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풍스런 하회마을의 탈춤
-낙동강 유역의 탈놀이를 찾아-
서연호 / 고려대교수
■ 탈의 기원과 탈놀이의 발생
바로 10년 전의 일이었다. 1977년 여름 방학, 당시 서울시립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필자는 학생들과 더불어 평소에 열망하던 하회동을 찾게 되었다. 안동에서 오후 3시에 그곳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험준한 고개를 넘어서니 나의 눈 앞에는 일대 장관이 펼쳐지는 것이 었다. 광활하고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과 삼면이 물에 둘러싸인 고풍스런 하회마을이 순간적으로 나의 일상적인 시간개념과 의식을 떨쳐버리게 하였다.
마을에 묵으면서 그곳에 전승되던 별신굿 탈놀이에 관하여 가능한 자료를 청취·수집하였다. 이웃 병산동의 가면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짧은 기간에 사전 지식도 부족한 처지였으나 그때의 충격과 발견은 나로 하여금 탈에 관한 조사 연구를 본격화시키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회고하자면 나의 탈에 대한 관심은 60년대 초기로 소급될 수 있다. 희곡문학·연극학·민속학 등게 특히 관심을 지니고 왕성하게 다독을 하고 있을 즈음에 비로소 탈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눈이 뜨이게 되었다.
1964 년 여름 「시낭의식과 탈춤의 발생」이라는 서울대 우리문화연구회의 현지조사 보고서를 읽고 아직 대학생이었던 나는 큰 자극을 받은 일이 있었다. 보고서는 낙동강 상류지류의 한 지점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등에서 벌어진 탈놀이를 소개한 것이다.
보고서에서 읽은 탈에 관한 인식과 그것을 성숙시켜온 환경적 조건은 13년이 경과한 뒤 하회동의 답사에서 대체로는 그대로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초보적 현장실습이 나로 하여금 탈의 기원, 원초적 발생, 전파, 발전에 관하여 주의력과 탐구심을 키워 주었다. 아울러 우리의경우 이러한 문제의 해명에 가장 훌륭한 일차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다름아닌 낙동강임을 깨닫게도 해 주었다.
그 후 다시 낙동강을 찾은 것은 1979년 여름방학이었다. 당시 문예진흥원의 「월간문예진흥」지에서 연재를 허락해 주어 의외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강의 하류인 진주·가산을 비롯하여 고성·통영·창원 등지의 오광대 탈놀이를 광범위하게 돌아보았다.
1979년 2월부터 1980년 1월호에 걸쳐 「문예진흥」에 연재한 「민속연극 보전전수 실태조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성취된 것이다.
기원론적 접근
1982년 8월 중순, 오랜 동안 답사해 보고 싶었던 주곡동(주실마을)을 찾았다. 때마침 그 마을 출신인 시인 조지훈선생의 시비 제막식이 있어 겸사겸사 주변을 찾을 계획으로 말로만 듣던 오지인 그곳으로 행하였다. 장시간의 여정 끝에 저녁 늦게야 주곡동에 도착한 나는 피로도 물리친 채 마을의 노인층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벌써 오래전에 탈놀이의 전승은 끊겼다는 것이고, 인근에서도 확인이 어렵다고하였다.
주민들의 기억과 과거의 조사기록에 의하면, 주곡동의 탈놀이는 지신밟기·화해(화합)굿·서낭제의 뒷풀이·별신굿·풀굿놀이 등에서 연희되었는데, 20세기초에 가면이 없어졌다고 한다. 재료는 종이와 나무가 주가 되었으며 턱을 움직이는 것도 있었다.
떡달이·휘광이·초랭이 같은 명칭은 하회의 것과 공통성을 보인다. 그곳 농악대에 부수되어 있는 사대부·거지·여자·곱추·포수 같은 잡색들의 역할은 과거 탈놀이의 관영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주곡동 인근의 가곡·도계·섬촌·사들 같은 부락에도 유사한 농악대의 탈놀이가 있었음을 아울러 밝혔다.
다른 보고서에 의하면 봉화군 소천면 현동 3리 (황목부락)에도 농악대의 탈놀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떡달이 양반광대(2인)·포수·각시 등이 출연하려는데 떡달이는 주곡동의 경우와 같이 가면의 일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양반광대는 가면의 표면에 개꼬리로 만든 수염을 달아 쓰고 싸리나무 담배대를 들었다. 노인에게 담배를 달라기도 하고 담배대로 사람을 때리기도 하였다. 남의 집 사랑에 거침없이 들어가 앉으며 겨울인데도 부채질을 하면서 거만스런 동작을 지었다. 여장남자인 각시는 아이를 배어서 배 부른 모습을 하고 양반광대와 온갖 수작을 하였다. 포수는 나무총을 메고 다니며 등에 진 망태 속에는 잡은 꿩을 넣고 있었다. 이러한 잡색패는 악사들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스꽝스런 몸짓과 즉흥적이고 익살스런 재담을 하여 주민들을 즐겁게 하였다. 이러한 놀이는 1960년대까지 전승되었다.
현재 예천읍 통명등 농악대에서는 색시와 충잽이가 종이로 만든 탈을 쓰고 논다. 경북의 청도군 풍각면 차산동, 금릉군 개령면 광천등(빗내), 대구시 수성구 내환등(구 경산군 고사면) 등지의 농악에는 양반·포수·색시·사대부·각시·총잽이·중 등의 잡색이 있으나 가면은 쓰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주곡동이나 현동 3리, 통명동의 경우를 고려하면 예전에는 대부분이 가면을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같은 농악대의 탈굿이나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한국가면문화의 원초적 성격이나 기원, 환경적 전승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점에서 크게 주목되고 아울러 값진 연회임이 분명하다. 중농과 다산, 벽사와 행운을 기원하는 종교적 요소와 함께 대동적인 오락과 예능적인 표현을 복합적으로 성취하려는 집단무의식에 기반을 두었으며 일과 놀이문화의 총체적 조화가 소박하고 진솔한 행동양식으로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문화가 낙동강이라는 환경적 조건이나 사회·경제적 여건과 함께 성장하였음도 동시에 상기되어야 할 것이다.
■ 탈놀이의 예능화와 작업화
낙동강 상류의 탈놀이
1986년 2월 나는 MBC 취재팀과 함께 하회·동래·고성·통영 등지를 답사하였다. 주로 사자춤의 전파, 향토성이 강한 문등이춤과 할미춤에 대한 취재가 주목적인 여정이었으나 나름대로 몇가지 과제를 안고 동행한 셈이었다. 문등이 춤과 할미춤에서는 진한 향토성과 어떤 원초성을 느낄 수 있었고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수용된 사자춤은 한반도의 최남단에까지 이르렀음을 주의깊게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하회의 재답사를 통해서 몇 가지 잠정적인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하회 마을에서 수집된 안도령전설과 안씨 동족부락설을 토대로 한다면 별신굿놀이의 성립 연대는 고려 후기 혹은 말기 (13∼14세기 )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점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로는 인근 안동의 옛 서낭굿놀이, 인근 수동의 서낭굿놀이 등에 내포된 고려 말기의 사회적인 요소와 아울러 대사의 내용에 포함된 관련 사항을 들 수 있다.
물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가면의 문화는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나 별신굿 탈놀이와 같은 하나의 독립된 구조를 형성한 것이 그 당시로 보인다. 그렇다면 소급해서 볼 때 하회의 상류에 위치한 주실마을, 항목부락, 안동, 수동 등 주변의 탈놀이 잔영들도 예전에는 모두 하회별신굿 탈놀이와 유사한 형태를 지닌 채 전승되었으리라는 가정을 세우는 데 어려움이 없다.
모든 놀이가 서낭굿을 기점으로 전개 되고, 지신밟기라는길놀이 형식을 가미하고 있으며 아울러 주민중에서 선출된 산주와 광대(농악대)들이 놀이의 역할을 담당했음이 공통점으로 확인된다. 또한 가면은 신성과 예능성(오락성)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주기적인 축제의 문화로 전승되어 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외사람들은 어느 해 홍수에 떠내려온 궤짝 속에서 처음 탈을 갖게 되었다는 전설을 마치 목격이나 한듯이 들려주었다. 즉 다른 마을에서 먼저 놀았기에 자기 마을에서도 놀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설은 기원적 신비성과 함께 공통적 전파를 시사해 준다.
이상과 같은 네차례의 답사여행은 나로 하여금 낙동강 문화에 대한 매력과 집념, 궁금증을 더해 주었다. 보다 광범위한 조사를 계획해 오던 중 이번 여름방학을 이요하여 새로운 여정에 나서게 되었다.
낙동강 중·하류의 탈놀이
오광대의 중간 시원지로 지목되어 온 율지리(밤마리)를 시작으로 중류에서 하류 혹은 바닷가를 순회하는 길을 떠난 것은 지난 7월 21일 새벽이었다.
대구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오령·율원을 거쳐 경북의 그중 오지인 율지리에 도착하였다. 먼저 그 옛날에 번창하였던 나루터에 가 보았다. 주변에 잡초와 나무가 무성한 넓은 강에는 때마침 잦은 비에 불어난 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으며, 10여 명이 탈 수 있는 작은 나룻배가 강의 양안에 대기하고 있었다. 건널 사람이 모일때까지 그처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이 편은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구 초계군)이고 강을 건너면 창령군 이 방면으로 가게 된다. 20년 전까지 강건너 숲이 모두 밤나무였다고 해서 율지리의 명칭이 생겼다 한다. 하류에서 올라오는 배가 이곳에서 대규모의 하역을 하였고, 다시 인근에서 모인 산물을 싣고 하류로 내려갔기에 큰 나루인 율지가 번창할 수 밖에 없었다. 1930년까지 배가 많이 다녔다고 했다.보통 5∼6명이 승선하는 범선이 구포에서 율지까지 오는데 15 일이 소요되었다. 마을에는 큰 장이 섰고 객주집이 많아서 전주·상인·노동꾼·투전꾼·광대 등이 항시 붐볐다. 물산과 화폐가 풍족하고 유통이 잘 되어서 자연 생활이 넉넉하였고 예능·오락·향락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정재석옹(1919. 9. 22∼)은 외조모(이판서할매라 불렀음)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큰물이 진 어느 해에 상류에서 궤짝이 떠내려와 열어보니 탈이 들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의논 끝에 탈패를 꾸며 놀기 시작하였다 한다. 탈피는 인근 동리 뿐만아니라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흥행하였고, 김해까지 가서 해산하였다. 한참 전성기의 율지리는 1백여 호가 훨씬 넘는 번창한 마을로서 법은 장마당에서 탈놀이가 벌어졌다.
정영회씨 (1929. 7. 18∼)는 1970년초 까지만 해도 하루에 1천여 명 정도가 나루를 이용하였다고 회고하면서, 무엇보다도 수운교통이 육운교통으로 전환되면서 율지리가 폐촌이 되다시피 하였고, 오광대놀이의 소멸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고 하였다. 자유당 시절 마을의 비빔밥장수 할머니 (살았으면 1백세 정도)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대체로 1920년 경까지 율지에서 오광대놀이 및 각종 광대놀이가 번성하였다. 요컨대 교통과 시장기능을 포함한 경제적·환경적 여건이 오광대놀이의 성립·발전·소멸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옛날 오광대를 자주 놀았다는 장터는 하루에 버스가 몇차례 와서 머무는 빈터로 변하고, 60년대 말까지 장이 섰으나 이제는 그것마저 끊어졌다.
현재 율지는 농가 34호, 비농가 12호이고 인구는 남자 75명, 여자가 82명이며, 농경지는 305핵타아르(1모작 40·2모작 265·밭 237.5) 임야는 1,760핵타아르로서 가난한 농촌이다. 다방·이발소·여관·약방이 없는 마을로서 식당이자 여인숙이 하나 있을 뿐이다. 하루 버스가 20회 왕복하며 나룻배는 모두 6척 뿐이다. 70년대까지 강물로 식수를 하였는데 이제는 오염으로 냄새가 심하여 목욕도 할 수 없을 정도이며, 세수를 하면 눈이 아프다. 민물고기도 먹을 수 없을 지경으로 악취가 심하게 난다.
마을 한편에서 큰 당나무를 찾았다. 매년 정월 14일밤에 당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옛날 서낭굿놀이가 벌어졌음직한 마당과 큰물이 들때 주민들이 대피하는 언덕이 바로 곁에 있었다. 구원의 당목임이 여실하였다. 오장대는 이러한 서낭굿 의식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보고서에 의하면, 율지의 놀이는 오광대 이외에도 산둑박첨지·사당·만수받이굿·줄타기·말타기·원숭이·조두·상간·무동·요술·재주넘기 등이 공연되었다 한다. 즉 주민이 주축이 된 향인광대의 놀이와 유랑광대의 놀이가 경기를 타고 지속적으로 흥행을 시도해 온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상류로부터 하회까지의 탈놀이에서 농촌경제와 경직생산양식에 기반을 둔 연극적 특징을 살필 수 있었다면 강의 중류인 율지리에서는 하시(河市)의 시장경제와 상품매매양식, 그리고 흥행적인 예능의 특징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탈놀이의 예능화·직업화는 이처럼 낙동강의 지역환경이나 생활여건에 따라 성숙된것임을 대강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
■ 탈놀이 성행의 제요인 및 유형
탈놀이 전파의 역사적 배경
낙동강유역의 탈놀이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율지를 중간 기점으로 하여 신반·의령·산청·영산·무안·진동·진주·가산·통영·고성·김해·창원·마산·부산진·수영·동마 등지에서 놀았으며 거제의 학산리·진주시의 도동·사천군의 서구리와 남구리 등지에서도 전파가 확인되었다.
1930년대 초기에 율지를 답사한 송석하선생은 신반을 포함한 의령은 율지와 비숫한 시기에 탈놀이가 성행하였고, 진주는 40년전(1890년대)에 의령에서 전파되었으며, 수영과 동래는 60년전(1870년대)에 율지에서, 창원은 40년전(1890년대)에 율지에서, 부산진은 40년전(1890년)에 수영에서, 김해 역시 47년전에 동래에서, 통영은 30년전(1900년대)에 창원에서 각각 전파되었다고 하였다.
대체로 19세기 후반에 성행하였음을 알 수있는데 이러한 전파 과정에서 오광대나 야류의 구조적 유사성과 환경적 공통성을 쉽게 가정할 수 있으며, 아울러 견실한 지역 문화의 기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전파설에서 반드시 상기되어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구조가 완성된 오늘날의 오광대(야류포함)의 전파를 전제로 한것일 뿐, 탈 자체가 19세기 후반에 비로소 만들어졌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탈의 기원은 오랜 것이며, 하회별신굿 탈놀이에서 벌써 훌륭한 연극적 구조가 실증된 이상, 율지리 이하의 탈놀이 기원을 모두 19세기 후반으로 잡는 것은 무리이며 탈문화에 대한 심한왜곡이 아닐 수 없다.
19세기 후반에 탈놀이가 성행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율지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농업·어업·공업 생산의 증가와 시장기능의 확대, 수운을 근간으로 하는 낙동강 유역의 중소도시 발달, 인구증가와 경제적 기반의 성숙, 놀이문화의 전통과 새로운 대중오락·예능에 대한 사회적 욕구의 증대 , 지방 관청을 거점으로 하는 수도권문화의 영향, 봉건적 제도의 모순과 신분적 차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민중의식의 성장 등이 탈놀이와 같은 서민문화의 발전을 가져오게 한것으로 해석된다.
낙동강의 본류는 율지·신반·의령을 거쳐 김해에서 삼각주를 형성한 후 바다로 흘러든다. 한 지류는 진주와 사천의 가산을 거쳐 바다로 흘러든다. 다시 해로를 따라 통영·거제도·부산진·수영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하시와 해시(海市)의 사이사이 내륙지방에 탈놀이의 전파가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뭍의 문화와 뭍의 문화의 조화를 이 광범한 지역에서 비로소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탈놀이 문화의 영남지역 유형
낙동강유역에 분포되어 있는 오광대나 야류는 흔히 산대가면극의 영남형으로 인식되어 왔다. 문헌상으로 산대에 관한 기록이 장구하고, 또한 서울 근교에 전승되는 산대탈놀이와 영남지역의 탈놀이가 유사한데서 비롯된 견해임이 분명하다. 수도권의 문화가 지방으로 확산되었다는 이러한 견해는 얼핏 생각하면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영남형이라는 인식은 아직 상식의 단계이지 학술적인 개념이나 명칭이라 할 수 없다.
산대탈놀이 자체에 대한 인식에도 문제가 없지 아니하다. 탈놀이를 포함한 여러 가지 연회를 공연한 산대놀이는 본래부터 왕이나 상류층을 위한 놀이나 수도권의 문화가 아니라, 서민의 놀이로 지방문화의 바탕위에서 주래적인 영향과 예술적인 창의력이 새롭게 가미되어 형성된 것임을 새삼 되새겨야 할 것이다. 서민이 주체이고 지역성이 특징인 문화가 중앙집권제 사회 속에서 대표성 있게 통합·재창조된 것이 산대놀이였다.
산대가면극의 영남형이라는 고정관념은 지역문화에 대한 수도권문화의 영향 내지는 문화 상호간의 교류에의해 성숙된 「탈놀이의 영남지역유형」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낙동강유역 문화의 자생적 근원성과 주체적 성장, 독자적 개성이 전제된 외부와의 교류·영향이 학술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일시적으로 수도권의 산대극 영향을 받은것을 마치 전체의 이식문화로 단정하는 데에 큰 오류가 있다. 탈놀이의 영남지역유형은 수도권 유형의 침강문화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연극·연회문화의 실체임이 분명하다.다만 문화의 연구에 있어 상호교류와 영향관계는 항시 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 탈놀이의 유형적 특징
첫째로 영남지역유형의 특징으로는 무속·백사의식 등 종교성이 강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울러 탈놀이는 종교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연회되어 왔다.
하회별신굿의 주지, 통영오광대의 영노, 사자와 담보, 고성오광대의 비비, 가산오광대의 오방신장과 영노, 동래야류의 영노, 수영야류의 영노와 사자 등은 현재에도 전승되는 극중역할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이미 전승이 끊긴 다른지역에서도 무속과 백사의식에 뿌리박은 역할이 널리 전파되어 있었음이 이미 보고된 바 있다.
통영에서는 통어사의 영문이 들어앉은 뒤부터 매해 섣달 그믐날 동헌에서 밤늦게까지 매구(농악)을 치고 탈놀이를 하였다. 수군에 배치된 악공들을 동원하여 섣달 28일부터 집사·이방 등의 감독 아래 연습하고 그믐날 매구 행렬에는 목가면을 쓴 양반, 큰어미, 작은어미, 까마귀, 주지, 비비, 중광대 등이 출연하였다. 동헌의 해사가 끝나면 민가를 순회하였다. 이는 궁중의 나례와 같은 행사로서 가면의식이 19세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승되어 왔음을 시사해 준다.
고성오광대의 기능보유자 허종복(1930, 4∼)씨는 고성군 동해면 봉암리 장항부락에서 태어나줄곧 살아왔는데 바닷가인 그곳에서는 동신제와 용왕제가 자주 있었다고 하였다. 「매귀」 「용왕멕이」등으로 불리어온 이제사에는 가가호호를 순회하는 지신밟기도 있었는데 여타 지역의 잡색춤과 유사한 놀이가 전승되었다. 그가 배김새춤에 멋을 느끼게 된 것은 이러한 놀이를 어린시절에 체험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가산오광대의 한종기 (1930. 8∼)씨는 동제인 천룡제에 대하여 들려주었다. 지금까지 매년 정월 초하루 뒷산의 당목 밑에서 산돼지를 현장에서 잠아 머리를 당 아래 묻고 제사 지내며, 제사가 끝나면 매구를 치며 마을을 순회한다. 오굉대 놀이는 이렇게 매구와 함께 놀았으며, 옛날에는 조창의 인부들을 위한 오락으로 놀기도 하였다.
김해군 가락면 죽림리의 옛 가락오광대에서도 부락제·지신밟기·마당놀이·탈놀이의 상관성을 확인하였다. 김상기 (1910, 8∼) 이동근(1914∼) 배몽기(1923∼)세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가락오광대는 60년대 초까지 놀다가 전승이 끊겼으며, 1910∼20년대에는 성행하였다. 동제가 끝나면 재력이 있는 큰 집을 위주로 방문하여 먼저 마당놀이를 하였는데 현장에서 탈놀이가 벌어졌다. 탈놀이가 끝나면 샘굿·성주굿·조왕굿·장독굿·뒤지굿(고방굿)등 지신밟기를 하였다.
이 밖의 오광대나 야류지역에서 서낭굿과 지신밟기 그와 연관된 탈놀이의 자료가 이미 보고된 바 있었다. 이같은 종교적인 행사는 놀이의 내면에서 표현되는 신앙적인 요소와 아울러 특히 영남지역 유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초성의 잔존으로서 극복된다.
두번째 특징으로는 지역성·향토성이 강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을 들수 있다. 하회의 백정마당에서는 백정이 도끼로 소를 잡아 관중들 앞에서 우랑을 팔며, 할미마당에서는 쪽박을 허리에 찬 할미가 신세타령을 하면서 베를 짠다. 혼례마당에서는 청광대가 자식을 얻기 위하여 각시광대와 혼례를 올리고, 신방마당에서는 두사람이 멍석 위에서 비의로 모의적인 성행위를 한다.
문등이광대의 춤은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는 병신춤과 더불어 이른바 「보리문둥이」의 비애와 꿈을 펼쳐보인다. 불치의 병을 앓는 문등이가 고통과 비애를 보이다가 차차 소고춤을 통해 부자유의 극복과 환희를 표현하는데 문등이춤은 고성·통영·가산·진주·동래 등지에 전승된다.
고성의 다섯 양반(오방양반), 통영의 여섯 양반과 포수, 가산에서 노장의 노골적인 추태 등도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역적 요소들이다. 비비(영노)는 종교적인 성격도 있으나 일면 양반과 대결하는 민중적이고 익살스런 상대역으로서 향토인들의 집단적인 저항 의식이 함축되어 있다.
■ 탈놀이문화의 사회의식적 기반
세번째 특징으로는 단순하고 즉흥적인 형식으로 연회되는 농악의 잡색탈놀이와 향인광대가 해당지역의 세시풍속으로 연희해 온 일정한 구조의 농어촌 탈놀이 그리고 유랑광대들이 생계유지나 흥행을 위해서 공연해 온 직업적인 탈놀이 등이 중충구조를 이루고 있는 점을 들수 있다. 이같은 중층구조를 통해서 우리는 탈놀이가 기원·발전·전파되어 온 경과와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탈놀이와 연관되어 있는 자연적, 인위적 환경이나 사회적 경제적 여건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탐구도 병행시킬 수 있다.
즉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올수록, 농어촌에서 중소도시로 갈수록, 즉흥적인 놀이에서 직업적인 놀이로 이행 될수록 예능성이 짙어지며 그 반대방향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신앙성·향토성·원초성이 짙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해서지역유행이나 경기지역유형과 전체적으로 비교하면 지역성이 보다 강하다. 현악기나 관악기를 곁들이는 여타 지역의 반주음악에 비하며 타악기(북)를 위주로 한 편성도 지역성을 잘 드러낸다.
다섯 차례에 걸친 낙동강유역의 탈놀이 탐사여행을 통하여 여러 지역에서 「가면궤 습득설화」를 청취할 수 있었다. 설화대로라면 낙동강 7백리를 가면궤가 떠내려왔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하류의 마지막 오광대지역인 가락면 죽림리를 찾았을 때 나는 그곳 김상기옹에게 역시 같은 설화를 듣고나서 설화의 진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민 것이다. 궤짝이 어떻게 그 먼 물길을 올 수 있겠으며, 설사 그 속에 가면 제구가 있었다 해도 놀이방식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필시 양반들에게 놀이의 작사와 놀이꾼의 본 모습을 숨기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가면궤 습득설화와 김상기옹의 말씀은 모두 나에게 의미있게 들렸다. 가면의 기원, 신성, 발전적 전파경로를 낙동강의 흐름과 더불어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 동시에 현지인들의 가면에 대한 본질적 인식, 즉 또 하나의 다른 성격에로의 위장과 놀이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진솔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낙동강유역은 가면문화의 대표적인 지역으로서 그 방면의 젊은 연구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깊고 유장하고 도도한 물길과 같이 그 문화 또한 오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녀 왔다. 강줄기를 뒤로 하고 서울로 되돌아 오는 나는 천지의 숱한 탈들이 정답게 손짓하며 억센 사투리로 서운함을 표시하는 환상에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