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미술

새로운 민족미술 창조의 열정과 이념의 분출




이구열 / 미술평론가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나라를 강점 당했던 36년간의 참담한 식민지 굴욕과 민족이 말살 당할 처지에까지 이르렀던 상황에서 역사의 순리로 국권을 되찾게 되었던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온 겨레를 감동하게 하고, 당장 새로운 조국건설에 나서게 한 열광의 기폭이었다.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였던 일제가 결국 연합군에게 패멸함과 함께 이루어진 민족해방이었으나, 그것은 그간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있어왔던 항일 독립투사들의 처절한 투쟁과 저항운동의 귀결이었다.

8*15 조국광복은 필연적으로 그간의 항일 지도자들에 의한 정치적 체제 선택의 과도기적인 격동을 유발하게 하였으나, 문화예술계에서도 그와 상관된 움직임들이 잇따르게 되었던 것 역시 필연이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조국건설의 체제노선을 에워싼 정치 지도자들과 그 분파세력 및 단체들의 정치적 이념대결로서의 우익*좌익 혹은 중도협상파 판세는 문화예술계에도 직접 작용하면서 급진적인 좌익계 및 그 동조자와 그를 경원한 우익 민족진영 계열로 분열상을 나타내게 하였다.

미술계의 경우, 해방 직후의 정치적 격동기에 가장 적극적인 단체행동으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 세력은 조만간 좌익색을 드러낸 계열이었다. 그러나 그 좌익계의 핵심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1946년에 접어들어 그들이 주도한 몇몇 미술단체에 확신 없이 가담하였던 대다수의 미술가는 순수한 열정과 오랜 동료관계 등으로 해방에 따른 민족미술의 새로운 추구에 동참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소속단체가 좌경색을 강화하려고 들던 과정에서 탈퇴하거나 이탈하여 달리 정치색을 배제한 화가단체를 조직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단체에도 관여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에 서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처음부터 젊은 좌익세의 급진적인 움직임과 대립관계에서 민족진영의 우익편을 견지한 미술가들도 많았다. 이들은 당시 미술계의 상징적 원로였던 고희동(高羲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미술가협회에 온건하게 소속해 있었다. 이 조선미술가협회는 1948년에 남한의 단독정부로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대한미술협회로 개칭되어 명실상부한 전체 미술인의 결집체를 형성하게 된다.

반면, 1946년 11월에 좌익 주도의 통합단체로 결성되었던 조선미술동맹(위원장 윤희순(尹喜淳))은 1947년에 접어들어 경향성을 한층 뚜렷이 하는 단계에서 간부진에서부터도 탈퇴자와 이탈자가 생기면서 핵심세력만 남게 되다가, 전체 좌익계의 전열 약화와 검거선풍에 기세를 상실하던 끝에 자유민주주의 진영으로서의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와해되었다. 그 뒤 저간의 좌익계 핵심작가 중 일부는 전향을 표명하고 1949년의 첫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온건히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북한에서도 단독의 공산주의 체제로 수립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 군세의 불의의 남침으로 민족적 비극의 6*25 전쟁이 터지며 이내 서울이 점령되자 그간의 전향자와 출옥한 좌익 미술가 등이 즉각 미술동맹 재건에 나섰다. 그들은 적화통일이 실현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과 3개월 후의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9*28 서울수복과 전세역전에 부딪치면서 결국 북으로 쫓겨가고 말았다.

이상이 8*15 해방에서 6*25 전쟁이 발한 직후가지의 5년간의 미술계 동향의 윤곽이다. 이어서 다음에 고찰하게 될 구체적인 움직임의 내막 기술은 당시의 상세한 객관적 기록자료의 결여와 한계 등으로 극히 제한된 접근임을 밝힌다. 무엇보다도 그 시기의 작품들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태라는 사실이 출판으로 보급돼 있는 문학분야와 달리 본질적인 미술동향의 구체적 검증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는 결정적 한계이다.

그로 인해, 특히 북으로 가버린 미술가들의 그 시기의 작품행위 그 자체의 경향성 실태나 사상적 주제의식 혹은 그들이 주장했던 인민적 미술형식 시도의 정도 등은 거의 검증해 볼 수 없게 된 실정이다. 6*25 전쟁은 하나 하나가 유일의 가치인 그 사이의 각종 미술작품의 거의 대부분을 파괴 또는 인멸시켰지만, 더구나 월북미술가의 것들은 온존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방직후 미술계 동향

1. 미술건설본부 결성과 해방경축미술전

8*15 조국광복의 감격 속에 서울의 문화예술계에서 맨 먼저 즉각 새로운 민족문화 창건의 의지를 다짐한 분야는 문학계였다. 뒤에 월북하는 이태준(李泰俊), 임화(粒和), 이원조(李源調) 등이 중심이 되어 해방 이틀만인 17일에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미술*음악 등의 타 분야에서도 서둘러 호응이 이루어져 분야별 건설본부가 조직되었다. 그러한 신속한 움직임은 다시 18일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결성으로 이어지면서 다음과 같은 각분야 건설본부의 통일적인 행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선 언>

친애하는 3천만 동포여 !

오랜 굴욕의 날, 압박과 착취의 긴 날은 끝나고 자유와 해방의 화려한 날은 왔다. 우리의 거룩한 조국, 아름다운 산천, 자랑스런 민족의 머리 위에 현란한 자유의 광망(光芒)은 비치었다. 이 모든 것의 해방과 더불어 30유여년의 장구한 동안 제국주의 일본의 노예적 지배하에 있던 우리 조선의 문화도 오늘날 그 무거운 철쇄(鐵鎖)를 끊었다. 유구한 역사 아름다운 언어, 전아한 예술의 전통과 더불어 혈한(血汗)의 투쟁 속에 자라나던 신문화 30년의 노력도 이제야 해방의 대평원에서 일로 전진할 날은 왔다.

친애하는 독립조선 동포 제군 !

친애하는 자유조선 동포 제군 !

문화의 해방이란 곧 문화의 건설이다. 신 조선문학의 건설 ! 그것은 자유와 독립의 정신 위에서 세계문화의 일환으로서의 새 조선문화를 건설함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조선의 모든 해방된 문화종사자, 예술가의 쌍견 위에 부과된 유일하고 신성한 임무다. 이 임무는 전조선 문화종사자 급(및) 예술가의 일치단결의 토대에서만 비로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는 장래에 성립할 우리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이 서고, 그 기관이 탄생하여, 이 모든 임무를 수행하게 될 때까지 우선 현 단계의 문화 제영역의 통일적 연락과 각 부문활동의 질서화를 위하여 형성된 협의기관으로서 현하(現下) 모든 문화의 총력을 몰아 신조선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조선문화의 해방 !

조선문화의 건설 !

문화전선의 통일 !

이것이 우리 문화의 연합전선이 전진하는 구호다. 두 손을 들고 소리 높여 부르자.

독립조선 만세 !

자유조선 만세 !

조선민족 해방 만세 !

연합군 만세 !

국제평화 만세 !

이 중앙협의회 결성에서는 의장에 임화, 서기장에 김남천(金南天)이 선출되고, 미술건설본부에서는 고희동(高羲東)*고진섭(高鎭燮)*김주경(金周經)*노수현(盧壽鉉)이 의장단에 참가하였다.

그 직전에(17일이었을 듯) 몇몇 선도자들이 나서서 문학계와 보조를 같이 하려고 급히 조직체계를 구성하게 되었던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당시 미술계의 상징적 존재였던 전통화가 고희동(高羲東)이 추대되어 있었고, 서기장에는 독학의 양화가로 후일 좌익계열의 한 핵심인물로 활약하다가 월북하는 당시 35세의 정현웅(鄭玄雄)이 내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각 부문 간부는 다음과 같다.

동양화부: 위원장 노수현(盧壽鉉), 위원 변관식(卞寬植).*허백련(許百鍊)*김용준(金瑢俊)/ 서양화부: 위원장 김주경(金周經), 위원 이종우(李鍾禹)*이병규(李昞圭)*오지호(吳之湖)*길진섭(吉鎭燮)/ 조각부: 위원장 김일두(金一斗)*문석오(文錫五)/ 공예부: 위원 이순석(李順石)/ 아동미술부: 위원 이병규(李昞圭)/ 선전미술대: 대장 길진섭(吉鎭燮), 대원 이순석(李順石)

문학건설본부 결성의 주도자와 연관시켜 분석해 볼 때, 미술건설본부 조직도 뒤에 좌익계열 에서는 정현웅(鄭玄雄)*김주경(金周經)*길진섭(吉鎭燮)*김용준(金瑢俊) 등이 앞장섰던 것으로 짐작된다. 문학계를 비롯한 그 주동자들은 8월 16일 새벽의 조선공산당 결성과 연계된 정치적 주도권 선취기도와 내면적으로 유대를 같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술건설본부 참가명단은 시간적으로 도저히 연락승인이 될 수 없었을 총 185명의 각 분야미술가를 포괄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 명단은 8*15 해방의 시점에서 거명될만 하였던 미술가들의 수적인 윤곽을 파악하게 해준다. 대상 거론에서 누락되었음직한 미술가도 있었지만, 당시 유인물에 밝혀져 있는 간부진 이외의 미술건설본부 회원명단은 아래와 같다.

강희원(姜喜遠)*공진형(孔鎭衡)*곽흥모(郭興模)*구본웅(具本雄)*구종서(具宗書)*권우택(權雨澤)*기웅(奇雄)*김갑수(金甲洙)*김성원(金星源)*김경준(金京俊)*김경태(金璟泰)*김남표(金南杓)*김두환(金斗煥)*김만형(金晩炯)*김민구(金敏龜)*김병기(金秉騏)*김봉룡(金奉龍)*김봉룡(金鳳龍)*김영기(金永基)*김영주(金榮注)*김재석(金在奭)*김재선(金在善)*김정수(金丁秀)*김정채(金貞埰)*김정현(金正炫)*김종남(金種南)*김종하(金鍾河)*김중현(金重鉉)*김하건(金河健)*김학수(金學洙)*김현빈(金現彬)*김호룡(金浩龍)*김화경(金華慶)*김환기(金煥基)*김흥수(金興洙)*나묘균(羅妙均)*노영원(盧泳源)*도상봉(都相鳳)*문재신(文在愼)*문학수(文學洙)*박광진(朴廣鎭)*박병수(朴拭洙)*박상옥(朴商玉)*박성규(朴性圭)*박승구(朴勝龜)*박승무(朴勝武)*박영선(朴泳善)*박영희(朴榮熙)*박원수(朴元壽)*박을복(朴乙福)*박응창(朴應昌)*박창선(朴昌善)*배렴(裵濂)*배정례(裵貞禮)*백남순(白南舜)*백문규(白文奎)*백영제(白英濟)*백원주(白元周)*서강헌(徐康軒)*서백(徐栢)*선우담(鮮于澹)*손영자(孫英子)*손응성(孫應星)*신명식(申明湜)*신홍휴(申鴻休)*신흥균(申興均)*심은택(沈銀澤)*심형필(沈亨弼)*안동숙(安東淑)*오일영(吳一英)*오주환(吳周煥)*원희정(元希貞)*유국열(劉國烈)*유병희(柳秉熙)*유석연(柳錫淵)*유영국(劉永國)*윤상열(尹相烈)*윤승욱(尹承旭)*윤자선(尹子善)*윤중식(尹仲植)*윤형열(尹亨烈)*윤희순(尹喜淳)*이건영(李建英)*이계만(李桂萬)*이국전(李國銓)*이규옥(李圭鈺)*이남호(李南浩)*이기범(李奇範)*이남이(李男伊)*이능종(李能鍾)*이대원(李大源)*이마동(李馬銅)*이만승(李萬升)*이병수(李秉洙)*이봉상(李鳳商)*이석호(李碩鎬)*이성화(李聖華)*이승만(李承萬)*이승영(李升永)*이영일(李英一)*이원석(李元錫)*이용우(李用雨)*이원경(李源庚)*이유태(李惟台)*이응노(李應魯)*이응세(李應世)*이인성(李仁星)*이정규(李禎圭)*이제창(李濟昶)*이주행(李周行)*이중섭(李仲燮)*이찬영(李燦永)*이철이(李哲伊)*이쾌대(李快大)*이팔찬(李八燦)*이해성(李海晟)*이현옥(李賢玉)*이훈종(李勳鍾)*임신(林愼)*임완규(林完圭)*임용연(任用璉)*임의순(任義淳)*임학선(林學善)*장발(張勃)*장선희(張善禧)*장환성(張遇聖)*장운봉(張雲鳳)*장욱진(張旭鎭)*장익(張翼)*정관철(鄭寬徹)*정말조(鄭末朝)*정보용(鄭補鏞)*정완섭(鄭完燮)*정용희(鄭用姬)*정운면(鄭雲恧)*정인호(鄭寅虎)*정종여(鄭鍾汝)*정진철(鄭鎭澈)*정찬영(鄭燦英)*정홍거(鄭弘巨)*조규봉(曺圭奉)*조병진(趙炳眞)*조용승(曺龍承)*조재규(趙再圭)*조중현(趙重顯)*주경(朱慶)*진환(陣簉)*채두석(蔡斗錫)*최계순(崔桂淳)*최규만(崔奎晩)*최근배(崔根培)*최동환(崔桐煥)*최연해(崔淵海)*최영시(崔榮時)*최우석(崔禹錫)*최재덕(崔載德)*한상익(韓相益)*한홍택(韓弘澤)*허건(許楗)*허민(許珉)*현건식(玄建植)*현성각(玄聖珏)*홍득순(洪得順)*홍여경(洪麗耕)*홍우백(洪祐伯)*홍일표(洪逸杓)*황성하(黃成河)*황염수(黃廉秀)*황영준(黃榮俊)*황헌영(黃憲永)*유형목(兪亨穆)

앞의 명단에서 주목되는 것은 지난날 일제 식민지 정책 밑에서 대표적인 협력자로 부각돼 있던 몇몇 미술가가 배제되어 있는 점이다. 곧, 일제 총독부가 주관하였던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참여작가*추천작가 위치에 있던 동양화가 김은호(金殷鎬)*이상범(李象範)*김기창(金基昶), 서양화가 심형구(沈亨求)*김인승(金仁承), 조각가 윤효중(尹孝重)*김경승(金景承) 등이다. 그러한 제외는 다른 분야의 건설본부 구성에서도 취해진 최소한의 대응이었다.1) 그러나 그 외에는 과거의 애매한 한계를 불문에 붙이고 새로운 민족미술 건설에 대동결속을 다짐한 것이 미술건설본부의 구성 성격이었다. 그 시점에서 미술계 좌익의 표면화는 없었다.

그러나 뒤에 살펴지듯이 정치적 이념노선을 앞세운 분파단체의 결성이 잇따르기 시작하려고, 각파의 세력규합 및 포용의 필요성은 일제 때의 위치와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선도 무너지게 하였다. 그러한 일이 있기 전의 미술건설본부는 10월 19일부터 29일까지 덕수궁 석조전에서 최대의 규모로 해방기념 문화축전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거기에는 회화*조각*공예*산업미술 등 각 분야 회원작가 97명이 132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앞의 전람회장 한켠에는 「전재동포 구제를 위한 작품」의 별실까지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출품작들의 상당수가 해방 이전의 구작이었던 내막이 내외의 비판을 야기 시켰다. 작가에 따라 신작을 준비할 수 없었던 실정을 반영한 그 내막은 이해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비판의 여지가 충분했다. 그 전람회가 그런 대로 많은 관람자를 동원하며 성황을 이룬 뒤, 미술건설본부는 그 사이 따로 등장해 있던 급진적인 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과 조선문화건설중앙협회외가 좌경노선으로 통합되는 움직임에 반대하면서 산하단체로 소속했던 협의회 탈퇴를 선언함과 함께 해산과정을 거쳐 독자적으로 조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게 된다.2) 그것은 고희동(高羲東)을 위시한 민족진영의 반좌익 원로*중진 미술가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들은 프로예술연맹 산하로 결성돼 있던 일부 무명 미술가들의 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의 존재를 배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프로미술동맹은 좌익세의 일익으로 존속되다가 조선미술가협회에서의 이탈자와 조선미술가동맹을 만들게 된다.

2. 프룰레타리아미술동맹의 존재

문학계에서 조선문학건설본부에 불참하던 이기영(李箕永)*한설야(韓雪野) 등이 지난날의 KAPF(1925∼35년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계승을 내세우며 좌익노선을 분명히 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한 것은 9월 17일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상호협의가 있었을 조선프롤레티리아미술동맹이 결성된 것은 그보다 이틀 앞선 15일이었다. 그때 맹원구성은 다음과 같았다.3)

위원장 이주홍(李周洪), 서기장 박진명(朴振明), 상임위원 이주홍(李周洪)*박진명(朴振明)*김일영(金一影)*강호(姜湖)*채남인(蔡南仁)*이춘남(李春男)*추민(秋民), 중앙협의원은 앞의 이(李)*박(朴)*김(金)*강(姜)*이(李)와 박문원(朴文遠), 그 외 매원 김정수(金丁洙)*장기남(張基南)*이순종(李純鍾)*김용환(金龍煥)*한상익(韓相益)*김경원(金景源)*최계순(崔桂淳)*박석정(朴石丁)*김경준(金京俊) 등 총24명.

이 맹원들의 대다수는 과거 선전(鮮展)에 한때 또는 상당 기간 경향성 없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한 적이 있는 동양화가*서양화가*조각가와 무대미술가 등이었으나, 8*15 해방의 시점에서 거의 무명의 존재였다. 특히 위원장 이주홍(李周洪)은 그전의 작품활동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 인물로, 그와 강호(姜湖)*추민(秋民)*김일영(金一影) 등이 연극*영화의 프로동맹 간부진에도 끼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무대미술에 종사했던 것 같고, 일찍이 KAPF에 관련했던 것 같기도 하다.

9월 30일에 KAPF 재건조직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 결성될 때에 이주홍(李周洪)*박진명(朴振明)*강호(姜湖)*추민(秋民)*이춘남(李春男)*김일영(金一影)*채남인(蔡南仁)은 중앙상임위원*중앙위원으로 끼어 프로미술동맹을 대표한 간부가 되었다. 이 연맹과 각 분야 산하동맹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확립과 일체 반동적 예술의 철저한 배격을 위한 투쟁」을 선언하고 있었다. 이 연맹의 중앙위원장은 한설야(韓雪野)였다.4)

프로미술동맹 결성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명단에 들어 있던 동양화가 김경원(金景源), 서양화가 최계순(崔桂淳)*한상익(韓相益), 조각가 김정수(金丁秀)가 가담하고 있는 점이다.

3. 조선미술가협회

1945년 10월에 해방 경축 종합미술전람회를 성황리에 개최한 조선미술건설본부는 문학분야의 건설본부가 프로문학동맹과의 통합 움직임에 자극 받아 중앙협의회 탈퇴를 선언하고 자진해체를 단행한 뒤, 내부토론을 거쳐 11월 중순에 새로이 독자적 조직으로 조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다. 고희동(高羲東)을 비롯한 기왕의 미술건설본부 주류파가 일부에서 제기한 프로미술동맹과의 통합을 배격하며 협회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조선미술가협회 구성에서는 오히려 회원자격을 엄정히 규제하기로 하여, 사전 준비대회에서 선출된 23명의 회원추천위원(명단 미상)이 1차로 98명을 전국적으로 천거한 뒤, 발기 총회를 갖고 창립을 보았다(날짜 미상).5) 이때에도 협회장에는 고희동(高羲東)이 추대되었고, 부회장에는 온건한 중진 양화가 이종우(李鍾禹)*임용연(任用璉)이 선출되며 다음과 같은 선언이 채택되었다.

1. 정치에의 절대 불간섭과 엄정 중립을 지킴.

1. 미술 문하의 독립적 향상을 꾀함.

1. 민족미술을 창조하여 건국에 이바지함.

윤희순(尹喜淳)이 집필한 「해방조선」 중의 미술-8*15 이후의 상황에는 조선미술가협회 결성의 전후 과정이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미술건설본부의 간부들은, 첫째로 미술계는 미술가만으로 단결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해보자는 것, 둘째로 정치적 색채를 전혀 초월하여 중립을 지키면서 순수예술을 파악하고 지속하는 태도로 나아가자는 주장을 하여 덕수궁 전람회를 끝으로 해산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사실상 중앙협의회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표현임과 동시에 프로연맹과의 합동에서 이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새로이 조선미술가협회가 조직되었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정치적 중립 표명은 고희동(高羲東) 회장의 우익 민족진영과의 개인적 연계와 관여 등이 드러나게 됨과 함께 그 노선으로 유도되어 갔다. 거기서 그 동안 내심으로 좌익에 동조하던 일부 회원의 명분 있는 반발이 시작되던 끝에 내부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해방의 첫해를 넘긴 1946년 2월 1∼2일에 우익계열 정당 및 각계 대표들이 중국에서 돌아온 임시정부 주도하의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한 비상국민회의가 열릴 때에 고희동(高羲東)이 미술가협회의 사전승인 없이 미술계 대표로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협회의 정치적 중립선언을 독단으로 깼다는 일부 강경회원들이 그의 회장직 인책사임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고 회장이 응하지 않고 많은 간부진이 그를 옹호하자 2월 20일에 가서 항의파의 집단탈퇴가 있게 되어, 협회는 마침내 분열했다. 맨 먼저 김주경(金周經)*오지호(吳之湖)*이인성(李仁星)*박영선(朴泳善) 등이 탈퇴성명을 내며 반기를 들었다.6) 이들은 탈퇴 즉시 프로미술동맹의 변신이던 조선미술동맹7)과 미술가협회 계열이 합동하는 형식으로 새로이 조선미술가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앞의 1차 탈퇴자들에 이어서 윤희순(尹喜淳)*길진섭(吉鎭燮)*김만형(金晩炯) 등 수십 명의 중견 미술가들이 미술가협회를 집단 탈퇴하게 되자, 협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2차 집단 탈퇴의 주동자들도 그간 좌익노선에 접근해 있으면서 협회 장악을 엿보던 세력이었음이 뒤에 언급하게 될 그들 중심의 진보적인 좌익지향 미술단체 조직으로 분명해진다.

그러나 조선미술가협회는 고희동(高羲東)을 중심으로 하여 보수적인 우익노선으로 존속이 유지되었다. 더구나 고 회장은 비상국민회의 결의에 따라 미군 사령관의 자문기관으로 구성되었던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뒤에 국민의회로 개칭)의 서무국장으로까지 참여하며 정치활동에 계속 가담하였다.8) 그는 문화예술계의 한 상징적 장로의 위치를 견지하여 1947년에 우익계를 중심으로 「전국문화단체총연합」(약칭 문연)이 결성될 때에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기까지 하였다.

고희동이 이끈 조선미술가협회 조직은 실상 많이 약화된 상태였으나, 1946년 11월에는 동화백화점 화랑(지금의 신세계백화점)과 화신백화점 화랑을 동시에 빌어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개최하는 등 존재를 과시하였다. 그에 앞서 이 협회는 전국적 조직의 미술가 단체로 정통성을 내세워 미군정청과 교섭하여 해방 전에 일본인들이 미술 구락부로 사용했던 서울의 남산회관건물을 접수하고 협회본부 겸 부설 조선미술연구원으로 삼는 기득권을 행사하였다. 그 모두가 고희동의 정치적 활약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 정부수립 때까지의 기간의 협회 움직임은 기록자들의 부재로 확인되지 않는다.

4. 개별 그룹과 단체의 출현.

1945년 11월에 조선미술가협회가 전국적 조직체계의 종합단체로 결성된 뒤를 이어, 일부 소속회원과 비회원의 동료들이 분야별로 뜻을 같이 하려고 한 개별 그룹과 단체가 잇따라 출현하게 된 것은 새로운 민족미술 지향의 열기에 따른 자연스런 의욕분출들이었다. 그러나 경향적인 색채가 일절 전제되지 않았던 그 그룹과 단체들은 대부분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여러 난관에 영향을 받으며 일시적으로, 혹은 수년간 존속하다가 좌절하였다.

ㄱ.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

1946년 연초에 전통 화단의 중견작가들이던 이응노(李應魯)*김영기(金永基)*배염(裵廉)*장우성(張遇聖)*이유태(李惟台)*조중현(調重顯)*정진철(鄭鎭澈)*정홍거(鄭弘巨)*조용승(曺龍承)의 9명이 그간의 스승 관계 계보를 떠나 새로운 민족적 전통 회화창조를 다짐하며 단합, 정기적인 동인작품전 의욕을 표명한 것이 단구미술원의 결성이었다. 그들은 뜻깊은 첫 3*1 독립운동 기념일에 맞추어 중앙백화점 화랑(지금의 미도파백화점)에서 의욕적인 창립동인전을 가졌다. 그때 이유태(李惟台)는 3*1 운동의 구심점이던 손병희(孫秉熙)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만을 부르짖던 민족 대중을 주제로 삼은 대작을 제작해 보였으나 전시장 공간이 작고 다른 출품작들이 거의 소품이었던 관계로 진열이 유보되었다가 1947년의 제2회전 때에야 발표되었다.9)

단구미술원은 1947년에는 8*15 해방 기념일에 맞추어 제2회전을 개최하였고, 1948년에 제3회전을 끝으로 해산되었다 .

遁. 독립미술협회(獨立美術協會)

1946년 1월 25일에 결성되어 7월에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개최한 사실만 확인될 뿐, 확실한 회원 명단은 기록부재로 알 수가 없다. 조선미술가협회에서 어떤 사유로 탈퇴 혹은 제명된 일부 양화가와 그 밖의 비회원이던 몇몇 양화가가 회칭 그대로 독립적인 양화가 단체를 의도했던 정도의 윤곽만 알려져 있다.10) 박상옥(朴商玉)*정규(鄭圭) 등이 창립회원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들은 2월 23일에 결성된 조선미술가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가한다. 따라서 7월의 독립미술협회 전은 그들 외의 잔류회원들이 꾸몄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그들도 해산되고 말았다.

鑁. 조선조각가협회(朝鮮彫刻家協會)

여러 성격의 미술단체가 잇따라 출현하던 1946년 2∼3년에 당시 조각가로 거명될 수 있었던 거의 전원이 참가하여 결성했던 단체이다. 동인제 성격의 그 회원은 모두 일본의 여러 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조각을 전공했던 존재들이었고, 기존 종합단체의 회원, 비회원, 무소속이 망라된 구성이었다. 곧, 윤효중(尹孝重)*김경승(金景承)*김종영(金鍾暎)*문석오(文錫五)*이국전(李國銓)*김두일(金斗一)*조규봉(曺圭奉)*김정수(金丁秀)*윤승욱(尹承旭)*이성화(李聖華)*이성(李成)*김남표(金南杓)*백문기(白文基) 등 13명이었다.11) 그러나 이들은 다른 단체들처럼 협회 창립전을 갖지 못하다가 8*15 해방 1주년 기념 문화대축전 때에 조선미술가동맹*조선조형예술동맹의 합동미술전에 참가하며 그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11월에 가서 앞의 두 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미술동맹을 결성하게 되던 시점에서, 조형예술동맹에도 처음부터 가입해 있던 김정수(金丁秀)*조규봉(曺圭奉)*이성(李成) 등이 그리로 붙은 반면, 그 밖의 회원들은 그를 반대하거나 새 동맹 결성에서 제외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ㄹ. 산업미술가협회(産業美術家協會)*상업미술가협회(商業美術家協會)*공예가협회(工藝家 協會)

1945년 연말에서부터 1946년 2∼3월에 걸쳐 경쟁하듯이 등장하였던 유사 단체들이었으나, 조선산업미술가협회만이 그후 존속을 계속하며 오늘의 대한산업미술가협회로 이어졌다.

조선산업미술가협회는 1945년 12월 27일에 맨 먼저 창립되었다. 창립회원은 한홍택(韓弘澤)*이완석(李完錫)*조능식(趙能植)*조병덕(趙炳悳)*권영휴(權寧純)*엄도만(嚴道晩) 등이었다. 사업 목표로 선전공예들 전시 및 산업도안에 관한 연구, 신국가선전정책에 협력, 외국산업미술의 국내 소개, 춘추 2회 작품전 등을 다짐하고 있었다. 그 실천으로 1946년 5월에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개최하였고, 10월에 가서 제2회전을 개최하였다.12) 그후에도 해마다 어김없이 협회전을 계속하였고, 1948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회칭을 대한산업미술가협회로 바꾸었다.

조선상업미술가협회는 1946년 3월 15일에 창립되어 6월에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가졌다. 창립회원은 화가로 상업미술에도 손대던 김중현(金重鉉: 회장 겸 간사장)과 양재헌(梁在憲: 상무간사), 오주환(吳周煥)*양규희(楊奎熙)*조봉현(曺鳳鉉)*김진태(金振泰)(이상 간사) 등 13이었다. 이 협회도 12월에 제2회전을 여는 등, 산업미술가협회와 경쟁관계를 보였으나, 그후 활동이 없이 사라져 갔다. 창립에 부친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13)

1. 우리는 예술정신을 공고히 하고, 민족문화의 비약적 진보를 기함.

1. 우리는 상업미술의 계몽과 발전을 기함.

1. 우리는 상업미술로서 신조선 건설 대업의 공헌을 기함.

한편, 조선공예가협회는 미군정청의 후원으로 1946년 3월 10일에 결성되어 6월에 덕수궁에서 창립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가졌다. 협회구성과 간부 몇 회원은 다음과 같았다

회장 김재석(金在奭), 부회장 강창원(姜菖園), 상무이사 백태원(白泰元), 각부위원: 도안부 이완석(李完錫)*신현우(申鉉友)*백태원(白泰元)/ 칠공부 강창원(姜菖園)*박철주(朴鐵柱)*김봉용(金奉龍)*유진욱(兪鎭旭)*김삼득(金三得)*김병덕(金秉德)/ 금공부 이중칠(李重七)*김상기(金象基)*이승만(李勝萬)/ 도자부 김재석(金在奭)*황인춘(黃仁春)/ 자수부 윤봉숙(尹鳳淑)*장선희(張善禧)*유복신(劉福信)/ 염색부 김재석(金在奭)*백태원(白泰元)/ 목공부 박중식(朴重植)*서재용(徐載沅)/ 화각부 음진갑(陰辰甲), 그리고 일반회원으로는 이순석(李順石)*곽흥신(郭興愼)*지성채(池盛彩) 등, 공예 각 분야가 망라돼 있었다. 총회원이 50명이나 된 조직이었고 다음과 같은 협회 강령을 앞세웠다.14)

1. 전국 공예가*도안가를 총망라하여 통일체를 구성함.

1. 국가에 공예정책의 건의에 협조함.

1. 조선 고유, 전통적 공예의 보호*육성*향상을 도(圖=도모)하며 개척함.

1. 외국 수출에 의하여 조선 공예문화 성가의 획득을 도함.

1. 국민생활에 문화적 발전을 도함.

그렇듯 의욕적이고 시의 적절하게 종합적으로 구성된 최초의 공예가단체였으나 이 협회도 제1회 회원작품전 이후 이렇다할 움직임이 확인되지 않는다.

1946년∼47년의 진보적 미술단체

1946년에 접어들어 특히 주목된 움직임의 단체는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 그리고 그 두 단체가 결국 합쳐져 종국의 좌익 세위를 뚜렷이 하게 되는 조선미술동맹(프로미술동맹이 한때 이름을 바꾸었던 조선미술동맹과는 별개)이었다. 해방 전에는 별로 민족적 이념의식이나 경향색을 보인 바 있던 일부 젊은 양화가들이 해방 정세와 더불어 급속히 진보적 사회의식을 취하며 타 분야의 좌익노선 움직임과 연대하려고 주도한 단체들이었다. 문학계를 비롯한 모든 문화예술단체 중의 동맹성격이 모두 그 경향이었고, 그것은 보통 협회로 이름한 단체의 보수적*우익적 단체들과 대립적인 관계를 의미한 것이기도 하였다.

1. 조선미술가동맹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1946년 2월 20일에 소집되었던 조선미술가협회 임시총회에서 그간에 있었던 고희동 회장의 임시정부 지지 정치활동이 규탄되다가 회장의 불참 등으로 인책사퇴 권고 등이 봉쇄되었을 때, 그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며 즉각 회원 탈퇴를 선언한 김주경(金周經)*오지호(吳之湖)*이인성(李仁星)*박영선(朴泳善) 등이 그간 미술가협회와 대립적인 관계로 좌익노선을 견지하던 프로미술동맹 후신의 조선미술동맹과 결합하는 형식으로 2월 23일에 신속히 결성했던 단체이다. 그렇게 서둘러진 것은 다음날인 24일에 전체 문화예술계의 좌익계 동맹들이 공동체로 결성하게 되었던 조선문화단체총연맹(약칭 문연. 문학계의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 등이 주축)의 산하 단체로 가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미술가동맹은 다음과 같은 강령을 내세웠다.

1. 일본제국주의 잔재의 청소.

2. 국수주의와 퇴폐예술사조의 배격.

3. 민족미술의 신건설

4. 국제미술과의 제휴.

5. 미술의 인민적 계몽과 후진의 적극적 육성.

간부진으로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주경(金周經), 부위원장은 이인성(李仁星)*박진명(朴振明)*박지원(朴之遠)이 선출되었다. 뒤의 두 사람은 프로미술동맹 창립간부였던 급진 좌익이었다. 그들 외에 중앙집행위원으로 참가한 미술가는 다음과 같았다.

오지호(吳之湖: 미술평론부위원회 위원장)*이순종(李純鍾: 미술교육부위원회위원장)*강호(姜湖: 무대미술부위원회 위원장)*김진성(金晋成: 아동미술부위원회 위원장)*이주홍(李周洪: 전 프로미술동맹 위원장)*박상옥(朴商玉)*최연해(崔淵海)*윤형열(尹亨烈)*이춘남(李春男)*정규(鄭圭)*기웅(奇雄). 조각부, 공예부 위원장은 미정.15)

이 조선 미술가동맹은 6월에 가서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맹원 소품전을 개최하였으나, 그때 전시된 작품들이 어떠한 내용과 주제로 경향적인 이념을 담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1947년판 「조선연감(朝鮮年鑑)」의 미술 개요에는 이렇게 평가되어 있다. 「이때까지의 굴욕의 식민지 문화, 노예적 예술에서 탈각한 민주주의의 국토 조선의 예술에로 지향한 새로운 길을 계시하여 미술계는 말할 것 없고, 전 문화계의 커다란 시사를 주었다.」

2. 조선조형예술동맹

1946년 2월 23일에 조선미술가동맹이 조직될 때에 김주경(金周經) 등은 그들의 뒤를 이어서 별도로 조선미술가협회를 집단 탈퇴 한 윤희순(尹喜淳)*길진섭(吉鎭燮) 등 약 30명의 동참을 바랐으나 의견 종합의 시간이 필요했던 관계로 뒤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김주경 측은 24일에 결성되는 문연(文聯) 조직에 가담하기 위하여 그를 기다림이 없이 프로미술동맹 계열과만 결합한 조선미술가동맹을 조직해 버렸다.

한편, 같은 23일에 윤희순 등은 서울신문사에서 새 미술단체 결성준비대회를 열고 회칭을 조선조형예술동맹으로 의결하여 조선미술가동맹과 대립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28일에 가서 정식 창립대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강령 을 채택하였다.

<강 령>

우리들은 신세대 미술의 건설을 기함.

1. 미술상의 제국주의적, 봉건적 잔재를 숙청하고 건실한 신미술을 수립함.

1. 조선의 자주독립 민주주의 국가완성에 협력하고 보조를 맞추어 조선미술의 부흥과 아울 러 그의 세계사적 단계에의 앙양에 힘씀.

1. 미술의 계몽운동과 아울러 일반 대중생활에 미술을 침투시킴에 노력함.

1. 미술단체의 통합을 기함.

동맹 위원장에는 미술평론과 조선미술사 연구에 주력하던 윤희순, 부위원장에는 양화가 길진섭이 선출되었고, 각부위원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회화부: 김기창(金基昶)*정종여(鄭鍾汝)*김만형(金晩炯)*이쾌대(李快大)

유석연(柳錫淵)*정현웅(鄭玄雄)*최재덕(崔載德)

조각부: 김정수(金丁秀)*조규봉(曺圭奉)*이석성(李錫成)

공예부: 강창원(姜菖園)*이완석(李完錫)*신현우(申鉉友)

건축부: 오영섭(吳英燮)

다음은 앞의 간부위원 이외의 다른 가맹작가 명단이다(3월 15일 현재).

회화부: 김각한(金珏漢)*김병기(金秉騏)*김순배(金舜培)*김영주(金永周)

김종하(金鍾夏)*김찬희(金讚熙)*김하건(金河鍵)*김화경(金華慶)

문재진(文在愼)*박협현(朴峽賢)*박생광(朴生光)*박성규(朴性圭)

방덕천(邦德天)*배정례(裵貞禮)*신홍휴(申鴻休)*손응성(孫應星)

손일현(孫日鉉)*서강헌(徐康軒)*안기풍(安基豊)*윤상열(尹相烈)

윤자선(尹子善))*윤재우(尹在玗)*윤정순(尹貞淳)*유병희(柳秉熙)

이석주(李奭柱)*이석호(李碩鎬)*이규호(李圭皓)*이중섭(李仲燮)

이정규(李楨圭)*이해성(李海晟)*이팔찬(李八燦)*이규상(李揆祥)

임완규(林完圭)*정온여(鄭溫女)*조병진(趙炳眞)*최근배(崔根培)

허남은(許南渖)*현충섭(玄忠燮)*홍일표(洪逸杓)

조각부: 이성(李成)*한재홍(韓在弘)*김종영(金鍾瑛)*이종태(李鍾泰)

공예부: 김천혜(金千惠)*박성삼(朴星三)*정순모(鄭純模)*한홍택(韓弘澤)

건축부: 강명구(姜明求)*김종식(金鍾植)*김충국(金忠國)*박학재(朴學在)

손중모(孫中模)*성낙천(成洛天)*이명징(李明徵)*유홍상(劉泓相)

조남수(趙南守)*조병선(趙秉善)

이 조형예술동맹도 결성 직후 문연(文聯)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동맹 강령 과 맹원 총명단에서 살펴지듯이 분명한 좌익미술단체 성격으로 규정할 단계는 아직 아니었다. 앞의 명단의 약 절반은 연말에 가서 미술가동맹과 조형예술동맹이 간부들의 이념적 동질성에 입각하여 통합된 조선미술동맹이 좌익노선을 선명히 하기 시작한 뒤 이탈하게 된 배경에서 알 수 있다. 결국 이탈자들은 해방 직후의 새로운 민족미술 창조 지향의 정당성과 열정에 동지의식으로 순수하게 동참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열성적인 좌익 간부들의 본질을 알게 되자, 동조를 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형예술동맹의 의욕적 움직임은 결성 직후인 5월에 기관지 「조형예술(造型藝術)」 1호를 내는 등 대단히 활발하였다. 그들은 미술가동맹에 앞서 5월에 동화백화점 화랑을 빌어 강령 정신을 실천한 맹원작품전을 가졌으나, 역시 그때의 작품들의 구체적인 내막은 확인할 수가 없다.

3. 조선미술동맹

1946년 8월에 해방 1주년 기념 문화대축전이 문연(文聯)주도로 꾸며질 때에 그 산하에 소속해 있던 조선미술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은 조선조각가협회의 일부 동조자들과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합동미술전을 가진 뒤, 상호 동질노선을 확인하여 문연(文聯) 산하의 단일동맹을 실현시키게 되었다. 11월 10일에 그들은 새 조직의 조선미술동맹으로 통합하고, 맹원 구성을 한층 엄격히 하였다. 1947년판 「예술연감(藝術年鑑)」의 「미술계 개관」에서 오지호(吳之湖)는 그 이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두 단체(미술가동맹과 조형예술동맹 )가 양자간의 문제로 되어 있던 실천적 열의의 차이를 극복하고 드디어 완전한 합동을 실현한 것이다. 이것으로써 형태적으로는 소수의 반동분자와 약간의 부동층을 제한 조선미술계 전반에 긍(亘)하는 현재 역량의 총집결을 보게 되었다.」

오지호는 김주경 등과 조선미술가동맹을 결성했다가 통합 미술동맹 결성에도 적극 앞장서서 역할하여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던 당시 가장 진보적인 이념론 제창자의 한 사람으로 유화가 이면서 경향적인 미술비평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앞의 기술과 시각은 그 시기의 그의 열정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미술동맹 계열의 필자가 쓴 것으로 생각되는 1948년판 「조선연감(朝鮮年鑑)」의 미술 개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다 같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약칭 민전(民戰))의 산하 단체로서(기왕의 미술가동맹과 조형예술동맹 지칭) 미술단체의 분산적인 역량을 통일 강화한 것으로,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본다.」

「두 단체의 합동을 계기로 그의 강령인 민주주의적이고 인민적인 민족미술 수립에 있어, 일제잔재와 봉건적 요소를 배격하고 미술의 대중화를 적극 추진시킬 기반이 완전히 섰다고 볼 수 있다.」

앞의 연감 필자는 또 특히 「조형예술동맹의 인적 구성이 중견대가가 중심세력이었던 만큼 지도적 입장에 설 수 있은 반면에, 그들이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걸어온 과정에 예술지상주의적인 점이 많아, 해방 후의 민족미술 수립에 있어서 준열한 자기비판 과정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도 쓰고 있다.

그렇듯 좌익노선의 통합 조직 정비로 결성된 조선미술동맹의 간부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

위원장 윤희순(尹喜淳), 부위원장 오지호(吳之湖)*이인성(李仁星), 위원: 동양화부 김기창(金基昶)*정종여(鄭鍾汝)/ 서양화부 박영선(朴泳善)*이쾌대(李快大)/ 조각부 이성(李成)/ 공예부 김봉룡(金奉龍)/건축부 오영섭(吳英燮)/ 아동미술부 정현웅(鄭玄雄)/ 선전미술부 한홍택(韓弘澤)/ 무대미술부 김일영(金一影)/ 미술교육부 이순종(李純鍾)/ 미술평론부 윤희순(尹喜淳)/ 서기국 박문원(朴文遠)*김만형(金晩亨)

조선미술동맹이 결성되던 11월 10일, 서울시 지부도 동시에 따로 구성하였는데, 그 조직은 이러했다.

위원장 길진섭(吉鎭燮), 부위원장 박영선(朴泳善), 서기국 이춘남(李春男)*손영기(孫英奇)*최은석(崔恩晳), 집행위원 서강헌(徐康軒)*김기창(金基昶)*기웅(奇雄)*윤자선(尹子善)*한재홍(韓在弘)*염태진(廉泰鎭)*안일수(安日洙)*김용환(金龍煥)*윤상열(尹相烈)*채남인(蔡南仁)*이춘남(李春男)*김길교(金吉敎)*길진섭(吉鎭燮)*윤희순(尹喜淳)*이인성(李仁晟)*박영선(朴泳善)*최재덕(崔載德)*김만형(金晩炯)*이성(李成)*최은석(崔恩晳)*윤흥섭(尹興燮)*오지호(吳之湖)*김주경(金周經)

이 미술동맹이 채택한 강령이 있었을 것이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작품전을 비롯한 1947년의 동맹활동 내막을 단편적인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조선미술동맹은 결성 직후인 1946년 12월에 동화백화점과 화신백화점의 화랑을 빌어 제1회 동맹전을 개최하였다. 그때의 한 평문에 전시작품들의 실상이 더러 밝혀져 있는데, 박문원(朴文遠)의 「감방-벽화를 위한 습작」과 기회주의적으로 가명을 썼다고 비판을 하면서도 정철이(政鐵以)의 <8*15의 행렬(민전상(民戰賞) 수상)>을 동맹노선에 가장 부합된 작품으로 평가한 반면, 동맹 부위원장이던 박영선(朴泳善) 등의 종래적인 순수작품에 대해서는 자기 반성이 없는 제작 태도라고 공박하고 있다. 최선덕(崔載德)*김만형(金晩亨) 등조차도 아직 외형적인 회화성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돼 있다. 그런가 하면, 순수추상주의를 지향하던 이규상(李揆祥)도 맹원으로 출품하고 있었는데, 그의 추상작품은 분위기에 어울려지는 무의식의 태도로 지탄되어 있다. 그렇듯 미술동맹 결성 당시만 해도 이념면에서 철저하지 않았던 작가와 조형적 순수성을 버릴 수 없었던 작가들이 혼재해 있었던 것이다.16) 그러나 미술동맹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신탁통치」 지지로 돌변한 좌익진영의 투쟁조직이던 민전(民戰: 여운형(呂運亨)*박헌영(朴憲永)*허헌(許憲) 등이 주축) 산하에 들어가 있었다.

1947년 4월초에 미술동맹 위원장이던 윤희순이 병사하게 된 것을 기화로 사무국 임원 개편이 이루어졌다. 중앙서기국장에 김만형(金晩亨), 총무부장에 최재덕(崔載德), 조직부장에 김형준(金亨俊) 사업부장에 정현웅(鄭玄雄)이었다. 그때 재차 조직정비도 병행된 듯하며, 그 직후 새 위원장으로 길진섭(吉鎭燮)이 선출되었다.17)

그렇게 체제를 새로이 한 조선미술동맹은 5월 하순에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기념 제2회 맹원전(동화벽화점 화랑), 6월 하순에 민전(民戰) 문화공작대 미술부로 맹원 파견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때를 같이 하여 대구 지부 결성 등 지방조직도 착수되었다.18) 그러나 7월에 여운형이 암살을 당한 후 박헌영의 남로당이 좌익세를 주도하게 된 상황하에서 미군정 당국의 좌익검거가 강화되기 시작하자 미술동맹 조직도 위축되다가 1948년의 대한민국 수립을 전후하며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 붕괴 과정을 촉진시킨 배경에는 동맹 위원장으로 중심인물이던 길진섭(吉鎭燮)이 1948년 봄에 월북해 간 사실이 지적될만하다.

그는 박헌영 지령의 민전(民戰) 추천으로 서울을 탈출하여 북으로 넘어간 뒤, 8월 25일에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미술학교 유화과 교원이 되었다. 그에 앞서 월북하였던 김주경(金周經)*김정수(金丁秀)*조규봉(曺圭奉)도 1947년 9월 개교한 평양미술학교 교원진에 들어 있었고, 김주경은 교장 자리에 있었다.

비경향 미술단체의 새로운 등장

해방 직후의 새로운 민족미술 창조지향의 열정 분위기에서 미술가동맹*조형예술동맹 결성에 가담했던 미술가의 대다수가 민전(民戰) 산하로 통합된 조선미술동맹의 좌익노선 강화에 당혹과 회의를 느끼다가 이탈하거나 탈퇴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중반부터였다. 그해 4월에 있은 미술동맹 조직강화 때에 주로 이탈하게 되었던 일부는 비경향 동인단체를 구성하기도 했는데, 곧 조선미술문화협회와 제작양화협회 등이었다. 회칭을 협회로 한 것부터가 비좌익을 뜻했다.

1. 조선미술문화협회

1947년 8월에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창립회원작품전을 가지며 미술계에 등장한 조선미술문화협회의 동인은 미술동맹 간부에서 이탈한 이인성(李仁晟)*박영선(朴泳善)*이쾌대(李快大)*한홍택(韓弘澤)을 비롯하여 이규상(李揆祥)*조병덕(趙炳悳)*이봉상(李鳳商)*이해성(李海晟)*손응성(孫應星)*임완규(林完圭)*임군홍(林郡鴻)*엄도만(嚴道晩)*신홍휴(申鴻休)*홍일표(洪逸杓)*박성규(朴性圭)*김재선(金在善) 그리고 그 동안 어디에도 가담하고 있지 않던 남관(南寬)과 김인승(金仁承) 등 양화가 18명이었다.20) 이들은 협회창립전 유인물에 다음과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번 동지 20인이 모여(실제 출품 참가자는 18명) 진정한 민족미술 건설을 촉진하기 위하여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고, 이후 제1회 작품발표전을 준비해온바 하기(下記=명단 및 작품목록)와 같이 전람회를 하게 되었다.」

작품목록을 보면 거의가 종래의 일반적 소재인 풍경*인물*정물이었음을 알려주고 있고, 이규상(李揆祥)만이 추상적인 작품이었던 듯 「작품」(A*B)으로 명제 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6*25 전쟁 직후 다시 열렬히 좌익으로 되돌아갔다가 끝내 북으로 가게 되는 이쾌대(李快大) 작품이 「동지」와 「고향」이란 명제였던 점이다. 그 작품은 역시 사회적인 의식을 담고 있었던 것 같다.

미술문화협회는 1949년까지 4회의 회원전을 가지며 지속되었는데, 그 사이 회원병동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쾌대는 여전히 중심적인 회원이었고, 그간에 김순배(金舜培)*안기풍(安基豊)*한중근(韓仲根) 등이 가입하고 있었다.21)

2. 앵데팡당전(展)

8*15 해방 전에 구체적인 일제 협력 사실로 그 동안 자중했던 듯, 어느 단체에도 관계하지 않던 양화가 송정훈(宋政勳)과 배운성(裵雲成)22) 등이 중심이 되어, 일찍이 파리에서 시작된 무심사 자유출품 형식의 앵데팡당 전람회를 조직하였던 것으로, 1947년 8월에 미술문화협회 창립전과 시기를 같이하여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전을 가졌으나, 지속되지 못하였다. 당시 경향신문에 기고한 송정훈(宋政勳)의 그 전람회 성격표명은 다음과 같은 요지였다.

정치성과 사상을 통하여 예술창작의 의욕이 어떤 제약을 받고,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예술가들이 협회*연맹*동맹 등등의 파당을 형성하고, 중상*분열*모략을 일삼으며 자파와 입장과 견해를 달리한다 하여 반박과 공격을 예술행동보다도 더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조선예술가의 타락과 몰락은 될지언정 진보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 감면히 반기를 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지상주의를 찬미하는 자도 아니며, 그와 동시에 창작의욕을 정치성이나 사상성*당파성으로 짓밟아버리어 앞날에 올 새로운 예술의 싹을 무찔러 버리는 예술의 정치적 선전 도구성에도 만족하는 자가 아니다.

그러한 전제에서 「심사제도를 배격하고 신진작가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취지로 시작했던 그 의욕은 결국 미술계의 별 호응을 사지 못하고, 1회전으로 그쳤다. 다만 특기할만한 것은 그 전람회에 주한미군 중의 출품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3. 조선종합미술전

1947년 11월에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서는 미군정청 문교부가 주관한 조선종합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다. 남한에서의 미군정의 안정세 확보와 우익민족진영과의 제휴구축을 기반으로 하여 기획된 이 종합미술전은 동양화부와 서양화부에 걸쳐 1백여 점의 초대작가 작품과 일반 응모작품을 전시한 매우 큰 규모로 꾸며 졌으나 좌익측의 조선미술동맹만 공식으로 참가를 거부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빌면, 동양화부에는 이용우(李用雨)*이응노(李應魯)*배렴(裵廉)*정진철(鄭鎭澈) 등, 그리고 서양화부에는 배운성(裵雲成)*이인성(李仁星)*박고석(朴古石)*조병진(趙炳眞)*이세득(李世得)*백영수(白榮洙) 등이 출품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조선미술가협회*단구미술원*조선미술문화협회 회원 대부분이 참가했던 것 같다.

4. 제작양화협회

1946년에 조형예술동맹 결성에 참가하였다가 그것이 좌익노선의 조선미술동맹으로 이어진 뒤에 이탈한 손찬성(孫讚星)*김찬희(金讚熙)*이규호(李圭皓)*방덕천(邦德天)*조관형(趙寬衡)의 5인 양화가가 제작활동의 자율성을 다짐하면서 모였던 작은 단체이다. 1947년 12월에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창립전을 가졌는데, 그때의 유인물에는 뚜렷한 성격 제시는 없이 다만 다음과 같은 소박한 초대의 말을 쓰고 있다.

「화우 5인 모여서 제1회 동인발표전을 갖게 되었읍니다. 다만 화도(畵道)에 정진하고 있는 저희를 일층 더 편달하여 주시는 의미로 부디 왕림하시와 고람(高覽)의 광영을 받들고자하옵니다.」

이름이 협회였지, 작은 동인그룹이었던 이 단체는 당시 누구나가 어려웠던 제작 생활의 어려움과 전람회 경비의 문제 등으로 1회전 이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1회전 때에는 약 50점 작품이 전시되며 동인들의 각별한 의욕을 나타내고 있었다. 풍경*인물*정물 등의 일반적 주제들이었다.

5. 해방 공간의 개인전*그룹전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의 해방공간 3년 사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집단적인 협회*동맹의 미술단체들이 우익*좌익의 노선대립 혹은 중도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미술계를 격변상황으로 만들고 있었으나, 그 속에서도 개인적인 작품발표와 그룹전이 적지 않았던 것은 자연스런 일면이었다. 다음은 서울에서 있었던 그 기록이다.

1946

양화 6인전 (신홍휴(申鴻休)*이종무(李種武)*한홍택(韓弘澤)*임군홍(林群鴻)*엄도만(嚴道晩)*박병수(朴拨洙), 10월, 동화백화점 화랑), 제1회 남관(南寬)개인전(10월, 동화백화점 화랑).

1947

대양(大洋)화랑 개관전(김경승(金景承)*이국전(李國銓)의 조각작품과 안창원(安菖園)*김봉용(金奉龍)의 공예작품 초대전시, 10월) 제2회 남관(南寬) 신작개인전(10월,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사 후원), 제1회 김기창(金基昶)*박협현(朴峽賢) 부부전, 오지호(吳之湖) 개인전(광주, 10월), 김세용(金世勇) 개인전(동화백화점 화랑에서 2회), 박영선(朴泳善) 개인전(동화백화점 화랑), 대양화랑 기획전(12월, 심형구(沈亨求)*김만형(金晩炯)*길진섭(吉鎭燮)*최재덕(崔載德) 등이 초대출품)

1948

정온여(鄭溫女)개인전(1월, 화신백화점 화랑), 배정례(裵貞禮)개인전(1월, 태백서적공사 전시장), 문신(文信)개인전(마산), 김두환(金斗煥)개인전(3월, 동화백화점 화랑), 이용우(李用雨)개인전(4월, 동화백화점 화랑), 제3회 남관(南寬)개인전(4월, 대구), 백영수(白榮洙)개인전(6월, 동화백화점 화랑), 이인성(李仁星)개인전(7월, 동화백화점 화랑), 제3회 김세용(金世勇)개인전(동화백화점 화랑)

정부수립 이후

해방 3주년을 맞이하던 1948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면서 그간의 무정부 상태의 혼미 공간은 막이 닫혀지고, 미술계도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우선, 그 동안 간판만 유지된 실정이었던 고희동 중심의 조선미술가협회가 정부수립과 함께 전국적 종합미술단체로서의 구성체로 조직강화를 시작하며 회칭도 대한미술협회로 바꾸고, 9월에 들어 경복궁 미술관에서 정부수립 기념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그 내면은 상세한 기록자료가 없어 알아볼 길이 없다.

정부 수립에 따른 특기할 미술계 상황의 변동으로는 그 동안의 좌익 미술동맹의 핵심 간부였던 정종여(鄭鍾汝)*김만형(金晩亨)*최재덕(崔載德)*정현웅(鄭玄雄)*김용환(金龍煥)과 그 노선에서 표면상 이탈하였던 이쾌대(李快大), 그리고 배경을 알 수 없는 배운성(裵雲成) 등이 그간 남로당 등에 연계돼있었던 듯, 정부가 전국적으로 모든 좌익의 전향 포용을 의도했던 보도연맹에 가입하며 전향을 나타냄으로써23) 해방 후의 경향적인 움직임이 사실상 없어진 것이었다. 그후 한동안 자유로이 개별적 작품활동을 보이게 되었다. 12월에 문총(文總) 주최로 민족정신 앙양 전국문화인총궐기대회가 개최될 때에 참가한 미술인 중에는 2년 후의 6*25 전쟁 직후에 끝내 북으로 가버리게 되는 최재덕(崔載德)*이쾌대(李快大)와 김용준(金瑢俊)*이국전(李國銓)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49년 12월에 문총이 주최한「민족정신 앙양 종합예술제」에서는 김만형(金晩亨)이 전년 봄에 월북한 「길진섭(吉鎭燮)군에게 경고함」이라는 규탄문을 낭독하기까지 하였다.24)

한편, 1948년 후반기에는 고희동(高羲東)*이응노(李應魯)*정종여(鄭鍾汝)*배운성(裵雲成)*심형구(沈亨求)*박영선(朴泳善)*김세용(金世勇) 등의 개인전이 서울에서 있었고, 새 그룹으로 현대적 추상주의와 순수 표현주의를 지향하던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장욱진(張旭鎭)이 신사실파 이름의 첫 동인전을 가지며 미술의 현대주의 바람을 선도하였다.

1949년에 접어들어서는 정부가 주요 미술문화정책으로 기성작가 초대와 신인등용문으로서의 작품공모 및 심사경연제도의 연례 국전(國展: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시작하면서 미술계의 최대행사로 삼았다. 그것이 해방 전의 일제 총독부 주관이던 선전(鮮展)과 일본의 종합적인 관전(官展) 제도에 친숙해 있던 미술가들에 의해 그 형식대로 작성됨으로써 미술계 일각에서는 일제 잔재의 무비판적인 승계라는 비판도 나왔으나 그대로 권위를 앞세워 실행되었고, 신인 경연의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다음해의 불의의 북한 공산군 남침으로 민족적 비극의 6*25 전쟁이 터지면서 미술계도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참담한 상황에 빠지며 그 현실에 굴절 당하게 된다.

다음에 1949년과 6*25 직후까지의 1950년 미술계 움직임과 결국 월북하게 된 작가들의 결말 등을 개관해 본다.

1. 국전(國展)

1949년 11월에 제1회 국전이 개최될 때에 서양화부의 제한된 추천작가로는 이종우(李鍾禹)*도상봉(都相鳳)*장발(張勃)*이병규(李昞圭)*이인성(李仁星)*김환기(金煥基)*심형구(沈亨求)*김인승(金仁承)*박영선(朴泳善)*남관(南寬)*조병덕(趙炳悳)*이마동(李馬銅)*구본웅(具本雄)*박득순(朴得錞) 등, 해방 후 조선미술가협회 계열과 조선미술문화협회의 중심회원 및 무소속 외에 조선미술동맹의 핵심이었던 김만형(金晩炯)*최재덕(崔載德)*이쾌대(李快大)와 배운성(裵雲成) 등 전향작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배운성(裵雲成)은 심사위원으로도 위촉되었다. 뒤의 전향작가들의 출품작은 보편적인 풍경*인물*정물 소재였다. 동양화부 추천 작가 명단에는 그간의 좌익계 작가가 한 명도 들어있지 않았고, 조각부에만은 전향해 있던 이국전(李國銓)이 포함되어 심사위원도 위촉받았다.

앞서와 같은 첫 국전(國展) 운영은 바야흐로 미술계의 평온 회복과 해방공간 3년간의 우익*좌익 대결 혹은 반목의 종언을 말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미구의 6*25 전쟁은 다시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였고, 국전도 3년간 중단되기에 이른다.

2. 신사실파(新寫實派)

앞에서 약간 언급하였듯이, 1948년 가을에 신사실파 이름으로 각기 현대적 혹은 독자적인 방법의 작품 추구를 다짐하였던 4인의 동인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장욱진(張旭鎭)이었다. 그들은 정부수립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질서의 궤도진입을 보는 시점에서 그와 같은 자부심의 그룹을 만들었던 것이고, 12월에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첫 동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1949년 11월에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2회전을 꾸몄으나, 다음해에는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3년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다시 모여 3회전을 갖는 등, 의욕을 지속했다. 이 신사실파전에서 처음부터 제시했던 유영국(劉永國)과 이규상(李祥)의 대담한 추상주의 작품행위는 특히 해방 이후 처음으로 현대미술의 의지를 뚜렷이 보인 점에서 주시 될만한 것이었다.

3. 무산된 50년 미술협회

1949년의 제 1회 국전(國展)의 초대작가 명단에서 제외되었거나 그 밖의 그 운영실태에 불만을 나타내던 상당수의 기성 양화가들과 전날 미술동맹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일부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국전에 대결할만한 강력한 재야미술가단체를 목표하여 1950년 연초에 결성을 보았던 50년 미술협회는 제1회 회원전을 준비하던 중에 예기치 못했던 6*25 전쟁 발발로 무산된 기록을 남길 뿐이다. 그때 주동 역할을 했던 작가는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남관(南寬)*박고석(朴古石)*김병기(金秉騏)*김영주(金永周)*이봉상(李鳳商) 등이었다.25) 그 밖의 명단은 기록부재로 확인이 어렵다. 비록 전쟁 사태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50년 미술협회의 결성 정신과 의지는 미술계의 발전적 전향성을 분출시켰던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4. 6*25 직전까지의 개인전*그룹전

1949년에서 6*25 전쟁 직전까지의 기간중의 개인전 그룹전 기록을 살펴보면, 정부수립 이후 38선 이남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이 가속되는 분위기였음을 반증해 주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다음과 같은 개인전*그룹전이 평온하게 잇따랐다.

1949

이건영(李建英)개인전(1월), 이응노(李應魯)*이석호(李碩鎬) 2인전(2월), 김영기(金永基)개인전(3월), 이순석(李順石)도안전(4월), 김흥수(金興洙)개인전(4월), 정종여(鄭鍾汝)개인전(4월), 이현옥(李賢玉)*배정례(裵貞禮)*정온여(鄭溫女) 3인전(7월), 심형구(沈亨求) 도미(渡美)기념전(8월), 대원(大元)화랑 기획전(12월: 박영선(朴泳善)*박고석(朴古石)*장욱진(張旭鎭)*송혜수(宋惠秀)*배운성(裵雲成)*김만형(金晩亨)*최재덕(崔載德)*윤자선(尹子善) 등의 유화초대전시)

1950∼6*25 직전

후소회(後素會)재기전(3월, 해방 후 처음 김기창(金基昶)*김화경(金華慶)*이남호(李南浩)*이팔찬(李八燦) 등이 참가), 김기창(金基昶)*박협현(朴峽賢)부부전(제4회 6월).

5. 6*25와 좌익의 재등장

1950년 6월 25일 새벽의 북한 공산군 전격 남침과 한때의 남진 계속 및 승세는 서울과 남한 전역에 잠복해 있었거나 감옥에서 나오게 된 좌익은 물론 1948년 이후의 일부 전향자들에게도 다시 나서게 하는 상황을 빚었다. 공산군이 38선 돌파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게 되자, 그에 영합하며 신속히 미술가들을 장악하려고 한 재기세력이 앞에 말한 존재들이었다.

해방 직후 미술가동맹*미술동맹의 핵심 간부로 활약하다가 남로당에도 가입했던 듯, 검거되어 감옥에 갇혀 있던 기웅(奇雄)이 풀려 나와 서울에서 즉각 미술가열성자대회를 주도한 뒤를 이어 서울미술동맹 재건에 앞장섰다.26) 그때 평양에서 내려와 그 재건조직을 지도한 책임자는 당시 평양미술가동맹 중앙위원이며 평양미술학교 교원이던 유화가 문학수(文學洙)였다.

기록 자료가 없이 확실한 조직구성을 알 수 없으나, 단편적인 자료와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그 재건 서울미술동맹의 핵심 간부는 정현웅(鄭玄雄: 서기장)을 비롯하여 전통화가 정종여(鄭鍾汝)*이석호(李碩鎬)*이건영(李建英)*이팔찬(李八燦), 양화가 기웅(奇雄)*김만형(金晩炯)*최재덕(崔載德)*이쾌대(李快大)*김용준(金瑢俊)*배운성(裵雲成)*이해성(李海晟)*현충섭(玄忠燮) 등의 윤곽으로 파악된다. 어느 증언자의 말로는 그 배후의 실질적 총책이 양화가 이순종(李純鍾)이었다고도 한다.

남한의 적화 해방을 확신하며 고무되었던 앞의 미술동맹 간부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불과 3월만에 전세가 역전되어 9*28 서울수복에 당면하게 되자 공산조직 퇴각에 따라붙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버렸다. 그러나 당시 미술동맹에 열성적으로 가담했던 미술가 중에 북행을 거부했거나 기피하여 자신을 보존한 작가도 있었다.

6*25 전쟁의 발발과 함께 공산군 점령하의 신변불안과 공포로 대다수 미술가들이 흩어져 숨으며 일시에 기존체제를 상실하였던 미술계는 그후 임시수도 부산에서 어느 정도 수습되어 전시상황의 제한된 움직임을 보이다가 1953년에 휴전이 성립됨과 함께 서울 중심의 원상회복이 이루어졌다.

추후 조사연구 과제

8*15 민족해방의 시점에서 1948년의 정부수립까지의 3년간의 해방공간과 그후 국토 및 민족 분단을 고착화시키게 한 6*25 전쟁 직후까지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미술계와 미술가들의 동향을 당시의 격동적인 정세와 현실배경의 각도에서 개괄적으로 정리해 보았으나, 머리말에서 전제하였듯이 기록자료의 한계에서 시도한 데 불과하다. 더구나 당시 작품들이 거의 인멸된 상태에서 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함께 시기의 북한과 평양의 미술계 움직임도 같이 살펴졌어야 마땅한 대상이지만, 그것은 더구나 자료의 전무실정이어서 손댈 수조차 없었다.

나로서 접할 수 있었던 그 기간의 북한 미술계 움직임의 간접적 기록은 오지호가 1947년판 「예술연감」에 약간 언급한 것으로, 1946년 3월 27일에 평양에서 북조선예술총연맹이 결성되었고, 그 산하로 평양미술가동맹이 조직되었다는 정도이다. 이 논고의 미흡과 북한 관계는 앞으로의 충실한 조사연구 과제이다.

<주>

1) 조선문학건설본부 구성에는 「일제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던 조선문인보국회의 간 이들」 이 제외되었다. 1947년판 《예술연감》(예술신문사 간(刊)) 문학계 개관(홍효민(洪曉民) 집필) 참조.

2) 민족주의 민족전선 편집 《해방조선 II》 제11장 문화의 미술 항목(pp. 476∼477) 참조. 과학과 사상사. 1988.

3) 잡지 《예술운동》(1945. 12. 창간호)의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 참조.

4) 앞의 잡지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 참조.

5) 「8*15 이후의 미술계 정세보고 및 조형예술동맹의 결성」(잡지 《조형예술》 1호, 조선 조형예술동맹, 1946) 참조.

6) 1947년판 《예술연감》 미술계 개설(오지호(吳之湖) 집필) 참조.

7) 1945년 12월에 문학건설본부 계열과 프로문학동맹이 이념적으로 합동하여 조선문학동맹 이 새로이 결성하게 되던 때, 프로미술동맹도 그와 보조를 같이 하여 조선미술동맹으로 재조직되었다.

8) 송남헌(宋南憲), 《해방삼년사(解放三年史)》(까치 간(刊), 1985) p. 282 참조. 이때 민주의 원 의장은 이승만(李承萬), 부의장은 김규식(金奎植), 총리는 김구(金九).

9) 김영기(金永基), 「해방 이후의 동양화단」(《한국의 근대미술》 4호, 한국근대미술연구 소, 1977) 참조.

10) 경향신문, 「1946년 일지(日誌)」(1947. 1. 1) 및 「한국근대미술사전 편찬을 위한 조사 연구」(홍익대학교 미술대학, 1974) 참조.

11) 이경성(李慶成), 《한국근대미술연구》(동화(同和)출판공사, 1974) p. 117, p.145 및 최열, 「해방공간의 미술연표」(《계간미술》 44호, 1987. 겨울) 참조.

12) 앞의 1947년판 《예술연감》 참조.

13) 앞의 《예술연감》 참조.

14) 앞의 《예술연감》 참조.

15) 1947년판 《조선연감》 p.344, 「조선미술가동맹」 참조.

16) 오장환(吳章煥), 「새 인간의 탄생-조선미술동맹 제1회전을 보고」(잡지 《백제(百濟)》 창간호, 1947. 2) 참조.

17) 1948년판 《조선연감》에서 조선미술동맹 위원장 길진섭(吉鎭燮), 부위원장 공석, 서기 장 김만형(金晩炯)으로 밝혀져 있다.

18) 앞의 《조선연감》은 1947년 8월 현재 남한 각지에 15개 미술동맹 지부가 조직되어 있 고, 총 맹원은 1천여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맹원수는 믿기 어렵다.

19) 김남식, 《남로당 연구 I》(돌베개 간(刊), 1984) 부록 2 참조.

20) 1948년판 《조선연감》에는 이 협회가 조선미술동맹의 노선에 불만을 가진 수명을 중심 으로 6월에 결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1) 김영주(金永周), 「상반기의 화단」(잡지 《문예》 창간호, 1949. 8) 참조.

22) 송정훈(宋政勳)은 일제 말기에 북지(北支) 종군화가로 활약했고, 배운성(裵雲成)은 유럽 체류활동 20여년만인 1940년에 세계대전으로 서울에 돌아와, 일제의 민족말살 책략이던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의 선전무용극 「부여회상곡(扶餘回想曲)」(대본 이서구(李瑞求), 무용 조택원(趙澤元))의 무대장장치를 맡았었다.

23) 최열, 「해방공간의 미술연표」 참조.

24) 앞의 「해방공간의 미술연표」 참조.

25) 이경성(李慶成), 「해방 15년의 한국 화단」(《현대문학》 1960. 8) 참조.

26) 장우성(張遇成), 《화맥인맥(畵脈人脈)》(중앙일보사 간(刊), 1982), pp. 111∼1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