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소리 에 묻힌 깊은 그늘
-강산제 소리의 고향-보성
유영대 / 전주 우석대 교수
정권진의 소리는 우리와 너무도 친근하다. 다행히도 그가 지난 68년 서울에 처음 와서 국악예술학교에서 부른 심청가의 테이프가 내게 있는데, 거칠고 소박하고 기교도 별로 없는, 흡사 통나무 소리 같은 묵직한 성음이 인상적이다. 아주 세련되게 다듬어진 것 같지 않으면서 친근한 소리, 그의 걸쭉한 목소리는 흡사 잘 거르지 않은 막걸리가 우리에게 주는 친근감과도 유사하다. 우리는 그것을 보성 소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강산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느 것으로 불러도 그것이 지시하는 내용은 하나인 듯하다.
주과포혜 박잔이나 만사를 모다 잊고 많이 먹고 돌아가오. 무덤을 검쳐 안고 아이고 여보 마누라 날 버리고 어디가오 마누라는 나를 잊고 북망산천 들어가 송죽으로 울을 삼고 두견이 벗이 되어 나를 잊고 누었는가. 내 신세를 어이 하리. 노이무처(老而無妻) 소무하니 사궁중에 첫머리요 아달없고 눈 못 보니 몇 가지 궁이나 된단말이요. 아이고 마누라 나만 살아서 무얼 헐꺼나. 나도 같이 따라를 가지.
이 대목은 물론 곽씨 부인을 묻고 그 자리에서 제문을 지으며 위로하는 내용이다. 이 울음 소리는 처절하여 그 소리가 오장육부에서 쏟아지는 성음처럼 여겨진다. 중앙성의 폭넓은 성음이 잘 드러난 강산 소리의 특징이 잘 보이는 대목이다.
바로 그 정권진의 소리, 보성 소리의 내력을 찾으려고 내려간 것이 이번 길이다. 보성은 민속음악의 여려 명인 명창들이 수도 없이 태어난 예향이다. 벌교를 지나 보성에 와서, 남쪽으로 아직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달려 내려가면 거의 바다에 닿을 듯한 회천면 영천리가 있다. 바로 이곳이 강산제 소리의 고향이다. 영천리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두 개 넘어 가면 바로 박유전이 살았던 강산리가 되며 그곳에는 올해 강산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내려온 길을 고닥 따라 한 십 리쯤 더 내려가면 남해바다와 맞닿은 율포리가 된다.
그곳에 정응민의 숨결이 있었다. 김연수, 박춘성, 김명환, 정권진,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 쟁쟁한 명창이 오랜 기간 터를 잡아 수련하던 터가 그곳에 아직도 남아있다. 물론 그곳을 진정으로 지켜야 할 사람은 이제 그곳에 없다. 그래도 그러한 소리의 고향이 온전히 있다는 것은 그 소리를 이어나가는 사람에게도, 우리같이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복된 일이다.
대체로 판소리의 큰 가닥을 동편제와 서편제로 분류할 때, 두 법제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으로 강산제를 상정한다. 그런가 하면 강산제 소리가 특히 보성을 기반으로 하며 성장해 왔으므로 「보성 소리」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보성 소리와 강산제는 동일한 내용물에 대한 이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강한영 교수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그 두 용어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며, 특히 김세종판 「춘향가」의 경우는 그것이 비록 강산제의 스타일로 불리기는 하지만 원형은 동편소리임에 유의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꼭 그렇지는 않지요. 원래 「강산제」라는 것은 박유전 선생의 법제로 정응민 선생에게 전승되어 내려오는 것을 지칭합니다. 강산제는 동편제를 거둬들인 것이지요. 동편제를 서편 스타일로 여유 있게 부른 것이 바로 강산제입니다. 대원군이 박유전 선생을 높이 산 것도 동편과 서편의 좋은 점을 종합하여 받아들였다는 그 점에 있는 것입니다. 「심청가」만은 의심할 것 없이 강산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수궁가」나 「적벽가」도 박유전 선생의 것으로 추정되며, 그렇다면 강산제라고 불릴만 하지요. 다만 「춘향가」는 동편소리인 김세종제를 정응민 선생이 받은 것이기 때문에 「춘향가」까지 강산제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 정응민 선생의 소리를 통틀어 「보성 소리」라고 부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보성 소리에 강산제는 포함되지만 그렇다고 강산제가 바로 보성소 리는 아닌 것이 확연하다. 다시 정리한다면 보성 소리는 다음의 표처럼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성소리 |
강산제 심청가(박유전-정재근-정응민-정권진/조상현) |
강산제 수궁가(?/박유전-정재근-정응민-정권진/조상현) |
강산제 적벽가(?/박유전-정재근-정응민-정권진) |
동편제 춘향가(김세종-김찬업-정응민-조상현/정권진) |
그래서 먼저 강산 박유전의 자취와 강산제 소리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보성 소리의 성장과정과 정응민의 판소리관을 종합해보자. 그리고 보성 소리의 쟁쟁한 전수자 가운데서 조상현의 소리내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강산제의 형성과 발전
박유전은 헌종 무렵에 전라도 순창에서 태어났고 그가 이름을 날린 뒤에는 보성에서 살았다. 판소리에 장식과 기교를 덧붙여 서편제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의 행적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목청이 절등하게 고와서 당시 비주(比犾)가 없었다. 대체로 대원군에게 「네가 제일 강산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전하며, 그의 총애를 받아서 무과벼슬을 하고, 대원군의 사랑에 무시로 출입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민비의 난을 만나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자 박유전도 민비 일파의 보복을 피해 전라도 나주 정재근의 집에 은거하면서 그를 가르친다. 대원군이 다시 득세하자 강산을 따라 정재근도 한양으로 가게 되고, 그 길에 정응민도 함께 데려가서 한문과 소리를 함께 배우게 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죽고 한일합방이 되자 박유전은 「나라를 잃어버린 명창 가객이 살아서 뭣 하느냐」고 탄식하며 스스로 노래부르기를 그치고 굶어죽었다고 전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보성을 기반으로 한 정응민이 그의 법통을 그대로 이어받게 된 것이다. 물론 그의 중요한 제자로 이날치를 들 수 있으나, 이날치가 박유전에게 배울 때도 그는 이미 일가를 이루었으며, 그에게서는 다만 기교의 세련 방식에 대한 학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박유전의 소리라고 추정되는 것은 심청가이다. 판소리 「심청가」는 동편제와 서편제, 그리고 강산제가 공존하고 있다. 동편 소리는 강도근이 보유하고 있으나, 전판이 완창된 적은 없고 이보형의 조사 보고서와, 그의 제자인 이애자가 사설로 정리한 것이 있어서,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서편제로는 이날치에 근원을 두고 김채만에 와서 갈라져 하나는 박종원에 이어져 한승호가 보유하고 있는 김채만제와, 박동설이 받아 한애순에 이어진 박동실제가 있다. 같은 서편 소리이긴 하지만 한승호와 한애순의 소리는 그 맛이 사뭇 다르다. 한승호는 엇붙임이나 잉애걸이 같은 기교가 자유자재이며 너무 뛰어나서 들을 때마다 우리를 감동시킨다. 한애순의 것도 기교가 뛰어나며 섬세하다고 하겠다.
「심청가」는 강산제 소리가 가장 폭넓게 전승, 향유되고 있다. 박유전에서 정재근으로, 다시 정응민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사설도 풍부하고 기교도 뛰어난 소리제이다. 조선조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동안에 심청전이 수도 없이 필사되어서 유통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강산제 창본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리고 역시 많은 양이 인쇄된 완판본 역시 강산제 창본을 거의 그대로 판각한 것이다.
심청전 가운데서도 강산제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대목으로는 심청이 시비 따라 장승상 부인 집으로 가는 진양조의 유장한 가곡성 우조 대목을 들 수 있다. 서편제에서도 진양 우조로 불리기는 하지만 강산제처럼 우아하지는 않으며, 동편제에서는 아예 중모리 평우조로 불린다.
시비 따라 건너간다. 무릉촌을 당도허여 승상댁을 들어갈 제 좌편은 청송이요 우편은 녹죽이라. 정하에 솟은 반송 청풍이 건 듯 불며 노룡이 굼니난 듯 뜰 지키는 백두루미 사람자최 일어나서 나래를 땅에다 지르르 끌며 뚜루루 길룩 징검징검 왕룡성이 기이허구나
이러한 곡조는 물론 가곡과의 교섭에서 생겨난 것으로 승상집의 우아한 면모를 소리로 보여준다. 백두루미가 나래를 끌며 거니는 모습이 그 집의 진중한 무게를 좀 가볍게 해주는 구실을 한다.
그리고 이 강산제에만 특이하게 심청이가 시비 따라 가는 대목이 뒤에 한 번 더 나온다. 그때는 진양세마치 평계면으로 불리는데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시비 따라 건너간다. 신세자탄 우는 말이, 아니고 내 신세야. 어떤 사람 팔자 좋아 양친이 구존하여 복록을 누리며 부귀영화 잘사는디 내 신세는 어이 허여 이 지경이 웬일이냐. 무릉촌을 당도허여 승상댁을 들어가니 부인이 반겨 나와 심청 손을 부여잡고 에이 천하 무정한 사람아. 나는 너를 딸로 여기는디 너는 나를 속였느냐, 너의 효성은 장커니와 앞못보는 너의 부친 뉘게 의탁하자느냐. 공양미 삼백석을 내가 내여 줄 것이니 선인들과 해약하라. 심청이 여짜오되 당초 한 번 억약한 걸 이제와 두 말 허면 선인들도 낭패옵고 무공헌 많은 재물을 지가 어이 받으리까…….
원래 강산제 소리는 세마치 장단을 사용하는 것이 한 특징이거니와, 이 두 번째 시비 따라 가는 대목은 계면을 사용하여 죽으러 가는 심청이의 절망적인 심사를 나타내면서도, 세마치 장단을 사용하며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를 구할 수 있기에 심청이의 발걸음이 다소나마 빨라졌음을 나타낸다. 인용한 대목에서도 처음에는 심청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다른 부모를 갖춘 친구들에 대한 부러운 마음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내 장승상 부인과 만나서는 효녀로서 지녀야 할 교양을 유지하는 인물로 바뀐다. 이 대목의 이면에 대하여 조상현은, 「부친을 위해서 죽으러 가는 것이니, 자기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서러운게 아니여. 내가 죽으면 눈까지 먼 우리 아부지에게 누가 더운 밥을 해주며, 빨래는 누가하며, 어디에 의탁해야 하는가, 그런 것 때문에 서러워하는 것이지. 그래서 진양을 세마치로 노래했다」고 말한다.
그렇기는 하여도 어찌 어린 소녀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서러워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복합적인 심사가 여기저기에 나타나는데, 이 노래의 다음에 이어지는 「선인 따라」대목에서도,「건너 마을 바라보며, 이진사댁 작은 아가, 작년 오월 단오일의 앵도 따고 노던 일을 뉘가 행여 잊었느냐. 상침질 수놓기를 뉘와 한께 하자느냐 너희들은 팔자 좋아 양친이 구존하니 모시고 잘있거라 나는 오날 우리 부친 슬하를 떠나 죽으러 가는 길이로다」라고 자신의 슬픈 처지를 애소하는 대목이 나와서 삶과 죽음 사이의 갈등을 잘 드러내 준다.
이밖에도 심청이 옥진 부인을 만나는 대목도 특이하며, 뒤에 안씨 맹인이 등장하는 것도 강산제 심청가만의 특징이다.
강산제 「적벽가」 가운데서 정권진이 부르는 군사점고 대목은 다른 어느 계통보다도 다채롭다. 슬프고 흥겨운 두 심사가 함께 일어나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앞부분에서는 조조를 위엄 있게 그리다가 이 대목에 와서는 우스꽝스런 인물로 변조시켜놓는 것은 흥겨운 대목으로 묘미이지만, 점고 대상이 되는 군사가 확대되면서 일상적인 인물들의 고통스런 정황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우리가 그들과 정서적으로 일치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허무적이나, 골내종, 박덜렝이, 왕덩방이-이들은 모두 우리들의 자화상에 다름 아닌 인물들이다.
〔중모리〕허무적이가 울며 들어오네. 투구 벗어 손에 들고 갑옷 벗어 들어 메고, 한팔 늘이우고 한 다리 절룩절룩, 통곡으로 우는 말이 고향을 바라보니 구름만 담담허고, 가솔을 생각허니 슬픈 마음 측량없오. 가고지고 가고지고 우리 고향을 가고지고……
〔중중모리〕골내종이가 들어온다. 골내종이 들어온다. 안판낙포 곱사등에 눈시울은 찢어지고 일할차 비뚤어져 귀하나 떨어지고 왼팔이 쭉 늘어져 다리절고, 곰배팔 거침없이 휘저으며 껑충껑충 모두발로 뛰어들어와, 「예이」
앞에 군사설움타령과도 흡사하게 이들은 그들의 현실 생활에서 강제로 동원된 인물들이다. 이런 어거지 전쟁에서 빨리 벗어나 노모가, 아내가, 자식들이 있는 삶의 건강한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모두 전장에서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귀까지 떨어져나간 병신들이다. 쓰리고 그런 현실을 회화적으로 묘사하므로 재미있으면서, 그들의 이면을 보면 한없이 슬프다.
정응민의 판소리관
순천에 사는 애호가가 찍었다는 명창들의 사진을 흥미롭게 보았다. 그에게 알맞을 듯한 시구를 족자에 적어서 세워두고 그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벼슬을 한 이들은 갓 쓰고 도포를 입고 사진을 박았다. 그 명창들 사진 가운데 정응민의 것도 있다. 그는 어떤 차림인가. 갓을 쓰지도 않았고, 도포를 갖추어 입지도 않았다. 머리는 짧게 자르고 평상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있다.
그는 스무 살까지 한양에 있다가 박유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바로 고향으로 가겠다고 결정한다. 그래서 내려오는 길에 부안에서 김세종의 제자인 김찬업에게 「춘향가」를 배운다. 그리고는 고향인 보성에 돌아와 은거하는 것이다.
우리 선생님은 실제 서울 조선국악연구회에서 활동을 하셨다면 돈에 대한 여유도 많으셨을 겁니다. 한 번 출연하면 3백원 정도를 받았는디, 당시 돈 1백원이면 여덟 식구가 1년 먹을 양식을 팔았다고 하니 얼마만큼 큰지 짐작헐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바로 보성으로 오셔서 은거하셨지요. 시골에서 삽을 들었고, 논에 물길을 대러 다니셨어요. 직접 농사일을 돌보시면서 한번도 다른데 눈을 주시지 않았지요.
이미 일제의 강점에 들어섰고, 그곳은 자신이 발붙일 땅이 아니라는 결심이 섰던 것이다. 삼사십대로 보이는 이 사진에서도 정응민의 그러한 옹골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당시의 풍조가 슬픈 성음, 계면조만 좋아하고 노랑목에 경도 되는 풍조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개탄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고제 소리를 지켜야 된다고 다짐하였다. 얼마전 최동현이 정말 귀한 테이프인 정응민의 단가 「녹음방초」와 「수궁가」의 초압을 들려준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낌으로는 참으로 덤덤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시 새겨보니, 고제소리의 맛이 살아나고 듣기에 편하다.
조상현의 눈에 보인 정응민의 모습은 한마디로 선비였다고 한다. 어느 경우에도 행동이 흐트러짐이 없어서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긴장이 된다고 하였다. 제자를 심하게 다그치거나 야단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어쩌다 한 마디 욕을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게쌀게」라는 말을 몇 번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전쟁의 끝 무렵이어서 좌익에 기울었던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게 되었을 무렵에도 앞장서서 나서서 그들을 변호하여 구해냈다고 한다.
다만 아들인 정권진이 소리를 하려고 하자 그때는 심하게 막았다고 한다. 명창이 되려면 수십 년 공을 쌓아야 되는데 그 공을 학문하는데 쓰면 몸도 편하고 훨씬 일도 많이 할 수 있으며, 설사 명창이 된다 하여도 대우도 못 받고 고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지만 정권진의 목이 썩 좋고 여기저기서 권하고 설득하여 결국은 아버지의 수제자였던 박기채에게 배울 수 있었다 한다.
소리 통성을 내기 위해서는 힘이 들고, 그러니까 얼굴도 붓고 배도 붓고 아주 힘이 들었지요. 그러고 인자 힘찬 소리를 허기 위해서는 노래도 노래거니와 따로 단전의 힘도 길러야 됐지요. 아침에 나는 쑥불을 많이 떴어요. 단전에, 배꼽 밑에 쑥불을 떠가지고 뜨거운 것을 아랫배에다 힘을 주고 참는단 말여.
이것은 정권진이 소리 공부할 때 뱃심을 기르는 방법이다. 조상현도 아침에는 통성을 지르지 않고 주로 하성을 이용하여 아-아-아-소리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가성을 사용하여 어려운 목들을 연습하였다. 그리고 아침이 지나면 일단 모든 사설을 자진모리가락으로 바꾸어 불러보기도 하였다. 원장단을 빠른 가락으로 불러보고 빠른 가락은 느린 장단으로 불러도 보면서 섬세한 채색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산에 가서는 하성에서 시시상성까지 뱃심이 오를 때까지 힘껏 소리를 질러 산울림으로 자신의 음질이나 음량을 파악했다고 한다.
강산제의 문파에도 명창에 대한 이론이 있다.
대명창이 되는 길은 정심, 정음, 사채에 달려있다. 정심이란 바르고 맑은 마음이니, 그 나라 음악을 듣고 그 나라 정치를 알아볼 수 있듯이 가객의 소리를 듣고 가객의 인격을 알아볼 수 있다. 「심청가」를 부르는 가객이 「심청가」를 청중에게 권하면서 자신이 불효하면 열기가 없는 죽은 소리요, 자신이 효를 행하면 생명감이 있고 기가 충만하고 진수가 담겨 참된 소리가 되는 법이니 소리 이전에 자신의 인격과 참다운 사람됨을 권한다. 다음에 정음이라 함은 소리를 엄격하게 성심껏 하며 득음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된다는 말이고, 사채라 함은 품위 단정한 동작, 즉 너름새이니 사채가 무게 있고 민첩하고 발 하나를 떼어도 정중함이 있어야 하며 사방으로 이유 없이 활보한다든지 쓸 데 없이 부채질을 자주 한다든지 난잡한 태도를 보여 품격이 떨어지면 올바른 사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명인명창」에서 인용).
이러한 원칙 때문에 설사 청중들이 계면성음의 노랑목을 원한다하여도 거기에 영합하지는 않았다. 이보형도 보성 소리가 갖는 고졸성에 주목하여 말한 바 있다.
해방이 되고 나서 많은 명창들이 세상을 떠나고 보니, 소리를 배울 데가 없었는데, 은거하는 명창을 수소문하여 보성에 정응민씨란 분이 아주 좋은 고제 판소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많은 제자들이 그곳에서 소리 공부를 합니다. 정응민의 외아들 정권진이 아버지 소리를 이어받아 훌륭한 집안의 전통을 이어왔지요. 판소리라고 하는 것이 북 머리에서 잠깐 배운다고 해서 그 진수를 아는 것은 아니고 오래도록 판소리를 익숙하게 듣고 배우고, 실제 공연을 눈 여겨서 봐야만 판소리의 진수를 알게 됩니다. 정권진은 정응민의 판소리 바디를 가장 완전하게 받은 명창이며, 정응민이 추구한 대로 판소리를 가장 진중한 예술쪽으로 이끌어간 명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성 소리 춘향가를 들어보면 진중한 무게가 느껴진다. 작년에는 정권진 추모공연이 국립극장에서 열림굿 같은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조상현의 소리내력
이제 조상현의 소리내력을 알아보기로 하자. 선친이 공부시킬 욕심이 많아서 그가 말을 할 무렵에 서당으로 보냈다고 한다. 위로 형이 둘이 있고 자신은 막내아들이었다. 열 두어 살 무렵에 같은 마을에 있는 최종기란 분에게서 단가 몇 마디와 춘향가 토막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고샅을 다니면서 소리를 하면 싹수가 있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래서 그가 열세 살 되던 해에 회천면의 정응민 선생댁을 찾아 들어간다. 1952년경인 듯하다. 어려서부터 그 집에 들어가 집안의 잔일을 도와주며 그 집 식구와 일곱 해를 살면서 소리를 배웠다. 그 동안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등 세 바탕소리를 익힌다.
조상현이 소리를 배우러 들어갈 때만 해도, 아무도 소리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아침저녁으로는 소리공부를 하고, 낮으로는 소깔도 베고, 소도 먹이고, 쇠죽을 쑤면서 「깔땀살이」를 하였다. 소를 뜯기러 들에 나가서 그날 배운 소리를 하노라면 그의 맑고 화려한 소리가 넓게 퍼져나가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고된 줄을 몰랐다 한다.
동네 사람들이 소년 명창이라고 칭찬하는 것 이외에도 명창 임방울에게서도 비슷한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한 번은 임방울이 그 댁에 들렀다가 조상현이 소리하는 것을 듣더니 정응민에게 「목이 좋네좋네 해도 이놈 같이 목이 좋은 놈은 첨 봤네. 형님이 성냥깐에서 두들겨만 주쇼. 팔기는 내가 팔께」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어린 조상현은 성냥깐에서 두들기라는 소리를, 자신을 두들겨 패라는 소리로 잘못 이해했다고 한다.
내 이름이 거기서는 「세또」요. 시방도 「세또」라면 통하지요. 그거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세빠또」에서 가운데 「빠」자를 빼고 부른 것이지요. 그것은 김명환 선생님이 내가 세빠또 모양으로 심부름을 잘헌다고 내게 붙여준 별명이지요. 심부름시키면 금방 달려갔다 오지요. 거그서 율포가 솔찬히 먼디, 거를 금방 갔다오니까, 그런 별명이 붙었어요. 많이 다닐 때는 하루에 여덟 차례를 율포에 다녀온 적도 있지라우.
나중에 김명환이나 성우향, 안채봉, 박금선 같은 이들이 소리 공부하러 들어왔다. 자신이 먼저 들어와 공부를 했지만, 나이가 원체 위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심부름을 도맡아서 했다 한다. 특히 어린 소년인 그는 설탕가루를 아주 좋아하여, 누가 설탕가루라도 한 줌 줄 양이면 무슨 심부름이고 다 번개처럼 해줬다. 소리를 배우는 즐거움에 그 모든 고생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한다.
한번은 스승에게 심하게 혼난 적이 있었다. 혼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치도곤을 당하여 한동안 스승과 헤어져 있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김명환이 어린 그에게 북을 가르쳐 줬는데, 아주 「쇠명하게」 잘 받아 배웠었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배운 소리를 익히는 일보다 북 치는데 온갖 신경을 다 빼앗겼다. 공식과 방법을 배워 그것을 익혀나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저 북만 붙잡고 살다시피 하였다. 한번은 광주에 가서 북을 치는데, 일산이, 「문닫아 놓고 치면 자네 북인지 내복인지 분간을 못 허겠네」라고 칭찬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한참 때는 북을 오히려 소리보다도 더 좋아했어요. 북에 취미를 붙이니 북이 늘어가고, 소리에 맞어 들어가니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요. 선생님하고 북이 비슷하단 말씀은 언감생심, 하늘과 땅 차이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가락 하나 가르쳐주면 그것이 소리와 접합이 되어서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지요. 그레노니, 북을 잘 친다고 안채용씨가 박금선씨가 밤낮으로 북을 쳐달라고 해요. 그렇게 북을 쳐대다 보니까 소리를 잊어버렸어요. 그때는 일주일 단위로 강을 받을 땐디, 그때 「천자뒤풀이」를 선생님 앞에서 하다가 「취지여일」 (就之如日) 날 일(日)까지 부르고 그 뒷 대목이 생각이 안나나요 「취지여일 날 일, 취지여일 날 일‥‥」이렇게 거기서 웅얼거리자, 선생님이 「웬놈의 취지여일이 그렇게 많냐」고 소리치시면서 복통을 던져버렸어요. 그러고는 「네 이놈 내 앞에 다시 올라면 다시 다 해 갖고 와」하며 자리로 돌아가셨지요.
어린 소년에게도 선생님이 야단치는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날 입시에는 야속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튿날, 하직 인사도 못 드린 채, 소년은 고향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얼마 동안은 모진 맘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특히 막히는 「천자뒤풀이」는 무려 천오백 번이나 불렀다. 그러면서 밤이나 낮이나 회천면 쪽을 향했다. 저절로 그쪽으로 향해졌다.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석 달이 지나서 가고 싶은 마음을 「정 못 참겠어서」선생님의 마음이 풀렸을지 궁금한 가운데 못이기고 회천면으로 들어간다.
갔더니, 선생님이 무척 기다리셨나봐요 「진즉 오지 뭣하고 여태 집에 있었냐」고 하시며, 「소리 한 번 해 보라」고 하셔요. 그 동안 연습한 것을 막히지 않고 하니까 그제서 마음이 풀리셨는지, 「소리는 잘허면 천하의 보배이지만, 그런 보배를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창, 국창 될라먼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된다. 그러고는 노력해야 돼. 노력 안 허고 그냥 공으로 얻을라고허먼 죽도 밥도 안 된다. 북이야 노력하면 칠 수 있지만 그래도 너는 소리를 타고났으니까 소리쪽에 모든 힘을 기울여라」 이렇게 말씀하시드만요.
이렇게 심한 야단을 맞고 정진하여 아마도 그 영향으로 세 바탕을 떼게 된다. 공부를 마치고는 스무 살경에 광주로 와서 호남국악원에서 지낸다. 그러면서 오전과 오후로 청도관이라는 호신술 도장에 다니면서 운동을 한다. 아마 그의 성격상 미치도록 빠졌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무렵 그는 소리보다도 운동쪽에 더 매료되어 있었던 듯싶다. 그 무렵의 그를 보고 아끼던 사람이, 「예술하는 사람이 운동을 하며 껄렁껄렁 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고 충고해준 적도 있었다.
군대 3년을 마친 후, 그는 잠시 영암에 살다가 목포에 정착한다. 목포국악원에도 있다가 목포문화방송에 정규 프로그램을 맡아 활약한다. 한 번은 박녹주의 은퇴공연을 목포에서 갖기로 하고 그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여기저기 섭외하여 막을 올리는데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다. 그때 공연에 참가한 이로는 박녹주 이외에 김연수, 박동진, 성창순 등과 대금 부는 유대봉, 젓대 부는 김동식 그리고 헤이만이라는 미국인 소리꾼 등이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소리를 듣던 박녹주가 「니마, 목포에 있기는 아깝다. 니가 목포국악원에 있으면 목포 조상현이 밖에 안 된다. 서울로 오그라」라고 정중하게 권했다 한다.
그는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비지요.」라고 말했으나, 결국 이 날의 대화가 그가 서울로 옮겨오게 된 동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가 서울에 와서 한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저 가장 편히 잘 수 있었던 곳이 석관동 국악예술학교 숙직실이었다고 하니 그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박녹주에게서 「흥보가」를 배우는 한편, 그는 자신의 입지를 점점 확보하게 된다. 사실 70년대에 조상현이 너무 갑자기 부각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시류를 잘 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가 타고난 목이 좋은 데다가 소년시절부터 온갖 고생을 하면서 닦은 그 뒷심이 없다면 서울에서 한시인들 버틸 수 있었겠는가.
그의 우조 소리를 한 번 듣는다면 막힌 가슴이 툭 트인 기분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의 성음이 국이 너무 큰 쪽으로 기울어진 것에 대하며 일말의 아쉬움을 표하고 성음의 변화를 기대하기도 한다. 엄중하면서도 느슨함도 갖고, 뚝성으로 누르는 대목과 세성으로 흐늘거리는 그러한 두 차원이 어우러져 그늘 짙은 변모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말했듯, 「바람도 순순하게 불었다가 세차게 불기도 하며, 물소리도 잔잔했다가 금방 파도가 일어나기도 하는 조화를 그 문학적 내용에 맞게 악곡이 따라가 주어야」할 것이다.
지금 조상현은 판소리보존연구회의 이사장으로 있다. 사무실은 강남의 무형문화재회관 안에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하여 사무실로 간 날은 토요일 오후였고, 마침 날씨는 우중충하니 비가 내렸다. 회관 지하실에서 스무 명이 넘는 그의 제자들이 소리공부를 하고 있었다. 춘향가의 초압인 「기산영수 별건곤 소부, 허유 놀고, 채석강 명월야의 이적선도 놀고」로 시작되는 대목이었다. 6년전에 처음 춘향가를 시작하여 1개월 전에 한 바탕을 마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연조가 오래된 사람도 많아서 열기가 대단하였다.
일곱 시간 가량 그와 함께 있었으며, 다섯 시간 가량을 면담하였는데, 하나도 피곤한 기색 없이 쌩쌩하게 자신의 행적과 경험을 털어놓았다. 어떤 부분은 아주 구체적인 체험이어서 실감이 났고, 어떤 대목은 특이하면서도 장황한 이론의 개진이어서 좀 지루하기도 했으나 그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조상현은 특히 국악의 저변확대와 사회교육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지금 전남대학에 매주 이틀씩 출강하고 있다. 국회나 그 밖의 여러 중요한 기관에서 강의한 회수가 이루 셀 수 없다 한다. 사무실안의 한 달 계획표가 씌어진 칠판에는 그의 이 달치 강연 계획이 거의 빽빽하게 채워져 있어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실기인이면서 이론을 겸하여 강의할 수준에 이른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며, 부러운 점이기도 하다. 그의 소리는 선이 굵고, 우람하며 질박하다. 그런가 하면 강산제의 정교하고 섬세한 특징도 갖추고 있다. 강의를 하다가 어떤 용어의 개념을 설명할 때 자신의 소리로 직접 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듣는 이에게는 얼마나 행운이 되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그가 한 석 달 열흘 보성의 깊은 그곳으로 다시 독공을 들어가서 그 쩌렁쩌렁한 호령조 소리에 더 깊은 그늘을 붙여와서 우리에게 다시 선다면 그 또한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그가 보성에 독공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도 그 자리에 따라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