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과 민속학
최인학 / 인하대학교·민속학
잠깐 문화관광이란 용어를 음미해 보고 나서 글을 진행하려고 한다. 관광이란 말은 단순 의미여서 혼선을 초래할 염려는 없지만, 문화란 말은 수용자의 의도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
한마디로 문화는 어느 수준의 교양이나 지식이나 편리한 생활 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할 수도 있고, 생활의 양식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할 수 있다. 문화민족, 문화국가, 문화인이라고 할 때는 전자에 속하고, 한국문화, 고대문화, 미개문화라고 할 때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민족의 생활양식
본고에서 문화관광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계승해 온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를 의미하며, 이러한 생활양식을 국내외로 보여주자는 의도에서 사용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현대생활을 전적으로 옛것에 복고하자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민속을 이해해야 할 당위성을 인정한다. 민속이란 말의 기원을 더듬어 보면 그 의의가 분명해진다. 민속을 서양에서는 FOLKLORE라 하는데 FOLK와 LORE의 합성어로 된 이 말의 뜻은 민간의 지혜, 또는 민중의 지식이란 의미가 있다. 이것을 우리는 민간풍속(民間風俗)이란 말로 수용하였으며, 민속은 이 말의 약어이다.
이때의 지식이나 지혜는 생활의 지혜를 말한다. 예컨대 우리의 주거생활에 있어서 우리 풍토에 알맞은 온돌, 식생활에 있어서 우리 음식에 맞은 수저의 개발, 의(衣)생활에 있어서 미(美)의 예술감각을 살린 한복 등은 우리 민족의 생활의 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독창적인 산물은 생활과 직결되고 있어서 생활해 오는 동안에 부단히 개발되고 발전, 변이 되는 것이다.
비록 외국으로부터 전래 수용된 지혜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것이 되어버렸다거나 그것을 우리가 생활화하는 과정에서 개선, 변이 했으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민속이라 할 수 있다. 불교나 도교 또는 유교문화가 우리나라에 수용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이것들이 외국으로부터 전래된 문화라 할지라도 우리의 토양에서 이미 뿌리를 내려,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운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문화요 민속인 것이다.
민속학적인 측면에서 문화관광이라 할 때는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에서 조상들의 생활의 지혜들을 총체적으로 체계화하여 내국인이나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주자는 것을 말한다.
외국인이 보려는 한국문화는 한국적 특징이 있는 문화요소이지, 결코 자기들과 같은 공통문화는 아니다. 그들은 한국의 독특한 문화에 더욱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종합예술로서의 동제(洞祭)
한국만큼 다양한 민속을 향유한 민족도 드물다. 많은 서양의 지식인들이 그 동안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서 편견과 오해를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다. 동양문화라면 대표적인 것이 중국이며, 한국은 중국에 예속된 문화라고만 믿어 왔다. 같은 한자문화권이며, 또 지정학적으로 오랜 역사상 관계가 깊다는 것만으로 이러한 편견을 가져왔다. 오래 전에 한국을 다녀간 서양인들이 돌아가서 쓴 기행문이나 문서들도 이러한 편견과 오해를 주는 악역을 했다. 이들은 소위 상류계층이나 왕실문화만을 접하고 돌아간 부류들이다.
최근에 와서 이러한 편견과 오해가 무너지기 시작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으며, 많은 고집쟁이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고유한 문화가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근간으로 해서 생성, 발전해 왔다는 사실과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 민속 중에 가장 핵심이면서도 쇠퇴해 버린 것 중에 하나로 동제를 들 수 있다. 군소 도시를 비롯해서 농어촌에서 동네나 마을마다 있어 왔던 동제는 당산제, 별신굿, 산신제, 성황제, 풍어제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옛날에는 곳곳에서 개최되었던 이러한 제의(祭儀)가 현재에 와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러한 공동제의는 신앙적으로는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신앙체계이며, 사회적으로도 공동체의식의 고취이고 기능면으로도 재생산으로의 힘의 발산과 축적이었다.
제의를 통해서 마을의 정신적 질서를 확립하고 나아가서는 지방의 질서가 확립되며, 크게는 국가의 질서가 확립되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신앙이 근간이 되어 있다기보다는 행사위주의 성격이 현저하게 나타나지만 그거야 어떻든 실시하고 있는 마을이 그렇지 않는 마을보다도 공동체 의식의 고취이고 기능면으로도 재생산으로의 힘의 발산과 축적이었다.
제의를 통해서 마을의 정신적 질서를 확립하고 나아가서는 지방의 질서가 확립되며, 크게는 국가의 질서가 확립되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신앙이 근간이 되어 있다기보다는 행사위주의 성격이 현저하게 나타나지만 그거야 어떻든 실시하고 있는 마을이 그렇지 않는 마을보다도 공동체 의식이나 여타 화목·단결이란 점에서 단연 우위임을 알 수 있다.
옛날의 제의 때는 무당도 등장했고, 탈춤과 농악도 참여하여 원시종합예술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냈지만 지금은 몇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중단했거나 제관(祭官)들만이 참여하여 유교식으로 간단히 치르는 정도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전통적 사회의 균형이 무너지는 현상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질서를 상징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제의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현대화 축제로 변이 되었던들 오늘날의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제의가 축제(Festival)로 변이, 발전하면서 오히려 재생산의 원동력이 된 실례로 일본의 마쯔라를 들 수 있다. 마을이나 동네의 수호신격인 신사(紳士)나 오미야(宮)가 중심이 되어 이것을 운영하기 위한 조직(講)이 구성되어 있다. 소박하고도 단순한 신앙의 대상으로 참배하던 마을 사람들은 현대화의 물결에 따라 이것을 정적에서 동적인 제의 형식으로 탈바꿈시켰다. 모든 주민이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에 동참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더욱 고취하게 되었다. 신체(身體)를 상징하는 미꼬시(新輿)를 청년조직이 메고 온 동네를 행렬을 지어 순회하고 나서 광장에 미꼬시를 진좌시켜 그곳에서 일대 축제가 벌어진다. 최근에는 민요·춤 등 민속놀이 이외에 가요 콩쿠르도 개최하는 곳이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전국적으로 번져 마침내 마쯔리는 도시화되어 서양의 페스티벌의 성격을 띠면서 크게는 국민화합이라는 기능으로 이어져 재생산의 힘으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한국의 마을 제의가 이와 같이 되지 못한 원인은 사회적·정치적으로 혼란이 거듭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관 주도하의 미신타파운동(자유당정권당시)과 초기의 새마을운동(박정권당시)이 하나의 쐐기가 되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이 두 운동들이 애당초 민간의 의식화에 따라 자연 발생된 것이라면 모르되 관권이 개입됨으로써 오히려 민심을 흩뜨려 놓았고 결국 전통적인 정신질서를 파괴한 결과가 되었다.
초기의 새마을운동도 발전적 주체성 확립보다는 마을의 낡은 것을 부수고 새것으로 대치하는 물리적 수단에 의한 현대화 운동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굴절의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노인들과 청년들간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또 하나의 절대적인 이유를 들자면 농촌빈곤이라 말할 수 있다. 일본의 마쯔리가 축제로 변이, 발전되면서 오히려 그것이 재생산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경제발전과 농어촌의 경제안정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신앙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지만 전통신앙의 쇠퇴를 가져오는 현대에는 경제부흥이 뒷받침의 주 요인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의 마을 단위의 제의가 제대로 유지되든 변이, 발전되든 농어촌의 부유가 선결되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농어촌의 빈곤이 갈수록 심화됨에 따라 사회기능의 메커니즘으로서의 전통문화가 계승될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을의 경계나 입구에 세워졌던 장승이나 솟대, 그리고 신역(神域)의 당집이나 당산목(神木)들은 우리 조상들의 신앙을 표시하는 상징으로서 소박한 상태로 다시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단되었던 제의도 신앙적인 기능이 있든 없든 민속종합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부활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느 마을을 불구하고 농악소리가 들리고 탈춤이 공연된다면 마을 그 자체가 하나의 명소이며, 문화관광지가 될 것이다.
민속박물관의 보급
반만년의 문화역사를 가진 우리로서는 민속박물관의 수가 적은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국립민속박물관도 그 규모면에서 보다 확대,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방에도 각도마다 민속박물관이 세워져야 하고 시군마다 민속자료실이 갖추어져야한다. 그래야만 문화를 보호하는 민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속자료실은 작은 공간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자료는 주민들의 협조로 어느 정도 갖출 수가 있다. 한꺼번에 다 갖추려들지 말고 시간을 멀리 내다보고 서서히 수집을 하다 보면 갖추어진다. 이런 민속자료들을 다루는 데는 전문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문인의 양성이 되어 있지 않다. 전문인이 없을 때에는 정년 퇴직한 원로들의 협조를 받을 수가 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큰 빌딩을 지을 필요도 없고 관청의 로비를 활용하다가 작은 공간을 할애하면 된다. 이리하여 시민들이 쓰던 고물들, 예컨대 농기구, 옷장, 뒤주, 멧돌 등 지금은 쓰지 않는 헌 가구들을 고물상에 넘기지 말고 그 향토자료실에 실비로 제공하거나 기증하는 풍토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외지로부터 어느 시·군을 들르더라도 그 주민들이 예로부터 살아온 생활양식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료실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산 교육이요 문화관광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외국의 예를 들 필요는 없지만 남미의 경우를 하나만 들겠다. 15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문화가 남미를 석권했다. 그래서 주민의 반 이상이 카톨릭을 신봉하며, 카톨릭문화가 지배적이다. 남미의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도 웅장한 교회당이 서 있는데 건물 자체도 훌륭한 관광명소가 되지만 대도시마다 있는 대성당(cathedral)이나 샌프란시스코 교회, 산토도밍고 교회 등은 각각 부설 자료실이나 박물관을 가지고 있어서 교회만 찾아가면 쉽게 그 나라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개 옛날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이 살던 자택도 많은 수가 개인박물관이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남미 각국의 공통점이다.
남미는 교육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결코 우리보다 앞섰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시각효과를 낼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많은 것은 우리보다 앞섰다 할 수 있다.
우리도 민속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는 인사동 거리와 같은 곳은 민속자료실을 겸한 판매장과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한결 고상해 보일 것이다. 한글·영어 설명을 붙인 전시를 해놓고 구입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팔기도 하는 다기능 상가는 대도시마다 장려할 만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상품으로 팔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전수한다는 자질이 필요하다.
민속을 아는 민족이어야
무엇보다도 가장 효과적이고 국위선양이 되는 것은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관광요원이 된다는 긍지가 필요하다. 이미 오래된 경험이지만 1974년 헬싱키에서 한 고졸선원을 만났다.「당신 나라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문화유산이 뭐요?」하고 물었더니 그는 거침없이「그야 말할 것 없이 우리 조상이 남겨주신 칼레발라지요」하며 자랑을 했다. 사실 핀란드의 민족적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는 이들의 조상들이 구전(口傳)으로 남긴 정신적·문화적 유산이란 것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핀란드보다 더 오랜 문화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조상들이 남겨준 문화유산이 너무나도 많다. 신화·전설·민담·민요 등 수많은 구비문학, 고유신앙으로서의 무당, 무가, 한국 특유의 의식주의 물질문화, 출생부터 사망에 이르는 인간의 일생을 통해 주기마다 베풀어지는 의례들, 탈춤, 농악, 판소리와 같은 민속예술들, 절기마다 행해지는 자연의 법칙과 생의 순리에 순응한 다양한 세시풍속, 이것들이 모두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민속자료이며 문화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민속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역사를 역행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민속문화의 올바른 이해가 무엇보다 앞서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