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거점의 보수성과 창조성
민용태 / 시인, 고대 교수
문화 거점은 어디에 있는가?
한국에 가 볼만한 데가 어디냐고 물으면 우리는 곧잘 경주 불국사나 아니면 잠실체육관이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문화 거점은 수많은 사찰과 박물관, 아니면 민속촌이라고 하기도 한다. 오랜만에 외국인 친구라도 오면 우리는 한국의 가장 그럴듯한 문화 유적을 하나 보여 주고 「원더풀 !」소리를 끌어내야 되겠는데 도무지 얼른 가 볼만한 것이 생각이 안 날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요런 서반아 친구는 아무리 덕수궁, 경복궁을 갖다 보여도 도무지 기가 죽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의 어느 나라를 가 보아도 문화유적들은 하도 어마어마해서 우리의 그 정교하다는 신라 왕관을 놓고 황금이 어떻게 정교하게 붙어 있으니를 설명할 엄두가 안 나는 것을 본다. 또한 크기로 말하면 어디 로마의 어느 궁전이나 해가 지지 않던 대제국 서반아의 궁전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자존심 상하는 딱한 경우에 우리는 도대체 문화 거점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아니 그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급한 물음은 문화 거점이 한국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다.
문화 거점은 문학으로 말하면 작품을 일컫는다. 즉 문화 관객과 문화 유산이 만나는 장소이다. 문학 작품이 꼭 인쇄된 책이 아니듯 문화 거점도 꼭 사찰이나 기념비일 필요는 없다. 문학에도 구전문학, 연극 따위의 종합예술 형태의 것을 포함하듯 문화는 보다 많은 분야들, 모든 유형 무형의 문화적 조형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더군다나 이것이 우리가 예로 든 문학과 다른 점은 대부분의 경우 문화 거점은 애초에 창작자가 문화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이룩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시간 속에서 그 원래의 용도를 벗어나면서 문화 유적으로 둔갑하는 예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선사시대의 주거지가 그렇고, 사찰이 그렇고 궁전이 또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 거점이란 오히려 시간이 이룩한 예술 전반을 가리킨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 문화공간이란 시간과 역사가 공간 화된 거점을 주로 이야기한다. 현재 공간을 통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문화 거점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공간이 유형이거나 무형일 수는 있다. 다시 말하면 꼭 기념비처럼 한 공간에 묶여 있는 것들이 있고 봉산탈춤처럼 한 지방, 한 민족에게 무형으로 전승되어 오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문화전통을 문화공간으로 설정할 때 우리는 그 공간적인 유형성의 결핍 때문에 흔히 문화 거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화와 오늘의 관객이 만나는 점에서는 훌륭한 문화 공간인 것이다.
문화를 좁은 의미의 예술로 국한시키면 우리는 흔히 예술이 먼저인가, 예술가가 먼저인가의 논쟁에 맞부딪친다. 구체적으로 하나의 예술품은 예술가가 만든다. 그러나 그 예술가는 예술품을 통하여 예술가임을 인정받는다. 즉 이 둘은 상호 생성 보조관계다. 예술품의 예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문화 거점은 또 다시 박물관으로 낙착되고 만다. 그러나 옛날의 전통 예술이지만 오늘 그것을 재현하는 예술가의 공연은 현재이면서 과거요 과거이면서 오늘 살아서 관객을 찾아가는 가장 역동적인 문화 거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화 거점의 개념이 꼭 유형적인 형태로 옛날의 무엇이어야 된다거나 오늘 문화 활동의 본거지라고 하는 좁은 개념을 벗어나야 될 필요성을 느낀다. 이런 착오는 한국문화의 거점을 몇몇 사찰과 왕궁, 박물관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고 잠실체육관이나 민속촌, 아니면 올림픽 공원을, 자랑할 수 있는 한국 문화 거점이라고 떠들어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선 문화 거점이란 일정한 문화, 즉 시간의 축적된 유형 무형의 예술적 구조물이 오늘의 관객이나 관광객과 만나는 장소로 규정짓고 그 보다 구체적인 성격으로 접근해 보자.
문화 거점의 질과 관객
일반적으로 미국인이나 신생국들은 구라파를 문화의 요람으로 생각해 왔다. 「미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유럽의 예술적 전통과 유럽이 이룩한 높은 예술의 경지를 부러워하는 한편, 유럽에서의 왕조와 귀족, 교회라는 엘리트적인 특성을 가진 제도권과 예술이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사이였다는 사실 때문에 예술의 탁월성과 세속적 민주적 가치는 서로 양립하기 힘든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습성이 있어 왔다.」고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한다. (「예술행정 1」, 한국 문화예술진흥원, 1987, 37쪽 참조) 이런 생각은 예술이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엘리트 군의 산물이라는 편견과도 일치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문화나 예술에 대한 계급적인 해석을 내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 문화의 평가 가치로서 시간성에 기준을 두는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즉 구라파 문화가 그토록 미국문화보다 오래 되었고 또 그만큼 많은 엘리트 군에 의해서 오랫동안 선호되어 왔다는 사실은 우선 그 문화 가치가 높다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보르헤스는 「고전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한 민족이 오랜 역사를 두고 되 읽고 섬기고 귀감으로 삼아온 책이라면 오늘의 어떤 평가와도 상관없이 고전으로서 존경받을 만하다고 동양의 주역을 예로 든다. 한 문화는 이런 고전성, 즉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보존되어 온 것, 또 오랫동안 좋은 것으로 평가되어 온 것에 의하여 간단히 평가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특히 상류층이나 전문가들에 의해서, 또한 세계적으로 더욱 넓게 평가된 것이라고 할 때는 금상첨화다.
이것이 문화 거점 자체로서의 가치 평가에 걸맞은 이론이라고 한다면, 그러나 이런 예술도 시대에 따라 그 평가의 고저가 있고 그 선호도에 있어서 명암이 겹쳤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가령 피카소에 의해서 「원시주의」로 각광을 받았던 아프리카 예술, 19세기말부터 서구 인상주의 화가나 문인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던 일본의 판화 같은 것이 그 예다. 때로 문화는 시대의 취향과 지역적 차이나 전통의 차이 때문에 혹은 선택받기도 하고 혹은 배척받기도 했다. 그것은 문화의 생명이 본질적으로 관객과의 끝없는 교감 속에서 재생산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서 보아주는 사람이 없는 문화 유적은 문화 가치가 없다. 문화라는 미학의 생성은 작품과 수용자의 교감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수용자, 즉 관객이나 관광객의 존재는 문화에 대하여 단순히 수용자적인 입장만이 아니라 그 재창작자이다. 하나의 석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감지할 능력이 없는 봉사에게는 괜스레 앞에 거치적거리기만 하는 귀찮은 물체다. 문화 유적은 단순히 사랑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소개와 심층 미학의 재발견이 그 문화를 더욱 높은 문화 되게 하는 필수 보조 단계다.
문화는 이렇게 원래 오래 되고 좋은 것으로 평가받아 온 것이어야 된다는 보수성과 그것이 다시 감상되어지고 재평가되어져야 한다는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문화 현상은 단순히 있는 것의 현현이거나 전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관객이나 보러 온 사람들의 미학적 재구성 내지는 참여를 유혹하는 매혹의 매개체이다.
한국 문화 유산의 특성
한국 문화 유산을 이야기할 때 나는 늘 서반아를 생각에 떠올리곤 한다. 10여 년을 그 땅에서 살아온 나의 인연이 나의 마음을 그리 움직일 것이다. 먼저 내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우선 우리의 문화 거점은 양적으로 너무나 취약하다. 물론 땅이 좁고 역사의 기복이 심했던 반만년의 땅에 남아 있는 게 많을 리 업다.
그 중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사찰만 보아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많지 않다. 나처럼 비전문가의 이런 불평은 뜻하지 않은 즐거운 반박에 부딪힐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유적의 보존 문제에 있어서 한국은 그렇게 집념이 강한 나라는 아니다. 우선 서울 안에 있는 고적만 해도 지하철 공사, 도로 공사로 한발자국쯤 옮기는 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김삿갓이 풍류를 즐기다 죽었다는 화순「적벽」도 저수지 공사에 물에 잠겼다.
물론 선진 조국에, 경제 발전에 우리도 바쁠 대로 바쁘다. 고속도로 공사가 고리타분한 문화니 뭐니 보다 우리에겐 급하다. 그러나 있던 초가집을 헐고 가짜로 민속촌에 초가집이며 양가집을 지어 놓고 주말이면 거기에 구경 가는 우리 신세가 서글프기까지 하다. 지금도 지으라면 백 채는 지을 수 있는 그따위 초가집이 또 무슨 말썽이냐고 따지겠지만 문화는 그때 그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 벨라스께스나 고야의 원화와 모조품을 비교해 보라. 그 값이 비교가 안 된다. 문화는 그처럼 그 진솔성에 있어 꽤 까다롭고 고지식한 데가 있다. 아무리 사찰의 벽이나 용마루에 횟가루 칠하고 페인트칠한다고 예쁜 게 아니다.
우리의 이렇게 하찮게 생각하는 마음, 이렇게「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을 발병이나 나라고 울고 마는 마음이 오늘 우리 곁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한 것은 아닐까. 차라리 우리 마음의 진솔한 곳은 세월과 함께 모두 풀어버리고 홀홀히 떠나는 나그네의 그것이 아니었을까. 우리 무속에 살풀이, 성주풀이 같은「풀이」류가 많은 것도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 잡아 두는 것보다는 풀어 주는 것이 뿌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사실 우리에게는 문화의 유산으로 잡아 놓은 게 정말 많지 않다. 차라리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문화 거점이나 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이다. 반만년을 그토록 수난 많은 민족이 많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같은 민족의 이름으로 살아 있고 또 웃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반만년 동안 쌓아 온 가장 커다란 유산은 곧 우리 스스로의 전통과 마음이라고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 문화 유산의 특성은 보다 크게 무형문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그것은 예술품이나 문화 유적의 문화라기보다는 예술가, 혹은 문화 주체의 장본인이 주체가 되는 전통 계승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무형문화의 취약성은 그 보존성이나 진실성에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전통은 다분히 조작되고 사멸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로 한국 문화에 있어서 문화행정이나 관리정책이 그토록 중요해져야 되는 연유가 있다.
한국의 문화 거점 확충을 위한 제의
나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한국문화 거점의 확충방안으로 몇 가지를 제의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에 앞서 이미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무형문화재 지정 제도, 민속놀이의 정격화 작업등은 행사나 관리가 서울 중심이라거나 관 주도적인 초기단계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환영할 만한 노력이라고 보아주고 들어가기로 한다.
그 첫째로 나는 무형문화 거점의 다양화 내지 유형화를 제의하고 싶다. 더 이야기를 구체화시키면 우리 선인들의 예술 관습의 거점화가 한 예다. 가령 포석정 같은 장소를 예로 든다면 옛 시인들이 지필묵을 준비하고 물가에 둘러앉아 시를 짓는 놀이 같은 것을 거점으로 만드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직접 관객이나 관람자가 참석하게 하는 가운데 옛 격식대로 술잔이 물을 타고 오면 시를 못 지을 대 벌주를 들게 하고 벌주가 3회에 이른 사람이 있으면 시회를 끝내게 한다든지……또 거기서 지은 시를 서예가가 써서 기념으로 전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념품이 될 것이고……
이야기를 간추리면 옛 풍류나 예술의 광장을 제공하고 직접 관중에게 참여케 함으로써 얻는 문화적 충격 요법은 한국 문화가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도자기를 굽게 하는 장소라든지, 자개를 붙여 볼 수 있는 문화 거점의 확보 같은 것 말이다. 생각하면 아이디어는 수없이 많을 수 있다. 다만 이런 장소는 첫째, 역사적으로 연관이 입증된 장소일 것이며 둘째, 그 방법이 고증을 거친 진지성이 요구된다. 구태여 도포를 입게 하지 않아도 좋다. 보다 심도 있는 관광을 경험케 하면 오랫동안 깊은 예술 충격을 심을 수 있다.
일본 다도의 원형이 한국에 있던 곳이라면 다도를 유형화해도 좋고 제주도의 조랑말이 유명했다면 예 사람들 스타일로 말을 타고 놀이를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진도의 농악이나 마당놀이, 씻김굿 스타일이 관객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개발된다면 좋다. 다만 여기 중요한 것은 그 깊은 맛을 자아내게 하는 안내자의 예술성이 문제가 된다. 얕은 것은 역시 얕은 것이지 높은 문화는 아니니까……
둘째는 한국 자연의 문화 거점화가 시급하다. 고래로 한국은 산 좋고 물 맑은 땅이어 왔다. 사실 우리는 자랑할 게 우리의 경관뿐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나 아마존의 밀림처럼 어마어마한 자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신비하고 곱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 옛 선인들은 명산명수를 찾아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렸다는 게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들이 그린 산수, 그들이 시를 쓴「관동팔경」같은 곳은 곧 문화거점화가 될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림 속 구비 구비 내리친 폭포와 자연을 보며 감상에 젖는 것도 잊지 못할 감흥의 하나다. 혹은 김삿갓이 머물렀음직한 마을 하나에「김삿갓 서당」이라고 문화공간을 만들면 또 어떠랴. 김삿갓이 지나갔음직한 서당은 아무 시골이고 좋다. 다만 거기「선생은 내불알(先生乃不謁)」이라는 시 몇 줄쯤 걸어 놓으면 옛 사람의 풍류와 해학은 우리의 가슴에 스밀 것이다. 꼭 장소 고증이 필요치 않은 경우도 이런 대목이다. 거기에 풍경 시까지 하나 덧붙이면 아무 야산이고 풍류객이 되리라.
우선 설악산만 산이 아니고 우리나라에는 시인 묵객이 아끼었다는 산하가 많다. 거기 간단한 시비 하나 정도면 그 풍경은 잃었던 시정을 되찾으리라. 서반아 같으면 오늘 살고 있는 소설가 까밀로 호세 셀라가「알까르리아 여행」을 쓰면서 여기 이 여인숙에 머물렀고 작품에 나오는 호수가 이 앞에 있는 물이라고까지 문화 거점화하는 판이다. 오늘 문화는 좀 지나치다고 점잖게 나무랄 분이 있을지 모르나 홍길동이 날뛴 산하, 춘향이의 고향, 심청이의 집 정도는 진솔한 문화 거점일 수 있다. 고증을 따를 수 있는 데까지 따르고 흥취와 예술성의 깊이를 가늠한다면 우리나라 어느 곳 하나 문화 거점화하지 못할 데가 없다.
자연을 문화 거점화해야 된다는 이야기는 문화 유적이 작아서 나온 궁여지책의 발상은 결코 아니다. 동양, 특히 한국의 정신이 가장 살아 숨쉬는 곳이 그 곳이기 때문이다. 노장도, 불교도 항상 자연 속에 보금자리를 찾고 수도의 장소로 삼았다. 가깝게는 풍수지리설의 명당이 어찌하여 문화 거점이 아닌가. 각 고을마다 서낭당이 자연과 마을의 경계선에 있고 집 지을 때도 지세를 그르치지 않게 집을 앉혔던 이 민족임에랴 이 자연을 빼놓고 어떻게 이 민족의 깊은 문화를 느낄 수 있겠는가. 한국이 진정한 문화 거점이 얄팍해진 후손들의 마음의 돈독함과 깊이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 우리의 자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