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 현장 르포

전통예술 산업의 고장

-예향 전주를 찾아서




최승범 / 전북대 교수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사는 고장이「예술의 고장」이라 불리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평소「예도 전북」,「예향 전주」의 말을 밖에 나가서 들을 때면 귀가 솔깃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도·예향이란 말이 어느 때로부터 쓰여 왔는지는 모르나, 예술의 전통이 깊은 고장, 예술을 숭상하는 고장, 그리고 예술을 가꾸기 위하여 마음 쓰는 고장이라는 뜻이 담긴 말로서, 사용하여 나쁠 것은 없는 말이려니 싶다. 이러한 세 가지 뜻으로 보면, 내가 살고 있는 고장 전북이나 전주를, 우선 자칭이든 타칭이든 간에 「예도」·「예향」이라 일컬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다. 문학·음악·미술·음악에서도 민요·판소리·농악 등 예술의 여러 분야에 걸쳐,「예도·예향」으로서의 일컬음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여러 분야에 걸쳐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게제가 아니어서, 주어진 제목인「전통예술 산업」면의 이야기로 돌리고자 한다.

내 고장의 전통예술 산업을 생각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종이와 부채다. 이른바 전주의 한지(韓紙)와 합죽선(合竹扇) 외에도 고창의 고수자기(古水瓷器), 장수의 곱돌그릇, 익산 황등의 석공예, 남원 운봉의 목기, 순창의 자수, 옥구 나포의 숫돌·돗자리, 김제의 갈퀴, 완주 비봉의 숫돌, 정주의 보리수염주·복조리·장고, 부안의 죽전(竹箭) 등 옛날로부터의 전통 있는 특산품 등을 들어 볼 수 잇다. 현재 임실에는 오동상감연죽장(烏銅象嵌煙竹匠)으로 무형문화재(제65호, 1985년 지정)인 추옥판(秋玉判)씨가 외로운 작업을 계속하고 있기도 하다.

이 중, 한지와 합죽선의 그 전통과 현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지와 합죽선의 전통과 그 현장

오늘날 종이라면 으레 양지(洋紙)를 일컫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옛날 우리나라의 종이는 조선종이로서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도 유명하였다. 조선종이를 문헌에서는 고려지·조선지·한지 등으로 일컬어 왔다.

종이의 기원은 다 알고 있는 바, 105년 중국 후한의 和帝때 蔡倫이 나무껍질·삼껍질·벳조각·고기그물 등을 재료로 만들었다는 채후지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종이 만드는 법도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라 하겠는데,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제지법은 우리나라에서 크게 발전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기록인「일본서기」에 의하면,

610년 고구려의 중인 담징(曇徵)이 법정과 함께 와서 5경·채화·공예 및 종이·먹·칠·맷돌 등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고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제지술은 일찍이 일본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뒷날엔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의 종이를 자기네들의 것보다도 귀중하게 여겼음을 본다.

당나라의 기록인「문방사고(文房肆攷)」엔,「780년부터 도중(都中)에는 누에고치와 같이 하얀 신라 종이가 나돌았다.」하였고, 송나라 황정견(黃庭堅 : 1045-1105)의 시 차운목부증고려송선(次韻穆父贈高麗松選)에도,「고려의 깨끗한 고치종이 명견지(明繭紙)와 솔부채(松扇)」를 들어 노래했다. 이수광은 그의「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의 종이를 얻고자 하는 중국사람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면지(鏡面紙)·죽엽지(竹葉紙)는 중국사람들이 무척 귀하게 여겼다. 내가 경인년(1590)에 중국 서울에 갔을 때, 예부시랑 한세능(韓世能)이 죽엽지 한 장을 보내면서 말하기를,「이것은 내가 사신으로 귀국에 갔을 때 얻은 것이오. 만일 이와 같은 종이를 가지고 왔거든 내가 얻기를 바라오.」라고 했다. 그 종이는 품질이 정결하고 조금 푸른빛이 돌아서 죽정지(竹精紙)와 같으면서도 좀 두껍다. 나는 아직 보지 못하던 종이였다

가 곧 그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제지술은 중국을 능가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지의 종류 및 주요산지

우리나라의 종이는 그 종류에 있어서도 다양하였다. 한선거사의「漢陽歌」(1844)에 보면,

지전을 둘러보니 각색 종이 다 있구나/白色壯紙 大好紙이며 雪花紙 竹淸紙며/蟬翼紙 花草紙며 개끗할사 白綿紙며/霜華紙 咨文紙며 初塗紙 上疏紙며/毛土紙와 毛綿紙 紛唐紙와/宮箋紙 詩軸紙와 각색 菱花 고울씨고.

로 여러 종이의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중, 천련지·모토지·모면지·분당지·궁전지 등은 중국산으로 수입 지다. 1931년 중앙시험소(조선총독부)가 조사한 「製紙의 표본」에 의하면 98종의 우리나라 종이를 볼 수 있다. 그 이름은 원료나 종이의 부피·길이·넓이·빛깔·다듬이질·쓰임새 및 생산지 등에 따라서 붙여진 것을 볼 수 있다. 때문에 동질이면의 것도 적지 않다.

그러한 우리나라의 종이 중, 그 생산량이나 품질에 있어 전라도의 것이 으뜸이었다. 1910년에 간행된「朝鮮産業誌」(편자 : 山口 精, 東京 寶文館)에 ,

한지의 생산지는 거의 이 나라의 남녘에 한정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전라북도는 그 산출량이 가장 많고, 경상남·북 두 도는 다음 간다. 이 3도에서 전국 생산량의 7∼8할을 생산하고 있다.

전라북도에 있어서의 연 생산량은 8천괴 (1塊는 2천 매, 약 40근)로, 그 주요산지 및 산출량은 다음과 같다.

임실, 1,840괴, 용택 690괴, 전주 496괴, 고창 460괴, 운봉 380괴, 진산 331괴, 진안 179괴 무창 120괴, 순창 108괴, 고산 98괴, 장수 70괴, 태인 63괴, 금산 40괴, 남원 17괴, 흥덕 7괴

라고 나와 있어 평야부를 제외한 거의 전도에서 종이를 만들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종이는 전주를 거쳐서 서울 및 전국의 각지로 나가게 되었고, 종이의 종류도 한지의 거의 전 종류를 생산하였다는 이야기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백지가 가장 많았고, 창호지·장지·후지(厚紙)·호척지(胡尺紙)·공물지(貢物紙)·유지(油紙) 등의 순위였다.

전북에서 종이가 가장 많이 나온 까닭은 무엇이었던가? 첫째, 전북 산야의 토질이 종이의 원재료가 되는 닥나무·고리버들나무의 성장에 적지라는 것이다. 고려시대로부터 닥나무 재배를 권장하였던 것을 문헌에서 볼 수 있다. 다음 이 지방의 깨끗한 수질이 종이를 뜨는 데 알맞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지공장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음을 본다. 세 번째로, 이러한 입지조건이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종이의 제조기술이 이 지방에서 발달하게 되었고 그 전통적인 숙련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엔 양지의 발달과 그 수요량에 비하여 한지는 사양산업이 되어 있지만, 그래도 전주에서의 한지산업은 국내에서의 사용량과 일본·자유중국 등에 수출품으로 명맥을 이어 생산되고 있음을 본다. 현재 전주 근교의 한지 생산공장으로는,

문산제지공업사, 전주시 평화동 1가 312-2

삼성특수제지, 전주시 중화산동 2481

신성제지, 전주시 평화동 1-350

전주제지공업소, 전주시 평화동 1-211

청웅제지공업(주), 전주시 동서학동 835

평화제지, 전주시 평화동 1-284

호남제지공업사, 전주시 평화동 1-199

등 7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 전주제지공업소(84-5789, 5984)의 현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공업소의 대표는 화선지 발명 특허 제 256호를 가지고 있는 송우석씨(65세)다. 송씨는 4대에 걸쳐 제지업을 잇고 있고, 현재 부자간에 공업소를 경영하고 있으니, 실로 5대에 걸친 가업이라 하겠다.

그의 증조부 송승완이 처음 풍남동 17번지에 제지공장을 차렸고, 조부 송길환은 전주우체국 앞에서「전주지물상회」를 경영하였다. 부 송기헌은 완주군 구이면 계곡리에 제지공장을 옮겨 특히 태지(苔紙)의 생산에 힘을 썼다. 그리고 태지로써 직접「태지 봉투」와「태지 두루말이(苔周紙)」를 만들어 당시 전라북도 산업장려관을 통하여 생산량의 80%를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8·15 해방과 더불어 현재의 흑석골 (평화동 1-211)로 공장을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송씨는 그 동안 30여 명의 제지공을 양성·배출하는 한편, 특히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던 화선지를 연구 개발하여 1957년엔 발명특허를 받기도 하였다.

공장이 있는 현 위치는 고덕산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맑은 계곡을 끼고 있어 한지를 만드는 데엔 천연의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든 한지는 속칭「송가 종이」로 수요가 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 생산하고 있는 한지의 종류는 몇 종이나 됩니까 ?

·필요로 하는 사람의 요청이 있으면 어떠한 한지고 다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크기나 두 께의 대소·후박이나 빛깔도 요청자의 취향에 맞추어 종이를 떠낼 수 있으니까요.

송우석씨의 이야기다. 그리고 여러 가지 종이를 꺼내어 하나 하나를 들어서 설명해 준다.

화선지만 해도 여러 종류다. 보통의 화선지 (66.7×130.3㎝), 규격은 같아도 원료에 볏집을 포함시킨 화선지, 호분을 가미한 화선지, 연분홍빛을 내는 화선지, 녹두빛의 포름한 화선지 등이 있었다. 또한 화선지이면서도 갈대를 원료로 개발하여 만들었다는 노설지(蘆雪紙)도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다.

이외에도 종이의 종류는 다양하다.

楮紙 (닥 50%·펄프 50%, 67×94cm)

型紙 (무늬를 놓아 뜨는 종이, 55×91.5cm)

典具紙 (질이 좋은 닥으로 뜬 종이, 50×66cm)

雲龍紙 (질이 좋은 닥으로 뜬 종이, 50×66cm)

皮紙 (중질의 닥으로 뜬 종이, 64×97.5cm)

薄苔紙 (닥 70%·펄프 30%, 64.7×97.5cm)

苔紙 (쑥색이 돋으며 태를 놓은 종이, 64⁓97.5cm)

眞紅紙 (닥으로 뜬 종이, 64⁓97.5cm)

眞黃紙 (닥으로 뜬 종이, 64⁓97.5cm)

色紙 (여러 빛깔이 있음, 64⁓97.5cm)

表具用色紙 (닥 70%·펄프 30%, 66⁓130.3cm)

이와 같은 한지의 한 장 한 장을 바라보자니, 그대로가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림이나 글씨를 위한 화선지도 종이 자체가 지닌 빛깔·발무늬 등이 있어, 미감이 돋았고, 은은한 쑥색이 바탕을 이룬 데가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테가 둘린 무늬는 그대로가 미술품이었다.

한지의 제작과정 및 미감

·종이가 되어 나오는 공정을 들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한지는 수공업적인 수록(手帪)제지법을 그대로 이어 지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들고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을 거쳐야 합니다.

현장을 안내하며 자세하게 들려 준 공정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원료를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한다. 원래 닥(楮)·닥풀(黃蜀蔡)·산닥나무 등이다. 닥풀에서는 점액을, 재배한 닥이나 산닥나무에서는 껍질을 취하여 사용하게 된다.

② 닥의 껍질을 한 주먹씩 묶어 말리어 흑저피(黑楮皮)를 만든다.

③ 흑저피를 10시간 정도 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칼로 외피를 벗기어 백피를 만든다.

백피를 솥에 넣어 2시간 정도 삶는다. 가성소다를 넣어 용해시킨다. 불을 끄는 시간이 석양 무렵 되게 하여 그대로 하루 밤을 재운다.

⑤ 다음날 아침에 꺼내어 티를 가려내고 물에 씻는다. 씻은 원료를 차아연소산수(次亞鉛素酸水)에 담가 표백이 되도록 하여 다시 물에 헹구어 이틀쯤 말린다.

⑥말린 원료를 고해(叩解)한다. 오늘날엔「비터(beater) 기계」를 사용하나, 옛날에는 곰방메로 찧어서 고해하였다 한다.

⑦ 고해된 지료(紙料)를 가마솥에 넣고 거기 적당량의 매염료(媒染料)·소금·소다회를 풀어서 70도로 가열한다. 이때 색지를 만들려면 목적의 색소를 지료에 부어 가며 비터 기계에 당시 넣어 뭉친 지료가 고루 풀어지게 한다.

⑧이 지료를 지조(紙槽) (옛날엔 나무통, 현재는 시멘트로 만든 통)에 넣어 적당량의 물을 붓고 휘저어서 닥풀을 섞는다. 이 물을 대로 만든 발로 떠, 앞과 옆으로 흔들어 가며 지합(紙合)시켜 판자 위에 지층(紙層)을 만든다.

⑨ 목적한 지층이 이루어지면 널찍한 돌로 눌러서 이른바「석압식(石壓式)」으로 물기를 뺀다. 지금은 압착기로 탈수시켜 바로 건조실에 넣는다.

⑩ 건조된 후, 지층을 이룰 때 한 장 한 장 사이에 놓은 실을 잡아들면 종이가 한 장씩 떨어진다. 이 종이를 다시 철판의 건조대에 부착시킨 후 빗자루로 쓸어 가며 완전히 건조시킨다. 옛날에는 벽이나 방바닥에 부착시켜 건조시켰다.

⑪ 한 장 한 장의 종이를 살펴서 티나 파지가 없는 것만을 골라내어 재단하여 200∼250매씩을 접어서 한 덩이(塊)로 완성시킨다.

이러한 긴 공정을 거쳐서 한지는 완성이 된다. 한지 한 장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태지를 만들자면 ⑧의 공정에서 지료와 닥풀을 혼합시킨 후 태를 적당히 넣고 대발로 떠서 지합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사용하는 태는 생수가 솟는 우물이나 웅덩이의 선보름(上旬)에 생긴 이끼만을 채취하여 사용해야만 태의 제 빛깔을 지닌 좋은 태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일찍이 시인 최하림은「한국의 멋」(지식산업사, 1974)에서,

우리의 가옥구조와 생활정서는 한지의 정갈한 맛을 유독 요구하고 있다. 시골이나 도시를 가리지 않고 한옥은 봄, 가을에 한지로 창을 일제히 바른다. 유난히 햇볕이 맑은 이 계절에 창을 바르고 나면 방안 분위기가 밝아올 뿐 아니라, 한지에 비쳐지는 햇볕이 잘 수련을 쌓은 승려의 깊고 은은한 눈빛처럼 사려성이 있어 보인다. 아마도 그 빛깔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리라.

고 한지 예찬을 하였다. 창호지의 미감을 잘 들어 말하였다. 7년 전엔가 읊은 바 있는 필자의「태지」송 한 편을 덧붙인다.

헹구고 다시 일은/섬섬 이끼 수를 놓은/가는 대발마다/새벽빛이 트여 들고/옛 어른/정갈한 書案 머리/먹 향기도/번져 온다.

두루마리 한 자락을/자르르 펼쳐 들면/그냥 그대로도/고운 선 무늬 이룬/우리네 옛 어른들의/마음결이/읽힌다

우리 부채의 전통

우리나라의 부채 또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최상수(崔常壽) 교수의「한국 부채의 연구」(대성문화사, 1972)에 의하면, 우리나라 부채에 관한 기록으로 최초의 것은「三國史記」에 보이는,

우리 태조(고려)를 추대하여 즉위하였다. 견훤은 이 말을 듣고 그해(918) 8월에 一吉飡閔夀을 파견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竹箭)을 보내 왔다.

는 공작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작선은 당나라로부터의 수입품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공작선은 방구부채(團扇)로 추측된다. 쥘부채(접부채·摺疊扇)인 합죽선은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수출된 것이었다. 이는 송나라 郭若虛의「圖畵見聞志」에 보이는「1076년 겨울에 고려의 사신 崔思訓이 쥘부채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나, 명나라 태종이 우리나라에서 선사한 쥘부채를 보고,「접히고 펴지는 것을 좋아하여 尙方에 명하여 이를 모방하여 만들도록 하였고, 이를 撤扇 또는 高麗扇이라 하였다.」(赤松智城·秋葉隆 :「朝鮮巫俗硏究」)는 기록으로 보아 확실하다.

우리나라 부채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여 오고 있다. 이미 위에서 그 이름을 말한 바, 방구부채와 쥘부채다. 방구부채는 깁이나 또는 종이로 둥글게 만든 부채를 말하고, 쥘부채는 접었다 폈다 하게 된 부채를 말한다.

최상수 교수의 분류에 따르면, 방구부채를 다시 세분하여,

梧葉扇·蓮葉扇·芭蕉扇·太極扇·兒扇·五色扇·까치扇·眞珠扇·孔雀扇·靑扇·紅扇·白羽扇·大圓扇·八德扇·細尾扇·尾扇·松扇의 17가지를 들었고, 쥘부채는

白扇·漆扇·油扇·服扇·僧頭扇·魚頭扇·蛇頭扇·班竹扇·外角扇·內角扇·三臺扇·二臺扇·丹木扇·彩角扇·曲頭扇·素角扇·黃邊扇·狹邊扇·有環扇·無環扇·合竹扇·短節扇·花扇·輪扇·吳骨扇·杓廷扇·춤부채(舞扇)·무당부채(巫扇) 등 28가지로 말하였다.

여기서는 이러한 부채에 대한 설명을 하나하나 곁들일 겨를이 없다. 예로부터 전라도는 부채로도 유명하였으니, 이 모든 부채도 전라도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大典會通」(1865)에 보면, 부채를 만드는 장인(扇子匠)으로 전라도에 2명, 경상도에 6명을 둔다고 하였으나, 이로부터 불과 67년 후의「朝鮮의 物産」(조선총독부, 1932)에 의하면 부채의 주산지는 전라도임을 말하고 있다.

쥘부채와 방구부채는 주로 대의 주산지인 전라남·북의 양도에서 제작되고, 전라북도의 전주 및 남원, 전라남도의 담양 및 나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다. 그 제작은 알맞은 가내공업으로서, 그 대부분이 부업으로 이루어진다.

는 기록이 곧 그것이다.

이제 쥘부채에서도 합죽선, 방구부채에서도 태극선의 제작은 오직 전주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대의 주산지를 끼고 있어서 뿐 아니라, 앞서 말한 바 전주는 한지의 고장이요, 예로부터 부채 제작의 전통이 뿌리 깊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주 부채의 기능보유자는 22가구에 40명 정도라고 한다. 그 중 전주시내에 자리하고 있는 대표적인 부채제작소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합죽선의 제작소로는,

榮進工藝社 (이기동), 전주시 인후동 1가 292

美扇工藝社 (엄주원), 전주시 인후동 1가 291-9

有林工藝社 (유춘근), 전주시 인후동 1가 286-4

德津工藝社 (노덕원), 전주시 덕진동 1가 1117-16

全州工藝社 (나태룡), 전주시 우아동 3가 556

新光工藝社 (박중양), 전주시 인후동 1가 659-126

를 들 수 있고, 태극선의 제작소로는

가내공예센터 (방춘근), 전주시 인후동 1가 332

민속공예 (조충익), 전주시 인후동 2가 246-2

전주토산품 (장상호), 전주시 인후동 1가 287-15

이화직물공예사 (이영기), 전주시 서서학동 268-2

선자공예사 (서재곤), 전주시 진북동 1165-37

한국유니온산업사 (유창해), 전주시 진북동 256-12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합죽선의 제작현장을 직접 찾아가 본 곳은 선장(扇匠) 이기동 씨(58세)의 영진공예사 (85-3773)였다.

인후동에서도 골목으로 들어가 언덕배기에 있는 초라한 집이었다. 판자 쪽에 「영진공예사」라 쓴 간판은 있었지만, 7∼8평되는 방 한 칸이 부채 만드는 방(扇房)의 전부였다. 이 방 한 칸에 네 사람이 앉아서, 이른바 합죽선 제작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씨와 이씨의 부인, 그리고 이씨의 두 아들(신립 28세, 남석 24세) 이었다. 두 아들 중 한 아들은 언어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세 사람은 묵묵히 일만은 계속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일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여남 살부터지요. 40년도 더 되나 봅니다.

이씨는 8·15 전의 어려서부터 한 마을에 사는 부채의 명수 배귀남·문준화 씨 집을 드나들며 부채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앞서 인용한 책 「조선의 물산」에서는 우리나라의 합죽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찬사였다.

조선 재래의 쥘부채는 부챗살에 제일 공을 들여서 만든다. 일본의 산품에 비하여 퍽이나 튼튼하여 쉽게 부서지지 않을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값도 싼 것이 아니다.

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와는 달리 이씨의 이야기인 즉,

일제 말기엔 사람들이 우리의 부채보다도 값이 싸고 팔랑개비처럼 가벼운 일본 부채 쪽으로 기울어져서 부채 만드는 장인들이 직업을 바꾸어야 할 형편이었지요. 그러다가 해방 후에는 형편이 좀 나아졌습니다. 일본 부채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니까요. 오늘날엔 실용성에서보다도 우리 고장 특산품으로서 선물용으로 찾는 것 같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씨는 담배도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 담배를 피운다면 부채 만드는 일엔 여간 불편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좁은 방에서 하는 작업이요, 방안에는 모두 불이 붙기 쉬운 물건들이다.

·생활은 어떠십니까?

·그저 먹고 살지요. 어려서부터 배운 것이란 이것뿐이니까, 이것으로 먹고 살아온 것입니 다. 이제는 제가 만든 합죽선을 <잘 빠진 부채>라고 사람들이 알아주고, 또 제게서 일을 배워 독립한 부채장이도 있고 보니, 살아 온 길에 후회는 없습니다. 때로는 보람 같은 것 을 느끼기도 하지요.

이씨는 자기의 제자인 노덕원 씨가 이제는 독립하여 「덕진공예사」에서 합죽선과 태극선을 만들고 있고, 또 사위인 한경치 씨가 자기에게 일을 배워 곧 독립하게 되었음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한 자루의 합죽선을 만들어 내기까지의 공정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옛날에 비한다면 많이 편해진 셈입니다. 그러나 잔손이 많이 들어가고, 서둔다고 빨리 만 들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나 하나의 일을 차근차근 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설명하였다. 옛날엔 대밭에 가서 대를 고르고, 그 대를 베어 내어 운반해 오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집으로 가져 온 대는 말린 후, 쓸 만한 길이로 끊어서, 대빛을 곱게 하기 위해서 숯불을 쐬어 가며 진을 빼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엔 죽상이 있어서 이러한 과정가지를 마친 대를 대금만 지불하면 집에까지 가져다주기 때문에 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상으로부터 구입한 토막진 대쪽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① 초지를 깎는다. 목살과 끝살을 꺾는 일이다. 목살은 대껍질만 남겨 놓고 깎아, 풀로 맞붙여 합죽을 한다. 이때의 풀은 부레풀을 사용해야 야물게 붙는다.

② 갓대를 만든다. 갓대는 대마디가 많은 것일수록 귀하게 친다. 갓대의 손잡이쯤엔 부골(附骨)을 한다. 부골의 뼈는 쇠뼈를 깎아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유나이트」라고 하는 플라스틱 종류로 된 기성품을 쓴다. 부골을 하는 데도 부레풀을 사용한다.

③ 낙죽(烙竹)을 한다. 낙죽이란 불에 달군 끝이 뾰족한 인두로 속살에 무늬를 놓는 일이다. 고르게 무늬를 놓는 일이 어렵다. 지금은 전기를 사용한 인두로 낙죽을 한다.

변을 잡는다. 직선인 갓대를 구부정하게 휘는 일이다.

⑤ 부챗살에 도배를 한다. 종이를 부챗살에 맞도록 접은 다음 살에 풀칠을 하여 그 종이를 붙인다.

⑥목살에 부골한 갓대를 대어 끈으로 동인다.

⑦ 사북을 한다. 사북이란 쥘부채의 가위다리 부분에 돌쩌귀처럼 꽂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은이나 백동으로 한 사북은 귀하다. 지금은 쇠에 금물 입힌 것을 사용한다.

⑧완제품엔 백지 두 가닥으로 두 군데를 동여서 오동나무 상자에 넣는다.

한 자루의 합죽선이 완성되기까지의 공정은 대충 이러하였다. 그러나 하나 하나의 과정엔 무척 세심한 마음씀과 손길이 가야했다. 이씨는 오동나무 상자에서 한 자루의 합죽선을 내보였다. 갓대의 마디가 23개다. 목살도 중간부분이 도도름하면서도 쪽 고르게 되어 있다. 갓대를 제외한 속살은 38개, 그러니까 40살의 합죽선이다. 낙죽은 박쥐를 놓고 그 옆에 「특」자를 넣었는데 움퍽집퍽이 없어 쪽 고르게 아름답다.

·이건 잘 빠진 물건입니다. 갓대도 맹종죽의 세 물째 난 끝죽순을 대로 키워서 잘라낸 것 입니다. 그래서 불과 25cm의 대의 길이에 마디가 23개나 있게 된 것이지요. 자, 이 손잡 이를 쥐어 보십시오. 손가락과 손바닥에 힘을 주어 보세요. 지압을 받는 느낌일 것입니다.

부채를 받아 손잡이 께를 쥐엄쥐엄 힘을 주어 쥐어 보니, 과연 지압을 받는 듯한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이모저모 바라보아도 귀품이었다. 이대로가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만한 작품이면, 시중에 내는 한 자루의 값이 얼마나 됩니까?

·그건 '大사십'이라고 하지요. 2만 5천 원에서 3만원까지 받습니다.

이곳 영진공예사 제품인 합죽선에는 5종류가 있다고 한다.

특대 40cm, 40∼50살, 35,000∼50,000원

대사십 30cm, 40살, 25,000∼30,000원

중사십 27cm, 40살, 15,000∼20,000원

소사십 25cm, 40살, 7,000∼12,000원

소삼십 20cm, 30살, 5,500∼6,000원

가격의 차이는 갓대의 마디 수나 제품의 굳고 튼튼한 정도, 보아서 아름다운 느낌 등에 따라서 매기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23마디의 「대사십」 한 자루를 이리저리 매만지며 있자, 이씨는 「그 한 자루 이곳에 오신 선물로 드리겠으니 가져가십시오」한다. 뜻밖의 호의였다.

선물로는 참으로 귀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옛 속담에도 「여름 선물은 부채요, 겨울 선물은 달력이라」는 말이 있었다. 「단오부채」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단오절에는 여염에서도 부채를 서로 선물로 교환하였다고 하거니와, 조정에서는 진상 받은 부채를 여러 벼슬아치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홍석모의「동국세시기」(서문 : 1849년)에서 「단오부채」에 관한 몇 대문을 옮겨본다.

공조에서 단오부채(端午扇)를 만들어 바친다. 그러면 임금은 재상과 시종신 그리고 각 궁에 소속된 하인들에게 나누어준다. 이 부채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대나무의 흰 살이 40·50개가 되는데, 이 흰 부채를 백첩(白貼)이라고 한다. 칠을 한 것은 칠첩(漆貼)이라 한다. 이것을 얻은 사람들은 대부분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그린다. 근대에 기생이나 무당들이 이 부채를 갖는 경우도 있다. 또 부채에 버들강아지·복사꽃·연꽃·나비·흰 붕어·해오라기 등의 그림을 즐겨 그린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사와 통제사는 단오가 되면 節扇을 올린다. 명절이 되어 상납하던 부채를 절선이라 하는데, 전례에 따라서 조정의 신하와 천지들에게 이를 나누어준다. 그리고 부채를 만든 고을의 수령도 진상하고 선사한다.

부채는 전주와 남평(남평=나주)에서 만든 것이 가장 좋다.

부채 한 자루 만드는 데에 드는 공력을 생각하면, 많은 부채의 진상에는 폐단도 따랐을 것이나, 다가오는 더위에 군신간 또는 친지간에 그 더위를 날리도록 부채를 선물하였다는 것은 아름다운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옛 분들은 멋이 있었다. 그리운 사람과의 헤어짐에도 곧잘 부채 선물을 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풍류랑 백호·임제의 시에도 기생에 부채를 선물한 뜻을 담은 한시가 있거니와, 무명씨의 시조,

부채 보낸 뜻을 나도 잠깐 생각하니/가슴에 붙는 불을 끄라고 보내도다/눈물로 못 끄는 불을 부채라서 어이 끄리.

도 부채 선물에 얽힌 노래다

그리운 사람과의 이별에 뿐 아니라, 벼슬길이나 지방 수령으로 나가는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도 부채 선물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부채의 한자인 「扇」자는 착한 「善」자와 음이 같은 것에 생각을 두어 「벼슬살이나 고을살이를 하면서 착한 일(善政)에 마음을 쓰시게」 하는 뜻을 부채 선물에 담았던 것이다. 옛 분들의 멋을 엿볼 수 있다.

합죽선은 이러한 뜻이나 그 실용성을 제쳐놓고도 언제나 바라보아 아름다운 느낌이다. 부채의 면(扇面)이 백지 그대로여도 미감이 일고, 부채의 면에 글씨나 그림이 담겼어도 미감이다. 이러한 합죽선을 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달맞이하는 마음으로/합죽선을 펼치면/부챗살에 담긴/한 쪽의 山水가/일어서/물흐름같은 이야길 안고/달처럼/떠 오네.

부채잡이 선초(扇貂)에선/고려의 소리가 일고/낙죽의 속살 새론/조선조 선비의 얼굴이 뵈네/바람도/뿌리가 있음을/합죽선은/일러주네.

이씨가 내어미는 합죽선을 나는 그냥 받아들 수가 없었다. 값을 치루재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한 자루의 부채값에 두 자루의 합죽선을 받아 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예향의 바람

위에서 산만하게나마 내 고장 전주의 전통예술 산업으로서 한지와 부채(합죽선)의 두 가지를 들어 살펴보았다. 모두가 가내수공업적인 것으로 사양길에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조상들의 숨결, 그 멋이 스며 있고, 또한 조상들의 정교한 솜씨가 이어져 온 한지와 합죽선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고장 사람으로서의 자랑 같은 것을 느끼지만, 을씨년스럽기만 한 현장을 직접 둘러보면 서는 무엇인가 아쉬운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전라북도에서는 「내 고장 일품 운동」을 추진 중에 있다.(1987년 7월부터). 듣자니, 「도내 각 지역 전래의 명특산품을 새로운 각도에서 품위 있게 재생하여 옛 명성을 되찾고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여 전국 제일로 명산화하여 나가겠다.」고 한다. 이 일품 운동에 한지와 부채가 들어 있으니, 연구·판로 등에 도당국으로서 많은 지원을 하여, 예도 전북·예향 전주답게 전통적인 한지·부채 산업도 활력을 되찾게 되기를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