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언론문화
성숙 없이 밀어닥친 언론문화의 돌풍
유일상 / 건대 신방과 교수
일제 말 친일군상의 오욕에 찬 반민족적 작태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여명은 예상보다 빨리 한반도 전역에서 동텄다. 일본제국주의 세력은 북지(北支) 전선의 교착과 남방전선에서의 계속적인 패퇴에도 불구하고 옥쇄(玉碎)의 결의를 새롭게 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는 모든 언론매체와 대부분의 지도층 인사들을 포섭, 동원하며 황군(皇軍)의 선전(善戰)을 선전(宣傳)했다. 그러한 발악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서구라파 전선에서의 연합국 승전과 함께 남방의 해양세력인 미국과 북방의 대륙세력인 소련군의 전면공격이 경쟁적으로 확대되면서 허무하게도 「무조건 항복」으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의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이처럼 세계 초강대국의 세계전략에 힘입은 바 크기 때문에 독립적 주권국가를 수립할 만큼 민족역량이 결집되고 사회 제세력이 해방조국을 건설할 만큼 정치적 교섭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성큼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더구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상이한 경제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고 민족경제의 각 부문도 초기 자본제적 질서와 동아시아적 공동체가 혼존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기득권과 기존가치의 유지*변형을 둘러싸고 민족간의 갈등과 분열이 첨예화할 수 있는 토양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에 더하며 조선시대의 반상(班常) 관념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멸시와 질투, 도전과 체념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한(恨)이 맺힌 생활양식이 몸에 배어 이데올로기라는 감정이 쉽게 확산될 수 있는 온상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급격히 밀어닥친 외래문물은 민족의 정체성 identity을 여지없이 유린하였고 사회는 극도로 혼란하여 마치 열정이 온 세상을 지배할 듯한 분위기가 언론문화 전반을 풍미하였다.
해방공간의 시대상
이 글은 해방직후의 흥분과 미국문화의 이식이 진행되면서 이승만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6*25라는 민족적 대수난이 있게 될 때까지의 약 5년을 정치체제와는 별도로 사회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기간으로 보고 해방공간이라는 이름을 잠정적으로나마 붙여 고찰하기로 한다. 아울러 이 기간에 있어서 주로 언론문화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그 내용 및 영향을 서술적 방법으로 살펴봄으로써 민족문화사의 일면을 재점검하고 해방 43년이 지난 오늘 언론문화에 참가하는 우리 자신의 과제들을 음미하려는 데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전국 방방곡곡에 가시적으로 알려진 것은 방송전파를 통해서였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경성(京城)방송은 일본 천황의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소식을 전했다. 이 무조건 항복이 있기까지 칠흑 같은 역사의 어둠 속에서 많은 지식인이 먹고살기 위해 변절하기도 했고, 동족이 갈라져 음모와 암투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던 일본은 1945년 봄부터 유리한 항복 조건을 찾아 대소(對蘇) 접근을 결정(1945. 5. 14)하고 그 통로를 찾고 있던 마당에 주로 지식인층이었던 친일언론인과 변절한 지도층 인사들은 일제침략자를 위한 선전봉사대가 되었다. 이처럼 그들은 역사감각이 무디었고 이론체계 역시 비실용적이었기 때문에 친일파를 제외한 지식인들마저도 민족 주체적 입장에서 해방 공간을 자립적인 민족국가 형성에의 길로 인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의 대소 접촉창구 모색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이미 얄타비밀협정(1945. 2. 11)에 따라-유럽전선 종전 후 2,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키로 약정함-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전쟁을 하루빨리 종식시킬 목적으로 8월 6일과 8일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으며 소련도 8월 8일 일본 관동군을 공격하고 일본의 점령지인 한반도에 대한 직접 공세를 취했다. 소련군은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대일전 참전 이튿날인 8월 9일 함북 웅기를 폭격한데 이어 13일 청진에 상륙한 후 24일에는 평양에 입성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미국은 마닐라에 주재하고 있던 태평양 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 38도선 이남 지역에서는 미국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까지 한국에는 강력한 통치권도 또 이를 뒷받침해 줄 무력도 없었기 때문에 부일(附日)세력이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온존할 수 있었다. 또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결정(45. 8. 10)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 내의 일본인 거주자 민간인 약 80만 명과 숫자미상의 일본군의 신변보호와 안전 귀국을 위해 송진우, 여운형 등 국내 지도자들과의 행정권 이양교섭을 벌였다. 양측 모두 교섭에 불응한 가운데 여운형측은 사회주의 세력의 지원을 얻어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8월 15일에는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치안대를 조직하면서 경찰관서를 접수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8월 16일 총독부는 갑자기 행정권의 이양을 거부하고 「인심을 교란하고 치안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일본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방침임」을 포고하면서 접수된 기관들을 재접수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강만길 교수는 한국현대사(한길사, 1984)에서, 같은 날 극비리에 서울에 도착한 미국군 선발대가 조선총독에게 「미국군이 진주할 때까지 모든 체제를 변경함 없이 그대로 유지하여 정식항복 때 일본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국군에게 인도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미군은 9월 7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였고 9월 8일 서울진주와 함께 9월 9일 진주군 사령관 하지 Hodge와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아부신행))간에 항복문서 조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38도선 이남에 있어서의 미군정이 개시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은 즉시 포고령을 통해 정부 및 공공단체에 근무하는 일체의 종사자에게 계속 집무를 명령함으로써 일제 식민통치기구를 그들의 통치기구로 인정하는 한편 과도적인 치안담당기구로서 당시 국내 유일의 정치결집세력인 건국준비위원회와 3*1 운동 이후 한민족의 주권법통인 상해임시정부 모두를 부인하였다. 이 포고령은 요꼬하마 주둔 미육군 태평양 지구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 따라 정부수립시까지 미군이 시범적인 군정을 실시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인 동시에 한반도 38선 이남을 일본총독에 대신하여 미군정 장관이 통치하겠으니 이에 따르라는 명령이었던 것이다.
이후 한반도 38선 이남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우리가 여기서 해방 공간이란 용어에 함축시키고자 하는 시대의 연대기는 한반도에 있어서 일제 식민당국이 그 지배에 동요를 보이기 시작한 1945년 8월부터 1950년 6*25 동란까지의 기간을 일컫기로 한다. 따라서 정치사적 의미에서의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및 동란 이전의 통치기간을 망라한다. 이기간의 분단 5년은 한반도의 체제 성격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계기가 되었고 장기지속적 역사의 맥락에서 한 동아리로 묶을 수 있는 기간이지만 정치권력의 승계가 언론문화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점을 인정하여 정치권력의 변천에 따라 이 기간을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제1기: 일본 지배체제의 동요와 미군 진주 및 직접적 군정기간
(2) 제2기: 미군의 섭정하에서 시도된 남조선 과도정부라는 미국식 정부형태의 출현과 그 통치기간
(3) 제3기: 38선 이 남에서의 자유선거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냉전체제에의 편입기간
이 기간의 언론문화를 살피기에 앞서 우리는 언론문화의 전파*유통에 가장 큰 향도력을 발휘하였던 언론정책 및 언론계의 편성요건들을 충분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우리들의 편의상 구분하여 차례대로 검토해 보자.
해방공간의 언론계 개황
제1기는 1945년 8월부터 1947년 6월까지의 기간으로서 1945년 9월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 공보 당국의 지도와 영향을 받아 언론계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두드러진 특징은 일제하의 조선인 발행 신문이 복간된 것과 일제하 총독부 기관지들에서 일하던 진보적 지식인이 주축이 되어 새 신문을 창간한 것 및 지하 사회주의 계열의 일본인 발행 신문 접수와 개제(改題)가 유행했던 것 등이다. 미군은 남한에 진주 후 즉각적으로 언론자유를 선포하고 일제시의 모든 언론관계 법령을 즉각 철폐하여 언론사상 초유의 자유방임정책을 시범적으로 보여 주었다. 한편 민족역량으로서는 유일하게 출판노동조합이 기동적인 움직임을 통해 전국의 쓸만한 주요인쇄시설을 장악함으로써 민중선전수단의 확보에 관한 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당시 출판노동조합을 포함한 민족주의 진영은 공산주의 세력에 크게 경도 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의 통치에 협조하거나 미군 공보 당국과의 협동적 갈등관계를 유지하기를 꺼렸다. 그 결과로 약삭빠른 일제 협잡배들이 통역정치의 폐단을 이용하여 미군 점령 당국과 유착관계를 맺고 민족주의적 역량의 결집을 좌익세력으로 몰아쳤다. 따라서 이들은 민족주의적 열등감과 피해의식 때문에 미군정 당국에 접근, 통역에 의한 의사전달의 왜곡과 반민족적 이간질을 통해 미군정 당국으로 하여금 언론통제정책을 펴도록 유인한 듯하다. 그리하여 미군정 당국은 1946년 5원 29일 군정법령 제88호(신문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의 공포를 통해 미군정에 대한 체제 도전의 봉쇄를 목적으로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의 등록제도를 허가제도로 바꾸어 언론을 통제한 결과, 친일파의 재편성과 변신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법령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의 발행허가제와 허가절차에 관한 규정
(2) 미국신문 및 정기간행물은 발행인이나 대리인의 신청에 의거, 군정 상무부장의 명령하에 배포 허가케 하는 규정
이 법 공포 이후 미군정 당국은 그 해 6월부터 용지난(用紙難.)을 내세워 출판물의 신규허가를 불허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나(동아일보, 1946. 6. 26) 그 배후의 목적은 군정법령 88호를 근거로 한 민족주의 계열의 출판물 통제에 있었다.
제2기는 1947년 6월 13일 남조선 과도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 당국이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면서 행정권의 일부를 미군의 고문을 받은 한국인이 집행하게 되면서부터 1948년 8월15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이다. 이때 미군정 당국은 사회주의 계열을 포함하여 수많은 민족주의적 인사들을 제거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시키기 위해 통일의 예봉을 꺾고 민중을 선무하는 여론정책을 폈던 시기이다. 따라서 남조선 과도정부는 미국의 입장으로 볼 때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내어 미국식 문화와 그 이데올로기를 이식하는 데 협조하는 장치였었고, 그에 힘입어 이 땅에는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2차대전 이후의 세계질서 구도에 들어맞는 친미정권이 수립되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인수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기간 중 남조선 과도정부의 입법의원은 1947년 9월 19일 군정법령 제88호의 대체입법으로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의 범위를 정하고 그 허가를 요건화 한 것
(2)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의 허가취소나 발행정지 요건을 정한 것
(3) 외국신문 또는 38도 이북의 신문 기타 정간물 배포는 대리인의 신청에 의해 공보부장의 허가를 받게 한 것
(4) 벌칙을 명시한 것
이 법안은 허가신청서상의 하자 이외에 법률에 위반할 때에 국한하던 허가취소의 법률상 요건을 확대하여 허가내용(이에는 발행목적 등이 명시된다)과 같이 발행되지 않았을 때나 범죄 또는 국가의 법률질서를 파괴하도록 선동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민심을 현혹케 한 경우에도 허가취소나 발행정지를 할 수 있게끔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언론계 전체로부터 과거 일제치하에서 시행되던 악법 중의 하나인 신문지법을 개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일어 시행 2개월만인 1947년 11월 폐기되고 말았다.
제3기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과 냉전체제에의 편입, 민족간의 비극인 1950년 6*25 동란까지를 말하기로 한다. 제3기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남한지역에서 실시된 5*10 선거에 의해 시작된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은 정치적 독립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라는 유엔측의 통일방안에 따라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기구였다. 한국에 도착한 이 위원단은 소련에 의해 38도선 이상의 입북을 거부당하여 유엔소총회의 가결(1948. 2. 26)로 유엔위원단의 선거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만을 치르기로 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이승만과 그 지지세력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시켜 분단국가를 성립시키려 한 반면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 계열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미*소 양군의 철수와 남북 요인의 정치협상에 의한 총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구 노선을 따르는 남북협상파는 세력이 축소되고 한독당은 총선에 불참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은 지하단체를 동원하여 총선을 저지시키는 극한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정권을 담당하게 된 이승만 등의 단정세력은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김구와 같은 민족주의자와 진보적 민족주의자까지도 정적으로 생각하여 그들의 의견이 전파되는 것을 막고자 1948년 9월 대한민국 공보처를 통해 언론정책 7개항을 발표하여 언론탄압을 강화하였다. 이 7개항은 보도금지 대상기사로서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국의 국시 국책을 위반하는 기사
(2) 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3) 공산당과 이북괴뢰정권을 인정 내지 비호하는 기사
(4) 허위의 사설을 날조*선동하는 기사
(5) 우방과의 국교를 저해하고 국위를 손상하는 기사
(6) 자극적인 논조나 보도로써 민심을 경악*소란케 하거나 민심에 악영향을 끼치는 기사
(7)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기사
이와 같은 정책방침 때문에 이승만 정권은 행정력을 동원하여 신문의 활동을 규제할 수 있었고 반이승만 노선의 선전*선동수단을 효과적으로 탄압할 수 있었다. 단독정부의 수립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반이승만 노선을 걸은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의견을 시*공간적으로 증폭시킬 미디어 공간을 확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는 언론통제를 강화할 속셈을 감춘 채 공보처와 법무부가 공동 기초한 후 법제처가 종합검토 한 전문 32개조의 새로운 「신문지법」을 국무회의에 상정시켰으나 언론계의 반발이 너무 거세어 국회에 법률안 심의회부도 못한 채 폐기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집권초기에 단정노선을 공고히 하여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면서 자신의 정권기반을 튼튼히 구축하기 위하여 광무신문지법을 이용한 신문의 정간과 언론인의 구속을 빈번하게 시도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5년의 공간 중 제1기를 제1공간으로, 제2기를 제2공간으로, 제3기를 제3공간으로 나누어 언론문화의 개별적 특성과 그 민족사적 영향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1공간의 언론문화
한국에 진주한 미군은 태평양 지역 미육군 총사령부 포고령 제1호를 통해
(1)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지역에서 일본의 항복문서 조항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및 종교 상의 권리 보호를 목적으로 미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며
(2) 현지의 모든 공공단체 및 제반 주요 직업종사자가 계속 직무를 수행하도록 명령하고
(3) 점령군에 대한 반항이나 질서교란행위를 엄벌하며
(4) 군정기간 중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1945년 9월 8일)하기 이전에 이미 언론계는 자체 역량만으로도 급격한 변화의 물결에 휩싸였다. 이유는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한민족의 정신적 지휘부를 구성한 해외망명세력과 국내 지식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지식인 중 일부는 일제말 민족반역적 활동에 가담했다는 죄책감과 열등의식이 남아 있었고 그 반면 또 다른 일군의 지식인들은 일제 언론기관이나 교육기관에 의탁하여 생명을 부지했으면서도 새 시대 민족사의 역사적 진로에 거듭난 사람처럼 성실한 자세로 적극 참여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지식인의 정신적 창작작업이나 보도논평활동에 의지하는 바 큰 언론문화활동의 주역은 자연히 양심적 지식인과 친일 변절 인텔리의 두 개 양극단으로 급속하게 분화되어 갔다.
해방 후 제1공간에 있어서 언론인의 이와 같은 시대사적 경향성은 이 극단에서 저 극단으로의 싸움에 간여하지 않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고 방관 또는 잠재 세력화하는 계기를 만들어 지식인층의 실천적 혁신운동을 내재적으로 막았다.
먼저 제1공간의 신문현상들을 일제하 신문의 복간과 새 신문의 창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일제하 신문 중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8월 15일 좌익 및 진보주의 세력에 즉각 접수되어 해방일보로 개제되었다가 일제 총독부의 8*16 포고령에 의해 하루만에 다시 매일신보 18인 자치위원회 (대표 윤희순 문화부 기자)에 넘어가 불편부당 엄정중립의 새로운 보도기관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1945년 10월 미군정 당국은 이를 재접수하여 사장에 오세창, 부사장에 이상형, 주필에 이선근을 임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자치위원회가 반발하자, 1945년 11월 10일 이 신문을 정간시킨 후 부사장에는 이상협이 만주의 일제 괴뢰신문인 만주신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하경덕을, 편집국장 역시 만주에서의 친분을 이유로 이선근을 배제하고 이관구, 홍기문을 임명하는 한편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어 그 해 11월 23일자부터 발행하게 하였다.
일제하에는 논조에 있어 종업원인 기자들 덕분에 몇 차례의 변전을 거듭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1945년 11월 23일과 12월 1일 각각 복간되었다. 이 신문들의 복간이 늦어진 것은 일제 당국이 두 신문을 1940년 자진폐간으로 유도하면서 인쇄시설 일체를 처분토록 종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복간된 이 신문들은 당시 언론계를 풍미하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대항체제를 구축하고 신탁통치 반대여론의 전파를 통해 다시금 여론의 각광을 받는 신문, 여론을 향도하는 신문으로 힘겨운 탈바꿈을 시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해방직후의 언론계는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및 「중앙신문」과 같은 진보적 민주주의 계열과 「해방일보」와 같은 공산당 기관지가 기선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선인민보」는 김정도(金正道)를 사장으로 하며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1945년 9월 8일 서울에서 창간된 신문이다. 이 신문의 주역들은 총독부 기관지인 일문판 신문 「경성일보」 출신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젊은 기자들이었다. 이 신문의 창간호 1면 톱은 연합군 환영기사를 영문으로 실었고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및 여운형 주도하의 인민공화국(인공)을 당시의 압도적 분위기에 맞추어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당시의 건준과 인공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힘의 공백상태에서 자치적으로 독립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일군의 사회지도층(이중에는 임화와 같은 좌익계열이 분명한 지식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흑백논리적으로 이 시대의 인맥을 좌*우익으로 분류 짓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자유신문은 조선인민보에 이어 1945년 10월 5일 창간된 바 그 사시로서
(1) 민족통일정권 수립을 위한 민족여론의 공기되기를 원한다.
(2) 민족진로의 지침이 되기를 기한다.
(3) 대중의 문화적 신생활 건설을 위한 제반활동을 기한다
고 밝히고 있으나 이승만과 한민당계는 이 신문마저 좌파 신문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에서 1947년 발간한 조사월보와 조선사정협회(朝鮮事情協會)가 발간한 Voice of Korea는 이 신문을 발행 부수 약 4만여의 중립신문이라고 분류하고 있으며 최근에 이르러 최준과 정진석은 이 신문을 좌익계로, 송건호는 진보적 중립지로 분류하고 있다.
또 하나의 해방초기 신문인 중앙신문은 재라오길(齋蘿五吉)의 소유였던 조선상공신문의 사옥과 시설을 매수한 김형수가 황대벽(인쇄인), 이상호(편집국장) 등과 더불어 45년 11월 1일 창간한 신문이었다. 이 신문의 논조도 해방 후의 압도적인 진보 우세 분위기를 쫓았다. 이 신문 역시 미군정 조사월보나 Voice of Korea에는 중립적 논조의 신문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정진석(한국언론사연구, 일조각, 1983)은 좌익계를 대표하는 신문으로 분류하고 있어 이채롭다.
이 이외에도 각 지방에서는 일본인 경영의 신문사 시설을 인수하여 각도 주민들이 새 신문을 창간하는 등 지역언론의 활성화가 모색되기도 하였다.
진보적 민주주의 색채를 띤 신문과 공산주의 계열 신문이 자웅을 결하며 언론계를 주름잡던 때에 극우파의 최선봉에서 저돌적인 언론활동을 벌였던 대동신문(사장 이종영)도 1945년 11월 25일 창간되어 이념투쟁의 극한을 치달리게 되었으나 일제하의 유력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재등장과 더불어 남한 언론계의 판도는 서서히 좌우 양분의 양상을 보였다. 그 가운데 동아일보가 한민당과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는 논조을 편데 비해 조선일보는 김구의 민족주의 노선을 지지하여 묘한 대조를 이루었고 천주교 계열의 경향신문도 복간되어 우파언론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활동은 이승만의 귀국(1945. 10. 16)과 김구 이하 임정요원의 귀국(1945. 11. 23) 및 8*15 후 북한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월남한 피난민들이 반공세력의 진용을 갖추게 되면서부터 제동이 걸렸고 좌우대립의 국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이념투쟁은 친일 부역배와 독립운동가들의 대미 접근방법의 차이일 뿐 계급적 특성을 가졌다거나 당파성을 명확히 한 것이 아니었다. D. W. Conde가 「해방조선의 역사」(일본 태평출판사, 1970)에서 밝히고 있듯이 당시 한국의 유력한 세력은
(1)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목적을 가진 미국
(2) 정치권력 획득을 노리는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지주와 그 협력자
(3) 민주적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의식이 강력한 압도적 다수의 국민을 대표하는 인민공화국 파
(4) 일제의 잔존세력과 그 산업 및 제도에 의존하는 일파 등이었다.
이 중 (1)(2)(4)의 연합세력이 독립*민족국가의 건설을 외면하고 예속적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일체의 존재를 적색 공산주의로 규정하는 착각증」(배성룡, 「자주조선의 지향」, 광문사, 1949, p.102)에 빠졌다. 그러므로 어떤 선입견에 의한 기존 특권을 모두 거부하고 순수하게 민족의 독립과 복지국가를 세우기 위해 독특한 이념의 창안에 전념하면서 좌*우의 대치를 극복하려는 일부 지식인의 노력은 좌우대립의 질풍노도속에 휩쓸려 큰 목소리로 증폭되어 질 수 없었다.
문필가 김동리(金東里)가 「좌우간의 좌우」(「백민」, 1946,.11)에서 쓰고 있듯이 이 당시의 좌*우익 개념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즉
「만약 토지개혁과 주요기업의 국유를 주장하는 것이 좌익이라면 조선사람은 전부 좌익이요, 민족해방과 완전독립을 갈망하는 것이 우익이라면 조선사람은 전부가 우익일 것이다. 조선의 소련방화 거부를 우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우익이어야 할 것이고 조선의 미국 식민지의 배격을 좌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좌익일 것이다.」
좌익의 본 뜻은 특정사안에 대해 반대자의 편에 서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해방직후의 좌익은 그 지칭하는 바 세력범위가 지극히 모호한 형편이었으나 좌*우 대립의 격화과정에서 중립적 입장을 지키고 좌우사상의 지양과 융합을 모색한 윤리적 지식인을 좌우 양측이 기회주의자로 낙인찍거나 중간파로 몰아 이념의 경직화 현상을 재촉한 것은 민족분단국가의 수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한 동인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의 이념논쟁과 관련하여 볼 때 우파와 좌파 사이에서 공정으로서의 정의원칙을 지키려는 지식인들이나 민주세력들의 입지가 좁아드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적 전례에 비추어 우려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1공간의 언론문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매체는 우익에 가담한 동아일보나 대동신문, 좌경 또는 좌파신문인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가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나 중립계열의 신문들이었다. 특히 이 신문들은 미군정의 일제 잔재 미청산 과정을 혹독하게 비난하였고 미국풍조의 유입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자유신문(45. 10. 12)은 미군정의 무분별한 통역정치를 비난하고 어학지식이나 표현의 재주만으로 민족의 안위를 경시한 채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자들의 각성을 촉구했으며, 45년 10월 15일자 논설을 통해서는 애국자를 고문하던 일제경찰들을 경찰책임자로 재등용한 미군정의 인사정책을 공격하고 경찰경험이 없더라도 민중과 친할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중앙신문(1945. 10. 3)도 자주사상을 갖지 못한 채 명리를 따라 바람 부는 대로 처신하던 친일파를 전 민족의 열망에 따라 민족반역자로 처단할 것을 주창하였다.
조선일보(1945. 12. 3) 역시 민족반역자인 친일파를 현재의 역할에서 재규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애국자연하면서 일제시의 민족통일전선을 방해하고 군정과 인민을 이간한 자, 모리로 경제질서를 교란하는 자, 봉건전제 또는 독재파시즘으로 끌고 갈 세력을 민족반역자로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양키즘의 유입에 대해서도 당시의 신문들은 억눌려 살던 민중생활의 애환이 남녀관계의 개방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당시에는 장년들의 경우, 정치에 심취해 있었고 청년들은 남녀관계의 개방물결에 빠져든 흔적이 신문논조에 비치고 있다. 즉 자유신문(1945. 10. 30)은 서울이 애욕의 환락가가 되어서는 안 되며 해방이 가져온 여하한 자유로운 남녀관계도 그 관계를 발생케 한 사회적 관계를 저버린 단순한 연애의 모색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논평하고 있다. 한편 중앙신문(1943. 11. 27)은 미국에게서 배울 것은 능률주의요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문화의 말초적 발현을 유치하게 모방하는 것인 바 이것은, 정신적 식민지의 인상이라고 하여 헐리우드 스타일의 모방을 경계했다.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미국의 저속한 오락물과 폭력물이 문화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버젓이 유행하는 것을 볼 때 금석지감이 새롭다.
그러나 미군정의 신문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결정(1945. 12. 29)과 더불어 국내 제세력의 찬탁, 반탁을 둘러싼 격렬한 대치과정에 휘말렸다. 언론계는 양분되었고 1946년 들어 민족세력은 좌우익으로 분명하게 갈라섰다. 이승만과 김구가 주도하는 우익세력은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여 미군정의 자문기관이 되었고 여운형이 주도하여 결성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전국노동자평의회와 함께 좌익세력을 결집시켰다. 이제 신문들도 좌*우 색채를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했고 중립지의 위상은 흔들렸다.
한편 미군정 당국은 그들의 실정을 비판하는 좌파언론에 대해 이제까지의 관대한 태도를 크게 바꾸어 엄벌주의를 실행에 옮겼다.
1946년 5월에 「인천신문」이 인천시청 적산과장에 대한 허위보도로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관련자 40여명을 구속하여 군재에 넘겨 벌금형을 받게 했으며 공산당기관지 「해방일보」의 인쇄소였던 조선정판사의 위조지폐사건 적발과 더불어 이 신문도 발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름높은 극우지인 대동신문도 여운형 암살미수범을 극찬하여 살인교사를 했다는 비난과 함께 발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1946년 9월에는 미군 축출을 선동한 혐의로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을 정간하고 수명의 기자를 검거하며 군재에 회부하였다. 이 후 조선인민보는 정간이 해제되지 않은 채 폐간되었고 현대일보는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의 서상천에게 발행권이 넘어갔으며 중앙신문은 47년 4월에 가서야 우파인사로 하여금 속간케 하였으며 신문발행 허가 중지로 신문발행 판권이 일종의 이권처럼 매매되는 부조리가 성행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군정 당국은 이 땅에 미국식 민주주의 방식대로 언론자유를 허용한지 불과 1년도 안 되어 포고령 위반죄를 적용하여 신문을 정간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실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기생하였던 반민족세력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일제시대였다 하더라도 행정경험을 존중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민족정기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한민족에게 허용하지 않았으며 일제잔재마저도 기회주의적 양면성을 지닌 언론인들의 출세지상주의와 더불어 온존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드골이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프랑스 영토를 연합군과 더불어 탈환한 후 독일점령치하에서 레지스탕스를 탄압하고 독일에 협력했던 프랑스 언론인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던 사실과 견주어 볼 때, 민족주의세력의 조직화가 미숙한 반면 미군정 당국의 친미정권 수립 구상이 얼마나 주도면밀했는가를 깊이 느끼게 한다.
제2공간의 언론문화
1947년 6월 13일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하는 남조선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안재홍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폭력사건, 폭동사건, 민중생존권 절규, 동맹휴학과 파업 등에 부딪쳐 좌우 양쪽으로부터 비난과 압력을 받았다. 그의 민정장관 수락은 좌익과의 합작이나 협력, 또는 타협을 포기하고 미군정과 더불어 한국의 적화를 막는 단정노선을 차선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의 중도파 지식인으로서 사상의 분파와 붕당적 대립을 지양하고 극우노선의 재수정을 요구하는 한편 민주독립국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국제협조를 통한 평화와 공존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재홍이 민정장관 취임 후 친미반공노선을 견지한 것은 그가 취한 중간우파노선의 소박한 민주사회주의 이념 탓으로 볼 수 있다(유병용, 「안재홍의 정치사성에 대한 검토」, 한국민족운동사 연구Ⅰ, 지식산업사, pp.177∼205).
1년 남짓한 제2공간의 두드러진 특징은 친미정권 수립을 위한 전초작업, 미국식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훈련 및 문화적 동질화를 위한 지식과 교육실천의 전이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의 지식인 중에는 강대국에 의한 민족분단의 운영을 감지하고 그 농간을 거부하는 자세를 보인 사람들도 많았다.
설의식은 「신천지」 1947년 7월호에 「미*소 대표에 보내는 말」이라는 글을 실어 「우리는 흑철같은 일의(一意) 독재의 소련식 민주방식도 원치 않거니와 명색 좋은 자본독재의 미국적 민주방식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조화적 합일점을 찾아 우리의 독자적 문화-생활양식의 기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일부 요약)」
이건혁은 「건국과 국민경제」(금룡도서, 1946)라는 책을 통해 「소련과 친하여 소련식 경제를 모방할 필요도 없는 동시에 미국과 친하여 미국식 경제를 모방할 필요는 없다. 조선의 실정에 맞는 경제정책이어야 한다(일부 요약)」고 주장했다.
지식인의 주류가 이념의 융화와 민족화합을 구국의 길로 생각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김준연은 좌우합작의 불가함을 「변동된 국제정세」(일월사간, 「독립노선」, 1947)라는 글을 통해 주장했고, 함상훈은 한민당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여 아시아의 모범적 반공국가로 나갈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생활사간, 조선독립과 국제관계, 1948).
이 무렵 좌익언론은 친미단정을 저지하기 위해 선전선동전을 강화했으며 남조선 과도정부는 이에 강경 대응하기 시작했다. 남로당기관지인 「노력인민」이 1947년 7월 10일자에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연루자인 이관술을 찬양하고 남로당 계열의 주관지 「건국」이 7월 21일자에 「반공특공대 검사와 형사」라는 기사를 통해 검사들을 공격하자 양지(兩紙) 발행인인 김광수를 체포 구속하여 포고령 제2호와 광무신문지법을 적용,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하였다. 피고측의 불복항소를 받은 고등법원에서는 김문설 판사가 원심을 깨고 벌금형을 선고한 바, 김판사는 판결문에서
「신문지법은 통감부 시대인 광무 11년 7월에 제정된 것으로 한국인에게만 적용하였다. 그 후 발표된 미군정 포고 제11호를 이유로 차별을 발생케 하는 법률은 이를 무효로 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신문지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경무부장인 조병옥은 광무신문지법이 존속하고 있다고 언명하여 이후 언론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이 법은 일제가 한국인에게만 언론자유를 제한할 목적으로 차별 적용한 악법으로서 민족언론을 옥죄이고 친일여론을 확산하여 일본의 한국병합과 주권침탈을 용이하게 추진한 장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민당계의 조병옥이 이 법의 존속을 선언함으로써 그것이 단순한 반공차원이었다 하더라도 후일 조병옥의 반이승만 투쟁과정을 저해하는 족쇄가 되었던 점을 볼 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든 이 사건 이후 좌익계열 검거선풍(1947. 8. 11)과 마샬 미국무 장관에 의한 한국 문제 UN상정(1947. 9. 17) 이후 좌익세력은 지하화하였다.
한편 이승만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재빨리 한민당과 합작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미군정 당국의 친미 단독정부 수립방침에 정면 도전하는 언론들은 좌파언론으로 분류되어 무더기로 폐간 처분되었다. 이승만계에서는 1948년 들어 평화일보(사장 양우정), 국제신문(편집국장 송지영), 국민신문(발행인 문봉제) 등을 새로 발행하거나 개제하여 우익지의 주도권을 장악해 갔으며 동아일보도 해방직후에는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듯했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발표된 후부터 이승만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단정 수립을 위한 이승만의 유력한 파트너인 한민당계의 의견을 대변함으로써 친미정권의 수립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국 최고 정당의 하나인 한민당은 황국신민화 정책에 봉사한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주변 및 동조세력으로서 토착지주들을 포용하였으므로 한국보수세력의 기반을 형성했다. 한민당은 그 상부구조 일부에 비식민주의 노선을 취하는 양심세력이 있었으나 일제 식민정치체제의 제세력을 온존시켰을 뿐 아니라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이승만 노선에 동원되어 민족적 민주정치의 발현을 오히려 지연시켰다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한국 정당의 뿌리가 형성되던 이 시기에 보수주의 정당이 참된 민주 주체의식과 역사정신을 가지고 새 국가 건설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에 상당한 손상을 입힌 바 민족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정치훈련은 시민 민주주의가 가지는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감화 감동시키지 못한 채 사대주의와 기회주의의 결합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적대시하는 괴팍한 모습으로 변질되었고 흑백 사이의 다양하고 미세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적 경직화와 체제동반세력의 열등감을 부채질하였다. 미국식의 시민 민주주의가 제대로만 인식되었더라도 최소한 국론의 분열을 막고 일제 협력파들을 순리대로 제거시킬 수 있었을 텐데 미군정 당국자들의 지배편의 및 한국 문화에 대한 무지, 일제 협잡배의 준동, 이승만의 야욕, 민족세력의 순진함 때문에 그 변형이 불가피했던 점은 민족사의 커다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승만계와 한민당의 합작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라는 제목으로 단정 반대를 선언했고 김규식은 우리 민족끼리 협상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의 양 김씨는 평양방문을 통해 남북협상의 어려움을 체험한 바 있지만 이승만은 양 김씨와의 제휴나 협조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 결의대로 남한단정을 밀어 부쳤다.
1948년 5월 10일 경찰력과 향보단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자유선거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천착 없이 남한을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기구로 전환시켰다.
제3공간의 언론문화
이승만의 집권으로 대표되는 제1공화국은 미국의 협조 하에 성공적으로 정부를 출범시킬 수는 있었으나 친일파의 숙청을 요구하고 남한 단정에 반대하는 많은 세력이 그의 정치적 안정을 위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공산주의 계열의 신문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선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공산당과 같이 용납할 수 없는 정적으로 생각하고 광무신문지법과 1948년 9월 발표한 언론정책 7개항에 의거, 가혹한 언론탄압을 실시하였다. 그 해 9월 정부는 제일신문, 조선중앙일보, 세계일보를 국시위반과 광무신문지법 위반으로 몰아 정간조치하고 다수의 언론인을 구속하였다.
그 결과 제3공간의 언론주역은 한민당계의 동아일보, 카톨릭계의 경향신문,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의 한성신문, 김구 노선을 지지하는 조선일보에 맡겨졌다. 일제하의 매일신보로서 우여곡절을 겪던 서울신문은 이승만 노선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뚜렷한 이유 없이 정간된 후(1949. 5. 3) 주식의 약 49 퍼센트인 귀속재산의 주주권을 행사하여 정부 공보처의 감독을 받는 체제기관이 되고 말았다(1949. 6. 20).
서울신문에 대한 정간조치에 항의하여 언론계 간부들의 단체인 담수회(淡水會)는 광무신문지법 적용의 부당성을 항의하였고 중앙청 출입기자단과 조선신문인협회가 서울신문의 정간해제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공보처장은 정부가 대한민국 헌법 제13조에 의한 언론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언론을 의식적으로 탄압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고 나선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서울신문 정간의 저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제3공간의 언론계 풍토에 대해 송건호는 「미군정시대의 언론과 이데올로기(한길사 간, 한국사회연구, 1984)」에서 대체로 자유민주주의적 언론기풍을 조성한 점, 재야정신의 방향에서 비판활동을 전개한 점,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 대중지로서 독자에게 영합한 점, 철저한 반공지로서 이승만 정권에 추종하여 남북관계에 부정적*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점 등을 특징으로 들고 있다.
이 당시에는 한국 문화의 전역에서 노회한 정치 지도자 이승만의 수완이 최고도로 발휘되었기 때문에 극히 미약한 정치적 지지기반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이승만의 노력이 비교적 순조롭게 관철되고 있었다. 당시의 각종 정치집단은 분열되어 있었고 제나름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이 점을 십분 활용하였다.
제헌의회의 의석 분포는 이승만계가 불과 61석이고 한민당계 80석, 임시정부계 57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민당의 지지기반이 친일파와 부재지주들로 이루어져 있고 당의구조가 가족적*지역적*경제적 유대 및 우인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전통적인 파벌집단임을 간파하고 한편으로는 한민당의 약점을 덮어주고 한편으로는 한민당과 같은 당파적 정당체계에 의한 관직독점을 봉쇄하는 대책을 강구하였다.
집권과정에서 한민당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한민당이 요구한 전체각료의 절반 할당을 거절하고 단 1명의 각료만을 임명했다. 이승만은 한민당이 많은 각료를 차지하게 되면 한국이 우경화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유엔에서 승인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해명하였다고 하나(이승만이 1948년 7월 28일 로버트 T. 올리버 Robert T. Oliver에게 보낸 서신), 이승만은 현실의 제반 여건을 이용하여 노회한 정치감각으로서 한민당과 임정세력을 상호 견제하게 하고, 한민당 세력이 자신의 집권을 넘보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제3공간의 언론문화는 이승만에게 소외당한 한민당적 정치기질과 임정계열의 민족정신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정권담당 세력이 되지 못한 채, 졸지에 재야세력이 되었고 참된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적 천착 없이 단순형식논리로 이승만 정권의 졸정과 실책을 비판하는 언론문화를 재생산하게 되었다.
따라서 제3공간의 언론문화는 이승만이 주도하는 분단체제를 더욱 고착시켰고 일제하의 범죄적 친일행각을 용서받는 대가로 한국보수세력의 일부가 반민족적 분단통치의 들러리가 되게 하였다.
김도현은 「이승만 노선의 검토」(한길사 간, 해방전후사의 인식, 1979)에서 이승만의 집권이 미*소 양극 냉전체제의 한반도 유인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시사함으로써 제3공간의 언론문화가 냉전 이데올로기를 증폭하거나 민족주의 세력을 소외시켰으며 결국은 한민당 계열에 의해 유지되어 오던 일종의 토착 민족문화마저도 왜곡*변질시키고 한민당 일파의 열등의식만을 더욱 고조케 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에 있어서의 진정한 보수주의가 민족문화와는 유리된 채 일제 식민체제의 온존과 미국식 민주주의의 배합 속에서 삐뚤어진 채 뿌리내리고 반공의 이름 밑에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언론문화가 무참하게 유린되는 모습들을 이 시대공간에 대한 예리한 분석들을 통해 충분히 간파하였다고 본다.
제3공간이 던져준 가장 큰 문제는 이제 송건호의 지적(송건호, 앞의 글)대로 민중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신문들이 차용된 보수주의의 이름으로 짓밟았던 민족문화와 민족언론을 재건하는 일이다.
해방공간 언론문화의 재평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방 공간의 언론문화는 태평양 지역 미군사령부의 방침에 의해 지향되었고, 이승만에 의해 유형적 특수성을 갖게 되었다. 해방 초기의 언론문화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지식인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나 조직적 문화운동의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열을 재정비한 일제협력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상충은 언론문화의 정치적 경향성을 가중시켰고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오염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곧 분단사의 본격적인 서막이 되었으며 6*25의 민족상쟁과 조국강토가 냉전의 희생양이 되는 민족분열의 원초적 출발점이 되었다.
따라서 해방 공간의 언론문화는 미국의 세계구도에 따라 하부구조의 성숙 없이 밀어닥친 냉전문화의 돌풍 속에서 너무나 허약하게 주체성을 잃었다. 특히 문화면에서 미군의 저급한 양키문화와 물질지상주의, 향락풍조가 전통적 가치관을 침식했으며 미군정의 통치력을 빌어서 언론문화 전반을 그 전파도구로 이용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외래문화의 충격을 자동조절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으며 전통문화마저도 무장해제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또 이승만의 집권과정에서 보여준 분할과 통치의 식민주의적 전략은 언론에 의해 기회주의적 지식인과 비민족적 인격체의 세력화로 비쳐져 마침내 그 극복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예속적 문화풍토를 만들었다.
이제 해방 공간의 언론문화에 대한 공과가 민족사적 관심 속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이에 즈음하여 우리는 한민당 이래 뿌리내린 친일파 등 외세 의존세력이 가질 수 있는 열등감을 자극하거나, 급진적 개척을 통해 그 잔재를 한꺼번에 청산하려는 세력을 고무하는 일들이 모두 해방 공간의 언론문화와 관련하여 깊은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해방 공간의 언론문화는 당시의 인간과 사회는 물론 분단의 심화*팽창과정에서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해방 공간의 언론문화에 대한 이론적 천착은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지식인의 과제라 하겠다.
세계평화의 대제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됨으로써 우리의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고 나아가 냉전체제의 극복을 겨냥하는 보다 성과 있는 모임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며 우리에게는 올림픽 개최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성큼 다가선 민족분단의 현실을 보다 현명하게 파악하는 예지가 필요하다. 필자는 이 예지가 바로 분단조국 초기 즉 해방 공간의 언론문화와 그 건설과정, 심화과정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심오한 탐구와 깊은 사색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