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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장르화 예술성향




김장섭 / 1953년 서울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74∼1979년 Independents 전, 1980년 제11회 파리비엔날레, 1985년 Asia현대미술전, 1982년 제1회 石南賞수 상

예술이 일반적으로 장르라고 불리는 표현의 한계적 영역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와지려는 기도를 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된다.

20세기 초반, 입체파들에 의한 앗상블라주의 시도라든가, 다다이스트들에 의한 반예술의 미학이 빚어낸 갖가지 실험은 오래 된 미술장르에 대한 관념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인상파 이후 근대미술운동들에서부터 미술은 자기자신을 뒤엎고 또 뒤엎는 일로 그 새로운 역사를 창작해 내고 있었다.

드디어는 미술에 있어서의 양식적 한계는 물론 그 고유했던 장르로부터의 이탈이 드세면 드셀수록 좋다는 지경에까지 이르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자살미술이라는 한계적 상황가지도 불사하겠다는 식으로……

그래서, 이미 미술에 있어서 장르라고 하는 말은 교과서에서나 나옴직한 범위개념으로 퇴색됐고, 또 그래서 미술 안에서 이야기되면 무엇이든지 미술일 수 있다는 현상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80년대 한국 현대미술

80년대의 한국현대미술은 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 나름의 힘겨운 역사를 헤쳐나가기 위한 숨가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80년대의 미술은 저 70년대라는 이미 구시대로 불리는 역사적인 배경으로부터도 극복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의 시대적 구분방법으로서 10년 단위를 사용하는 편의성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를 차지해 둔다면, 70년대의 특징적인 사회현상과 미술문화에서 보여졌던 특징적 패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는 많다.)

또, 그도 그럴 것이 70년대라는 시대적 의미를 새롭게 가늠해 보지 않고서는 80년대라는 시대환경 속에서 미술이 그 자신의 위상을 적절하게 도출해 낼 도리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당히 위기감으로, 혹은 70년대라는 한국미술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하나의 회오리가 남겨둔 허탈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어떻든, 80년대는 현대한국이라는 종합문화환경에서 빚어진 몇 가지 숙제들을 싸안고 그 자신의 새로운 의지를 키워 나갈 방향모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그것은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작가들에게 보다 강한 목표의식으로 번져가는 분위기도 조성했던 것이다.

우선 70년대 쪽의 미술환경에서 보면 이것은 대단한 변화의 조짐이었다.

새롭게 부각된 역사인식과 문화, 경제, 정치환경으로부터 자극 받은 새로운 의지는 미술에 대한 태도를 새롭게 구축하지 않으면 안될 조건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타난 현상들이 저 70년대의 획일화된 것으로 보였던 한국적 모더니즘운동으로부터 자유의지를 선언하는 젊은 그룹들에게서 나타난다.

민중미술운동과 신종 로맨티스트들, 그리고 휴머니스트들의 신구상회화가 그것이었으며 70년대의 모더니스트들에 의한 미학에 그 끈을 대고 있는 오브제미학과 설치미술, 그리고 퍼포먼스로서 그 패션을 구축해 가는 그룹의 성장도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대충 이런 사정으로 오늘날의 미술환경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어떻든, 여기서는 이 원고의 주문사항인「탈장르화 되는 미술」특히 설치미술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소위 요 몇 년간 갑자기 사용빈도가 많아진 설치-입체미술 등에 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설치미술의 개념

최근 들어 인스탈레이션이라는 미술용어로 지칭되는 일련의 미술현상의 대유행을 맞고 있었다.

전시대에「입체」라고 불리우던 것에 뿌리를 댄 이 유형의 용어적 개념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 신종미술용어(?)의 구체적인 사용을 이미 70년대부터 외국의 미술정보 등에서 접한 일이 있었으나, 직접 경험한 것은 1980년의 제11회 파리비엔날레에서였다.(필자의 기억으로는 퍼포먼스라는 말도 이 때 처음으로 수입 사용된다.)

그 당시 비엔날레 주최측은 이 용어를 전체전람회의 섹션구분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공식채택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전시공간의 적응방법과 아울러 설치양식의 유형적 구분으로서 종래의 조각개념을 넘어서거나 그 구축의 방법이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경우를 기술적으로 나누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지 않나 한다.

결국 인스탈레이션이란 하나의 장르적 특성을 가지는 용어라기보다는 설치양식과 전시환경에 관련된 편의적 영역구분으로서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한국현대미술의 경우 하나의 장으로서 설치미술-입체미술이라고 불리우는 패션이 특별히 그 양식적 의미를 가지는 듯이 보이는 이유는 각별히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 원인이라면 정확한 표현은 못하겠으나 다분히 미술패션에 대한 감각적 해석이 그 주된 원인이랄 수도 있고, 패션을 장르로 오인하는 데에서도 기인하는 경우라고도 생각된다.

이를테면 회화영역이나 조각의 영역과 구분되거나 종래의 단편적 오브제 설치양식과 구별되는 구축물에 대한「차별화」로서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든, 그렇지 않든 소위 가벼운 마음으로 말하자면 설치미술이라고 불리우는 미술형태들이 요즈음 들어 매우 각광을 받고 있었다는 것만은 주목할 일이다.

한국미술에 있어서의 오브제미학 내지는 오늘날 설치미술이라 불리우는 전시 형태를 연상케하는 작품들은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서부터 발견된다.

60년대말서부터 일기 시작한 서구모더니즘의 적극적인 수용의 열기는 A. G 그룹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주변의 소규모 그룹운동에서부터 시작된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시대를 장식했던 S. T그룹 등이 오늘날의 미술환경의 뿌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말하자면, 어떤 식으로든 초기 설치미술 내지는 오브제 작업등이 이루어낸 한국적 모더니즘의 표정 속에는 당시 적극적인 외국미술개념의 도입의 열기와 그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서로 줄을 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이르는 정치, 경제적 환경, 즉 수출주도형 경제의 정착과 외국자본, 기술의 적극적 도입, 그리고 성장일변도로 짜여지고 홍보된 정책 등이 곧 당시의 문화의 환경으로서 그 시대적 특징을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우리의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운동과 무관하지 않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도 있었을 것이고……

한국의 경우 언제나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정치, 경제적 환경이 조성한 시대적 요청과 그 분위기는 문화계와 연계되어 특징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그것이 더욱 많은 시행착오의 늪을 제공하고 있었다는 데 문제는 있었지만 아무튼, 대체로 A. G이후 S. T로 대표되는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설치미술은 그 맥을 이어간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 당시 입체라고 불리우던 오브제미학과 설치미술의 경향을 띠었던 작가들의 활동이 퇴색해가는 현상을 볼 수 있게 된다.

많은 초기의 입체-설치미술 작가들이 다시금 점잖게 붓을 잡을지, 아니면 조각의 우아함을 다루는 쪽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80년대에 들어와서 전술한 바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와 이유 등에 의해서 다시금 설치미술에 해당되는 성향의 작가들의 출현을 맞게된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그들은 그들이 가진 새로운 감각으로서 상당한 성과도 일궈내게 된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새롭게 부각된 일련의 작가군은 그들의 선배미술가들이 구축해 놓은 방법상의 텍스트와 그 모델들을 넘어서는 일에 매우 민감해져 있었다.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표현양식에 이르기까지 기성의 냄새와는 사뭇 다른 개인적인 냄새를 보다 더 드러내는데 가치를 두고 있는 듯 했다.

바로 이것은 개인적인 관심, 개인의 경험만이 경직된 사고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라고 믿겠다는 의지를 구체화시킨 것으로도 보여졌다.

이것은 전시대에 비하자면 특징이랄 수 있는 요소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작품을 감각 속에서만 다루는 듯한 인상도 남기고 있었다.

70년대의 그것이 매우 드라이하고 절제된 이지적 표정이었다면, 80년대는 보다 다양하고, 동시에 매우 첨예화한 감성으로서의 표정을 수반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이것은 시대에 부응하는 개인의 태도와 삶의 재해석을 의미하는 변화인지도 모른다.

자동차를 무더기로 수출하고, 바야흐로 무역대국을 표방하는 환경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시대적 반응이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80년대의 작가라고 불리우는 일군의 세대는 바로 저 70년대라는 역사가 뱉어 놓은 사고의 획일화와 그 경직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극복해 내는데 개성과 감각 등이 유효한 원료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일반화되는 일에 일종의 무언의 합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쨌든, 한동안 침체의 위기 속에 놓여져 있던 설치미술이라는 장르(?)는 활발하게, 보다 다양한 표정으로, 보다 빠른 걸음으로 이 시대의 특징을 구축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설치미술의 표현방식

오늘날 설치미술이라고 불리우는 패션을 명쾌한 양식개념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처럼, 현재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 설치미술의 표현영역을 한마디로 평가하거나 분석할 능력이 필자에겐 없다.

다만 요즈음 들어서서 보면 이들 설치 미술이라는 영역의 작품들이 오늘날 유행하거나 과거에 유행했던 모든 표현방법과 재료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작가의 체질과 경험, 개성 등으로 해서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개인의 감각, 감수성 등을 중요시하는 세대적 분위기는 이를 극대화하는 데 유효했다고나 할까?

얼만큼쯤 시의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키네틱아트의 변형이라든지, 네온이며 라이트를 사용하는 미술이라든지, 비디오며 사진기술의 적극적인 도입과 그 변형, 야외에서 꾸며지는 일년의 현장작업의 다양화, 퍼포먼스와 접목된 회화며, 우편이나 인쇄매체를 이동하는 미디어작업, 심지어는 음악과 무용과 접목시키려는 여러 시도들에다가, 끝내는 전화메시지로 작품의 아이디어를 지구 저쪽편으로 전달해서 재현해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패션의 다양함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쯤에 이르면 미술에 있어서의 이미 표현방법상의 한계라는 것은 엷어지다 못해 없어지고 있다고 해야 옳다.

오래전에 이야기되고 있었던「미술이라면 미술이다」라는 식의 표현은 한낱 시효를 잃은 농담처럼 들리게 된다.

미술이 미술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도 이미 오래전에 있었기 때문이지만……

또 한가지 한국현대미술의 80년대의 특징적 사건으로서 퍼포먼스의 확산을 들 수 있다.

한국의 퍼포먼스의 역사에 관해서는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일이지만, 그래도 대충 점검해 보자면 이렇다.

한국 퍼포먼스의 역사

1960년대 중반이 지나면 소위 해프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퍼포먼스의 역사는 시작된다.

몇몇 전위작가들에 의해서 시작된 해프닝은 사회도덕적인(?) 규제로 말미암아 그 계속성을 잃게 되지만, 그 몇몇 선구자들의 업적은 그 후 70년대에 들어서서 보다 건조한 표정으로 새롭게 무장된 이론적 뒷받침을 받으며 다시금 그 모습을 들어낸다.

오늘날 퍼포먼스라고 불리는 장르도 이미 설치미술의 예에서 보았듯이 한마디로 규정해서 이야기할 것이 아닐만큼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70년대부터 다시 일기 시작한 퍼포먼스에의 관심은 몇 가지 중요한 전통(?)을 세우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S. T그룹에 속해 있던 몇몇 전위작가들에 의해서 두 번째로 그 모습을 드러낸 퍼포먼스는 그 당시 이벤트라 불리워지고 있었다.

이들 퍼포먼스의 선구자들에 의해 연출된 이벤트는 때로는 로지칼·이벤트라고도 하여 해프닝과는 전혀 다른 이지적인 양상으로 확산되어 갔다.

특히 여기서는 당시 극성을 부리던 개념미술의 도입과 아울러 진행되면서 기본적으로 표현언어의 논리적 틀을 중요시하는 표정이었다.

로지칼·이벤트의 첨예한 논리의 사용은 그 성격적인 한계와 특히 개념미술의 온전한 정착이 어렵던 한국미술의 체질적 조건이 원인이 되어 다시 침체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이벤트의 역사는 면면이 이어져갔고 그 주축이 됐던 이들에 의해, 그리고 당시 그 영향을 받았던 젊은 세대들에 의해 비로소 보다 광의적 개념인 퍼포먼스라는 용어를 내세워 80년대에 선을 보인다.

동시에 80년대의 퍼포먼스는 보다 젊은 세대에 의해 주도되면서 80년대 미술의 특징인 개인적인 사고를 중시하고 또 그 감각을 돋보이게 하는 양상으로 발전되어 간다.

또 이 퍼포먼스는 드디어 연극, 무용, 음악 등과 접속되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결국 퍼포먼스도 하나의 미술패션으로서 80년대를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술은 이제 작품의 설치양식이나 패션으로서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닌 것 같다.

이제는 무엇을 표현할 수 있을까라든지 보다 진지한 작품의 내용에 관한 사유가 필요할 때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작품의 겉모습으로서의 패션은 의미가 아니다.

한국 현대미술이 갖는 중요한 문제는 이제 그동안 펼쳐왔던 미술의 내용에 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이제 또 헤쳐 가야할 우리 미술언어에 관한 심사숙고일 것이다.

무릇 미술에서 양식이나 기법이 정신을 포함한다고는 하지만, 한때 대유행을 보였던 하이퍼·레알리즘의 그것처럼 하나의 유행병처럼 표현양식이 선택되고 버려져서는 참다운 미술사를 우리 손으로 획득하기가 지난해지는 것이다.

오늘날 대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설치미술이나 퍼포먼스가 다시금 전시대의 그것들처럼 자생적인 의지력과 그 심각한 자기확인 작업을 결여할 경우, 이것도 한낱 대중가요의 운명과도 같이 몰락해갈 것이다.

문제는 이 방면의 작가들의 숫적인 팽창에 있지 않다.

기법이나 작품의 겉모습의 다양성이 곧바로 마술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해내는 요술방망이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양식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콘트롤할 수 있는 정신의 힘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미술이 그 장르의 확장과 그 이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정착시키고 또 비로소 당당한 표현의 챠넬을 열어보이냐에 있다.

이제 미술이 진정으로 우리자신의 것이 되기 위하여서는 잠시 우리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해 보아야 옳은 시기인 것이다.

정말로, 진정으로 나의 언어는 내게 필요한 것이고 가치있는 일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