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펼쳐지는 황토빛 판소리
- 신재효를 낳은 토양-고창
유영대 / 전주 우석대 국문학과 교수
신재효를 낳은 토양 고창에 다녀왔다. 신재효가 살던 집도 보고, 사진도 찍고, 모양성도 보고, 그리고 돌아왔다. 길게 뻗어 내린 노령산맥의 마지막 자락에 방장산이 있고 다른 켠으로 인천강이 흐르며 너른 평야지대가 이어진다. 진한 황토색이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창은 인촌과 미당을 낳은 전형적인 전라도의 넉넉함을 지닌 곳이다.
여류명창인 김소희와 김여란도 고창에 태를 묻었다. 아주 맑은 소리를 지닌 김소희나 정정렬의 소리를 온전하게 전수한 김여란이 고창 사람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이름은 헛되이 전하지 않는 법이어서 그만한 값을 하기 때문이다. 고창이 또 다른 판소리의 고향이 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 광대론이라는 용어
우리 판소리의 거점인 고창은 그러나 지금은 판소리에 관한 한 그 이름에 값하지 못하는 듯하다. 고창 문화원은 이곳의 문화와 역사를 찾고 보존하는 곳이다. 그러나 고창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터줏대감 격인 소리꾼이 한 분도 없고, 판소리를 부르고 전수할 수 있는 국악원도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고창에서 좀 넉넉히 조사도 하고 여러 사람 만나려던 계획은 우선 그 초입에서부터 틀어졌다.
물론 이 글은 신재효에서부터 말문을 열고자 한다. 신재효는 참 흥미로운 사람이다. 19세기의 변화하던 우리 사회의 여러 면모를 잘 드러내 보이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삶에 대한 자세, 세계관, 판소리에 미친 영향 등은 단순하지 않다. 지금까지 신재효에 관한 연구는 아주 많다. 박사학위 논문이 두 편이나 나왔으며, 신재효를 본격적으로 다룬 논문만도 60편 가까이 되니 아주 풍성한 편이다. 양만 풍성한 것이 아니고 질 또한 풍성하여 신재효에 대한 평가는 철저하게 이중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재효만을 다룬다면 그것은 구태여 고창에 와보지 않아도 될 일이며, 이 글은 오히려 지금 그 땅을 지키는 소리꾼에 대한 논의의 의미가 있으므로 다룰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더 주목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광대론이자, 보편적인 용어로 구비문학 작가론인 셈이다. 흔히 작가론이란 용어는 현대문학 가운데서도 주로 소설가의 일생과 작품 창작의 세기, 경향 등을 논의하는 것이지만 그 범주는 확대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옛이야기를 잘하는 이야기꾼,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 소리 광대 등 구비문학의 모든 갈래를 통틀어 이러한 작가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마침 이러한 광대론에 걸맞은 사람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의 실마리는 신재효에 관한 서종문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그는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83년 2월에 고창과 김제 지방을 답사하면서「전북 김제에 살고 있는 김이수(김성수라고도 함)라는 판소리 창자에게서 신재효가 정착시킨 사설을 부르고 있다는 증언과 구체적인 자료를 입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없으나 아주 흥미로운 기사거리임에는 틀림없어서 호기심이 일어났으며 메모를 해두었는데, 이번에 고창을 다녀오면서 내내 그를 찾을 방법을 궁리하였다. 다른 인적 사항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뜻밖에 그는 썩 유명한 소리꾼으로 알 만한 사람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소리 내력을 알아보기로 한다.
신재효와 판소리
동리는 19세기 초반인 1812년 고창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에는 대대로 경기도 고양에서 살았는데 부친인 신광흡이 서울에서 고창의 경주인을 맡아 하다가 그 인연으로 고창에 관약방을 맡으면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관약방은 아전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고을에서는 세도를 부릴 만한 자리인 데다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자리였다.
아버지대에서부터 풍류에 관심이 많아서 자연 그의 집에는 풍류음률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체로 좀 있는 집의 행랑채는 으레 그런 예능인들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 어려서부터 음률과 가곡, 창악에까지 뛰어난 감상적 재능을 보였다.
신재효가 19세기의 변화하던 사회의 제반 면모를 보여준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그가 속한 신분이 아전이었기 때문에 당대 사회의 여러 모순과 갈등을 가장 첨예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민중들의 정당한 욕구와 지배층의 야욕을 동시에 접하면서 그가 고민하고 갈등한 것은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하층민에 대한 연민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신분상승에의 의지로 각각 나타난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시조시인인 가객과 판소리 광대와는 엄연한 신분적 거리가 있었다. 시조시인들은 대체로 서리 출신이었지만 생리는 상층적인 것이었다. 가객이란 용어 자체가 민요나 판소리의 창자에 대한 우월성을 내포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쯤 되면 판소리 광대들의 신분이 격상되어 어떤 기록에 보면 고종대의 가객 안민영이 호남을 노래하며 순유하면서 운봉 사는 명창 송흥록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신만엽, 김계철, 송계학 등 명창들을 만나 수십 일을 질탕하게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동리는 판소리 광대들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이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파트론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직접 소리꾼들을 지도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신재효가 유능한 창자였느냐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도섭만으로도 소리를 가르치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강도근의 경우도 한의사인 박봉채에게서 소리를 배우는데, 박봉채는 속목과 도섭만으로 소리를 가르쳤으나 귀명창이고 그 가르치는 기술은 일품이었다고 한다. 오늘날도 김명환 같은 명고수가 최승희에게 심청가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원래 고수 중에서도 소리를 하다가 고수가 되기도 하고 고수를 하다보니까 소리꾼이 되기도 하는데, 생각컨대 신재효가 특히 장단 등에 밝아서 이론화시킨 점이나 몇몇 창작 단가들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충분히 소리에 관한 선생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판소리에 관한 그의 역량은 탁월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해 내었다. 명창의 등용문인 전주대사습에 나가기 전 많은 소리꾼들이 일단 고창에 들러 신재효의 지도를 받고 나가야 제대로 겨룰 만했다고도 전한다. 그 문 아래 있었던 사람으로 특히 고창 출신의 진채선과, 순창 사람인 김세종, 부안의 전해종 등이 당대의 명창들이다. 그들의 문하에서 각각 허금파, 이동백, 이선유, 장자백 등이 나왔으니 그 융성함을 짐작할 만하다.
그는 여러 편의 중요한 단가를 창작하였고 판소리 여섯 바탕을 개작하였다. 그가 지은 광대가는 최근 박동진이 곡을 붙여 부르기도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 수련의 어려움을 지적하고 광대를 예찬하고 있다.
거려천지 우리 행낙 광대 행세 좋을씨고
그러하나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 직차 득음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귀성끼고 맵시 있고
경각의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상의 풍류호걸 귀경하는 남녀노소
울게하고 웃게하는 이 귀성 이 맵시가
엇지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율을 변화하여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게 그도 또한 어렵구나.
우리 판소리 광대는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의 네 가지 요건을 다 갖추어야 된다고 하였다. 인물이 잘나야 하지만「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지만」특히 사설, 득음, 너름새에 깊은 공력을 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치산가」도 그의 의식의 한 가닥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루면서 근검 절약하여 농사에 힘쓰고 돈 날 작물을 심어 파는 것이 요령이라면서 자신의 경험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도리화가'는 애인이기도 했던 진채선이 떠나갈 때 준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이다.
신재효가 개작한 판소리 사설에 대하여 평가가 다양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대로 그가 당대를 살면서 갈등하는 양상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춘향가나 토별가의 경우는 판소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육담이나 욕설 등이 사라지고 한문 투의 전아한 문체로 바뀐 점에 주목하여 판소리의 발랄한 성격을 잃어버리게 했으며 이것은 퇴행적, 보수적 개작이라고 볼 만하다. 심청가의 경우도 지나치게 자신이 목소리를 효 쪽으로 집어넣고 있다. 박타령도 이러한 보수적 개작의 의미가 강하다.
그렇지만 적벽가나 변강쇠가의 경우는 정욱 같은 인물을 활기차게 만들어서 평민성을 부각시키거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동리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개작의 태도와는 별개의 문제로, 동리의 작업이 다소 불분명하게 전승되어 온 사설을 명확하게 정립했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 사실 광대들이 소리를 하면서도 그 사설이 지니는 의미에 관하여 깊이 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방치되어 있기도 하였다. 애초 동리의 착안은 거기서부터였을 터이나 고치는 가운데 자연 자신의 생각을 담는 쪽으로 갔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사설의 전체적인 일관된 맥락을 중요시하여 그 가운데서 이면이 맞지 않은 것들은 주로 바꿨고, 자신이 고친 것에 대하여 '좌상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묻고 있다.
그가 창작한 단가나 사설이 그대로 불리지 않은 점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이후에 정정렬이나 김연수가 사설을 고치면서도 동리의 사설의 지향에 특히 주목하여 유식하게 고친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의 매력도 있다고 하겠다. 신재효에 관한 관심이 앞으로도 상당히 논쟁적으로 지속될 것이다.
김여란과 김소희
본래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판소리는 대원군 시절 진채선의 등장 이후 많은 여류명창들이 배출되어 판소리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여류명창의 등장은 창극의 융성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는데, 판소리가 가졌던 역동성이나 발랄성은 오히려 감소하게 된다. 요즘에는 오히려 남자명창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아서 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어떻든 고창에서는 뛰어난 여류명창을 여럿 배출하였다.
김여란은 1907년 고창 흥덕에서 태어났다. 김소희는 이보다 꼭 10년 뒤에 역시 흥덕에서 태어났다. 흥덕은 고창에 들어가기 전 선운사 들어가는 입구의 삼거리 지점이다. 고창은 특히 여류명창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진채선이나 허금파도 이곳 출신이다.
김여란은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고 부친이 소리꾼과 어울리기를 좋아해 집에다 명창을 자주 초대해 소리를 듣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벌써 소리를 근사하게 부를 수 있었다. 열 살 되던 해에 근처의 김비취에게서 시조와 가곡 등을 배웠다. 그후 김봉이에게서 심청가를 배우고, 다시 정정렬에게 7년간 춘향가, 적벽가, 심청가를 모두 배워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1929년에 대구에서 판소리 발표회를 가졌는데 만원을 이룬 청중들로부터 아홉 차례나 재청을 받았다 하니 그의 기예를 짐작할 만하다. 그 무렵의 여류명창으로 이화중선과 박녹주를 들 수 있다. 김여란은 빅타레코드와 계약하여 음반을 취입하기도 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면서 명성을 높였다. 중하성이 발달하여 묵직한 느낌을 주는데 필자에게는 그가 마지막 무대에서 부른 정정렬 작곡의 '적벽부' 테이프가 있는데 참으로 소리가 맛있다.
그는 여류명창으로는 드물게 판소리를 고수한 인물이다. 한때 화랑창극단에 참여한 적도 있지만 이내 그만두고 판소리에만 전념했다. 해방 후에 서울에 민속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시켰고, 그의 능력이 인정되어 춘향가의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그의 제자로는 최승희와 박초선을 들 수 있는데, 둘 다 훌륭한 기량을 가지고 있다. 최승희는 지금 부안 국악원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김소희는 열두 살 되던 해, 이화중선의 공연을 보고 삶의 방향을 정한다. 그는 광주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광주에 들어온 창극단의 공연을 보고 스스로 소리꾼이 되고자 결심한다. 그래서 송만갑의 문 아래에서 소리를 배웠는데, 가르치는 대로 바로 배워들이자 무척 아껴주었다. 특히 춘향가는 송만갑과 정정렬의 소리를 함께 배워 나중에 만정판 춘향가를 만들었는데, 이 두 소리제를 적절히 배합한 것이다.
그리고 박동실제 심청가를 배운 데다가 다시 후반부에는 정응민제를 교합하여 역시 만정판 심청가를 만들어 부른다. 그의 소리는 청아하고 미려하다. 다만 좀 쉰 듯한 소리가 아쉬우며 너무 맑아서 그늘을 좋아하는 소리꾼에게는 아쉬운 대목이 되기도 한다.
특히 김소희는 심청가를 잘한다. 심청가 가운데서도「범피중류」나「추월만정」대목은 압권이라 할 만하다. 일제 때 이화중선이 부른「추월만정」이 수십만 장의 레코드 판매량을 보였다고 하는데 김소희의 소리는 이 대목에서 이화중선과도 흡사하다. 아직도 그의 능력은 무궁무진하며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김성수의 소리내력
김성수는 1929년 생으로 올해 예순 살이다. 호적에는 이름이 김이수로 되어 있다. 고향은 바로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로 선운사 뒤편 바닷가이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김제읍 신풍리이다.
그의 소리는 맛이 있기로 정평이 나 있어서 시인인 정양은「소리가 곰삭아서 아주 쫄깃쫄깃혀」라고 말한다. 그는 재주소리를 한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이 점은 그의 소리가 자리에 따라서 수시로 다르게 변화를 보인 데서 얻은 평이다. 부침새가 까다로워 북을 치기가 아주 어려워서 "성수 소리에 북을 제대로 치면 못 칠 북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조사하러 갔을 때, 웅장호방한 단가인「천하가 태평하면」(홍문연)과 심청가 가운데서 심청이가 용궁에 가는 대목을 들려주었는데 과연 한 경지에 이른 듯 하였다. 함께 조사를 하고, 또 그의 소리에 북을 친 최동현도 연신 신이 나 했다.
우리는 먼저 그의 소리 내력을 물었다.
아홉 살 때부터 소리에 취미가 있었어. 그때 건성으로 서당 다녔는디, 글 못 배운 것이 후회가 돼. 그때 영광 포천에 살았는디, 작은집에 양자로 가서, 협률사가 들어왔어. 아무데라도 가설치고 허는 협률사가 들어와서, 가설치면서 나찌마리라고 굿들어왔읍네 허는 광고를 혀. 농악을 치고 댕겨. 먼 데서 들으먼 이 새납부는 새납소리가 어찌 좋든지 아새끼 똥 구녁이 그냥 들썩들썩 혀. 그래서 거기를 저녁 밥 묵고 들어갔제. 아그들은 못들어오게 허데, 포장 쳐놓고, 그레, 포장을 칼로 찢고 들어가다가 지키는 놈에 들켜서 붙잡혀 뺨을 맞았제. 그래서 하소연을 했오, 나도 오직하먼 오겄냐고, 나도 국악인 포부가 있다고 얘기했제. 그러니까 허허 웃더니 들어가라고 헙디다. 그때 박동실 씨, 공귀남, 그이 아부지가 공창식이여, 그 자제 공귀남 씨가 방자하고, 멤바가 참 좋았어. 작곡 잘허는 조상선이, 모다 소리 잘허는 사람들이여. 그렇게 노는디 참 기가 맥혀. 어린 소견이라도. 그래서 인자 집에 들어와 갖고 그때는 바람이 나 갖고 서당이고 지랄이고 다 소용이 없고 그래서 맨놈의 소리허는 데만 쫓아 댕겨 인자. 듣고, 그때만 허더라도 고창 선운사에 가서 선생을 놓고 공부를 혀. 원광호라고 거문고허는 이, 그 양반도 거그 있었고, 죽은 유대복이, 가야금 잘하는, 고리 거그가 있었어. 거그를 가서 소리를 배우는디, 그때만 헤도 총기가 좋으니께 한번 들으먼 싹 해버려.
해방되기 직전 그가 열 다섯 무렵에 고창에 협률사가 다시 들어왔을 때 그 패거리에 따라붙었다. 그는 박동실의 심부름을 다 하면서 지성으로 그들의 소리를 배웠다. 그래서 웬만한 토막소리는 다 배웠다고 한다. 그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를 앓아서 그리 되었다. 그런 불편한 몸에도 잔심부름을 다하여 귀여움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한번은 임방울 앞에서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창극도 하고 농악도 하는 패거리를 데리고 다녔는데 그때 만났었다. 그 패거리로는 박막동과 신두억이 기억에 남는데 모두 기가 막히게 멋있는 사람들이었다. 상쇠를 귀신같이 쳤다. 죽은 김만식은 설장고를 그렇게 잘 쳤다. 김채오도 지금 광주에 있는데 장구의 명인이었다. 임방울은 그의 소리에 무릎장단을 치더니만 그가 소리를 마치자「니가 소리를 참 잘헌다만, 글시 어쩌끄나」하고 말꼬리를 흐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몸이 불편한 것이 소리를 하는데 하나의 꺼리는 흠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뜻의 우려가 아닌가 한다. 신재효가 그의 광대가에서 '인물치레'를 들었을 때, 그것이 꼭 완벽한 미남을 지목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어떤 인격적 완성이 이루어진 인물치레가 아닐까 한다.
해방되고는 다시 고향인 고창에 돌아와서 자신이 외증조할아버지인 김토산에게서 바탕소리를 익히게 된다. 스물 세 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때 김토산은 여든세살쯤 되었는데, 명창이날치의 수제자였다.
도막소리만 가지고는 안되것다 싶어서 바탕소리를 배울라고 했지. 그때 흥덕에 사후포라고, 뒷개라고도 허는 데가 있는디 김토산씨가 거그 살았어. 지금도 한 삼백 가호는 돼.
그분 선생이 이날치 씨인디, 이날치 씨의 수제자여. 이날치는 늦게 소리를 시작했는디, 그 양반 일곱 살에 데려다가 소리를 시켰어. 이날치 씨가 늦게 소리헌 이유가 있어. 원래 북을 쳤는디, 북 치다가, 박만순 씨가 그랬다고 허든가, 북치기가 이날치 씨 눈 구녁을 찔러부렀어. 순창사는 광대 한 분이 소리를 그렇게 기맥히게 잘허시는디 그 양반이 어전에서 소리헐 때 이날치 씨가 북을 치면서, 북을 어만간데다 친개, 감사도 보시고 있는디, 눈구녁을 쑤셔부렀어. 이날치 씨가 눈 구녁이 절단나갖고 그 뒤로는 이빨을 갈고 공부해 갖고 굴속에서 팔 년을 독공을 혀, 그런개 살살 소문이 날거 아니요. 적벽가에 그 새타령이 있거든, 새타령을 허면 새가 와요.
그렇다는 소리를 신오위장이 들었다. 그렇게 소리를 공력을 들여서 헌다허니 경오를 옳게 허는 것이냐, 안옳게 하는 것이냐, 불러들이라고 해서 데려다가 소리를 시켜본개 신오위장이 유식해서 들어보니 아닌디는 아니여. 그래서 이날치 씨더러 여그서 한 이 년 있거라, 신재효씨가. 그래서 이 년을 시정을 시키고, 그래갖고 이날치는 득음을 했어. 눈이 그래서 어전광대는 안되고, 그러나 어전광대 이상 소리를 잘했어.
김토산은 바로 서편재 심청가의 창시자인 이날치의 제자이다. 이날치는 박유전에게서 심청가를 배우고 나름대로 공력을 들여서 서편제 심청가를 완성한다. 동편소리에 비하여 훨씬 기교가 풍성하고 다양하며 부침새도 복잡하다. 김토산은 조선창극사에도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김성수의 말에 의하면 일세를 풍미한 광대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기록에서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김성수가 스물 세 살 되던 해에 전쟁이 끝났는데, 바로 그해부터 소리를 배웠다 한다. 김토산의 나이는 여든 세 살이었다.
선운사 앞에 있는 동문암에서 자신은 기식하면서 그곳에서 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배웠다. 그리고 독공하기 위하여 선운산 깊은 곳, 일본 놈들이 뚫어 놓은 굴속에 들어가서 여러 달 거처하였다. 물론 그 사이에 목이 부어서 똥물을 먹은 것도 여러 번이라고 하였다. 맑은 똥물을 먹으면 어혈이 풀리고 부기가 빠진다는 사실은 지금도 소리꾼이나 또는 민간에서는 유효한 처방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그 뒤에 다시 김연수에게 소리를 배우게 된다. 선운사에서 소리를 배운 뒤 스물 예닐곱 되던 해부터 정읍 신흥동에 있던 정읍 국악원의 소리선생으로 있게 된다. 그곳에서 한동안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오정숙이나 성창순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때였다. 김연수가 춘향전 정리차 선운사에 왔다. 김연수는 춘향전을 포함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나름대로 자작한 인물이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신재효가 정확한 사설을 정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연수도 정확한 사설을 정하고 전승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물론 신재효처럼 유식한 한문 투의 개작이 많았다.
더욱 중요한 점으로 김연수가 고친 사설은 거의 많은 대목을 신재효의 것에서 그대로 옮겨와 정리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만 한다. 특히 이 점은 심청가와 토별가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곡을 붙인 것은 정정렬의 것을 많이 본뜬 것이다. 춘향전의 경우는 그 영향관계가 역력하며 김연수의 것이 좀더 창극조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김연수는 어느 자리에서 "정정렬 낳고 춘향전 다시 낳다"라고 말하여 정정렬이 춘향전에 끼친 영향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지만 그도 또한 춘향전 개작에 힘썼으며 좋은 작품이 되었다.
심청가의 경우는 정정렬의 소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단언하기 어려우나 sp판으로 남아 있는 정정렬의 소리를 놓고 비교해 보면 그 친연성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정정렬 소리제의 독특한 특징으로 그의 제자인 김여란이 부른 심청이가 인당수에 떨어지고 난 직후의 소리인「묘창해지」대목이 중모리로 불리는 것이 지금도 sp판으로 남아있는데 이 대목은 보성 소리에서는 진양으로 바로「행화는 풍랑을 쫓고」가 되며 김연수제만이 중머리로 불린 뒤에 다시 진양의「행화는 풍랑을 쫓고」가 이어진다.
김연수가 사설을 신재효에게서 많이 이어받았다는 점은 기존의 연구에서도 많이 이루어졌다. 어떻든 간에 김성수가 동초에게서 소리를 배우게 된 인연이 생기게 된 것은 바로 춘향전 사설의 정리차 그가 선운사에 온 때문이었다. 동초가 선운사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김성수는 큰 닭 한 마리를 가지고 찾아가 대접을 하였다. 그리고 동초가 좋아하는 장어를 사려고 장수강까지 걸어서 삼십 리를 왕복하곤 하였다. 그리고 손수 양념하여 대접하였다. 그때 소리하는 강종철도 함께 와 있었으며 틈틈이 소리를 읽혔다. 총기가 좋으니까 한번 들으면 머리 속에 쏙쏙 들어갔다. 동초를 네 달 가량 모셨고, 그때 배운 것이 그래도 가장 속시원했다.
이날치 씨가 신오위장님한테 시정을 받아놓으니까 이날치 씨의 계통으로 우리 선생님이 공부를 했응게, 그리고 우리 선생님한테 내가 했응게, 암만해도 신오위장님 계통이 좀 있다고 봐야죠. 돌아가신 동초 선생님도 신오위장님 문서를 어디서 구했는지 그걸 가지고 춘향전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 귀신이 했지 사람이 했다고는 헐수가 없어. 연수씨도 그렇게 재주가 있는 양반이여. 그래도 동초선생은 심청전 옥진부인 내려오는 대목을 중모리로 아는디 나는 옛날 세마치 진양으로 하지.
그러나 그가 가진 자료들을 살펴보니 신재효본으로 소리를 한다는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신재효본과 김연수본의 천연성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꼭 그것이 신재효 본이라는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신재효의 사설로 소리한다고 마음이 그러하니 그러한 믿음은 아마도 고장이라는 끈이 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특히 그의 서승의 계보가 이날치-김토산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김성수의 판소리관
특히 그는 사설의 정확함에 대하여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들려준 소리도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분명히 전달되었다.
소리는 어떻든 간에 말 자체, 가사, 말놓는 발음을 정확히 똑똑 부러지게 놔야 혀. 장판방에 콩 궁글어가듯 그냥 톡톡톡톡, 그냥 유무식간에 잘 알아듣게 말을 놔야헌단 말이여. 편시춘에 '오릉금시은학백마'라는 구절이 있느디, 이것을 누구는 '오연금시'라고 허. 그래서 그 사람한테 '오연금시'가 뭐단가 물으먼, 몰라라우 나도, 이런단말여. 모르먼 개좃빤다고 혀. 알아 갖고 해야제.
그래서 그는 사설 한마디라도 모르는 구석이 나오면 광주나 군산, 부안, 고창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그 의미를 알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춘향가에 나오는 한시 가운데서 뜻을 모르는 것을 해명하려고 몇 달을 고생하다가 부안 사는 김하준 씨에게서야 명쾌한 답을 듣고 아주 기뻐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
신재효도 특히 이면을 중요시하고 김연수도 또한 이면을 중요시했는데, 김성수도 이면을 아주 중요시 생각하였다. 김연수는 평소에 판소리는 연극이므로 판소리의 이면, 즉 사설에 나타난 극적인 요소에 따라 곡조를 변화시키고 연기도 곁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이면 찾다가 소리 버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의 분명한 성음과 이면의 표현은 따를 이가 없었다.
사설을 놓고 연구를 해서 어단성장은 우리가 다 아는 것이니까 말헐 것도 없고 말을, 일테면 심청이가 임당수에 빠진다. 대해, 창해 먼먼 바닷물에 빠지든지 헐 때 어떤 마음으로 빠지면 어떻게 빠져야 옳을 것이냐, 허는 것을 연구를 해야 혀. 그래야 듣는 분들도 아 그렇구나 허고, 판소리란 것이 덮어놓고 건성으로 허는 것이 아니거든, 연구를 해야 해.
또한 고수의 역할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그는 북에도 일가견이 있어 내노라 하는 사람도 그에게 물으러 오기도 한다고 하였다.
때로는 북이 소리를 싸고 나가는 것이지만 어쩌다 북이 좀 헤이는 북을 만나면 소리가 싸고 나가야 되지. 왜 소리가 싸고 나가야 하느냐. 소리가 영화 필름 돌아가듯 죽 가는디, 똑딱 사이도 못돼, 머리크락 사이도 못되는디, 북이 삐끗허여 어먼 간데다 때려버리면 소리꾼이 기가 칵 죽어가지고 뒤에 힘을 못쓰게 돼. 솔찬히 소리가 힘이 나갖고 밀고나가서 저그 가서 저그 가서 그냥 높은 독 궁글어 내리듯 내려쳐 버려야 하는디, 그레 그만 깜짝 놀래부려야 되는디, 한참 거그 밀고나가는디 북이 어먼간디로 탁 새버리면 소리꾼이 대고 헛심을 씨어비리요.
그러니 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소리꾼과 고수의 조화로운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바탕의 소리가 제대로 나오게 된다.
지금은 보통 세마치라고 허지만, 원래는 삼공잽이라고 해. 요새는 삼공잽이라면 몰라요. 신염장단은 엇몰이를 가리키는 말이고, 안즌반이 장단은 단골네 푸념허는 디 쓰이는 장단이여. 단골네 푸념허면서 안즌반이 치제, 옛날, 판소리가 원래 단골네 푸념 속에서 나온 것이여. 옛날에는 푸념 속에서 나온 것인개 장단을 쳐도 고수가 말 떨어지는 데만 탁탁 쳤어. 그것이 안즌반이 장단이여. 그것이 발전이 되니께 장단이 생겨난 것이제.「이런 것은 이러허고 저런 것은 저러했다」,「정정 정적궁」이러해 대충 말에 따라 붙인 것이여. 고놈이 발전이 되니깨 박자가 생겨나고 한배가 생겨나고, 좋은 색채가 생겨났어.
이는 중요한 진술이다. 대체로 판소리의 근원은 무당의 사설에서 생겨났다고 하며, 육자배기 토리가 주조라고 하는데,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재차 확인한 결과 그의 집안은 내력이 상당히 깊은 국악인의 집안이었다. 부친은 김용달이고, 1900년 태생인데 역시 김토산에게 소리를 배웠다. 소리 잘하는 신영채도 부친에게서 배웠다. 전일도, 이목돌, 신영채, 임방울 등이 모두 비슷한 또래이자 비슷한 실력이었다. 목구성이 천구성으로 소리가 십리 밖에서 들렸다 한다. 고창은 물론 영광에까지 그 이름이 날렸다. 판소리뿐 아니라 육자배기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한다.
할아버지도 대금을 부는 예인이었다. 진도의 젓대 부는 박종기와 방불하다고 말한다. 일제 때 시조 했던 김추얼은 바로 자신의 고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큰딸인 김연자는 강도근에게서 소리를 배우다가 지금은 서울에 와서 공부하고 있다. 가히 국악 하는 집안의 표본이라 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여러모로 복이 따르지 않은 듯하다. 제자 복이 없어서 아직까지 변변하게 키우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그의 소리를 들었다.「천하가 태평하면」은 항우와 유방의 홍문연 싸움을 그린 야심만만한 단가이다. 그에게는 어떤 야심이 아직 남아있던가. 우리는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끌어보았다.
그는 아주 솔직히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내가 도망한 이야기며, 자신의 술 주정에 관한 것, 그리고 대사습에 아홉 번이나 나갔지만 장원은 한 번도 못한 채 2등만 두 번 했다는 것, 지금 소리는 자신이 있지만 그런 대회라는 것이 뭔가 정당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것, 도 문화재에 대한 관심, 그리고 진정으로 고창에 소리꾼이 없으니까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것 등을 차분히 말했다.
한 번은 최동현이 김성수의 도 문화재가 되는 조건 등에 대하여 문의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광대는 인물치레가 중요하다는 점과, 바디의 불분명성을 들어서 완곡한 해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살이에 그 밖의 다른 사연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 방안 소리로는 너무나 듣기 좋은 그의 소리. 그가 고창에 가서 터줏대감이 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이며 진정한 귀명창인 천희두는 김수성의 소리를 특히 좋아하는데 어느 자리에선가 그에게「이러다가 당신, 죽어서 명창될 것이요. 살아서 명창되는 수도 있고 죽어서 되는 수도 있는디, 당신은 죽어서 명창 될 것이요」라고 말했다 한다. 명창. 진정한 명창이 바로 우리 앞에 있으며 그가 지금 소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