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시

이데올로기의 범람과 시의 승리




김용직 / 서울대 교수

8*15 해방은 우리 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한 고비를 이루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 철권정치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동서 양대 진영의 냉전체제에 휘말려든 것도 이때부터다. 8*15와 함께 우리 국토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우리 사회는 좌우 양측의 이데올로기 싸움에 의해 격심한 알력*마찰*충돌 현상의 소용돌이가 되었다.

말하자면 8*15는 우리에게 기대와 달리 아주 달갑지 않은 사태를 빚어내게 된 것이다. 비슷한 현상이 시와 문학, 문단에도 야기되었다. 피상적으로 보면 8*15는 우리에게 그지없는 축복이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시인과 작가들은 오래 규제가 되어온 우리말과 글을 마음대로 구사할 자유가 주어졌다. 이날 이후 우리에게는 어떤 소재나 주제 선택, 그 형상화에 있어서도 규제가 개입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8*15와 함께 우리 시와 문학은 비로소 해방된 하늘 아래서 제 생각을 제 나름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이야기할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밝은 면과 함께 8*15는 우리 시와 문단에 아주 짙은 빛깔의 어두운 그림자도 몰고 왔다. 이때부터 우리 문단은 공산당의 지령 아래 움직이는 좌파 문인들과 그에 맞서 우파의 보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려는 민족진영측 문인들로 양극화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좌파의 행동강령, 문학활동은 우파에 의해 비판*배제되어 수긍되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우파 민족진영의 문학활동은 좌파에 의해 전면 비판*거부되는 사태가 야기된 것이다.

8*15의 문학사적 의미

본래 8*15 이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문학사는 매우 불우한 경로를 거쳐 그 명맥이 유지되어 왔다. 19세기 말 개항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무거운 책무가 두 어깨에 지워져 있었다. 그 이전 우리 문학은 미처 전근대의 너울을 제대로 벗어버리지 못한 채였다. 그때부터 우리 시와 소설들은 다분히 지역성이 강한 문학 성향을 탈피하여 근대적 차원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당면 과제는 정치*사회적 여건 미비로 제대로 달성되지 못했다. 우선 문학과 문단이 제대로 근대화의 기틀을 구축하기도 전에 우리 민족은 주권을 강탈당했다. 일제는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철권정치로 우리 민족을 지배했다. 그 부수 현상으로 우리 시인과 작가들은 항상 총독부의 감시*규제*핍박 속에서 그들의 말을 가다듬고 작품을 써내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패퇴하고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진 8*15가 왔을 때 우리에게는 하나의 지상명령 같은 것이 내려져 있었다. 그것이 재빨리 전체 문학인들의 행동을 좋은 작품, 훌륭한 문학을 제작*발표하는 쪽으로 결집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세계문학, 민족적 대문학시대를 열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해방과 함께 빚어진 이데올로기 대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은 이 민족문학사의 지상과제 수행에 엄청난 차질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범박하게 보아도 이것은 해방이 몰고 온 부정적 사태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8*15 이후 우리 시와 시단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어떤 경우에도 문학*예술은 시대와 무관하게 전개되는 초월적 실체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런 자리에서 당연히 8*15가 뜻하는 바 정치*사회적 상황도 이 무렵 시와 시인의 효과적인 이해를 위해서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방 초기의 문단 상황-좌파 문학가동맹 측의 행동 양태와 시

어떤 경우에도 문학활동의 첫 발걸음은 작품의 제작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 역시 그 발표와 호응의 확보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8*15 직후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진 문학활동은 이런 초보적 공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8*15를 맞은 다음 우리 주변의 문인들은 작품의 제작 발표에 앞서 문인들을 규합*조직하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문단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이때 이런 일을 주동한 문인들이 좌파계의 시인*작가들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구(舊)카프계의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재빠르게도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들린 다음날 이미 여러 문인들과 접촉한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한청 빌딩의 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 자리를 접수하여 거기에 조선문학건설준비본부(그후 곧 준비 두 자는 제거함)의 간판을 내거는 것이다. 처음 이 단체가 표방한 것은 전문단인의 대동단결이었고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문학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표방은 어디까지나 위장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문학건설본부는 발족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조선문학동맹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그 실질적인 주재자 자리인 서기장을 임화가 차지한다. 또한 이 단체는 같은 무렵에 발족한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1945년 9월 17일 발족)을 흡수, 병합해서 그 세력을 확대*팽창시킨다.

그리고 1946년 2월 7일 이른바 전국문학자대회를 여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문학동맹은 압도적으로 많은 문학인들을 포섭*가맹시킨 문학단체였다. 그리하여 단연 해방문단에 군림하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조직기구는 그 무렵까지 아직 전국적인 규모로 문학인들을 동원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모든 행동에 형식*명분을 선행시키는 좌파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시급히 시정할 필요가 있는 경우였다. 그리하여 그 극복책으로 개최된 것이 전국문학자대회였다. 이 대회를 계기로 문학동맹은 그 명칭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고친다. 또한 여러 맹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칙을 결정하고 행동강령도 채택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세운 바, 문자 그대로의 한반도를 대표하는 최대의 문학단체가 되는 것이다. 이 단체는 그 표방을 범박하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민족문학 건설에 있는 양 위장한다. 참고로 그 행동강령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과정에 있어서 조선문학의 자유스럽고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좌의 강령을 제시함.

1. 일본제국주의 잔재의 소탕

2. 봉건주의 잔재의 청산

3. 국수주의의 배격

4. 민족문학의 건설

5. 조선문학의 국제문학과의 제휴

그러나 이런 표방들은 어디까지나 표방으로 그친다. 전국문학자대회 때도 그 각본을 짜고 연출을 행한 것은 임화*김남천*이원조(李源朝) 등이다. 또한 이때에는 뒤에 남로당의 문화활동을 책임진 김태준(金台俊)이 등장한다. 그는 이미 그 이전에 있었던 문학동맹과 프로예맹의 조직 합동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뿐만 아니라 이 대회에서 지지*찬동을 보내고 고무*격려의 말들을 한 것 역시 조선공산당과 그 외곽단체인 공청(共靑), 민전(民戰), 연극동맹, 영화동맹 등이다. 이런 사실은 조선문학가동맹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구카프의 노선을 새롭게 적용하여 활동할 필요가 있게 만들었다. 그들의 민족문학 표방이라든가 계급사관에 입각한 이데올로기를 후퇴시킨 듯 위장한 사실은 모두가 이런 선에 연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문학가동맹은 발족 당시부터 공산당의 지휘 통솔 하에 있었고, 그 맹원들의 활동들 역시 알게 모르게 그런 각도에서 조종*통제되었다. 따라서 8*15 이후 그들의 시와 문학도 당연히 그런 테두리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 활동을 본격화시키면서 문학가동맹이 노린 것은 자파 세력의 확대*강화였다. 이에 따라서 그들은 과거 프로문학활동에 가담하지 않은 시인들도 상당수 포섭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또한 문단활동의 대세가 새로운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깨치고 인식이 있었던 듯 보인다. 그리하여 8*15 이후 시작활동을 시작한 다수 신진 시인들도 이끌어 들였다. 그리하여 8*15 이후 좌파의 시와 문학은 대충 세 가지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 첫째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이 임화, 권환(權煥), 박팔양(朴八陽), 박세영(朴世永), 조벽암(趙碧岩) 등이다. 언뜻 보아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이들은 대개가 구카프계 출신의 시인들이다. 따라서 조직활동이나 투쟁경력으로 볼 때는 단연 문학가동맹 내의 시 분야를 장악*지배할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작품활동의 실제에 있어서는 사정이 반드시 그렇지 못했다. 이들 가운데 박세영과 박팔양은 8*15 직후 임화와는 달리 프로문학가동맹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김태준을 개입시킨 공산당의 중재*지령에 따라 문학가동맹으로 흡수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들에게는 감정상의 앙금이 생긴 것 같다. 그리하여 소련군의 비호 하에 38도선 북쪽이 사회주의 체제를 굳혀 가자 곧 남쪽을 등져버린다. 이른바 일차 월북문인들의 대열에 끼인 것이다. 따라서 1946년도 중반기경부터 이들의 활동은 38선 이남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음 권환, 조벽암 등은 8*15 후에도 여전히 이데올로기를 교조적으로 옹호*해석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음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제재로 한 권환의 작품 일부다.

높은 담 밑 흰눈도 마지막 사라지고

연못가 버들가지 푸른 고궁에

그대들은 왔구려 봄을 찾아서

그대들은 거룩한 원정들

팟쇼의 억센 가시나무를

군국주의의 모진 독초를

모조리 베어버리고 뿌리 채 뽑아버린

승리의 원정 !

세계에 민주주의의 씨를 뿌리고

세계의 민주주의 꽃에 물을 주는

민주주의 원정

훌륭하게 복도다 주리라

조선의 꽃

사십 년 동안 제국주의 발 밑에 짓밟혀

잎도 꽃도 피어보지 못한 한 떨기 조선의 꽃

봉실봉실 피리라 조선의 꽃

아름답게 피리라 민주주의의 꽃

오래 동안 서리맞고 거치러진

조그마한 이 화원에도

<고궁(古宮)에 보내는 글>

본래 문학가동맹이 노린 것은 시를 통해서 대중을 교양*선동하고 그들로 하여금 혁명투쟁의 대열에 서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의식화되지 않은 대중을 이끌어들일 말씨나 가락, 문학적 의장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8*15 이전과 꼭 같이 프로 시가 단순한 이데올로기의 해설판 이상이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권환의 작품은 그런 요구에 기능적으로 대처할 힘을 지니지 못했다. 이런 사정은 임화의 경우에도 대동소이하게 나타난다. 새삼스레 밝힐 것도 없이 임화는 1920년대 후반기 이후 프로문학을 지배한 문학운동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 역시 프로 시로서는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타의 공인을 받은 경우다. 또한 그의 작품활동은 8*15 후에도 상당히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질적 수준에 있어서 이미 거기에는 옛날의 빛깔 농도가 유지되지 못한 상태였다.

죽어도

썩지 않을

하나를 지닌

가슴과 가슴은

공 럼 부푸러

드는 손

마디마디 맺힌 피

발을 구르면

따뜻이 흘러 나려

너른 회장(會場)은

온전히 한 심장

여기

인민공화국의

수도가 있다

노래에도

연설에도 이미

살길은 명백하고

우리는 단지

죽는 법을 배워

도라가면 그만이다

<헌시(獻詩)> 전문

카프의 시인으로서 활약한 시기에 임화의 시가 높이 평가된 데는 거기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 무렵 임화는 그의 작품에 대개 인물을 등장시켰다. 그는 또한 반드시 계급의식을 바닥에 깐 말투로 대중의 투쟁의욕을 고취해 내었던 것이다. 그것을 카프측에서는 한때 단편 서사시라는 이름으로 규정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프로 시가 이야기 줄거리 비슷한 것을 지니고 그 가락도 비장미가 담긴 쪽으로 쓰여질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작품으로 집약되는 8*15 이후의 임화 시에서는 그런 요건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조선청년 총동맹 결성대회를 겨냥하고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로 보아서는 대단한 비중을 두어야 할 행사를 다룬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런 사실이 기능적으로 다루어졌다고 할 정도로 장중한 느낌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점으로 보아 8*15 후 임화의 시는 저미한 상태에 그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8*15 이후 문학가동맹에 관계한 시인들에는 일군의 순수 문인들이 있다. 그들이 곧 정지용(鄭芝溶), 김기림(金起林), 오장환(吳章煥), 임학수(林學洙), 여상현(呂尙玄), 이용악(李庸岳), 이병기(李秉岐), 조운(曺雲), 조남령(曺南嶺) 등이다. 이들은 몇 가지 점에서 공통된다. 우선 8*15 이전 이들은 전혀 카프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중의 일부는 카프의 창작방침에 정면으로 맞서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그 작품의 질로 보아 이들 시인들은 대개가 우리 시단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은 경우였다. 특히 정지용이나 김기림, 오장환 등은 그 무렵 우리 주변에서 일급 시인의 평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처음 문학가동맹의 바닥을 흐르는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이해*파악하지 못한 채 좌파의 문학집단에 가담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그쪽에 속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단, 그 가운데 정지용이나 임학수는 작품활동의 실제에서 적극적 활동을 펴지는 않았다. 이들의 활동은 대개 논설, 잡문이라든가 실제 발언 등을 통해서 행해졌다. 김기림, 오장환, 이병기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특히 김기림은 「새나라 송(頌)」, 「어린 공화국이여」 등을 통해서 문학가동맹 취향의 작품을 쓰기는 했다.

거리로 마을로 산으로 골짜구니로

이어가는 전선은 새나라의 신경(神經)

이름 없는 나루 외따른 동리(洞里)일 망정

빠진 곳 하나 없이 기름과 피

골고루 도라 다사론 땅이 되라

어린 기사(技師)들 어서 자라나

굴뚝마다 우리들의 검은 꽃묶음 연기를 올리자

김빠진 그장(場)마다 동력을 보내서

그대와 나 온백성의 새나라 키어가자.

산신(山神)과 살기와 염병이 함께 사는 비석(碑石)이

선 마을 마을에

모-터와 전기를 보내서

산신(山神)을 쫓고 마마를 몰아내자

기름친 기계로 운명과 농장을 휘몰아갈

희망과 자신과 힘을 보내자

용광노에 불을 켜라. 새나라의 심장에-

철선을 뽑고 철근(鐵筋)을 느리고 철판을 펴자.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나라 세워가리

<새나라 송(頌)>

본래 프로 시는 넓은 의미에서 혁명투쟁의 수단이다. 그리고 이때 혁명이란 계급의식에 입각한 체제 전복을 전제로 한다. 또한 계급의식에서 골자를 이루는 것은 이른바 지배계층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다. 그리하며 프로 시에서는 계급의 적과 그 체제, 문화에 대한 비판*배제*공격의 의지가 표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기림의 이 작품에는 그런 단면이 잘 검출되지 않는다. 그 대신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건강하고 희망에 찬 새 사회, 새 나라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8*15 이후 김기림의 시는 좌파의 강경노선 쪽으로 급회전한 경우가 아니다. 그의 전향은 상당히 부드러운 단면을 띠고 나타나는 셈이다.

다만 오장환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르게 나타난다. 그는 당시 우리 사회를 「병든 서울」로 집약시킨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시인 가운데 가장 강하게 프로의식을 들어낸 경우가 여상현과 이용악이다. 우선 여상현은 1930년대 후반기에 나온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의 한 사람이다. 그 무렵 그의 시는 해사적(解辭的)인 단면이 강하고 초현실주의 성향을 띤 것이었을 뿐 프로문학의 갈래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8*15와 함께 이런 사정에는 큰 변화가 온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는 것이 「영산강」이다. 여기서 여상현은 영산강 일대를 「지극히 영특한 백로의 웅거지」라고 노래 불렀다. 그런가하면 거기 사는 사람들을 차례로 들먹이면서 다음과 같이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가을 햇볕에 항쟁(抗爭)의 피도 엉키었고

왜적(倭敵)과 더불어 호화롭던 놈이

또한 호화롭던 외출이 잦아도

택양(潭陽), 죽세공(竹細工), 화순(和順) 탄광부(炭鑛夫), 나주(羅州) 소방공,

도적(盜賊)이 버리고 간 옛 땅만 바라될 뿐인

무수한 농민들

결국 김기림의 경우와 달라서 여상현의 작품에는 계급의 적에 대한 비판*적개심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8*15 후 그의 전신은 상당한 급선회를 뜻하게 된다. 이용악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는 일제 말기에 「낡은 집」과 「분수령」 등 두 권의 시집을 출간시킨 시인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어느 정도 국경 지방의 한층민들이 갖는 생활상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그는 체질적으로 프로문학에 기울 요인을 지닌 경우에 속한다. 그것이 8*15를 맞고 문학가동맹에 참여하면서 곧바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시는 일찍부터 문학가동맹에서 이른바 진보적 단면을 지닌 작품의 한 보기처럼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1947년 문학가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문학상에서는 오장환의 「병든 서울」과 함께 수상후보작으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문학가동맹에 관계한 셋째 유형의 시인들이 8*15 이후 문단에 등장했거나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한 일군의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그 이름을 들어보면 설정식(薛貞植), 김동석(金東錫) 등을 비롯하여 김상민(金常民), 김광현(金光現), 김상훈(金尙勳), 이병철(李秉哲), 박산운(朴山雲), 유진오(兪鎭五)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설정식과 김동석 등은 8*15 이전에도 연구논설이라든가 번역*수상 등을 발표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들의 시가 문단에서 고정된 예는 없었다. 또한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도 동인지 활동을 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양이나 작품 수준은 아주 미미한 것이어서 그것으로는 기성으로 대접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어떻든 8*15 이후에 등장한 시인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그 발표량으로 보면 이들의 활동은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설정식은 「종(鍾)」(1947), 「포도(葡萄)」(1948), 「제신(諸神)의 분노」(1948) 등 세 개 시집을 잇달아 출간시켰다. 또한 김동석도 1947년도에 33편의 작품을 실은 시집 「길」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시가 지닌 질적 수준은 별로 높지 못했다.

만(萬) 생영(生靈) 신은(呻吟)을

어드메 간직하였기

너는 항상 돌아앉아

밤을 지키고 새우느냐

무거히 드리운 침묵이어

네 존엄을 뉘 깨트리뇨

어느 권력이 네 등을 두다려

목메인 명인(鳴咽)을 자아내드뇨

(‥‥‥)

한 아름 공허여

아 우리는 무엇을 어루만지뇨

그러나 무거히

드리운 충종(忠從)이어

동혈(洞穴)보다 깊은 네 의지(意志) 속에

민족의 감내(堪耐)를 살게 하라

그리고 모든 요란한 법을 거부하라

내 간 뒤에도 민족은 있으리니

스스로 울리는 자유를 기다리라

그러나 내 간 뒤에도 신음은 들리리니

네 파루(破漏)를 소리 없이 치라.

-설정식, <종(鍾)>

설정식은 그의 첫 시집의 제목을 그대로 이 작품의 제목으로 삼았다. 또한 뒤에 문학가동맹 소속의 문인들이 이 시집의 서평을 쓸 때도 곧잘 이 작품이 인용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설정식이 이 무렵 발표한 작품 가운데서는 대표작의 하나로 생각되는 경우다. 그런데 이 시의 바탕이 되는 상상력은 별로 신통한 게 못된다. 여기서는 종이 핍박받는 민족의 상징이 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 소리는 역사의 멍에를 담은 고통의 심상을 곁드린다. 우리는 이미 에밀레 종의 슬픈 전설을 신라시대에 가져온 민족이다. 그렇다면 종소리에서 고민하는 인간사를 연상했다는 것은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생각이다. 더욱이나 이 작품의 말솜씨는 상당히 진부한 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 작품을 고정할 수가 없게 된다.

다음 나머지 여러 신인들의 시는 또 다른 한계를 지닌 경우다. 문학가동맹은 이들 신진 시인들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리하여 8*15 다음해에는 재빨리 이들 가운데 김광현, 김상훈, 이병철, 박산운, 유진오 등 다섯 사람을 골라 「전위시인집(前衛詩人集)」을 내게 한다. 구체적으로 이들의 공동시화집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김광현(金光現)편>

새벽길, 보람, 조국은 울고, 기아선(飢餓線)에서, 거지반 헐벗고

<김상훈(金尙勳)편>

말, 전원애화(田園哀話), 장열(葬列), 기(旗)폭, 바람

<이병철(李秉哲)편>

소, 새벽, 대열(隊列), 울면서 따라가면서, 거리에서

<박산운(朴山雲)편>

버드나무, 추풍령(秋風嶺), 거울같이 아는 일을, 소년의 사(死), 포복(匍匐)의 시

<유진오(兪鎭五)편>

공청원(共靑員), 장마, 횃불, 삼팔이남(三八以南),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 젊음이냐 ?

이 시집을 내고 나서 위의 다섯 시인들은 곧 전위 시인으로 호칭된다. 여기서 전위란 물론 좌파, 문학가동맹의 행동노선을 가장 앞장서 나가는 시인에게 허용된 이름이다. 따라서 이 다섯 시인에게는 좌파가 대단한 기대를 걸었음이 짐작된다. 그런 사실은 이 시집이 나온 전후의 문학가동맹 동향으로도 재확인된다. 이 시집의 서문과 발문은 당시 문학가동맹 시부에서 주도권을 행사한 김기림과 오장환이 각각 맡았다. 또한 이 작품집이 나오자 좌파 쪽의 논객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서 그것을 문학적인 성공 내지 성과라고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다시 우리가 이들의 시를 검토해보면 그런 일련의 논평이 상당히 과장된 것임을 알게 된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

두 팔에 힘을 주어 버티는 것은

누구를 위한 붉은 마음이냐 ?

깨어진 꿈 조각을

떨리는 손으로 주어 모아

역사가 마련하는 이 국사(國士)우에

옛날을 찾으려는

저승길이 가까운 영감(令監)님들이

주책없이 중얼거리는 잠고대를

받아드리자는 우리의 젊음이냐 ?

왜놈의 씨를 받어

소중히 기르는 무리들이

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리진

새로운 ○○○의 손님네들 앞에

머리를 숙여

생명과 재산과 명예의

적선을 빌고 있다.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

서른여덟해 전 나라와 같이

송두리채 팔리워 피눈물어려

남의 땅을 헤매이다 맞어죽은 동족들은

팔리든 날을 그리고

맞어죽든 오늘 구월 초하루를

목메어 가슴을 치며 잊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날 또한

색은 ○○○에 배탈이 나고

뿌우연 밀가루에 부풀어 올르고도

삼십오백만불의 빗을 질머지고

생각만 하여도 이가 갈리는

무리들에게 짓밟혀

가난한 동족들이

여기 눈물과 함께 우리들 앞에 섰다.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

어느 놈이 우리의

분통을 터트리느냐 ?

우리들 젊음의 힘은

피보다 무서웁다

머얼리 바다 건너 저쪽에서도

피끓은 젊은이의

씩씩한 행진과 부르짖음이

가슴과 가슴들 속에 파도처럼 울려온다

젊음이 갈 길은 단 한길이다

가난한 동족이 우는 곳에

핏발서 날뛰는

○○ ○○○들과

망명한 영감님들에게

저승길로 떠나는 노자를 주어

○○으로 쫓아야 한다

-유진오,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

얼핏보아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아주 직설적인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화자가 여기서 외곬으로 외치고 있는 것은 적을 추방하자는 외침이다. 그리고 그 적이란 화자의 편에서 보면 인민들을 못살게 만드는 외세이며 보수 반동으로 규정될 수 있는 늙은이들이다. 이 작품은 처음에서 끝까지 그들을 배제*추방하자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따라서 예술적인 의장보다는 목적의식이 앞서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예술성보다 이데올로기만이 강조된 경우라고 하겠다. 이 작품은 문학가동맹이 다음해에 낸 시화집에 유진오의 대표작으로 뽑아서 수록했다. 또한 한동안 이 작품의 작자는 그들 진영에서 계관시인까지 칭예된 바 있다. 참고로 밝히면 유진오는 이 작품을 훈련원 광장에서 거행된 국제청년데이에서 낭독했다. 그리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군정 당국에 체포*구금된 다음 재판에 넘겨져 1년형의 언도를 받았던 것이다. 문학가동맹과 공산당 문화부에서는 이런 사실을 높이 산 것 같다. 그리하여 그 무렵 가장 훌륭한 시와 시인으로는 의례껏 유진오의 이름과 이 작품이 첫째로 손꼽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해낼 수 있다. 즉 8*15 후 문학가동맹이 지향한 시와 문학의 길에는 예술성이 전혀 문제 밖의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당파성이 문제였고 그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읊조려 내는가가 최대의 관심사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시는 카프가 그랬던 것처럼 이데올로기의 시녀 내지 그 앙상한 잔해로 남을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민족진영 시인들의 활약과 성과

8*15와 함께 좌파 프로문학 진영이 재빨리 문단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에 대응하는 우파 민족진영의 움직임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 중앙문화협회다. 이 단체는 그 명칭에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문학만의 전문단체가 아니라 문화*예술의 개념을 포괄한 일종의 통괄 기구로 발족한 것이다. 그 주역은 변영로(卞榮魯), 박종화(朴鐘和), 김영랑(金永郎), 김광섭(金珖燮), 이헌구(李軒求), 양주동(梁柱東), 유치진(柳致眞), 이선근(李瑄根) 등이다. 이런 명단으로 짐작되는 바와 같이 중앙문화협회는 지난날의 국민문학파와 해외문학파를 주축으로 하여 발족이 이루어진 단체다. 그리고 그 발족 일자는 1945년 9월 18일로 나타난다. 중앙문화협회는 발족과 동시에 곧 반문학가동맹, 반공주의를 그 기치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 사업의 하나로 기관지 「중앙순보(中央旬報)」의 발간과 함께 이승만의 저서인 「독립정신(獨立精神)」, 「일본패전의 진상」을 출간했다. 한편, 8*15 이후 최초 여러 문단인을 거의 망라한 「해방기념시집(解放記念詩集)」도 펴낸다.

그러나 중앙문화협회는 그 성향으로 볼 때 문학*예술의 전문단체가 아니라 그 전단계에 속한다는 느낌이 짙었다. 이에 한계를 느낀 민족진영 문인들은 그 다음 단계의 조직으로 전조선문필가협회를 발족시킨다. 이 단체는 1946년 3월 13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상당수의 내빈과 함께 백여 명에 달하는 문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족되었다. 회장에 정인보, 부회장에 박종화(朴鐘和), 이병도(李丙濤), 설의식(薛義植), 함상훈(咸尙勳), 사무국 상무위원에 이헌구, 오종식, 김광섭 등의 진용이었다. 또한 5개항으로 이루어진 강령도 채택했는데 그 가운데는 「민족자결과 국제공약에 준거하여 즉시 완전 자주독립을 촉성하자(제2항)」라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민족자결」, 「즉시 완전 자주독립」 등의 구절은 주의를 요하는 말들이다. 그 무렵 민족진영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 예속 노예화로 규정하고 그것을 결사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와 동시에 민족자결 원칙에 의한 즉시 독립을 외쳐마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전국문필가협회 역시 반공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문학단체임을 알 수 있다.

문필가협회가 발족*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을 무렵 좌파 문학가동맹측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들은 숫자로 보아 압도적으로 많은 문인들을 규합하여 민족진영 문인들을 압도하려고 들었다. 이런 문학가동맹의 공세에 기능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춘 조직체가 필요했다. 하나는 좌파의 양적인 공세에 맞서 작품의 실제에서 격조를 유지한 활동이 전개되어야 했다. 또 하나는 기동성 문제였다. 문화협회나 문필가협회는 어느 편인가 하면 원로, 노장문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으로는 좌파의 일방적인 공세에 맞서 기능적으로 펼 수가 없었다. 이 역시 민족진영 문화전선의 한계점이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출범한 단체다. 구체적으로 이 단체는 1946년 4월 4일에 발족했다. 그리고 그 중요 구성원들은 김동리, 유치환, 서정주,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조연현, 곽종원 등이다. 이 단체는 발족과 동시에 선언과 강령을 발표했는 바 선언문의 일절에는 「대다수의 문인은 당(黨)에의 예속을 부르짖어 문학정신을 유린하고 다시 나아가 사조와 정국에 대한 천박한 해석과 조급한 판단으로 말미암아, 직접*간접으로 조국과 민족의 해체에 급급」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청년문학가협회는 좌파의 반민족적인 활동에 맞서 싸울 뿐 아니라 「진정한 문학정신」의 옹호를 기한다고 나섰다. 여기 나온 진정한 문학정신 옹호 주장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청년문학가협회도 물론 좌파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 그들 나름의 이데올로기를 받들어 지키고자 했다. 그것이 좌파의 계급사관에 대한 국가, 민족의식의 표방*현양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에 그치지 않고 문학활동의 한 근간으로 예술적인 차원 개척, 곧 작품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기했다. 이런 의미에서 청년문학가협회는 우파, 민족진영의 문학단체 가운데서도 아주 기동성이 강한 경우였다.

8*15 후 중앙문화협회와 문필가협회, 청년문학가협회 등에 관계하면서 반문학가동맹의 입장을 취한 가운데 민족진영의 편에 선 시인들은 크게 세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한국 근대시의 초창기부터 등장, 활약한 시인들로 당시 우리 문단의 원로에 해당되는 분들이다. 그 이름을 들어보면 정인보(鄭寅普), 변영로(卞滎魯), 김억(金億), 박종화, 홍사용(洪思容), 백기만(白基萬), 양주동(梁柱東), 이하윤(異河潤), 김광섭, 김영랑 등이다. 8*15 후에도 물론 이들은 작품활동을 통해서 현역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어느 편인가 하면 그 질적 수준들은 이미 우리 시단의 중심권에서 벗어난 느낌이 있었다. 그 연령으로 보아 정력적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할 입장이 못된 듯하다. 또한 그 가운데 일부는 민족진영의 정치운동이나 문화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하여 모든 일을 제패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전력 투구를 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다음 제2유형에 속하는 민족진영의 시인들이 서정주, 유치환, 김달진 등이다. 이들은 30년대 후반 우리 문단에 등장한 시인들이다. 또한 당시 나이 30대 초반이어서 육체적으로 정력적인 작품활동이 가능한 때였다. 뿐만 아니라 그 의식에 있어서 이들은 문학가동맹 소속의 시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들에게는 시와 문학이 일체였고 그 밖의 모든 일들은 부차적이거나 참고사항이었을 뿐이다. 이런 마음의 자세에 곁들여서 이들은 3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익혀온 기법도 지닌 터였다. 그리하여 해방 한국 문단에서 주목되는 작품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우리 시의 새 차원을 구축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 무렵에 나온 서정주의 「귀촉도」와 유치환의 「생명의 서(書)」, 「울릉도(鬱陵島)」는 주목에 값하는 시화집들이다. 먼저 서정주의 「귀촉도」에는 「밀어(密語)」 이하 24편 서정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작품 가운데는 「행진곡」이나 「만주(滿洲)에서」 처럼 8*15 전에 쓰여진 것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개 그들이 활자화된 것은 8*15를 맞이하고 나서의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크게 보아 해방시단의 수확으로 셈쳐서 큰 잘못이 없는 경우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견우(牽牛)의 노래」(「백민」 1946년 6월호)는 그 제재가 우리 전래의 민담인 견우 직녀에서 택해져 있다. 그러니까 그 의식의 뿌리는 우리 민족문화의 한자리에 닿아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정서 자체는 개성적이면서 동시에 감미롭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전통의 감각이 곁들여진 가운데 제 나름의 해조도 지니는 가작이 되어 있다. 또한「밀어(密語)」(「백민」1947년 2월호)는 시인 자신의 말에 따르면 8*15 해방의 기쁨에서 그 제작 동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그런 관념이나 사변의 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인(人)가에 머무른 꽃붕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채일을 두른듯, 아늑한 하늘인(人)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인(入)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본래 좋은 서정시에도 사상이나 관념은 이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때 사상이나 관념, 의미 내용이 얼마간이라도 작품 안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가 아닌 일상적 언어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자취가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받는 느낌은 그저 푸근하고 따뜻한 봄날의 꽃 핀 정경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정신의 깊이를 느끼게 만드는 상상력의 층이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심상과 가락을 통해서 우리를 움직이게 할뿐이지 생생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서정시는 고운 가락을 빚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되는 것이 주요한과 김억, 김영랑 등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면세계의 폭과 깊이를 갖기에 성공한 것들도 나타난다. 그 대표격이 되는 것이 만해 한용운의 경우다. 30년대에 들어 와서는 몇 개의 실험이 가해진 바도 있다. 가령 정지용과 김기림 등에 의해서는 구체적이며 견고한 심상들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상(李箱)과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들은 아주 과격한 입장에서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나름의 가락을 가진 가운데 선명한 심상을 제시해내고 그와 함께 내면세계의 깊이도 지닌 작품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서정주의 위와 같은 작품에는 그런 단점이 고루 극복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집 「귀촉도(歸蜀途)」는 8*15 시단의 한 수확인데 그치지 않는다. 분명히 그것은 한국 서정시사에 나타난 한 풍경이 되는 것이다.

다음 「생명의 서(書)」와 「울릉도(鬱陵島)」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성립된다. 8*15 이전 유치환은 「청마시초(靑馬詩痹)」를 상재했다. 거기서 그는 선이 굵으면서 통사적인 말투로 강하게 생명의지 같은 것을 노래했다. 그 이전 한국의 서정시는 대개가 여성적인 목소리로 마음속의 한을 노래한 편이다. 유치환의 시는 그와 좋은 대조가 되는 단면을 지닌 셈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8*15 이전에 쓰여진 그의 시는 울림이 부족했다. 그런데 8*15를 맞고 나서 그 지양*극복이 이루어졌다. 작품 「울릉도」는 이런 경우의 우리에게 가장 좋은 보기가 되어 준다.

동쪽 먼 섬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금수(錦繡)로 구비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을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구비에

금시에 지워질듯 근심스리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자나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밀리어 오는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의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피나

얼핏 보아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의 제재는 울릉도에 있다. 이 동해에 있는 한 섬을 이 작품은 의인화시켰다. 그리고는 그것을 독특한 가락에 곁들인 심상으로 제시하여 놓은 것이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8*15 이후 민족진영의 시가 마련한 그 나름의 설자리를 헤아려 볼 수 있다. 문학가동맹과 맞서려는 의식에서 민족진영의 문학이 민족 쪽으로 기운 사실은 이미 지적된 바와 같다. 그러나 이때 민족이 시에서 소재 상태로 생경하게 들어 날 수는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소재가 곧 예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치환에게는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울릉도를 의인화시킨 다음 그것에 그 나름의 역사 감각, 국토의식, 향토애의 마음 같은 것을 동시에 저며 넣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두가 하나의 심상으로 융합되고 또한 작품의 음성구조에 수렴되어 총체적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이 작품이 민족과 동시에 예술적인 차원도 훌륭하게 확보했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으로 집약된 유치환의 시 역시 해방기의 시와 문학의 한 이정표가 된다고 할 것이다.

8*15 후에 나타난 민족진영의 셋째 유형에 속하는 시인들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朴木月), 이한직(李漢稷) 등이다. 이들은 모두가 일제 말기에 소정의 절차를 밟고 문단에 등장한, 또한 당시 나이들이 20대 종반기의 한창 때였다. 정치나 사회활동과 작품제작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분별력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이 8*15 후에 보여 준 작품 가운데는 한국 서정시의 새 국면 타개에 기여한 것이 있다. 이런 경우의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는 것이 「청록집(靑鹿集)」이다. 구체적으로 이 시화집은 1946년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공동명의로 발간되었다. 참고로 거기 실린 작품들 이름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박목월(朴木月)편>

임, 윤사월(閏四月), 삼월, 청(靑)노루, 갑사댕기, 나그네, 달무리, 박꽃, 길처럼, 가을 어스름, 연륜(年輪), 귀밑 사마귀, 춘일(春日), 산이 날 에워싸고, 산그늘.

<조지훈(趙芝薰)편>

봉황수(鳳凰愁), 고풍의상, 무고(舞鼓), 낙화(洛花), 피리를 불면, 고사(古寺) 1*2, 완화삼(玩花衫), 율객(律客), 산방(山房), 파초우(芭蕉雨), 승무(僧舞)

<박두진(朴斗鎭)편>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도봉(道峰), 별, 흰장미와 백합꽃을 흔들며, 연륜(年輪), 숲, 푸른 하늘 아래, 설악부(雪岳賦), 푸른 숲에서, 어서 너는 오너라, 장미의 노래

물론 이들 작품 가운데는 8*15 이전에 제작*발표된 것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박목월의 「연륜(年輪)」, 「산이 날 에워싸고」라든가 조지훈의 「봉황수(鳳凰愁)」, 「승무(僧舞)」 그리고 박두진의 「묘지송(墓地頌)」, 「향현(香峴)」 등은 「문장(文章)」의 추천시로 일제 치하에서 발표된 것이지 8*15 후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예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 시집은 8*15 이후 민족진영의 시가 올린 성과로 손꼽힐 수 있다. 우선 이 시집에서 일제 치하에 발표된 작품들은 숫자로 보아 아주 부분적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두가 8*15 후에 나온 작품들이 있기에 그 존재의의가 확보되고 제나름의 역학도 지니게 되는 듯 보인다. 이 말을 바꾸어 보면 「청록집」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8*15 이후에 제작*발표된 작품에 그 비중이 놓이는 경우가 된다. 한편 이 시를 통해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은 후에 청록파라고 불려지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세 시인이 공동시화집을 내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세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서 하나의 공통되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 하나는 이들 시인이 다같이 자연이라든가 고풍스러운 세계, 또는 한국의 전통적인 마음 자리를 기반으로 한 시를 쓴 점이다. 박목월은 그가 사는 고장과 거기에서 촉발된 감정 등을 그의 시의 제재로 삼고 있다. 그런가하면 조지훈은 대개가 해묵은 우리 자신의 것에 그의 눈길을 던졌고, 또한 현대 서구문명에 오염된 도시를 벗어난 산이라든가 강마을에 그의 노래거리를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박두진은 이 무렵 아주 뜨겁게 그 주변의 자연에 탐닉했다. 그리하여 그는 해와 별, 나무가 우거진 산들과 숲을 고조된 목소리로 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과 함께 「청록집」에는 아주 강한 세 시인의 개성도 검출된다. 우선 박목월은 매우 부드러운 가락 속에 때로는 선명하기 그지없는 심상으로 그의 작품을 빚어낸다. 구체적으로 「윤사월(閏四月)」(「상아탑」 6호 (1946. 5))을 보면 그 무대배경은 깊은 산 속 인적이 드문 어느 집이다. 때는 송화가루 날리는 윤사월이며 그 산 속에는 꾀꼬리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를 외딴 집에 사는 눈먼 처녀가 듣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의미 내용이다. 이런 정서적 풍경을 박목월은 7*5조 4연 8행에 담아서 읊조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좋은 서정시만이 지니는 회화성에 간결함과 가락을 모두 갖추면서 일종의 긴 메아리에 해당되는 여운까지를 빚어준다. 다음 조지훈의 경우 역시 그의 시는 아주 개성 적이다. 좌파의 논전에서 이 시인은 종횡무진 논진을 펴고 그 나름의 주의 주장, 정치적 견해도 편 사람이다. 그러나 「청록집」에 실린 그의 작품에서는 시 이외 것에 대한 곁눈질이 철저하게 배격되어 있다. 가령 「낙화(落火)」를 보면 거기에는 고요한 산중한거의 세계가 나타난다. 「고사(古寺)」에서는 세속의 일체 일들이 배제된 정신의 순수한 경지가 제시되어있다. 그리고 「산방(山房)」이나 「파초우(芭蕉雨)」에서 산수소요의 정신이 조지훈의 나름의 독특한 가락에 실려 읊조려 있는 것이다. 특히 그의 말씨는 좀 고풍스러운 듯한 가운데 점잖은 단면을 띤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조선왕조 시대의 내방에서 전해져 왔음직한 정서가 현대적인 감각으로 계승된 맛을 자아내는 것이다.

박두진도 박목월이나 조지훈과 꼭 같이 서정시를 쓴 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형태 해석에서부터 두드러지게 그다운 면모를 드러낸다. 그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의 서정시는 대체로 짤막한 형태를 취한 단곡이었다. 그 말씨도 같은 말을 잘 되풀이하지 않는 간결주의에 지배된 듯 보인다. 그것이 박두진에 이르러서는 전면적으로 전복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눈물과 피와 푸른빛 기빨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빛 기빨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

다. 기름진 냉이 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어서 철

이야 너는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

둥실 두둥실 봉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슬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딩굴어 보자.

-<어서 너는 오너라> 후반부

본래 우리 주변의 서정시에 소품단곡의 경향이라든가 말을 아껴 쓰는 습벽이 붙은 데는 거기에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본래 서정시는 생각이나 감정을 듣는 이나 읽는 이로 하여금 장미의 향기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야 하는 양식이다. 이렇게 감각적이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간결한 가운데 강한 인상을 남기는 말을 쓸 수밖에 없다. 또한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서 좋은 서정시의 보기로 생각되어 온 것이 한시의 5언이나 7언 등으로 이루어진 절귀들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에서는 말이 지극히 아껴 쓰여져 왔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서 형성된 서정시, 곧 간결한 말로 이루어진 단형소곡(短形小曲)이라는 통념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이런 일면과 함께 또 다른 원리에 의해 쓰여진다. 그것이 곧 가락이라든가 심상을 통해서 상대방을 뒤흔들 필요가 있는 점이다. 본래 서정시는 서사시와 달라서 아주 사적인 감정을 읊조리는 양식이다. 사적인 감정을 읊조리기 때문에 이 양식의 성패는 듣는 이를 매료시킬 수 있는가 아닌가로 결정된다. 그런데 이때 매료가 가능한가 아닌가는 가락과 심상이 기능적으로 작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한편 한시가 아닌 우리말 시에서는 심상과 가락이 여러 말을 줏어섬기는 입심으로 이루어지는 수가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각설이 사설이나 타령들을 들을 때 까닭 모르게 흥취를 느낀다. 이것은 여러 말을 줏어섬기는 입심의 힘을 빌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박두진은 그의 초기 시에서 한국의 근대 서정시가 미처 개척하지 못한 처녀지에 손을 대었다는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그의 시도는 「청록집」에 잇달아 나온 「해」, 「청산도」 등을 통해서 재확인, 신장된다. 「해」나 「청산도」는 그 이전 우리 시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은 파토스식 정열이 있다. 그러면서 그 세계는 건강하고 그 목소리가 걸쭉한 메아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결국 민족진영의 시는 이런 음역의 확충을 통해서 우리 서정시에 새 풍경을 선물한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8*15 시단에 등장한 이들 신진 시인의 의의는 상당히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8*15 이후의 시를 파악한 후의 교훈

이상 몇 개의 장을 통해서 8*15 이후 우리 시의 형성*전개를 살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 같은 것을 얻게 되었다. 흔히 우리는 시와 사회적인 상황과의 상관관계를 직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사회가 안정되고 시인, 예술가에게 좋은 여건이 마련되면 작품들도 훌륭한 게 나온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사회가 혼란스럽고 시인이 길거리에 방치되면 시와 예술도 동요, 쇠퇴하는 양 생각해온 경향이 그것이다. 그러나 8*15 직후 우리 사회의 상황과 시는 이런 단순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8*15는 우리에게 동서양대 진영의 이데올로기가 맞서는 사태에서 국토분단을 가져 왔고 분열, 혼란을 빚어냈다. 우리 시인, 작가들도 그런 소용돌이에 휩쓸려 열띤 이데올로기의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시, 특히 민족진영의 시는 제 나름대로 새 지평을 타개했고 아주 볼만한 풍광을 마련해주었다. 이것은 시와 문학이 단순히 역사*사회의 반사체가 아님을 알리는 아주 좋은 예증이 될지 모른다.

다음 여기서 우리가 하나 문제 삼아야 할 것이 문학운동과 작품제작의 실제에 나타나는 이율배반성이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8*15 직후 재빨리 그 조직활동을 전개해서 우리 시와 문단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좌파*문학가동맹 측이다. 한때 이들의 기세는 전문단을 석권하는 느낌이 있었고 그 맹원들도 민족진영쪽 문인이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부산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그럼에도 해방문학을 총결산하고 보면 그들의 시와 문학은 민족진영의 것에 멀리 미치지 못한다. 물론 우리는 그 빌미를 문학외적인 각도에서도 지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8*15와 함께 좌파들은 다시 미군정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격렬한 구호를 내걸고 군정 당국을 반대*배격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많은 시인 작가들이 군정 당국에 의해, 구금 투옥되고 또 상당수가 활동의 제약을 받았다. 그 나머지 그들의 시와 소설도 제대로 제작*발표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8*15와 함께 이른바 프로문학운동의 논리나 원리가 크게 바뀌어졌다. 그러나 문학가동맹에 관계한 시인 작가들은 대개가 낡은 시기의 이론을 익힌 경우였다. 또한 그 가운데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새롭게 그들 전선에 가담한 자들이다. 그들이 프로문학운동에 기본 전제가 되는 행동원리, 창작이론을 제때에 제대로 파악했는지도 문제다. 그러나 이런 사유가 그대로 문학가동맹측 작품의 질적인 저하를 해명하는 결정적 구실일 수는 없다.

이런 경우 우리는 민족진영의 경우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군정 당국의 압박을 받았다고 해도 해방 직후 얼마동안 문학활동의 토대가 되는 여러 여건은 좌파 쪽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 무렵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일부 일간지를 제외한 전 발표매체는 모두가 좌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또한 사회 전체의 흐름이 민족진영 문인들을 돌보지 않은 상태였다. 좌파 문인들이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제때에 익히지 못했다면 민족진영 쪽에서도 사정은 꼭 같았다. 그들에게는 마르크시즘처럼 편리하게 완제품이 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도 없었다. 그들이 원용해야 할, 민족의 편에 선 순수문학의 원리는 바로 김동리, 조지훈, 조연현 등에 의해 암중모색의 상태에서 만들어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왜 압도적인 세력을 보유한 문학가동맹이 작품활동의 실제에서 소수파에 지나지 않는 청년문학가협회 중심의 우파 민족진영에게 판정패를 당하고 만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민족진영에게는 시와 문학을 위해서 모든 것이 뒷전으로 돌려져야 한다는 창작활동의 제1교의가 신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좌파 문학가동맹은 터무니없게도 이 평범한 진리를 돌보지 않았다. 그들은 시와 문학을 정치투쟁의 시녀로 전락시켰다. 그 결과 시와 예술을 잃었을 뿐 아니라 끝내는 그들이 목숨을 이어갈 공간마저를 빼앗겨 버렸다. 이렇게 보면 8*15 이후의 시를 살피고 나서 우리가 얻게된 교훈은 아주 크고 뚜렷하다. 어떤 경우에도 시와 문학의 진실은 옹호, 견지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제 몫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