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완성에 목적을 둔 무용교육
-무용교육의 발전방향
이병옥 / 대한 유도대학 무용과 교수
최근 국내 무용계는 전국 20여 개가 넘는 대학 무용학과가 증설되어 무용인구가 폭발적으로 양산되고 있다. 또한 이에 편승하며 대학무용이 국내 무용계를 주도하면서 공연 횟수도 매년 반 배 이상씩 증가되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용인력의 양적 증가에 따르는 직업 무용단의 수급면에서는 극히 미비한 실정이다. 즉 서울의 국립 시립무용단,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국악원무용단 그리고 몇몇 도시의 시립무용단이 고작이며, 유일한 기업체의 럭키무용단마저 존폐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무용단은 대학졸업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교수 무용단이나 같은 무용학과 졸업생 중심의 동창 무용단, 무용연구소의 연구생을 중심으로 한 학원 무용단 등 대부분이 비직업적이고 아마추어적이고 공연 때마다 재조직되는 일시적인 형태의 무용단이 국내 무용예술의 현실이다.
따라서 예술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할지라도 프로다운작품을 만들기 어려운 영세한 여건으로 말미암아 공연문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국내 무용예술교육의 문제와 발전방향에 대하여 논해보기로 한다
국내 무용예술교육의 문제와 발전방향
첫째, 대학 무용학과의 성격이 불분명하여 예술교육도 문제가 있으며 무용공연에도 문제가 있다.
대학 무용계가 예술의 전당이나 공연의 현장처럼 여겨지는 불합리를 속히 청산하고 대학 본연으로 돌아가 학문의 전당이 되고 교육의 도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 무용계의 실정이 유능한 무용가가 직업적으로 안정된 대학무용 교수직으로 편중된 나머지 대학무용의 비중이 높아지고 무용단이 약화되는 기현상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대학무용 내에서도 학자 부재의 구조를 이루어 실기 위주의 교육과정으로 짜여져 있다. 그리하여 논문 하나 못쓰고 졸업하는 학사를 양산하고 있으며 학생작품 발표회와 교수공연까지 성시를 이루어 전체 무용계에 차지하는 공연 비중도 높아져 대학이 마치 공연의 현장이나 예술의 전당처럼 느껴지는 착각마저 드는 실정이다.
무용예술을 본격적으로 추구하면서 훌륭한 무용가들이 두꺼운 층을 이루고 있는 유럽지역의 각국에는 놀랍게도 대학에 무용학과가 있는 나라는 단 일 개국도 없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오짜노미즈 대학에 단 하나의 무용학과가 있으나 완전히 학문 중심의 무용학과이다.
미국은 원래 다양성에 입각한 나라이므로 연극 계열, 음악계열 등에 속하는 형태로 무용학과가 있으나 우리의 무용학과와는 성격이 아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결국 우리 나라의 대학 무용학파는 외양적으로는 전국 27여 개 학과나 되는 세계적인 숫자를 보유하고 있는데 반하여 내면적으로는 무용학과의 좌표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채 방황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일반 무용학교가 있어서 전문 무용가들에 의해 기능이 뛰어난 무용수를 양성하여 직업무용단의 많은 무대 경력을 쌓아 전용극장에서 훌륭한 무용가로 성장하게 된다.
우리 나라는 학력을 중시하는 풍조로 인하여 이런 나라들이 직업무용단이나 극장에 부설된 무용학교와 같은 기능을 대학무용학과에서 담당하여 무용가를 양성하고 있으니 쑥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대학무용이 정상화되어 대학 본연의 학문의 길을 찾게된다면 유능한 무용수들이 보다 넓은 예술의 세계에 심취하고 보다 많은 실기를 경험하고 이론을 정립하여 더욱 훌륭한 무용가로 성장할 수 있게 교육이 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둘째, 대학교수는 무용가가 될 것인지, 무용학자가 될 것인지 자기 거취를 분명히 하여 대학을 떠나 참된 무용 예술인의 길을 택하거나, 학문을 탐구하고 실기지도의 방법론을 연구하고 적용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참된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대학에서 교수와 무용가를 겸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수 본연의 자세와 직무에 이탈되는 사례가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교수라면 당연히 대학생들에게 이론적 바탕을 심에 주고 실기능력을 향상시켜서 무대경험을 얻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용가적 기질을 떨쳐 버리지 못해 자신의 공연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면 학문은 점차 멀어지고 교육은 소홀해져 오히려 학생들을 자기 무용의 도구로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학생을 위한 작품 발표회인지 교수를 위한 공연인지가 불분명해지고, 발표회와 공연의 구별마저 모호하게 되었다. 게다가 교수자신의 공연에 학생들이 출연한다 하여 공연 비용마저 부담하는 병폐가 발생했기 때문에 문교부의 대학생 출연 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완성되지 못한 대학생 무용수들에 의하여 올려지는 이런 공연들은 아마추어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임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교수무용가 중에는 프로적 기질을 가진 유능한 무용인들이 많이 있다. 이들이 지금이라도 무용가의 길을 택하며 허울좋은 교수직을 미련 없이 벗어버리고 프로 무용가로 출범한다면 우리 무용계의 활성화는 물론 무용가 자신의 예술적 삶에도 서광이 비칠 것이다.
우선 당장에는 어려움이 많겠지만 무대에 생명을 걸고 공연에 사활을 걸게 되면 명작이 나오게 되고 그를 따르는 무용가가 나타나고 명작을 감상하러 투용 팬들이 몰려올 것이다.
외국의 무용가들은 바로 이 프고 정신으로 무용에 투신하기 때문에 많은 무용 팬을 가지고 있으며 유명세에 따라 공연도 호환을 누려 공연비는 물론 경제적 기틀도 마련할 수가 있어서 계속적인 상승 무드를 타고 더욱 무용에 정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기의 경우는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무용에 건 무용가가 없이 직장에만 의존하다보니 명작이 나오지 않으며 공연이 흥행되지 못하여 무용 팬도 없으니 자연히 공연비 마련에 부심하여 억지 표 강매 같은 악순환만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교수 무용가들이 자신의 거취와 진로를 분명히 함으로써 대학무용이 정상화되고 한국 무용계가 중흥되며 무용가 자신에게도 영광이 찾아 올 것이다.
세째, 무용발전의 초석이 되는 초·중·고등학교의 무용교육이 정상화되도록 교육과정과 제도가 재고 개편되어야 한다.
무용교육은 인간완성이라는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용의 창작과정을 다루는 교육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무용교육은 무용을 창작하는 과정을 중요시하며 작품의 결과는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무용교육 현실은 아직도 교육무용의 본질이 망각된 채 기능전수적이고 작품 주입식 교육이 가시지 않고 있다.
아동화는 아동이 직접 그린 그림이지 성인이 어린이를 위해 그린 그림을 일컫지는 않는다 . 마찬가지로 아동무용은 아동 스스로 창작한 무용이어야 아동무용이지 교사들이 만든 작품을 익힌 것이 아동무용이 아니다.
당장은 미숙하고 보잘 것 없는 아동작품이라도 아동 스스로 창작했다는 그 창작능력이 훌륭한 것이며 이러한 능력이 다져져서 훌륭한 무용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유능한 무용가로 성장되는 것임을 명심하여 바른 무용교육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육제도상으로는 무용이 체육과목의 일부 영역으로 채택된 점이 모순이다.
무용과 체육이 다같이 인간의 육체를 주체로 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예술적인 차원에서 근본적인 다른 과목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중·고등학교 남학생에게는 무용지도 내용이 없는 교육과정도 모순이다 .
무용이 결코 여성 전유물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학생의 무용지도를 제외시킨 것은 전인교육의 입장에서는 신체를 통한 정서교육과 표현예술을 배우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며, 무용계 입장에서는 남성 무용수의 빈곤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초·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만이 무용의 기초기능은 물론 창작능력을 기르고 무용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결국 무용 애호가가 나타나고 무용 전공자들이 탄생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