇄에 착수 하였다. 신문사의 활판시설을 이용하니 초판에 2천부, 3천부를 찍어낼 수 있었다. 책은 대량으로 찍어 낼 수 있었으나 서점망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이기에 직접 책을 짊어지고 장터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혼자서 장터를 도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날 안성장에 갔다가 소장수가 우체국에서 우편환을 찾아오는 것을 본 태삼은 「이 우편 판매 이용하면 좋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집에 돌아온 후 곧 우체국에 대체구좌를 개설하고 광고를 시작했다. 서적판매에 새로운 경영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광고는당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 계속해서 알리는 한편, 간행되는 책의 맨 마지막 장을 이용하였다. 그때 개설한 대체구좌가 「경성진체 17번」이었다.

勿失好期! 讀書期는 오다. 小資本으로 大成功을 하시려는 분에게! 小資本으로 大企業을 이루고 成功할 수 있는 것도 서적상이 제일. 文化向上 發展을 위하여 社會에 貢歌할 수 있는 것도 서적상이 제일.

이 세창의 선전문구는 지금도 세창서관에서 간행된 어느 책에서 든지 볼 수 있다. 이 대체를 이용한 광고 덕택에 경성진체구좌 17번 세창서관으로는 전국에서 주문서가 쇄도하였다.

이렇게하여 1928년에는 지금의 서울신탁은행 종로 3가 지점이 위치하고 있는 종로 10번지에 자리를 옮겼으며 인쇄시설까지 갖춘 유망한 출판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영화시대 (映畵時代)」란 월간 잡지의 발행에도 손을 대었으며 당시 개성지방의 어느 양가집에서 일어난 실화를 대본으로 한 「며느리의 설움」은 3만부 정도가 팔릴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미 청년 실업가로서 종로의 거상으로 등장하게 된 신태삼은 1932년 몽양 여운형(夢陽呂運亨)의 6촌 여동생 여옥희 (呂玉熙)와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식에는 최남선을 비롯하여 당대의 명인들이 모여 그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고, 김두완도 그의 의형제로서 참석하였다.

한편 농어촌에서 놀음판이 성행하는 것을 보고는 이를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흥미있는 이야기책을 대량으로 찍어 공급하였다. 역시 책의 뒷면에는 「도박의 오락은 패가망신하고 독서의 연구는 성공치부한다. 인생의 성공발전도 독서에서, 문화향상도 독서」 등의 문구를 인쇄하여 전국 행상인을 통하여 장날 시장에서 판매케 하였다. 이 역시 천자문, 동몽선습, 논어, 맹자등과 마찬가지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노름으로 소일하던 사람들도 이야기책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소학교가 설립되면서 서당이 점차 쇠퇴하게 되자 일인은 소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학습참고서인 「모범전과」를 간행하였다. 이 참고서가 일본인에 의하여 집필되었고 내용 또한 소략함을 본 신태삼은 한국인에게 집필 의뢰하여 보다 풍부한 내용의 참고서를 간행하기로 하였다.

원고가 완성되자 외숙을 찾아갔다. 외숙이 경영하는 영창서관과는 경쟁상대가 되어 늘 미안하게 생각하였던 차였기에 이 기회에 큰 사업 한가지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하여 「모범대전과」는 영창서관에서 간행되었고, 일본인이 간행한 참고서와 당당히 경쟁하여 그를 압도하였다. 물론 가격도 학생들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싸게 하였기 때문에 각 학교에서 단체주문이 쇄도하였다. 이로써 영창서관도 일약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외숙 강의영도 의로운 사람이어서 교육계에서 벌어들인 돈을 뒷날 이화학당의 선교사들이 물러감으로 해서 재정난을 겪게 되었을 때 전 재산을 털어 희사하기도 한사람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화 60년사」에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일제침략기간 동안 서적에 대한 검열도 심하여 「위인창가집」같은 것은 출판금지를 당하였거니와 외가가 대한제국에 엽전을 만들어 대던 집안이었고, 또 처가가 독립지사 집안이었으니 세창서관 한문책 판돈은 상해임시정부로 넘어간다는 소문이 일경에 퍼져 있었다.

어느날 낮선 청년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두루말이 편지 한 장을 내어 놓았다. 편지는 김두환이 보낸 것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신태삼은 아내를 불러 집안에 있는 돈을 동전 한 잎 남기지 말고 가져오라 하여 그에게 넘겨 주었다. 이튿날 일경에 끌려가 심한 취조를 받았으나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여 다행히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울분은 20대부터 익혔던 사냥으로 달래기도 하였다. 그의 사냥솜씨는 보통을 넘어섰고 이것이 널리 알려져 시골에 멧돼지가 나타나면 그를 찾아와 잡아주기를 요청할 정도였다. 멧돼지는 다 지어 놓은 농작물을 짓밟아 망치게 하였기 때문에 마치 일인의 가슴에 총을 대듯 방아쇠를 당겼다. 손수 몰이꾼을 사들여 멧돼지를 처치해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러한 사냥으로 해방 후에는 하아지 중장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하아지 중장도 사냥을 즐겨 신태삼이 안내를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하아지는 전형적인 사관출신 직업군인 이었으므로 해방뒤에 찾아온 일대 정치적 혼란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사냥을 같이할 기회가 많았던 신태삼은 이때마다 적절한 장소에서 우연을 가장하여 당시의 경무국장 유석 조병옥을 비롯하여 백인제, 유일한, 공병우 등을 하아지와 만나게 해서 그가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돕도록 인식시켰다.

해방이 되자 첫번째 펴낸 책으로는 「우리말 사전(문세영 편)」이 있다. 이 책은 우리의 말과 글을 바르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간행한 것이었다. 이때에「영어자동」이란 책이 많이 팔려나갔다. 「영어자통」은 해방전에 그의 친구 김동성이 지은 것으로 원고료 없이 책 6권만 받을테니 간행해 보라고 하여 간행한 영어사전인데 간행당시에는 빛을 못보았으나 해방후에 몇 십만부가 팔려나갔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고 6.25가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생활하였다. 생활이 빈곤하여 몇가지 지형을 팔아 연명할 수 있었다.

수복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종로 3가 10번지에 다시문을 열었다. 다행히 그 전쟁속에서도 창고에만 불이 나서 쌓아둔 책중 일부만 타버렸을 뿐 건물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때에는 주로 고대소설과 신파소설을 주로 간행하였다. 3∼40년대 처럼 호황을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몇몇회사의 지형을 인수하여 수 종을 간행하였다. 1969년에는 종로 3가 10번지에 옛건물을 헐어내고 10층짜리 세창빌딩을 세웠다. 서적을 중심으로 판매하는 거대한 계획의 첫 단계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남이 아버지의 인감을 몰래 새겨 숱한 빛을 얻어 탕진하는 바람에 이 빌딩은 사채업자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뱃심 두둑한 그는 이러한 엄청난 현실 앞에서 「무엇이 오래 남겠어. 책밖에 더 있겠어」하며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차마 종로는 떠날 수 없어 그 거대한 빌딩 옆에 세를 얻어 서가에 다시 책을 꽃았다. 이것이 1973년 그의 나이 65세 때였으니 보통사람 같으면 그대로 주저 앉고 말 그런 나이였다. 그러나 신태삼은 초연하게 망가진 판을 고치고 교정을 보고 82년에는 대정신보 팔만대장경(大正新補 八萬大藏經)를 간행하기도 하며 더욱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덕수빌딩 3층 현 세창서관 자리가 출판인으로 70평생을 보내온 신태삼이 마지막 머문 곳이다. 한때 민족 문화의 계발, 국민의 계몽이라는 출판인의 자긍심 속에서 종로의 거부로 부상되기도 하였고 전국의 상권이 일인의 손에 넘어 갔어도 종로바닥과 개성만은 넘어가지 않았다고 장담하던 그가 가슴벅차게 살아왔던 곳이다. 인쇄 기술이 발달되고 양장제본의 무수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내가 하는 사업을 중단하면 누가 하겠느냐고 한적과 고소설만을 고집하던 그였다.

그렇다. 신태삼은 초창기 신문화의 거센 파도를 헤치며 책을 통하여 국민을 계도하려 하였고 이 길만이 민족문화를 계승할 수 있고 문화발전에 공헌 할 수 있는 길이라 자각한 출판계의 선각자임에 틀림없다.

1984년 10월 그의 잔뼈가 굵은 종로 70여년의 변모과정을 낱낱이 꾀고 있는 종로는 떠날수 없어 그날도 세창서관에 들러 일을 마친 다음 지하철을 탔다. 부평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탔다. 이 버스 안에서 신태삼은 눈을 감았다.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앞의자에 얼굴을 기댄채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눈을 감은 것이다. 마치 해공과도 같이 사자얼굴을 한 고집 센 80kg거구의 신태삼이 그의 모든 것을 책에 남겨두고 홀연히 떠난 것이다.

■ 필사와 목판의 뒤를 이은 딱지본

딱지본은 필사·목판에 이어 20세기 초반의 새로운 활자로 찍어낸 책들을 말한다. 내용별로 보면 고소설을 비롯하여 신소설·신파소설·가요집 등이며 이들은 겉표지에 울굿불굿하게 내용과 관계되는 그림을 그려 넣었고 분량은 국판 100면 내외의 소책자이다. 이의 첫출판은 1908년에 간행된 이인직의 작품인 신소설 「은세계 (銀世界)·同文社」이며 이의 영향으로 조선시대에 쓰여진 소설작품들을 신소설과 구분하여 고대소설이라고 붙여 간행하기도 하였는데 출판사에 따라 내용을 약간씩 변개하여 간행하거나 제목으로 달리하는 수도 있었다. 고소설이 처음으로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광동서국(光東書局)에서 간행한 강감찬전(姜邯贊傳, 33 p)이며 그후 1911년에 이해조가 춘향전을 개작하여 옥중화(獄中花)란 명칭으로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하였다.

이러한 고대소설의 간행은 상업성을 띠고 각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간행되어 소설독자층의 확대를 가져왔고 이본의 파생이라는 의의를 지니게 되는데 초창기 고대소설을 간행한 출판사는 유일서관(唯一書館), 박문서관(博文書館), 신문관(新文館), 신구서림(新舊書林), 회동서관(匯東書館), 조선서관(朝鮮書館), 영창서관(永晶書館) 등 여러 출판사가 참여하였다.

이중에 세창서관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세창서관에서 처음 간행한 딱지본은 송나라를 배경으로 여주인공 정수경의 무용담을 그린 「녀장군젼」이며 李太伯實記(74 p)/?成義博(35 p) 獄中佳花(140 p), 能見難思 (61 p), 金華寄夢遊錄 張國振博(44 p), 天情緣分)(32 p), ?雄博(79 p), 洪吉童傳 (37 p), 金仁香傳, 白鶴仙傳등이있으며 해방뒤에는 여러 출판사의 지청을 사들여 세창서관 이름으로 간행하였는데 1960년대 까지 간행하였다. 이를 보면 아래와 같다.

강태공전 / 강릉추월 / 김옥진전 / 곽분양전 관운장전 / 구운몽 / 김학공전 / 곽해룡전 / 가인기우 / 강유실전 / 권용선전 / 권익중전 / 당태종전 / 둑겁전 / 몽결초한송 / 박씨전 / 박문수전 / 별주부전/ 봉황금 / 사씨남정기 / 숙향전 / 산앙대전 / 신유복전 / 십생구사 / 심청전 / 서정기 / 앙주봉전 / 양산백전 / 양풍운전 / 어룡전 / 옥낭자전 / 용문장군전 / 이대봉전 / 임경업전 / 임호은전 / 장끼전 / 장풍운전 / 장익성전 / 적벽대전 / 적성여전 /제갈량전 / 진대방전 / 장자방실기 / 조생원전 / 조자룡전 / 정을선전 / 창선감의록 / 춘향전 / 최고운전 / 초한전 / 화룡도실기 / 홍부전 / 홍계월전 / 용문연 / 홍경래실기 / 청년회심곡/금산사몽유기 / 장학사전 / 전우치전



■ 신파소설의 간행과 독자층 확보

신파소설은 딱지본의 형태로 간행되지만 고대소설이나 신소설과는 달리 고대소설의 개작이나 윤색도 아니며 신소설처럼 개화의식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창작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표지에는 純情悲劇小說·探偵活劇小說·悲劇家庭小說·義俠戀愛小說·實情哀話小說·모범연애소설 등의 표제가 붙여져 있는데 대부분이 애정비극 소설이다. 이의 간행은 신소설과 같이 20세기 초에 간행되기 시작하여 해방이후 까지도 계속되었다.

신파소설의 독자는 대부분 근대교육을 받지 않은 농어촌의 부녀·노인계층이 대부분이었으나 그 폭은 상당히 넓었다.

작자는 무서명·무작자의 경우가 대부분인데 발행자 자신이 직접 원고를 쓰기도 하고, 무명작가들이 쓰거나 유명작가들이 썼으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 등이 있다고 한다. 독자층이 대부분 농어촌 사람들이었으니 주로 시골 장날 좌판을 벌여놓고 판매가 이루어졌다.

세창서관에서 1961년 12월 30일에 발행한 「사실비극 며누리의 죽임 -인명 철로우에 사라지는 곳」이란 신파소설을 펼치니 저자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고 병자(1936)년에 쓴 작자의 머리말이 첫페이지에 있었다. 그러니까 25년만에 다시 간행한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책이 팔리느냐고 물으니 간혹 노인분들이 들려 찾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조사된 목록은 다음과 같다.

강명화의 애사/견우직녀/기생의 설움/그 여자의 애정/괴적단/나의 춘몽/남편찾아 만주/능라도/동정의 미인/뜨거운 애정/독부의 눈물/락화암/만주의 눈물/만주에 간 애인/매부를 죽이기 까지/미인도/며느리의 죽엄/무정한 처녀/미남자의 눈물/무정한 미인/무정한 기적/마적과 처녀 /백의인의 눈물/불쌍한 처녀/북간도의 눈물/불같은 정열/봄을 맞는 처녀/사랑을 위하여/승방애화/신일선의 눈물/사랑에 속거 돈에 울고/상해야 잘 있거라/사랑은 원수/사랑에 무덤 /애정의 미인/일당백/애인의 정사/애인의 몽상/정열의 눈물/은하에 흐르는 정열/유정한 처녀/애정다한/악마의 눈물/영원의 눈물/애정/열녀의 눈물/인간유정/인생의 춘몽/용정촌의 설움/연애의 불길/연애의 눈물/이별의 눈물/연애의 승리자/죄진 여자/정든 고향을 찾아서/정조/장안애사/진주의 눈물/추야월/청춘의 애인/청춘의 보쌈/철로위에 사라진 꽃/사랑의 열정/혈루의 미인/황금의 눈물/황금의 실연/현철한 안해/홍도화/홍등의 하룻밤/한강의 비극

대물림으로 이어진 세창서관

신태삼은 가고 없지만 그가 만년을 보낸 그자리에 그와 너무도 닮은 셋째아들 호균이 지키고 있다. 세평 남짓한 공간에 한문고전들을 천정이 닿도록 쌓아 놓았다. 책상 한 개, 전화기 한 대. 한시대 출판문화를 주도해 왔던 그시절의 세창서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76 년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창서관에서 일해 온 호균은 아버지가 고집해 왔던 옛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요즈음에 판매하고 있는 서적은 논어·맹자·고문전보·통감등 한문고전을 주로 하고 있다. 「한문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늘어 대학교재로 몇부씩 나가고있읍니다.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도 감독용으로 나가구요. 돈 벌 욕심은 없읍니다. 다른 출판사들이 많이 생겨 영인본도 많이 나오고 다들 잘하고 있지요.」 말투까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는 세째, 신태삼의 그 고집을 다시 보는 듯하다. 부평에서 어머님 呂王妃 여사를 모시고 살아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