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르뽀(4)

간송미술관과 보화각




윤강로 / 고려대 국문과 졸업. 현재 보성고 교사로 재직중이며, 시집으로는 「불꽃놀이」가 있으며 「분수」 동인으로 활동중임.

초겨울로 접어든 성북동 北檀莊은 고즈넉했다. 이곳 저곳에 놓인 석물 주변엔 낙엽이 표표히 날리고, 고미술의 중추적 현장인「拺華閣」은 10월의「근대서예Ⅱ」전을 치른 후의 숨결을 가다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단아한 모습의 최완수 연구실장이 맞아준다. 고미술 연구에 외곬으로 전심하는 학자답게 俗氣가 없다. 학문 이외의 처세에 문을 닫은 시선인 듯 단호하고 결백한 응대가 믿음직스럽다. 옆방에선 책을 뒤적이고 움직이는 연구원 두어 젊은이의 기척에 차를 마시는 이쪽이 조심스럽다.「보화각」은 세월이 흘러도 낡지 않는 고미술의 정체처럼 언제나 새롭다.「저야 뭐 내세울 게 있나요. 산송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일할 따름이지요」하며 겸손해 하는 최완수 실장은 연구실적에 던져지는 주변의 관심을 무척 부담스러워 하는 듯했다. 이제 단단한 기반 위에서 훌륭한 운영자와 역량있는 연구자의 힘을 입어「보화각」이 지닌 광휘가 더욱 돋보일 것이다.

정감어린 보화각의 분위기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간송 전형필 선생은 귀국 즉시 한국문화재 수집에 박차를 가하였다. 1920년대 후반엔 한 개인의 소장품으로서의 질과 양을 넘어서게 되고 박물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마침 한국에 와 살던「부래상」이란 프랑스인이 본국으로 귀국하게 되어 성북동에 있는 그의 집을 사게 되었다. 대지가 약 1만 평에 달했는데 여기를 북단장이라 명명한 것이 1934년이었다. 이곳에 당시로서는 아주 현대적인 시설의 박물관을 짓고「보화각」이라 하였다.「북단장」과「보화각」이라는 이름과 현판은 위창 오세창이 써 준 것으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로써 한국 고미술이 한데 모이게 되고 연구자료의 중심이 됨은 물론 연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북단장에 산재한 석물들도 모두 중요한 문화재들이다. 간송은 매년 몇 회씩 소장품을 정리·공개하면서 관계자들과 같이 감상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만족해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 고미술품에 접근하는 것을 극히 경계하여 초청인사를 知己로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차 보화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방문객이 늘게 되자 보화각 이층에 응접실을 마련하여 이에 대처하였는데, 바닥에 까는 양탄자도 고려자기 무늬가 있는 것으로 애써 주문하여 장식하였다. 민족 정서의 분위기로써 보화각의 성격의 일환으로 삼았던 것이다. 보화각은 8·15 해방 후 6·25와 간송의 타계로 수난을 겪게 되었으나 간송의 두 자제가 본격적으로 관여하고 고미술 분야의 최고 인사들이 학문적 정신적으로 지원하면서 정리·수습되어 연구와 문화적 실질기여의 단계에 이르렀다.

간송 전형필의 생애와 인간

보화각, 즉 간송미술관을 이해하려면 간송의 생애와 인간을 분리시킬 수가 없다. 보화각과 간송을 따로 떼어놓고 보화각에 입문한다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것을 젖혀놓고 외형만 아는 것이 된다. 간송의 일생에 깃들인 정신적 소산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개인을 넘어선 문화적 지향과 민족문화재의 수호라는 대전제에서 가능했던 보화각은 곧 간송 자체였다. 보화각이 없다면 한국 고미술연구가 맥을 잃고 그 본체를 규명하는 작업이 불가능해진다. 고미술 분야의 정상을 차지했던 학자들이 간송과 화음을 이루면서 오늘의 수준에 이른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간송을 연구하고 그 기록을 모아 정리하는 과정에서 보화각이 지닌 모든 것의 모습과 내용과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 고미술품 수집과정과 그것을 지탱해 주었던 정신적 에너지의 양상을 보면서 간송과 보화각의 일체화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화된 기록은 없었지만 생전에 교류했던 산 증인의 단편을 주어 모아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서술만으로 실상에 접근하고자 한다.

간송은 일생을 통하여 두 가지 사업에 몰두하였다. 하나는 민족의 유형적 문화재를 고루 수집하여 이를 통한 문화적 전승을 성취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훌륭한 교육기관을 만들어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이 땅에 태어난 본분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적인 기록들의 편린을 모아 일람하면 그것을 위해 개인적인 온갖 능력과 재산을 경주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사생활과 교우관계, 일상적 대인관계, 고미술품 수집과정, 학교설립 동기와 결실 등에서 드러난 간송의 면모는 서로 맥락을 같이하면서 확연해진다.

간송의 교우관계

간송 전형필 선생은 1906년 중추원의관을 지낸「전영기」선생의 2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휘문의숙(현 휘문중·고등학교)을 졸업하고 당시 뜻이 큰 청년들이 현해탄을 건넜듯이 도일하여「와세다」대학에 들어갔다.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마친 선생은 앞날의 설계를 어디에다 둘 것인가를 고심하다가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나게 된다. 위창 오세창 선생의 정신적 지도와 진로에의 조언을 받아들여 고고미술에 정착하였다.

학창시절 간송은 좋은 친구를 애써 사귀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사귀어진 친구를 깊이 교우하는 편이었다. 1920년대는 신학문이 채 일기도 전이었다. 음악을 좋아했는데 특히「베토벤」에 심취했으며 1천여 장의 레코드를 수집하기도 했다.

귀국한 간송은 문화재 수집에 전심하면서 큰 집안의 주인으로서 매일 20여 명의 내각을 맞아 담소하면서 지냈다. 박학다식했던 간송은 담소의 즐거움을 아는 반면 무척 과묵한 편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입을 빌어 보건대 결코 화내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한다.

간송은 가정에서도 온화하고 대범했던 모양이다. 정기적으로 가족음악회를 열어 그 날 들을 레코드를 손수 고르고 감상이 끝난 후에 연주자와 독창자에 대한 해설을 했다. 또 가족 미술의 밤을 가져 함께 그림을 그리고는 그림에 대한 평과 교정을 하기도 했다.

후진양성추진

1939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준비중이던 김승현은 간송과 교분이 깊었다. 김승현은 우연히 운영난에 허덕이는「K학원(현존하는 중·고교의 재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때 민족적 요구에 부응하여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있던 부호들 중의 일인이었던 간송은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도록 부탁했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K학원은 새로운 경영인을 물색하는 중이었고 일제의 학무국은 이에 개입하고 있었다. 이에 반응을 보이자 일제의 학무국은 간송에게 모 여자중·고교를 인수토록 종용하였다. 일제의 중재로 학원을 인수하는 데 응할 리가 없는 간송은 일제의 중재보다는 뜻이 통하는 지기와 함께 의논하여 학원을 인수하고자 했다. 김승현 박사를 통해 이를 알게 된 K학원은 간송의 지불능력을 짐작하고는 과한 요구를 하였다. 연백에 있는 3천 석 농장과 15만 원의 거금으로 협상에 응했으나 K학원은 빗자루 총채에까지 값을 매겨 5천 원을 더 요구하였다. K학원은 당시 금광을 하던 박모 씨에게 3만여 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 협상이 깨진 사정을 들은 간송은 학원 인수가 민족적 사업이고 후진 양성의 신성한 사업인데 금전문제에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며 요구금액 전액을 주고 K학원을 인수「동성학원(현 보성중·고교)」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문화재 수집과 교육사업의 병행이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실제적 추진을 맡았던 의학박사 김승현은「바이올리니스트」김영욱의 부친이기도 하다. 학교를 인수한 간송은 학원설립 취지를「고매한 기풍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함」으로 삼았다.

예술가들과의 교분

간송은 서화에 능했다. 예술적 감각이 예리한데다가 예술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예술을 아끼고 예술인들을 좋아했다. 위창 오세창, 종원 안석정, 춘곡 고휘동, 청정 노수현 등 일대를 풍미하던 많은 예술가들과 깊은 교분을 지녔다. 위창 오세창은 중국과 한국의 고미술품 고증에 큰 힘이 되었고 간송은 스승의 가정을 극진히 보살폈다. 화가들이 전람회를 열면 본인 모르게 작품을 사들여 어려운 생계를 도와 예술활동을 격려하였다. 광복전에는 일본인들의 눈에 지목당하던 예술가들을 비호하고 북단장에서 연회를 열어 위로하기도 했다. 학생들을 직접 인솔하여 보화각을 열람시켜 민족의 우수함을 깨우치면서 일본인, 특히 일본 관리들이 보화각을 보기를 원하면 깍듯이 외면하곤 했다.

1940년대 조선총독부의 총독「미나미」가 보화각을 보고 싶다고 사람을 시켜 전갈해 왔다. 간송은 싫었지만 총독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며칠 후「미나미」총독은 비서장「스즈끼」등을 거느리고 삼선교에 도착했는데 마중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날 삼선교까지 나가서 영접하기로 약속이 된 것을 묵살한 것이다. 당황한 비서장「스즈끼」가 뛰어들어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간송은「그랬던가」하며 시치미를 떼고는 천천히 웃옷을 입고 나가 영접하였다. 동경제국대학 총장이며 교수이던 나가야 박사는 한국에도 많은 제자를 둔 인격 높은 학자였다. 나가야 박사는 고미술에도 조예가 있었고 간송의 고미술 소장품을 몹시 보고 싶어했다. 간송은 나가야 박사를 정중하게 초청하여 보화각에 안내함은 물론 격조있는 융숭한 대접을 하였다.

일제 때 일본에 살고 있던 영국인「존 캐스비」는 우리나라의 많은 서화와 자기를 소장하고 있었다. 중·일전쟁으로 일본과 영국의 관계가 악화되자 소장품을 처분하고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간송은 전세비행기로 일본에 건너가 우리의 고미술품을 넘겨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그냥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 사실은 일본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캐스비」는 곧 한국에까지 와서 소장품을 넘겨주면서「한국의 고미술품을 한국인인 귀하가 도로 가져가게 되어 기쁘다」라고 말했다.

「한남서림」경영

1939년 간송이「한남서림」을 인수, 경영한 일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전국에서 고서가「한남서림」으로 모였고 국학이나 어문학을 전공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국학과 어문학연구에 조예가 깊던 김태준은「한남서림」의 주요 고객이었다.

조선총독부 서생으로 있는 한국인 모씨가 고향인 안동에 갔다가 우연히「훈민정음」원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급히 상경한 그는 이 사실을 김태준에게 알렸다. 진본임을 확인한 김태준이 이를 매입하기 위해 돈을 주선해 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한남서림」의 직원으로 있던 이지광이 이 사실을 간송에게 전하였다. 간송은 서둘러 사람을 안동에 내려보내 진품를 확인케 하는 한편 돈을 마련해 이순황, 김동규를 현지에 보내「훈민정음」원본 입수에 성공하였다. 그 때 현지에서 입수한 것은「훈민정음」외에「동국정운」불경언해류 등이었으나 간송은「훈민정음」과「동국정운」외의 것은 모두 김태준에게 증정하였다. 「훈민정음」은 성공적으로 입수하였으나 조선총독부에서 알면 무사할 리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기에 간송은 극비리에 보관하였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훈민정음」은 관계학자들에 공개되었고 간청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영인본으로 선보이게 되니 곧「김민수 著 주해 훈민정음」이다. 김민수 교수는 지금도 고려대학교에서 강의와 연구에 쉴틈이 없거니와「훈민정음」과 처음 대면하게 된 학자이다. 그런데「주해 훈민정음」에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서울고등학교 국어교사 정철(鄭喆 : 본명 輝萬)은 이 책은 원래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동 이한걸(李漢杰 : 본은 眞城으로 退溪의 宗派, 호 後村, 1880∼1950) 씨 댁의 世傳家寶였던 것이 1940년경에 그의 삼남 용준으로부터 당시 경성제국대학 김태준 교수를 거쳐서 골동품 수집가 전형필의 수중으로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학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아울러 그 유래를 해명하였다. 즉, 애초에 이 책은 그의 선조가 여진 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상으로 받아서 늘 감추어 두었던 것이라 하고, 그 후 언문책을 가진 이를 처벌하던 연산군 때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첫머리 두 장을 뜯어버리고, 비장해 두었던 것이라고, 그 낙장의 유래를 말하였다. 그리고, 또 이어서 그 낙장 보충의 결과를 밝히었다.……삼남되는 이용준님은 서울경학원(成大前身)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성대 조교수 김모의 가장 총애하는 제자였습니다.……이용준님은 그의 가장 존경하는 김모에게 사사하는 가운데, 자기 고향 안동에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김모는 곧 전형필님으로부터 많은 돈을 얻어 가지고 당장에 안동으로 내려와서 현물을 보게 되었습니다.(下略)」

상기 내용은「훈민정음」의1·2장은 판본이 아니고, 붓글씨로 쓴 것이니, 낙장을 뒤에 누가 기워넣은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데 대한 언급이거니와, 여기에 간송의 수중에「훈민정음」이 들어오는 과정이 들어 있어 인용해 보았다. 입수 경위가 약간씩 다르지만 별로 문제가 될 리 없다. 다만「훈민정음」과「동국정운」을 찾아내어 입수하는 데「한림서림」이 무관할 수 없었다는 데 생각이 이르게 된다.

간송은 1956년 문화재 보호위원을 지냈고, 1962년 교육공로자 표창, 1964년 대한민국 문화표창, 1964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간송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편적인 산 증언을 모아 전술했거니와, 보화각과 더불어 생활하다시피 한 고미술 분야의 석학들이 한자리에 모여 간송 11주기를 맞아 좌담회를 한 기록을 발췌하고자 한다. 좌담회 내용 자체가 간송과 보화각을 드러내는 많은 비화를 안고 있다. 좌담회가 열린 시기가 1973년 11월 30일이니 벌써 15년의 세월이 흐르고, 여기에 참석했던 분들 중에 김상기와 최순우도 이미 타계했다.「普成」지에 게재된 이 좌담회 자체가 소중한 기록이기에 중요 부분을 골라 소개한다. 장소는 북단장이며 참석한 분들의 직함은 당시의 것이다.

◎ 참석자

김상기(전 서울대학 문리대학장)

노수현(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동양화가)

황수영(국립중앙박물관장)

김원룡(서울물리대 고고학 교수)

진홍섭(이화여대 박물관장)

정영호(단국대학 박물관장)

최순우(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 실장)

전성우(간송의 장남·서양화가·보성고등학교장)

◎사회 : 이구열(미술 평론가)

사회 : 금년으로 간송 서거 11주년, 그동안 사회·교육·문화 등에 많은 발전과 변모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이 시점에서 간송의 명예로운 생애를 재평가하는 의미에서 간송의 위대한 공적, 특히 일제 하에 민족문화 유산에 대한 수집 등에 얽힌 정신적인 면을 다시 음미하고 그 높은 뜻을 다시 새긴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간송 생전에 각별히 가까이 모시었고 또 그 방면에 높은 학문을 이룩하신 분들로 널리 알려졌읍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여러 면에서 자유롭게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개인의 힘이지만 국가에 못지 않은 위대한 공적, 속칭 위대한 시민상의 전형이라고 보아 무방하겠읍니다. 그런 면에 대해서……

감상 : 일제 침략 아래서 우리 문화재가 약탈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큰 뜻을 세우셔 우리의 정신적인 유산인 문화재를 수집 보관하시게 된 것으로 압니다. 제일 감명받기론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캐스비(주한 공사관에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간 사람)가 수집한 문화재가 국제적으로 경매된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그 가치성을 잘 아시고 간송께서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시일이 촉박해서 비행기로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캐스비 소장의 귀중한 민족 유산을 막대한 금액을 들여 구입해 오신 일은 세인을 놀라게 한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송께서는 민족의 유산으로 우리의 얼이 담긴 것이면 무엇이나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구입 수장하셔서 오늘날 민간 소장으로 양·질 양면에 걸쳐 뛰어난 것으로 보화각에 소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여진 문화재에 대하여 전교장, 그 형제분과 동지 여러분이 연구와 보존에 힘을 기울이고 있거니와 간송 박물관의 기초가 더욱 굳건해지고 더욱 널리 소개 선전되어 국내외 인사의 연구에 이용되길 바라고 있읍니다.

김원 : 간송의 지난 업적을 한 말로 표현하긴 어렵습니다만 단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이 방면에 진실한 의미의 개척자로 또 순수한 수집가로서 처음이라 할 수 있고 제1인자로 생각합니다. 그 수집태도, 수집성격 등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개인 수집으로 귀감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읍니다.

황수 : ……저의 박물관에서 특별한 전시회에는 먼저 첫손에 꼽는 것은 간송 수장품입니다. 그만큼 크고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읍니다.……그 중에 제가 특히 머물러 설명을 하게되는 것은 아까 이야기된 캐스비한테서 수장하신 오리연적 더욱이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있는 것은 많이 이야기가 되고 운학항아리는 단연 발군의 작품입니다. 사실 이런 물건이 일본인의 손에 건너간 작품입니다. 일단 이런 물건이 일본인의 손에 갔다가 왔고 값의 고하간에 2배의 값을 주겠다고 했을 때「이 물건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져오면 이 운학병을 산값에 주겠다」고 실행불가능한 것을 아시면서 말씀하신 것은 값의 고하간에 민족의 유산은 수장하신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읍니다. 그 안목, 입수하실 때의 경위, 품위 등이 대수장가의 면모를 여실히 느낄 수가 있읍니다.

사회 : 1930년대는 문화면에 급격한 변화와 활발한 발전 면모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재의 학구적 연구에 고유섭 선생 같은 분이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무형문화재 같은 위치에서 송석하 선생 같은 분을 생각할 수 있겠읍니다. 이런 시기에 순수한 민간 시민의 위치에서 학문적 연구가에 못지 않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문화재를 수집 보존하신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 사회 변화상 등과 관련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빙 선생님 말씀해 주십시요.

김상 : 190년대는 민족의식이 앙양되고 또 간송께서는 위창 선생과 교유하시면서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넓히시고 일본으로 흘러가는 우리의 문화재를 지켜야 한다는 강렬한 이념 아래 활동하신 것으로 압니다.

사회 : 연보로 보면 간송께서 와세다를 졸업하시면서 수집의 뜻을 펴신 것으로 되며 1930년대 중엽에 오면 벌써 상당한 양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읍니다. 간송께서 이 방면에 뜻을 두도록 영향을 끼치신 분이 있다면 누가 되겠습니까?

최순 : 위창 선생댁에 드나드시면서 한국고미술에 대한 식견과 안목을 높이셨고 또 말년에 이르기까지 춘곡 선생과 자별하게 지내신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물론 춘곡과는 휘문에서 사제 관계이십니다만 이런 분위기가 수집하시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사회 : 다른 분께서 수집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김원 : 저희들이 생존해 계실 때 말씀을 드렸읍니다. 간송 문화재의 메모같은 것을 해 두십사고. 그러나 당신께서 수를 믿으셨는지 전연 그런 것이 없습니다. 참 안타까운 이야기로 일례를 들면 처음 수집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따위가 기록이 되어 있었으면 참 재미있는 일이 되겠습니다만……

정영 : 저도 만년에 몇 년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읍니다만 위대한 수집가·수장가는 물론 위대한 안목을 뵈울 수 있었읍니다. 일례로 1960년에「고고미술」이 창간되어 계속되고 있었읍니다만 매호마다 연구논문을 주셨읍습니다. 그러나 작고하신 후에 회화부문에 원고를 주신 분이 안 계셨읍니다. 이것은 선생의 수장품이 미적인 가치뿐 아니라 학술적 가치에 기여하고 있는 점을 말하는 것이며 간송의 안목 높은 식견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 : 간송의 초기 일화에 대해서는 간송의 기록도 없고 또 자세한 내용을 캐기가 어려워 안개 속에 있읍니다만……일화중심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감상 : 전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읍니다. 간송께서 한남서림을 친한 사람을 시켜 경영하신 일이 있읍니다. 물론 取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본 전적을 구하기 위해서 친한 분(이순황)을 시켜 경영하시면서 많은 전적을 모으셨는데 그 중 가장 전형적인 것이 국보로 지정된 훈민정음, 동국정운 같은 것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 외에도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을 많이 보존하셨읍니다.

최순 : 한남서림이 물론 전적을 수집하기 위한 뜻도 있었읍니다만 당시 미술품 경매장으로 경성 미술 구락부란 것이 있었는데 회화나 자기 부분의 구입대행도 한남서림에서 했던 것으로 압니다.

전성 ; 제 기억에도 간송께서 낙찰을 시키려면 한남서림 주인을 시켜 큰 소리를 질러야 한다고 농담 비슷하게 말씀하신 것을 들은 일이 있읍니다.

김원 : 간송께서 그때 고미술품 값을 크게 올리셨다고 합니다. 간송께서 수집하신 것 중에서 가장 주된 것이 무엇이겠읍니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위창, 춘곡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셨다면 회화에서 시작해서 퍼져나간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만 지난번 완당전을 보고는 그 콜렉션이 정말로 크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읍니다.

황수 : 실질적으로 양이나 질로 봐서 서화가 주가 되지 않겠읍니까. 전에 한국미술사를 연구하던 구마가야를 만난 일이 있는데 간송 소장을 못 보고는 한국 고서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읍니다. 아까 1930년대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 일본인이 일종의 민족적 레지스탕스라고 평한 것을 들은 일이 있읍니다.

최순 : 존 캐스비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간송께 직접 들었읍니다. 대금지불은 그때 공주에 있는 농장을 팔아서 지불하셨다고 합니다. 자당께서 그 일을 아시고「애 조상전래의 농장을 파느냐」고 걱정을 하셨고, 간송은「어머니, 염려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다 하겠읍니다」고 대답했다고 들었읍니다.

진홍 : 최근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세계적인 걸작품인 천학매병이 개성 부근에서 발굴이 되었는데 간송께서 그것을 아시고 하나도 깎지 않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일본인이 몇 배를 더 준다고 했지만 완강히 거부하셨고 이로 인해서 한국사람의 높은 기상이 널리 알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전성 : 몇 해 전에 동양 도자기전에 갔었던 일이 있읍니다. 호중고 주인이 간송의 자제냐고 물으면서 천학매병을 사셨을 때 기억이 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읍니다.

사회 : 괴산석조구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황수 : 박물관에 기록이 있읍니다. 일본사람이 가져가는 것을 인천에서 차압한 것을 간송께서 입수하신 거죠.

최순 : 간송이 수집하신 것 중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읍니다만, 오사카 도미다 쇼카이가 가지고 있던 혜원의 퐁속화첩을 사오신 것도 큰 공적입니다.

황수 : 서화 중에는 오세창 선생의 소개로 사신 것이 많죠.

최순 : 이건 일종의 기연인데 1958년이던가요. 경주 포석정 근처에서 아주머니들이 와당이나 돌등을 팔았었죠. 그때 화강암에 조각이 되고 이끼가 긴 것을 3백 원에 사다가 사무실 책상에 놓았죠. 간송께서 와 보시고 자꾸 달라고 하세요. 그 뒤에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없어졌는데, 하루는 간송이 집에 오라고 하시고는 간송이 가지신 돌조각과 내 돌조각을 맞추어 보여주시며「이렇게 딱맞는 같은 조각인데, 이래도 안 줄테야」하시더군요. 기연이지요. 특히 간송은 남의 욕을 안하십니다. 굉장히 밉고 얄미워도「그 사람 컨추리야」그게 고작입니다.

사회 : 보화각이 건설된 것이 1936년으로 되었읍니다. 간송께서 대학을 나오신 지 만 5년이 되는데 개인 미술관을 지을 만큼 문화재가 소장되었다고 보겠읍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미술사에 기념비적 건물이 되겠읍니다. 그때 상황이나 일화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원 : 당시는 종로 이북의 북촌이 한국인 지역이라 할 수 있었고 아담한 산장들이 있었던 성북동에 보화각을 자리잡게 한데는 간송대로의 포부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일본의 군국주의가 고조되어 가고 있었을 그 무렵 우리 문화의 정수를 전시 보조할 개인박물관을 건설한다는 데는 일제로서는 환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최순 : 민족문화 보호의 구체적인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건축자재도 어려운 땐데 진열장은 대판에 있는 야마나까쇼카이에서 고가로 매입하신 것입니다.

전성 : 현재의「한국 민속미술 연구소」건물은 불란서인 부부가 살던 곳으로「화신」을 설계한 분이 설계하셨다고 합니다.

최순 : 보화각은 일종의 민족적 저항운동의 구체적인 발로라고 볼 수 있지요. 말하자면 민족문화 보존은 물론 민족적 긍지를 되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한국문화를 건설하는 데 초석을 만들고자 하는 데서 이루어진 것으로 압니다. 그러한 의도는 연구도서 일체가 복수로 준비된 점 같은 데서 잘 드러납니다. 즉 연구기관의 구상이었읍니다. 따라서 개인 장서라기보다 민족의 공기로서 기획된 것이 명백하죠. 제가 유럽으로 떠날 때도 그러한 연구기관을 잘 보고 오라고 하신 일이 있고 또 서울에서도 후보 건물을 그런 관점에서 관찰하신 일이 있읍니다.

김원 : 보화각의 뜻은 정확히 어떻게 요약할 수가 있을까요.

김상 : 보화란 빛나는 물건을 모아 둔다는 뜻이죠.

진홍 : 해방 후에 미국에서 일체 비용을 댈 테니 미국에서 전시하자는 청탁이 있었죠. 의연히 거부하셨읍니다.

사회 : 보화각 수집품이 8·15를 전후해 어떤 상황에 있었으며 또 국립박물관을 인수할 당시의 간송의 역할, 그리고 6·25를 전후한 수장품에 얽힌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상 : 8·15이후엔 별 변화가 없으셨고, 6·25에는 박기중씨댁(울산)에 우거하신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황수 : 중요품목은 부산으로 소개를 하였지만 놓고 가신 것이 더 많지요. 수복하셔서 보니 여기저기 선생의 물건이 나와 다니고 때로는 경매에 나가면 당신 물건이 나와서 그것을 회수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신 것이란 말씀은 여간해선 안하세요.

김원 : 6·25 때에 혜화동 로타리를 걸어가는데 거지가 피 나오는 무릎을 이상한 종이로 닦고 있었죠. 보니까 고판본 찢은 것이라서 깜짝 놀라 이게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더니 보성중학교 뒤에 가면 산같이 싸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때는 별 도리가 없었지요.

최순 : 전적도서가 사변 중에 없어졌는데 상당한 부분이 모처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자기의 것이면서도 그쪽에서 요구하는 금액을 다 주시고 다시 인수하셨읍니다.

최순 : 6·25 땐 북단장 아래 전효준 씨가 사시던 데로 옮겼죠. 북쪽에서 온 당원으로「기」란 사람과 서예가「일관」이란 사람이 와서 간송 소장품을 안전한 데로 옮긴다는 것이죠. 그래 손재항 씨와 제가 지연작전을 세웠읍니다. 우선 선별 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하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었다간 아니라고 다시 싸고, 또 목록이 잘못 되었다고 다시 하였지요. 포장이 진행되면서 상자를 사오라고 하는 둥 목수가 없다는 둥 지연하고……9·28 때까지 완전히 포장되어서 상자에 싸여진 것은 하나도 없었죠. 그때 보화각 지하실에「화이트 호소」위스키가 궤짝으로 있었는데 그것을「기」한테 날마다 자꾸 권했죠. 술이 취하면 우리가 사보타즈하기 쉬웠죠. 그리고 그 속에 일본판화로 된 좋은 춘화가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보고 좋다고 흥얼대면서 우리가 눈속이는 걸 모르고 매일같이 곯아 떨어졌습니다. 소전 선생과 나는 참 위기일발로 살아남았어요. 북쪽 책임자인 일관이란 사람이 9·28이 다가오자 우리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할 때는 참 아찔했읍니다. 그날 그들이 모두 서울에서 사라져 버렸읍니다.

전성 : 그때 짠 상자로 부산 피난을 했읍니다.

사회 : 남쪽 피난시의 비화를……

전성 : 피난을 울산 옆 병영으로 갔읍니다. 그리고 물건은 김승현 박사가 염주동 가자마 별장에 보관을 했죠. 그리고 1953년 겨울에 물건이 서울에 왔는데 물건이 오자 10일 뒤엔가 그 별장에 큰불이 나서 전소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도왔다고 했읍니다.

김원 : 간송 미술소장만 가지고도 한국 미술사가 되리라 봅니다. 연구소에서 많은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길 바랍니다.

전성 :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전에 못 듣던 일을 직접 간송과 교유가 있었던 여러분께서 말씀해 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간송이 못 다하신 일을 부족한 저희들이나마 최선을 다해서 만분의 일이나마 해볼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간송문화

1965년부터 보화각 소장 문화재의 종합 정리작업에 들어가게 된 바, 1966년 4월에는「한국 민족미술 연구소」가 발족하기에 이른다. 전영우 연구소장은 간송 선생의 2남으로서 서울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학에서 해당 분야에 대한 강의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소장 문화재 정리작업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간송미술관의 실질적인 활동을 전개해 온 최완수 연구실장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수 줄곧 고미술 분야에 외곬으로 몸담아 정진해 온 뛰어난 학자이다. 모교인 학부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해오다가 지금은 이대와 동국대에도 출강하고 있다. 최완수 원장의 개인 신상 명세와 학문적 수준 업적은 해당 분야는 물론 많은 인사들의 시선 속에 있거니와, 결벽한 학자에 대한 예우로 함부로 거론함을 피하고자 한다. 다만 전영우 연구소장, 최완수 연구실장을 비롯하여 수석연구원 정병삼씨 등 20여 명의 연구원이 쉴 틈 없이 쌓아 가는 연구와 실적이 약속하는 내일에의 화려한 기대가 보화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이미「간송문화」33집까지 간행한「한국 민족미술 연구소」부설「간송미술관」의 견고한 실행력은 이미 고미술 분야에 큰 기여를 이루었다.「간송문화」에서 소장품의 체계적인 전시의 모습과 최완수 원장을 비롯한 해당 분야 학자들의 우수한 연구결과에 의한 논문을 볼 수 있다. 「간송문화」의 그간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60년 6월 : 전적(典籍) 부분 정리하여「간송문고 한적목록」발간

1971년 10월 : 겸제 정선의 회화 특별 전시회 및 도판과 관계 논문 수록의「간송문화」제1호 발간

1972년 5월 : 추사 김정희의 서예 전시회(Ⅰ) 및 제2호 발간

1972년 10월 : 추사 김정희의 서예 전시회(Ⅱ) 및 제3호 발간

1973년 5월 : 단원 김홍도의 회화(Ⅰ) 전시회 및 제4호 발간

1973년 10월 : 단원 김홍도의 회화(Ⅱ) 전시회 및 제5호 발간

1974년 5월 : 고려청자 전시회 및 제6호 발간

1974년 8월 :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인「혜원전신첩」을 탐구당에서 출간

1974년 10월 : 현제 심사정의 회화 전시회 및 제7호 발간

1975년 5월 : 중국역대 명인의 서예 전시회 및 제8호 발간

1975년 10월 : 오원 장승업의 회화 전시회 및 제9호 발간

1976년 5월 : 한국역대 풍속화 전시회 및 제10호 발간.

1976년 6월 : 추사 김정희의 서화 일품을 집성한「추사명품첩」상·하 지식산업사에서 출간

1976년 10월 : 한국역대 사군자 전시회 및 제11호 발간

1977년 5월 : 한국역대 扇面書畵 전시회 및 제12호 발간

1977년 10월 : 중국역대 명인의 회화 전시회 및 제13호 발간

1978년 5월 :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의 회화 전시회 및 제14호 발간

1978년 10월 : 한국역대 서예 전시회 및 제15호 발간

1979년 5월 : 한국역대 문인화 전시회 및 제16호 발간

1979년 10월 : 한국 翎毛畵 전시회 및 제17호 발간

1980년 5월 : 한국 도석 인물화 전시회 및 제18호 발간

1980년 10월 : 추사 書泌의 서예 전시회 및 제19호 발간

1981년 5월 : 조선왕조 순백자 전시회 및 제20호 발간

1981년 5월 : 겸제 정선의 회화 일품을 집성한「겸제명품첩」상·하를 지식산업사에서 출간

1981년 10월 : 한국역대 진경산수화 전시회 및 제21호 발간

1982년 5월 : 연적 전시회 및 제22호 발간

1982년 10월 : 간송 20주기 기념호 대표 수장품 전시회 및 제23호 발간

1983년 5월 : 서화Ⅰ추사 墨錄 전시회 및 제24호 발간

1983년 10월 : 조선남종화 회화 XV전시회 및 제25호 발간

1984년 5월 : 조선중기 회화 전시회 및 제26호 발간

1984년 10월 : 중국 淸 서예 전시회 및 제27호 발간

1985년 5월 : 중국 회화Ⅱ전시회 및 제28호 발간

1985년 10월 : 眞景시대 서화Ⅱ전시회 및 제29호 발간

1986년 5월 : 추사탄신 이백주년 기념호 서예Ⅶ 전시회 및 제30호 발간

1986년 10월 : 도예Ⅵ 청자 전시회 및 제31호 발간

1987년 5월 : 근대산수 전시회 및 제32호 발간

1987년 10월 : 근대서예Ⅱ 전시회 및 제 33호 발간

보화각의 간송미술관에는 일만여 점을 추산하는 문화재가 있고 그 중에는 청자기린 유개향로(靑瓷麒麟有蓋香爐, 65호), 청자상감 유죽연로 원앙문정병(靑瓷象嵌柳竹蓮盧鴛鴦文淨甁, 66호), 청자상감 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68호), 훈민정음(訓民正音, 70호), 동국정운(東國正韻, 71호), 계미명 금동삼존불(癸未銘金銅三尊佛, 72호), 금동삼존불(金銅三尊佛, 73호), 청자압형 수적(靑瓷鴨形水滴, 74호), 혜원 신윤복 풍속화첨(135호), 동래선생 교정 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149호) 등의 국보 10여 점이 있다.「간송문화」는 이를 잘 감당하면서 민족문화의 숨결을 되찾아 현재와 미래를 조명하는 큰 구실을 하기 위해, 발전된 방법론으로 천착하는 고미술 연구의 얼굴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