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과 함께 살아있는 정신
-한국문학비 167기의 실태와 분석-
함동선 / 중앙대교수
■ 문학비의 태동과 그 환경
광복후 본격화된 한국문학연구는 현대문학을 고전문학의 자생적 요소에서 맥락을 찾고, 서
구문학의 외생적 요소는 충격으로 수용하려는 문학사관의 정립, 실증과 논리를 통한 방법론의 재구성, 새로운 언어이론에 의한 표현구조의 요청, 그리고 문학 자체의 개념 확대로 인한 사상, 정치, 경제의 영역까지 문학연구의 대상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한국문학연구의 다기한 분화, 영역의 확대, 방법의 다양 등은 문학연구의 한전환점을 이루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이러한 때, 금석문을 통한 한국문학연구는 한국문학사적 의의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요체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금석문이 지니는 역사적, 문헌적, 실증적, 예술적 요소가 문제 된다면, 금석문으로 기각(記刻)된 문학작품도 이에 상응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금석문은 고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후세에 남기고 싶은 의사가 투사된 「유의식지작품(有意識之作品)」이다. 이 「유의식지작품」은 원시 미개인이 물체 혹은 자연물에 기호를 새겨 후세에 남기고 싶은 의지의 표출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인류의 본능에 가까운 행위라고 보아도 좋다. 여러가지 기호를 알게 되면서 그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물체와 자연물에 기각한 것은 점유(占有), 기념, 보존등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데 있었고, 후에 그 내용이 복잡하게 된 것은 문화의 진전에 따른 것이다. 본 연구범위에 해당되는 「유의식지작품」으로서 문학비에 기각된 작품은 후세에 남기고 싶은 의식의 표출 그리고 선별된 작품인 것이다. 금석문으로의 작품은 작품과 금석문이라는 이중적 명제를 지닌다. 아울러 금석문으로서의 작품은 역사적 상황, 시대적 상황의 소산이기도 하다.
이에 본고에서는 문학비연구, 이른바 금석문을 통한 한국문학사 연구를 위한 전사적 연구인 금석학의 개념, 한국문학비의 태동과 그 환경, 한국문학비의 실태와 전개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 금석문의 개념과 영역검토
금석문이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총괄적으로 정의한 광의(廣義)와 이에 대척(對蹠)되는 제한적으로 정의한 협의가 있다.
전자 즉 광의는 모든 물건 또는 모든 고유형(固有形)과 자연물에 각자 주각(鑛刻)된 글을 말한다. 한편
금석이란 옛 사람들이 남긴 글이나 혹은 모든 의미있는 작품이 금석이나 기타 물질에 힘입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라고 한 마혈(馬衡)의 언급과 같이 영구적 보존성이 있는 모든 물질에 기록된 글이다.
후자는 오늘날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대로 금속(金屬)과 석재(石材)에 각자된 문자를 가리킨다. 금속에 새긴 문자를 금문이라 하고, 석재에 새긴 문자를 석문이라 하여 양자를 합쳐 금석문이라 한다. 이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을 금석학이라 하고, 한국에 관계되는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을 한국금석학이라 한다.
금석학 개념정립에 앞서 우선 다음 네 가지 실제 영역이 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 금석학의 대상, 둘째 금석학의 범위, 세째 금석학의 효용성, 네째 금석학과 관련되는 인접학문 혹은 상위학문 등이 그것이다.
금석학의. 대상은 인류가 과거에 존재하고 행동하고 사유했던 일체의 공간적 물건, 고유물, 즉 물질적 잔존물(殘存物)과 자연물이 해당된다. 물질적 잔존물은 구체적으로 말해 금속, 석재, 흙, 나무 따위로 만든 비, 갈(碣), 건축물, 성새(城塞), 관, 탑명 등과 같이 모양이 크고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귀갑(龜甲), 수골(獸骨), 금속, 석재, 흙, 나무, 대나무 등으로 만든 거울, 장제구(葬祭具), 무기, 악기, 가구, 도자기, 도장, 화폐, 와전(瓦塼), 죽간(竹簡), 목간(木簡), 목기, 봉니(封泥), 불상, 책판, 편액, 현판 등 대체로 옮길 수 있는 작은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자연물에는 마애(磨崖)와 벽화 등이 포함된다.
다음 금속학의 범위를 살펴보면,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현대까지의 전 기간과 문헌자료 혹은 문자자료가 있는 시대를 기준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역사에 대한 개념을 기록에 남는 문헌사학의 영역으로 한정하기 보다, 그 기록의 유무에 관계 없이, 인류의 과거를 모두 역사의 대상으로 보는 개념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한국 문학비의 태동인 그 개념은 역사의 영역을 문헌사학에서 해방시켜, 인류의 발생에서 현대까지의 인간의 역사를 총합적으로 파악, 인류사를 실증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있다.
후자는 「왕고인류지유문(往古人類之遺文)」 임을 감안할 때 인류가 문자를 만들고 기록으로 남긴 후가 그 시간적 범위가 된다. 또한 지역의 범위는 원칙적으로 전세계가 되지만, 인간이 과거에 거주하고 활동한 범위로 한정될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한민족의 영토가 되었던 모든 지역이 해당됨이 자명하다. 본고는 금석학의 범위를 후자로 한다.
금석문에 대한 시각이 다양화됨에 따라 금석학과 관련을 맺는 학문이 늘어나고 있지만, 뚜렷한 인접학문으로 역사학과 고고학을 들 수 있다. 역사학과 고고학은 문화권이나 문화층을 설정하는 경우, 모두 문헌과 유적, 그리고 유물로 공급되는 자료 즉 객관적 사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금석문은 객관적 사실의 기초적 자료라는 점에서, 엄정한 문자기록으로서, 또 정확한 사실로서, 각각 역사학과 고고학의 보존학문이 된다. 그리하여 금석학은 독자적 학문체계로 보다는 인접학문의 하위 분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 사정은 나아가 금석학을 사학의 한 분과로 고정 시키거나, 고고학의 한 분과로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금석학을 문헌학과 고고학의 중간에 있는 보조과학, 또는 문헌과 물체를 취급하는 고고학과 미술사학의 양자에 걸쳐서 다리 구실을 하는 학문이라는 견해가 표명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후말할 것도 없이 안정학문의 입장에 시각을 둔 것이다. 그런 한편 금석학의 위상이 다양함을 증거해 주기도 한다.
이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금석문의 효용성이다. 첫째로 공시성(公示性)을 들 수 있다. 금석문이 후세에 남기고 싶은 자율적 의사가 투사된 「유의식지작품」이란 점은 기록의 공시성이란 속성에서 연유된다. 이 속성은 이질적 생활영역을 결합하고, 무수하게 다기한 사회관계를 통일시켜, 현재성이 없다해도 잠재적 사회의의의 집적물로서 가능해 진다. 또한 공시성은 그 시대 정신사의 흐름을 직·간접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둘째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지적된다. 실사구시는 경제학의 그것이 아니라, 고전에 대한 고증학으로서의 그것이다. 실사구시 구현의 대상으로서 금석문의 가치는 일찌기 김정회(金正喜), 오경석(吳慶錫)에 의해 천명된 바, 금석의 고구를 통하여 역사연구의 실증정신을 구현하고, 우리나라 역사를 재조명 함으로써, 역사연구에 있어서의 금석학의 기여를 명확히 제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금석학과 인접학문과의 관계 및 위치는 다른 지면에 재론될 것이다.
이제까지의 검토를 요약하면, 금석학이란 기본적으로 인류 과거의 모든 물체, 모든 고형물, 그리고 자연물에 새겨진 유물연구로서, 인류의 과거를 해명 파악하는데 기여하는 학문으로 독자적 범주를 지니며, 대상, 범위의 규정에 따라 그리고 인접학문과의 관련에 의해 새로운 양상과 의의를 지니게 되는 공시성과 실사구시 정신이 학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 한국문학비의 태동과 그 환경
문학비는 금속학에 속한다고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이 금속학의 특성은 각한 문자를 주된 대상으로 연구하느냐, 각한 물체를 주된 대상으로 연구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각자된 명문(銘文)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할 때, 그 명문은 문서 또는 기록으로 역사학의 보조학이 되고, 각자된 물체 (유물)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 할때, 기년(紀年)의 유무(有無)로 연대를 결정하는 중요한 구실이 되는 고고학의 보조학이 된다. 한편 자연석에 각자된 명문은 물체(유물)로 고고학 측멸보다 명문이 주가 되는 역사학 측면으로 고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을 종합하면, 금석학은 역사학과 고고학을 잇는 다리로, 이 두 학문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수는 없어도, 가장 가까운 학문이라는데 금석학의 좌표가 위치한다. 따라서 명문이 중심이 된 한 국문학비 연구는 결국 한국문학사연구와 연관된다.
한국금석학은 미개척 분야의 하나로, 금석문의 수집정리 고증이 미흡함은 물론 학문적 연구의 기반 조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허문도(許文道)는「한마디로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의 금석학의 실정은 불모의 황무지라 할까, 버려진 초야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듯 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한국금석학을「불모의 황무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선행연구의 부재에서 출발한 것이 한 국문학비 연구이다.
한국에서 문학비 또는 시비(詩碑)란 용어를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근자에 이르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국어대사전」의 기본어에도 빠져 있는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하에 간행된 「조선금석총람」을 보면 해남 「명장양동정시비(明張良東征詩碑)」, 개성 「선죽교 시비(善竹橋詩碑)」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시비란 용어는 전에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학비는 명문을 각자한 입석(立石)의 모양에 따라 갈 또는 비로 구분된다. 갈은 기등 모양의 석재에 각자한 것이고, 비는 널조각 같은 형싱기 석재에 각자한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도 비가 아니라 갈이라는 설이 있다. 문학비는 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비란 각문의 내용 즉 기공(紀功) , 송덕, 묘비, 묘지, 경전, 불전, 조상(造像), 시문(時文)에 따라 묘비(묘갈, 탑명, 신도비 포함), 묘지, 각경(석경, 경량 포함), 조상(조불명, 화상석명 포함), 제명(題名), 제자(題宇) 등이 포괄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세우고 있는 비의 종류는, 그 내용에 따라 순수비(巡狩碑), 기적비, 신도비, 능비, 묘비, 정려비(旌閭碑), 송덕비, 문학비, 시비, 기념비, 전적비, 전승비, 참전비, 위령탑 등으로 구분된다.
문학비 또는 시비에 대한 정의는 사전의 기본어에도 생략되어 있다. 근간된 외국의 문학사전에 의하면, 시비는 「시인의 고향 혹은 관계있는 고장에 시를 새기고 세운 비」라고 기술되어 있다. 문학비는 문인을 기리고자 하는 고장에, 기리고자 하는 글을 새긴 기념비가 되겠다.
문학비는 각자된 문의에 따라 시를 새긴 시비, 작가의 짤막한 글을 새긴 사비(詞碑), 동요·동시를 새긴 동요비(노래비 포함), 민요를 새긴 민요비 등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한국문학비는 현대문학비와 고전문학비를 포괄한다.
문학비 특히 시비에 대한 용어는 일제하에 간행된「조선금석총람」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광복 후 최초의 시비를 세우기 전후의 일이다. 1948년 우리나라 최초로 시비를 의식하고 세운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시비를 세울 때, 박노아(朴露兒)는 「상화시비 제막 식행」(신세대, 1949)이라는 글에서, 시비 건립에 대한 근대적 발언을 한다. 그는 시비 건립의 목적을
시인의 시비를 세우는 뜻은, 오로지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인간성이 상실되고 민족혼이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 있어, 조선 민족의 전통과 체질 속에 깊이 숨 쉬고 있는 순일 무사한 시정신을 환기하자는 것이며, 그것이 곧 우리 민족정신의 양식이 될 수 있으며, 모리배와 정권 야욕배들의 미망을 깨워주는 경종이 될 수 있는 까닭이라‥‥‥.
고 조선 민족의 전통과 체질 속에 숨쉬고 있는 시정신의 환기와 모리배와 정권 야욕배들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다는 것은, 형식에 있어 에피그램을 연상케 하나, 대체로 시비의 효용성을 주장한 듯하다.
이에 반해 북한에서 최초의 문학비건립이 있었다고 박흥근(朴洪根)은 말한다.
나는 8·15 해방을 고향에서 맞이했다. 우리의 고향은 문학인이 비교적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그래서 문학청년도 많았다. 해방과 동시에 우리 사이에 논의된 것은 서해(囑海)의 문학비 건립이었다. 우리는 서해의 얼굴도 본 일이 없었으나, 우리 향토가 낳은 작가라는 데 대해 일찍부터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7년엔가 공원에 서해의 문학비는 세워졌다고 들었다. 그동안 나는 고향을 떠나 청진과 평양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사업에 직접 참가는 못 했다. 서해의 문학비는 우리나라의 문학비로서는 아마 일찌기 세워진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서해의 문학비가 1947년에 건립된 것이 사실이라면 한국 최초의 현대문학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 성진에 건립했다는 것은 지금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것도 문학비에 나타난 분단현상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문학비 또는 시비를 의식하고 세운 시람은 김소운(金素雲)이다. 김소운은 1948년 3월 대구 달성공원에 최초의 문학비인 상화 이상화시비를 세웠다. 일본의 경우 초창기에 해당한 明治시대는 문학비를 의식하지 않고 세운 듯하고, 昭和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문학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문학비의 환경 속에서 자기 인식이 김소운으로 하여금 시비의 개척자가 되게 하였다. 김소운이 시비를 건립한 것은 광복 후의 일이지만 뜻을 가지기는 일제 말엽의 일이라 한다. 신시 40년에 시비 하나 세우지 못했다는 것도 초라하거니와 생전에 불우했던 시인들이 사후에 시비 하나 가진다해서 과분한 사치라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최초의 시비를 세우게 된 전말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해방되던 해 삼월에 나는 평북 영변에 들렀던 길에 약산(藥山) 중복에 있는 천주사(天柱寺)에 며칠을 머물렀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동대(東臺)에 올라 군룡강 구비구비를 바라보면서 소월(素月)의 시가 절로 입속에 떠 올랐다. 여기 소월의 시비 하나가 있었으면‥‥‥‥. 비는 못세워도 하다못해 어느 바위에 싯귀라도 새겨 두었으면‥‥‥‥. 그때 주머니에는 만주에서 찾아오던 원고료 기천원이 있었다. 그만 일을 하려면 할수 있었고, 일본으로 도로 가려던 길인데, 가면 마치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운 때이었다. 인연 엷은 고토에 선물 하나 남기고 갈 겸, 조선시집 두권의 역고료(譯稿料)를 도로 조선시단에 물려 갚는다는 뜻으로도 알맞고 적절한 기회라는 생각이었다.
그당시 일본의 유수한 출판사 富出房, 三省堂 등은 용지 사정으로 만주 신경에 소개되어 있었다. 김소운은 마침 두 출판사에서 조선시집 두 권과 기타 저서의 인세 기천원을 받고 귀로에 영변의 천주사에 소월시비를 세우던가, 바위에 시귀라도 각자했으면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천주사 주지의 만류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일본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뜻밖의 가성 천연두를 앓고 광복을 맞이한다. 38선으로 남과 북이 분단되고, 소월시비는 세울 수 없게 된다. 이에 김소운은 「백조(白湖)」지가 풍기는 분위기가 그리워 생전에 한번 만나 본 일 밖에 없는 이상화시비를 세운다. 이 전말은 국토 분단으로 야기된 여러 현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한국문학비의 건립 추이 과정에서 발전적 계기가 된 것은 한국일보 발행인 장기영(張基榮)이 작고문인 기념비 건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시비 세우기 운동, 윤석중(尹石重, 새싸회장)의 노래비 세우기 운동, 김동욱(金東旭,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의 시가비건립운동 등을 들 수 있다.
■ 한국문학비의 실태와 전개양상
오늘날 한국문학비는 졸저 「한국문학비」 (시문학사, 1978)에 시비 44기, 사비 5기, 동요비 7기, 민요비 2기, 고전시비 14기, 작곡비 1기 등 73기와 「한국문학비」(제2집, 도서출판 호롱불, 1983)에 시비 11기, 사비 4기, 동요비 4기. 고전시비 12기, 고전사비 1기 등 32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비 56기, 사비 8기, 동요비 11기, 민요비 2기, 고전시비 26기, 고전사비 1기, 작곡비 1기 등 총 105기가 된다. 「한국문학비 」제 3집에 수록될 문학비는 시비 26기, 사비 11기, 동요비 3기, 민요비 3기, 고전시비 19기 등 52기가 된다. 이미 간행된 「한국문학비」와 장차 「한국문학비」 제 3집에 수록될 문학비의 총계는 시비 82기, 사비 19기, 동요비 14기, 민요비 5기, 고전시비 45기, 고전시비 1기, 작곡비 1기등 167기가 된다. 현대문학비 116기, 고전문학비 51기로 구분된다. 위에는 미처 답사하지 못한 문학비, 가요비, 선시비(禪詩碑) 등 40여기는 제외되어 있다.
1948년 최초로 문학비 건립
한국문학비의 태동은 「조선금석총람」의 시비에 대한 기록과 박홍근의 북한문학비애 대한 서술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비 또는 시비를 의식하고 세운 시비는 1948년 대구에 세운 상화 이상화시비로 비롯된다. 식민지의 애환 속에서 「숨결이 막혀」 「저 하늘에다 문창이나 뚫으랴」 <조선병에서> 하고 민족을 위한 시를 쓰면 항일하는 저항시가 되고, 민족의 애가를 쓰면 다양한 낭만적 경향의 시가 된 민족시인 상화시비가 최초의 문학비가 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은 한국시의 변화가 한국시 자체내에서 이루어진 변화이고, 서구시는 하나의 충격으로 수용되었다는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타생적(他生的) 요소를 배제하고 자생적 요소에 근거를 둔 주체관의 모색과 무관하지 않다. 상화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나의 침실로> 11연이 각자되어 있다. 비양(碑陽)의 제첨은 오세창(吳世昌)이 쓰고, 비음(碑陰)의 글은 김소운이 짓고, 글씨는 상화의 세째 아들 태희(太熙)가 11세 때 썼다.
1950년대의 문학비
1950년대 문학비에는 6·25동란의 아픔이 투영된 특징이 지적된다. 영랑(永郎) 김윤식(金允植)은 「총칼사이 헤매다 죽는 태어난 비운의 겨레이어든」(<망각>의 4연에서)하고 동족상쟁의 총칼 사이를 헤매다, 1950년 7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는 날, 신당동 자택 대문 앞에서 포탄의 파편을 맞고 그 다음날 운명한다. 이태원 남산 기슭에 가매장했다가, 1954년 11월 망우리 묘지로 이장하고, 묘비겸 시비를 세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4행이 각자되어 있다. 이에 대응해서 고전문학비는 충무시의 이순신시비, 서울의 사육신시비가 세워진점은 위의 경우와 상보관계가 있다고 추측된다. 기타도 진주시의 논개시비, 김상용(金尙鎔)시비, 박인환(朴寅煥)시비, 노천명(廬天命)시비 등과 개인이 남긴 한국근대문화사상의 공적이 바로 한국근대문화운동의 전모라는 공적을 기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사비가 있다. 비양에는 그의 공적기와 비음에는 「독립선언서」가 음각되어 있다. 시비 4기, 사비 1기, 고전시비 3기 등 8기가 된다.
1960년대의 문학비
1960년대의 문학비는 민요비의 갑오동학철명탑비가그 효시다. 그것은 5·16혁명과 유관한 듯하다. 한편 문단과 언론기관에서 작고 문인기념비 건립운동, 한국일보 창간 발행인인 장기영 사주의 시비 세우기 운동, 그리고 새싹회에서의 노래비 세우기 운동 등이 계기가되어 한국문학비의 성장을 촉매시킨다. 이 시기는 대체로 시단의 원로시인의 시비와 동요시의 노래비가 주축을 이룬다.
평생을 독신으로 방랑하다가 유시집 한 권을 남기고간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시비는, 1963년 7월 서울 수유등 속칭 빨래골 묘소에 세운다. 시비에는 그의 생애와 시를 지배한 <방랑의 마음> (I)의 1연을 새기고 있다. 공초는 「시대고와 그 희생」이라는 글에서 1920년대의 이 땅을 황량한 페허라 선언한다. 그 폐허를 의미하는 식민지 상황에서, 탈식민지하기 위해 건설을 위한 파괴와 영원한 창조는 그의 정신에 있어 양면성이다. 전자의 이상론이 일제하에서 실현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 후자도 선회하여 영원한 창조를 위한 형이 상학적인 관념세계로 귀의한다. 이것이 방랑의 마음이다. 한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소월 김정식, 수주(樹洲) 변명로(卞榮魯),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윤동주(尹東柱) 등 민족시인의 시비가 세워진다. 만해의 파고다공원시비는 <춘주(春晝)>와 <우리 님>이라는 시조 2편이, 수주의 부천시비는 <생시에 못 뵈올님>의 전반부, 소월 남산시비는 <산유화>의 전문이, 육사의 안동시비는 <광야>, 윤동주의 연희동산시비는 <서시 (序詩)>의 전문 등이 각자되어 있다.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의 부산 경남여고교 시비, 경주 불국사시비, 부산 남여상고교시비 등 3기와 가람 이병기(李秉岐) 전주시비, 김수영 도봉시비, 강소천(姜小泉)의 구리동요비, 권태웅의 충주동요비, 박목월(朴本月)의 경주동요비, 이원수(李元壽)의 마산동요비, 서덕출의 울산동요비, 홍난파(洪蘭坡)의 수원작곡비 (노래미로 세웠으나 필자는 편의상 작곡비로 구분함), 윤극영(尹克榮) 서울동요비, 윤석중(尹石重) 서울동요비 등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사비로는 김유정(金裕貞) 춘천사비가 있다. 이 시기는 시비 12기, 사비 2기, 동요비 7기, 민요비 1기, 고전 시비 1기, 작곡비 1기 등 24기이다. 현대 문학비는 22기, 고전문학비는 2기이다.
1970년대의 문학비
1970년대는 한국문학비의 성장기에 해당된다. 이름에 집착하여 세운 선정비, 불망비는 그 글자 풀이와는 달리 세월이 갈수록 세상 사람들의 시야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문학인을 기리고자 세운 문학비는 세운 후에 그 문학이 지니는 역사적, 예술적, 문학적 가치로 만인의 가슴을 울리고, 만인을 즐겁게하는 명비(名碑)가 된다. 이 시기의 문학비는 이러한 명비의 조건을 갖추게 하는 반성론이 제기된 시기에 세워진다.
그 반성론 속에 「시비」(「미래로부터의 도전」 중대신문사)라는 글에서 필자가 말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가 인간의 진실을 담은 명시이어야 한다. 둘째 그 명시는 가능하면 비주(碑主) 자신이 고른 것을 비주 자신이 써야한다. 이것이 여의치 못하면 차선책으로 자필을 확대하거나 집자(集宇) 한다. 이것도 불가능할 때는 좋은 글씨를 얻는다. 그러나 비주의 글이 좋다해도 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악필이어서는 안된다. 세째 조형예술로서의 새로운 감각과 스타일을 갖춘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 네째 비주에 친근감을 느끼고 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시민의 정서개발과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 다섯째 현대와 미래에서 그 명분을 찾을 수 있는 명비라해도 탁본(拓本)으로서의 예술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런 명비에 대한 관심은 한국 문단 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기대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특성은 명비가되지 못할 바에는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반성으로 출발한 셈이다.
1970년대의 문학비는 광주시 광주 공원에 세운 영랑 김윤식시비, 박용철(朴龍喆)시비 등과 사직공원에 세운 윤선도(尹善道), 김인후(金麟厚), 이순신(李舜臣), 김덕령(金德齡), 임제(林悌), 송순(宋純), 정충신(鄭忠臣) 등의 고전시비 7기가 특기할 만하다. 그 외에 조지훈(趙芝蒸)의 남산시비는 지조와 강직으로 이름난 매친(梅泉)과 만해를 추앙한 만큼 고고한 자세로 명비가 되고 있다. 시비에는 시 <파초우> (芭蕉雨)의 전문이 음각되어 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봉선사시비는 10편의 시를 각자할 만큼 비신이 크다. 심훈(沈熏)의 당진(唐津)시비는 그의 절창 <그날이 오면>을 각자한 한국문학비 중 그 규모가 큰 것 중의 하나다. 김현승(金顯承) 무등산시비, 신석초(申石艸) 광주시비, 김용호(金容浩) 단국대시비, 신석정(辛夕汀) 전주시비, 한하운(韓何雲) 소록도시비, 송강(松江) 정철(鄭激) 담양고전시비, 이매창(李海窓) 부안고전시비 등의 문학비가 있다. 이 시기는 시비 33기, 사비 4기, 동요비 5기, 민요시 1기, 고전시비 15기, 고전사비 1기등 59기이다. 현대문학비는 42기, 고전문학비는 13기가 된다.
1980년대의 문학비
문학비는 명비가 되어야 한다는 반성론을 계승한 1980년대는 김동욱의 전국시가비 건립동호회의 활동과 서울 도심 속에 세운 원로시인의 시비가 돋보인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한국문학비의 중흥기로 간주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사된 문학비는 시비 31기, 사비 11기, 동요비 2기, 고전시비 19기 등 63기에 이르고 있다. 연대별 문학비 기수(基數)는 다음과 같다.
비주별 문학비 수는 대체로 한국인의 시 선호도가 작용된 듯하다. 그리고 새워진 지역은 비주와 연관된 지역이 많으나 소월은 예외로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유치환 5기는 부산과 경북에, 한용운은 홍성에 2기, 서울과 부산에 각각 1기, 이병기는 전북에 3기, 이은상은 경남 2기, 부산에 1기 등이나 소월은 서울에 4기가 집중적으로 세워져 있다.
지역별 문학비 기는 다음과 같다
지역별 문학비는 서울, 경기, 전남의 순위이다. 그동안 전남의 우위에 있었던 것이, 최근에 서울에서 도시공간 미화작업의 일환으로 전개된 시비 세우기 운동에 밀린 듯한 인상이다.
■ 한국근대시사연구의 전사적 연구
지금까지 한국문학연구를 위한 시설로 한국문학비의 실태와 분석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한국문학에 관한 금석문은 한국문학을 추진한 주역이 후세에 남기고자 기각한 「유의식지작품」이다 이 「유의식지작품」은 후세에 전하겠다는 결의의 표출이다. 따라서 후세에 전하겠다는 결의의 표출은 그것으로 주목의 대상이 된다. 필자가 시도하는 바는 이러한 「유의식지작품」을 통한 한국근대시사연구의 전사적 연구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문학비의 출발은 늦은 듯하다. 문학비를 의식하고 그것도 지절시인 상화 이상화시비로 출발된 것은, 오늘날 한국의 현대시를 내재적 요소에서 찾으려는 인식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 크다. 세째 문학비의 짧은 역사에도 탓이 있을 것 이지만, 문학비가 시민의 정서순화를 할만큼 명비가지 많지 못하다. 문단과 사회는 이에 대한 배려가 뒤따라 할 것이다. 근자에 도시 공간 미화작업의 일환으로 세워지고 있는 시비들 중 그 환경과 균형이 어리지 않는 조형성과 각자의 졸필은 마땅히 시정돼야 한다.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보완은 필자의 다음 과제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