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무사시노 음악대학, 은은한 소나타




김진원 / 세종대학교 교수

나의 유학시절은 일본이「경제대국」이라고 자처하면서「소비가 미덕」이라고 큰소리를 치던 1971∼ 1974년까지를 의미한다. 그 당시의 유학생은 극히 드물었고 약간의 국비 장학생이 있었다. 학교는 무사시노(武藏野)음악대학이었으며 동경 안에 에고다역 앞에 위치하고 있고 재학생 수만 주야간 합쳐서 2천명이 넘는 단과대학이다「동경예대」와「구니다찌」「도호학원」등 유명대학이 있는데 역사적으로는「무사시노」가 유명하다고 생각된다. 규모는 3천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 있고 부대시설로는 파이프올겐이 일본에서도 제일 규모가 큰 것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특기할 것은 음악박물관에 세계적인 희귀악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악기는 서양에서도 보기 드문 문화재라는 점이 부럽기까지 하였다. 더욱 놀란 것은 각 학년마다 오케스트라를 분류하여 연구하고 있는데 그 실력이 상당수준이라는데 있었다. 3학년반의 연습을 방청하였는데 스트라빈스키, Stravinsky의 「불새」를 듣고 현이나 관·타악기 등의 수준은 놀랄 정도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스트라빈스키는 자주 연주하지 않는 곡이고 대학교에서는 아직 연주하는 곡은 아니었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들은 기억이 난다. 교수진은 일본 저명교수들도 많이 있었으나 각과마다 외국인 초빙교수가 상당수 재직하고 있었고 실기교수뿐만 아니라 딕션도 외국인 교수 이었다.

음악도서관에서는 등록만 하면 대여, 복사 등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음악감상실에는 곡목별, 작곡가별, 연주가별로 나누고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헤드폰」으로 서로 다른 곡을 들을 수 있는데 넓은 공간인데도 항상 만원이었다. 피아노 연습실은 1층부터 5층까지 상당수 있었으나 학생수가 많기 때문인지 시간제로 배당받고 일정한 연습비를 별도로 받는다. 일본의 음악대학의 입학자격은 한국과 별로 다른 바가 없지만 특별히 다른 점은 성악의 경우 피아노를 소나타까지 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노래는 반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과목도 많아서 노래는 물론이고 시창, 청음, 이론, 신곡 등을 이수하고 합격하며, 졸업도 까다롭다.

대학원 과정은 두 가지 형태이며 정규과정 2년제와 연주가 코스인 전공과가 있고 수업은 합만을 하고 전공과는 주로 연주에 필요한 과목만 이수하고 학위는 없다.

동경에는 구미각국과 공산권인 동구권 연주가들의 연주회가 매일같이 열리고 있었고 일본사람들도 사대사상이 있는지 유명도가 없는 연주자는 별로 관람자가 없었다. 일본유학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생증만 제시하면 음악 책, 레코드, 악기 등을 할인을 하여 주는 등 사회에서 최대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점과 학생들의 학구열이 타산적이라기 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문학교일수록 재수생이 많으며 5수 6수도 많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엄격한 학풍의 현장, 비엔나 대학




유민영 / 단국대예대학장, 연극평론가

유학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은 못되지만 70년대 초에 중부 유럽 오지 깊숙히에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교 연극학과에서 잠시 연구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비엔나대학교는 유럽의 다른 대학과와 달리 교수건 대학원 졸업생이건 상관없이 누구나 거기서 공부하려면 대학 입학생처럼 등록수속을 밟아야 한다 유학생이므로 한국에서 구비한 각종 학교 이력만 가지면 간단한 언어(독어)시험 (오럴테스트)만 거치면 등록금 없이 입학이 허가된다. 입학도 청강생이냐 정규학생이냐의 차이밖에 없다 정규학생은 학위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 한한다. 나는 당초 학위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정규학생으로 등록을 했다. 참으로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현직 교수였는데 대학에 갓 입학하는 수속을 밟았으니 말이다. 다행히 한국에서의 교수경력을 인정해서 곧바로 학위논문을 쓰도록 특혜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학과 주임교수를 만나는데 자그만치 2주일이나 소요되었다. 연구실에 뻔히 앉아 있으면서도 주임교수는 다른 스케줄이 선약되어 있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 옆방에 있는 비서가 주임교수의 스케줄을 거의 짜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한국에서의 교수모습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를 실감케 되었다. 특히 요즘같이 교수수난시대에 있어서랴. 역시 교수의 권위가 그 정도 되니까 유럽의 학문수준이 세계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엔나대학의 교과과정은 전공 위주로 빡빡하게 짜여져 있었고 고등학교의 수업 연한이 우리보다 길기 때문에 웬만한 교양과목은 고교에서 모두 이수했다. 그러니까 저들의 대학 제1학기는 우리나라 학제로 따지면 예과 2년을 거쳐 본과 1학년, 즉 3학년에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곧바로 무거운 전공 기초강의를 듣게 되는데 입문, 학술사, 방법론 등으로 1년여를 보내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세부로 나뉘어져서 학생 중심의 세미나식 강의로 진행된다. 저들은 매우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이어서 숙제도 많지만 전학생에게 부과하는 라틴어 시험은 특히 동양학생들에게는 굉장한 부담이었다. 별 필요도 없는 라틴어 공부를 해야 하니까 그렇다. 그때까지도 7년째 대학당국에서 동양학생들에게 라틴어 시험을 부과하느냐로 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점도 요즘 우리나라 대학들이 쉽게 교과목을 뜯어고치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되는 것이다. 저들 교수들은 매우 친절하면서도 엄격하게 논문지도를 한다.

일단 학위논문 테마를 받게 되면 한 달에 한 두 번씩 조금 쓴 논문을 갖고 가서 교수한테 보여 주고 수정지시와 함께 방향제시를 받아야 한다. 학위 논문 테마를 받기 전까지 5,6년 동안은 교수와 접촉할 기회가 그렇게 많지가 않다. 그러나 논문 테마를 받고부터는 자주 또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고 교수의 학문과 인간성이 학생에게 한꺼번에 전달되는 것이다. 저들 교수들은 학생을 일단 인정하게 되면 끝까지 돌봐준다. 반면에 학생이 한번 불성실하게 비쳐지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 도저히 그 대학에서 학위를 받지 못한다. 권위있는 교수라면 다른 대학으로 옮겨도 심사위원으로서 저지를 받게 되므로 학위 받기가 지극히 어렵다. 저기 교수들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권위가 있고, 권위를 지킬 만큼 연구도 철저하다. 우리나라의 대학과 교수수준도 하루 빨리 향상되어야 한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뉴욕시립대에서 판소리 선보여




김수남 / 청주대학 연극영화과 교수

해외 유학에 대한 기대감은 경우에 따라서 선망의 대상이 될 순 없지만, 대체적으로 우리보다 체계화되고 앞서간 지식을 보다 나은 학문탐구의 여건 하에서 접하여 보려는 욕구라 볼 수 있겠다. 이런 연유로 해외유학은 학문의 정도로 인식되는게 우리의 풍토다. 특히 우리 예술계의 사정은 그러하다 나날이 변천하는 예술세계에 대한 정보가 부재한 우리 예술계는 객관성을 상실한 채 오도화되고 체계화되지 못한 지식이 획일화한 예술교육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유학계획은 예술교육의 획일성으로부터의 탈피이며, 무한한 예술세계의 다양성과 새로움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된다.

미국 뉴욕시, 예술인 마을로 알려진 그리니치 빌리지에 이웃한 워싱턴광장에 소재한 뉴욕사립대학은 1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종합대학으로서 각기 개성있는 연극과가 예술대학, 문과대학, 교육대학 및 교육연수원 등 단과대학에 개설되어 있다. 내가 등록한 문과대학원의 드라마과는 80년 봄학기부터 공연학과 performance Studies로 개칭되어 새 출발한 세계 유일의 신 학과이다. 공연학과는 실기보다 이론을 중심으로 무대예술(연극, 무용)과 민속공연물을 교육한다. 그렇다고 이론만을 습득하진 않는다. 자신의 욕구에 따라 3개 단과대학 연극과에 개설된 실기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광범위한 커리큘럼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세부적인 커리큘럼의 체계화요 거기에 따른 전문교수의 확보다. 우리 연극과의 경우, 커리큘럼의 분리는 1단계적 기초학문의 수준이지만, 그들은 3단계적 커리큘럼의 분리로 학문의 깊이를 성취케 한다. 예를 들어 동양연극사를 설명하자면, 1단계의 동양연극사 그리고 세분화된 2단계로 극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 및 일본연구사로 나뉘어지고 마지막 3단계 과정에서 동양연극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제의적 공연물과 민속공연으로 대별시킨다.

이와 같은 단계적 과정을 무시하고 자유로운 커리큘럼의 선택에 힘입어 연기강좌중 마지막 단계의 하나인 뮤지컬공연을 선택했다가 당한 뼈아픈 기억이 생각난다. 뮤지컬공연 강좌를 위한 아무런 단계적 강좌의 습득없이 그저 뮤지컬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싶다는 욕심으로 수업에 임하였다. 수업결과의 평점은 손수 작사·작곡하며 춤과 연기와 노래를 해야만 가능하였는데 ,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한국에서 어설프게 배운 판소리로 평점하여 주도록 교수님께 사정하여 겨우 C학점을 딴 치욕스런 추억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지식을 얻어 낸 것이 자랑스럽다. 그 후 담당교수님은 내 극성에 동조하듯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며 브로드웨이에 있는 사무실로 찾아오면 언제든지 뮤지컬 리허설 현장을 안내하겠다고 약속하였다 . 덕분에 학교에서 공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외국유학에서 진실로 내게 도움이 된 곳은 학교 수업보다 엄청난 양의 자료가 보관된 학교도서관과 링컨센터의 자료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적 환경은 내게 한국의 풍토에서 예술적 천재가 탄생되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닫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되게도, 그 엄청난 지식과 문화적 환경이 나의 예술세계와는 무관함을 확신했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던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 될 수 있다고........

내가 유학에서 얻은 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이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아리조나 땡볕 아래, 즉흥연기





김방옥 / 연극평론가

외국 유학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과목은 무대미술시간이었다. 담당 교수는 예일대 박사로서 전공은 무대장치지만 선생님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분이었다. 냉소적인 눈매에 한문장마다 「four letter words」의 욕을 섞어 말하고 호모라는 소문도 돌았으며 고양이를 어깨에 얹고 다니는 괴짜였는데 수업방식 역시 독특했다.

내가 들은 수업은 대학원 과목이었기 때문에 목공, 페인트, 도면작성 같은 기초실기보다는 무대장치에 관한 디자인 개념design concept 중심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실제 무대장치를 위한 프롤플랜 floor plan이나 모델model을 만들기에 앞서 그 작품에 관련된 주변사물, 환경으로부터 기본적인 디자인 개념을 추출하는 작업을 요구받기도 했다. 또 그러자니 교수가 지정해주는 물건이나 장소를 찾아가 직접 관찰하고 느끼고 해야했다.

그런데 그 장소들이란 것이 매우 까다로왔다. 예를 들면 애완동물 묘지라든가 통조림 가공을 위한 가축 도살장이라든가 가장 지저분하고 수상한 거리에 있는 식당의 주방이라든가 포르노관이라든가 하는 식이었다. 워낙 친구들을 사귀어둘 만한 붙임성도 없고 마음대로 거리를 운전해서 돌아다닐 만큼 방향감각이 없던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사정사정해서 운전을 부탁하고 외딴 주소를 묻고 물어 그 고약한 장소들을 탐방해야 했다. 도시 한가운데 공원처럼 예쁘게 꾸며진 묘지의 비석에 씌어진 애완동물에게 바친 사연, 그리고 그 사연들에서 묻어나는 주인들의 외로운 삶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들이 즐비한 거대한 기계식 도살장, 험상궂은 남자들이 왔다갔다하는 더러운 부엌‥‥ 이런 것들로부터 인상적인 디자인 모티브design motif를 얻어내어 주어진 희곡작품의 내용과 연결시켜 내 나름대로의 시각적 방범으로 무대장치에 관한 기본 개념concept을 제시한 후 그것을 구체적인 프롤플랜이나 모델로 만들어 제시하는 것이다.

거의 십 년전의 일이라 지금 그 작품들도 없어지고 구체적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어떤 작품을 무대에 형상화하는 과정에서의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그 경험은 상당히 인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밖에 대학과목이었던 연기시간도 생각난다. 이 수업 역시 구체적 장면연습보다는 즉흥성이나 상상력 표출에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어, 고무밴드같은 주변의 일상적 사물을 이용해 10개의 상황을 창조해낸다든가 자신의 신체로 진공청소기와 같은 일상적 사물을 표현한다든가 하는 훈련들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집중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는지 몰라도 매우 곤란한 숙제를 받았다. 네 명씩 짝을 지어 시내로 나가서 사람들이 주변에 와글와글 모여 들만한 상황을 연출해보라는 것이었는데 단, 소도구나 대사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팀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결과 「유리운반」을 생각해냈다 즉 수퍼마켓 입구에서 커다란 유리를 운반하는 시늉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모은 그것을 떨어뜨리는 시늉으로 상황을 끝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미친 짓 하는 젊은이들에 익숙한 - 미국사람들은 한두명 홀낏거리다가 지나갈 뿐 그 더운 여름 아리조나 땡볕 밑에서 진땀을 흘리던 나는 곧 감기에 걸려 눕고 말았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삼위일체 교육의 요람, 뉴욕대학




김선희 / 이화여대 강사

뉴욕대학은 맨하탄에 워싱턴스퀘어 공원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나는 그곳School of the Arts의 무용과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기숙사에 들어갔다. 캠퍼스가 한 장소에 밀집돼 있지 않고 도서관은 명동에School of the Arts는 충무로에 있는 것처럼 산재된 건물 속에서 나는 입학수속부터 헤매이며 다녔다. 공부를 무사히 끝마치기 위해 떠나기 전부터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지만 실지 부딛히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했었다. 다른 언어와 생활양식의 차이점에 쉽게 익숙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유를 생각해서라도 하루빨리 익숙해져야만 했었기에 정신없이 나날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한 해에 유학을 떠났으니 사실 공백기가 거의 없는 학생생활의 연장인 셈이나 참으로 대학원의 공부는 힘이 들었다. 언어가 주는 고통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학과의 프로그램 자체가 숨막히도록 에너지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무용을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그 이상의 힘을 내기가 불가능하다할 정도로 그 당시에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외국인과 타 대학을 졸업한 미국인들이 이곳의 대학원 과정을 마치려면 90포인트를 따야만 한다 한학기당 16에서 15포인트를 할 수 있으니 약 3년을 요구하는 셈이다. 실기와 이론에 거의 반씩 비중을 두고 있으며 2년 동안에 필수의 이론과정을 마치게 되면 3년째는 실기와 공연을 위주로 한 교과과정으로 끝마치게 된다. 정말 힘겹게 느꼈던 교과과정이었으나 여러 면에서 지구력을 기를 수 있었던 귀한 경험이었음을 새삼 느낀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이면서 한 가지라도 더 배워야 된다는 신념으로 일관된 나날이었지만 졸업할 때까지 가장 결석을 많이한 학생이 네가 아닐까 생각한다 . 졸업할 때까지 아침 첫 수업은 매일같이 있었으며 그 수업을 맡는 선생님은 언제나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계셨다. 내게도 어려운 점이나 도와줄 일이 없는지 먼저 물어보시는 그분의 태도는 내가 배울 수 있었던 가장 큰 교육인 이었다. 체력이 왕성한 미국인들도 물론 풀타임full time의 프로그램을 힘들어 하지만 그들은 정말 열심히 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기본적 생활보장을 받는 이들이 대학교육을 받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대학교육을 받는 학생들과는 많은 의식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하기 위해 대학을 다니며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주는 것이다 . 학생들의 결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선생들 역시 한번의 지각이나 휴강을 하지 않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학생과 선생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철저히 하는 의식들 속에서 진정한 교육이, 질높은 교육이 이루어짐을 보았다. 뉴욕대학의 무용과가 우리나라의 무용과 프로그램과 많은 차이는 있지 않다. 다른점이 있다면 대학의 선생들은 거의 외부활동을 하지 않으며 철저히 학생들을 위한 시스템으론 full가동하는 것이다. 선생의 이름이 들먹여지지 않는 많은 공연과 외부의 훌륭한 안무자를 초빙해 학생들에게 폭넓은 경험을 줄 수 있도록 무용과와 선생들, 학생들은 삼위일체가 되어진다. 우리나라 대학무용도 더 질높은 교육이 되어질 수 있도록 재정적인 많은 투자와 진정한 교육을 위한 선생의 희생정신, 학생들의 적극적 자세가 뒤따른다면 그 발전은 굉장할 것이라 믿으며 다시 한번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미국대학, 지옥훈련




김석만 / 연출가, 중앙대 교수

대학에 들어가 연극반 활동으로 연극에 발을 들여논 이래 체계적인 연극교육과 장인적 훈련을 받기를 나는 늘 갈망했었다. 28살의 늦은 나이에 미국대학 연극과 3학년에 편입했을 당시만 해도 내가 지닌 연극의 지식과 경험은 정말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첫 강의가 시작되던 날, 책보따리를 메고 등교하면서 그간 한없이 불어왔던 기대가 불확실한 미래의 암담함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을 때 난생 처음으로 절망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다. 그 절망감을 이겨내고 내가 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게 내가 받은 연극교육의 전부이다. 그리고 그것은 체계적이고 엄한 장인적 훈련으로 가능했다.

그때 내가 다녔던 학교는 10주를 한 단위로 하는 1년 3학기 제도를 택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다름 아닌 지옥훈련이었다. 우선 그 연극과는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과에서 올리는 공연에 오디션을 참가하지 않으면 수강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비록 스텝을 하려 해도 연기 오디션을 일단 거치게 했다. 나는 그 오디션을 통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코 큰 아이들에게 망신당하기 싫어서라도 며칠씩 밤을 새워 대사를 익혀야 했다. 피를 말리는 듯한 오디션의 긴장된 순간은 아마 연기자라면 이해하리라.

한 학기에 보통 이론과목 2개, 제작과정과 관련된 과목 1∼2개를 선택하는데 이론과목의 과제는 엄청났고 매 학기 참가해야 하는 제작연습은 밤늦도록 끝날 줄 몰랐다. 이론과목당 과제물은 우리로 치면 원고지 100매 분량짜리 리포트 하나 이상에 주관식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예외 없이 보았다. 한 과목당 1주일에 읽어야할 희곡이 2∼3편, 정교재가 2-3권, 보조교재가 5∼6권이었다. 또 선생에 따라서는 수시로 단답식 20분짜리 짧은 시험을 보았다. 그곳에선 이런 짧은 시험을 퀴즈quiz라고 부른다. 다음 시간에 퀴즈를 보겠다는 교수의 말에 재미있는 수수께끼 푸는 것이거니 생각하고 갔다가 그만 첫 퀴즈를 빵점맞고 낭패한 웃음을 터뜨린 경험이 있다 . 어쨌든 아무리 산술적으로 계산을 해도 그 과제 및 예습·복습을 해낼 절대시간이 모자랐다. 어떻게 그 과정을 낙제 않고 마쳤는지 꿈만 같기만 하다. 그 당시에는 어디에든 머리가 닿기만 하면 잠에 떨어졌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에 신명 나게 공부했던 기억뿐이다.

그 고된 가운데 날 신명나게 만들어 준 지도교수들의 장인적 실천 또한 잊을 수 없다. 나이가 지긋한 조명선생님이 계셨는데 이 선생님은 내가 소금독 디머를 써왔다는 사실 하나로 내게 특별한 관심을 베푸셨다. 이 분은 매주 샌프란시스코 하늘의 변화를 관찰 대상으로 한 숙제를 내 주었다. 태양은 광원, 도시는 무대, 하늘은 싸이로노라마, 도시 환경은 무대장치,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은 배우, 그리고 관찰자는 관객, 조물주는 연출가라는 지론이었다. 그분에겐 평론가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분은 일기변화에 따른 학생들의 느낌을 기록하게만 할뿐 과제물을 평가하진 않았다. 그분 밑에서 일년간 조명을 배우고 나서야 어렴풋이 그 뜻을 헤아리게 되었고 훨씬 후에 연출작업을 할 때야 그분의 위대한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다. 무릇 예술교육엔 왕도가 따로 없다.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 자신과 자신이 속한 환경 속에서 자극을 받아 상상력을 넓히며 일상 속에서 적합한 표현을 발견해 내는 것이 평생의 예술교육이라고 여긴다.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지옥훈련 같은 초기 교육과정과 주름살 많고 두툼한 손을 가진 그 스승을 생각하며 힘을 얻는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뉴욕주립대의 예술적 매력




김성곤 / 서울대 영문과 교수

나의 문학수업은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약 6년간 미국에서 이루어졌으며, 수련장소는 버펄로 소재 뉴욕주립대학교와 뉴욕시 소재 컬럼비아대학교 영문과였다. 그리고 내가 받은 교육은 문예창작이라기 보다는 주로 문학연구와 문학비평, 그리고 문학교수법에 더 가까운 분야였다.

뉴욕주립대의 예술교육 방침은 기본적으로 전통과 혁신의 조화이지만, 사실 그곳의 매력은 새로운 예술감각과 새로운 예술양식에 대한 관대한 허용과 과감한 장려에 있었다고 기억된다. 예컨대 에릭 벤틀리가 주축이 되고 있었던 연극학과에서는 해마다 델라웨어공원의 로즈 가든이라는 곳에서 세익스피어극을 현대화 시킨 실험극을 공연했었고, 존 바스나 레이먼드 페더만이나 로버트 크릴리가 주도하고 있었던 창작강좌에서는 각종 실험소설과 실험시들이 산출되었으며, 레슬리 피들러나 노만 홀랜드 등이 담당하고 있었던 문학연구강좌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 심리분석이론, 또는 기호학 같은 혁신적인 문학이론들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뉴욕주립대의 또 한가지 매력은 그곳이 예술을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최대한의 자율과 개성을 허용해 준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은 소정의 세미나 강좌들을 이수한 후엔, 개인연구나 연구지도, 또는 논문지도 등의 코스에 등록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를 담당교수와 단 둘이서 토론하고 지도를 받을 수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외국에서의 나의 문학수업시대를 가장 값진 경험으로 만들어 준 것도 바로 그 자유스러운 학문 분위기였다 .

주립대학의 진보적 분위기를 최대한 살린 뉴욕주립대와는 달리 컬럼비아대는 사립대학의 보수적 분위기를 꽤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 물론 세계에서 가장 템포가 빠른 도시 뉴욕에 캠퍼스를 갖고 있으며, 앨런 긴스버그나 잭 케로악 같은 많은 전위 예술가들을 배출했고, 「진보적 상상력」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라이오넬 트릴링의 대학답게 컬럼비아는 분명 진보적인 면을 갖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진보성은 늘 유럽적인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성에 의해 견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컨대 개인연구나 연구지도 같은 과목은 아예 없었고, 교과과정도 고전시대와 중세에 많이 편중되어 있었으며, 현대문학강좌는 기껏해야 모더니즘 시대만을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두 대학 다 공통되는 점은, 문학강좌가 학생들의 자유스러운 토론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두 시간 동안 계속되는 세미나에서 학생들은 각자 읽어온 한 두권의 문학작품을 놓고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새롭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창출되는 것을 보았다. 예술은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나라와 인종을 초월해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한번은 수업 중 어느 미국인 학생이, 자기는 중국인이 성경이나 「실낙원」을 읽으며 우는 것을 상상할 수 없노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동양인은 결코 영문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다. 성경을 읽으며 우는 동양인이 사실은 많이 있다는 것 , 한국에서는「십오 소년 표류기 」를 읽고 실제 섬으로 떠난 소년들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미국에 와 있는 거라는 것을 그 어리석은 미국인 문학도에게 설명하며, 나는

예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와 나의 깨우침조차도 사실은 자유스러운 토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융통적 교육의 현장, 일리노이주립대




유한태 / 미학박사. 숙대 교수

필자가 1980년 미술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떠나게 되어 미술실기로서 그래픽디자인과 사진, 미술이론의 관련과목 등을 주로 연구하게 된 대학은 미국의 중서부 일리노이주 Normal-Bloomington에 자리잡고 있는 일리노이주립대 Illinois State University였다. 13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대학은 당초 사범대학으로 출발했으며 당시 학생수가 2만 명이 넘는 미국 전체에서 중간규모의 대학이다.

미국에는 대학수준의 학교가 약 3천 4백개로 추산되고 있는 엄청난 숫자이지만 이들 대학이 모두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개성이나 교과과정상의 특성을 갖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 대목이다. 미술분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각 대학마다 독특한 대학편제와 이에 따른 교파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일리노이주립대의 경우 「College of Fine Arts」라는 명칭의 단과대학이 있고 이 속에 미술, 음악, 연극영화Theatre등 3개과를 운용하고 있는데 이같은 대학편제는 시각예술과 청각예술 및 종합예술의 일원화를 재확인하고 이들을 서로 연계시켜 활성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미술과Department of Arts의 경우만 해도 학과장을 비롯 총 30여명의 전임교수들이 미술의 세부분야에 교과목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같은 일련의 교육은 이 대학 「미술센터」Center for the Visual Arts에서 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은 「예술대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 대학의 교육내용은 크게 둘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술의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살리려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초등, 중등, 대학교육에 필요한 교육자를 양성하는 전문적 훈련을 받으려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대학원 교육과정에서도 그 학위명칭이 M. A., M. S, M. FA., Ed. D. 등으로 다양한데 학부나 대학원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흥미와 필요에 따라 교과목을 융통성 있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이 대학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원의 경우학생 자신이 계획한 잠정연구계획서를 토대로 해당학위과정 지도교수 Director나 Advisor와의 광범위한 협의를 거쳐 어떤 과목을 언제 얼만큼 수강할 것인가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인데 그만큼 이미 준비된 교과목의 내용이 다양하고 방대한 것이다. 특히 미술(학) 박사과정의 경우는 미술실기와 미술이론을 골고루 공부해야 하는 것이 기본 요건으로서 학생자신이 연구계획서plan of study를 작성하여 대부분의 과목이 미술과 안에서 수강하는 코스워크Course Work의 과정인 한편 부전공Minor의 경우 15학점 정도를 미술과의 밖에 다른 과에서 이수해야 하는 엄격한 조건이 따른다. 손자병법의 「지피지기」의 교육철학을 이미 구현하고 있는 셈인데 이같은 부전공필수의 교육과정을 통해 「제3의 학문예술영역」이 배태되어 균형있고 다양하며 조화있는 교육전반의 「모양 갖추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듯한 인상인데, 이같은 현상은 비단 이 대학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이른 바「학제적 연구Inter-disciplinary를 지향하는 현대교육의 공통적 경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뮌헨에서 싹튼 꿈




김광규 / 시인. 한양대 교수

옛날에 독일의 뮌헨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알프스산맥을 멀리 병풍처럼 두르고 바이에른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예술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다.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나도 적잖은 손님을 치루었다. 구미 유학생들이 방학을 틈타 방문하기도 했고, 직업상의 용무로 한국에서 파견된 친구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유럽 관광을 하던 길에 들린 팔자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항상 시간과 공부에 쫓기는 대학생에게는 이들에게 관광 안내를 해주는 것도 커다란 일이었다. 예술의 도시를 찾아 왔으니 우선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안내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수효가 너무 많아서 모두 가볼 수는 없고 방문객의 취미에 따라서 한두곳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옛미술관Alte Pinakothek」이나 「새미술관Neue Pinakothek」과 「독일박물관Deutsches Museum」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옛미술관」에는 우리가 미술책에서 보았던 루벤스, 렘브란트, 뒤러 등의 많은 그림이 전시되어 있고, 「새미술관」에는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예술의 집 Haus der Kunst」같은 미술관에서는 외국의 저명 화가들 작품이 순회 전시되고 있어, 프랑스의 명화들은 물론 아프리카의 토속미술품이나 극동의 동양화까지 이곳에서 볼 수 있다.「독일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과학기술 박물관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를테면 비행기관에는 인간이 최초로 제작한 날개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초음속제트기에 이르기까지 실물을 그대로 진열해 놓았고, 그 내부에까지 직접 들어가 보게 되어 있다.

광산관에는 옛날에 갱도 속에서 마차로 석탄을 실어 나르던 모습과 땅속에서 소금을 캐어내는 광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고, 인쇄관의 한 귀퉁이에는 고려시대의 우리 활자도 전시되어 있다. 모두가 정말 그 분야의 현장을 체험하는 듯한 실감을 준다.

뮌헨에서는 음악회나 연극이 연중 무휴로 계속된다. 음악회에서는 고전과 현대 작품이 곁들여 연주되는 수가 많다. 극장은 제각기 전문화되어 있다. 괴테에서 브레히트까지의 본격적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 오페라나 뮤지컬 또는 시사적 풍자물을 공연하는 극장, 옛날 영화만을 돌려주는 영화관 등 각양각색이므로 취향대로 가볼 수 있다.

역사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다하우 강제수용소」 유적지도 꼭 가보아야 할 곳이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맥주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어느 곳을 가보든지 단체로 몰려다니는 두 그룹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관광객 그룹이고, 또 하나는 교사가 인솔하는 학생들 그룹이다. 독일의 학교에서는 예술이나 기술에 관하여 배울 때, 교실에서 교과서를 통하여 이론적으로 배우는데 머물지 않고, 반듯이 실물을 감상하고 현장을 견학한다. 그들의 예술교육은 실제로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자기 손으로 그리고, 연주하고, 만드는데 중점을 둔다. 그리고 예술이나 기술에 소질이 있는 학생은 국민학교 4학년을 마친 다음부터 곧장 예술학교나 공업학교로 진학하여 일찍부터 특기 교육을 받도록 한다. 우리의 교육제도처럼 12년동안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을 모조리 이수한 다음 전과목 시험을 거쳐 음악대학이나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예술수업을 시작한다면, 안네 조피 무터 (Anne-Sophie Mutter)같은 천재 연주자를 길러내기는 힘들 것이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어바인대학에서 교수들과 호흡하며




정옥조 / 숙명여대 무용과 강사

춤 그것의 의미와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강한 의혹이 끊임없이 부딪혀오던 시절.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감성과 정열을 묻어 두기엔 너무도 답답하고 무지했던 한국에서의 대학교육 4년을 훌훌 털어버린 채 나는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우선 나름대로 선별한 미국(美國) 대학 무용과에 지원서를 내고 제대로 배울만한 곳을 찾아 전전긍긍하였다. 이것은 오직 좀 알아야겠다는 강한 의욕과 나 자신에 대한 실험 (?)이기도 하였으리라. 어쨌든 나는 서류심사를 거쳐 미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은 학위가 M. A. 현대무용 및 체육학과목 위주로 된 강의가 많았고, 개인에 따라 원하면 다른 실기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나는 또한번 의심한 갈등과 회의에 부딪혔다. 이것만으로는 도대체 잘 모르겠다는 결론이었다.

나는 당시 그 학교의 orehesis무용단의 단원으로서 여러 편의 공연을 만들고 출연하면서 그들의 제한된 교육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놓고 나는 다시 더 나은 곳을 찾아 나셨다. 그곳이 바로 UEI. 캘리포니아어바인대학교이다. 다시 지원서를 내고 1년을 기다리면서 이 학교에 시험을 치를 준비를 하였다(이 학교는 1년에 한번 학생을 받는다). 어학 및 실기시험, 서류심사, 인터뷰를 거쳐 합격통지서를 받은 나는 더 이상의 바랄게 없다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그 학교는 나를 포함한 그곳에 모인 학생들의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학위는 M. F. A. Master of Fine Arts로서 2년에 최저 72학점을 요구하는데, 막상 졸업할 때의 학점은 90학점을 넘게 된다 대학원 1학년은 필수적으로 무용사 및 그에 관련된 예술사를 3학기 들어야하며(1년이 4학기임) 무용교수법(3학기), 무용테크닉 (대학원 코스나 상급코스로) 2개이상 7학기, 대학원 프로젝트, 그리고 선택과 두 코스의 논문법을 택해야한다. 다음 2학년에서는 역시 무용사 및 그에 관련된 예술사(3학기), 무용테크닉 코스(3학기), 프로젝트, 그리고 졸업논문이 요구된다. 무용 교수법에서는 무용역학 및 춤의 테크닉분석 및 춤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치료법, 신체 해부학적측면 연구와 춤의 형태의 분석 및 스튜디오에서의 교수법, 안무법을 공부한다.

특히 이곳에서의 무용실기는 현대무용, 발레, 재즈 코스를 다 택해야 하며, 이것은 프로젝트에 포함된 안무법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필수과목으로 요구된다.

또한 프로젝트는 안무에서부터 음악, 의상, 조명까지 한편의 무용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기 전에 수반되는 모든 과정을 학생들 스스로 만들어야 하며 작품의 설명서 및 수반된 과정의 설명서를 역시 첨부해야만 한다. 또한 교수법에서의 3학기에는 실제로 수업에 들어가 한시간 반짜리 수업을 여러 교수와 대학원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하여 이들로부터 평가를 받게 된다.

실제로 잘한 것보다는 보완해야할 점과 부족한 점을 평가받는데, 이것은 우리를 긴장시키게 만들었고, 또하나의 고민스러움을 만들었던 하나의 좋은 추억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나는 나의 의혹이었던 춤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이 학교에서 풀 수 있었다. 미국 무용사에 기여했던 실력있는 교수들과 더불어, 학문과 예술 그리고 인간적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예술가로서, 교육자로서의 그들의 삶은 엄격하면서도 자유롭고 그리고 순수하기 때문이리라. 힘들고 정신없이 보냈던 나의 유학생활은 그들과 더불어 호흡할 수 있었기에 보람있었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마카로바의 교훈을 되새기며




조승미 / 한양대학교 무용과 교수

내가 다니던 U. S. C.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하고 있는데 세계 각처에서 유학은 많은 학생들로 또한 사립대학으로서 명문대학 중의 명문학교이다. 공부벌레처럼 보이는 수많은 학생들의 모습은 유학생뿐만 아니고 미국학생들의 전체의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흔히「미국」이라는 나라를 연상할 때는 극히 자유스럽고 화려하고 보다 개방된 분위기 속에 화려한 상류사회의 모습이 연상되고 때론 마약중독자, 거지들, 동성연애, 난폭한 흑인들의 모습이 미국의 전부인 양 무서울 때도 많다.

하지만 미국의 참 모습은 참으로 여러 곳에서 찾게 되는데 그중 하나는 그 무서운 범죄가 들끓는 암흑가 옆에 밤이나 낮이나 무섭게 책과 씨름하는 공부벌레들의 모습이다. 밤이 새도록 도서관의 불이 켜있고 샌드위치나 빵조각을 책상 앞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밤을 새며 정신없이 연구하는 동안 어느새 손은 맨 책상만 만지게 될 정도로 무섭게 공부하는 무리의 모습이 또한 미국이다.

그런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깊은 안도의 숨을 쉬게 되고 쉽게 미국이 망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또다른 미국의 모습을 알게된다.

나는 체육대학 무용학과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수업시간은 무척 엄격하게 진행되면서도 참으로 화기애애한 분리기로 즐거운 시간시간을 보내게 만든다.

발레를 지도하는 교수님은 「네오타드」와 「타이쓰」를 깨끗하게 차려입고 항상 의욕에 불타서 수업을 진행하며 무용실 전체를 다닐 수 있는 바퀴 달린 녹음받침대를 만들어 열심히 테이프를 바꿔가며 지도하신다. 물론 매시간 실기를 가르치면서 동작의 용어 설명은 빼놓지 않는다. 꼭 외우도록 반복케 하며 한 달에 한 번 시험을 본다. 이론시험은 교실에서 시험지로 보게되는데 「용어를 써놓고 설명하시오」, 「동작설명을 단어로 쓰시오」등이다. 확실한 이해와 능력을 기르는 시험이었다. 비디오를 통한 수업도 가끔 있었는데 여러 무용테이프를 관람하였지만 특히 잊혀지지 않는 것은「마카로바」주연의 지젤이다. 그때 마침 「마카로바」는 임신 5개월 중 그 영화를 찍은 것이었다.

교수님이 특히 그 점을 강조하면서 여성 무용수들의 애로사항과 필요한 이야기를 곁들여 주었다.

무척 인상깊은 수업이었고 다시 한번 「마카로바」의 위대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여성 무용수들이 겪어야하는 필요한 과정에서 참으로 어려운 작업을 해낸 「마카로바」의 그 놀라움은 결코 임신 5개월 이였을지라도 유산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만든 작품 중의 하나였음을 설명 듣게 되었다.

예술은 위대한 용기를 낳게 하고 위대한 용기는 아름다운 예술을 영원히 보존하게 한다는.....

그 비디오 수업을 통한 우리의 교육목표는 충분히 성공하였고 많은 교훈과 찡하게 오는 그 무언가를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아무튼 교수와 학생간의 무언가 느낄 수 있는 귀한 교육분위기는 영원히 나의 교육경험에 큰 보탬이 되리라 믿고 특히 U. S. C. 학교분위기 속에 학생과 지도교수, 과장 등 참으로 즐겁고 확실한 그리고 알찬 공부의 현장이라고 느끼게 하였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현대음악의 산실, 구라파 음악학교




최동선 / 작곡가

구라파(독일) 음악학교의 전문음악교육 시스템은 우리 나라의 경우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 교육기간이 그렇고 교육방법에서 특히 그렇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음악전문교육이 주로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그곳의 경우는 콘서마토리움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식 교육제도를 표방하고 있으면서 전인교육을 목표로 하고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그곳에서는 음악예술 창조의 전문성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여 3학년 때부터 전문과정을 본격적으로 이수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중학교 과정을 마치면 곧바로 각 음악학교는 자체에서 정한(문교부가 정하지 않음) 학생선발 기준에 따라 신입생을 선발한다. 일단 선발된 학생은 음악가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전문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우리 나라처럼 국어, 영어 등 교육필수나 교양선택 등의 학과목 이수가 아니라, 모든 과목은 음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학과목, 전공실기 (음악개론, 솔페지오, 음악사, 화성학, 대위법, 음악분석, 음악감상 등)만을 이수하게 된다. 이처럼 음악의 효과적이고 창조적인 훈련을 위해서 다른 교과과목 (교양과목)으로 인한 에너지의 소모를 막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곳의 음악학교의 교양교육은 중학교 교육으로 일단 마감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제도와 크게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약3-4년의 전문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소위 우리나라의 대학원 과정이라 할 수 있는 마이스터 과정에서 계속하여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은 학교가 정한 실기시험에 응시하여 시험을 치른 다음 곧바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시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졸업시험과 비슷한 성격을 갖긴 하지만, 그 보다는 중간고사 정도의 비중을 갖게 된다. 이는 마이스터 과정에서 연구할 수 있는 능력 판정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에 관계없이 교수의 재량권에 따라 「패스」가 결정되면 그로부터 2∼3년의 연구를 할 수 있게 되고, 「노 패스」가 결정되면 시험에 응시하기 이전의 과정에서 다시 더 공부하면서 다음 시험을 기다려야 하는 시스템이다.

필자가 유학했던 학과는 구라파 전역에서 쾰른 Koln음대에만 유일하게 설치되어 있는 뮤직 디어터 Musiktheater 학과였다. 이는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만 생각해 왔던 종래의 감상 개념에서 벗어나 「보고 듣는 것」이라는 감상개념으로 새롭게 발전되어야 청중(관중)의 공감대를 쉽게 형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학과의 정원은 6∼8명이다. 내가 입학한 당시 학생들의 국적은 가지각색이었다. 독일인이 2명, 프랑스인이 1명, 영국인 1명, 스페인이 1명, 미국인이 1명, 이스라엘인이 1명, 한국인 1명(필자)이었다. 강의는 독일어로 실시되지만 지도교수였던 마우리치오 카겔Mauricio Kagel은 본래 철학을 전공한 후, 전공을 음악으로 바꾼 알젠틴 출신의 독일인(귀화)으로, 필요에 따라, 독일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등을 능통하게 말할 수 있어, 세미나 시간에는 4∼5개국어로 학생들의 질문에 답한다. 나 같은 한국인은 지금 교수가 말하고 있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하와이대학, 열정의 교수 공연




허영일 / 무용평론가

하와이 대학!

10여년 동안 키워 왔던 나의 조그마한 열정의 이슬들이 아롱져 열어지기 시작한 곳.

하와이대학의 첫 가을 학기는 시작되었다. 내가 선택한 과목은 「무용사」「훌라」「Hawaii dance and Music」「여성무용」(처음 개설된 강좌)」「무용비평」이었다. 산드라 하몬드는 하와이대학에서「무용사」를 가르치는 교환교수이자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무용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으로 새로운 강좌인「여성무용」을 함께 담당하고 있다. 그녀는 뉴욕에서 줄리어드 학교의 안토니 튜더, 마기렛 크라스크, 발레레퍼토리학교의 이탈리아 마라로부터 무용을 배웠다. 그의 저작 중에는 발레의 테크닉과 역사에 관한 것이 많은데 최근에 나온 「발레에의 기초」제2판은 널리 읽혀지고 있다.

강의실에서의 커피문화 분위기는 이국인인 나에겐 낯설기도 하려니와 과중한 학습량 때문에 힘들었다. 우선 교수의 영어를 알아듣기는 해도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에 어떤 과목이건 대개 교과서가 2∼3권, 참고서적도 최소한 5∼6권은 읽어야 했으니 처음부터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한가닥 기쁨이자 위안이었던 것은「무용사」시간의 30분간의 필름 상영시간이었다. 「발동작 Toe-Work」을 개발한 최초의 발레리나인 마리 타그리오니의 담쟁이 넝쿨 우거진 고색창연한 생가와 그곳에 보존되어 있는 토슈즈, 마고트폰테인·조지 발란쉰의 기초훈련과정의 모습 등은 나의 어두운 마음에 빛을 던져 주었다. 「무용사」의 중간시험은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공연을 보고 조르쥬 노베르(1727-1810)의 관점에서 현대발레를 비교 분석하는 것이었다. 노베르의 춤 철학은 발레동작이 기교상으로 화려해야 할뿐만 아니라 극적인 풍부한 표현을 통해 관객을 감동시켜야하고 이야기 줄거리는 구성상의 통일을 기하는 동시에 논리적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독무 등 연속되는 춤은 줄거리를 무시해서는 안되며 작곡은 테마에 알맞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20세기에 온 노베르가 되어 NBC홀 객석에 앉게 되었다. 신디사이저 음악과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 액센트가 큰 포르드 브라 Port de Bra 자동차 바퀴가 무대 위에 굴러가고 바퀴 속을 통과하는 무용수들. 자전거 바퀴는 분해되어 끊임없이 무대를 횡단하고, 이러한 것들이 노베르의 입장에서 보면 한낱 도깨비 장난 같았다. 그러나 200년 사이의 무용의 변화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강의실을 찾느라 헤매이던 시간으로부터 캠퍼스 어디든 자유자재로 잔디의 감촉을 만끽할 수 있게 된 학기의 끝무렵 하와이대 무용교수단 지도공연이 템포러리 댄스 빌딩에서 열렸다. 교내에 케네디극장이라는 미국 내에서도 수준급의 무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극장 이동무대 형식을 이용 조촐하게 공연된 것이다.

레퍼토리는 「에스파니아의 폴리 」와「탱고는 어떻게」. 처음의 것은 강의 받은 내용이 관련되어 있는 작품으로 태양왕 루이14세가 그의 발레교사 보샹에게 동작의 형식을 모두 기술해 줄 것을 요청했고 최초의 추상적인 무용표기법이 보샹에 의해 만들어졌다. 1700년대 초엽 또는 중엽의 안무가들은 당시의 발레활동을 개척해 보려 하지 않았는데 이 무용표기법을 기초로Feuillet는 「볼륨댄스」를 표기했고 Pecour는 「사교댄스」를 표기했다 . 이러한 문헌들과 표기법을 통해 현시점에서 재창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 산드라 교수의 지론이었다. 그는 1부에서 고증에 의해 자신이 만든 1700년대 궁정발레의상을 입고 나와 품위있고 화려하고 경쾌하면서도 당당한 그리고 매우 절제있는 동작으로 정력, 화려함, 날렵한 발동작 등을 통해 당시 Pecour와 Feuillet의 안무를 표기법을 통해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보였다. 「탱고는 어떻게」는 재즈댄스를 가르치고 있는 캐롤 페이지 교수의 작품인데 그는 특수한 리듬과 남미 전통음악에 맞추어 꿈속에서의 탱고를 보여준 다음 스텝 하나하나를 시범형식으로 코믹하게 엮어 시도해 가면서 폭소를 자아내게 함으로써 학생들에게 탱고를 배우게끔 하는 그런 것이다. 이렇게 교수님들은 그들의 강의와 연관된 실기와 연구결과를 보여주었다.

캠퍼스 안에는 우리의 마루와 같은 태국식의 정자가 있었다. 나는 가끔 거기에 누워 푸른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았다 . 새의 비상(飛翔)은 참 자유롭게 보였다 . 힘도 들이지 않고 어떻게 저리도 가벼이 날수 있을까?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세련된 나는 솜씨 때문에 그리 쉽게 보일 뿐 실은 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새들은 날다 지쳐서 정자 꼭대기나 잔디에 내려앉아 쉬고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쉽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 아주 힘든 고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공연도 NBC홀도 케네디 극장도 아닌 곳에서 학생들을 위해 명성도 생각지 않는 열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발표회가 끝난 후 산드라교수의 목에 레이를 걸어 드린 나는 우러나오는 존경심으로 그의 땀흘린 얼굴을 생생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특집 / 예술전문교육

그 교실 그 보람

몽블랑 영봉 아래




정소성 / 작가, 단국대 교수

내가 프랑스에 간 해는 1981년이었다. 외무성 초청이었다. 공부하고 싶은 대학을 말하라기에 그르노블을 원했다. 나의 요구대로 되어 주었다. 도불하기 직전까지 문통이 있었던 르 이르오 Le Hir 교수에게 랑데뷰(면회)신청을 했다. 교수의 권위가 절대적이라 과 사무실에 가서 랑데뷰신청을 해서 시간약속을 받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다. 과 사무실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교수 집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어렵게 르 히르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지정한 날짜와 시간에 그의 연구실 앞으로 갔더니 학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옆방 교수도 학생들 틈에 줄을 서고 있었다. 교수에게 내 소개를 하고 쌩떽쥐페리를 연구해서 박사논문을 쓰고자 하니 지도를 허락 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쌩떽쥐페리에 대해 쓴 논문을 가져와 보라고 했다. 다음 주 그 시간을 지정해 주었다. 르 이르 교수는 역시 교수인 나에게 꽤나 깐깐하게 굴었다. 나는 나이도 마흔 가까이 되었고 소설을 쓰기 위해 천 페이지 이상의 원고지까지 가지고 온 처지라 깐깐한 교수를 만나 하드 트레이닝을 받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지도교수를 르네 브르조아 Bourgeois 교수로 바꾸었다. 오전에 기숙사에서 논문을 쓰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도서관에 나가 소설을 조금씩 썼다. 그 나라 외무성 초청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쓰러 간 사람이, 대학 도서관에서 한국어로 소설을 쓰다니 남들은 곧이 듣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논문을 쓰기 위해 불문학 서적들을 독파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내 가슴속에 들끓고 있던 창조의 혼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르노블 문과대학 도서실에서 쓰여진 작품이 나의 중편「슬픈 귀국」과 「쌀 안치는 소리」이다. 나는 프랑스에서 소설창작을 위한 특수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유학은 나를 소설가로서 입신시키는데 큰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프랑스는 그야말로 문학인의 나라라는 사실의 인식에서 오고 있다. 언어와 문장을 그렇게 정밀하고도 철저하게, 그리고 일상적으로 다듬고 즐기는 민족이 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그르노블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샹베리라는 산악도시가 있다. 알프스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서 일년 내내 눈에 덮혀 있는 도시이다. 이 산악도시는 루소가 도망와 숨어서 글을 쓴 곳으로 유명하다. 질베르 뒤랑이라는 인류학자가 이곳에 살고 있다. 그는 그르노블 대학교의 샹베리 분교 교수인데, 세계적인 학자이다. 그의 중요저서는 「인간상상력의 인류학적 구조」인데 대단한 명저인 모양이다. 그르노블프대학(법상대학), III대학(문과대학) 교수들은 외국학생을 만나면 거의 이구동성으로 이 책을 읽었느냐고 묻는다. 뒤랑은 향리를 떠나지 않고 여기에 살고 있다. 바슬라르가 인간 상상력의 기본 원리는 물, 불, 공기, 흙 네 가지라고 했는데 뒤랑은 여기에다 눈(雪)을 덧붙여 다섯 가지라고 주장한다.

뒤랑이 어느날 그르노블에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무심코 강연장에 갔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청중들은 손에 녹음기를 들고 있었다. 작가와 시인의 작품을 너무나 열심히 읽어주는 이 나라의 풍토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나라의 소설과 시를 가지고 오만 가지 방법의 연구를 시도하여 거기에서 위대한 학문을 도출시키는 이 나라의 풍토는 진정 언제 우리의 것이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