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 현장 르포

도예문화의 부흥과 자긍심

- 도자기의 고장 이천




이광복 / 소설가

―아마 세계 각국의 도자기를 통하여 고려조의 도자만큼 정적한 마음이 많은 도자는 없을 것이다. 그 정적함은 나로 하여금 고려 도자를 볼 때마다 언제나 무(無)에 상도(想倒)케 한다. 허다한 청자와 백자, 이러한 기물은 허무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을 느끼게 한다. 무엇에든 집착된 곳이 없는 마음, 그것은 모든 깨끗한 것, 아름다운 것, 깊은 것이 흘러나오는 근원이지만, 우리의 고려 도자기도 또한 바로 그러한 마음의 소산이다.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도자기의 형태나, 비할 수 없는 내면적 깊이를 가진 그 색채나, 매우 가늘고 자유를 극한 그 조선(彫線)이나, 이들이 무엇이나 모두 그러한 마음에서 나온 데 지나지 않는다. 한 개의 상감청자의 술병, 위는 부르고 밑은 야위어서 전체가 자못 가늘고 긴 느낌을 준다. 그릇 전면에는 흑과 백으로 버드나무의 모양이 상감 되어 있다. 그 형과 문양에서 나타나는 흐르는 듯한 선은 틀림없이 이것이 무의 자태가 아니냐. 하나의 청자 접시, 그 농청(濃靑)한 유면(釉面)은 심연을 생각게 하고 음각된 야화(野花)의 문양은 가는 맛을 한껏 다하였다. 무의 산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한 개의 백자 사발, 그것은 희다 하기엔 너무 푸르고, 푸르다 하기엔 너무나 희다. 깨끗하고 그윽하고 고요한 그 색조는 무의 세계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케 한다.(고유변,「청자의 감상」)

다소 인용이 길어졌지만, 이 글은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태두 고유섭 선생이 청자에 대해 깊은 사랑과 높은 안목으로 정리한「청자의 감상」가운데 일부이다. 한 일본 학자도「동양정신의 극치는 정적이요, 정적의 극치가 무라 할진대 무의 세계의 소산인 고려 도자기야말로 동양정신의 극치」라고 지적하였다.

고려청자의 그 우아하면서도 형언키 어려운 색깔에 대해서도 중국인들은 천하제일 고려비색이라 하였다. 고려의 도자기를 예찬한 글은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문화의 전승과 보존에 다소 소홀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명될 수 있다. 예컨대 간단없이 계속된 국난도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숱한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 우리는 각종 문화유산을 파괴, 소실 또는 약탈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 나라 이 강토를 지켜 왔으며, 빛나는 문화를 창조해 나왔다. 여러 문화재들이 우리 민족의 우월성과 번뜩이는 지혜를 입증하고 있지만, 도예문화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에 속한다.

자타가 천하제일이라 일컬었던 고려청자, 그윽한 멋을 풍겨주는 분청사기, 담백하면서도 오묘한 정취를 자아내는 조선백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들은 세계적인 도예문화를 창출하였다.

이 같은 도예문화의 역사는 멀리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원시적인 토기문화를 시작으로 흙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토기의 발달도 이루어진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토기문화가 만개하게 되는데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발굴되는 토기들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통일신라시대 이르면 고려청자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원시적인 청자를 빚어내게 된다. 항용 청자 하면 고려를 연상케 되지만 기실 청자의 역사는 그보다 더 오래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어쨌든 청자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꽃을 피우게 되고, 특히 순청자 시대에서 상감청자 시대를 맞으면서 청자문화의 절정을 이룬다. 대개 국운의 융성과 문화는 비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문화의 창달이 결국 국운 융성의 밑거름이란 사실을 뜻한다. 고려가 태평성대를 구가할 때에는 청자문화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고려의 전성시대에 나온 청자들은 모두가 도예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일까, 고려 말기로 들어오면서 청자문화는 서서히 쇠퇴하는 한편 조선 왕조로 넘어오는 단계에서 분청사기 시대를 맞게 된다. 이 분청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왕조 초기를 대표하는 도자기로서 임진왜란을 전후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 분청의 단계를 지나 도자문화의 대종을 이루는 것이 백자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백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도자문화의 큰 흐름을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전통문화의 맥락 끊겨

한편 일본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의 도자기를 수없이 약탈해 갔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도공들을 납치해 갔다. 겨우 목기에 의존했던 일본인들은 이때부터 도자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임진왜란을 일컬어「도자기 전쟁」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고, 일본의 도예문화는 왜란 당시 조선에서 잡혀간 도공들에 의해 막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세계의 도예문화, 특히 동양의 도예문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항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어쨌든 조선의 백자는 고려 초기에서부터 만들어져 임진왜란 이후 널리 이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1884년 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분원에 두었던 관요를 폐하면서 사실상 도자기 번조의 맥이 끊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도예문화의 측면에서 다시 고유섭 선생의 견해에 귀를 기울여 본다.

―여하튼 고려자기나 조선조 분장회청기(粉粧灰靑器)는 그 조성이 분업적이 아닌 즉 개성적인 것이 있는데 청화백자는 분업적인 특색이 완연하다. 이는 사실에 있어서도 화원이 분원에 나가 화식(畵飾)을 분담하고 있어 그러하였던 것이지만 고려조에 있어서도 그렇지 아니하였으리라는 법은 없으되 결과에 있어 그 분업 소치가 드러나고, 아니 남의 구별이 있음은 결국 시대의 문화가 계급적으로 분화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데 문제가 있을 듯하다. 즉 고려조에 있어서의 예술문화의 배경은 불교였고, 조선조에 있어서의 예술문화의 배경은 유교란 것이 상층에 있어 불교는 일반이 계급적 차별이 없이 민중 사이에도 숨어 있었음에 반하여 유교는 확실히 민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층계급에만 있었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이리하여 고려 도자기에는 도자기 그 자체 안에는 별로 대립된 두 개의 요소가 없지만 조선조 도자기, 특히 청화백자에는 민중적인 요소와 문화적·계급적 요소와의 두 가지 대립이 성립된 듯하다. 다만 같은 조선조에 속하는 것이지만 분장회청기에 이 대립이 없는 것은 실제에 있어 그 기물이 상층계급에도 유용 되었다 하더라도 기물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민중 속에서 자라난 까닭일까 한다. 말하자면 분장회청기는 계통적으로 따질 때 불교신앙의 기물의 연장(즉 고려자기의 연장)으로서 철저히 민중적인 것으로 남게 되고 유교정신이 아직 지배성을 얻지 못하던 때, 즉 과도기적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이 소략하다면 하지만 고려도자와 조선조 도자와의 현저한 차이점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러한 변천 과정을 통해 면면이 이어져 나온 도예문화의 맥락은 광주군 분원을 폐함으로써 일단 끊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도자기를 구워냈던 몇몇 도공들이 있었으나 격동기를 맞으면서 이 땅의 도예문화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특히 일제에 의한 강점기는 암흑의 시대였다. 일제는 우리의 문화재들을 강제로 약탈해 가는 한편 민족문화의 말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민족말살에 있었으므로 우리의 문화는 철저히 파괴 약탈당했다.

그러나 광주군 분원 폐쇄 조치 이후에도 도공들은 사기와 옹기를 구워냈다. 집념의 도공들은 끈질긴 노력으로 옹기를 구워냈는데, 오늘날 현대의 갖가지 생활용품이 쏟아져 나오는 문명의 홍수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것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예문화의 본고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지난번 아시안게임에 이어 제24회 올림픽이 열리는 올해 이천에는 숱한 외국인의 발길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이천은 저 유명한 설봉산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온천까지 개발되어 장차 서울 근교의 관광지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기름진 쌀의 고장

그러면 여기서 이천의 내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천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볼 때 경기도 동남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아주 유서 깊은 고을이다. 광주산맥의 지맥인 원적산이 에워싸고 있어서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사통오달하는 요지이자 서울과 삼남을 잇는 관문이 되어 왔다. 이러한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 고장에 세력을 뻗쳤다.

특히 이천의 진산인 설봉산은 요새 중의 요새로 이 산에 있는 성은 삼국시대 후반부터 신라가 이 고장에 두었던 남천정의 옛터로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남천정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에도 자주 나타난다. 진흥왕 16년(서기 555) 신라가 남천정을 설치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무열왕 7년(서기 660) 유신·진주·천존 등과 더불어 왕이 서라벌을 출발, 남천정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태종 무열왕이 백제를 공략하기에 앞서 당대의 명장들과 이곳 남천정을 찾았던 것이다. 또 신라가 백제를 친 후 문무왕과 유인원이 회합한 곳도 이곳 남천정이었다. 이는 이 고장이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임을 입증하는 실례가 된다 하겠다.

어떻든 여기에서 보다시피 이천의 옛 이름은 남천이었다. 고구려 시대에 남천현을 두었고, 신라 진흥왕조에 주로 승격시켜 군주를 두었다가 경덕왕 때에 황무현이라 한 적도 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이천이란 지명을 붙였다.

태조 19년, 왕건은 신검이 거느린 후백제의 잔존세력을 무찌르기 위하여 이 고장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큰 홍수가 나서 물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이때 효양산 밑에 살던 서목이란 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했다. 이로써 왕건과 그 군사들은 물을 무사히 건넜고 후백제의 잔존세력을 섬멸하고 개선하게 되자 서목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고사에서 인용, 이천이라는 지명을 내렸다고 전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당시 왕건이 이 고장에 머무르는 동안「이섭대천」이란 점괘를 얻고 출정, 마침내 대승을 거두자 이 점괘로부터 이천이란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 고종 때에 영창으로 개칭되었던 역사가 있으나 공양광 때에 남천현으로 환원되었다가 조선왕조 원년이래 오늘날의 지명인 이천으로 굳어졌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지닌 이천에 대해 고려말에 태어나 조선왕조 초기의 명신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권근은「땅이 넓고 기름져서 사람이 많고 부유하다」고 했다.

특히 이 고장은 옥토에서 나오는 쌀로 유명했다. 이 고장의 쌀은 자채쌀이라고 해서 벼의 품종이 특수했다. 이 자채벼는 전통적으로 여주군 일부와 이천지방에서만 재배되었던 특이한 품종이었다. 이 벼에서 얻어진 쌀로 밥을 지으면 그 맛이 기가 막혀서 임금의 수라상에 올랐다. 이 자채벼는 이천 땅을 가로질러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복하천과 그 지류에서 발달한 드넓은 벌판에서 재배되었다.

이 자채벼는 그 탁월한 맛에도 불구하고 수확량이 적어 다른 재래종 벼들과 함께 멸종되었다. 특히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농산물 수탈에 혈안이 되어 다수확 품종의 재배를 장려했으므로 신품종만이 판을 치게 되었다. 이 바람에 자채벼는 완전히 멸종되었고, 오늘날에는「자채농요」만 구전되어 지난날 자채쌀의 영화를 전해주고 있다.

도자기의 고장

오늘날에도 이천 쌀은 최상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것은 이 고장의 기후와 토양, 그리고 물과 깊은 관계가 있다. 특히 이천은 그 지명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물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오늘날 이천에 신흥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음료, 주류 공장 등 물을 주원료로 하는 생산업체들이 대거 이동해 온 것은 바로 양질의 물 때문이다.

뒤에 부연설명이 되겠지만 도예문화의 발달과 물은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도자기를 빚을 때 쓰는 물일수록 불순물이 없어야 한다. 즉 도자기를 번조하는 과정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물에 유기물질이 다량으로 함유돼 있을 경우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도자기 본연의 아름다운 색감을 얻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천과 인접한 광주 땅에 분원이 있었고, 이천 일대에 각종 요장이 산재돼 있었던 내력을 더듬어 볼 때 수질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특히 요장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신둔면 수광리의 옛 지명이 수출리(水出里)였다는 사실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요장들이 무리를 지어 성황을 이루고 있는 이천읍 사음리는 속칭 사기막골로 그 지명이 의미하는바 옛날부터 민간 수요의 백자를 굽던 곳이며 신둔면 수광리 일대는 질 좋은 옹기를 구워내던 곳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짚어볼 때 이천이 오늘날 신흥 도예문화의 요람으로 명성을 떨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와 함께 이천이 전통 도예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 이유는, 원료와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지정학적 여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원료와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면서 교통이 편리한 곳에 요장을 설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예컨대 청자 도요지로 유명한 강진, 해남, 부안, 고창 등은 원료와 땔감이 풍부한 곳이면서 해안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고장이었다. 저 옛날 육로보다 수로를 더 많이 이용했던 교통을 상기할 때 이들 도요지가 지정학적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을 대뜸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가까운 도요지로는 현재의 용인군 이동면 서리와 인천직할시 경서동이 유명했다. 이들 도요지에서 구워진 도자기들은 한강 뱃길을 따라 서울로 운송되었다.

백자 도요지로는 조선시대의 관요인 사옹원 분원이 현재의 광주군 분원리를 중심으로 금사리, 도마리 등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며 분청 도요지로는 계룡산 요장과 무등산 요장이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천이 도예문화의 요람으로 부상케 된 데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근세인 1884년까지 인근 광주에 분원이 남아 있었던 사실과 분원 폐쇄 이후에도 도공들이 옹기를 구워왔다는 사실 등을 역사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입지조건으로 보았을 때, 원료와 땔감의 확보가 용이하고 물이 좋다는 점, 옹기 가마를 토대로 도자기 문화를 재창조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했다는 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천이 오늘날 도예문화의 본거지로 확고한 위치를 굳히게 된 데에는 현대 도예가의 1세라고 할 수 있는 유근형, 지순택, 홍재표, 고영재, 이정하 제씨가 이천에 정착하면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들 현대 도공 1세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나라 도예문화의 부흥과 재건을 다짐하면서 이천으로 모여들어 각고의 노력으로 흙을 빚어 아름다운 자기들을 구워냈다.

그런데 이들 도공 1세들은 이천에 옹기 가마가 산재해 있는 것을 보고 이 고장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며, 그렇다면 이천이야말로 어쩌면 끊어졌을지도 모를 도예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해 뜻 있는 도예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다시 말하면 도예문화의 역사적 흐름과 이천이라는 유서 깊은 지역성, 그리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코자 하는 도공들의 노력이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이천은 바야흐로 도예문화의 본고장으로 영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도요지 60여 개소 밀집

위에서 언급한 도공 1세들이 정착한 후로 그 뒤를 잇는 기능인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그들은 도공 1세들이 정착한 신둔면 일대에서 또 다른 요장을 개설함으로써 점차 이 고장을 도예촌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 이후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지면서, 이 고장의 도예문화는 한일 양국사이에 더욱 유명해졌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철저히 말살하려했던 일본인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이천의 도예문화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컬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현재 이천에는 신둔면 수광리, 수하리, 남정리, 소하리와 인접한 이천읍 사음리를 중심으로 60여 개소의 요장이 밀집해 있다. 이들 도예인들은 1981년 4월, 한국전승도예협회를 결성, 매년 서울에서 작품전을 개최해 왔다. 한국전승도예협회는 이천의 도예인들이 주축을 이루어 결성된 단체이나, 가까이로는 이웃 광주군의 도예인들과 멀리로는 강원도 원주에 있는 도예인까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참고로 이천지방에 산재해 있는 주요 요장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해강청자(유광열)

·고려도요(지순택)

·부림요(이기휴)

·현암요(현무남)

·청운도예(이준희)

·항산도예(임항택)

·우당고려청자(한명성)

·화원도요(정광식)

·한청도요(김복한)

·가천도예(송기영)

·청록도예(문복만)

·우송도예(김대희)

·여천도예(우인숙)

·영창도예(안상우)

·범호요(현계춘)

·성전요(임일남)

·예원도예(엄주섭)

·운암요(김경철)

·오남토형연구소(이종성)

·수광도요(이범식)

·동국도요(방철주)

·세창도예(김세용)

·이조요(홍재표)

·태성요(이용세)

·해평요(윤윤섭)

·한성도예(한성구)

·수암도예(이재춘)

·송정도예(문송만)

·석양도예원(서구산)

·미도요(권영석)

·죽산요(김형자)

·청파요(이은구)

·효천요(권태현)

·청담요(김흥복)

·사음요(김문식)

·해림요(이춘규)

·무룡도예(장영무)

·송암요(최기연)

·송월요(김종호)

·청산요(이정면)

·지천요(지창근)

·대강청자연구소(김장식)

·부학온(김형상)

·부림도원(조성주)

·한국도요(김정묵)

이들 요장 외에도 이천읍 사음리와 신둔면 수광리, 수하리, 남정리, 소장리 일대에는 크고 작은 요장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한국전승도예협회에서는 회원 작품전 이외에도 도예문화의 발전과 보급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한국전승도예협회는 지난해 4월 9일부터 4월 14일까지 5일간 서울 동방플라자 미술관에서 제7회 회원전을 열었다. 참고로 이 회원전에 참여한 회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근형(협회 고문)

·지순택(협회 고문)

·김문식(사음요·이천읍 사음리)

·김복한(한청요·신둔면 수광리)

·김종호(송월요·이천읍 사음리)

·노영수(남광요·광주군 초월면 쌍동리)

·박부원(도원요·광주군 초월면 대쌍령리)

·박인원(고선도예연구소·광주군 동부읍 하산곡리)

·서광수(부학요·이천읍 사음리)

·양명환(청진요·광주군 초월면 산이리)

·유광열(해강고려청자연구소·신둔면 수광리)

·이기휴(부림요·신둔면 수광리)

·이연휴(여천요·신둔면 수광리)

·이은구(청파요·이천읍 사음리)

·임일남(성전요·신둔면 남정리)

·장송모(이조도요·강원도 원주시 원동)

·전동일(동일도예연구소·신둔면 수광리)

·한성구(한성도예연구소·신둔면 소정리)

·한일상(도평요·광주군 광주읍 송정리)

·현무남(현암요·신둔면 수광리)

이들 회원들은 도예문화전승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즉 옛것의 재현에 치우치다 보면 모방이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고,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면 국적불명이라는 비난이 따른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도자기의 우수성을 말하는 이는 많으나 우리 도예문화의 본질을 아는 이가 드물고, 작품의 질적 향상을 외면한 채 요장이 난립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와 같은 여러 문제점을 극복하고 선조들이 이룩한 도예문화의 맥을 이르려는 노력이, 이들 한국전승도예협회 회원들에 의해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스럽고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행정당국에서도 도예문화의 중흥에 깊은 관심을 보여, 경기도는 최근 이천읍 사음리를 도자기 민속마을로 지정하여 전시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으며 지난해부터 열린 향토문화제 속에는 도예축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지난해의 경우 설봉문화제추진위원회 주최로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간 이천읍 일원에서 제1회 설봉문화제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의 일환으로 9월 28일부터 10월 9일까지 온천관광호텔 설봉에서 도예축제가 열렸다. 이 도예축제는 도자기를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하기 위한 도자기시장, 도예작품전 등이 마련되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와 함께 교통부와 관광공사는 민속 축제·호텔 특선요리 축제와 연계하여 외국관광단을 모집하는 등 대대적인 홍보 전을 전개, 앞으로 이 고장의 도자기는 국제적으로 더욱 성가를 높일 전망이다.

연륜을 요구하는 작업

그러면 도자기는 어떻게 제작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자기는 원료의 확보와 배합, 성형, 조각, 번조에 이르기까지 그 제작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이 때문에 대학에서 공부해도 실지 도자기 제작에 뛰어들기 어렵다. 한 점의 도자기를 빚기 위해서는 오랜 연륜을 필요로 한다. 어느 분야에 있어서든 숙련된 기능을 갖게 된다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미술품을 빚는 일이야말로 심미안은 물론이려니와 자기가 빚어내고자 하는 작품을 자유자재로 연출해 낼 수 있는 고도의 기술과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어느 것이든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없다. 현재 도예가로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대가들과 중진들은 각고의 연구와 노력 끝에 그만한 기량과 재능을 발휘케 된 것이며, 거기에 곧 창조자의 집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도자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도자기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료(原料)

도자기를 만드는 데에는 도자기의 모태가 되는 태토(胎土)와 겉을 반드르르하게 하는 유약이 필요하다. 이 원료로는 고령토, 점토, 백토, 규석, 장석, 도석, 석회석, 납석 등이 쓰인다.

·수비(水硽)

원료를 곱게 빻아 불순물을 없애고 고운 가루를 물에 가라앉혀 미세한 분말의 앙금만을 취한다. 이 과정을 수비하고 한다.

·건조

수비된 원료를 일정기간 그늘에서 말린다.

·숙성

건조하는 과정에서 흙 속에 남아 있는 유기물질을 완전히 부식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태토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도자기에 흠집이나 티를 남기게 된다.

·답토(踏土)

숙성된 흙을 충분히 밟아 줌으로써 점력을 갖도록 반죽한다.

·성형

밟아 이긴 흙으로 형체를 만든다. 만들고자 하는 자기의 모양이 나타난다. 이때 그릇의 형체를 만들기 위해 회전물레를 쓴다. 물레를 회전시키면서 흙을 감아 올리려면 고도의 숙련이 필요하다. 성형이 마무리되면 굽 깎기 등 부분적인 잔손질을 한다.

·조각

형체가 만들어지면 그 표면에 상감, 음각, 양각, 투각 등을 한다

·건조

조각이 끝나면 또다시 그늘에서 말린다. 표면에 그림을 그리고자 할 때에는 조각을 하지 않은 채 그냥 말린다.

·초벌구이(애벌구이)

잘 말린 그릇들을 가마 속에 쌓아 넣는다. 그런 다음 아궁이만 남겨 놓고 모든 문을 밀봉하고 서서히 불을 땐다. 보통 8백∼9백 도(섭씨)를 유지하며 15시간∼25시간 굽는다.

·회입(繪入)

초벌구이가 끝난 그릇들을 가마에서 꺼내 겉면에 문양을 넣는다. 이때 가마에서 꺼낸 그릇들은 완전히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안료는 청화, 철사, 진사 등이 쓰인다. 이를 이용해 그림을 그려 넣거나, 청자에 철화(鐵畵) 혹은 진사채(辰砂綵)를 넣는다.

·시유(施釉)

유약을 입힌다. 어떤 그릇을 만드느냐에 따라 유약도 달라진다. 유약에는 청자유·백자유·철유 등이 쓰인다. 시유에는 그릇을 통재로 유약통에 담갔다가 꺼내는 방법이 있고 특수한 경우 유약을 초벌구이 그릇에 뿜어대는 분사법이나 붓으로 칠하는 필화법이 쓰이기도 한다.

·두벌구이

유약 입힌 그릇들을 다시 가마 안에 쌓아 올리고 불을 땐다. 이 두벌구이 때에는 아궁이에서부터 서서히 불을 때면서 가마 안 전체가 고른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차례로 곁불을 넣는데 1천 2백∼1천 3백 도(섭씨)의 고온을 유지하면서 20∼30시간쯤 땐다.

그런데 불을 때서 도자기를 구워내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환원염 번조, 중성염 번조, 산화염 번조가 그것이다.

환원염 번조는 가마 안에 산소 공급을 차단한 상태로 불을 때는 불완전연소 방식이다. 이 방식을 쓰면 자기질 속에 포함돼 있던 철분의 환원작용으로 청자는 푸른빛을 띠며, 백자는 약간 푸른 기가 도는 청백 또는 순백의 빛깔이 나온다.

중성염 번조는 환원염과 산화염 번조의 절충 형식으로 청자나 백자의 빛깔이 회색 빛을 띠게 된다.

산화염 번조는 가마 안에 산소를 충분히 공급해 주는 완전연소 방식이다. 이는 환원염 번조의 반대 방법인데, 이 방법을 쓰면 청자는 황록의 색조를 나타내며 백자는 누른 기가 약간 도는 유백색으로 나온다.

이러한 방법으로 두벌구이를 마치면 도자기의 번조가 끝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도자기의 번조야말로 이론과 실제가 같지 않다. 이상의 이론은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의 소개에 지나지 않을 뿐,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 두벌구이를 마치고 나서 가마를 열어 보았을 때 모든 것이 판명 나게 된다.

초심자들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아무리 노련한 도공이라 해도 가마를 열어 보기 전에는 도자기가 과연 어떻게 구워졌을 것인가를 장담하기 어렵다. 여기에 전통 도예문화 계승의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도자기를 구우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도예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벌구이까지 끝나 가마를 열어보았을 때, 마음에 차지 않는 졸작만 나왔을 경우에는, 그들은 정성스레 빚어낸 도자기들을 부수어 버리면서 명품을 만들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전통문화의 재인식

항간에 알려진 이야기로는, 고려시대의 도공이 청자의 비색 번조 기법을 아들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근래에는 이를 뒤집을 만한 이론이 나와 주목되고 있다.

얘기인즉, 청자를 빚는 기술이 아까워서 아들에게 전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후손만큼은 도공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 비법을 일러주지 않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는 옛날 도공의 신분이 결코 양반일 수 없었고, 산간 오지에서 늙어 죽도록 고생하는 것은 물론, 명품을 빚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통이 따라야 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실례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그 동안 도공에 얽힌 일화들을 수없이 들어 왔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진실인가를 회의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도예에 관하여 명쾌한 이론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사학의 태두 고유섭 선생의「고려청자」를 효시로 하여 몇몇 학자들의 끈질긴 연구와 집념으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이론서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연구서가 나와야 할 것은 물론이며, 도예문화가 우리 생활 속에 뿌리를 박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도예문화가 만개하기 위해서는 도예인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물질문명만을 선호할 것이 아니라 한 점의 도자기에 깃든 도공의 혼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유섭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은 더욱 실감 있게 클로즈업되어 다가온다.

―예로부터 「陶를 통하여 政을 본다」라는 말이 있다. 도자는 실로 일국의 역사를 대변하고 정신을 대변하고 습성을 대변한다. 이것을 감상하는 데는 풍부한 식견을 요하고 아름다운 심리를 요한다. 또 도자의 감상은 오감(五感)을 가지고 하라는 사람도 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라고 한다. 이것은 즉 몸으로써 감상하는 것이다. 몸으로써 한다는 것은 마음으로써 한다는 것이다. 몸이란 실로 마음인 까닭이다. 몸으로써 감상하고 몸으로써 맛볼 일이다. 즉 체험이지 뉘라서 남의 말에 끌려 예술의 세계에서 놀 수 있을까보냐.(「청자의 감상」)

다행히 요 근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도자기에 대한 관심도 비등해지고 있는 현상은 바람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안목이 달라지면서 우리는 지금 자긍심을 한껏 되찾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과거 식민사관적 발상에 따라 자기를 비하하고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천박한 사대주의 대신 떳떳한 민족주의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더라도 도예문화의 부흥과 이를 통한 우리의 전통 계승은 실로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천과 그 일대가 품고 있는 요장은 장차 우리의 자랑거리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고려청자의 형태를 대개 둘로 대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실용에서의 형태이고 둘째는 무엇이든 간에 장식 象形의 형태이다. 전자는 하등의 기교를 베풀지 않는 일견 단순한 것이나 이 단순한 것에서도 여러 가지 심정을 느낀다. 모양이 바른 것은 모양이 바른 것으로서의 특수한 심정이 있고 삐뚜른 것은 모양이 삐뚜른 것으로서의 특수한 심정이 있다. 모양이 바른 것은 규격이 정제한 것으로서 힘의 안정이 있고 모양이 비뚜른 것은 힘의 움직임, 不定한 동요가 있다. 여하튼 형태에도 이 두 상이한 美가 있다. 전자는 볼륨의 아름다움이 되고 후자는 리듬의 아름다움이 된다. 이것이 즉 그 器物의 성격이지만 고려도자에 대해서 말하면 어느 것이나 볼륨에서 느끼는 것보다 리듬의 아름다움이 더욱 좋다.(「청자의 감상」)

우리나라 도자기에 대한 깊은 애정과 높은 식견 그리고 심오한 철학이 담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찬란한 도예문화를 꽃피워 왔던 우리가 격동기를 거치면서 이를 잃어버릴 뻔했던 것은 참으로 아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천과 광주 일대에서 도예를 전승하려는 노력이 쉼없이 진행되고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장차 이천은 도자기의 본고장으로 자리를 굳힐 것이며,, 이 나라 도예문화의 본고장으로서 우리 땅을 찾는 이방인들에게도 큰 감동과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끝으로 취재과정에서 이천문화원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음을 밝히며 아울러 고유섭 선생의 글은 이화여대 박물관장 진홍섭 교수의 편역본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