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문화관광 개발코스

안골포 언덕에서 가덕도 바라보며

-안골 음악촌




금수현 / 한국작곡가 협회장

세계의 문화권 국가에서는 한 고장을 선정해서 음악제를 열고 있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해변이나 호반에서 이런 음악제를 시작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여기저기에서 개최하고 있다. 우리나라 민속음악 분야의 예술제도 오래 전부터 도시에서 또는 지방에서 계절마다 열려 왔으나 순수음악 분야의 것은 별로 없다.

근년에는 바이올린이나 첼로 분야에서 몇몇 교수가 그 분야의 음악도를 모아놓고 수련을 하는 일종의 음악캠프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장소와 경비문제에 애로가 있다.

이 문제는 일본의 경우도 음악제의 건물과 호텔 값이 음악인이 아닌 기업가의 것이기 때문에 해마다 값이 울라「재주는 곰이 부리고」라는 상황을 들어 왔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조금 여유 있는 음악인과 협의하여 음악제를 열 땅을 우리의 힘으로 마련하기로 했다. 이 음악제를 여름방학 때 연다면 바닷가가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동해안, 서해안, 심지어는 군산에서 멀리 떨어진 어청도까지 답사했으나 조건이 안 좋아 겨우 구한 곳이 남해안 안골포라는 곳이다. 당시 땅값이 과히 비싸지 않아 언덕 땅을 약 6천 평 살 수 있었고, 회원 중 유지들에 의해 5평의 연립숙소를 10년간 건축하여「안골 음악촌」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안골은 안골포로 임진왜란 초기에 충무공이 대첩한 역사적인 바다이나 일반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부산에서 진해로 가다 보면 그 중간쯤에서 왼쪽으로 1킬로미터쯤 들어간 곳에 안골동이 있다. 우리가 땅을 마련한 후에 아스팔트가 깔려 시간도 30분 정도이고 쾌적하다. 그러나 좀 불편한 일은 안골동에서 약 50미터 높이의 언덕을 올라 300미터를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방문객의 불평을 위해 나는「예술의 길도 멀고 험하다」라는 팻말을 써 붙였더니 불평이 사라졌다.

그 음악촌 남쪽 아래에는 앞에 가덕도가 보이고 마치 호수 같은 바다가 있어 해수욕을 할 수 있고 바위와 모래밭도 있다.

지금은 진해시로 편입된 이 안골 음악촌은 머지않아 해안도로가 되어 자동차가 현지까지 들어갈 것이며 음악당도 지어 해마다 여름에 본격적인 음악제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음악가에 의한 음악제마을은「재주는 곰이 부리고」라는 말이 안 되는 고장이 될 것이다.

이런 곳은 내가 아는 바로는 세계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안골포 언덕에서 가덕도 바라보니

바다가 호수인가 호수가 바다인가

갈매기 날아가네 울면서 날아가네

고깃배 거북선인 듯 그 옛날이 아롱지다

시인 아닌 나에게서 이런 시가 나와 곡까지 붙여 보았다.

그러고 보니 예술하는 사람들, 문인, 시인, 화가들도 찾아오면 좋을 것 같다.

금년에도 필자는 7월 하순부터 광복절까지 그곳에 머물 것이다.




마음 씻어 헹구는 돌밭 나들이길

-전봉건 시인의 탐석 코스를 말한다




서벌 / 시인

전봉건 시인의 돌밭 나들이 길은 155마일로 그어진 휴전선 남쪽, 그 어디에나 나 있었다. 그만치 탐석 범위가 넓어, 어떤 때는 2박 3일 정도가 되기도 했다. 장대 흡사한 훤칠한 몸에 배낭이 따라붙으면 돌밭 나들이행이고, 타고 가던 버스나 기차에서 내리게 되면 근방 일대가 탐석지로 변하곤 했다.

그러한 이 시인이지만, 즐겨서 곧잘 나드신 길은 남한강을 낀 여러 모롱이들이었다. 충주 근변을 샅샅이 뒤지면서 내왕하기도 했으나, 댐 완공 이전의 일이었고, 지금껏 한결같이 밟으신 길은 양평·여주 일대였다.

마장동 시외버스 정류장을 떠나 산자수명하기로 이름나 있는 덕소·팔당 유원지를 정취감 어린 눈으로 지나가고 보면, 북한강·남한강이 부지런히 흘러와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지점인 합수 지점을 거치게 되어 있다. 이른바 양수리이다. 애석가(愛石家)들의 눈빛 또한 이 부근을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달라지게 된다. 이를테면 자연의 힘으로 순수 무구하게 다스려진 일품 명석, 그 지고한 일대 천연 조각품을 이번에야말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방금 막 수석 맛들인 신참일수록 더하기 마련이다. 전 시인은 그런 풋내기를 여럿 데리고 다니면서 돌을 선택하는 법과 애석의 차원이 어떤 것임을 열심히 가르치곤 했다. 나도 그 중의 한 풋내기였다. 물론 1970년대 중반 무렵의 얘기다.

얘기가 잠시 옆으로 흘렀지만, 양수리를 지나면 강 있는 쪽 어디에나 돌밭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전 시인을 모시고 다닌 곳을 대충 종잡아 보면 다음과 같을 일이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일대(신원리·국수리·운심리 강변 지역).

·양평군 강상면 일대(병산리·교평리 연접 지대).

·양평군 개군면 강변 전역.

·여주군 금사면 강변 일대(전북리·금산리 연접 지대).

·여주군 흥천면 일대(대리·상백리 강변 연접 지대).

·여주군 대신면 일대(보통리·당산리 연접 지대).

·여주읍 이호리·단현리 부근, 특히 우마니 나루와 부라우 나루 일대.

·여주군 강천면 강천리 강변 전역.

우리가 이런 지역을 주로 누비면서 전 시인의 애석관을 화행(話行) 이론, 특히 언향적 행위(言響的 行爲, Perlocutionary Act) 같은 시론상의 방법론과 다름없을 그만한 전달력으로 익히는 한편, 때로는 전 시인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하면서 별명을 지어 부르고는 낄낄거리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묵묵묵(默默默)」과「묵묵자(默默子)」가 주된 별명이었다. 언제나 말이 없으신 분이므로 그렇게들 불렀던 것이다.

강에서 건진 돌을 예술성에다 올려 한 차원씩 더 높여온 시인 전봉건, 한 때는 설날도 돌밭에서 맞았었던 애석의 시인 전봉건, 그런 이 시인은 운동선수가 끊임없는 트레이닝의 나날을 쌓아나가듯이, 그처럼 돌 망우리를 넘어 양평 가고 여주 가는 강변이라면, 어느 곳이든지 다 쉬어가기 좋을 뿐 아니라 놀기 좋은 곳뿐이다. 그 즐비한 비단 같은 곳곳을 전 시인과 우리가 함께 오갔던 것이다. 마음에 쌓인 묵은 때를 씻으면서, 그리고 마음에 닿는 돌도 얻으면서, 그렇게 오래 오간 것이다.

배낭을 지고 다녔다. 아니 그것이 바로 전봉건 시인의 몸을 건강 쪽으로 이끄는 운동이었고, 1주일 동안 마음에 쌓인 묵은 때를 말끔히 씻는 마음의 빨래였던 것이다.

전 시인이 돌밭 길을 오가게 된 까닭은 당뇨 때문이었다. 30대 중반부터 고생하게 되었고, 악전 고투 10년을 보내다가 적당한 운동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게 바로 돌밭 나들이 길이었다.

처음 돌밭에 나섰을 때는 자갈밭을 단 10미터도 걸을 수 없었단다. 집에 돌아오면 며칠씩 고열로 앓아 누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살길은 이것뿐이라고 믿었고, 또한 돌에 대한 매력을 이미 확인한 후라 다음 일요일이면 또 나갔다.

1년쯤 지나면서 생활리듬으로써 자리가 잡혔고, 바가지 만한 돌멩이 두세 개를 지고 십리는 갈 수 있을 만큼의 건강을 갖게 됐다.

자갈밭을 걷고 허리를 굽히는 가운데 건강은 한 치씩 가까워졌으며, 더욱이 가는 곳에 강을 낀 공기 좋은 곳이어서 더욱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 글은 전 시인 56세 때에「중앙일보」가「나의 건강 비법」난에다 취재하여 실은 전 시인의 술회 일부이다. 이런 과정을 밟은 전 시인과 우리는 더러 박두진·김광림·김광협·박희선·장순하 시인 등을 돌밭에서 우연하게 만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풍광 명미한 강 마을의 주막 평상에 둘러앉아 민물고기 매운탕에 묵·두부 안주를 곁들여 놓고 막걸리를 꿀맛으로 즐기기도 했다. 어떤 때엔 이름 모를 마을에 들어 민박을 했고, 또 어떤 때엔 여주 신륵사 근처에서 자고 오기도 했고, 영릉 참배 때에는 사뭇 숙연할 뿐이었다. 현대인이 망중한으로 잠시 가서 지녀볼 수 있는 강호지락(江湖之樂)이 바로 이런 재미 아닐는지.




호남가단의 빛저운 나들이길

- 고산 윤선도 코스




이병주 / 국문학자, 동국대 교수

누가 뭐래도 문예라면 역시 호남이다. 거기에는 억세지 않은 산이 아름답고, 느긋한 강물이 감돌아 흐르고, 그런가 하면 새파란 바다는 시문과 예술이 절로 나래를 펴게 한다. 따라서 문화관광이라면 아무래도 호남이 윗길이다.

더욱이 윤선도 코스는 호남가단의 쌍벽이어서 한결 빛저운 나들이길이다. 광주에서 내려 우선 광주박물관에서 신안 앞 바다에서 건져낸 도자기로 세파로 찌든 눈을 씻고, 이어 호남가단의 주류를 이룬 담양의 면앙정, 그리고 송강정과 식영정의 주변을 비롯하여 서하당, 게다가 김인후와 양산보 사돈간의 도타운 사연이 깃들인 소쇄원 등을 둘러 시와 노래가 이루어진 원류를 더듬는 과정이 빌미를 다잡기에 종요롭다.

윤고산 고택 : 광주에서 해남행 직행버스를 타고 해남에서 다시 대흥사행 버스를 타고 연동 윤고산 고택 입구에서 내리면 왼편 산자락에 고가가 보인다. 고산 윤선도라면 노래로 일인자인 송강 정철과 맞수다. 정철이 즉흥으로 노래를 불러제낀 대손이라면 윤선도는 흥을 일궈 곰곰 반죽해서 수놓는 다사한 솜씨다. 워낙 효종의 스승에다 국부(國富)여서 문학은 물론 음악과 무용에까지 정통한 대가다. 그 고택을 둘러보면 그 산세와 지리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지금은 그 종손(윤형식)에 의해 고스란히 간수되어 해묵은 녹우당과 함께 세전의 유물이 새로 지은 아담한 유물전시관에 진열돼 있다. 앞뜰에 새겨진「어부사시사」의 첫 장이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함께 고산가의 멋을 과하며 돌아서는 발목을 잡는다. 그 집안의 그 자손이요 그 자손의 그 꾸밈새다. 여기 유명한「오우가」등이 지어졌고, 지금도 그 원본은 물론 윤두서를 비롯한 명작을 직접 볼 수 있다.

대흥사 : 고선고택에서 나와 내친 걸음이니 호남의 대찰 대흥사를 참방치 않을 수 없다. 물론 일정이 느긋하면 큰길에서 비포장 소로로 걸어 10킬로미터를 들어가면 윤선도가 자주 노닌 금쇄동이 있고, 거기에 그의 산소도 있다.

버스로 대흥사 주차장에 내려 걷노라면 백년 묵은 승나무 숲을 지나면 왼편에 법당이 우람하고 길가에 부도와 비가 즐비하다. 대흥사는 임진란의 승병장 서산과 사명대사의 사당인 표충사는 물론 천불전을 둘러보고 차로 이름난 조선후기의 시승 초의의 일지암에 오르면 다소 가파롭긴 해도 굽어보는 경관은 비록 대둔산엔 못 미쳐도 실로 가관이다.

여기에서 내려와 다시 직행버스로 강진으로 돌아서 정약용의 다산초당과 영랑고택과 도요지를 들르면야 안성맞춤이지만, 바쁘면 그냥 완도로 달려 대교를 건너면 푸른 바다가 하얀 파도를 앞세워 반색을 한다. 이왕이면 거기서 파도로 갈 닦여 반들반들한 새까만 바둑돌, 그것도 주먹만한 것이 거의 1킬로미터에 깔려 있는 정도의 장관을 거치면 그야말로 관광이다.

보길도 : 완도항에서 정기쾌속선을 타고 1시간 남짓 해맑은 청정해역을 가면 노화도에 닿고 맞은편이 보길도다. 여기가 윤선도의 대작「어부사시가」가 지어진 유서 깊은 섬이다. 일찍이 병자호란을 맞은 윤선도가 의병을 거느리고 뱃길로 올라갔다가 산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탐라(제주)로 피하다 풍랑을 만나 내려서 개척한 윤선도의 은거처다. 지금은 정자는 없고 주초만 남은 세연정이지만 예전에는 호화판 놀이마당을 벌였던 세연지가 비자숲에 감싸여 맑은 연못물에 어리 비치고 있다. 거기서 마을로 오르면 산기슭이 부용동이고 윤선도가 풍악을 잡히고, 한편 독서와 탐금하던 낙서재가 있다.

예송리 : 보길도는 들어가면 산마을이다. 일주하는 버스도 있고 택시도 있으니 말이다. 산길을 휘돌아 마루에 오르면 크고 작은 섬이 안개 속에 아른하고 양식장의 하얀 스티로폴의 뜨게가 백조같이 아롱거려 창파와 손짓을 한다. 예송리에 다다르면 정녕 자연의 신비가 시상을 절로 일깨운다. 검고 부연 바둑돌, 그것도 새알만큼한 돌무적이 2킬로미터에 걸쳐 깔려 있다. 게다가 갯가를 둘러선 검푸른 해송에 부딪치는 바람소리는, 무심한 파도를 하놀이며 유심한 붓을 설레게 한다. 진작 윤선도가 아니라도 멋을 아는 이는 누구도 반하지 않을 장비가 없는 절경이다. 그 돌로 수제비를 뜨면 아시의 추억이 되살아나 숫제 발을 묶는다.




선운사 동백과 도솔암의 난

- 고창의 춘란을 찾아




홍해리 / 시인

난초는 풀이다. 산야에 자생하는 야생초를 사람들이 가까이 옮겨 놓고 인격과 의미를 부여해 왔기 때문에 사군자의 하나인 난이 된 것이다.

난과 식물은 식물학상 단자엽 식물 중에서 가장 진화된 고등식물로 전세계에 3만여 종이 있다. 난꽃은 그 자체가 사랑의 형상이며 꽃말은「미인」이다. 난을 이야기할 때 동양란이다 서양란이다 하는 것은 식물학상의 분류가 아니고 관습상 편리하게 불러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란이란 한국·일본·중국에 자생하는 사철 푸른 잎의 심비디움 계통의 난을 칭하는 말로 쓰여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걸쳐 90여 종의 난이 자생하고 있다. 봄이 오는 것을 알려주는 보춘화, 즉 춘란은 서해안의 백령도를 북방한계선으로 하여 충남의 태안반도로부터 전남북과 경남북의 해안 도서지방으로 이어져 동해안의 영일만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다.

자생지에서는 대개 3월 중순부터 5월초까지 수수한 이파리 사이에 콩나물을 닮은 꽃대를 뽑아올려 수줍게 꽃을 피워 낸다.

우리 선조들이 난을 가까이한 역사를 살펴보면 서민들이야 먹고사는 일에 쫓겨 여유를 가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사대부 집안의 선비, 시인 묵객들이 난을 시문이나 묵화로 남겨놓은 것을 보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멀리는 신라 말기 최치원의「유감」이란 시에 난이 등장하고, 고려시대에는 이규보, 정몽주, 이인로, 정도전 등의 문집에 자주 나타나 있다. 조선 세종 때 강희안이 지은「양화소록」에 와서야 우리 자생 춘란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추사나 흥선대원군의 난화가 유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현대에 와서는 가람, 석정, 미당, 목월, 혜산 시인들이 난을 읊은 작품이 많으며 최근에는 젊은 시인들도 난을 가까이하며 시로 엮어 놓고 있다.

우리에게는 난 문화가 아직 정립되지 못한 형편이다. 앞으로 난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하는 한편 문화적인 면에까지 확대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난을 찾아가면서 관광도 할 수 있는 코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고창 선운사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있는 고찰인데 정주나 고창에서 버스로 들어가면 된다. 정주나 고창의 어느 산에 올라도 난은 지천으로 널려 있으나 기왕이면 선운사로 가서 관광까지 겸하는 것이 좋다. 선운사 입구 오른쪽 밭에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있고 절에 들어서면 고찰의 냄새가 물씬나고 절 뒤의 동백나무숲은 기름이 잘잘 흐른다. 도솔암으로 가는 길을 따라 오르다가 오른쪽 계곡으로 난 길을 타고 동남향의 소나무숲의 산을 뒤지던가, 도솔암 뒷산엘 오르면 무더기로 모여 있는 춘란을 만나게 된다. 집에 모셔다 길러볼 만한 것을 만나는 인연이 닿으면 몇 포기 캐서 신문지에 싼 다음 뿌리가 꺾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가지고 오면 된다.

하산 길에 절 입구에 있는 노천 음식점에서 도토리묵과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어도 좋고, 숙대 국문과 출신의 박숙희 여사가 경영하는「동백장」에서 살살 녹는 풍천 장어 구이로 영양 보충을 하고 돌아오면 다시 가고 싶은 멋지고 추억에 남을 여행이 될 것이다.




축제와 난장이 어울리는 한판

- 강릉 단오제를 찾아




정병호 / 중앙대 교수

강릉은 고려시대에 대도호부가 있어 위로는 원산에서 곁으로는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다스리던 곳이다. 푸른 바다에 접해 있어 앞으로는 굽이마다 이름 있는 관동의 승지가 자리잡고 있고, 뒤로는 태백의 준령들이 병풍을 두른 듯하여 옛 시인들은 관동 아홉 고을에서 강릉이 으뜸이라 했다. 강릉은 율곡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한 선비의 고장인 동시에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사회에서 싹튼 제천의식이 오늘의 축제로까지 발전한 이른바「단오제」가 베풀어진 고장이기도 하다.

강릉의 동북지구는 강릉다운 경관과 사적이 모인 지역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학자로서 퇴계 선생과 함께 손꼽히는 율곡 선생이 태어난 오죽헌이 있는데 이 오죽헌은 또한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의 사표가 되는 사임당 신씨가 태어난 친정집으로 옛날 살던 집과 몽룡실이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경포대를 향해 가는 도중에 앞뜰에는 연못을 파 정자를 곁들인 99칸의 살림집인 선교장과 조선 중기의 별당건물인 해운정이 있으며, 그 앞으로는 거울 같은 경포호와 경포대가 울창한 송림에 싸여 있다. 이렇듯 이 고장에는 문화재가 즐비하여 지정문화재만 55개소나 된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경포해수욕장을 찾아오지만 그보다도 5월 단오제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옛날부터 이어온 축제의 하나로서 현재까지 제대로 전승되고 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강릉단오제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예로부터 관민이 한뜻이 되어 대관령산신과 대관령국사성황을 치제위무(致祭慰撫)하면서 향토의 안녕과 풍년 풍어를 기원하는 한편 농악과 그네 그리고 씨름 등 대대적인 민속놀이를 벌여 한(恨)과 고통을 풀고 나아가서는 애향심과 협동적 향토혼을 다져온 커다란 잔치이다.

양반사회의 유교식 제례와 토속신앙에서 기원하는 무격들의 굿, 그리고 관의 동참을 상징하는 관노가면회 등이 지위의 귀천을 초월하여 한데 어울리게 하며 남성황과 여성황이 일 년에 한 번 결합하는 성(性)신항의 제의도 베풀어진다.

강릉단오제는 예비제와 본제로 나뉘어 진행된다. 보통 예비제는 5월 하순에 대관령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어서 성황당에서 제를 지낸 다음 강릉시 홍제동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에 와서 남녀성황을 모시는 봉안제(奉安祭)를 지낸다. 본제는 6월 중순경 5일간에 걸쳐서 베풀어지는데 먼저 국사여성황당에서 영신제(迎神祭)를 지내고 이어서 등불행렬, 남대천에서 무당들의 굿, 관노가면회, 농악, 씨름, 그네뛰기, 민요와 시조경창대회 그리고 궁도대회가 열린다.

그러나 강릉단오제는 이러한 행사 외에도 난장판이 볼 만하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남대천 다리 밑에 있는 축제장으로 모여든다. 축제장에는 장사꾼과 상품들, 음식점들, 포장극장이나 씨름판, 굿판, 농악판에서 들리는 스피커 소리와 함성소리가 요란하다. 이때가 되면 강릉은 시민들 외에도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상민, 연예인, 구경꾼들로 붐비며 특히 남대천 백사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들어 난장을 이루므로 판 문화의 특징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불멸의 대작 낳은 당진의「필경사」

- 심훈의「상록수」코스




이근배 / 시인

산과 물은 자연 그대로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역사와 문화가 깃들여 있을 때 향기와 의미가 천 배의 값을 내뿜게 된다.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혼과 말과 글마저 송두리째 빼앗겼을 때 붓으로 횃불을 삼아 나라를 구하기에 온몸을 불태운 분이 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 끊치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심훈「그날이 오면」에서

이처럼 처절하고 통렬하게 조국 해방을 희구하고 염원한 시가 있었던가. 많은 시인들이 남긴 항일 민족시 가운데에서도 이 시는 단연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심훈은 시보다도 그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상록수」가 불멸의 민족문학으로 그 이름처럼 시대가 바뀌어도 푸르름이 가시지 않고 잎과 줄기를 더해 간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창간 15주년 장편소설 현상모집에서 당선되어 신문에 연재된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어, 당시 일제의 사슬에 묶인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과 농촌부흥운동을 함께 불지른 작품이다.

이미 1924년「미인의 한」을 동아일보에 연재를 했던 기성작가 심훈은 장편소설「동방의 애인」,「불사조」,「영원의 미소」,「직녀성」등을 발표 10년의 작가생활을 했음에도 1934년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필경사」(筆耕舍)를 짓는다.

「필경사」는 붓으로 밭을 간다는 옛말을 따서 붙인 이름 그대로 집필을 위해서 따로 지은 집이고 그 첫째 번 목표 작품이 곧「상록수」였다. 10년 경력의 기성작가가 다시 현상모집에 응모한다는 정신도 높이 사줄 만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한 편의 소설을 위해서 한 채 집을 새로 짓는다는 그 결의는 참으로 본받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당진행 관광 버스를 타고 2시간쯤 가면 당진 읍내가 나온다. 나지막한 남산 위에 하늘을 받치고「상록탑」이 영원한 민족의 시「그날이오면」을 가슴에 새기로 이 땅의 상록수 정신, 민족 정신의 푯대로 서 있다.

읍내에서 10킬로 남짓을 가면 심훈의 생가가 있고 생가에서 5백 미터쯤 거리에, 두어 그루 상록수를 마당에 세운「필경사」가 빈집인 채로 뜨거웠던「상록수」집필의 그 날을 말없이 새기고 있다.

심훈의 생가에는 아직도 심훈의 큰조카 심재영(沈載英 : 76세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의 모델)씨가 생존하고 있으며, 심훈의 유고 유품 등과 함께「상록수」집필에 얽힌 숨은 일화 등을 채록할 수 있다.

아산만을 낀 한진 포구가 눈앞에 펼쳐 보이는 갯가마을의「필경사」는 우리 근대문학사에도 한 편의 작품을 위해 지어진 유일한 집이고 문학산실로서 보존되어 있는 예도 둘을 찾아볼 수 없다.

당진은 성인 김대건 신부의 성지가 있고 옛날 당나라와 문물을 교역하던 국제항으로서의「영랑사」,「영탑사」등 고찰과 찬란한 문화유적들이 한층 문학기행의 정서를 살찌우게 하는 코스이다.




성불사 뜰의 보리수를 그리며…

-「성불사의 밤」의 고향




김원구 / 음악평론가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라고 시작되는 홍난파의 유명한 가곡이 태어난 성불사라는 절은 황해도의 명산인 정방산에 자리잡고 있는데 명찰로 알려져 있다. 이 절을 작곡가 자신이 보고 그린 것은 아니겠지만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이 몸소 이 절에 와서 보고 지은 시조에 붙인 가곡인 만큼 매우 실감을 자아낸다.

성불사는 우리나라에 서너 곳이 있다고 하지만 홍난파의 가곡인 이「성불사의 밤」이 모델이 된 이 절은 아마도 가장 클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불상들도 매우 다양하며 수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절은 바로 필자의 고향인 봉산군 사인면 월산리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져 있어서 어릴 때부터 여러 번 찾은 곳인데 고향을 떠난 지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생생하게 머리 속에 남아 있다.

성불사는 부산에서 신의주로 이어지는 철도인 경의선을 경계로 하여 필자의 고향인 봉산군의 맞은편인 황주군에 있는데 이 절이 있는 정방산은 필자가 어릴 적엔 호랑이가 나온다던 험준한 산이어서 등산객이 많이 오르내렸다. 이 산기슭의 고적인 성곽도 유명한 데다가 동굴처럼 생긴 큰 악수굴이 있어서 봄에서 가을까지 숱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즐겼다.

진달래가 유명한 우리나라 산으로는 김소월의 시「진달래」에 나오는 약산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성불사가 있는 정방산에 피는 진달래가 꽃망울도 크거니와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 한다. 이 산엔 진달래가 어찌나 많은지 봄이 오면 그 큰 산 전체가 분홍색으로 물들 뿐 아니라 나무꾼이며 소풍 객들이 해마다 꽃가지를 꺾어가건만 그래도 줄어 보이지 않을 만큼 온통 진달래꽃으로 뒤덮이곤 했다. 성불사를 노래한 시조시인 노산이 어째서 정방산의 진달래를 문학작품으로 남기지 않았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

성불사엔 꽤 큰 보리수나무가 뜰 한복판에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가 20대였던 광복 후에는 성불사에 가보지 못했는데 지금도 싱싱하게 살아 있는지 모르지만 슈베르트의 가곡「보리수」를 어쩌다 들을 때엔 불교의 상징인 성불사 뜰의 그 보리수가 그려지곤 한다. 북한이 이 같은 명찰을 잘 보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필자가 유년기와 소년기에 자주 찾았을 때엔 절이 고색 창연했고, 특히 두 채의 절 안에 있는 오만가지 불상들은 오색찬란했으며, 특히 황금빛 불상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성불사 처마에 매달린 풍경은 숲 속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려 그윽한 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지없이 평화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중들이 연방 두드리는 목탁소리와 함께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는데 두 타악기, 즉 쇠붙이로 된 풍경과 나무로 된 목탁의 두 소리는 단조로우면서도 기막힌 조화를 이루어 이 성불사의 분위기를 더욱 신성하게 했었다.




환상적인 문화의 고장

-호국 문화유적의 보고-강화




이재인 / 소설가

「힘을 동반하지 못한 문화는 당장 내일이라도 사멸한다」고 처칠은 말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강화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문화는 힘과 슬기와 끈기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힘과 슬기와 끈기의 문화를 보다 많이 알리고, 보여주면서 인식시켜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의 헌신적인 앞장이나 홍보로써 가능해지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강화는 문화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유적지이며,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로도 권장할 만한 곳이다.

김포공항 입구 공항동 네거리에서 강화읍까지는 약 40킬로미터의 거리로 공항 입구를 정면으로 보고 우회전을 하여 주산성 입구→마송리→강화대교를 지나는 것이 정석이다.

전등사는 강화읍 초입 왼쪽에 위치한 우체국을 이정표로 3백 미터쯤 가다 왼쪽의 좁은 도로로 진입한다. 이 삼거리에서 1킬로미터쯤 가면 오른쪽에는 길상면 진강산의 야트막한 분지에「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53권을 쓴 이규보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일반 관광객에게 혹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있어 이규보의 묘소는 그가 세계적 문인으로 추앙 받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가 일생동안 쓴 시가 7천에서 8천 수에 이른다. 또한 최충헌의 군문(軍門)에서 문인의 기상을 높였다. 그는 변혁기를 맞아 무(武) 밑에서 이사(滯使)당하고 유린당하여도 끝끝내 문의 힘을 믿는 평화주의자였으며 문장경국대업(文章經國大業)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 문장경국의 대업을 믿고 실천했다. 몽고군 몇 만의 대군을 문사(文辭) 한 장으로 물러가게 한 바 있다. 강화 천도 후에 정직한 관리로, 청빈한 학자, 문인으로서 객사 한 간에 방을 얻어 사명을 맡아 문인으로 영광된 자리를 지켰다.

이분의 묘소 관광 후에는 다시 내린 장소에서 출발, 1킬로미터쯤 가면 찬우물 고개, 거기에서 우측 길로 가면 외포리, 왼쪽 길로 택해서 가면 10킬로미터쯤에 傳燈寺가 있다.

이 대웅전은 팔작(八作) 지붕으로 된 건물로 광해군 13년에(1621) 건립되었다. 현재 정면 삼 간은 기둥 사이를 각각 동일한 길이로 분할하고 세 자씩은 분합빗살문을 달고 있다. 또한 좌우측면은 벽을 치고 있으나 앞 한 간만은 외짝으로 된 출입문이 있다. 기둥은 굵고 배흘림을 나타냈으며, 모서리 기둥만은 다른 기둥들보다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게 했다. 또한 창방(昌枋) 뿌리에 연봉우리를 새기고 특히 귀 기둥 제공(諸噶) 위에 여인나상이 네 귀에 새겨져 있다. 대웅전에 나상이 새겨진 것은 많은 관광객들에게 우리 문화의 코믹한 점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사고(史庫) 터가 있고 1866년 병인양요에 갑곶진에 상륙한 프랑스 군을 동서북문에서 대패시킨 곳이다. 이 정족산성 내에는 그때의 대장 양헌수(梁憲洙) 승전비가 서 있다. 정부는 1976년 삼랑성 남문을 중수, 문루를 다시 건립했다. 한번 가볼 만한 문화관광 코스이다.




모화의 애기소, 목월의 산천

-경주의 문학공간




김선학 / 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던 버스가 경주로 들어서기 바로 전,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능선은 완만하지만 그윽한 산자락과 마주하게 된다. 삼국통일의 주역이던 김유신의 영령이 잠들고 있는 선도산(仙桃山)이다. 장군이 누워 계시는 이쪽 기슭의 건너편 산자락이 끝날 무렵쯤 경주 시가지 동남쪽을 바삐 돌아나가던 형산강이 잠깐 물줄기를 쉬고 있는 듯한 곳이 있다. 애기소(沼)다.

경주 역에서 포항으로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왼켠으로 울창한 숲과 만날 수 있다. 이 숲이 황성 공원인데 과수원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봄날 아지랑이가 꿈처럼 아득히 피어오르고, 사과나무와 배나무에 화사한 꽃망울이 매달리면 건너편 선도산 줄기 아래의 애기소에는 떠가는 구름이 둥실 박혀 있기도 하다.

애기소는 동리의 소설「무녀도」의 고향이다. 무당 모화는 굿판을 벌이고 애기소의 물 속으로 자꾸 들어간다. 하나뿐인 아들이 야소교(기독교)의 귀신에 덮씌웠다고 생각한 모화는 어쨌든 마귀로부터 아들을 구출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면서 깊은 소의 물 속에 잠기고 만다. 밀어닥치는 외래문화가 고유한 토착문화와 관습을 잠식하는 과정을 동리는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지만 토착적인 것이 새로운 것에 의해 정복되는 과정을「무녀도」는 한국적인 무속의 전형에 맞춰두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형산강 물줄기가 잠깐 숨을 돌리는 경주의 애기소 주변을 통해 천년 권세가 허망하게 주저앉아 버린 신라의 옛날과 외세에 끝없이 농락 당한 민족의 운명이 함께 생각되어 가슴에 무거운 짐 같은 것을 간직하게도 된다.

달빛이 쏟아지는 불국사의 뜨락에 한 번만이라도 서 보아라. 그러면 누구나 다음의 시구들이 가진 참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흰달빛 / 紫霞門 // 달안개 / 물소리 // 大雄殿 / 큰菩薩 // 바람소리 / 솔소리 // 泛影樓 / 뜬 그림자 // 흐는히 / 젓는데 //흰달빛 / 紫霞門 // 바람소리 / 물소리

목월은 경주 근교 진천이 고향이다. 그의 시비가 앞서 말한 황성공원의 한켠에 자리하고 있듯이 목월의 시를 읽으면 그의 시심은 경주의 흙 속에 깊이 갈무리해 둔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된다.

경주 시가지를 출발, 보문단지를 벗어나서 덕동댐을 거쳐 감은사(感恩寺)가 있었던 감포로 가는 길은 심산유곡이다. 감은사지를 못 미쳐 오른쪽으로 꺾이면 기림사(妘林寺)로 가게 된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 꼬불꼬불 가다 보면 산자락에 파묻힌 마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동해 바닷가가 지척인데 이렇게 깊은 산협 촌들이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송화가루 날리는 / 외딴 봉우리 // 閏四月 해 길다 / 꾀꼬리 울면 // 산직이 외딴집 / 눈 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대이고 / 엿듣고 있다」는 목월의「윤사월」정서가 봄날 이 곳을 가다 보면 더욱 절절해진다.

머언 산 靑雲寺 /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 / 봄눈 녹으면 // 느릅나무 / 속잎 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

열두 굽이를 더 넘게 돌아 기림사 앞에 서면 그 오래 된 옛 사찰의 낡은 기와들이 문득 목월 시의 고향이 이곳임을 확인하게 한다.

문학 속의 경주 공간, 그 속에는 모화의 몸부림이 있었던 애기소나 목월의 정서가 깊이 뿌리내린 경주의 산천들이 있다. 또한 옛날 충담(忠談)과 월명(月明)과 득오(得烏)의 시심이 그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신라 천년의 경주가 오늘은 한국문학의 봉우리인 동리, 목월의 본향이 되어 자꾸 우리를 손짓하고 있다.




시인들의 자취를 따라

-시비, 혹은 문학비




김성춘 / 시인

좀 늦은 감은 있지만, 한국 문화예술진흥원의「문화 관광 시대를 연다」라는 기획은, 그 코스의 개발이 내용도 알차고,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코스로 짜여진다면,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보존풍토 조성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예술가에 대한 의식이나, 문화전통의 의식 향상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바람직한 기획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거주하는 곳이 경남이라, 우선 부산, 경남, 대구, 경북지방에 산재하고 있는 시인, 작가들의「시비(문학비)코스」를 생각해 보면,

경주(청마 시비, 박목월 노래비)

②대구(상화 시비)

③울산(서덕출 「봄편지」 노래비)

·울산의 처용가 시비(개운포 바닷가, 처용설화 발상지)

양산(이원수 「고향의 봄」 노래비)

⑤마산(이은상 「가고파」 노래비, 김수돈 시비, 이원수 노래비)

⑥부산(에덴공원의 「청마」 시비)

⑦진주(촉서루의 「논개비」)

등의 코스를 자을 수 있겠는데, 이 코스는 그 지방의 이름난 관광명소 코스도 곁들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할 것이다.

그 외 전국에 산재해 있는 작고 문인이나 현존하는 시인, 문인들의 시비들, 예를 들면 소월, 미당, 윤동주, 이육사, 이상 김동명 등의 시비 코스도 전국을 대상으로 해서 코스 개발을 해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전국의 시비 코스는 필자의 자료조사 부족으로 여의치 못함).

그 외에 필자에게 생각나는 문화관광 코스 개발로 떠오르는 것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은 코스들이다.

·예술가 생가(生家) 코스

경주지방→박목월, 김동리 생가

충무지방→청마, 윤이상(작곡가) 생가, 유치진(극작가)(해상국립공원 관광을 겸해서)

·타지방의 훌륭한 예술가·문인들의 생가 코스도 가능할 것임.

·윤선도의「보길도 코스」

·이효석의「메밀꽃 필 무렵」코스(강원도 평창 부근 일대)

·김동리의「역마」코스(하동 쌍계사와 섬진강 일대)

·「정다산」코스(茶 코스와 병행해서 실학 코스, 유배지 코스 등을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

·이병주의「지리산」코스

·오영수의「갯마을」코스(양산군 일광 부근 바닷가 지방)

그 외에도 문학외적인 것으로 사찰 순례 코스와 곁들인「불탑(혹은 범종)」코스도 생각해 봄직하다. 또한「민속마을 코스」로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과 경남 하동 부근의「신선동 마을 코스」등도 민속전통을 현대에서 살필 수 있다는 데서 코스 개발을 해봄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아리랑의 발상지




신승근 / 시인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이 노래는 정선 아리랑의 시원(始原)을 이루는 노래가사이다. 정선 아리랑은 정선 아라리로 더 많이 불리어 지며, 지금부터 600여 년 전 고려조가 망하매 송도 두문동에 은거하던 72현 가운데 7현이 정선 거칠현동(居七賢洞)으로 옮겨와 백이산(伯夷山)과 서운산(瑞雲山)을 오가며 망국(亡國)의 쓰라림을 읊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강원도 지방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은 우리나라 민요 중 가장 많은 노랫말을 지니고 있다. 채록된 가사만 700여 곡,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때마다의 인간상과 감정을 속임 없이 전래의 가락에 맞추어 부름으로써 많은 가사를 지니게 되었다.

정선은 흔히 유배지나 은둔지로 알려져 있으나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출발한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제2차 혁명으로 이어져 정선·영월·평창의 동학군(東學軍)이 정선에서 집결, 강릉을 접수하여 내정개혁을 표방했던 역사의 현장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정선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문화의 보고이며, 한국인 정서의 때묻지 않은 본거지로서 손색이 없다.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처럼 흐르는 남한강의 젖줄은 정선에서 시작된다. 정선은 문명의 이끼가 전혀 끼지 않은 고유한 비경(秘境)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정선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이다. 그러나 산과 강을 함께 느끼며 호흡하려면 버스 편을 이용해 가는 길이 훨씬 운치가 있다. 걸어서 가보면 더할 나위가 없다.

강릉에서 출발하여 삽당령을 지나 임계→여량·구절→정선에 이르는 길.

서울에서는 영동고속도로를 경유, 평창→정선으로 가는 길. 또는 하진부를 지나 숙암→나전→정선에 이르는 길. 특히 이 길은 진부→숙암간의 백리 계곡(40킬로미터)을 지나는 길로 가을의 단풍은 가히 절경이다. 백리를 줄곧 오대산에서 흘러내리는 오대천을 따라 물과 함께 흐르다 보면 정선에 닿는다. 기차로 증산 역에 도착하여 버스로 정선아리랑의 발원지인「남면 거칠현동」을 지나 서운산의 허리를 감아 돌며 바라보는 백이산의 장관도 일품이다.

정선에 닿으면 반드시 다녀가야 하는 곳은 역시 화암팔경(畵岩八景)이다.

정선군 동면에 자리잡은「정선소금강」이 그곳이다. 거북바위·용마소·종유굴·화표주·설암(일명 소금강)·몰운대·광대곡 등의 팔경이다. 광대곡에는 12용소가 있다. 모두 다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못이다. 마지막 절벽에는 40미터나 되는 폭포수가 앞을 가로막는다. 못(소) 중의 하나인 피용소는 물이 피처럼 붉어서 그렇게 부르는데 전설에 의하면 열 두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다 한 선녀가 나무꾼에게 날으는 옷을 빼앗기고 승천하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순결성을 남긴 흔적이라 한다.「선녀와 나무꾼」의 얘기도 정선에 오면 강한 리얼리티로 전이하는 것인가.

정선은「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는」곳이 아니라「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남겨 주는 곳」이다.




사당패와 한바탕 놀아볼거나

-임홍재의 유시(遺詩)를 더듬어




임덕원 / 시인

지난 3월 4일, 내 고향 경기도 안성에서는 한 이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안성 미술인회가 주최한「고 임홍재 추모, 시와 그림의 만남 전」이 그것이다.

임홍재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1975년도 신춘문예에서 서울신문과 동아일보에 각각 시와 시조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1979년, 늦은 귀가 길에서의 실족사고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향토색이 물씬한 유시집「청보리의 노래」를 남겼으며, 그의 고향 동네인 마둔 저수지변에 잠들어 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오후 4시가 되자 지금 안성군청의 지원으로 복원 중에 있다는 안성 남사당패가 농악을 울리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안성공원 안의 전시장에는 임홍재를 기리고자 출품한 이 고장 출신 선후배 시인들의 많은 시들이 선보였다. 박두진·조병화·정진규·한광구·윤범하·민성훈 등의 이름이 얼핏 눈에 띄었다. 또한 이들 말고도 고 이봉구를 비롯해 한천석·윤재천·김유신·지성찬·윤현조 등이 모두 이곳에서 배출된 문인들이다.

고향 시인들의 시를 주제로 안성 미술인회 회원들은 각기 개성이 넘치는 크고 작은 그림들을 그려 시와 함께 나란히 내걸었다. 김효기·구본용·윤병권 등이 중심이었는데, 이들은 또 일찍이 안성이 배출해낸 우뚝한 화가로서 고인이 된 박길웅·김세중 외에 이병규·박서보 등의 뒤를 좇는 후배인 셈이다.

공원 마당에서는 임홍재 추모제를 지내며 그의 시「남사당」을 낭독했다.

……아 청홍사 남사당 그리운 얼굴들/어디로 갔는가./ 내 차라리 남사당이나 될꺼나. 될꺼나.

임홍재의 그 뜨거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팔도의 떠돌이란 다 몰려와 떠돌이끼리 흘레붙고 뿌리내려서 사당패가 되었다」는 안성 남사당은 점점 더 신명을 돋우고, 옆에서는 페인트가 범벅진 광목천 위를 한 젊은 미술학도가 알몸으로 구르고 있었다.

고향의 대 선배인 조병화 시인도 많은 사람들 속에서 조금은 급하게 파이프를 빨아대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열살 남짓한 사당패 어린 소녀의 언 손을 감아쥐며 왠지 복받치는 눈물을 참아야 했다.

고향이 그리우면 고향에 가자. 삶이 시답잖고, 머리에 자꾸만 안개 같은 게 지피면 안성에 가자.

숱한 예술인의 희열과 탄식이 잦아진 곳, 연암 박지원의 소설「허생전」의 무대였던 곳,「안성맞춤」의 그 고장,「안성탕면」의 안성에 가자. 우리가 가서 다시금 생명의 혼불 다독여 고의춤에 여미고 돌아오자.

문인 몇이서, 화가 몇이서 날 잡아 약간의 경비만 추렴하면 나설 수 있다. 떠나기 일주일 전쯤에 안성 문우회(회장 : 정진규)를 통해 미리 연락해 두면 모든 준비는 현지에서 도맡는다.

척에 따라 싱싱한 딸기며, 일품의 안성포도 맛도 볼 수 있고, 지난 시절의 천렵국도 대할 수 있다.

장소로는 임홍재 시비가 있는 안성농업전문대학 그늘께도 좋고, 곳곳에 널린 개울가나 동산 등 어디든지 좋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사당패 앳된 소녀들의 모습이 화인(火印)처럼 우리의 가슴에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강남터미널에서 고속버스가 15분 간격으로 출발하고 있으며, 소요시간은 1시간.





봉미산 끝자락 사찰의 풍경소리

-원효성사의 신륵사 코스




탁계석 / 음악평론가

사찰은 으레 깊은 산 속에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신륵사는 세인의 이 같은 상식을 꾸짖기라도 하듯 잠잠히 흐르는 남한강을 굽어보며 서 있다. 사력 1천년이 넘는 이 절은 신라 때 원효성사가 창건한 것이다. 확 트인 시야로 강바람이 가슴에 와 닿고 처마 끝 풍경소리에 물살이 읊조리듯 일렁거린다.

서울에서 1시간 20분 남짓이라 짐 챙길 것도 없이 훌쩍 떠날 수 있어 출발부터가 즐거운 것이리라. 정확히는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백리 길이면 여주읍에 이르게 되고 여기서 동편으로 불과 1킬로미터인 봉미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신륵사의 맨 처음 입구가 되는 강기슭엔 영월주가 초병처럼 지키고 서 있다. 이곳엔 강가의 마암에서 용마가 날뛰어 나옹화상이 절에서 신비로운(神) 굴레(勒)를 씌웠더니 양순해졌다는 이 절의 이름과 관계되는 마음과 영월주가 있다. 강을 끼고 도보로도 십여 분이면 신륵사에 도달한다.

고려 공민왕사(共愍王師)이자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과 고려조의 대 충신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대학자 목은 이색 선생이 입적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 때에는 영릉(세종대왕의 능)의 원찰(願刹)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조선조가 망하자 일시 유흥장이 되어 오다 최근 사찰 정화운동으로 성역화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키 작은 소나무 숲을 들어서면 아홉 마리의 용과 인연이 있다는 구룡주가 있고 삼존불을 봉안하기 위한 극락보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당초문이 양각된 다층전탑.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강가 바위 위에 세운 강월헌.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보제존자 석종. 우리나라 석탑으로는 드물게 보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보물 225호의 다층석탑 외에도 무학대사와 지공화상, 나옹화상의 영정이 조사당에 모셔져 있다. 조사당 앞뜰에는 이성계가 자신을 도와 조선왕조를 개국케 한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을 추모해 심었다는 수령 6백년이나 되는 향나무가 있다. 또한 절 내에 있는 은행나무 역시 6백년을 헤아리는데 이는 나옹화상이 꽂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이 같은 거목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 사는 목숨의 짧음이 말없이 서 있는 역사성 앞에 어찌 움츠러지지 않을까 ?

원나라에 까지 성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목은 이색(1328-1396)은 대제학의 벼슬까지 올랐던 유학(儒學)의 거두로 이성계의 조선조 건국에 대항하다 유배되기도 했는데 그는 만년에 신륵사를 무척 사랑하여 여러 편의 시조도 남기고 있다. 그의 마지막 목숨이 1396년 이곳 신륵사로 오던 중 여강에 이르러 배안에서 였음을 알았을 때 흐르는 강물과 맑게 씻겨 누운 모래벌판의 조화가 대학자의 인품처럼 느껴져 오는 것이다.

산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은 여주에는 이곳 말고도 세종왕릉, 고살다지가 있고 질 좋은 도자기 생산지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돌아오는 길에 들릴 수 있는 곳으로 신륵사에서 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영릉-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 있다. 1977년 세종 전을 지어 세종대왕의 위업들을 살펴볼 수 있어 젊은 세대들의 교육장으로도 활용될 수 있으리라.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해시계와 아악을 정립했던 뜻에 맞추어 옛 악기들도 전시해 두고 있다. 험난한 코스가 전혀 없어 이곳을 찾는 층의 다양함도 특색이라 하겠다.




명사산 기슭의 작은 도시

-윤후명의「돈황의 사랑」에 나타난 소설 공간




황충상 / 작가

윤후명이 쓴 작품 가운데「돈황의 사랑」을 나는 높이 산다. 그 까닥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 우선 꼽게 되는 것은 소설 공간이 광의롭다는 점이다.

감숙성의 돈황 현성(縣城)에서 동남쪽으로 50리쯤 떨어진 곳에 모래언덕으로 이루어진 명사산(鳴沙山)이 길게 자리잡고 있다. 북경에서 4천 킬로미터, 잇수로 따져 꼭 1만리다. 적막하고 웅장한 명사산은 모래언덕이기 때문에 밟으면 모래가 허물어지나 산마루는 날카롭고 올라가면 명사산이 울리는 소리가 난다. 사막지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이 명사산 동쪽 기슭에 열 개의 왕조와 1천 년의 세월에 걸쳐 갖가지 양식으로 만들어진 석굴의 무리가 막고굴이다.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는 이 막고굴은 처음에는 서역으로부터의 영향을 짙게 나타내다가 점차로 중국화되어 당나라 때는 중국 예술의 정수로 나타난다.

이것은 소설의 공간이 되고 있는 돈황을 사전적으로 단편화한 작품의 일부 인용이다. 윤후명은 이 명사산 기슭에 있는 작은 도시 돈황을 소설 공간으로 대담하게 수용하여 시공을 초월한 의식세계와 화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 윤후명의 소설 공간, 돈황은 우리에게 어떻게 와 닿는가. 막고굴 속의 비천상이 봉덕사 종에 와 머물고,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벽에 와 날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잠재의식 내지는 무의식의 공간에 가교를 놓아준다.

명사산 사막의 길을 한 마리 사자가 화등잔 같은 눈을 껌벅이며 걷고 있다. 그 사막의 길은 일찍이 신라의 중 혜초가 불성(佛性)을 깨치고자 지났던 곳이기도 하다. 사자는 서역 구만리로부터 광화문에 이르는 길을 지금도 걷고 있다. 그리고 그 사자는 작가 윤후명이자 우리 모두일 수도 있다. 서울의 도심, 빌딩 숲의 사막을 우리가 지금 걷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 주인공의 정신 내용은 의식(意識)과 의식 안쪽에 있는 잠재의식, 그리고 가장 깊은 층인 무의식을 교직함으로써 시간 개념과 공간 개념을 폭넓게 수용한다. 이 점에 있어 장인이다 싶게 윤후명은 「돈황의 사랑」에서 시공의 개념을 초월하고 있다. 먼 역사와 오늘, 다시 말해서 돈황과 광화문까지의 아득한 거리가 한 순간의 의식 속에 놓여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윤후명의 소설 공간은 주인공의 의식을 중심으로 현실세계와 환상세계를 거의 같은 거리로 압축시킨다. 그것은 시간 개념과 공간 개념을 동일선상에 놓기 때문이다. 따라서「돈황의 사랑」에 있어 윤후명의 소설 공간은 현실과 환상세계를 자유롭게 교감시킨 그것만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심층에 다리를 놓은 셈이 되고 있다.




구석기인의 생활을 찾아

-박물관을 찾아




최복규 / 강원대 박물관장

1.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충남 공주군 장기면 석장리 구석기유적 출토 구석기·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골리 구석기유적 출토유물 전시)→2. 연세대학교 박물관(연세대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전국의 구석기 시대 유물전시)→3. 서울대학교 박물관(전곡리유적 출토유물이 전시되어 있음)→4. 경희대학교 박물관(서울 동대문구 면목동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 유물과 전곡리유적에서 발굴한 구석기들이 전시되어 있음)→5.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유적(1978년에 발견되어 1979년부터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유적임·한탄강이 흐르는 강변으로 몇 천 점의 구석기가 출토된 중요한 구석기유적으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생활하였던 자연환경과 지리적인 조건을 관찰할 수 있는 곳임)→6.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학교 박물관(강원도지역에서 출토된 각종 구석기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양구군 상무룡리 구석기유적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 유물이 수천 점 보관되어 있음)→7.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상무룡리 유적(1987년 화천댐의 파로호 물을 회수시킴으로 해서 지상에 노출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같은 해 봄부터 발굴·조사하여 수천 점의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음.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판명됨. 계속 발굴할 계획으로 있어 발굴현장을 관람할 수도 있음)→8. 충청북도 제원군 송학면 포전리 점말동굴 유적(1973∼80년 사이에 발굴되었으며 구석기시대 사람 뼈와 치레걸이·뼈연모·돌연모 등이 출토된 동굴유적임)→9. 충북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 바위그늘(rock shelter) 유적(1981년에 발굴된 유적으로 현생인류의 머리뼈가 출토되었으며 구석기도 같이 발견됨)→10. 단양군 매포읍 도담리 금굴유적(1983∼85년 발굴된 유적으로 남한강이 흐르는 강 옆에 위치한 동굴유적으로 입구가 남향으로 벌어져 있으며 지층 속에서 구석기 시대의 뼈연모와 석기가 출토됨)→11. 제원군 한수면 사기리 창내유적(1982년 발굴되었으며 후기 구석기시대의 집자리와 석기가 발견됨)→12.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유적(1980년에 발굴, 조사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남한강 옆에 위치하고 있음. 석기 제작장소가 발견되었음)→13. 충북 충주시 충북대학교 박물관(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 두루봉 동굴유적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의 동물·사람 뼈가 진열되어있으며 수양개 유적과 기타 전국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되고 있음)→14. 충남 온양시 권곡동 온양민속박물관 내 선사박물관(한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선사시대의 유물이 입체적으로 전시되고 있으며 구석기시대의 사회상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설명이 잘 되어 있음)→15. 충남 공주군 장기면 석장리유적(1964년부터 10여 년 동안 발굴된 유적으로 전·중·후기 구석기시대의 문화층이 발굴된 금강 옆의 유적으로 남한에서는 처음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적임. 후기 구석기시대의 주거지도 발굴되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밝혀내었음. 현재는 발굴한 뒤 모두 덮었으나 앞으로 계속 발굴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어 발굴현장 견학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됨)→16. 충남 공주군 반포면 마암리 마암 동굴유적(1967년 발견되었으며 구석기가 수십 점 채집되었음)→17.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 동굴유적(1973년 조사에서 홍적세 때의 동물 뼈·석기들이 발굴되어 중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임이 밝혀졌고 그때에는 제주도가 대륙에 연륙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음)




영산홍 어우러진 푸근한 전원

-신석정 코스




이병천 / 시인, 전주 문화방송 기자

가신 지 이미 1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석정 신석정(辛夕汀) 시인을 만나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은 전주로 발길을 돌리고 이내 덕진공원으로 향해야 한다.

세상에 외롭지 않은 시인이 있으랴. 봄빛만 무더기로 쏟아지는 날 외롭지 않은 시인이 있으랴. 하물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세계 속의 석정 시인은 이런 날 어떠할 것인가.

전주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덕진공원, 수천 수만의 조선 연잎이 햇빛 쪼이는 연못을 가없이 응시하며 석정 시비는 서 있다.「돌멩이의 체온도 그리운 죽음보다 외로운 오후」「삼월보다 따스한 네 손을 달라」고 노래했던 시인 석정이 그래서 이 봄날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얼마나 반기는지 알게 된다.

네 눈망울에서는/초록빛 5월 하이얀 찔레꽃 냄새가 난다/네 눈망울에서는/초롱한 별들의 이야기가 있다.

전주에서 부안까지의 직행 요금은 지금 720원. 우리나라에서는 시외버스를 10분쯤 타려면 백 원을 지불해야 하니까 역산해서 720원이라면 얼추 한 시간 남짓 소요되는 거리이다. 실제적으로 그렇다.

한 시간 남짓 동안 내내 차창밖에 펼쳐지는 드넓은 금만 평야들을 보면서 나그네는 상념에 빠져들 것이다.-한 들녘이며 산하가 어떻게 시인을 배출시키는지-.

석정은,「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의 매창이 태어난 바로 그 부안읍 동중리에서 1907년 태어났다. 그날은 마침 칠석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이름이 석정(錫正)이기도 했지만 시인은 저녁 석(夕)에 물가 정(汀)을 써서 아예 이름으로 삼아버리기도 했던 것이다.

석정의 생가는 지금도 부안읍 동중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지만 집을 들어서는 입구에는 지금도 이름처럼 고운 시누대가 바람결에 서걱이며 시인이 젊은 날 그쯤에서 수없이 읊조리곤 하던 시구들을 반복해서 들려준다. 집 뒤의 잡목 숲이며 마당가의 싸리 풀도 아마 어쩌면 지금쯤은 새싹을 내밀었을 것이다.

…어머니 !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장광 팔십 리라고 알려진 대변산의 산세는 다른 들녘과는 달리 그 산 그림자의 옷자락을 조금은 이른 초저녁에 풀어놓는다. 그런 초저녁에 석정 생가 뒤편의 언덕에 서보면 산새들의 지저귐이 유난스럽게 조급하다. 어디 산새뿐이겠는가 ! 자기의 우리로 돌아오는 양떼며 염소, 망아지, 송아지, 때까우, 집오리들도 종종걸음이다. 이런 경우에 촛불을 켜두고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불빛으로 그들을 맞아들인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이다. 그때처럼 아직은 촛불을 켜지 않는 것이 자연적이다. 이 자연이 바로 무위자연인데 석정은 스스로 말한 바 있듯이, 노장철학을 바탕으로도 연명과 타고르 그리고 도로우에게 받은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노년기의 구릉이라고 알려진 호남지역의 산세가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부안의 자연은 확실히 우리를 노자나 장자 같게 하는 무엇이 있다. 혹시 그것이 석정의 시 때문은 아닐까 ? 석정이 바로 이 땅에서 쓴 시들 때문에 우리가 지레짐작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찌됐든 부안의 자연은 무위자연이다.

석정 생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서림공원이 있고 매창의 시비가 바로 이곳에 있다. 석정은 매창을 무척이나 기리고 시공을 넘어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즈음까지 그저 이곳저곳에 흩어져 전해지던 매창의 한시들을 모아 석정은 매창 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석정은 발문에서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빛나는 명기로 부안의 매창을 부각시켰다. 그래서「북의 황진이 남의 매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매창 시비 앞에는 매창이 사랑했던 매화들이 이 고을 풍류객들의 알뜰살뜰한 배려에 의해 심어졌다. 시시껄렁한 화투짝에도 매화는 2월이라 했던 대로 음력 2월이 되면 이 앞의 매화가 참으로 곱게 핀다.

한편「매창뜸」이라는 곳에는 매창의 실제 무덤이 있으니 일찍이 부안의 두 명문인 진주 김씨와 영월 신씨 가문의 양반들이 그녀가 죽은 뒤부터 정성껏 제사를 지내왔기 때문에 보존이 가능했던 곳이다. 뭐, 황진이의 무덤에 엎드려 사대부가,「청초에 우거진 골에」어쩌고 했다가 조정으로부터 찬 서리를 맞았다는 고사를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중 영월 신씨가 바로 신석정의 가문이었던 것이다.

석정이「전원시인」이라고 불리는 만큼 부안의 사람들은 그 전원을 부안으로 여기고 또「목가시인」이라고 불리면 그 목가가 부안 지방의 노래라고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매창의 시조로 이뤄진 시조창이 낭랑히 들리는「부풍율사」를 둘러보고 개암사며 월명암, 내소사, 직소폭포 등이 있는 내변산과 채석강의 외변산을 살펴볼 수 있다면 나그네는 부안이 배출한 시인들과 부안의 풍류들을 이해할뿐더러 사랑하게 되리라.

부안과 변산반도를 일주하고 피곤한 몸으로 고향집에 돌아오듯 전주시 중노송동의 석정 옛집에 이르르면 석정이 생전에 그토록 이나 아끼었던 난초며 댓잎모란, 태산목, 오동, 매화, 동맥, 영산홍이 어우러진 전원이 푸근하게 맞아준다. 석정은 이곳에서 세 권의 후기 시집을 내기도 했다.

비오는 소리도, 눈 내리는 정경도, 또한 나뭇잎에 햇빛 쏟아지는 모습도, 어둠이 내려와 앉는 자세도 모두 석정의 시일 것 같은 이 집에는「저녁 강 언덕」인 석정의 부인,「작은 개울가」라고 이름한 박 소정(小汀) 여사가 지금도 석정의 시 혼과 유품들을 오늘에 전해주며 나직나직 흘러가고 있다.




남해 푸른 수면의 소설공간

-광양만 일대




정현기 / 연세대교수, 문학평론가

모든 사물은 언어로 불리는 순간, 관념화하면서 추상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이를테면 채만식(蔡萬植)이 그의 대표적인 장편소설「탁류」(濁流)의 배경으로 그린 군산항과 군산시가지가 아무리 완벽한 고증을 거쳐 완전한 말로 그려졌다 하더라도 그곳은 이미 관념으로서의 시가지이고 군산항구일 수밖에 없다. 현물 질서로부터 말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너머엔 읍의 전경이, 그 너머엔 남해의 푸른 수면이 보인다. 동네 나이 든 사람들이 고속도로가 현(弦)이 되어 활짝 열린 바다로 화살을 놓을 발복(發福)할 지세라 했다.

이균영(李均永)이 그의 단편「보리」에서 그려 놓은 한 주인공의 고향마을 전경이다. 작가 자신이 작품 속에 명시해 놓고 있지는 않더라도 고속도로와 남해, 그리고 읍의 모습을 위와 같이 그린 지형을 실제의 남해 어느 고을 지명에다 여럿 대입하여 설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균영의 고향은 전남 광양이다. 북쪽으로 구레에서 경남 하동을 거쳐 해발 1,218미터 되는 유명한 백운산을 끼고 돌다가 남해 광양만에 잇대어 흐르는 섬진강을 띠처럼 두른 곳, 광양만을 건너면 여수여서 또한 이름난 오동도가 있는 곳이 작가 이균영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인 중편「멀리 있는 빛」은, 또 하나의 중편인「불붙는 난간」과 단편「보리」에서 보다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광양만 일대의 아름답고 추억 어린 고향을 잃은 한 인물의 고뇌와 설움을 그린 소설이다. 경남 남해군 소재 상주 해수욕장은 꽤 널리 알려진 명소로 광양을 에워싸고 있어서 작가 이균영 소설세계의 기름진 텃밭이 될 것이고 광양만의 여수 쪽에 있는 묘도, 순천만을 낀 순천, 벌교(최근 조정래의 대하장편 소설「태백산맥」의 배경인 곳) 등이 또한 이균영의 소설 속에 아름답게 녹아 묘사되는 배경 고장이다. 그의 작품 속에 구체적으로 이 지방 이름이 명시되지는 않고 있으나 그의 작품 성격이 지극히 자전적 색채를 띤 탐색을 담고 있어서 N시 K시 등으로 작품 속에 그려지고 있는 이유를 알 만한 일이기도 하다. 광양군과 인접해 있는 승주군 경계 안에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조계산의 사찰 송광사가 있어 이 일대가 그 지역 출신 작가들의 좋은 배경이 되고 있다.「불붙는 난간」의 주인공은 그의 할아버지가 간척지 사업(광양만)으로 가산을 다 털어 넣고 망한 과거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멀리 있는 빛」은 그 주인공이 새로이 옛 가정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의지와 현실과의 피 어린 싸움을 절묘하게 그린 작품이다. 덧보태어 김승옥(金承鈺)의 대표작「무진기행(霧津紀行)」의 안개 낀 소음이 바로 광양만 일대일 개연성이 아주 높다는 사실도 밝혀둔다.




기암절벽 열두 봉우리의 꽃과 녹음

-유·불·선의 도장, 청량산을 찾아서




김시덕 / 안동대

기암절벽의 열두 봉우리로 이어진 경상북도 도립공원 청량산은 예로부터「소금강」이라 불려 왔다. 하지만 숱하게 흩어져 있는 전설과 유적, 그리고 산과 산성마을 사람들을 지켜온 산신각과 공민왕당이 있어 한층 더 발길을 끄는 곳이다.

이러한 창량산은 봉화군 북곡 광석나루에서부터 시작된다. 광석나루에서 골짜기를 따라 무실재까지 약 5킬로미터에 걸친 청량산 기슭의 산성마을은 흡사 별장을 한데 모아놓은 것 같다. 마을의 밑에서 바라보면 수십 길의 절벽 위에 지은 정자 같은 집과 산비탈의 주름살과 같은 밭이랑이 꾸밈없는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오리, 십리에 걸쳐 띄엄띄엄 늘어선 집들을 이정표 삼아 약 한 시간쯤 가면 싸리못에 도착한다. 여기서 우측으로 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축융봉의 중턱쯤에 산신을 모시는 산령각과 공민왕을 모시는 광감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산성마을 사람들은 칠월백중과 정월대보름 두 차례에 걸쳐 그들의 안녕 질서와 풍년을 기원하는 당 고사를 모신다. 또한 역사적 인물이어서 인지 득남과 자식장래 기원에 영험이 있어 음력절기에 따라 기도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산성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산신과 공민왕은 풍요다산을 비는 신이요, 흩어져 있는 취락을 하나로 통합하는 통치자요,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매는 종교적 욕구충족의 신으로서 주민들의 숭배를 독차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시고, 행여 부정을 탈까 하여 갖은 금기를 지키고 있다.

산신각의 호랑이와 광감전의 용의 상징성을 생각하며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몽진하였을 때 쌓았다는 산성에 도착한다. 이 산성을 근거로 산성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공민왕이 8년간 머물렀던「왕도」라고 믿고 있으며, 공민왕을 모시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또한 청량산을 중심으로「높은데」의 공민왕 딸당,「구테미」의 딸과 사위당,「명신산」의 부인당, 등자교의 공민왕 내외당이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여기서 반대편 봉우리를 향하면 소금강이란 말에 수긍이 간다. 뿐만 아니라 기암절벽의 열두 봉우리 꽃과 녹음, 단풍과 설경이 장관이어서 각 시대 각계각층의 명인과 성현이라면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대와 의상봉, 김생과 퇴계가 공부했다는 김생굴과 오산당, 최치원이 수도한 차원대와 고운봉, 원효대사가 물을 마시던 원효정, 그리고 원효(혹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유러보전과 웅진전이 있어 유적과 전설의 요람이란 느낌이 든다.

이렇듯 청량산은 수려한 절경의 명산이기도 하지만, 발을 딛는 곳마다 전설과 유적이 흩어져 있어 유·불·선교의 도장이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명산이기도 하여 더욱 의미가 깊다.




그리운 이름, 마음의 시

-서울지역 시비코스




함동선 / 시인, 중앙대 교수

우리 인간의 관광욕구는, 처음 단계가 풍광관광이고, 그 다음 단계가 사적관광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풍광관광으로 설악산을 친다면, 사적관광은 경주가 해당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비(詩碑)관광은, 풍광관광이라기 보다 사적관광에 해당된다. 사적관광의 대상은, 고적, 사적, 유적, 서원, 사찰, 묘역, 비, 탑 등을 들 수 있다.

시비 코스는 전국 코스가 있고, 각 지역마다 지역 코스가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서울에 한정하고자 한다.

서울 일원의 시비 코스는 소월, 조지훈 남산공원시비-지절 시인 윤동주 연희동산시비-공초 오상순 빨래골시비-육당 최남선 우이동시비-김수용 도봉동시비-박인환 망우리시비로 이어진다. 따라서 시비 코스는 남산공원 소월로 입구에서 한강을 눈 아래 굽어보고 서 있는 소월 시비에서 시작하는 것이 제격이라 여겨진다. 소월 시비는「한국신시 60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일보에서 세웠고, 시비에는 시「산유화」의 전문이 새겨져 있다. 일중(一中)의 글씨와 김정숙의 작품으로 한국시비의 대표작이라는 평가 속에 서울 시민의 정서계발과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연세대에 세워져 있는 순절시인 윤동주 시비에는「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서시」가 새겨져 있다. 그가 거닐던 연희동산에는 오늘도 가슴을 울리는 그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수유리 빨래골에 있는, 생활자체를 일상자체를 시로 생각하고 산, 공촌 오상순시비에는, 동가식서가숙한 그의 일생을 말하듯,「흐름 위에/보금자리 친/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魂」이라는 「방랑의 마음」첫머리를 새기고 있다. 살아서「담는 내 호흡이야」 하시더니, 지금도 시비 근처에는 불을 붙이자 곧 꺼진 그대로의 담배 개비, 반쯤 타다 남은 꽁초가 수북히 쌓여 있다. 우이동 종점이 있는 소원(素園, 육당이 일제말엽 칩거했던 별장)에는 육당의 시비가 있다. 비양(碑陽)에는 그의 행적기가, 비음(碑陰)에는 3·1독립운동의 독립선언서가 새겨져 있다. 이 독립선언서는 한국근대사에 자기반성을 가져다준 대문장이기도 하다. 이 소원에서 창동을 지나 도봉산에 이르면 초기에 모더니즘 운동을 시도했고, 60년대는 참여시운동의 기수가 되었던 김수영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시「풀」의 2연이 새겨져 있는데, 그 풀은 그냥 풀이 아니라, 크게는 민족의, 적게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풀이었던 것이다. 이 도봉동에서 망우묘지에 이르면, 비록 초라하지만, 세월과 함께 정신의 왕자임을 뽐내고, 시인임을 자랑하듯 북의 고향을 바라보고 있는 박인환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시「세월이 가면」의 1연이 각자 되어 있다.「검은 준열(峻列)의 시대」의 기수와 정신의 귀족임을 자랑하듯 그의 시비는 이렇게 망우리묘역을 지키고 있다.




고향의 봄, 그 동산에 올라

-「난파 노래 비」를 찾아서




나운영 / 작곡가

예나 지금이나 작품을 쓰는 사람들은 소위「영감」이라는 것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게 마련이다. 즉 작품이란 기계적으로 아무 때나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잉태한 다음 달이 차야만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영감이란 그리 쉽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니 나의 경우는-작곡을 하려면 우선 테마나 모티브가 떠올라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산책을 한다거나 여행을 해서 생활환경을 바꿔야만 영감이 떠오를 때가 많다. 그런데 말이 여행이지 직장에 매인 몸이라 아무 때나 여행을 떠날 수도 없는 일이고 보니 자연히 서울 근교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게 마련이다.

서울에서 지하철이나 시외버스를 타고 수원에 내려서 팔달 공원을 물으면 어린이들도 잘 가리켜 준다. 즉 시민회관을 끼고 조금만 걸어가면「난파 노래 비」가 보이는데 노래 비 자체는 그다지 크거나 멋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초라한 것이지만 그래도 홍난파 선생의 얼굴과「고향의 봄」의 악보가 새겨져 있어 그런 대로 그의 업적을 기리게 되는데 이 노래비가 서 있는 주위라던가 이곳까지 찾아가는 길목이 매우 아름답기만 하다.

수원이란 옛 도읍이어서 성으로 둘러싸였고 문도 많고 깨끗하여 관광할 곳이 많지만 난파 선생의「봉숭아」,「옛 동산에 올라」,「성불사의 밤」,「고향의 봄」등 주옥같은 노래를 애창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찾아가 볼 만한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난파 선생은 무덤이 없다. 1941년 여름 세상을 떠난 선생은「내가 죽거든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을 해 달라」고 유언하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덤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이 노래비를 더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빈에 가면 중앙묘지에 베토벤의 무덤 옆에 슈베르트가 묻혀 있는데 만약 홍난파 선생의 묘가 있었다면 슈베르트를 본받아 나도 그의 옆에 묻히기를 유언하고 싶은 심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건만…….

수원에는 이 밖에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 난파 선생의 옛 집터에「유허비」가 있지만 너무 멀어 잘 갈 수 가 없는데 서울 시내에도 난파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인왕산이 바라보이는-지금 중앙기상대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세모꼴의, 빨간색 벽돌의 아담한 2층 양옥이 보이는데 이 집이 바로 선생의 재혼살림을 꾸렸었고, 이곳에서 주옥같은 작품을 쓰다가 조국광복을 보지도 못한 채 43세에 요절한 곳이기도 하니 홍파동 집 주변을 맴돌며 아쉬움을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금년은 선생의 탄신 90주년이 된다. 바로 4월 10일이 탄신일 이니 새봄이 돌아올 때마다「봉숭아」노래와 함께 나의 영원한 스승 홍난파 선생의「노래 비」와「홍파동 집」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설악산의 봄과 님의 침묵

-백담 계곡과 만해 한용운




석자명 / 스님, 시인

백담사는 내설악에 위치하여 대청봉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수렴동을 지나 백담계곡까지 맑고 깨끗하게 흐르고 있다.

이곳은 또한 만해 한용운의 자취가 깃들인 곳이기도 하다.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가장 밝은 빛으로 타올랐던 만해 스님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상가로, 독립지사로, 시인으로 수많은 찬사를 한 몸에 받아오고 있다. 스님은 젊은시절 한 때 동학운동에도 가담했으나 좌절로 끝나자,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어쩌지 못한 채 백담사에 들어가 출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백담사에 들어와 한국현대시사에서 가장 훌륭한 금자탑을 이룩한 시집「님의 침묵」을 쓰게 된다. 이때가 서기 1925년이다. 스님은「님의 침묵」끝에「독자에게」라는 글을 실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 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을축 8월 29일 밤 끝.

그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와 밤을 새워가며 갈고 다듬어 시를 썼던 것이다.

설악산은 외설악, 내설악, 남설악으로 나누어지는데 외설악과 남설악은 사람이 많이 가지만 내설악은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찾는 사람이 적다. 그래서 백담계곡은 오염되지 않고 청정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들어가는 길은 속초에서 용대리를 거쳐 걸어서 30여 리를 들어가야 한다. 구비 구비 기묘한 암석으로 형상을 하고 있으며 물줄기가 큰못을 이루어 산과 어우러져 신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만해가 거닐던 숲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가야동 계곡에 오세암이 나오는데 이곳 또한 스님과의 인연이 많은 곳이어서 아직까지 스님이 손수 파놓은 작은 석간수 샘이 남아 있기도 하다. 한때 이곳에서 1백일간 기도를 하여 기도를 성취했던 곳이라고도 한다. 정상인 대청봉 아래엔 봉정암이 있어 설악산의 웅장한 모습을 관광할 수 있는 곳이며 또한 이곳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으로 많은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백담 계곡이야말로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채 말없이 법을 설하는 도량인 것이다.




무등산의 아름다움과 신비의 절

-미륵신앙의 본거지 운주사




임영숙 / 서울신문사 문화부 기자

운주사를 생각하면 내게는 무등산이 먼저 떠오른다. 성장기의 3년을 광주에서 지냈으면서도 광주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무등산의 그 특별한 의미를 참으로 느낀 것은 운주사를 찾는 길에서였기 때문이다. 전남 화문군 도암면 대초리에 있는 운주사(雲住寺)로 가자면 광주를 거쳐가게 되고 당연히 무등산을 보게 된다. 미륵신앙의 본거지를 찾는 문인·학자들의「순례」길에 한몫 끼어 운주사를 찾은 것은 지난해 1월이었고 우리 일행이 광주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점심참이었다. 시장골목의 한 식당에서 세발낙지 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서울서부터 타고 온 봉고차에 다시 올라 포만감에 나른해진 눈으로 지방도시 뒷골목의 잡답(雜沓)을 훑으며 지나다가 갑자기 무등산과 맞부딪쳤다. 산꼭대기에만 하얗게 눈을 쓰고 선 무등산이 눈을 찌르는 듯 다가온 것인데 그 순간 무등산은 내 가슴속에 각인 됐다.

그 형언할 길 없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등산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지난 넉넉함과 슬픔에서 온 것이고 그 넉넉함과 슬픔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무등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듯 싶다. 눈을 뒤집어쓴 겨울의 무등산 속에 5월의 무등산이 있음을 보고서야 나 또한 뒤늦게 그것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광주에서 운주사까지는 버스로 약1시간. 거리로는 40여 킬로미터에 불과하다지만 화순읍을 지나 도암면에서 국도를 버리고 포장 안 된 좁은 길을 한참 털털거리며 들어가야 했다.「중장터」란 곳에서 일반버스는 멈추고 운주사를 찾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사찰경내까지 걸어야 하는데 우리는 무례하게 봉고차를 대웅전 코밑까지 몰았다.

가정집 만한 크기의 낡고 초라한 대웅전을 훑어보고 사찰 입구쪽으로 거슬러 내려가면서 우리는 이내 우리의 무례함을 후회했다. 길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돌탑과 돌부처들이 우리의 성급함을 조용히 나무랐기 때문이다.

1천 개의 돌탑과 1천 개의 돌부처가 있었다고 전해진 이곳에 현재 남아있는 돌부처는 70개, 돌탑은 18개, 절 입구에 선 몇 개의 돌부처와 돌탑을 제외하곤 산기슭, 밭 두렁, 큰 바위 밑 등에 흩어져 온전한 모습으로 서있거나 얼굴 부분이 떨어져 나간 채 넘어져 뒹굴고 있는데 여느 절에서도 볼 수 없는, 치졸하도록 소박한 모습이다.

절 입구의 어린아이 크기 만한 조그만 돌부처에서부터 시루떡을 둥글게 쌓아 올린 듯한 원형다층석탑, 석실 안에 두 개의 돌부처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속칭「굴미륵석불, 큰 바위 밑에 비를 긋듯 서 있는 가족상 같은 몇 개의 돌부처를 거쳐 절 맞은편 산꼭대기에 나란히 누워 있는 거대한 2개의 불상 앞에 이르자, 일행은 낮은 탄성 속에 잠시 말을 잃었다. 편편한 자연의 바위에 반듯이 하늘을 바라보며 누운 자세로 새겨진 이 부처는 한쪽은 크고 한쪽은 약간 작아 남녀 또는 모자 사이로 일컬어지는데 가로 세로 10미터가 넘는다.

기이하게도 이 돌부처는 머리를 낮은 쪽에 두고 있다. 어느 옛날, 현재의 운주사가 있는 산골짜기에 모여든 천민들이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세우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미륵세계가 온다고 믿고 천불천탑을 만들었으나 마지막 만든 이 부처를 일으켜 세우기 전에 약속된 기일이 지나버려 미륵세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전설을 그 모습은 안타깝게 상기시켜 준다.

어느덧 짧은 겨울해가 기울어 산골짜기엔 어스름이 깔리고 일행은 숙소가 있는 광주로 발길을 재촉했다.

무등산의 아름다움과 신비의 절 운주사의 아름다움은 결국 동질의 것이었다.




신명나는 농악관광

-명창들의 유적지를 찾아서




이보형 / 문화재 전문위원

국악에 관한 문화관광 코스를 개발할 분야가 참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들기가 어려우므로 우선 현지에서 벌어지는 공연현장을 관광하는 입장과 명인명창의 유적지를 관광하는 입장으로 나누어서 간략히 써볼까 한다.

지금 한강에는 유람선이 다닌다. 그러나 문화관광 차원에서 이 유람선 운행은 영점이다. 기하학적인 조형으로 만든 배 모양도 운치가 없고, 한강 개발한다고 시멘트 제방을 일직선으로 쌓아 놓은 것 또한 볼품이 없다. 이제라도 한강변 곳곳에 자연스런 경관을 조성하고 버들을 심고 정자를 지어 멋있는 경관을 조성한 다음 황포 돛대를 단 배를 만들어 이 코스를 운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옛날 한강변에는 시선배가 드나들었고 뱃사람들이 뱃노래를 구성지게 불러 젖혔다. 또 철마다 뱃놀이를 벌이게 되면 삼현육각잽이를 불러 풍악을 잽히고 낭랑한 가객(歌客)들의 노래 소리가 자지러졌다. 돛단배에 뱃노래와 풍악이 어우러지는 속에 한강변 경치 좋은 나루를 운행하면 좋을 것이다.

지금도 농악이 가끔 공연되지만 그것은 놀이마당이나 민속놀이 경연장에서 공연되는 것이지 현지에서 공연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현지에서 당산제 마당밟기 판굿 등 세시풍속대로 벌이는 농악을 보고 싶지만 이 소망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었다. 뜻있는 이들이 정월 대보름에 전라북도 임실군 필봉마을에서 대보름 농악을 공연하도록 하여 작년에도 농악이 공연되었지만 이것이 관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광인들도 찾기 어렵고 현지인들도 공연하고 돈만 들었으니 민망하다. 이를 문화관광으로 개발하여 관광객이나 현지인이나 서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농악관광은 필봉마을 외에도 함안농악, 김천 벗내농악, 평택농악, 강릉농악, 이리농악 등 농악이 전승되는 곳에 두루 개발해 봄직하다.

전통사회에서는 농민들이 철마다 농요를 부르며 농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농요를 부르며 농사짓는 고장은 한곳도 없다. 전라북도 익산군 삼기면 오용리에서는 지게목발노래라는 나무꾼소리가 전승되어 이것을 들고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연하여 상을 받았다. 또 이 마을에는 모내기소리, 김매기소리, 타작소리, 방아소리 등 10여 종의 농요가 전승되는데 이것을 들고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연하여 상을 받았다. 이 마을에는 농요보존회가 조직되었고 회관도 섰다. 또 보존회에서 논을 따로 마련하여 공동경작을 하는데 이 논만은 기계를 쓰지 않고 전통적 방식으로 경작하며 농요를 부른다. 옛날에 향토적인 풍물에 젖고 싶은 관광객들이 많이 참관해야할 것이나 이것이 문화관광으로 개발되어 있지 않다. 익산 삼기면 오용리 외에도 경북 예천읍 통명동, 예천군 공처리, 경남 고성읍, 전남 나주군 다시면 천용리, 강원도 명주군 학산리,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 등 농요가 전승되는 곳에는 모두 문화관광 개발에 유념해 봄직하다.

서양에서는 베토벤, 슈베르트 등 유명한 음악가들의 유적지가 관광지화되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의 명인명창의 유적지는 돌보는 이가 없어 유적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유적지가 어디인지조차 잊어버린 경우가 많다. 문화국민으로서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명인명창의 유적지는 많지만 몇 가지만 들겠다.

역대 판소리 명창 가운데 첫손을 꼽는 이가 송흥록(宋興綠)이다. 그래서 그는 가왕(歌王)으로 꼽히었다. 그는 전라북도 익산군 웅포면 웅포리에서 태어나 명창이 되었고 남원군 운봉면 화계리 비전마을에서 살다가 웅포리에 묻힌 것으로 짐작된다. 웅포리에는 그가 소리공부를 했다는 십장암이라는 바위가 있고 그의 무덤이 있었다는 대밭이 있다. 비전마을에는 그가 살았다는 터만 남아 있다.

역사에 전해지는 판소리 명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는 영조 때 태어난 권삼득(權三得)이다. 양반 가문에 태어나서 명창이 되어 여러 가지 기인다운 일을 벌인 그의 설화는 지금도 전라북도에 두루 전승되고 있다. 그의 묘가 전라북도 완주군 용지면 구억리에 있다. 구억리 산꼭대기의 권씨 문중 묘지에 있는 권삼득의 묘 앞에는 저절로 뚫어진 조그만 구멍이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이 구멍에서 권삼득 소리가 들린다 하여 소리 공부하는 이들이 밤에 몰래 와서 듣고 공부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가야금산조의 명인으로는 김창조(金昌祖)와 한숙구(韓淑求)를 손꼽을 수 있다. 김창조가 살던 곳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와 덕진면 영부리에 있다. 한숙구는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용안리에 살았는데 집터만 남아 있다.

일제 때 가야금산조의 최고 명인은 강태홍(姜太弘)이며 대금산조의 최고 명인은 박종기(朴種基)이다. 강태홍이 살던 집은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교초리 664번지에 남아 있고 그 양자가 살아 있어 약간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박종기가 살던 집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 466번지에 남아 있고 그가 어려서 날마다 젓대를 불며 솜씨를 다듬었다는 후박나무는 지금도 하늘을 찌를 듯이 청청히 살아 있다. 그가 젓대를 불며 산새소리를 내면 산새들이 날아들었다는 제각도 남아 있다.

조선 말기와 일제 때 최고 판소리 명창으로 치는 송만갑(宋萬甲)이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북문리에 터만 남아 있다.

그런 유적지들이 터만 남은 것은 문화유산을 돌보지 않는 후손들의 못난 소치이다. 유적지에 비만이라도 세워 다음 세대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워 주도록 문화관광화해야 할 것이다.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경기도 서해안 코스




윤후명 / 시인, 소설가

경기도 안산시는 다들 알다시피 반월공단의 배후 도시로서 새로 개발된「신도시」다. 그러므로 문화유산을 살펴본다는 측면에서는 다소 소홀한 눈길을 던지게 된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는 수인선 협궤열차를 우선 타볼 것을 권한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곳밖에 없는 협궤철도를 달리는 꼬마열차를 말한다. 철도란 레일 사이가 표준 궤간인 1.435미터를 기준으로 해서 그보다 더 넓으면 광궤라 불리고 더 좁으면 협궤라 불린다. 그러므로 수인선 협궤열차는 매우 좁아서 승객들은 양쪽에서 마주보며 앉게 되어 있다.

이 열차가 수원과 인천 송도 사이를 하루에 세 번씩 오르내리는 것이다. 겨우 객차 두세 칸만으로 하루에 세 번씩밖에 운행하지 않으므로 이 열차의 존재는 실로 미미하다. 하지만 경기도 서해안 작은 마을에서 이 열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절대적이다. 이들 협궤철도 언저리를 직접 이어주는 도로가 없기 때문에 자동차를 이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협궤열차의 운행 시각표는 수원에서는 아침 다섯 시 오십 분, 낮 한 시 삼십 분, 저녁 여섯 시 삼십 분에 떠나서 송도에 일곱 시 이십 분, 세 시, 여덟 시에 닿는다. 한 시간 반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리고 송도에서는 아침 여섯 시, 낮 열한 시, 저녁 여섯 시 사십 분 출발한다.

장난감 같은 열차에 흔들리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서해안의 황량한 개펄을 낀 독특한 풍광도 마음속에 새겨둠직하다.

이 수인선 협궤열차의 중간쯤에 안산시가 자리잡고 있다. 안산시만으로는 서울과의 교통로가 몇 갈래로 뚫려 있어서 수인선 협궤열차를 들먹일 계제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루쯤의 여행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안산시의 고잔역에 내려 우리나라의 유일한「계획도시」가 어떻게 새로운 도시 공간을 만들어 가는가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공간 속에 용신동이라는 동명이 자리잡고 있다. 용신동은 일찍이 이곳의 샘골마을에서 농촌계몽활동을 폈던 젊은 여자 최용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최용신이 누구이기에 버젓이 동네 명칭으로까지 불리어졌을까? 그녀가 바로 우리나라 농촌계몽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심훈의「상록수」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인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것이다.

주위의 땅들이 개발로 인해 온통 새로이 구획 정리가 되었음에도 그녀가 머물렀던 천곡교회는 작은 동산 위에 빨간 머리를 이고 고고하게 서 있다. 그 뜰 앞에는 류달영 박사가 짓고, 그녀의 모교인 루씨여고 동창들이 세운 까만 오석의 기념 비석이 서 있다. 규모는 작아도 옛 선각 여성의 발자취라 그것에 감동하여 쓴 소설「상록수」의 향기가 짙게 전해져 온다.

자, 그러나 여기서「문화관광 코스」를 끝내서는 안 된다. 좀 떨어진 성호동으로 가서, 우리나라 실학파의 중요한 인물인 성호 이익 선생의 묘소를 참배해야 한다. 선생의 훌륭한 저작인「성호사설」도 미리 읽었어야 하리라.

이렇게 우리는 수원 쪽에서든 인천 송도 쪽에서든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와서 두 권의 책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사통의 사리포구로 가서 갈매기를 이끌고 들어오는 작은 통통배들을 맞이하며 생선회와 매운탕을 시켜놓고 한 잔의 술로 하루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좋겠다. 전생과 금생과 내생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좋겠다.




경주 남산의 야외 박물관

-신라 천년의 유적을 찾아




문명대 / 동국대 교수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에는 무수한 유적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경주 남산은 신라를 이끈 불교의 유적들이 온 산을 뒤덮고 있는 성지(聖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절터와 불상·불탑들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이 남산이야말로 우리나라 최대의 야외박물관이자 세계적인 유적지인 셈이다. 남산을 찾아보지 않고는 우리 역사의 숨결을 맡을 수 없다는 말을 되새기면서 경주 남산으로 오른다.

남산은 크게 서남산과 동남산으로 나눌 수 있지만 궁성인 반월성에 가까운 동북쪽 기슭에서부터 불적(佛蹟)의 역사는 시작되고 있다. 동쪽으로 향해서 얕은 능선에 불곡(佛谷)이 있다. 화강암 암벽을 뚫어 감실(龕室)을 만들어 높은 돌을 새김으로써 고졸한 불상을 조성하고 있다. 인도 석굴에서부터 시작된 석굴은 서역과 중국의 돈황, 운강, 용문, 천룡산을 거치면서 특히 중국 산동의 여러 석굴을 만든 그러한 전통을 여기에 받아들여 우리나라 석굴의 시원 작품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한 능선을 지나면 탑곡(塔谷)이 나타난다. 골짜기가 유수하고 맑은 물이 풍부한 이 탑곡에는 유명한 사방불(四方佛)이 있다. 거대한 석주(石柱)의 사방에 불, 보살, 비천, 탑, 사자 등을 새긴 이 사방불 돌기둥은 신라 국력의 성장과 불교사상의 확충을 뜻하는 의미심장한 유적이다. 특히 신인사(神印寺)로 알려져 있어서 건너쪽 멀리 보이는 사천왕사(四天王寺)와 함께 삼국통일의 의지가 숨쉬고 있다. 여기서 다시 능선을 지나면 보리곡의 보리사가 나타난다. 유명한 항마촉지인 석불좌상과 탑재들 그리고 바로 이웃하여 마애불이 있다. 동남산의 골짜기마다 절터와 사지(寺址)들 불상들이 있지만 동남산의 백미는 7불암(7佛庵)이다. 본존마애불과 석주4방불(石柱四方佛) 그리고 석실형사원이 능선 단면에 자리잡고 있는 장려한 불적이며 이 정상부에는 하계를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거대한 암벽에 세련된 보살상이 절묘하게 새겨 있는 것이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서남산의 천룡사 계곡으로도 갈 수 있고, 용장사와 용장사 계곡, 삼릉계나 윤을곡으로도 내려갈 수 있는데 무척 감동적인 유적로(코스)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면 다시 동쪽으로 내려가 남산리 석탑이 있는 남산리 동네에서 남산 횡단로를 지프차나 걸어서 넘을 수 있다.

불곡쪽에서 서남산을 돌아 유적을 찾는다면 인용사지석탑(仁容寺地石塔)과 삼화령(三花嶺)을 찾아야 한다. 삼화령에는 경주박물관에 옮겨 놓은 석조미륵삼존불이 있었으며, 완전히 서남산으로 돌아가면 옛 사제사지(四祭寺址)가 있고 여기에도 석재와 탑재 불상(경주박물관)들이 흩어져 있다. 다시 돌아가면 삼랑사지, 금강사지, 창림사지 등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석탑, 당간지주들이 옛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서쪽으로 가면 포석정과 윤을곡마애불 등이 나타나며, 다시 서쪽으로 가면 약수계와 대마애불, 석불 마애불 등이 무수하다. 유명한 선방사기 삼존불을 거쳐 세 왕릉이 있는 삼능을 거슬러 올라가면 삼능계의 각종 불적들이 산재하고 있다. 입구의 관음보살상과 머리 없는 불상, 6존선각마애불, 마애대불 등 온 골짜기 가득히 불적들로 덮여 있는 것이다. 서남산 가운데 가장 유수하고 제일 많은 불적들로 가득한 곳이 용장계이며 이 가운데도 용장사지의 마애불, 탑, 미륵장육불 등이 진수이다. 그 다음 천용계의 천용사지도와 백운계의 불적들도 잊지 못할 유적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남산의 불적과 정상의 산성(山城) 그리고 남산 주위의 무수한 고분과 저명한 왕릉 및 신라사(新羅史)의 보고들이 우리의 발길을 자꾸만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