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현장

판소리 고향 남원에서의 신명나는 한가락

- 판소리 동편제와 남원국악원




유영대 / 고려대 국문과 졸업·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전주 우석대 국문과 교수

남원은 판소리의 고향이다. 남원은 춘향골이라고 불러야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며, 춘향과 이도령의 로맨스를 나눈 장소인 광한루가 있어 더욱 정겹다. 춘향이 옥에 갇힌 정경을 슬프게 노래한「쑥대머리」나, 근처의 농부들이 부르는「농부가」도 모두 남원의 향기를 담고 있다.

남원에 가면 아주 쉽게 판소리와 만날 수 있다.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는 문화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여도 만날 수 있는 그런 것으로서의 판소리가 존재하는 땅이다. 남원 사람은 누구나 귀명창이다.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고향의식이다. 필자는 남원 사람이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판소리에 관하여 알게 모르게 접해 오는 동안 그저 자신도 모르게 판소리를 공부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판소리의 고향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판소리가 어떻게 생겨 나왔으며, 어떻게 전승되어 왔으며, 지금의 실태는 어떠한가. 이런 좀 막연해 보이는 질문들에 대하여 간단한 답변을 위하여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대체로 판소리 동편제의 형성을 간략하게 더듬어 보면서, 판소리 자체의 형성과 당대 사람들의 판소리에 대한 인식 등을 간략하게 검토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려 한다. 이어서 동편제의 진짜 명창인 강도근의 소리내력을 주로 그의 구술을 따라 가면서 들어보기로 한다. 다음에 남원지역을 중심으로 판소리 전승의 맥락을 살펴서 그것이 한 시대를 어떻게 길항하며 버텨 나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남원국악원의 성립과 거기서 맡은 바 판소리 전수의 실태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동편제 소리의 형성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산출되어 중요한 기능을 한 민중의 예술이었다. 조선후기의 김홍도나 신윤복 등의 그림을 보면 씨름하는 모습에서나, 단오날의 목욕 풍경들이 자못 흥겹다. 한판의 긴장된 씨름판이 전개되지만 한 귀퉁이에서는 씨름의 결과에는 아랑곳없다는 듯 엿 사라고 외치는 엿장수도 그리고 있다. 깊숙한 골짜기에서 여인네들이 윗적삼을 벗은 채로 창포에 머리감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나무 뒤켠에서 몰래 엿보고 있는 떠꺼머리 총각들의 은밀한 미소를 또한 담고 있다. 시각을 한쪽으로만 집중시키지 않고 여럿으로 나누어 정경을 스케치 풍으로 정겹게 묘사한다. 잔치 풍경 등 어느 것이나 풍속화풍으로 당대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판소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실적인 사설로 당대의 현실을 그려 보이고 있다.

「소리를 잘허먼 곡 그림을 그리덱기 눈에 선허게 떠올라야 돼. 산이 있어도 말허자먼 높은 봉오리도 있고, 깊은 골짜기도 있잖어. 내려오자면 숲도 울창하고 죽은 나무도 있고, 그걸 소리로 다 맨들아야혀. 그레서 나는 소리를 헐 때마다 동양화를 생각혀.」

이 말은 명창 최승희의 것이다. 판소리의 사실성을 말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현실을 그럴 듯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판소리를 포함한 평민예술의 특징이다. 그러면서 판소리는 사람을「울렸다 웃겼다」하는 것이다. 판소리는 현실을 그럴듯하게 보여 주면서,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구경군의 현실이라는 점을 정신적으로 일치시켜 주기 때문에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동편제 소리는 예스럽고 소박하며 비기교적이고 건조한 연기로 일관된다. 강도근은 동편소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편 고대로만 가지고 소리허먼 소리 못 들어요. 소리 못해 묵어요. 지금 서편이나 강산제, 가령 세 시간 헌다면, 동편 소리 한 시간 헌 놈이 더 되요. 동편 소리가 그만치 되고 더 어려워. 장단이 대마디 대장단이여, 딱딱 그대로, 이것이 소리에 딱 맞아가지고 있어서. 새금과 부침을 넣을 겨를이 없다니까. 동편 소리가 이렇게 힘드니까, 거기다 깨소곰 넣고 찬지름 치고, 이렇게 맛있게 맹글자, 맹글아서 못쓸 것은 고치자, 이렇게 나온 소리가 서편소리여. 김연수씨 춘향전 자작하덱기.」

판소리의 유파에 대해서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되는 흐름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동편제에서는 철저하게 배타적인 태도로 유파를 구분하려고 한다. 동편제 소리에 대한 우월의식이 상당히 작용하였다. 20세기 초반에 와서는 이러한 구분이 거의 무의미해지게 된다. 서로 다른 유파끼리도 이른바 창극단을 구성하여 다니게 되면서 자연히 유파의 구분의식이 느슨해졌으며, 오히려 소리도둑질이라 하여 서로 배우는 현상도 일반화되었다. 선생에게 배울 때는 법제대로 배우다가도 실제 소리할 때는 다르게 했다는 일화도 많다. 그러다가 해방 후에 다시 예전 유파를 고집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그래서 유파간의 소리길을 과장하여 구분 지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남원은 판소리 동편제의 형성과 전승에 중요한 기여를 한 동편제의 고향이다. 판소리의 비조라고 일컫는 권삼득은 익산 출신이지만 남원 주천면에 와서 소리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동편제 소리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인물로 송흥록을 들 수 있다. 그는 소리의 완성을 위하여 폭포에서 소리싸움을 하는 등 대단한 수양을 했다는 기록도 있거니와, 특히 진양조의 완성과 관련해서 기생인 맹렬과의 로맨스 한 토막은 극적이기까지 하다. 남도의 대표적인 민요의 흥타령에는 진양조 가락이 아니고 늦은중모리 가락으로 불리는, 송홍록이 불렀음직한 가락이 담겨 있어서 처연한 심사의 한 가닥을 보여 준다.

「맹렬아, 잘가거라

가려거던 정마저 갖가지

몸은 가고 정만 남으니

쓸쓸한 빈 방안에

외로이 애태우니

병 아니될소냐」

송흥록에서 비롯된 동편제 소리는 그를 정점으로 하여 동시대에 이미 수제자인 고창사람 박만순과 아우인 광록에게로 전승된다. 그리고 동편제 소리는 송흥록의 처남인 김성옥과 매제인 주덕기에게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덕기는 송흥록의 수종고수로서 많은 영양을 입었다. 진양조에 대해서는 처남인 김성옥의 문병에서 비롯되었다는 일화도 있지만 어떻든 송흥록은 동편소리의 완성뿐 아니라 판소리의 중요한 장단인 진양조의 완성에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김성옥의 아들인 김정근에 이르러서는 중고제로 변모하여, 박유전·이날치와 주상환 등에 의하여 서편제 소리로 맥을 달리한다. 이날치 또한 동편제의 거창 박만순의 수종고수로서 동편소리에 익숙했을 터이나 박유전의 문하에 들어가 서편제를 완성한다. 이 무렵부터 유파간의 병존이 시작되었을 것이며, 그 사이에 주로 주도권에 관하여 갈등이 시작되었을 성싶다.

특히 송흥록의 아들 송우룡은 소리를 전가의 보도인양 끝내 고수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일관하였다.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동편제를 아들인 송만갑에게 전수하는 과정에서 만갑이 서편제로 취향을 바꾸려 하자 목숨을 걸고 그같은 전향을 막고자 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우룡이 극약을 놓고 부자간에 죽기로 다그치니 아들 만갑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아비의 청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기실은 송만갑은 서편소리의 좋은 점들을 잘 받아들여 소화시켜 낸 인물이기도 하다. 송만갑은「소릿군은 비단 포목상과 같아서 청중이 비단을 요구하면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면 무명을 준다」고하여 소리의 자유로움을 추구하였다.

유성준은 남원군 수지면에서 태어나 송우룡에게서 판소리를 배웠으며 동편소리의 맥을 잇고, 전도성과 함께 특히 이론에도 강한 인물이었다. 유성준의 생질인 김정문도 동편소리의 맛을 그대로 간직한 인물이다. 김정문은 유성준과 송만갑에게 배웠으며, 잠시 서편제의 대가인 김채만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 임방울, 이화중선, 김연수 등도 유성준에게서 배웠다. 김정문은 강도근, 박녹주, 박초월 등을 길러냈다.

이화중선은 출생지에 대해 이설이 있기는 하나 1892년 운봉면 북천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 그의 동생인 이중선도 뛰어난 명창이었다. 이화중선은 특히 일제 때 가장 인기있는 명창이었다. 이들 모두가 남원 태생이니 남원이야말로 판소리의 고향이자 성지라고 아니 부를 수 있겠는가.

강도근의 동편제 소리

「이때 홍보는 제 마누라와 홋구구로 대종없이 부르며 박을 타는디, 어허 슬근슬근 톱질이야. 스르렁스르렁 쓱싹 톱질이야. 이대 쿡칵 박을 타노으니 박 속에서 이 세상 왼갖 세간이 다 나오겄다. 이것을 볼작시면 자개함농 반다지며, 용장 붕장 귀두주 쇄금들미 삼층장 게자다리 옷거리며, 쌍룡그린 빗접고비 용두머리 장목비 놋촛대 백통유기 샛별 같은 요강타구 그득히 버려놓고 운단이불 대단요며 원앙금침 잣벼개를 반다지에 쌓아놓고 사랑치레 더욱 좋다. 용목쾌상 벼루집 화류문갑 각게수리 용연벼루 거북연적 대모책상 호박필통 황홀하게 버려놓고 한쪽으로 서책을 쌓았으되 어디보자 천자 유합 동몽선습 사략통감 논어맹자 시전서전 대학중용 길길이 쌓아놓고 그 곁에 순대모 안경 화류채경 진묵 당묵순황모 무심필을 산호필통에 꽂아놓고 각색지물이 또 나오겄다. 낙곡지 별택지 도침지 간지 주지 피딱지 갓모 유삼 유지 지식 다 나오며 또한 왼갖 필육이 다나온다. 길주명천 가는베 회령종성 고흔베 당포 춘포 육진포 바리포 자승포 중산포 가는무명 강진해남 금세목 고향꽃밭들 이생원의 맏딸아기 보름만에 마쳐내든 세목관 대차로 봉해 있고 의성목 안성목 송도 야다리목이며 가는모시 굵은모시 임천 한산 극세저며 각색비단이 또 나온다.」

이것은 강도근의 특장인 흥보가 중에서도 박타는 대목이다. 그의 박타령에 대해서는 명창인 임방울도 일찍이 인정한 바 있다. 그는 어떤 의미로든 남원의 터줏대감이다. 그가 일단 무대에 오르면 그 넓은 곳이 어디 한군데 빈틈이 없다. 그 스스로는 판소리 다섯바탕을 다 잘하면 그 중에서도 특히 수궁가를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평판은 그렇지 않다고 못내 섭섭해 한다. 필자가「선생님은 흥보가가 특히 장기이시지요?」라고 묻자, 대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여, 오바탕을 다했지. 했지만, 과거에 흥보전을 잘헌 사람이 송만갑씨가 잘했고, 송만갑씨 제자 김정문씨가 잘했고, 그 양반들한테 배운 내가 잘헌다고 말이 올라.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흥보전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허는데, 한바탕 소리를 다허먼 말이 올라, 규격이 되아가지고 있어. 그래서 내가 흥보가에 독보다, 나는 가르친 대로 하지 내가 어찌 자작을 해. 자작은 안 써.」

강도근은 1918년생이니 올해로 꼭 일흔 살이다. 그는 열일곱살에 소리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다. 올해로 55년째 소리판에서 살아 왔다. 그런데 그는 요즈음도 남원국악원에서 60명 가까운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 아침 열 시부터 시작하여 열두시까지 오전 수업이 있고, 오후 세 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 꼬박 아홉 시간을 그 소리 그대로 가르친다. 그가 가르치고 있는 모습만 흘낏 보아도 감격스럽다. 스스로 북채를 잡고서 통성을 지러대며 코흘리개에서부터 거의 예순이 되는 노인까지를 제자로 삼아 가르친다.

물론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바탕을 두루 가르치는데, 어디에서도 막힘이 없다. 그는 판소리 열두바탕도 한때 다할 줄 알았다고 하며, 그밖에도 안중근전이나 유관순전 등 일제시대의 창작판소리도 많이 알고 있으나 통 부를 기회가 없어서 나올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한가지 소리만 배우지는 않는다. 그는 제자의 능력이나 나이 등을 고려하여 수준에 맞게 소리를 가르친다. 그러다 보니 앞에서 배운 사람하고 나중에 배운 사람하고 약간 다른 경우도 생기는데 그것은 마땅히 배운 이의 수준을 참작한 것으로 알면 된다. 아마도 진짜 동편소리를 배울 진정한 제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듯 느낌이다.

그가 소리공부를 하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의 소리공부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의 처음 스승은 주천면에 살던 유명한 김정문이다. 그곳에 살면서 2년 정도를 배웠다. 그때 배운 것이 흥보가 한바탕이며, 춘향가는 끝을 맺지 못하고 나머지 소리들도 동편 그대로 배웠다고 한다. 김정문이 젊은 나이에 죽자 그는 스무 살 무렵 서울 익선동 9번지의 조선성악연구회를 찾았다. 그곳에서 송만갑, 정정렬, 이동백 등을 만나 2년간 배웠다. 그 무렵 송만갑은 일흔일곱의 나이였는데도 그가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기꺼이 춘향전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스물 다섯이 되어서 구례로 와서 구례 용강리의 박지용 선생 댁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박봉채에게서 소리를 배운다. 박봉채는 소릿군은 아니고 한의사였는데 속목으로 가사와 도섭만 가르쳤다고 한다. 박봉채는 요절한 명창 박봉래의 동생이자 진정한 명창인 박봉술의 가형이기도 한, 바로 그분이다. 박봉술, 강사홍 등과 함께 거기서 소리를 배우고 하동 쌍계사에 들어가 독공하였다. 대체로 독공은 바탕소리를 받으면 바로 석달 열흘 가량 들어가는데, 깊은 산 속의 암자를 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이른바 폭포와 소리싸움을 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동편을 가지고 독공을 해서 목성음을, 득음을 해야혀. 동편제라야 득음이 돼. 내가 오십 사 년을 소리를 허는디, 석달 열흘 독공을 수십번 들어갔어. 중노릇 하다시피, 산에서 살다시피. 어찌 소리를 허다 보면 목이 쉬어서 소리가 나오들 안혀. 거기다 공력을 많이 들였어. 좋은 성음을 가진 사람도 독공헐 때는 목이 안쉰 사람이 없어. 그러다가 귀곡성이 나오기도허고. 공력이 들고 연조가 깊어지고, 그래서 득음이 되면 나는 안 듣기지만 저만치 선 사람에게는 듣기게 된단 말여. 좋은 목이 나온단 말이여. 어느날에.

목에서 피가 넘어와야 소리를 잘헌다는 말이 있는디, 그것은 멍청헌 사람들 말이고, 목에서 피가 넘어온단 말은 목이 부러져버렸다는 뜻이고, 목에서 피는 안 넘어올 정도로 해야돼. 안 부러질 정도로. 목이 상헐 즈음 해서는 똥을 먹어야 해. 똥물을 먹으먼 열이 풀어지거든. 그러먼 목이 카랑카랑해진다고, 그래서 똥물을 먹어, 통대나무를 담갔다가.

독공을 헐 때먼 그때까지 배운 가사를 고대로 한 만번에서 이만번 가량을 불러야 돼. 그러면 눈 감고도 소리가 저절로 나와. 내가 먼소리를 헌지도 모르는디 저절로 소리가 돼부러. 장단도 바꽈서 불러보고」

그는 쌍계사에서 독공을 마치고 마치 하동 악양(?)의 유성준에게로 가서 수궁가를 배웠다. 강도근의 표현대로 유성준은「영감이 멋은 있는디 소가지가 나쁜」전형적으로 까다로운 선생이었다. 임방울도 그곳에서 수궁가를 배웠다. 다시 하동의 섬도에 가서 이진영에게서 심청전을 배웠다. 그 뒤에도 김천희가 다섯바탕을 다 가진 신접한 인물이라고 하여 곡성 고달면으로 찾아가 배웠지만「소리공부 좀 헐라면 선생이 죽어버리」곤했다. 다시 김철원에게서 배우기도 하였다. 그가 진주궈넌의 소리선생으로 가자 그곳까지 따라가서 배우기도 하였다.

임실 사는 박준근에게 배운 것이 마지막 정리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였다. 박덕보라는 소릿군의 조카가 박준근인데 그에게서 송판 적벽가를 배웠다. 이후 그는 창극단에 끼어 한두 해 다니게 된다. 임방울·김연수·공귀남·임소향·박동실·오태석·정남희 등과 함께 다녔다고 한다. 박동실의 호남창극단을 따라서 통영에서 공연하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그곳에서 해산하고는 바로 남원으로 돌아왔다. 그 뒤 김연수 창극단과 동일 창극단에서 잠깐씩 일하다가 결국은 남원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면서 그때부터 남원국악원의 소리선생이 되었다.

약간 쉰 듯한 수리성에 철성을 겸한 것이 성음인 그는 특히 통성으로 질러내는 소리가 특징이다. 타고난 윤기와 공력이 곁들여 거의 완벽하며 특히 기교를 부리지 안고 질러내는 소리로 송만갑과 가장 닮았다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아쉬운 점으로 가사의 발음이 불명확한 점과 재담이나 발림이 부족하다는 것을 들기도 한다. 얼마전 이른바 인간문화재의 대상에 올랐다가 이런 지적 때문에 보류되었다고도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토록 우수꽝스러운 넌센스도 없을 것이다. 어느 유명한 소릿군에게 물어보아도 그를 그런 식으로 평하지는 못할 것이다. 앞에서 임방울에게도 인정받았다고 했는데 그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이 재미있을 듯하다.

이 이야기는 천이두 교수의「명창 임방울」에 실려 있다.

한번은 어느 공연장에 출연하고 돌아오던 길에 임방울이 임준옥씨더러,

「야 참, 오늘 나, 노래 한번 기차게 잘허는 놈 하나 보았다. 웬 젊은 놈인디, 내 소리가 그놈 소리한티 영 밀려부럿어야.」

하며 칭찬하기에 입에 침이 마르는 줄을 모르더라는 것이었다.

숨은 명창이 하나 새로 데뷔를 했던 모양이었다. 천하의 임방울이 이다지도 칭찬을 아끼지 않은 그 당자가 누구일가. 임준옥씨로서는 궁금하기도 하고 은근히 샘이 날 것은 당연하다.

「그 사람이 누군디요?」

「남원 사는 새파란 젊은 놈인디 정문이 제자래여.」

「그러면 한번 오락 하지오.」

「글안혀도 편지를 냈으잉게 오기는 곧 올 것이다.」

며칠 뒤에 그 당사자가 찾아왔다. 그가 바로 남원의 강도근씨였다.

지금까지가 인용인데, 이 문맥으로만 보아도 강도근이 당대를 풍미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명창이다. 다만 술 받아 준다거나 교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길래 서울을 택하지 않고 지독하게도 남원을 고집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자리에서 행한 인터뷰는 그의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나는 서울 사람들허고 판이 달러. 그 사람들은 창이면 창, 연극이면 연극으로 먹고 살어야겄다 하고 나선 사람들이지만 나는 내 손으로 농사지어서 곡식으로 먹고 살아. 그것이 나는 좋아. 서울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비웃네. 나는 돈을 싸줌서 서울서 살라고 혀도 못 살아. 시끄럽고 사람 많고 차도 많고. 그것이 사람사는 곳인가. 그리고 서울 가면 사람이 버려. 옛날에도 멀쩡헌 청년들이 소리헌다고 서울가서는 계집질에 술에 아편에 몸버린 사람 많았어. 지금도 그려. 서울가서 보면 순전히 술에다 화투에다 놀고 먹자판이여. 그러고서 언제 소리공부허는지 모르겄어. 그러고 돈, 돈에 눈이 벌게져서 돈밖에 몰라. 그러니 우리는 촌에서 농사짓고 사는 게 마음 펜허고 좋아. 모다들 문화재헌다고 야단들이지만 나는 문화재헌다고 쫓아다니기도 싫고, 저희들이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주지말라 그맘이여.」

그래서 그런지, 그는 신문, 잡지, TV 등에 나오는 것도 반가와하지 않고 오직 제자들 가르치는 것만이 제일이라고 말한다.

일제시대의 판소리와 남원 권번

일제시대 남원에서의 판소리 전수는 대체로 세 갈래로 나뉘는 듯하다. 하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유명한 명창의 집에 가서 배우는 도제식 수업이다. 명창의 집에 가서 학채를 내고 배우거나 아니면 나무나 빨래를 하는 등 집안 일을 도우면서 판소리를 배우는 방식이다. 김정문이 사는 주천면에 박녹주나 강도근이 배우러 다닌 것이 대표적이며, 최근의 판소리 전수도 모두 이같은 방식을 통한다. 두 번째는 권번에서의 판소리 전수이며, 세 번째로는 국악연구를 위한 클럽 활동을 들 수 있다. 전수의 주도권은 주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방법이 많이 이용되었으나, 강도근의 증언에 의하면 세 번째의 활동도 왕성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권번에서의 전수상황에 대하여 알아보자. 조선시대 남원부에는 관기 15명 있었다. 조선 때까지만 해도 기생을 교육시키는 곳은 교방이라고 불렀는데, 일제때 왜적에게 국권을 빼앗긴 이래 우리 국악도 제대로 전수 발전보다는 왜곡된 형태로 굴절되었다. 권번이라는 용어 자체도 비루하고 속된 느낌이 드는 용어인데, 어떻든 그나마 이 권번을 통하여 판소리명맥의 한 계통이 이어졌다는 아이러니도 있다. 남원에 권번을 세우는 데 공헌한 사람이 이현순이다. 그는 광한루 경내에 권번을 세우고 우리 국악을 전수시켜 나가도록 일을 꾸민 인물이다. 남원 권번이 설립된 해는 1921년의 일로 이곳에서는 기생이나 기타 관심있는 이들에게 판소리와 가야금, 무용 등을 가르쳤다.

남원 권번을 통해서 등장한 예능인들의 숫자는 아주 많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화중선과 강국향, 최봉선, 조기화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의 구체적인 매거는 피하기로 한다. 1931년에 춘향사당이 건립된 것도 기념비적인 일이며 흥미로운 일화도 많이 있다. 춘향사당의 건립을 주도한 이도 바로 이현순이다. 그는 남원의 문화에 대하여 강한 애정을 가지고 남원군내에 안 다닌 곳 없이 다니면서 기금을 모으러 진주나 서울 등지의 이름난 기생들을 찾아서 춘향사당의 설립 취지와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광한루 경내에 춘향 사당을 세우게 된다. 이현순의 행위는 단순한 복고취미는 아니며, 나름으로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정신으로 우리의 민족의식을 지켜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국악의 명맥을 이어나갈 것을 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판소리의 발전에 일정한 몫을 하였던 권번이지만 일제는 이러한 작업이 민족의식의 고취라고 생각되어서, 핑계를 찾다가 권번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재판소를 설치한다는 명목으로 광한루 밖으로 좇아내서 권번은 가정집으로 가게 되었다.

1933년의 일이었다. 이같은 짓거리는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그 뒤에도 그 자리에 재판소는 세워지지 않고 오히려 술집만 들어서게 되었다.

춘향사당이 생기고 나서는 4월 초파일이면 춘향의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춘향의 제사는 권번의 초대 조합장이던 이백삼이 주도하여 본격적으로 치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도시의 권번과 예기조합에 통첩하여 4월 초파일 춘향제 참석을 의무화시켰다. 그 예로 서울의 한성 권번이 제를 지낼 인원 명을 파견하되 향전은 이십 원을 부담하였으며, 진주 권번, 순천 권번이 각각 제원 2명에 향전 십 원을 부담하고 전주, 하동 기타 권번에서도 제원 한 명을 파견하되 향전은 오 원을 가져오도록 하여 첫째로는 제전당일의 경비에 충당하고, 둘째로는 춘향사의 경영 유지비로 활용하였다.

또 하나 춘향제사를 지내는 일을 두고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현재 남원 국악원장인 박재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당시 권번에서 배우고 나서 부산관에서 돈을 번 최봉선이 춘향 사당을 짓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춘향의 제사는 주로 남원 권번에서 주도해 왔는데, 몇 해 지나자 다른 지역의 권번에서도 제사 비용을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춘향제사를 맡고자 요청하였다. 비용 염출이 어려웠던 남원 권번에서도 좋다고 하여, 제비를 많이 내는 쪽에서 주도하기로 결정이 났다. 1930년대의 권번으로는 평양, 진주, 남원을 쳐서 3대 권번이라 하였다. 그 중에서도 평양 권번이 명성이나 실세로나 가장 왕성하였으므로 매해 춘향의 제사를 도맡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진주 권번에서 맡아 남원에서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다.

그러자 권번에서는「우리 고을의 춘향제사를 왜 뺐기느냐」는 반발이 일어났으며 최봉선이 다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논으로 마련하고 영구적으로 춘향의 제사 비용으로 충당하게하고 이후부터는 춘향의 제사를 남원 권번에서만 지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지금은 본격적으로「춘향문화선양회」가 구성되어서 이 일을 주관하고 있다.

이후 춘향의 제사는 남원 기생의 전용물이 되었다. 물론 기생들이 춘향의 제사를 전적으로 주도하였다는 사실은 춘향이 그들의 먼 선배이자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인물이라는 점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아가서는 자신들도 춘향과 꼭 같이 신분상승을 이루고자 하는 원망을 그 행위 가운데 담아두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제사를 주도하고자 한 행위는 그 진실된 욕망을 엿보이게 한다.

최근의 국문학계의 쟁점으로 춘향이 기생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문제점으로 되어 왔다. 판소리나 소설에 담긴 춘향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요조숙녀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조숙녀는커녕 기생의 전형이기도하여 자못 혼란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춘향의 양면적 성격에 대하여 불합리성이라든가, 갈등 등의 용어로 해명하려는 시도도 있는데, 실제로 춘향의 제사를 두고도 그러한 쟁점은 재연되기도 하였다. 춘향의 제사를 계속 권번에서 주도해 오다가 해방 이후 권번이 없어진 다음에도 기존의 기생이나 작부들이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원 사회에서 그것이 여론화되어 1960년대에 와서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 결국은 남원여고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남원의 모든 여고생들이 참여하고 있는 행사이다.

어떻든 수난을 받으며 장소를 옮겨 가면서 겨우 명맥을 이어온 권번은 해방이 되자 사라지게 되었고 그 이후는 남원국악원이 그 몫을 이어받게 되었다.

일제 때의 판소리 육성에 한몫을 하였던 클럽 활동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 무렵의 예능인 단체로 협률사를 들 수 있다. 협율사('헹물사'라고 발음하면 노인들은 다 안다)는 지금의 작은 규모의 유랑극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재능있는 이들이 쉽게 모여 공연하다가 수지가 맞지 않으면 바로 해체하곤 해서 이런 이합집산이 자유로운 단체는 전국적으로 수도 없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원에도 그런 협률사가 자주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권번과는 또 달리 예능인의 충원과 양성을 위하여 뿌락꾸(강도근이 부락을 일본어대로 발음한 것임)를 만들고 그 곳에서 모여 기량을 연마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곳에 모인 멤버들은 박중근, 조기화, 김정문, 최봉선, 김억득, 장석현, 강백천, 김철원, 장혜순, 장소조, 강희중, 소관중, 박덕보, 강도근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뛰어난 예인들이었는데, 지금은 그 이름이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력들은 대단했다고 한다.

이들 뿌라꾸의 후원인으로는 운봉 사람인 박희옥이란 사람이었는데, 아주 고집이 센 심술통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 무렵 운봉은 온갖 예능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유명한 공연은 거의 운봉에서 열렸는데, 그 이면에는 아주 재미난 에피소드가 숨어 있다. 남원에 이동기란 사람이 아주 부자로 호가 났는데, 이분의 취미가 국악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고 공연시키는데 아낌이 없었다고 한다. 이동기가 부자라고 뽐내는 것이 못마땅한 운봉의 박희옥이 심술이 생겨「누가 더 부자냐」를 겨루고자 하는 오기가 나서 이동기의 집에 출연이 약속된 이들을 모두 웃돈 주고 빼돌려서 그토록 운봉이 번창했다는 얘기가 있다.

강도근이 구술한 것을 토대로 몇 분을 이 자리에 소개하고자 한다. 정석현은 특히 해금의 명인이었는데, 아무 곡조도 없이 해금을 멋들어지게 잘 탔다고 한다.

「이 양반이 그렇게 해금을 잘 타. 깨구락지 우는 소리도 다 내. 근디 별호가 장개좆이여. 성질이 어찌 좆같던지, 이빨도 닦으면 못쓴다고 안닦고, 머리도 감으면 못쓴다고 안 감아. 언제나 추레허니 꼭 기인이여, 기인. 그런디, 해금소리만 나면 오금이 저린단 말이여.」

김철원은 소리의 명인이었다. 불행히 한쪽 눈이 멀어서 소리판에 설 기회는 드물었지만 목소리 하나만은 기가 막혔다고 하였다.「그 소리를 들으면 청댓닢을 날린다고 했어. 그런디 애펜을 했어. 아주 태가 있었제.」

강백천은 젓대의 명인이었다. 주천면 사람으로 그의 대금소리는 귀신을 능히 부를 만하여 그의 소리를 듣는 이들은 모두 신접을 하였다고 감탄하였다. 특히 달밤에 들리는 그의 젓대소리에 눈물짓지 않은 이가 없었다.

조기화는 장구에 신기가 들었다고 하였다. 최봉선은 소리에 특히 뛰어난 재질을 가졌다. 그는 권번에서도 아주 우수한 교습생이었고, 돈도 많이 벌었으며, 좋은 일도 많이 했는데, 뒤에 나병이 걸려 어디론지 없어졌다고 한다. 어떻든 이 뿌라꾸도 결성된 지 3년만에 깨어지고 말았다. 1930년 중반의 일이라 한다.

이러한 흐름을 통하여 일제 때의 판소리는 우여곡절 아래서 겨우 전승되거나 또는 왜곡될 수박에 없었다.

남원국악원에서의 판소리

해방이 된 후 국악의 창달을 위하여 조광옥, 이환량 등이 주축이 되어「남원국악인동호인회」를 결성하고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이환량은 특히 국악이론에 정통하였으며 농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일찌기 국악에 관심을 보이면서 활동을 하자 문중에서는 족보에서 아예 제적을 시켜 버릴 정도였다 한다. 그러나 그는「세종대왕께서도 현금을 즐겨하셨고 음악 예술 행정에 치중하였는데 효령대군 후손으로 그 유풍을 따르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일제하 국악 운동에 앞장섰다.

1950년대에 국악원법이 제정되고, 동호회가 남원국악원으로 계승되면서 점점 활기를 띠어 갔다. 국악원은 다시 관한루 경내로 들어갔다가 몇 번의 이사를 거쳐 1979년에야 금암봉 공원 아래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1983년에 시로 승격함에 따라 남원시립국악원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주실과 창악실, 무용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현재 60여 명이 판소리를 배우고 있다. 필자는 강도근 선생의 수업시간을 서너 차례 참관한 적이 있는데, 국민학교 3학년 학생에서부터 중학교, 고등학생, 대학생, 일반인,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러층이었지만 하나같이 진지한 자세였었다.

환갑에 가까운 듯 보이는(실제로는 환갑이 넘었을지도 모르겠다) 분은 그때 심청가를 거의 떼어가서 마지막 맹인연 대목을 배우고 있었는데 받아 쓴 소리책이 손때가 타서 두꺼운 데다 아주 낡아 있었다. 그런데다 매번 커다란 녹음기를 들고서 열심히 선생의 소리를 담아 혼자 연습하기도 하였다. 심청가를 마치면 적벽가를 배울 예정이라고 하였다.

한 국민학생은 춘향가를 배우고 있었는데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아서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창악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하였다. 대부분이 국민학생과 중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생들은 대학의 국악과를 지원하려고 훨신 정성을 쏟아서 배우고 있었다.

김명남은 학생대사습에서 입상한 경력도 있는데 특히 흥보가를 잘하며 현재는 전주 우석대학에서 판소리를 전공하고 있다. 이애자는 특히 주목할 만한 실력을 갖추었는데, 그는 강도근 선생의 소리를 많은 부분 이어받은 듯하였다.

남원국악원의 한 달 수강료는 팔천 원이다. 매일 30분 가량 배우는데 수업료는 참으로 싼 편이다. 그러나 어떻든 이런 힘으로 밀고 나간다면 한길을 이루지 못할 것인가. 20년쯤 전에 이곳에서 공부하고 나간 사람들이 지금 서울에서 왕성히 활동하면서 구태여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잘 밝히지 않는 경향이 있다면서 강도근은 섭섭해 하였다. 그런데 지금 배우고 나가는 아이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고 하니 그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이리라.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뒷자리에 아주 신명나는 박타령 한 자락이 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