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르뽀(2)

고려청자를 찾아




이창경 / 한양대 국문과·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한양대 강사.

한 점 치우침 없는 완만한 곡선. 그리하여 후덕스럽고 단아하며, 그 속에 무한의 세월의 흔적을 담고 민족의 정신을 담아 이룩해 낸 고려청자, 운학의 비상이 있으며, 비색의 신비로움이 감추어진 예술품이 고려청자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미의식을 유감 없이 발휘한 것이 청자이기도 하다. 일찌기 송나라의 사신 서긍은「고려도경」에서 그 제작의 공교함과 색깔과 광택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청자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의 청자기술은 11세기 북송의 한족문물과 접촉함으로써 五代 北宋의 越州窯系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12세기 전반기에는 독자적인 예술성이 발휘되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특한 예술품이 창작되었다. 청자음각부용문발이나 청자매병이 이때 만들어진 유물들이다. 청자음각부용문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釉胎가 맑고 개끗하며, 굽다리의 마무리가 한결같이 가지런하게 되어 있는 점이라든가 청자매병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곡선과 안정감, 단아한 색조 등은 청자예술의 극치를 이룬다.

象嵌技法도 12세기 전반기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銀入絲, 銅器施紋, 나전칠기시문 등을 도자기에 응용한 것으로, 음각문·양각문을 주문양으로 하여 어느 부분에 약간의 상감을 곁들이면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문양은 주로 寶相唐草, 蓮唐草 등이며 長砂彩를 곁들여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중국도자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 후 12세기 중엽부터 몽고군이 침입하기 전가지 약 80년간은 고려청자의 전성시대로 볼 수 있다. 이때에는 상감이 양산되고 문양의 유형이 國俗化하며, 靑磁釉의 투명도도 높아졌다. 또한, 그 형태도 고려적인 것으로 정착되었는데 청자상감당초문완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후로는 몽고군의 침입과 사회혼란의 심화로 인하여 상감의장이 산만하게 나타나며 곡선에 있어서의 변형, 상감의장의 일부를 인각으로 쉽게 다루려는 기풍이 일어나 粉靑砂器의 前兆가 보였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청자는 자취를 감추고 조선시대의 백자가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고려청자의 일반을 살펴보았거니와 조선조를 거치는 동안 청자의 제작기술은 그 전통이 단절되고 비밀을 간직한 채 역사적 유물로 존재해 왔다.

수백 년 동안 단절되었던 고려청자 재현에의 집념을 가지고 90평생을 청자연구에 골몰해 온 사람이 해강 유근형 옹이다. 어느 누구도 청자에 대한 관심조차 가지지 못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나, 불모지에서 가난과 싸우며 민족혼의 재현을 청자에서 찾으려 했던 그의 집념은 빛을 보아 수백 년간 어둠에 가려졌던 그 신비의 색깔을 재창조하고 생동하는 운학의 상감기법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1928년 일본 別府博覽會에서 최고상인 금메달을 획득하고 1954년 전국 국산품전시회에서 문교부장관상,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박람회에서 최우량상, 195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크라멘트 시에서 개최한 국제박람회에서 금메달 획득 등 수상경력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그의 삶은 청자와 함께 한 한평생이었다.

올해 93세인 유근형 옹이 여생을 보내고 있는 곳은 도자기 마을로 널리 알려진 경기도 이천군 수광리이다. 수광리를 중심으로 이천에는 청자, 백자, 현대도자기 등을 생산해 내는 크고 작은 도자기 공장이 백여 개나 산재해 있는데 해강 유근형 옹이 1960년에 「해강청자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다른 많은 업체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90을 넘긴 노구이지만 가끔 조각실에 나와 문양을 조각하기도 하고 유약제조를 지시하기도 하며 후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의 삶은 예술가적인 장인기질과 최고를 지향하는 완벽성으로 자신이 술회하듯이 시련과 형로였다. 오늘의 해강청자가 있기까지의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고려청자와의 첫 인연

해강은 1894년 2월 후암동 두터바위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주로 외가에서 보냈다.

외가는 2만여 평의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외조부가 구한말에 판서를 지낸 사대부 집안이었다. 어머니와 누님과 함께 외가에서 생활하였는데 어린 아이가 없었으므로 외조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7살이 되자 외조부는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키려 하였으나 어린 근형은 서당에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등을 외는 시끄러운 소리에 이곳에서 공부할 흥미를 잃고 서당을 뛰쳐나와 성안을 배회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이러한 날이 1년여가 계속되는 동안 근형은 신학문을 하는 학생들이 부러워 서대문 근처에 있는 보성학교를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하루는 마음을 굳게 먹고 혼자서 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을 만났다.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말했더니 선생님은 쉽게 허락하였다. 당시는 보호자의 승낙만 있으면 입학할 수 있었다. 보성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는 열심히 공부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너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재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건강이 제일이다」하시며 海剛이란 호를 지어 주셨다. 바다처럼 도량을 넓게 가지고 굳은 신념을 가지며 굳세라는 뜻까지 설명해 주셨다. 이 해강이라는 호는 그가 어려움에 닥쳤을 대마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오늘날가지 그의 작품에 반드시 새겨 넣게 되어 이름보다는 해강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10년 보성학교 졸업반이었다. 졸업반 일동은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다. 창경원에 도착하여 이곳의 한쪽에 있는 박물관을 견학하였다. 이곳에서 해강은 처음으로 고려청자를 대하게 되었다. 박물관 진열장 안에 여러 유물들과 함께 진열되어 있는 청자에 시선이 머문 것이다. 미려한 선, 우아한 색채, 은은한 광택, 그 신비로움에 경탄하며 오랫동안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곁으로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선생님, 이것이 어느 때 만들어진 것입니까?」

「음, 고려시대 만든 청자라는 것이란다.」

「지금도 만들고 있습니까?」

「못 만든다. 기술이 단절된 것이지.」

이밖에도 청자에 관한 많은 것을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지만 선생님께서는 만드는 기술이 단절되어 안타깝다는 것과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재라는 것만을 말씀해 주실 뿐 구체적인 대답을 해 주지 못하셨다.

소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의 뇌리 속에는 청자의 은은하고 신비한 색감과 원만한 그 형태를 지어버릴 수 없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청자에 관한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왜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해강은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그 아름다운 청자, 아무도 만들지 못한다고 하는데 내가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 색깔과 똑같이, 그 문양, 그 형태와 똑같이,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 더 뛰어나게. 그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전통이 끊겼다고 하는 고려청자를 재현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이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다. 기필코 해내고 말리라」그는 이때의 다짐을 마음 속에 깊이 깊이 새겼다.

당시만 하더라도 자기를 굽는다는 것은 사회에서 거의 인정해 주는 일이 아니었으며 몇몇 도공들에 의해서 사기그릇 정도를 구워 내는 수준이었으니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된 그의 생각은 엉뚱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의 전 생애를 청자연구와 재현에 바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청자의 그 우아한 광택은 완전한 비취색이며 미의 극치요 유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지. 아마 내가 창경원 소풍길에서 고려청자를 보게 되고 그것을 재현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신의 계시였는지도 모르지. 이때부터 오직 청자에만 매달려 흙과 씨름하며 살아 왔으니, 한때는 전통의 맥을 잊지 못한 선인들을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어디 청자뿐인가. 삶 그 자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 가는 과정이 아니겠어.」

한양고려소와 마사꼬

청자를 재현하리라고 자기 자신과 굳게 약속한 해강은 문헌을 뒤지고 알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청자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물었으나 특별한 것을 찾아 내지 못하였다. 당시 그릇공장으로 널리 알려진 연천의 사발공장, 황해도 조박골 등을 찾아가 보았으나 이곳에서도 사기그릇을 만들 뿐 도공들조차 청자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이곳에서 자기를 만들어 내는 공정만은 익힐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해강은 박물관에서 본 운학무늬를 열심히 그렸다. 양 날개와 두 다리를 곧게 펴고 무한의 공간을 날고 있는 학의 자태와 불로초 형태의 구름무늬, 수없이 그려보고 또 그렸다.

이러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을 때, 정똥이가 찾아왔다. 그는 먼 친척간으로 조부께서 금릉위 박영효의 별장을 돌보도록 주선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 장춘단에 있었던 嚴妃 소유의 수평원이란 집을 박영효가 관리하게 되자 그도 따라 그곳으로 옮겨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엄비가 세상을 뜨자 일본인 신옥번송이 이 집을 구입하여 고려청자 공장을 차리게 되었고 똥이 역시 그곳에 남아 자기 만드는 일을 돕고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해강은 뛸 듯이 기뻤다. 한국인이 아니고 일본인에 의해서 청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못마땅하였으나 현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똥이에게 대뜸 졸랐다.

「내가 그곳에서 청자 기술을 배울 수는 없을까?」

그러나 똥이는 망설이는 것이었다.

「양반집안에서 공부만 하던 분이 어떻게 도공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일인의 밑에서 말입니다. 외조부님이나 어머님께서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똥이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어코, 청자를 재현하고 말리라 하는 각오만이 있을 뿐이었다. 외조부나 어머니도 그의 결의를 꺾을 수 없었다. 그의 굳은 신념에 굴복한 어머니는

「정 네 뜻이 그렇다면 끝가지 해 보거라, 중도에 포기해서는 결코 안 된다. 더구나 일본 사람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 」하시며 손을 잡아 주셨다.

어머니의 동의를 구한 해강은 똥이의 소개로 고려청자 공장의 주인을 만났다. 주인 신옥번송은 40대의 중년 나이로 그의 동생과 함께 청자 굽는 일을 하고 있었다. 청자를 재현해 보겠다는 자신의 뜻을 말하니 간단한 시험을 거쳐 상감조각사로 취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였다. 취직이 되자 거처도 공장 근처인 광희동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공장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공장에는 주인 형제 외에 이시다, 무미다까 등 일본인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한국인에 대한 모욕은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럴수록 기술에서 그들을 누르고, 훌륭한 기술자가 되어야한다고 다짐하며 일에 더욱 몰두하였고 시간이 날 대마다 서적을 뒤지고 박물관을 찾아가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으로 훌륭한 도공이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듬해엔 자신의 동생인 근호를 설득하여 무보수로 물레일을 하도록 하였다. 우리의 전통예술을 일본인들이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못마땅하였고 한국인을 대하는 기세등등한 그들의 태도가 구역질이 날 정도였으나 언젠가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 아래 몇 번씩 졸도를 해 가며 그들보다 몇 배 노력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를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이 마사꼬였다. 마사꼬는 주인의 이종누이동생으로, 공장일을 하다가 졸도하였을 때 집에까지 찾아와 간호를 해 준 마음 착한 17세의 아가씨였다. 마사꼬는 해강의 성실한 태도와 청자에 대한 강한 그의 집념에 마음이 끌렸고 주인인 신옥도 두 사람을 맺어주려고 하였다.

19살의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해강은 조국을 일인의 손에 빼앗겼다는 분노에 치를 떨었고 때로는 우수에 잠겨 일손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이럴 때면 마사꼬는 곁에 다가와 그의 마음을 읽고있는 양 아무 말 없이 담배불을 붙여 주곤 하였다. 그러나 정작 마사꼬의 집안에서 적극적으로 결혼을 하자고 제의해 왔을 대 해강은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사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짓밟아버린 일본의 여자와의 결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의식적으로 마사꼬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럴수록 마사꼬의 마음은 더욱 가까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하루는 마사꼬의 어머니가 공장으로 찾아왔다. 마사꼬가 며칠째 몸져 누워 있으니 한 번 와 달라는 것이었다. 죽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오직 해강만을 찾고 있으니 자기 딸의 목숨은 오직 해강에게 달려 있다고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해강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애정을 느끼는 것은 해강도 마찬가지였다. 「그까짓 왜년을…」하며 마음 속으로는 뇌여 보았지만 실상은 마사꼬의 영상을 완전히 지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나마 요 며칠 새는 어느 정도 잊을 만하니가 마사꼬가 병이라니, 그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제발 부탁이네. 우리 자식 좀 살려주게.」마사꼬 어머니의 애원은 계속된다. 「예, 생각해 보겠습니다.」얼떨결에 나온 대답이었다. 그녀가 떠나간 뒤에 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사꼬를 택하는 것이 조국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난 작업실에 그는 혼자 남아 있었다. 아가위나무같이 연약한 마사꼬, 누구보다도 자신을 이해해 주고 따르던 천진한 그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사랑의 힘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해강은 조선척식회사 뒤편에 있는 마사꼬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자의 편린을 찾아 5년

주위의 축복을 받으며 마사꼬와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신혼살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결혼 후 1년도 채 못 되어 마사꼬가 장질부사로 세상을 뜬 것이다. 너무 허망하였다. 아내이자 동반자였던 마사꼬, 어느 곳에도 마사꼬의 은은한 미소는 찾을 수 없었다. 겨우 몇 달 동안 마사꼬는 그의 전부를 바치고 갔다.

마사꼬와의 이별로 실의에 찬 생활이 계속될 때 해강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것은 청자에 대한 집념이었다. 2년 전 이 공장에 들어 올 때는 유약의 조합법을 익히겠다고 들어 왔으나 일인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고려청자의 비색에 도달하려면 너무나 아득하였다. 고려청자의 부활이 자신이 가야 할 길임을 인식한 그는 이 공장이 자신의 공부에 도움이 안될 바에야 마사꼬의 기억을 하루 빨리 지워버리기 위해서라도 이 공장을 떠나야 하겠다고 결정하였다.

공장을 떠나온 해강은 무엇보다도 유약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5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였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이 양구 방산이었다. 이곳의 방산토는 조선시대 진상 백자를 만들던 흙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흙과 백자 유약으로는 청자를 만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다음 찾아간 곳이 황해도 관정리였다. 이곳은 백점토가 많이 나와 대대로 흰 독을 만들어 생활하던 곳이었다. 길바닥의 돌· 흙을 모아 분말을 만들어 구워 보기도 하였다. 한번은 붉은 흙으로 만들어 구워 보니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나타났다. 이 붉은 흙은 흑상감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각 지역 흙의 점력이라든지, 변화된 색깔 등에 관한 사항들을 하나하나 기록해 나갔다. 이번에 흑상감을 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다음은 함경도 생기령 광산을 찾아갔다. 이곳은 도자기의 가장 중요한 원료인 蛙目土와 木節土가 나온다고 하였다. 이 흙들도 보따리에 싸서 보관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명주이다. 이곳에는 옛 날 가마터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고 도자기 공장도 많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줄인 배를 움켜쥐고 며칠 밤낮을 걸어 막상 이곳에 와보니 가마터는 없었고 공장이라야 오지독을 만드는 곳 뿐이었다. 그러나 단념하지 않고 도자기 공장이 있다거나 가마터가 있는 곳이라면 험로를 무릎쓰고 찾아 다녔다. 때로 막노동을 하여 식사문제를 해결하고 여비가 있으면 차를 타고 없으면 걸어선 전국 각지를 찾아 다녔다. 평남 강서군 양차면에서는 가마터도 찾아내었고 부근에서 청자 파편들도 찾아내었다.

또한 대전 진남면 가마터에서는 繪高麗를, 황해도 송화군에서는 白高麗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헌에는 고려시대에 회고려와 백고려를 만들었다고 하였을 뿐 실제로 어디에서 만들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아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

이밖에도 전북 부안·진안, 전남 강진 등지를 찾아다니며 많은 청자 파편들을 모아 가지고 돌아 왔다.

고려청자의 재현

5년간 청자의 파편들을 찾아 전국을 편력한 그는 청자의 제작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처음 찾아간 공장이 수원 오목내에 있는 칠기공장이었다. 이곳은 조덕수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으로 무일푼인 해강은 일을 해 주고 밥만 얻어먹는 조건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곳에서 틈나는 대로 청자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흙을 사용하여 성형을 한 후 유약을 발라 구워 내서 시커먼 칠기가 되었다. 다시 이 부근의 야산에서 백토만 2, 3종 구하여 물에 풀어 반죽을 하여 빚어 보았으나 점력이 없어 부슬부슬 흩어져 버렸다. 다시 양구 방산흙에 느릅재로 만든 유약을 발라 소성하니 연옥색의 백자가 되었다. 다음엔 차진 기가 있는 누런 흙과 백토를 섞어 성형을 하고 소나무재로 만든 유약을 사용하여 소성하니 훌륭한 분청이 나왔으나 형체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또한 송화에서 가져온 백토와 진남토 진지동 적토를 섞고 상감을 하여 떡갈나무재의 유약을 사용하니 이번에는 상감과 형태는 일정하였으나 색이 고르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흙의 배합을 달리해보고 유약의 재료를 달리하고 화력을 조절하는 등 수차례 실험을 거듭하여도 청자의 색깔을 내기란 요원하기만 하였다. 이때 일본인 천주백교가 오목내로 찾아왔다. 그는 고고학자이며 화가로 총독부 고문관으로 있으면서 도자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와는 조박골 관정리 양주 등의 공장에서 여러 번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니 장소를 한번 옮겨 보라고 하며 여주 오금실을 권했다. 그의 말도 그럴 듯하여 오금실의 김완배가 경영하는 공장을 찾았다. 여기서 싸리산에서 나는 흙이 점력이 있어 이것을 가지고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흙이 부드러워 수비를 하지 않아도 쓸 만하였다. 여기에 몇 가지 흙을 혼합하여 화병 두 개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학과 구름을 조각하여 상감을 넣고 손질하였다. 유약도 이 곳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유약을 만들어 구웠다. 이번에는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초조하게 기다렸다. 가마를 꺼내는 날이 되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의 시선은 화병 쪽으로 쏠렸다. 그 어느때 만든 것보다 색감이 잘 나타나고, 운학의 문양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참 아름답다. 이렇게 투명할 수가.」주위 사람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해강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멍하니 숨죽이고 바라 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한 순간. 쨍하며 로구로실에서 뽑아 올린 그대로 조각이 나서 떨어졌다. 청자연구에 착수한 지 10년이었다. 그간 숫한 청자를 만들어 보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주위에서 위로와 격려를 해 주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는 앞이 안 보이더군. 청자연구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어. 본래 만들어진 청자의 색감이 너무 좋았으니. 청자연구가 끝이라면 내 인생도 끝이라 생각했지.」

그러나 해강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청자 만드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내가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색깔은 어느 정도 재생되었으니 견고함만 보완하면 되지 않는가.」 다시 작업실로 갔다. 이번에는 오목내에서 가져온 흙을 단미로 반죽해서 조그마한 화병 네 개를 만들었다. 두 개는 역시 분청유약을 만들어 씌우고, 두 개는 운학을 조각해서 상감을 하고 청자유약을 씌워서 구웠다. 오목내에서는 실패를 하였으나 칠기불과 사기불은 때는 방식이 다르니 색에 변화가 있을까 해서였다.

이 화병을 가마에서 꺼내는 날 아침이다. 해강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마에 갔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가마 앞으로 모였다. 아사가정상도 왔다. 신배가 가마로 들어갔다. 해강은 긴장하여 한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청자를 꺼내자 모여 섰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신음과 같은 탄성이 나왔다. 몇 백년간 잠자고 있던 고려청자가 새로 태어난 것이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아사가정상이 「대성공입니다.」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춘배도 입을 열었다. 「이것은 유상의 기쁨뿐만 아니라 민족의 기쁨이요 영광입니다.」주위는 기쁨이 넘쳤다.

「자식을 얻는 기쁨이었지, 영혼의 자식을 말이야.」

청자자영(靑磁自營)과 별부박람회(別府博覽會)

청자를 만드는 데 성공은 하였으나 정작 밖에 나와 자본주를 구하려 하였으나 일반에서는 청자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있던 1921년 이른 봄, 경도에서 사람이 왔다. 이때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고려청자에 대한 인식이 높아서 청자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물론 질에 있어서는 뒤지는 것이었다.

찾아온 일인은 교토에서 주식회사 鈴本商店을 운영하는 영본의 심부름으로 온 사람이었다. 영본상점은 도자기의 작업현대화를 실현하여 이미 도자기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는 회사였다. 그의 집에서는 가보로 몇백 년 전부터 고려청자를 만들어 오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를 이어서 동생인 지혜꼬가 대신하고 있으나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주백교의 소개로 해강을 데리러 온 것이라 하였다. 마침 자본주를 구하지 못하여 고생하고 있던 해강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심부름 온 상원을 따라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해강은 영본을 만나고 지혜꼬가 경영한다는 경도고려소를 둘러보았다. 영본이나 지혜꼬는 갖은 친절을 베풀면서 그곳에서 청자기술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였다. 물론 보수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강은 긴 세월 동안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며 터득한 기술을 일본인에게 전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우리의 민족혼이 숨쉬고 있는 고려청자가 아닌가. 그것을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일본인에게 전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호의에 보답하는 뜻에서 철청자 몇 개를 만들어 주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백방으로 자본주를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되지 않던 중 영등포 수정에 고려청자를 만들다가 버려둔 곳이 있음을 알았다.

당시 경성에는 이왕직미술공장이 있었다. 이왕직 안에는 장관이 있어 이왕가의 재산으로 모든 사업을 운영하였는데 장관은 이완용의 아들인 이항구가 맡고 있었다. 그는 이왕직 미술공장 안의 금은 미술품은 물론 고려청자를 만들기 위하여 일본의 유명한 기술자인 정과를 초청해 왔다. 당시 물레는 천기가 맡고 있었고, 조각은 이희만·최인환이 맡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약이 제대로 되지 않아 푸드죽죽한 사금파리만 만들고 있었다. 결국 고려청자부의 인원을 해산하게 되자 정과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천기는 도구 일절을 인수하여 영등포에 공장을 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왕직에서 하지 못한 일이 영등포에서 될 리가 만무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문을 닫았는데 이 빈 공장을 빌려 청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1926년의 일이었다. 이 해에 황인춘이 산수정에 공장을 세웠으니 고려청자 공장 두 곳이 조선인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등포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청자는 대부분「조선관」주인인 진촌이 사다가 자신의 가게에 놓고 팔았으므로 큰 걱정은 안 되었다.

공장에서 상품을 만들면서도 여러 가지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때에 해강은 운학무늬매병과 이중투각항아리를 주로 만들고 있었다. 이때 1928년 별부시에서 박람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하여 운학문매병포도문주전자·이중투각항아리 등 3점을 출품하였다. 이들은 50일간 일본에서 전시되고 마지막 날에는 시상식이 있었다. 여기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그가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하기까지는 동생인 근호의 공이 적지 않았다. 동생은 한양고려요에서 물레의 기술을 익힌 다음, 영등포 공장에 와서 일을 도와 주고 있었다. 형의 금메달 획득 소식에 복동은 누구보다도 좋아하였다. 형의 수상소식을 전해들은 며칠 후 근호는 지병이 도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형의 권유로 물레질을 배웠고 형의 출품작을 제작하는 것을 끝으로 세상을 뜬 것이다. 근호의 나이 23세였다.

영등포 공장이 수익이 좋아지자 동업을 하기로 했던 맹씨는 여러 가지 조건을 내세워 월급제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해강은 제의 조건이 마음에 맞지 않아 이곳을 떠났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조금도 거리낌없이 훌훌 털고 떠나는 것이 생활화되었다. 구속됨을 싫어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떠나는 것이었다.

영등포 공장을 떠난 해강은 공업전문학교 1회 졸업생인 최면재가 경영하는 회령소, 함북도자기회사 한수경이 경영하는 금교도자기 공장 등을 전전하며 그곳의 가마도 고쳐 주고, 한편으로 청자의 기술향상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공장이 어느 정도 기반이 닦아지면 한결같이 계약을 파기하고 월급제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생활은 어렵게 되었고, 자신이 직접 공장을 경영할 자본금이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그렇게 할 형편도 못 되었다. 게다가 청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부족하여 생활은 더욱 곤란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일을 버리고 다른 일에 손대야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흙을 만지고, 물레를 돌리고 상감을 하고, 이 일에 집중하다보면 그곳이 바로 자신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한때 마포형무소에 작업사로 취직하기도 하였다. 마포형무소에는 일본인 천기죽차랑이 고려청자를 만들다가 버리고 간 가마며 도구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소장으로 부임해 온 권영준이 청자를 만들어 외화를 획득하자는 취지에서 해강을 불러들인 것이다. 권영준은 해강의 청자제작 기술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해 주던 사람으로 당시 미국의 무초 대사와 최신 기계설비를 갖추고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하기로 하였으나 6·25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계획은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1956년 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 후에도 해외 각 국에서 개최되는 전시회에 출품하여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세계에 인식시켰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은 가마 하나 가지지 못한 채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바빴다.

이천에 터를 잡고

해강이 이천에 처음 발을 디뎌 놓은 것은 1959년 여름이었다. 이곳에서 가마의 열도만 맞으면 소규모로 작품을 만들어 볼 생각에서였다. 이곳의 미나리에는 칠기공장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작업일을 하는 사람들과 판매하는 사람들이 작은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마를 빌려 한쪽에 자신의 작품을 구워 당시 유일하게 청자를 취급하던 남대문 근처「보국장」에 내다 팔았다. 주요 고객은 미국인이었다.

해강의 청자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 9월 1일 한국일보에 인간문화재란 제호로 해강의 기사가 실리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도 인식이 부족하여 시장은 좁기만 하였다. 반면에 외국에서는 1956년 이후 미국·캐나다·페루·호주·영국·이태리 등 각국의 전시회에 출품을 꾸준히 해 온 관계로 각국에서 해강의 청자에 매료되어 주문편지가 답지하였으나 당시의 경제형편으로는 이에 응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1962년에는 당시의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게 스웨덴·시카고·뉴욕 등에서 온 주문서를 첨부하여 국가에서 뒷받침해 줄 것을 탄원하였으나 회신조차 없었다.

다행히 수광리에 비어 있는 가마가 있어 자본주를 구하여 동업을 시작하였으나 판로는 여전히 막막하여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공장이 없는 서러움에 장남인 광열이 어느날 언 땅을 파고 벽돌을 박아 가마를 만들었다.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가마였지만 이것이 해강청자를 더욱 빛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는 국내보다 일본에서 해강청자가 널리 알려져 일본의 TV와 각 신문사에서 촬영도 해가고 취재도 해갔다. 1973년에는 부수상 안신개가 공장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 후 동경 대판 등지를 순회하며 전시회를 가졌고, 다음 해에 동경백화점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가졌으며 다음 해 대판에서 세 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이외에도 동경 삼월본점에서 두 차례, 후꾸오가 라마야에서 두 차례, 오끼나와 미쓰꼬시에서도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서울에서는 1973년 12월 신세계 화랑에서 한 차례 가졌다. 각 전시회에서는 그의 독특한 예술세계가 높이 평가되었고 전시회가 끝나기 전에 예매가 완전히 끝났다.

해강청자가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자 칠기점촌으로 알려졌던 미나리는 고려청자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고 현재 해강청자연구소가 있는 수광리 부근만 하더라도 60여 개의 공장을 헤아리고 여주에도 50여 개의 공장이 세워졌다.

해강청자 연구소의 두 기둥

해강의 나이 올해로 94세. 안경 너머로 보이는 노안에는 젊은이에게서 찾을 수 없는 광채가 있었다. 온화한 그 자태는 어쩌면 여유있게 날고 있는 청자의 학,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그려온 학, 그야 헤아릴 수 있나. 무수히 깨어져 흙으로 되돌아갔고 몇 마리 남아 현대인의 가슴속에 고려의 빛으로 남아 있으면 족하지. 내가 만든 작품들이 고려의 그것과 같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것은 신의 경지라고 할 수 있으니까.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상태에서 지선의 미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겠어. 그리고 청자는 다른 예술품과 달리 예술가의 정신과 사용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하지. 즉 청자는 가마에서 끄집어 낼 대 완성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해 가는 과정에서 완성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예술이라 할 수 있지.」

그의 아들 광열도 청자를 굽기 시작한 것이 30년 가까이 된다.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은 대부분이 비법이라고 하여 그 제작 기술을 공개하는 것을 꺼리고 한두 사람에 전수하는 데 그치고 말았지. 그러니까 단절이 쉽고, 그것을 만들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했지. 나는 최대한 그쪽으로 향하려고 하지만 아직도 멀었어.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작품에 완벽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다행히 두 아들이 잘 하고 있으니까. 내가 겪었던 고초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그는 현대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는 고려의 산천 속에 살고 있었다.

수광리 해강청자연구소에는 광열·승열 두 형제가 해강의 뒤를 이어 청자제작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아버지의 청자에 대한 집념은 아무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청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마음을 빨아들이는 신비함을 지니고 있어요. 이것이 아마 아버님의 뒤를 잇게 된 동기이겠지요. 청자를 널리 공개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광장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해요.」

두 형제는 그동안 연구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할 박물관 설립과 연구기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작년 10월에는 이천의 도자기 공장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도자기축제를 성황리에 끝냈다.

향토문화의 계발과 전승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장남은 현재 이천문화원장직을 맡아 지역문화발전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이고 있다.

「아버님의 지론은 불가능은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통문화의 계승도 이 창조정신이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 아버님이 걸어오신 길을 계승해야지요. 한 가지 일에 전념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니까요. 앞으로 청자는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실생활에 이용될 수 있는 작품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빨리만을 추구하는 현대작가들의 의식도 불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꾸준히 연구하는 자세,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 바로 그것이 고려청자의 세계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