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바탕소리 산철쭉 물들이고
- 정정렬 춘향가와 최승희의 소리내력-부안
유영대 / 고려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전주우석대 국문과 교수
얼핏 부안의 변산이 이번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 바람 편에 넌짓 전해졌다. 이른바 서해안 개발의 한 가닥으로 이곳이 주목된 것이리라. 많은 사람들은 변이 국립공원 되는 것이 늦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생각이 들만큼 변산은 아름답다.
부안에 가서
십여 년 전에 공소에서부터 줄포, 내소사, 격포를 거쳐 변산반도를 걸어서 돌아본 적이 있었다. 맵추운 겨울이었는데 , 전혀 인공의 맛이 들어있지 않은 채석강도 순수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늦었다고 입을 모으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그러나 나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소식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변산은 국립공원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기 때문에 요즘은 나아졌지만 얼마 전만 하여도 변산에 가기가 참 어려웠다 길도 변변하지 않고, 여러 가지 불편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일단 변산에 들어가기 만 하면 아무도 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기근과 병란의 위험이 없다는 이른바 십승지지의 한곳이며, 「살아 부안 죽어 승천」이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여유 있는 땅이다. 막상 들어가기는 어려워도 일단 들어가면 이제는 나오기가 싫은 곳, 그곳이 부안이다.
김제에서 부안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동진강이 흐른다. 동진강은 바로 서해에 이어져 있어서 멀리 황색의 바닷물이 밀려오는 것이 보인다 동진강의 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산면이다. 둘러보아도 휜 산은 보이지 않고 너른 평야만 잇달아 있었다. 갑오년의 농민 전쟁 당시에 봉기한 횐 옷 입은 농민들이 산처럼 모인 터라는 것을 기념한 명명이라고 함께 간 최동현은 말한다. 1980에 발간된 「부안향토문화지」에 의하면 이때 모여든 민중이 수만을 헤아려 백 산천지가 온통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한다. 이를 막기 위해 1천여 관군이 신식 무기인 정총을 마구 쏘아댔으나, 결국은 당시의 부안 현감인 이철화가 낭패를 보았다고 한다.
부안의 문화는 정악과 민속악이 적절히 어우러져 있다. 한편으로는 갓 쓰고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에서 아낙의 외치는 소리가 다정하다. 풍류모임인 부풍율회와 국악원이 서로 이웃에 있으며 시조와 판소리가 함께 어우러진다. 19세기 후반에는 「칠칠회」라는 풍류모임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일흔 일곱 살 된 일곱 명의 노인이 7원 7석에 칠성암에 모여서 시회를 가지면서 붙인 이름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인 이매창이 이 고장 사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의 툭 트인 시나 시조는 피 속의 시대를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그의 시 「취한 손에게 주노라(贈醉客)」는 「취한 손이 비단 치마를 움켜쥐니 /그 손길에 비단치마 찢어지네 /한갖 치마야 아까울소냐/다만 은정 끊어질까 걱정된다오(醉客執羅衫 羅衫隨手裂 不惜一羅衫 但恐恩情絶)」라고 노래하고 있다. 매창의 시비가 있는 곳이 바로 매창 뜰인데, 우리가 알기로도 참 자유를 누린 여인이었다. 매창의 시비가 있는 그 옆에다 지난 4원 명창 이중선의 비를 새로 세웠다. 이중선은 이화중선의 동생으로 부안에 와서 죽었는데 , 그녀가 죽었을 때 전북의 국악인들이 묘도 쓰고 봉분의 떼도 사다가 머리에 이고 와서 잘 입혔다 한다. 이번에도 국악인들이 앞장서서 묘비를 세우게 되었다.
신재효의 제자인 전해종, 서편의 대가인 백경순, 성민주, 김신복 등도 모두 부안 태생의 반열에 들어간다. 시인 신석정이 태어나 산 곳도 부안이며, 시조와 가곡의 명인인 정경태의 고향도 이곳이다. 지금 부안에는 최승희가 살고 있다 처음에는 국악원에서 기거하다가 요즘에는 부안읍 동중리로 옮겨서 기거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최승희는 정정렬제 춘향가를 고스란히 갖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정정렬의 춘향가를 검토한 다음 최승희의 소리내력을 알아보기로 한다.
정정렬의 춘향가
정정렬은 19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20세기 전반에 죽은 진정한 명창이다. 그는 기왕에 있던 춘향가 가운데서 좋은 더늠을 발췌하고 그 밖의 더늠은 덜어내고, 거기에다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에 부합하는 사설을 창작하고 그 사설을 새로 작곡하여 또 하나의 아름다운 바탕소리를 완성하였다. 정정렬의 춘향가는 고스란히 김여란에게 이어졌고, 다시 박초선과 최승희에게 전승되었다.
정정렬이 새로 짠 춘향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첫째로는 사설이 일관성을 갖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초압에서 두드러지는 바 역대 명창들의 좋은 더늠, 이를테면 「기산영수」라든지, 특히 장중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적성가」, 「늬그른 내력」, 「경상도 산세는」, 「해동성참판」 등의 아름다운 더늠을 덜어내 버리고 처음부터 일관성 있게 소리를 다시 卦다 기왕의 더늠을 부득이 넣을 경우에도 자신의 그 사설에 대한 태도를 밝히고 있는데 , 예컨대 이도령이 사또의 귀밝음을 탓하는 말을 하고는 「이리 했다고 하나 이는 잠시 웃자는 말이요. 그리했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한다거나 춘향이가 군로 사령에게 사정하는 대목을 중머리로 부른 다음에 「이 대문에 이리했다 허되 그럴 리가 있으리오. 춘향같은 열녀가 죽으면 영영 죽었지 사령에게 사정할 리도 없으려니와 사또가 춘향에게 혹한 마음 사령을 보내어 잡아 오라 했을 리 있으리오」라고 스스로 수정하고 있다. 더늠을 덜어낸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으나 그가 만든 춘향가는 일관성 있게 다듬어졌다.
둘째로 지적할 것은 새로운 사설이 문학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너무 아름답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sp판으로 남아있는 정정렬이 부른 정정렬제 춘향가 대목으로는 「천자뒤풀이」, 「기생점고 대목」 그리고 정정렬이 짜 넣었고 김연수가 이어받은 것으로 「난향이 춘향훼절을 강권하는 대목」, 「박석티 대목」과 「어사와 장모가 만나는 대목」 등이 있는데 각 대목마다 맛이 다르다. 또, 정정렬판의 특징으로 이도령과 춘향의 첫날밤이 월매 몰래 이루진다는 사실도 지적할만하다. 이 부분은 김연수가 그대로 이어받아 부른 것이 레코드로 남아 있는데 절창이다. 그렇지만 나는 특히 이별가 대목이 전체적으로 가장 잘 짜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
분 같은 얼굴은 저절로 숙여지고 구름 같은 머리는 스스로 흩어지고 앵도 같은 입술은 외꽃 같이 노래지고 두 눈은 동튼 듯이 뜨고 도련님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한숨만 휴우. 얼굴이 방재사색이로구나. 도련님이 겁이 나서 춘향의 목을 부여안고 아이고 이 사람 죽네. 춘향아 정신차려라, 내가 가면 아주 가는 게 아니다. 춘향이 그제서야 정신이 나서 후우, 도련님 답답하니 저만침 가시오, 무엇이 어쩌고 어째요, 이별 말이 웬말이오, 참말이요 농담이요.
이것은 이도령이 처음 춘향에게 우선 이별을 하고 훗기약을 하자고 말하자 화가 난 춘향의 반응이다. 완판본 춘향전에는 이 대목에서 춘향이 옷고름을 뜯고 발광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런 감정의 격앙상태를 보이기 위해서는 아마도 자진모리 정도의 빠른 가락이 적격일 듯 하기도 하지만, 이 부분은 진양으로 불려진다. 게다가 처음 소리 놓는 「분 같은 얼굴은 저절로 숙여지고」까지에 진양의 한 배가 들어있어서 아주 처절하게 늘어진 심사를 보여준다. 춘향의 형용을 비유적으로 소개한 다음 「무엇이 어쩌오 어째요」하면서 항변이 시작된다 이 대목에 이어져서 다시 춘향모의 거친 「칠십당년 늙은 년이 딸 죽이고 사위 잃고 누굴 믿고 살으라고 못허지 못허여 양반의 자제라고 몇 사람을 죽일라는가」라는 항변이 빠른 가락으로 이어진다 .
방안 이별에 이어 오리정 이별이 이어진다. 슬픔이 고양되면서 그러나 탄을 타고 가는 듯한 자진모리 가락의 이별대목이 그 가락 때문에 한결 슬프다 방자가 말을 몰아 딸랑딸랑 딸랑딸랑 가는 기분은 아주 경쾌하지만 그러나 그 자리는 이별의 슬픈 오리정이다. 「그때에 춘향이는 따라갈 수도 없고 높은데 올라 서서 이마 위에 손을 얹고 (도련님 가는 데만 물끄러미 바라보니) 가는데도 적게 뵌다. 이만큼 보이다가 저만큼 보이다가 달만큼 별만큼 나비만큼 불티만큼 박석고개 (아주 깜박 넘어가니 우리 도련님 그림자도 못 보겠구나)」. 여기서 ( )한 부분은 장단은 흥겹게 진행되는데 말은 아주 천천히 놓이면서 계면의 성음이 두드러진다. 송영주는 이러한 연출의 기법을 괴대죽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떻든 도련님의 가는 모습이 아주 빨리 점점 작아지면서 빨리 가버리는 님에 대한 야속한 심사까지를 보여준다. 아주 잘 짜여진 문학적 구조이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아주 다양한 음악적 기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정정렬의 목구성과 관련이 있지만 잉에걸이나 완자걸이, 엇붙임 등의 부침새의 기교가 탁월하다는 점이다. 상성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들고 나가기가 어려우므로 당연히 부침새가 다양해야만 한다. 정정 릴의 소리는 미세한 부분까지 다 들어야 그 맛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는 서편제 소리의 특징인 「갈 데까지 간」 대표적인 소리라고 하겠다.
정정렬이 춘향가를 새로 짠 것에 대해서는 찬양과 비판이 어우러지지만 그의 소리에 대해서는 한가지로 감탄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얕은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런대로 쉽게 들리고, 깊은 맛을 좋아하는 이에게도 그에 맞게 깊이를 느끼게 하는 진정한 소리를 한 광대였다. 그의 소리는 우선 알아듣기 쉽다. 그가 부르는 사설은 아주 쉽게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것은 왜인가 그가 사설을 쉽게 바꾸어서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해있는 상황을 아주 절실하게 그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면그리기 」라고 말하거니와, 특히 정정렬은 이면에 충실한 광대였다.
남도에 가던 길에 같은 버스에 탄 아낙네가 갑자기 창 밖을 보더니, 「오매, 저 꽃 좀봐」라고 외쳤다. 「오매, 단풍들것 네」와 같은 감탄사이다. 지극한 시심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웃, 저자거리에 있으며, 시인의 구체적인 아낙에 대한사랑이 있어야 시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정렬의 소리를 들어보면 그때마다 소리에서 그리고 있는 정경과 내가 처한상황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가 부른 심청가 가운데 「곽씨부인 치상하는데」를 들어보자.
아이고 아이고 어쩌리 흐윽, 여보 마누라---- 아이고 여보 마누라 나도 가지 나도 가지, 마누라 따라서 나도 가지. 여보시오 마누라 평생의 원한이 사생동거 하잤더니 황천이 어디라고 날 버리고 혼자 가. 아이고 마누라- . 그대 살고 내가 죽어야저 자식을 살리지 그대 죽고 내가 사니 저 자식을 어찌 허여. 앞못보는 죽은 나는 어쩌라고 혼자 가오.
이 대목의 시작은 심청가에 들어있는 노래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아내의 주검을 마주한 남편의 통곡이다. 아이고 외치는 대목도 처절하고, 마누라를 부를 때는, 흔히 목이 매이면 목소리가 갈라지는데, 영락없이 갈라지고 있다. 그러다가 이야기 줄거리로 들어간다 사설을 정확히 다듬으면서 이면을 그리는 것도 뛰어났다 창자가 소리의 내용을 실감나게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판소리이다.
명고수인 송영주는 정정렬의 소리에 대하여 「판소리 자체를 가지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관중, 고수, 창자의 사이를 일심동체로 만들어 놓은 이면이 뛰어 난 소리」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이면을 잘 그리는 사람으로 전도성을 들었는데 전도성은「흥보가 박통 속에서 쌀과 돈을 덜어내는 대목」을 다음과 같이 소리했다고 한다.
내가 제일 많이 접해온 명창으로는 전도성인디 , 그는 창도 기맥히게 잘 했지만 이면을 그려내는 것이 일품이었어. 7월 열 엿새 날이 우리 할아버지 생신인디, 그날이면 그 양반이 빼놓지 않고 날샐 때까지, 밤새도록 소리를 했어. 한번은 흥보가를 허는디, 쌀관 돈이 많이 나온다, 허는 대목인디, 요새는 그저 잠깐 「돌아섰다 돌아보면 도로하나 가득허고 돌아섰다 돌아 보먼 돈과 쌀이 도로 가뜩」허여 몇 번 되어내다 보면, 한 2, 3분 되아 내다 보먼 돈이 얼마고 쌀이 얼마였다 라고 아니리로 말허는디, 그 양반은 달랐어요, 전도성 명창은 한 1미터 80가량의 키였는디, 그 양반 소리를 헐 때면 한산 세모시 두루매기를 입었는디, 이 대목을 헐 때는 팔을 딱 걷어올리고 들어부어 내는디, 영락없이 궤 속에서 돈과 쌀을 되아내는 형용이여. 그런디 , 한 20분을 되아 내. 자식은 많고 형님에게 쫓겨나서 그렇게 굶주렸던 흥부 내외가 돈과 쌀을 만났으니 참, 팔이 부러질 정도로,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도까지는 되아 낸다는 그런 느낌이제. 휘모리를 되아내는디, 갓이 뒤꼭지에 늘어 붙고 속적삼 밖으로 두루매기까지 땀이 철떡철떡 젖어 있고, 목이 탁 쉬어서 소리가 안나오고, 기진맥진헐 정도까지 되어내다가 주저앉는데서 끝이나는 거여.
전도성은 시골에 묻혀있어서 소리로는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탁월한 광대이자 이론가였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는 전적으로 그의 구술에 의존한 것인데 , 부분 부분은 예전 명창의 더늠을 그의 방창으로 소개하고 있다. 정정렬은 어려서 정창업, 이날치에게서 소리를 배운 뒤, 다시 전도성에게서도 소리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영주는 특히 송만갑이나 이동백의 소리도 좋지만 정정 릴의 소리야말로 가슴에 딱 와 닿는 맛있는 소리라고 하였다.
최승희의 소리내력
최승희는 1937년에 이리 북일면 양정부락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3대독자였는데 아주 완고한 학자였었다. 그래서 최승희는 바깥 출입도 쉽게 할 수 없었다. 하도 집에만 있어서 어릴 때 별명이 우렁이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서 가끔 열리는 콩쿨대회에 나가서 입상한 적도 있었다. 최승희가 국악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입사식은 나름대로 흥미롭다 .
열 일곱 살이던가, 군산에 고모 댁에 어머니 따라서 놀러간 적이 있었지요. 하루는 고모를 따라 계돈을 받으러 가는디, 마침 「국악인의 집」이라는 데를 갔어요 집 앞에 화단이 똥그란허니 있드니만, 큰 나무도 있었고, 작은 나무도 있었고, 그 길 앞을 살짝가렸는디, 그 사이로 보는거여. 들어감선 보니까 어느 처녀 하나가 호박단 저고리에다 보라색 유똥 치마를 입고, 강사댕기를 들이고는 손을 무릎 위에 다 놓고 노래를 부르는디, 어떻게나 예쁘든지. 노래도 그렇게 잘해. 고모는 그 집에 돈 받으러 가고 나는 화초밭 사이로 그걸 보고 있고. 그러는디 조금 있다가 소리가 끝나고는 북채를 양쪽 손에다 들고는 북을 치면서 승무를 추는디 무슨, 선녀가 하강헌 것 같드라고. 그렇게 예뻐 홀딱 반해버렸지. 저것 좀 배웠으면, 아이고 나도 저것 좀 배웠으면, 막 그러고 넋 놓고 보고 있는디, 고모가 나와서 '너 배우고 싶냐'이러고 묻드라니까.
그래서 고모가 어머니를 설득하며 아버지 몰래 군산에 남아서 소리를 배운다. 최승희는 이리의 원광여고를 마치고 바로 「군산성악회」로 와서 소리를 배운다. 그는 명창 홍정택에게서 「때마침 봄이로다」, 「운담풍경」, 「편시춘」등 단가와 춘향가, 홍보가, 수궁가 등의 토막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그 해에 다시 전주로 와서 김동준에게서 심청가를 배운다.
그러다가 열 아홉 살에 서울에 올라와서 김여란을 찾는 것이 삶의 한 분기점이 된다. 새벽에 원남동의 조그만 2층에 들어서서 김여란을 대면하던 때의 감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부터 67년까지 10년 가까이 수양딸이 되어 김여란을 모신다. 그 집은 학원이었고 당시 학원의 학생수가 l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김여란은 이 무렵 지속적으로 아팠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을 최승희가 선생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그 집에서 여러 가지 일도 처리하면서 오랫동안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목이 푹 익을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최승희의 목은 누구보다도 김여란의 소리에 가깝다. 그 집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는 동안의 괴로움을 최승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내가 밥 해먹어야지, 빨래해야지, 선생님 약수발 해야지, 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 가르쳐야지, 아무 새가 없어요. 언제는 북 채 잡고, 약탕관 앉히고 약수발 해야지. 우리 선생님이 워낙 깔끔한 분이라서 다른 사람 꼴도 못 봐요. 나만 그렇페 가까이 두고 애꼈지요.
소리를 가르치다보면, 신입생들은 가르칠 수 있지만, 구입생들은 가르칠 재료가 없을 때도 있어요. 그러면 어머님께 바로 말씀드리지는 않고, 아버님께, 선생님 남편인, 정 선생님인디, 아버님께 말름드려요. 「아버님, 재료가 없어서 못 가르쳐요」 그러면, 선생님께 말씀드려 주고. 이내 선생님이 「승희야, 북가져 오니라」부르지요. 그러먼 제일 좋아요 아주 한 대목을 다 배워 가지고 나왔어요.
소리 한 대목을 배울 때가 최승희는 제일 좋았다고 말한다. 10년 가까이 김여란의 집에서 소리를 배우면서도 춘향가 한바탕을 모두 배우지는 못했다. 그 무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다가 후유증이 생겨서 해남에 있는 시댁으로 요양을 가서 살았다. 남편이 강권하여 한동안은 판소리를 잊어버리고 살았다고 한다.
60년대 중반에 김여란이 판소리 춘향가로 인간문화재가 되면서 거기에 따른 이수생, 전수생 등에 관한 혜택도 주어졌었다. 물론 서열이나 경력으로 보아서는 당연히 최승희에게 그러한 혜택이 주어질 법하지만 그때는 해남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하여 행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후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김여란의 전수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다시 판소리에 전념하며 좋은 목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79년부터 최승희는 판소리 경연에서 연거푸 장원을 하여 기량을 과시한다. 79년에는 서울판소리 경연대회에서, 80년에는 남원 춘향제에서, 그리고 81년에는 전주대사습에서 각각 장원 입상한다. 이것들은 모두 김여란의 소리에 대한 충실한 전승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최승희는 전수생에 관한 행정적인 규정에 의하여 아무런 혜택을 입지 못하고 오히려 손해를 입게 된다. 춘향가 바탕소리를 모두 이수했음에도 행정적 서류에 의한 것은 완전히 전수 받지 못한 상태에서 스승이 작고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 뒤에야 이수자가 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말은 안 하지만 미묘한 갈등이 있었으리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제대로 소리를 하고도 적절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괴로운 시간이 오래 지속되었다. 김여란이 살아있을 때 스스로 후계문제를 언급하면서 최승희를 자주 거명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많다.
부군이 작고한 후 부안 유지들의 초빙으로 부안으로 내려온 것이 85년의 일이다. 그곳에서 소리와 북을 가르치며 또 전주우석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금숙과 오정의가 특히 기대되는 제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읍에 사는 김향초도 지금 최승회에게서 소리를 배우고 있다. 오정의는 그에게 배운 뒤 대사습의 고등부에서 장원을 하고 현재 우석대학 국악과에 재학중이며, 박금숙은 대사습의 대 학부에서 장원을 했다. 김향초는 대사습의 일반부에서 장원을 한 내놀만한 제자라고 자랑하였다. 그밖에도 또한 얼마나 많은 제자가 있는지는 이루 셀 수 없다고 하였다.
김여란의 성음
최승희의 판소리 관은 김여란의 그것과 동일하다. 이 점에 관한 한 최승희는 철저한 김여란의 아류라고 할 수 있다. 김여란이 정정렬에게서 소리를 받으면서도 김여란 특유의 느낌을 가졌는데, 이보형의 해설에 의하면 정정렬은 남자의 소리로 기상이 있어 고조되는 인상이나 김여란은 보다 더 진중하고 여유 있으며, 가곡적 기풍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김여란과 변별되는 특징을 찾아내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듯하다. 최동현은 누군가가 김여란의 소리를 찾기에 대신 최승희의 소리를 들으라고 권했다 한다. 「최승희 선생의 소리는 돌아가신 김여란씨소리와 도신허지요. 강도관씨 소리가 송만갑씨 소리와 도신하듯이」라고 말챘다. 도신하다는 말은판에 박았다는 뜻이다. 최승희도 어디 가서 소리를 할 때면 아는 이들은 「김여란이 왔다」고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김여란에 대한 간단한 검토는 지난번의 글에서 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줄이기로 한다 . 다만 그가 남긴 소리대목이 적벽부 등 몇몇 단가와 이별가를 비롯하여 토막소리가 전해지는데 깊은 맛이 깃들여 있다.
김여란은 특히 정악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판소리를 배우러오는 이에게도 먼저 시조와 가곡을 가르쳤다. 정판 춘향가에 들어있는 시창은 모두 본격적인 것들이다. 그 점은 김여란이 일찌기 정악을 탄탄히 배운 뒤에 판소리를 익혔기에 가능한 것이며 앞서 이보청이 「가곡적 기풍」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점을 말한 것이다.
또한 엄정하고 절제된 기품을 강조한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남창은 우조성음이 제격이며 여창은 계면성음이 어울린다고들 말한다. 감정을 쉽게 표현하기에는 계면의 성음이 특히 여창에게 어울리며 많은 여류명창들이 계면성음에 특징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김여란은 오히려 진중한 우조의 성음을 강조하였다 .
임방울 선생님은 「아서라 세상사 쓸 데 없다 . 군불견 동원도리 편시춘 장가소부야 웃들 마라」이렇게 계면조로 나가는디, 우리 선생님은 절대 단가를 계면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선생님이 가르쳐준 단가에는 절대 계면이 없어요. 「아서라, 세상사 쏠 곳 없다 군불견 도원도리 편시춘 장가소뷰야 웃들 마라」 이렇게 우조로 하니 아소 분위기가 틀려버리지요.
이렇게 글로 적어서는 밋밋한 내용이지만 직접 들으면 확연히 그 소릿길이 구분된다. 정정렬 작곡의 적벽부를 김여란이 74년에 불렀는데 과연 호령조의 우람한 맛이 있었다. 최승희의 집에서 마침 부안의 여고 교감선생님인 김형주가 쓰고 최승희가 작곡하여 부른 변산찬가를 듣게 되었는데 썩 아름다웠다 .
그 단가의 뒷 대목은 이러하다 .
봄잠을 언듯 깨어 녹수를 따라가니 비류직한 만장폭이 층암절벽 걸렸으니 직소폭로 이아니냐. 말로만 듣던 선경 암석 위에 자리 깔고 진세티끌 씻은 후에 벗님과 마주앉아 한잔 술을 아낄소냐. 산철쭉 늦은 꽃이 나그네를 반겨주네. 만학천봉 송백 속에 종소리 은은하니 내소사가 이아니냐. 두 손 합장 향을 피워 마음을 닦은 후에 해안길 돌고돌아 격포에 다다르니. 은린곡척 뛰는 고기어장이 풍성쿠나. 채석강 적벽강은 만첩청상 등에 지고 하얀 병풍 둘러친 듯 만권 서책 쌓아 논듯 이태백 소동파는 한번 가고 안오는고, 무릉도원 별유천지 여기말고 또 있는가.
엄정한 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한편 좌로는 사설을 정확히 발음하고 시김새를 이면에 맞게 구사하는데 철저했다. 김여란은 사설이 미심쩍은 곳은 철저하게 확인하였으며, 그 작업은 주로 부근이 도와주었는데 문장의 경우는 옆에 토를 달아서 자세히 뜻까지 확인하며 알려주고 획순까지 적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관은 오자 낙서도 없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줄거리도 일관성이 있다. 또한 시김새나 타루치는 것, 각 구녁질 등의 기교가 아주 화려하다.
예를 들자면 이별가 가운데서 「높드라한 상-상-봉이 평지가 되거든 오시랴오」를 헐 때, 산은 올라갔제. 높은 꼭대기에 올라갔으니까 상은 거기에 음이 있지요. 평씨가 되거든 하면 상봉에서 점점 네려오지. 상상봉에서 내려오면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고, 음퍽질퍽허니 이렇게 돼있는 것을 그려내는 거여.
마지막 특징으로는 발림의 진중함을 들 수 있다. 김여란은춤의 명인이기도 하다 우리의 춤은 어깨의 움직임과 손의 움직임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손가락을 덜컥 하면서 바윗돌이 떨어지는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최승희의 발림도 키가 작기는 하지만 온 무대를 확 채울 수 있을 만치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최승희는 이번 5월 마지막 토요일에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번 소리는 명고수 김명환에게서 배운 것으로 보성소리이다. 전에 김여란에게서 심청가와 숙영낭자전을 일부 배웠으나, 그 소리는 대개 잊어버려서 새로이 배운 것이다.
소리를 몇 십 년을 했으나, 인자사 소리맛이 알아져요. 나이가 어려서는 천방지축으로 뭘 몰라 가지고 소리 질르고, 예쁘게만 내고, 어떻게 허먼 소린줄로만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고 그저 이면에 맞게 옛 양반들이 작곡한 것 슬픈 대목이라든지, 우조로 나가는 대목이라든지, 경드름제라든지, 그것이 이자사 가슴에 와 닿드란게요.
우리 나이로 쉰 둘에 와서 쉽지 않은 솔직한 고백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야말로 자신이 생겨야 나오는 용기 있는 것이리라. 이것이 오히려 당당한 자기 자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걱정이 생겼다. 이 좋은 땅 부안에서 최승희는 그다지 오래 있을 것 같지 않다. 배우는 이도 몇 없고, 그래서 별로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이나 전주로라도 옮겨서 그는 소리를 이어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앞에서 부안에 오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렵다고 했는데, 누가 그를 좀 꼭 잡아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