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절기 따라 새로운 한국인의 멋과 흥

-세시풍속의 한*중 비교를 중심으로




장정룡 / 관동대 강사*민속학

현대사회는 급속한 변모를 내적 외적으로 겪고 있다. 산업화 및 도시화, 대중화에 따른 전통사회의 구조적 변동은 재래의 문화유산인 세시풍속의 모습을 탈바꿈하게 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농경문화의 꽃을 피워 왔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이들 문화는 생활과 풍속, 신앙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대사회는 지나친 도시집중의 중앙집권적 문화형태를 양산하고 있으며,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물결에 따른 농촌인구의 이농현상(離農現象)은 오랫동안 기층문화의 담당자였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게 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도시와 농촌의 상대적 양극화를 초래하여 농촌은 노농화(勞農化), 도시는 도시빈민층을 형성시켰다.

이와 같이 변화하는 시대의 전통문화는 그 담당자와 향유자의 사회적 갈등이 표면화됨에 따라 민속사회 folk society의 기반을 바꾸었으며, 금전만능은 각종 기회의 불균형과 상호간 지역간 계층간의 괴리감을 잉태하였다.

어느 사이엔가 고유한 전통문화 및 정신문화는 설자리를 잃고 외래문화와의 갈등과 부조화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미풍양속보다는 실리추구를 강조하고, 축적된 문화유산은 낡고 고루한 행동강령이 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탈춤이나 살풀이 춤사위보다는 고고춤이나 에어로빅댄스에 익숙한 몸짓을 흔들어야 하고, 판소리 한마당이나 민요 한 소절 못 불러도 팝송이니 오페라니 재즈니 칸쪼네니 하는 것들은 익숙해져 간다.

아이들은 「엿」 문화의 여유와 풍류와 덤의 미학을 모른다. 엿장수의 경쾌한 가위놀림과 폐품활용의 차원을 넘은 우리네 어른들의 애환을 모른다.

「캔디」 문화는 공동체 인식의 장을 무너뜨렸다. 「말만 잘하면 공짜」라는 여유는 캔디 하나 하나의 포장처럼 개별화와 이기적 타산으로 변하였다.

「떡」은 왠지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요즘에 생일파티에는 반드시 「케이크」를 자르고 촛불을 끄고 「해피버스 데이」를 불러야 진정 한 살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더 있다.

새마을 사업한다고 부수어 버린 초가집과 서낭당, 우상숭배라고 뽑혀진 장승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네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극복의 현주소를 외면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누추함과 미신과 우상이라는 왜곡된 편견이 아니라면 말이다.

한복 대신 양복, 짚신 대신 구두, 초가집 대신 아파트, 밥 대신 빵을 먹고, 입고 자고 뛰어다녀도 한국인은 한국 민족이다. 소위 엽전의식이나 짚신관을 버린다면 누가 뭐라해도 문화 민족임이 자명하다. 「호미씻이」나 「관례」가 무언지 몰라도 「발렌타인스 데이」 St. Valentine's Day는 잘도 기억한다.

「만우절」이라고 쓰는 「에이프릴 풀스 데이」에는 소방서에 거짓 전화나 하면서 보름날 「더위팔기」는 소리 없이 지나친다. 수릿날, 한가윗날 등 운치 있는 우리말이 있어도 단오절이니 중추절이니 하여야 명절 기분이 난다고 느끼는 것도 문제의 하나이다.

더구나 「설날」은 구정이 되고 거기서 더 밀리어 「민속의 날」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형적 명절이 되고 보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세시풍습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서양문화의 무절제한 수용 및 침강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 중국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다. 부지불식간에 혼용되거나 우리의 세시풍속에 주고받은 교섭관계를 종속론적 관점이나 아류적 사대성만을 강조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전통성을 바탕으로 한 기층문화의 탐색과 세시풍속을 통한 민족정기의 재발견을 위하여 비교 문화적 관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철갈이의 삶과 믿음

세시풍속은 일년 중 일정한 시기가 되면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민속이다. 세시풍속은 그러기에 주기적이고 전승적인 생활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믿음이 있고 놀이가 있고 생활 그 자체가 스며있는 것이다.

세시(歲時)의 「세(歲)」는 일년을 가리키고 「시(時)」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사시를 말한다. 따라서 세시풍속은 한 해 중 계절에 따라 치러지는 철갈이의 관습적 행사라고 볼 수 있다.

세시풍속은 「연중행사」라는 용어와 함께 속절(俗節)이니, 세시절일(歲時節日)이라고도 한다.

민속상으로 「세시」는 특별한 날을 이른다. 이는 무시(無時)라는 단어가 뜻하는 것과는 반대 의미의 설날이나 보름날, 수릿날 등과 같이 특정한 날의 뜻이다. 그러기에 세시풍속은 이러한 특별한 날을 기해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되풀이해온 습속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말에 「철난다」는 것도 하나의 매듭을 뜻하는 것이고 보면 어린이들에게 「철이 없다」는 표현도 매듭의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철」이란 한 계절을 말하는 것으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변화에 따라 한 해를 넷으로 나눈 그 한동안이므로 세시풍속은 이러한 철갈이의 연속인 셈이다.

주기적인 철갈이의 변화인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생활상의 적응은 세시풍속이라 이를 만하다.

요컨대, 세시풍속을 정의한다면 시기상으로는 해마다, 구조상으로는 주기적인, 형태상으로 반복되는, 의미상으로는 특별한, 성격상으로는 공감과 보편성을 지닌 생활행위와 관념인 날짜 중심의 민속이라 하겠다.

백리부동풍 천리부동속(百里不同風 千里不同俗)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세시풍속은 지역상 가가례(家家禮)와 같은 변이양상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풍역속(移風易俗)이란 말이 뜻하듯이 풍속은 사회적 변화와 이를 수용하는 기층문화의 역할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세시풍속은 공동체 생활권에서 삶을 영위하는 구성원들에게 최선의 행동체계로 관습화되고 유형화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활상 변화와 리듬감을 주어 활기찬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산과 휴식, 노동과 놀이의 순환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순환의례를 성속(聖俗)의 교차 순환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경의례적 관점에서 보면 세시풍속은 신앙과 밀접하다. 세시는 천시(天時)와 통하기에 하늘에 순응하고 자연의 질서에 거스르지 않는 믿음이 생겨났다.

봄이 되면 씨를 뿌리기 전에 농사의 풍흉을 미리 알고 싶어하는 마음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들을 하였다. 이를 예축제의(豫祝祭儀)라 한다면 여기서부터 파종제, 성장제, 수확제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세시풍속의 행사들은 문자력이 들어오기 전에도 자연력에 의한 생산활동을 이루었던 때에서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봄에 씨뿌리고 가을에 거두는 것으로 한 해를 마감하고 신에게 기원하는 가무오신(歌舞娛神)의 행사는 삼한의 농공시필기의 춘추제에 나타난 것으로도 익히 알 수 있는 바이다.

중국의 문자력을 수용하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만월을 기준으로 한 자연력을 근거로 역법을 운영하였다. 만월력의 고유성은 한국 세시풍속의 원초성을 오늘날까지 간직하게 되었고 이것이 중국 세시풍속의 중일력(重日曆)과는 다른 양상이라 하겠다.

한국 세시풍속은 이와 같이 파종과 수확의 상관 및 만월력에 의한 보름민속을 형성하였다. 뒤에서 논의되겠지만 우리 민족의 독특한 세시풍속은 종교적 믿음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계절에 밀착된 신과 자연, 인간과의 조화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교차세시와 순환세시

세시풍속은 이와 같이 자연의 섭리를 삶의 현장에서 재창조하였던 것으로 그 배경에는 자연적 환경, 문화적 기능, 역사적 상황, 사회적 역할 등을 고려하게 된다.

한국 세시풍속의 특징은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보름을 중시한 만월세시와 파종과 수확의 농경세시가 구조적으로 파악된다. 전자의 만월세시는 농경의례의 절차로 보면 정월 대보름의 예축의례와 팔월 한가위의 경축의례가 연맥된다.

대보름날의 점세적(點歲的) 행위는 이러한 풍요 기원적인 의미를 기본으로 하였는데 달과 대지의 음성원리(陰性原理)에 입각한 것으로 보인다. 줄다리기를 비롯한 달맞이, 달집태우기, 보리뿌리점치기, 석전(石戰), 나무쇠싸움, 횃불싸움 등의 직*간접 점년행사(點年行事)가 이때에 집중된다.

각 달마다 보름이 있으나 정월 대보름은 이와 같은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보름은 곧 밝음의 상징이며 만월의 풍요주술을 한 해의 첫째 달에 기구하였던 것이다. 즉 미리 풍요를 간구한 것이다.

이와 연결된 만월의례는 팔월 한가윗날로 이어진다. 예축의례를 통한 풍요의 염원은 성장과 수확을 이루는 과정을 거치게되어 경축의례를 이때에 행하는 것이다.

보름세시의 기조는 풍요주술이다. 풍요는 화합과 안녕을 가져오며 낭만과 여유을 초래하므로 놀이가 부수된다. 「삼국사기」 유리이사급조에 기록된 적마풍속(績麻風俗)은 신라6부의 주민들이 참여한 대동놀이로서 팔월 보름날인 가윗날의 행사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기록으로 밝혀주고 있다.

지난 4월에 발견된 올진군 봉평리의 신라 비석에도 「신라6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음을 보면 위의 가배(嘉俳)날 축제는 사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동국세시기」에도 언급하였듯이 한가윗날은 농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햅쌀은 이미 나오고 추수가 멀지 않으니 모든 사람이 천신을 하고 귀향을 하며 실컷 마시고 춤춘다.

최남선은 정월 보름과 추석을 우리 농본본위의 양대 명절이라 하였는데 천고마비(天高馬肥)의 풍성한 성숙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속담에 「더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윗날만 같아라」든가 「오월농부 팔월 신선」이라고 한 것을 보면 농사짓고 사는 일이 힘이 들지만 햅쌀로 송편을 빚어 조상에게 천신하고, 흩어졌던 피붙이가 모여들기에 반갑고 즐거운 것이다.

7세기경 「수서(隋書)」의 기록이나 「구당서」(舊唐書) 동이전의 기록에도 8월 보름에 설락음연(設樂飮宴) 하였던 신라의 풍속을 밝혀주고 있다.

이를 보면 신라시대 이래로 정월 대보름과 팔월 보름은 예축과 경축의 관례로 연결될 수 있으니 이것이 중국의 중일세시(重日歲時)로 순환하는 세시풍속과 다른 양상이다.

다른 또 하나는 농경의례적 교차세시로 5월 파종제와 10월 수확제가 이어지는 구조적 형태이다.

5월제의 형태는 수릿날이 의미하듯이 벽사진경과 풍요주술적인 기원행사로 규정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한조에 의하면 「항상 5월이 되어 씨를 다 뿌리고 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이 때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시고 놀아 밤낮을 쉬지 않는다. 춤을 출 때에는 수십 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서로 뒤를 따르면서 땅을 밟고 높이 뛴다. 이 춤추는 모습은 꼭 탁무(鐸舞)와 같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 한 번 이렇게 논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 진(晋)나라 때 진수(陳壽)가 수집 기록한 우리의 기록으로 삼국시대의 풍속이다.

농공시필기의 이와 같은 5월의 의례적 세시풍속행사는 오늘날의 단오제라는 중국식 명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 강릉단오제는 원초적인 5월제인 유풍을 간직하고 전승되는 중요한 마을 공동축제로 우리 농경세시의 한 형태를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서낭신을 중심으로 산신을 함께 숭상하며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신과 인간의 마당을 베푸는데 가면극과 농악놀이, 그네, 씨름, 난장 등 축제의 옛 모습을 오늘의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다.

5월 파종제의 상대적 세시행사인 10월 수확제는 상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농사를 마무리하고 집집마다 고시치성을 올린다. 국중대회로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성대하고 경건하며 즐거운 행사를 치렀음은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을 통해서 두루 알고 있는 바이다.

밤낮을 쉬지 아니하고 음주가무하였다는 이들 기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

농경민족의 최대의 축제원형이 동맹이고 무천이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각종 마을 단위의 추수감사제인 것이다.

세시풍속은 놀이와 믿음이 어우러진 마디마디 삶의 재창조 매듭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름민속으로 정월 보름과 팔월 보름이 연맥되고 농경민속으로 오월 파종과 시월 추수인 수릿달과 상달의 연맥이 서로 교차되는 세시풍속을 형성하고 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중국의 세시풍속은 순환적 구조를 갖고 있다.

여기서 순환적 구조라 함은 역법에 충실하고 음양관을 반영한 세시풍속이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중국의 명절은 1*3*5*7*9의 기수 중복으로 이들 기순은 음양수 중 양수에 속한다.

대체로 양수는 좋은 숫자로 여기고 있으므로 양수 겹침은 길일로 보고 있다.

1월 1일은 어느 나라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특히 일찍부터 역법이 발달한 중국은 3월 3일 상사절(上巳節), 5월 5일 단오절(端午節), 7월 7일 칠석절(七夕節)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등으로 명절을 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시기에 보면 「9대속절」, 「4명절」, 「5절향」이라 하여 정조(正朝), 한식, 단오, 추석 외에 상원, 상사, 중구, 동지 등을 중국에서 수용하여 명절로 삼았다.

중국의 세시풍속은 이와 같이 음양관에 기초한 기수민족의 순환으로 태음력을 전통적으로 써왔다. 또한 24절기의 풍속 및 12지지와 연관된 동물민속이 현저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는데 그 영향이 우리 민속 청명, 한식, 상자일, 상해일 등의 모습으로 편재되어 나타났다.

「시경」 빈풍에서 출발한 중국의 세시행사 기록은 예기(禮記) 월령이 처음에 정령의 반포에서 비롯된 것과 같았으나 세시기의 효시격인 「형초세시기」의 출현과 함께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섰다.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502∼557년) 때 종름이 기술한 이 세시기는 양자강 중류지방의 세시풍속을 월별에 따라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보면 윤달의 내용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지키고 있는 세시풍속 내용들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동국세시기」가 「형초세시기」의 영향을 받아 약 1,300여 년 후에 작성된 것이라고는 하나 한국과 중국의 교섭이 오랫동안 깊숙이 진행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세시풍속은 기능상 복합적 기능, 교류적 기능, 수용적 기능 등이 살펴져야 할 것이다.

복합적 기능의 경우는 내포된 내용과 그 표상이 복합적인 것으로 예를 들면 대보름날 다리밟기가 건강뿐만 아니라 도액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 등이다. 이러한 예는 적지 않다.

교류적 기능은 계층간이나 집단간의 상호교류를 통한 세시풍속의 전파, 차용 혁신, 기능전화 등을 말한다. 세화(歲畵)의 경우 궁중풍속으로 전해 왔으나 차츰 민간으로 전파되어 여염집에서도 닭이나 호랑이, 기타 그림 등을 그려 붙여 보편화된 것 등이 있다.

수용적 기능은 한*중간의 경우 밀도 있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수용의 경우는 중국의 행사일, 명칭,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원단, 입춘, 한식, 중양 동지 등이 있다.

이밖에 명칭만을 받아들인 것으로 내용은 고유한 행사를 치른 경우가 있다. 상원이나 중추의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이원적 형태의 수용이 있는데 궁중이나 상층에서는 중국의 행사를 단순 수용하였으나 일반계층에서는 재창조하거나 선택적으로 배제하고 혁신시킨 경우이다. 중화절과 머슴날, 삼짇날, 단오, 칠석, 중원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외래적 요소를 내포한 과거 상류층 표층사회와는 달리 고유적 요소를 간직한 기층사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잔존된 행사도 적지 않다.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의 영향하에서도 계속되는 용왕제라든가 어촌민속의 금기나 세시행사, 서낭제, 영등날, 용알뜨기, 호미씻이, 더위팔기, 부럼깨물기 등등 고유성을 갖고 있는 풍속들이 아직은 계속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교차세시와 순환세시를 명료하게 대비하기 위하여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춘기추보와 하선동력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한 한반도에 형성된 세시풍속은 기후변화에 민감하다. 그러므로 계절성을 간직한 생활과 경작, 식품, 신앙도 각각 독자성을 갖추게 되었다.

봄과 가을의 대응, 여름과 겨울의 대응구조는 계절적 변화뿐만 아니라 생활과 의식구조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씨 뿌려 거두는 것으로 계절 변화를 인식하려던 고대인들로부터 오히려 계절감각을 상실할 정도로 겨울에 싱싱한 과일과 야채 등이 비닐하우스에서 튀어나오는 급변한 사회가 되었다.

「더위팔기」가 더 이상 세시풍속으로 남지 못하고 향수어린 이야기로 들리게 됨은 선풍기와 에어컨의 덕택이다. 굳이 봄에 씨를 부리지 않아도 되고 겨울에 김치를 담그지 않아도 된다.

가정의 장독대에 반지름하게 닦아놓은 장단지를 가풍의 오래됨과 자랑거리로 삼던 시기도 지나간 듯하다.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만들어 낸 장류들이 고추장, 된장, 간장 할 것 없이 똑같은 맛으로 식탁에 오른다.

지역성을 중시하던 속뜻은 지역의식과 지역특성이 정신문화의 나무그루에 각각 독창적이고 나름의 멋을 꽃피우도록 놔두려는 뜻이다. 요즘에는 지역의식이 지역감정으로 바뀌면서 여러 측면에서 분출되고 있어 적지 않은 문제점으로 보인다.

그 원인이야 많겠지만 독창적이고 자생적인 문화형태의 규제 및 지나친 통일의식과 강박적인 일체성의 반발로부터 나온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정초로부터 3월까지는 기원적 형태의 세시풍속이 많음을 볼 수 있다.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는 경건한 제례를 통하여 추원보본과 숭조보근의 뜻을 새겼다. 한국과 중국에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차례와 세배는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통과의례이다.

이 의례는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함에 혈연적 유대감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든다.

대보름은 이에 비해 집단적 이익과 공감에 의해 행해지는 의례행사가 주종인데 만월제의를 통하여 풍요라는 공동목표에 이르고자 한다.

따라서 정초의 세시풍속은 혈연 중심적인 종적 구조의 의례라면 보름의 세시풍속은 마을 중심적인 횡적 구조의 의례인 것이다.

이러한 시기는 기원의례의 성격이 강하므로 인간과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가을은 이에 감사하는 의례가 주로 행해진다. 즉 인간의 뜻을 신이 감응하였으며 자연이 이에 순응하였으므로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았기에 신에게 감사하며 즐거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다. 이러한 공식을 봄에 기원하며 가을에 보답한다고 하여 「춘기추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국과 중국에 공통적인 세시풍속을 이루는 배경이다.

다음에는 우리의 세시풍속 중 특징적으로 논급되는 사항으로 「하장동저」 즉, 여름에 장을 담그고 겨울에 김치를 담그는 풍속이다.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듯이 식생활적인 특성 또한 다양하다. 세시기를 분석해 보면 시절음식이 가장 많은 빈도수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음식세시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권의 영역에 따라 단오권, 추석권, 단오*추석의 복합권으로도 나누기도 하였지만 북쪽의 단오권에서는 조를 주식으로 하고 있는 전작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중부 이남은 쌀을 주식으로 한 도작문화가 발달하였음은 추석권이라는 영역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떡을 쌀로 빚어 조상께 올리고 명절 음식으로 삼았으며 지역마다 향토주가 명주의 역사를 지녀왔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맛과 멋은 상통한다고들 하였듯이 미각의 발달과 함께 전통미의 발현도 병행되었을 것이다.

한민족은 저장가공법에 일찍이 눈을 떴다. 여름에 장 담그는 일은 보통 가정의 으뜸에 해당되는 연중행사였다. 지금도 보수적인 가정에서는 장 담그는데 길일을 택하고 있는데 신일 (辛日)은 신맛의 신자가 음이 통한다 하여 기피한다.

「규합총서」에도 언급하였듯이 외인의 출입을 삼가고 방위를 택하는 등 일년동안 사용하는 장맛에 유독 신경을 쓰는 것이다.

한국에서 장을 담그고 술 빚기를 잘하였음은 상고시대부터의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고구려에서는 장양(藏釀)을 잘한다고 하였음을 보아서도 짐작된다.

여름에는 장을 담그고 겨울에는 김치를 담구었던 계절음식의 상응은 여름에는 부채를 나누고 겨울에는 달력을 돌려 생색내는 「하선동력」의 생활세시와 같은 계절대응이 세시풍속의 구조적 형태라고 하겠다.

오늘날과 같이 겨울에도 싱싱한 야채를 구할 수 없던 시절에 김치는 비타민과 무기질의 공급원으로 끼니때마다 거를 수 없는 고유식품이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소시지나 각종 인스턴트 가공식품이 도시락의 반찬을 대용하는 때에 김치를 먹지 않는 어린이도 있다고 한다.

김치보다는 양배추 샐러드에 입맛이 당기고 고추장보다는 토마토케첩에 적용되어 가는 세태에서 보수와 혁신의 실질적인 자리다툼이 어린 세대로부터 파급되고 있다.

김치를 일본이나 외국 어디에서 수입할 날이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 것을 업신여기는 사고방식과 생활태도에서 전통의 의미가 얼마나 무가치한 공론인가를 웅변해 줄 것이다.

선조들의 지혜와 경험의 축적은 구시대적 유물만이 아니다. 이를 통한 창조적 계승이 요구되는 때가 지금의 시점이다.

같은 김치라 하여도 지역마다 향토색을 짙게 띠고 있다. 마치 다양한 향토문화의 색깔과도 같은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인은 고추장과 김치의 맛과 그 속에 들어 있는 선조들의 지혜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동국세시기」에는 동침(冬沈)이라 기록한 동치미를 비롯하여 섞박지, 나막김치, 총각김치, 열무김치 등등 부지기수로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김치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문화의 모습과도 같다. 다양하되 하나로부터 출발하는 원심론적 문화형태를 말해준다.

누군가 비빔밥 문화론을 말했지만 혼돈과 질서가 반복되며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생활론적 우주관이 의식주의 면면에 숨쉬고 있다.

중국은 지역적으로 음식의 맛이 다양성을 보여준다. 동쪽 지방음식은 맵고, 서쪽 지방의 음식은 시고, 남쪽 지방 음식은 달고, 북쪽 지방 음식 맛은 짜다는 것이다. 이는 동랄북산 남첨북함(東辣西酸 南甛北鹹)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남주북병과 북면남미

한국인의 기호식품에는 차와 술이 있지만 술에 얽힌 풍속이 많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남산 아래에서는 술을 잘 빚고 북부에서는 좋은 떡을 많이 만듦으로 서울 속담에 남주북병이란 말이 생겼다고 하였다.

동서보다는 남과 북으로 길게 형성된 반도의 척추를 태백산맥이 뻗어 내려온 탓인지 모르겠으나 지역적으로 남북의 대비는 흥미로운 일이다.

「경도잡지」는 이조 정조 때 유학자인 유득공이 지은 서울지방 세시풍속지인데 권1 풍속조에서 술을 언급하였다.

봄에 빚는 좋은 술로 소국주*도화주*두견주가 있고, 지역적으로 평양의 감홍도주, 황해도의 이강고, 전라도의 죽력고가 있다 하였다.

얼마 전에 지역별로 향토주를 장려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지정한 것은 잘한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고구려에서는 술 빚는 것이 유명했다고 한 것은 중국인의 기록인 것을 보면 역사가 깊다.

백제 사람 인번(仁番)이 일본에 술 빚기를 가르쳐 주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수질이 술맛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역마다 약간씩 다른 술맛이 난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허리를 한 번 펴고 들이키는 막걸리 한 사발은 땀을 식히고 허기를 달래고 피로를 풀어준다.

우리의 세시풍속 중 2월 초하룻날을 「머슴날」이라고 하는데 이날은 과거에는 집의 머슴 중 20세가 된 성인머슴에게 술과 떡으로 주인이 한턱을 낸다.

막걸리를 받아 마시는 것으로 성인이 되었다. 또한 정월 대보름날 세웠던 볏가릿대를 내려서 벼이삭을 찧어 송편을 만들어 「나이떡」이라고 먹게 한다. 나이수대로 떡을 먹은 머슴은 비로소 성인대접을 받아 소잔등에 타고 모처럼 마을 한 바퀴를 개선장군처럼 돌아 다녔다.

친구들의 축하와 연소한 머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이날은 어른이 되는 날이다.

술과 떡은 각종 중요한 의례행사에 빠지지 않았다. 혼례시에 합환주를 마심으로 부부의 예가 끝나는 것이고, 조상의 제사에도 술이 필수적이다. 관혼상제에 이들 술과 떡은 꼭 끼어야 하는 것이다.

떡은 우리 음식문화의 표상이다. 첫돌에는 백설기와 수수경단이 놓이는데 백설기는 깨끗한 떡을 삼신할머니에게 바치는 뜻이다. 백 가지의 살을 없애달라는 뜻도 포함되는데, 수수경단도 액땜을 상징한다고 한다.

정초 설날에는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첨치의례가 행해지고 이월에는 송편을 나누어 먹었다. 삼월에는 쑥떡, 사월에는 느티떡, 오월에는 수리치떡을 단옷날에 먹었다. 유월 유두는 밀전병, 칠월에는 수단, 팔월에는 오려송편, 구월에는 국화떡, 시월에는 무시루떡,동짓달은 새알병, 섣달에는 골무떡을 만들어 먹었다.

세시풍속과 긴밀한 떡타령 한 수를 들어보기로 한다. 계절구분이 분명하다.

떡사오 떡사오 떡사려오

정월망일 달떡이오

이월한식 송편이오

삼월삼짇 쑥떡이로다

떡사오 떡사오 떡사려오

사월팔일 느티떡

오월단오에 수리치떡

유월유두에 밀전병이라

떡사오 떡사오 떡사려오

칠월칠석에 수단이오

팔월가위 오려송편

구월구일 국화떡이라

떡사오 떡사오 떡사려오

시월상달 무시루떡

동짓달 새알병요

섣달에 골무떡이라

-「교합악부」

「남주북병」은 이처럼 우리 세시풍속의 중요한 사례적 특징을 보여준다.

중국은 대륙 각 지역이 회하(淮河)를 경계로 하여 북방은 면이 주류를 이루고 남방은 쌀이 주식이 된다. 이를 북면남미라는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대만의 경우 각종의 의례에 국수류가 필수적으로 등장하는데 혼례식에도 그러하며 제례시에도 국수가 제물로 쓰인다.

수세를 하는 밤에 국수를 먹고 정초에도 탕에 면류을 넣은 위로(圍爐)를 모여 앉아 함께 떠먹는다. 이는 대만의 주민들이 대부분 대륙의 이주민인 관계로 북방식 음식이 전래한 것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된다.

국수를 먹으면 장수한다든지, 첫돌상에 실을 놓은 것은 생명이 실처럼 길게 해달라는 유감주술적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가 체계를 갖출 리도 없고 그렇다고 논리적 타당성을 더욱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세시풍속의 생명력은 논리성이나 체계성, 종교성, 관념성을 초월한 기층문화의 축적된 관습에 의한다. 그러므로 비록 다른 측면의 의도적인 힘이나 강요적인 방향전환에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아니 그 외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내부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는 것은 변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한국의 세시풍속이 된다.

강강술래와 삭전(索戰)

강강술래를 우리의 원초적인 집단원무라고 본다. 만월의 보름달에서 추어진 강강술래의 상징은 원형사고이다.

놀이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 이상의 의미를 구현한다. 신앙과 노동, 예술이 하나가 된 것이 놀이문화다.

한국 전통놀이 구조는 세시풍속과 긴밀하다. 일과 놀이, 노동과 휴식을 부드럽게 연결하고 창조적 역할과 생산적 휴식을 세시풍속이 마련하였다. 역으로 이들이 모여 세시풍속의 마디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가윗날, 더욱이 전라도 남해안 일대에만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 「강강술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

강강술래의 기원에 대한 설이 구구하므로 그것보다는 이 놀이를 통해 표상된 의미를 통하여 한국 세시풍속의 일면을 구조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것이 본의이다.

강강술래는 보름달 아래서 여성들에 의해서 행해진다. 왜, 여성들만 참여하였는가 ? 이순신 장군과 연관된 기원설에 의하면 남성들은 모두 전투에 나갔기 때문이고 여성들은 의병전술(擬兵戰術)로서 원을 만들어 산봉우리를 돌았기 때문인가 ?

고대로부터 여성은 상징적으로 풍요 주술적 대상으로 보았다. 여성의 고리는 여성으로 이어져 원형을 이룬다. 즉 「풍요+풍요」의 연속고리이다.

거기에 달이 가득한 보름달이다. 「원형+원형」이 하늘과 땅에서 합일되었다. 무엇이 연상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달과 여성은 생명력의 화신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중국사람은 좀생이를 보고 농사짓고 우리나라 사랑은 달을 보고 농사짓는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농경문화의 확고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농경문화의 궁극적 목표는 풍년에 있다.

원만은 풍년 상징이고 경축해야 할 일이다. 한가윗날의 어원이 가배날로부터라고 본다면 가배는 가운데의 의미로 보름을 지시한다.

보름은 밝음의 어원이다. 밝음은 만월이 가져다주는 것이다.

여성들에 의한 원무는 하늘의 달과 어울려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그것은 풍년의 감사를 놀이로 형상화한 것이다. 대지는 여성상징이다. 이 때에 대지를 밟는 여성은 방패꼴 청동기에 새겨져 있는 벌거숭이 사내가 밭갈이하는 모습과는 상대적이다. 봄철 파종시 사내의 나경 (裸耕)은 대지를 여성으로 인식한 모의풍요 주술행위이다.

달과 여성, 대지의 연결은 순전한 음성적 여성상징이다. 수확의례의 놀이에 일치된 여성고리의 환대를 보여준 것이 강강술래다.

자연과 인간의 매듭과 연결은 강강술래를 놀이 이전의 신앙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놀이는 제의와도 긴밀하다.

강강술래를 통해서 유추될 수 있는 문화형태는 원형적 음성적 사고의 일면이다.

반면에 삭전 또는 줄당기기, 줄다리기는 직선적 사고의 놀이형태이다. 같은 풍요주술적인 놀이이지만 직선적 양성적 형태를 갖고 있다.

암줄과 숫줄로 나뉘고, 동과 서로 나뉘고,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고, 풍년과 흉년상징으로 승패가 나뉘고, 산과 강쪽, 윗마을 아래마을, 작은 마을 큰 마을의 편 갈이 의례이다.

부았네 부았네 동쪽조× 부았네

달았네 달았네 서쪽×이 달았네

위의 줄다리기 민요에 나타났듯이 남성위주의 모의 성적인 풍요기원적 놀이다. 대보름놀이의 대표적인 줄다리기는 예축적인 의미를 지닌다.

암줄과 숫줄의 연결은 모의 성적인 행위이다. 대체로 암줄이 이기는 것으로 끝난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유추될 수 있다. 풍년이 들려면 암줄이 이겨야 한다는 속신이 이미 승패를 넘은 세계 속에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형초세시기」에서 이미 한식날 행했다고 적었다. 당나라 때 봉연의 「봉씨 문견기」에는 발하라고 써서 삭구(索龜)를 말하며 교전의 뜻이 있다고 하였다. 청명일에도 하고 정월 망일에도 행했음을 기록하였다. 교전의 숨은 뜻이 분명히 있는데 일본의 「쓰나히끼」와 같은 동궤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짚 이외의 칡줄 등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짚을 여러 집에서 모아 이를 한 줄로 꼬아내는 줄은 도작문화의 소산물이다.

직선적 구조는 이쪽과 저쪽을 암수로 나누는데 용이하였다. 또한 암수를 하나로 묶는데도 용이하였다.

속신에 줄의 암수를 비녀로 꽃은 부분을 썰어 논에다 뿌리면 풍작이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예축적 풍요관의 한 형태가 아닐까 한다. 줄다리기를 요약한다면 농경사회의 지모신 상징에 뿌리를 둔 성행위의 모방주술적 놀이로 축원적 농경의례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강술래의 원형적 놀이사고는 줄다리기의 직선적 놀이사고로도 변형이 가능하다.

다만 이들 놀이는 예축과 경축의 관계를 충실하게 표출하고있을 뿐이다.

줄다리기는 단순한 편싸움이나 패가름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지역적 통합기능이 숨겨져 있다.

강을 사이에 두거나 산을 사이에 두었거나 간에 집단적 모의 싸움을 통하여 일체감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물리적인 힘에 의한 분산과 통합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이 이어지는 직선적 노선이 줄다리기이다.

마을의 풍년과 안과태평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기에 기지시 줄다리기 경우는 이기는 쪽이 풍년이 들고 지는 쪽이 질병이 없다는 합리적(?)인 승부를 창안하기도 하였다.

승부를 통한 화합이 우리의 민속놀이에는 교훈적으로 들어있는 것이다.

강강술래의 원형적 논리와 줄다리기의 직선적 논리가 우리의 민족정신과 생활에 어우러질 수 있는 분위기의 회복이 중요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세시풍속의 의미

세시풍속은 우리네 삶의 안전판이다. 세시풍속은 자연에 고마움을 느끼게 해주고, 조상께 감사함을 기억하게 해준다. 관습적으로 되풀이되는 주기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움의 창조적 역량을 생산하게 한다.

세시풍속은 경건하고 진지한 삶의 순환이며 일과 휴식, 새것과 밝음의 교차이다.

일상적 시간과 관습적 시간의 교체, 무시(無時)와 세시(歲時), 평일과 절일의 뒤바뀜, 성속(聖俗)의 순환,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혼돈과 질서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세시풍속이다.

그렇다고 세시풍속은 거창한 이념이나 이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생활철학에서 자연히 우러나온 오아시스이다.

따라서 망국적 고스톱판에 긴 밤을 꼬박 새우는 놀이문화는 청산되어야 한다. 아무개 식의 고스톱이 가져온 병폐는 순수한 놀이판을 오염시키고 있다.

국적 없는 노랫가락에 몸을 뒤틀고, 명분 없는 종교논쟁에 끼어 들어 내 것도 못 찾는 어리석음은 없을 줄 안다.

세시풍속은 수천 년의 뿌리 그 자체이다. 극단을 중화로, 판쓸이를 양보와 호혜로,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조화를 추구하기 위하여서는 잃어버린 세시풍속, 잊혀져 가는 세시풍속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 볼 시점에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추석 귀성객 열차 속에 가득한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의 응집이 세시풍속의 원천이고 미풍양속이 대접받는 문화양태이다.

자연과 사람과 믿음의 조화원리인 세시풍속을 통하여 공동체 문화를 창조하여야만 민족적 동질성을 획득할 수 있다.

설날, 대보름날, 수릿날, 한가윗날 모두 삶의 재활성화에 기여한 기층문화의 하나이다.

각기 다른 고유한 세시풍속의 의미가 일 년을 단위로 집약되고,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전체적인 측면에서 이들 풍속의 개별 특성을 천착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이 민족정신문화의 맥락에 어떠한 구조적인 시간 흐름을 갖고 있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세시풍속의 낱낱의 행위와 믿음, 놀이가 하나의 초점으로 집약되고 다시 분화하는 과정을 통하여 한국인의 멋과 신명은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

세시풍속의 본질적 요소는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로부터 생활의 활기와 창조력을 가져다주는 데 있다.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세시풍속의 일정한 틀 속에서 동질성을 이어 나가고 사회적 집단적 기능을 회복할 때 다양하면서도 창조적인 문화유산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맥락 속에서 오늘을 숨쉬는 세시풍속이 미풍양속으로 지속되어 창조적인 모습으로 계승될 수 있도록 관심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으로 본다.

<참고문헌>

임동권(任東權), 「한국 세시풍속 연구」(서울: 집문당, 1985)

강수근(姜壽根), 「한국의 세시풍속」(서울: 형설출판사, 1984)

김택규(金宅圭), 「한국 농경세시의 연구」(대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5)

김열규(金烈圭), 「한국 민속과 문학 연구」(서울: 일조각, 1971)

유동식(柳東植), 「민속종교와 한국 문화」(서울: 현대사상사, 1978)

홍석모(洪錫謨) 저*이석호(李錫浩) 역,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외) (서울: 을유문화사, 1969)

임재해(林在海), 「민속문화론」(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6)

국제문화재단 편, 「한국인의 생활풍습」(서울: 시사영어사, 1985)

누자광(婁子匡), 「신년풍속지(新年風俗志)」(대북(臺北):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 1967)

상병화(尙秉和), 「역대사회풍속사물고(歷代社會風俗事物考)」(태북(台北): 태만상무인서관 (台灣商務印書館), 1985)

요한신(廖漢臣), 「태만적 연절(台灣的 年節)」(태중(台中): 태만초문헌위원회(台灣肖文獻委 員會), 1973)

호박안(胡樸安), 「중화전국퐁속지(中華全國風俗志)」(태북(台北): 계신서국(啓新書局), 1968. 재판)

촌상지행(村上知行), 「북경세시지(北京歲時志)」(동경: 동경서방(東京書房), 1940)

돈 숭(敦 崇), 「연경세시기(燕京歲時記)」(태북(台北): 광문서국영인본(廣文書局影印本),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