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의 방법론적 모색
박정진 / 한양대 국문과 졸업. 영남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양대, 단국대, 서울교대 강사 지냄
현재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
흔히 미학은 철학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여전히 매우 관념적인,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전통앞에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이것은 서구의 관념적 철학 전통이 갖는, 그들이 말하는 이성적(理性的)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근대 세계 질서를 그들의 원리대로 움직여가는 서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예컨대 문화적 제국주의- 의 산물이다
예술인류학의 목적
차라리 철학 속에 미학이 포함될 것이 아니라 미학 속에 철학이 포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철학적 사유도 철학자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 문화적 환경과 인간의 대응(對應)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순수한 출발점은 일종의 창조적 비유analogy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주체와 객체(인간과 자연)중 어느 것에 비중을 더 두느냐는 별도의 문제이지만-이것은 인류사의 수많은 철학적 미학적 문화 항목의 저장고를 만들었다. -양자의 설정 자체가 실은 매우 미학적인 출발의 한 예이다. 예술의 모방설이나 유희설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특히 일반적으로 원시 종교 형태로 통했던 토테미즘Totemism도 이와 맥락이 닿는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토테미즘도 사물(자연)을 인식하고 표현하기 위한 인간의 원시적 인지수단의 하나이기도 했으며 특히 인지·사회인류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자연을 상징화Symbolize 하여 집단을 표현한 것이다 .
실제로 토템의 대상이 된 동물들이 그것을 상징으로 사용하고 숭배하는 인간집단의 주변에 생존했을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토템 동물과 인간집단의 대응 관계에서 토테미즘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토테미즘도 원시종교 형태라기보다는 일종의 「자연의 사회화」라는 지각의 긴장과정을 지친 인간의 보편적 인식방법 중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토테미즘은 인간의 단순한 대뇌작용의 산물만도 아니고 처음부터 자연속의 피조물을 그대로 표현한 것도 아닌, 일종의 가공과정을 거친 창조행위의 산물이다. 무룻 주체와 대상사이에서 창조된 것은 예술로 간주할 수 있다.
철학도 단순한 대뇌작용(관념)이나 피조된 것(사물)이 아닌 이상 인간 특유의 창조적 예술이다. 따라서 철학은 차라리 미학에 포함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미학이 철학의 일부로 간주된 것은 너무 사변적인 것에 대한 편중의 결과이다. 예컨대 말(개념)로써 규정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본 서구 문명의 오류 때문이다. 그들에겐 존재being하는 것은 말로 표현되어야 했고 말로 표현된 것은 존재being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서구문명의 말(理性)중심주의logos-centrism는 인간의 신체나 자연의 물질적 속성이 갖는 상징성,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만지고 보고 느끼는 재료들이 연출하는 상징적 효과를경시·도외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서구문명의 예술적 업적을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들의 예술적 업적이나 예술가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서구의 미학은 철학에 환원되고 철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환원되고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기독교의 절대적 신관에서 종말을 고한다 이것이 그들의 문명적 순환이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순환이 지금도 되풀이된다. 서구의 역사가 각 시대마다 어떤 특성으로 유형화되고 단계적 발전론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기호학적역사이다 그래서 서구의 역사 속엔 각 시대마다 고정된 (정확한)의미가 있다.
그러나 기호학은 인간의 진정한 의미의 세계를 「가두는 상징학 」Symbology이거나 「가두어진(고정된) 상징을 보는 상징학」이다. 기호학이 서양 역사에선 필연적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동양(동아시아) , 특히 한국에선 그 의미가 대폭 축소되어지거나 요컨대 「열려진 상징학」으로 변형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한국 문화는 특유의 상징(감정)중심주의Symbol-centrism의 상징문화이고, 그 상징은 시공간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생성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선 다차원의 의미가 매우 상황적으로, 연극적으로 생성된다. 여기에서 본고의 한국 문화에 대한 예술적 이해가 당위성을 갖게 된다. 예술의 상징·메타포가 인식의 수단이 되고 사물을 파악하는 방법론이 된다는 뜻이다.
문화에 대한 예술적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문화에 대한 제개념 규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 문화를 상징체계로 보는 종류와 연구 영역, 그리고 예술인류학의 성격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
미학의 중요성과 문화에 대한 예술적 이해에 선구적 역할을 한 서구의 학자들은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루카치 등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하는 학자와 프랑스의 M .메를리 퐁티나 폴 리피르, 롤랑 바르트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중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식논리적 사고보다는 예술·미적 지각이 오히려 포괄적인 합리성이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균형잡힌 합리성이라고 주장,가장 주목된다. 물론 예술적·미적 합리성이 하나의 문법이나 관례, 고정된 의미체계를 강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적어도 상징적 균형잡기를 위한 대립된 세계를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구적 합리성과는 다르다.
루가치도 「예술품은 현실과 자연의 미적인 물질세계 그리고 사회의 구체적 구조를 반영한다. 그것은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서 인간, 자연 그리고 사회의 총체적인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이다고 주장, 예술품이 사회·문화의 총체성을 반영한다고 한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프랑스 학자 중 롤랑 바르트는 후기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의 기수라는 점에서 가장 눈에 띈다.
롤랑 바르트는 그의 텍스트론에서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에 하나의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떠한 다원성으로 그것이 구성되어 있는지를 감정appreciate하는 일이다」고 했다. 또 그는「텍스트가 진리나 개연성이나 심지어 가능성의 다원성이 아닌 다원성 바로 그것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의 문제이다」고 덧붙였다.
롤랑 바르트는 결국 작자적 텍스트론에서 「생산물」이나 「구조」의 개념들을 「과정」 및 「분할」의 개념으로 대체한다.
독일 학자의 경향은 예술과 사회(문화)와의 관계에서 사회를 예술(미학)적으로 보거나 예술(작품) 속에서 사회 (문화)의 총체성을 보는 것이라면 프랑스 학자들은 작품 자체 흑은 탈구조에 관심이 많아 의미 또는 다층의 의미파악에 관심이 많다.
전자는 확실히 사회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고 후자는 작품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다.
양자를 통합하는 길이 없을까 ? 한 사회는 그 나름의 의미체계를 갖고 있다. 또 한 사회의 의미체계는 변한다. 의미체계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체계의 많은 가능성을 전제하는것이다.
사회와 작품의 의미 체계는 서로가 역반응을 하는 관계에 있다. 사회가 없으면 작품은 표현 대상이 되는 실체를 잃는다. 반대로 작품의 의미체계가 없으면 사회는 표현될 틀을 잃게 된다.
이밖에도 위르겐 하버마스의 소통적 합리성이나 기호학자들의 노력은 의미체계를 고정화(이를 텍스트화·부호화라고 할 수있다)하려는 일환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구 문명의 언어중심주의·도구적 합리성 선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적·예술적 관심은 인간의 사회생활(특히 정치적인 분야)에 예술을 확산시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실천이나 사회적 소통을 예술적·미적으로 논하는 것은 필자의 예술인류학과 기본적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결국 예술적 언어인 상징은 인식수단에서 사회적 소통, 나아가서 인간을 하나로Communitas만드는 가치를 지닌다. 상징은 언어보다는 매우 적응의 탄력성이 높다.
상징은 언어(개념)보다 덜 정교한 인식수단인 것처럼 일방적으로 매도되어 왔다. 이같이 상징이 서구의 자연과학주의에 의해 평가절하 당할 경우 우리나라와 같이 상징이 풍부한 문화는 미신(微臣)이나 불합리 투성이의 덜 발전된 underdeveloped문화(사회)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상징이야말로 또다른 과학체계임을 알 필요가 있다. 예컨대 물 (水)을 「H2O」로 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충분히 자연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면서 적응하며 살수 있었다. 물(水)이란 월(月) 화(火) 목(本) 금(金) 토(土)와 함께 음양오행(陰陽五行)체계(음양과학체계)의 하나였다. 이 음양오행은 원소주기율표의 원소들보다 덜 세분화된 상징이었지만 사물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하나의 틀(과학)로써 훌륭히 기능을 수행했다.
원소는 오늘날, 더욱더 미세한 미립자로 쪼개지고 있지만 이들의 구조도 음양(+, -)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음양」은 가장 미시적 인식 단위이며 음양이 확대된 오행은 가장 거시적 인식단위로써, 따라서 음양오행은 동시에 「미시-거시적 」 인식 방법론임을 알 수 있다 .
한국 문화(사회)는 이러한 음양상징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음양상징법은 매우 역동적(易動的)인 것으로 예술적(창조적) 이해 , 드라마적 이해 , 연행적performative 이해의 틀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이상의 이론적 배경을 근거로 문화에 대한 예술적 이해를 다음의 두 가지 차원에서 논하고자 한다.
첫째 예술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Anthropology of Art과 민족예술학Ethno-Aesthetics, 둘째 예술적 접근의 인류학Artistic Anthropology이 그것이다.
첫째, 예술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은 기존의 예술학(각 예술 장르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 활동을 지칭)이 장르별로, 그것도 대체로 서구적 개념틀을 근거로 보편성(일반성)을 추구하는데 반해 항상 인간의 보편적(원시적) 심성과의 관련 속에서 탈장르-탈서구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학문 활동을 말한다.
따라서 지존의 예술학은 장르적 폐쇄성과 서구적 기준으로 편향성을 띠는 반면 예술인류학은 이를 극복하고 예술을 사회(인간집단)와의 관련 속에서(그렇다고 예술사회학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예술을 인간 생활Human life과의 일체감 속에서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민족예술학은 예술 장르보다는 민족 단위로 인간의 기본 심성이 어떻게 특수한 문화 유형(방식)을 통해 표출되느냐를 연구한다. 또 서구적 보편성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 문화의 특수성을 토대로 보편성을 새로 구축하는 예술학이다. 이것은 민족적 폐쇄성 (비교문화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을 갖고 있지만 문화상대주의적 열린 시각을 갖고 있다.
둘째, 예술적 접근의 인류학은 예술장르나 민족 단위 등 어떠한 폐쇄성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언어, 몸짓 등 행위전반에서 열려진 의미를 찾는 작업을 하는 인류학을 말한다.
특히 예술적 접근의 인류학은 인간의 행위 속에 숨어있는 의미 (숨겨진 차원)를 찾아내고 어떻게 그 의미가 상호 교환되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연구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위도 마치 예술의 상징처럼 메타포의 연속(조합)으로 보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인류학이 다루는 상징(코드, 메타포)은 매우 역동적이며 인간의 사회적 행위 속에서도 역설적인 의미 (이중적 가치)를 찾는다.
또 사회의 구조(조직) 속에서도 균형론적 입장의 기능이나 의미를 찾는 것보다는 균형론과 갈등론적 입장을 조화하는 연행적performative 중용적 입장에 선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존재being적 사고와 생성become적 사고를 동시에 포괄하는「존재 -생성적」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예술적 접근의 인류학은 다원다층의 의미를 찾는 한편 그러한 다원다층의 의미들이 하나로 환원하는 신화적 원형을 탐색하는 작업을 벌인다. 그러한 점에서 원효(元酵)의「一卽一 體,一體卽一」의 화엄사상,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반야사상 등과 맥을 같이 한다.
신화적 원형 탐색은 동양(한국)의「理氣」사상, 서구의 후기구조주의와도 통한다 .
예술적 접근의 인류학이 사실 본고에서 주목적으로 하는 부분이다.
인간의 문화는 그것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든-예컨대 개념이든, 물질(문화)이든, 사회 구조든, 상징(의례)이든-결국 의미세계로 귀결된다. 그것이 역설적 의미(이중적 가치)일 때는 더욱 값진 것이고 역동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상징(의미)이 가장 잘 확인되는 영역이 인간의 정치행위이다. 상징으로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역설을 하나로 포용하는 것이면서 역설을 드러내는 것이고 끝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모든 것을 하나가 되게 한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하나 속에서 모든 것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특정시·공간에서 또2된법에 근거해서 그 어느 한쪽을 결정론적으로 강요하는 것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 다원다층의 의미를 찾는 작업이 예술인류학의 목표이다. 예술인류학은 정치학에서 신화학(신학)으로 영역을 확대하면 초자연적 현상을 설명하면서 더욱 신비적 환상적인 분위기까지를 보여준다.
미학이 사회학의 영역에 들어가면 정치학이 되고 정치학이 종교학의 영역에 들어가면 신화학이 된다. 다시 말하면 신화적 원형의 발견이야말로 예술인류학의 종착역이다.
다시말하면 문화-관념 물질문화 사회구조 상징 (의례) 등-의 모든 영역에서「신화적 원형을 발견하는 인류학적 도정」이 예술인류학의 목적이다.
문화의 예술적 이해
문화의 개념
인류학은 문화를 총체적인 것 Wholism으로 본다. 이것은 문화요소가 유기적인 관련성organic relation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를 문화복합culture complex 또는 문화체계 culture system로 말하기도 하다.
문화에 대한 개념정의 중 인류학의 초창기에 많이 인용되고 준거가 된 것은 타일러E.B.Yylor의 정의이다.
「문화 또는 문명이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기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획득된 모든 능력이나 습성의 복합적 전체complex whole이다.
타일러의 정의는 문화의 내용들을 열거한 감이 있지만 가능한한 문화 전반을 포함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정의는 좀더 단순화할 필요성을 그 후에 느끼게 했다.
「문화란 이런 저런 사람들의 생활방식the mode of life이라는 위슬러 C.Wissler의 정의, 「문화란 어떤 사회의 전체 생활양식the total way of life」이라는 린턴R.Linton의 정의가 그같은 단순화의 대표적 예이다 .
또 클라크흔 C. Kluckhohn의「생활의 설계」design for living, 구드노프W .H .Goodenough의「생활의 유형」pattern of life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들 정의의 공통점은 문화적 내용물이 어떤 형태, 형식을 갖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식은 가시적인 것이기도 하고 비가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물질 문화를 통해 볼 수 있는 문화의 형식-예술적 작품 또는 민예품-이 있을 수 있고 인지구조·사회구조라든가 비물질적인 것도 있다.
어떻든 형식이라는 공통적 기반을 토대로 창출된 개념이다. 여기서 형식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형식이란 정신과 물질세계가 만나는 점에서 발생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식은 마치 물질처럼 굳어질 수도 있지만 새로운 형식이 형성될 때는 매우 창조적인 긴장을 요한다.
이것은 각 문화(민족문화)가 특수성을 갖지만 그 특수성은 각 시대마다 변화(변형)를 초래하게 되고 그러한 변화는 주로 창조적 개인에 의해 수행된다. 이때의 창조적 개인은 물론 집단적 무의식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창조적 과정이야 어떻든 결국 형식의 창조로 귀결되는데 문화의 개념에 대한「형식으로의 규정」은 문화와 예술과의 접목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형식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예술가의 창조작업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형식-예컨대 풍수지리학-이나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형식-예컨대 예학-, 그리고 관념과 사물의 관계 형식인 철학 등도 인간의 예술적 창조 작업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는 관념(체계) 혹은 상징물symbolate 또는 행동(유형 , 양식 )으로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가 예술(품)이다.
문화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연구영역이 달라지고 이에 대한 연구(접근) 방법도 달라진다. 다시말하면 「형식으로의 개념규정이 문화를 예술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길을일차적으로 열어 놓은 셈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식은 다름아닌「구조」임을 감안하면 더욱더 예술적 이해의 지평은 할짝 열리게 된다.
문화에 대한 예술적 이해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문화개념규정은 기어츠C .Geerz의「상징체계」로서의 정의이다.
기어츠는 상징체계를 파악하는 매개로 상징형태symbol form를 들었다. 상징형태란 「공유된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가 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예컨대 아프리카 원주민의 통과 의례, 최신의 과학이론, 혁명이념, 19세기의 영국 소설작품 등이 포함된다고 기어츠는 말한다.
상징형태의 폭이 매우 광범위함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질적, 비물질적인 것을 망라하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우주상)의 모든 것은 의미를전달할 가능성이 있고 의미가 붙어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이란 그것이 사회적인 경우-제도나 관습-기능이 우선되기 마련이고 기능은 사회적인 맥락을 떠 날수 없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형식이 사회적인 것이 아닌 예술작품인 경우는 물론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개인적·사회적인 맥락에서-. 예술작품은 상징 ,그 자체이고 그것의 사회적 기능은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어츠에 이르러 결국 문화는 그 핵심이「의미meaningJ임을 드러내게 된 셈이다.
의미가 형식(구조)이 되고 그 형식은 예술작품으로, 사회적인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형식(구조)이란 다름아닌 「의미의 조합의 방식」을 말한다. 좀 비약하면 인간의 행위도 바로 상징symbol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셈이 된다. 인간의 행위를 상징적 교섭론symbolic interaction의 입장에서 본 부루머H.Blumer는 이 분야의 개척자이다.
문화를 상징symbol으로 보고 그 상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상징물symbolate이라고 한 최초의 인류학자는 레슬리 화이트Leslie White이다. 그러나 그는 이 주장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실질적인 연구 활동은 신진화주의자neo-evolutionist로서 마침으로써 상징의 진정한 면모를 해명하지 못했다. 화이트의 상징물이란 인간이 의미를 부여한 일체의 것을 말한다.
기어츠의 경우는 상징이 경험적이긴 하지만 다소 관념적인 성격을 보이는 반면 화이트는 관념과 할께 「의미가 붙은 물질」을 상징으로 보고 있다. 결국 화이트에겐 세계는 상징물symbolate로 가득 채워져 있는 셈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문화의 개념을 「의미체계」로 규정하는 것이 관념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예술품을 비롯한 물질문화, 인간 행위 전반에 걸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한국 문화를 예술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위의 세 가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예술을 대상으로한 인류학
예술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다음부터 예술인류학이라 부른다.)은 우선 대상이 이미 예술적인 것으로 직접 감지할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을 말한다. 예컨대 미적인 관점이 표현된 고고미술품이라든가 민속공예품, 또는 무형문화재(민속공연예술·민속축제), 전통건축 등 물질문화 그리고 현재의 각종 예술 장르의 작품활동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예술인류학이 기존의 예술 장르에서 논하는 예술비평과 예술철학, 예술학과 다른 점은 종국에 가서는 인간의 기본 심성과 예술작품을 관련시키는 일이다. 물론 기존의 예술비평활동등도 궁극적으로 인간 심성의 보편성 또는 보편적 심성과의 관계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기존의 예술학(예술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학문적 활동)이 서구의 학문적 전통에 크게 의존한다든가 역사적인 변천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예술인류학적 작업들은 그러한 서구 중심적 역사 발전론 보다는 예술품 자체의 구조라든가 모든 예술품 속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보다 근원적인 인간 심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기존의 예술학과예술인류학적 작업들은 서로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고 때로는 같은 주제에 같은 관심과 연구결과를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예술작품 속에 원시 심성(인간의기본적 심성)이 표현되어 있다거나 인간의 심성이 변하지 않았다거나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등의 인류학적 주장은 기존의 예술 장르의 연구가 흔히 논하지 않는 부분이다. 다시말하면 예술인류학은 인간심성의 원형을 찾는 작업이다.
요컨대 기존의 예술학이 특정 장르, 특정 시대에서 일반화를 시도한다면 예술인류학은 상대적으로 탈장르, 탈시대적 맥락에서 일반화를 시도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예술인류학은 궁극적으로 예술작품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뒤에 숨어있는 인간이나 인간생활에 관심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특성은 인류학이 문화 전반(또는 문화 총체)의 양식이나 형식, 유형에 관심을 갖는 것에 기인한다. 특히 공시적(共時的)인 입장에서 -.
흔히 예술인류학이 선사시대 또는 고대의 동굴벽화나 고미술품을 다루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상대적으로 오늘의 예술학이 역사시대나 근·현대에 관심이 많은 것에 비교된 때문이다.
또 실지로 인류학이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 심성이나 미의식에 대한 연구가 효과적으로 수행되는 곳이 바로 선사나 고대의 예술에서다. 왜냐하면 원시예술은 장르 분화가 되지 않고 표현 자체가 총체적 (종합적)으로 나타나기 때운이다.
예술인류학은 기본적으로 장르나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인류학이 인류학인 이상 문화의 총체성Complex 연구나 체계성 System 연구에서 끊임없이 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개개의 예술품이나 예술활동에서-. 이러한 인류학의 학문적 특성으로 인해 구체적인 인류학적 작업은 대체로 민족예술학적으로 성취된다. 즉 예술의 장르나 역사적 변천이나 유형의 탐구라기보다는 민족Ethnos을 단위로 한 문화의 예술적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말하면 기존의 예술학은 예술작품 그 자체에서 보편성이나 보편적 원리를 찾고 그것을 서구 역사의 전통에서 맥락을 찾거나 예술가 개인의 생애와 연결시키는 반면 민족예술학은 일단 집단적 심성(의식 또는 무의식)과의 관련성을 추구함으로써 집단적 특수성을 통해 보편적인 것을 추구한다.
예술적 접근의 인류학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예술적 작품을 대상으로 한 인류학과 예술작품이 민족 단위로 어떻게 특수성과 보편성을 나타내는가를 추구하는 인류학에 대해 논의를 해왔다. 이 장은 직접적으로 예술이라고 보기 힘든-필자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인간생활 그 자체를 예술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인류학에 대한 논의이다.
철학이 개념의 예술로써 미학에 환원되고 미학은 예술품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행동·생활에 확대된 셈이다. 인간생활에서 어느 분야에 예술성이 가장 잘 나타날까? 모르긴 해도정치 분야일 것이다. 정치가 인간의 예술이니 종합 예술이니 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
최고 권력자는 사회구조의 가장 높은 상징(권위)이다. 그것의 교체는 사회의 크고 작은 하위상징들을 재편성하게 만든다.
그것은 한편의 거대한 종합 예술이고 지도자의 교체시기는 매우 축제적인 시기이면서도 불확실성으로 긴장하는 시기이다. 예술작품이 그것을 창조하고 이해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정치는 집단의 모든 구성원에게 예술적·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정치행위는 반드시 정치가들에게만 해당될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시시각각 여러 수준과 차원에서 정치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 사회적 상징을 높이기 위해서 다른 하위상징들을 제물로 쓰고 있다 정치는 따라서 사회적 상징의 은행(저장고)인 셈이다.
이러한 인간 행위의 상징분야는 인류학 가운데서도 정치인류학과 겹치는 부분인데 예술인류학이 정치인류학과 다른 점은 그러한 사회적 상징을 정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징 과정으로 보는 점이다 . 이것은 매우 종교적인 과정과 유사성을 갖는다. 예술인류학은 사회적 시·공간에서, 다시말하면 사회적인 기능이나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예컨대 지각과정에서의 상징이나 실천 과정의 의례적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정치적으로 성공이냐, 실패이냐는 별관심이 없다. 그러나 지각 과정이나 실천 과정은 대체로 사회적 결과물을 산출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러한 「상징 一의례(연행)」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예술인류학이다 . 상징과 의례는 인간의 지각 및 실천 과정에선 매우 가역적이다. 따라서 상징은 의례를, 의례는 상징을 내포한다. 이는 이론 theoria과 실천 praxis을 그대로 적용한 수도 있다. 이론 속에는 실천이, 실천 속에는 이론이 내포되어 있다고-. 예술인류학적으로 볼 때 이론은 상징의, 굳은hard형태이고 실천은 의례의 굳은hard형태이기 때문이다. 「상징-의례」과정을 필자는 연행performance이라고 본다.
정치행위에 대한 예술인류학
정치, 종교, 신화는 인류의 생활에서 땔래야 뗄 수 없는 문화요소이다. 이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주로 정치인류학, 종교인류학, 구조(상징)인류학에서 담당해 왔다. 정치인류학은 주로 사회제도적인 차원, 종교인류학과 구조(상징)인류학은 상징체계와 사고구조(원형)의 차원에서 문화요소·현상을 다룬다. 이것은 크게 보면 사회(인류)학적, 문화(인류)학적 차원으로 양분할 수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적인 연구결과들과 매우 밀접한 상호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 종교, 신화는 매우 역동적인 상호 관련성을 갖고 있다. 이 역동성은 이들의 특성이 매우 집단적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이라는데서 기인한다. 예컨대 정치적인 권력을 획득하는데는 사회제도적인 정치 과정을 거쳐야 되지만 또한 개인적인(인간들 사이의) 상징조작과 권력을 부여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의 인지(구조)적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종교행위 (믿음)는 정치적인 위계질서를 수반하지 않으면 안되고 신학(교리)에 대한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
신화도 종교적·정치적 속성을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다. 신화는 집단 속에서 종교라는 형태로 제도화되고 집단을 이끌어가는 사고구조(원형)-영원성-를 제공함으로써 집단적 정체감 형성을 통한 높은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삼자간의 관계는 이들에 대한 연구가 보다 역동적 (동태적)으로, 다시말하면 개인과 집단, 사고와 행위, 역사와 신화 사이를 넘나들면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해준다.
이같은 역동적 분석은 퍼스Firth가 지적하듯이(1951:18)기술적인 측면에서는「미시사회학적 micro-sociological」이지만 거공식에 있어서는「거시사회학적macro-socio-logical」인 것을 추구하는 동시에 정치적인 맥락에서 이데올로기와 의례ritual가 매우 상호 의존적이며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된다.
예술인류학적 연구는 정치행위를 권력관계의 맥락, 즉 정치적인 것을 떠난 상징이나 집합표상의 차원에서 연구하며 신화의 구조(언어)를 밝히는 작업이다. 또 신화의 구조가 어떻게 역사적 현재로써 새롭게 나타나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이와 아울러 종교의 상징체계와 집단적 행위는 정치와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고와 행위」라는 인간의 본질적 문화패턴(구조)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인간들 사이의 상호 작용의 패턴은 상징적인 것에 의해 제한되면서도 표현되고 변화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정치·종교·신화는 실질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삼자 중 어느 하나에는 반드시 나머지 두 개의 기능과 의미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예컨대 정치행위에는 반드시 종교적·신화적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은 이들 사이의 관계가 바로 상징적 관계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상징에 대한 연구야말로 인류학이 추구하는 총체성Wholism의 실현에 더욱 가까이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상징이야말로 구조화·체계화된 것과 그것의 상호 작용, 변화, 나아가서 닫혀진 체계closed system에서 열려진 체계open system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화의 구조는 정치적 현실과 만나면 그 폐쇄적 구조를 털지 않으면 안되고 마찬가지로 정치는 안정을 얻기 위해서 신화의 닫혀진 체계(이데올로기) -정당화legitimation- 를 이룩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 종교는 역사적으로 신화를 재구성(재생산)하지 않으면 현실세계에서 존재가치를 잃게 되고 그 때문에 부단히 상징의례ritual -집단예배- 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화요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호작용 속에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자기나름대로 끊어서 말하자면 해부학적으로 그것을 보고 끊어진 단편particle, section과 단편사이의 관계와 상호 작용을 항상 존재론being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인간사고 -행위의 역동적 매카니즘을 파악하는데 미진했다.
따라서 인류의 상징연구는 이제 (사고)구조주의자와 행위이론가의 연구 경향을 통합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말하면 상징은 어떻게 생성되어 구조화되며 구조화된 상징은 왜 또다른 상징을 재생산하느냐? 문화복합culture complex은 그 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편으로 떼어서 보면 이미 그 본래적인 살아있는 모습을 잃고만다. 따라서 문화의 생리학이 필요한 것이다. 문화의 생리학은 분명 생성론becoming의 관점에서 문화를 보는 것이다. 존재론적 관점은 「집단 중심」이고 생성론적인 관점은 「개인 중심」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론은 「집단·개인」이라는 연구 방향을 갖지만 생성론은 「개인→집단」이라는 연구 방향을 갖는다.
문화의 생리학이 「개인 중심」이라고 해서 그것이 심리학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심리학적인 연구 결과들은 결정론determinism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생리학은 또한 생물학적인 개인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문화의 생리학이 다루는 것은 개인의 물질적인 체계가 아니라 상징체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는데 그 사회의 문화와 구조가 인간을 형성한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현실은 외부로부터 그에게 직면된 객관적 사실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집단은 개인에 앞선다.
반면에 일간은 자아Self의 자율성을 발전시킨다. 이처럼 인간과 사회사이의 관계는 변증법적인 것이다. (래드클리프-브라운 Radcliff-Brown1952, 베르거 Berger와 러크만 Luckman 1967)
따라서 인간은 현실에 의해서 왜소화되거나 인간의 본질과 의지가 현실에 의해 기계적으로 결정되지도 않지만 인간의 자유는 집단으로부터 무한정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변증법적 관계라는 것은 개인과 집단이 부단히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또한 한 차원에서의 관계는 보다 많은 가능성possibility의 한가지 표현임을 가리킨다.
이같은 변증법을 「개인중심」에서 바라본다면 개인은 기존의사고(구조)체계를 인정하든가, 반대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고(구조)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구조)체계의 「파괴-생성 과정」은 매우 상징의례적ritual인 특성을 가진다. 이것은 사고(구조)체계가 존재being적이지 않은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사정은 정치적인 영역에서 흔히 기존 정치체계 (이데올로기)의 강요와 이에 대한 반체제 운동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러한 반체제 운동은 비공식적인informal집단(조직)에 의해 주도된다. 그리고 형식 (상징적)과 기능(상징적)의 차이에 의해 기존의 형식들에게서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도록 허용한다.
사고구조(쳬계)와 행위는 그것이 생성become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의례적ritual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고 이는 사회구조 속에서 흔히 정치성을 갖는다. 또 이러한 정치성은 흔히 그 집합표상collective rePResentation 때문에 신회적 원형(원천,힘)을 갖는다.
바이델만(1968 : 483)이 V.W. .터너 Turner와 레비스트로스를 비판하면서 보여준 「터너와 레비스트로스 상징들의 명목상 성질을 강조한다…」에서 알 수 있듯이 상징에는 또 다른 신화적 힘이 있다.
상징의 「힘」과 「명목」의 통합을 이를 수 있는 까닭은 상징이 본래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이중성 ,양가성 때문이다. 상징은 사물을 규정하는 언어적 측면도 있지만 사물에서 원천적인 힘을 떠올리게 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성. 그 자체 가 이같은 「사고-행위」의 상징- 의례적 통합을 이루게 하는 원천인 것이다.
에반스 프리차드의 고전적 저작인「누어족」(1940)에서는 누어족의 정치체계의 작동방식을 너무 정체적으로 보았다.
그루얼 Gruel 1971과 하이트Haight 1972는「표범가죽추장Leopard-skin chief의 권력이 없다」는 에반스 프리차드의 주장에 반대한다.
그루얼은 표범가죽추장이 어떤 결정을 강제할 수 있는 직접적인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고 있다.
하이트는 표범가죽추장이 주도적인 세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능력을 통해 정치력을 행사했다면서 그의 권력은 정치적이기 보다 종교적이라고 주장했다.
어떻든 정치적인 것을 역동적으로 분석·기술할 때는 매우 상징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종교적인 의식과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 의식은 또한 신화 재창조로 승화된다. 「결혼의 정치학」이라든지 「의식의 정치학the politics of cermonial」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놀이의 신학」이라고도 말한다 .
지금까지 인류학은 미개사회primitive society나 복합사회complex society를 연구하면서 집단 중심으로 정태적인 분석·기술을 해왔다. 그리고 그것도 주로 타민족 연구에 열중해왔다. 이러한 경향을 예컨대 개인중심의 동태적(역동적)인 분석·기술을 할 경우 종전과는 또 다른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인류학이 복합사회로 시야를 옳기고 자민족의 일상생활에 대한 해석으로 관심의 초점을 맞출 때 「개인 중심-동태적 분석·기술」은 앞에서 얘기한 상징의례symbol-ritual적 접근 방법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것은 「일상 속으로의 축제」이면서「축제로서의 일상」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미적-정치적 활동이기도 하다. 그
그렇다면 이러한 의례ritual의 매커니즘은 어떤 것인가?
인간의 사고는 코드code에 의해 비롯된다. 코드는 마치 소리의 판별적 차이 difference 때문에 음운구조phonemics가 생기듯이 개념작용에 의해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코드가 사회적으로 결정화될 때 개념concept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한 문장을 만들 때 그 개념을 연결시키는 것이며 그 연결을 위해 문법을 필요로 한다.
코드는 2분법에 의해 생성되며 그것은 나선적 모양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코드가 계속 생성되는 원천은 무엇인가. 코드와 코드의 사이는 왜 분절적Segmentary이고 불연속적discontinuity인가.
인간의 지각 이미지 Sens image는 인간의 신체에서 통합 매커니즘을 갖고 있다. 인간의 신체의 신경조직은 전기적 전도(+,-)에 의해 지각된 이미지를 두뇌에 전달하는데 전기적 전도는 다름아닌 리듬의 전기적 전환이라고 여겨진다. (표1참조)
수많은 전기적 전도는 코드code의 창고와 같다. 코드가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이룩하기 위함이다 . 그런데 그 코드가 이데올로기를 지향하지 않고 감정의 캡
술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감정 ,그 자체를 위해 살아갈 사회적 장치도 필요한 것이다. 또 사회 속에서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체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해소(만족)를 수시로 해야 하고 이때는 오히려 이데올로기를 감정해소의 제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지각 이미지를 개념화하는 과정과 정반대이다
(표1 )
氣→리듬rhythm→지각 이미지sense-image→전기적 전도(+, -)→코드code→개념Concept→
이데올로기적 체계ideological system→신회적 표상representation→氣(陰陽)
이것은 흔히 기존의 이데올로기 체계에 반운동을 하는 것으로 극단화되기도 한다. 지각 이미지는 전기적 전도의 다발이며 분열 (2)과 통합 (1)을 계속한다 . 인간의 신체적 의례ritual는 근본적으로 전기적으로 우리 몸에 숨어(쌓여)있는 코드code를 리듬의 상태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체계가 신화적 표상을 통해 통합될 때(집단의 정체감을 형성할때)와 유사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사고(신화)체계와 함께 반드시 (상징)의례ritual를 동시에 가지는 것은 이같은 이치 때문이다 .
나아가서 상징·의례ritual 행위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며 이데올로기 자체가 이미 상징·의례적 기능을 갖는, 넓은 의미의 양가성biviocality, 애매모호성ambiguity은 이러한 인간의 지각 매카니즘의 가역성 때문이다. 또한 일(1)과 이(2)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이상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와 상징·의례행위를 사회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고있는 정치행위 (정치성)이다. 정치행위는 때로는 체제적-이것은 사교적 sociable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지만-또는 반체제적-이것은 혁명적·개혁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으로 나타난다. 또는 체제와 반체제사이를 오갈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정치적인 행위에서는 이데올로기와 상징·의례행위를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역설적으로 상징·의례행위의 뒷받침이 없으면 존재하기 어렵고 상징·의례행위 또한 이데올로기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생성되기 어렵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필연적으로 정치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사정(事情)을 말해준다.
이것은 물신 숭배fetishism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이 사물과 신(神)을 동시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과 통한다. 단지「사물=신」이라는 도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두 대립항 가운데 무수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문제는 「이데올로기-상징·의례행위」라는 도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단순논리 즉2분법에 빠지고 그것을(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대립항을 2분법을 발생시킨 차원과 동일한 차원에서 일원화하려는데 문제가 있다 . 해결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심층심리학이 의식과 무의식의 다른 차원의 해결을 하는 것은 매우 현명한 것이다 . 그러나 심층심리학도 다른 차원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 구속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역시 성급한 것 (해결)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사회 속에서 정치성(사교성, 혁명성), 자연 속에서 물신숭배fetishism로 살아가지만 이러한 도식의 이해에는 대립항, 즉 양자사이에 수많은 과정-대립항의 변증법적 역동적(음양적 )과정-이 개입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로 정치학과 신화학이며 기본적으로 미학(美學)인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상징학symbology이다. 예술인류한(상징학)의 기본 모델은 「종교의례=샤머니즘」이다. 과학의 이면에도 이데올로기가 깔려있고 신학에도 의례 ritual가 있다. 상징 (언어)-의례(실천)의 역설이다.
상징·의례는 실지로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다시말하면 컴피턴스competence와 퍼포먼스 performance,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코드code와 연주play-사이에 있으며 그것의 존재방식은 정적Static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dynamic이다. 그 역동적이라는 말은 이론과 실천의 끊임없는 긴장(균형잡기)이다 . 이것은 인류학에서 에틱etic과 에믹드emic의 관계에도 적용한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에틱과 에믹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변증법적 상호관계(역동적 긴장)에 있다. 대부분의 인류학적 연구가 에틱적 입장에 서 어떻게 에믹적 입장으로 파고들어 갈 수 있느냐에 고민하던 것과는 반대로 여하히 에민적 입장에서 에틱적 입장으로 빠져 나올 수 있느냐도 정치행위에 대한 예술인류학의 성공여부가 달려있다.
결국 에틱과 에믹을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끈은 없는 셈이며 양가의 관계야말로 변증법적인 관계로 한쪽은 다른 한쪽을 존재케하는 근본 원인이며 무한대의 만나고 헤어지는 욕구(성질)를 갖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에틱이 에믹이고 에믹이 에틱이 되는 경지가 가장 큰연구의 진폭을 가지는 인류학적 연구가 될 것이다. 상징·의례연구는 심층심리학이 꿈과 현실사이의 구된(2분법)에 의해 인간과 우주의 본질적인 모순을 해결하는-현실과 다른 꿈의 세계의 욕구해결, 연상, 도착, 해방-것과는 달리 인간의 마음mind에서 실천praxis에 이르는 2분법을 일원화함으로써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시말하면 이것은 서양학자들이 이론과 실천을 존재being로 보고 그것을 나누는 영역(기준·수준)을 무시한 것과는 달리 이론과 실천을 생성becoming으로 보고 오히려 두 세계를 나누는 영역(기준·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오히려 풍성하게 보는 입장이다. 다시말하면 훌륭한 상징인류학자는 어디서나 상징·의례를 찾아낼 수 있다(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상징인류학을 예술인류학이라 명명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우주는 실로 과정process중에 있다. 그 과정의 표현형이 이론이나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이러한 표현형에 우선priority한 나머지 존재being적 모순에 빠져 끊임없이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고 그것의 마지막 단계가 유심론적·유물론적 변증법이다. 이에 반해 동양은 과정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존재적으로 드러내는데 소홀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동·서양의 역사는 그 자체가 모순의 관계에 있으며 서양 문화의 존재론적(수단적) 가치가 동양 문화의 생성론적 (목적적, 본질적) 가치와 만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양의 변증법은 비록 존재적 가치가 숨어있지만 가장 동양적 사고·우주관에 근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변증법에서 존재론적 결함을 빼버리면 동양의 생성론 -즉 음양론,기철학- 에 이르게 된다.
필자가 정치행위를 연구하면서 정치인류학이 아니라 예술(상징)인류학이라고 한 까닭은 정치인류학이 일단 집단의 존재(사회적 실체)를 인정하면서 집단과 집단간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보는 것인데 반해 예술(상징)인류학은 집단을 생성(끊임없이 변하는 상징 또는 상징의 집합)으로 보고 개인과 집단사이의 관계를 엄밀히 말하면 음양적 상징으로 보려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상징)인류학은 집단의 실체적 성격을 상징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집단의 변화를 파악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징은 어느 곳에나 숨어있다. 단지 사람들이 보지 못할 따름이다. 예술(상징)인류학자는 숨어있는 상징과 상징의 조합을 찾는 광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소립자의 세계와 같다. 그러나 상징인류학자가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깡그리 밝힐 수는 없다. 본질은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상징)인류학자는 인간의 마음mind에서부터 사회, 물질문화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을 관장한다. 예술(상징)인류학자의 입장에서 본 정치인류학은 상징의 사회적인 차원에 불과하다. 즉 제도체내의 상징행위에 대한 탐구이다. 이에 비해 물질계에서의 상징작용의 대표적인 과학체계가 한의학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의 예술(상징)인류학은 다같이 상징을 다루면서도 마음mind, 사회, 물질계를 총체적으로 보기 때문에 비언어적non-Verbal 영역에까지 확대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으며 그것은 흔히 말하는 자연적 상징 natural symbol이 아니라 상징이 자연계의 물질운동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상징적 체계전symbolic system라는 점에서 언어와 비언어를 통합하는 상징학symbology의 집대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음양학」이나 「氣학」으로 명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존재)에 걸리면서 자기를 벗어나는 것 (생성)이 우주의 이중성ambiguity, 표현형과 이면형이다.
표현형과 이면형은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이다. 물질과 기(基)도 그러한 관계이고 생명은 바로 그 중간체로 상징의 표현형과 이면형의 다발이라 봄이 적합하다.
따라서 필사의 예술인류학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학이며 사교성Sociability이나 물신숭배fetishism에 머무는 상징의 결론을 넘어 사교성에 내재한 본질적인 힘, 물신숭배에 내재한「엄청난 상징의 층」을 밝히는 고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즉 사교성 그 자체, 물신숭배 그 자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것을 마음mind의 본질, 자연의 본질(氣)로 확대·환원시키는 극단의 드라머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필자는「구조의 즐김」performance이라는 차원에서 한국적 상징인류학으로 예술인류학을 제창한 것이다.
예술인류학은 무소부재의 학이다. 그것의 제일 원리는「현상은 본질의 드라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참고 문헌)
*Radcliff- Brown A. R. . 1952, 「Structure and Function in Primitive Society」, London Cohen & West
*Berber peter and L.T Luckman : 1967, 「The Social Constructiun of Reality」, London : Allen Lane, The penguin Press.
*Beidellman T.0. : 1968, 「Review of V.Turner」「The Forest of Symbol」 「Africa」, p.38, pp .483∼484.
*Evans-PRitchad E.E : 1940, 「The Nuer」, Oxford, England : Clarendon Press.
*Greuel, p. J. : 1971, 「The Leopard-Skin Chief」, American Anthropologist 73 : pp.1115-1120.
*Haight, B. : 1972, 「A Note on the leopard-Skin Chief」, American Anthropologist 74 : pp .1313∼ 1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