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논단·1

창작의 자유와 문학의 본질




이태동 / 문학평론가

금세기 초 우리나라에서처럼 자국의 민족문학을 일으키려 했던 아일랜드의 위대한 시인 월리엄

버틀러 예 이츠 William Butler Yeats(1865∼1939)는 1926년 상원의원이 되어 아일랜드 남부, 워터포드 Waterford에 있는 어느 수녀원 소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때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그들을 향해 미소짓는 늙은 자신의 모습을 놀란 시선으로 응시하던 모습을 보고, 시상(詩想)이 떠올라, 「초등학교 어린이들 틈에서」라는 유명한 시를 썼다.

그는 이 시에서 그가 방문했던 초등학교의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얼굴 위에다 자기의 옛 애인인 모드 곤 Maud Gonne의 얼굴을 포개놓고, 굽 도는 삶의 계단을 지나서 성숙하게 된 어른이 아이들을 쳐다보며 지나온 성장과정에서 얻고 잃은 것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긴다. 아무런 목적 없이 굽이쳐 흐르는 그의 명상은 마치 시냇물처럼 흘러, 그것의 수원지에서부터 먼 지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는 이 상념의 수면 위에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헬렌을 낳은 레다 Leda, 「자연은 단순히 사물의 정신적 원형 위에 노니는 하나의 포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플라톤, 알렉산더 대왕의 궁둥이에 가죽채찍을 가했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별의 노래와 번뇌 없는 뮤즈가 듣는 노래를 바이올린 활이나 혹은 현으로 뜯는 황금 넓적다리를 가진 피타고라스」 그리고 미운 오리새끼 및 무수한 개인적인 회상의 이미지들을 의식의 흐름으로 연결 지어 하나씩 하나씩 띄운다

그런데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시골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예쁜 얼굴과 맑은 시선이 노시인으로 하여금 생각나게 한 것은 그 애인 모드 곤의 어린 시절과 그녀 때문에 괴로워했던 사랑의 여로와 심층적으로 관련이 있는 신화, 즉 달걀의 한 껍질 속의 흰자와 노른자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적 비유담,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된 사물의 본질과 생성에 관한 신비이다. 다시 말하면, 클리앤스 브룩스가 지적한 것처럼, 남녀는 「과거로-말하자면-달걀 그 자체로 되돌아감으로써 하나가 되고, 또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분화되어, 아주 다른 깃털을 지닌 새가 되었으며, 그녀는 백조의 딸이 되고 그는 허수아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그는 이 시의 끝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써 그의 시적(詩的)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수녀들과 어머니들은 이미지를 숭배한다.

그러나 촛불이 밝히는 이미지들은

어머니의 환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과는 다르고,

대리석이 나 청동의 평정을 지닌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 「실재」여 ,

정념과 경건함, 그리고 여정이 알고 있는 그것,

그리고 온갖 천국의 영광이 상징하는 그것-

아, 스스로 제 몸에서 생겨 인간의 일을 조롱하는 자여

고역은 꽃피거나 춤추고 있다.

영혼을 즐겁게 하려고 육체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곳에서,

아름다움이 그 자체의 절망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 곳에서,

눈이 흐린 지혜가 한밤중에 태우는

기름에서 태어나지 않는 곳에서,

오, 밤나무여, 뿌리깊은 큰 나무여,

그대는 잎인가, 꽃인가, 줄기인가 ?

오, 음악에 따라 춤을 추는 육체여,

오, 빛나는 눈빛이여,

우리는 무희와 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으리 ?

--예이츠 「초등학교 어린이들 틈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이 시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시인 예이츠는 플라톤이 말하는 신적(神的)인 이념, 즉 본질 being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생성과정 becoming은 서로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시적인 명상 속에서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이를테면 씨앗 속에 담겨있는 신적인 본질과 일치되는 나무 형상 form의 신비가 없으면, 씨앗에서 나온 나무 모양은 있을 수가 없다 또 역으로 나무가 자라지 않으면 씨앗 속에 내재해 있는 나무 형태는 볼 수가 없다. 씨앗이나 나무의 뿌리 혹은 구근(球根)에 내재해 있는 나무의 형상이 플라톤이 말하는 신적인 것이라면, 씨앗이 움터서 잎이 생겨나고 줄기가 뻗어나며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은, 씨앗 속에 숨어 있는 원리가 생성을 통해서 구현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예이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의 궁둥이에 아홉 가닥의 채찍을 가하며 그를 교육시키려고 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물이 생성과정이 전혀 없는 돌이 아니라면, 그 속에는 플라톤이 말하는 본질적인 형상과 그것을 꽃피우기 위한 생성과정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영과 육이 완전히 결합해서 나타나는 고역(苦役)이나 산고(産苦)는 「영혼을 즐겁게 하려고 상처를 입히지 않는 곳에/ 아름다움이 자신의 절망에서 태어나지 않는 곳」에서 「꽃피거나 춤을 춘다」고 예이츠는 노래하고 있으며 또 밤나무는 잎이나 줄기 혹은 줄기와 뿌리 그 어느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합쳐져서 하나의 나무를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이 춤추는 무희에게서 춤과 무희를 구별할 수 없다고 표현한 것은 무희가 없으면 춤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춤을 출 때 무희는 영과 육을 하나로 일치시켜 그 어느 하나만을 구별하기 어려운 미학적 현상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중심적인 의미는 브룩스가 말한 것처럼 자연세계를 초월하고자 인간의 욕망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섞여 있는 인간 상황 그 자체-즉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 인 것의 요구들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끼어 있는 인간 상황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초등학교 어린이들 틈에서 」란 이 시는 비록 예이츠가 존재의 본질과 사물의 생성과정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움직이고 있는가를 과거에 대한 자신의 삶의 경험과 희랍신화에 대한 그의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에서 발견한 존재의 신비와 그 형성과정에 대한 원리를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문학적 상황에다 적용시켜 보면, 타산의 돌이 될 수 있겠다.

민족문학의 정립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근자에 와서 우리 문단의 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은 민족문학을 새롭게 창조하고 정립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많은 젊은 작가들은 치열한 리얼리즘의 기치아래 민족문학을 정립하고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처해있는 분단 현실과 압박을 받고 있는 노동자, 농민을 주제로 해서 글을 써야만 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그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경직되어 훌륭한 리얼리즘의 작품이라도 서정성이 짙거나 혹은 교조주의적이거나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약하면 그것은 역사성이 결여되었다고 해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그들의 이러한 비판은 문학이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반영시키면서 그 사회가 지닌 어두운 면을 고발하고 증언해야만 한다는 작가의식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예술은 도덕적인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작가와 시인들이 문학의 형식적인 본질과 질서를 부정하고 경직된 역사의식 때문에 분단문제와 계급의식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주제의 대상으로 제한한다면, 거기에도 적지 않는 문제가 있다. 문학은 사회의 어두운 면뿐만 아니라 밝은 면도 비추어 보일 수 있고, 또 사회에 대한 거울뿐만 아니라 인생과 자연에 대한 거울이 될 수 있다. 또 문학작품에는 눈에 보이는 도덕성과 눈에 보이지 않는 도덕성이 함께 수용되어 있다. 예술의 창조과정에서 소재를 선택하는 것도 일종의 도덕적 행위지만, 그것을 예술로서 변용 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한 형식과 서정성은 보이지 않는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른 예술형태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문학에 있어서 경직된 자세는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되지 못한다 만일 작가와 시인들이 이데올로기적인 목표만을 추구하는 경직된 자세를 보인다면, 그들은 어떤 추상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들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 대단히 경직된 자세로서 투철한 역사의식이 없으면 작가도 될 수 없고 시인도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 젊은 시인들의 태도는 오랫동안 우리 문단에서 점철되어 왔던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논쟁 및 싸움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하다. 우리가 이른바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갈등을 민족문학을 보다 나은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유파」간의 변증법적인 갈등이라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한계가 분명하지 않은 도덕적인 명제를 두고 문단이 두개의 「유파」혹은 그이상의 「유파」로 나누어져 심한 반목으로 일관하며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발전을 위한 종합 Synthesis이 아니라,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과도 같은 파행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하나의 「유파」는 다른 「유파」의 자세를 알게 모르게 동시에 공통적으로 흡수하고 있거나 수용하고 있다. 리얼리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른바 「미메시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이론과 거기에서 비롯된 역사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그것은 앞에서 예이츠의 시를 중심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원리이자 명제인 형식 form 내지 형식주의 formalism를 원시적인 차원에서 전제로 하고 있다. 또 문학사의 심층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리얼리즘은 낭만주의에서 잉태되어 나온 것이고, 또 그 역도 성립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역사의식을 가진 리얼리스트들이 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관념도 낭만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으며, 낭만주의에서 강조하고 있는 「자연」 역시 리얼리즘이 공유하고 있는 요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만일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같은 이상적인 현실이 없다면, 사물이나 혹은 개체는 그 스스로를 발전시킬 목표와 대상을 상실하게 된다. 또 역으로, 이상적인 현실은 그것을 실현시켜 줄 생명체나 개체의 삶이 없으면,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고역(苦役)은 영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육체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곳에서 꽃피거나 춤을 춘다」는 예이츠의 시 구절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유토피아」라는 추상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삶의 디테일을 외면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이고 비극일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추상적인 현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른바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주의주장도 좋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리석이나 청동의 조상(彫像)처럼 인간의 가슴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되며, 인간의 「정념과 경건함 그리고 애정이 알고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추상적인 유토피아만을 위해 삶의 아름다운 물결과 잔무늬, 그리고 음악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인간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유토피아에 도달하게 되면, 정말 인간이 행복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여기서 또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만일 더 이상 새로이 창조할 역사도 없고 그것을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되면, 비록 우리가 유토피아의 세계에 머문다 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권태로울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은 상태는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율리시즈가 귀향을 하는 길에 연꽃 열매를 먹고 모든 괴로움을 잊은 사람들 lotus-eaters이 사는 도원경과도 같은 섬에서 경험하는 권태로움이나 졸리움과도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아무튼 어느 하나의 「유파」의 주장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너무나 극단적으로 주장하게 되면, 그것이 경직하게 되어 생명력을 잃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다

식민지 시대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아일랜드에서 민족문학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려고 했던 예이츠는 「1916년 부활절」이라는 시에서 이데올로기와도 같은 한 가지 목적만을 끝까지 추구하면 반어적인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그 당시 아일랜드를 억압하고 있던 영국에 대항하다가 산화한 아일랜드의 시민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그들 개개인이 완고한 죽음을 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의 기대와는 달리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여름 저을 할 것 없이

한 가지 목적에만 매달린 사람들은

살아 흐르는 시냇물을 방해하는

돌에 매혹 당하는 것 같다.

길에서 벗어나서 오는 말과 기마수(騎馬手),

굴러가는 구름에서 구름으로 날으는 새들,

그들은 순간 순간으로 변한다

강물위에 비치는 구름의 그림자도

순간 순간으로 변한다 .

물가에 말발굽이 미끄러지면,

말은 그 속에서 물을 친다.

그곳에서 다리가 긴 쇠물닭은 물 속에 잠기고,

암컷은 수컷을 부른다.

순간 순간 변하면서 그것들은 산다.

너무 오랜 희생은

사람의 마음을 돌로 만들 수 있다.

아, 언제 그 목적이 달성될 것인가 ?

그것은 하늘의 역할, 우리의 역할은

마치 뛰어 놀던 아기의 팔다리에

마치 잠이 찾아왔을 때

엄마가 그 아이의 이름을 속삭이듯

이름 하나 하나를 읊조리는 것뿐이다.

……

……

예이츠는 이 시에서 「돌」로서 상징되고 있는 완고한 불변의 집념을 두고 그것이 아무리 고귀한 인간정신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의 흐름을 막는다면 개인과 사회에 불행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말한다. 예이츠가 정치 시처럼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강조한 것은 우리가 하늘만이 알고 있는 어떤 목적을 위해 지나친 희생을 하지 말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조화 속에서 사랑하자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문단에서 젊은 리얼리스트들이 모더니즘이 지니고 있던 「황무지적인 인생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은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사실 모더니즘은 낭만적인 오류와 하나인 자아의 유일성을 너무나 강조한 끝에, 소외의식, 허무의식, 미학적 귀족주의, 실존주의적 비인간화 및 예술의 비인간화, 그리고 파우스트적인 이데올로기를 지닌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그 결과 문학은 인간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로 될 가능성을 보이게끔 되어, 인간의 미래에 대해 밝은 빛을 제시해주기보다는 우울한 그림자만을 드리워서 모럴리티를 상실하는 위험을 보여 왔다.

그러나 오늘의 많은 젊은 한국 작가들은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가치와 자유를 배제할 정도로 공동체 의식을 너무나 강조한 끝에, 그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계급간의 갈등문제를 중점적으로 취급하게 되어 계층간의 위화감을 심각하게 유발시킴은 물론, 문학이 예술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사회학의 일부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경직된 면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모더니즘이 그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는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결함을 스스로 노출시키고 있지만, 그것이 지닌 미학(美學)과 예술적 비전은 신념의 공백상태에서 일어나는 혼돈의 세계에다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서, 플라톤이 말하는 절대적인 질서와 일치되는 형식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속하는 오늘의 젊은 작가들은 모더니즘이 지닌 여러 가지 결함을 단호하게 배제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지닌 좋은 점은 그대로 계승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차원의 문학사를 위한 문을 열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개인(혹은 자아)과 사회, 그리고 욕망과 행동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연결시킬 다리를 놓는 것이다. 여기서 다리의 기능을 말하면서, 솔 벨로우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진정한 의미의 형제애를 제시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벨로우가 여기서 말하는 형제애는 개체를 배제한 단순한 집단이나 혹은 명목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핏줄기로 연결된 생명의 신비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문단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모든 「유파」의 주의주장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나친 욕망을 버릴 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인간의 삶이 우주적인 것과 조화를 이를 때 다시금 새로워진다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른바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들과 참여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가 대치 상태에 있을 것이 아니라, 상대편을 자기 발전을 위한 촉매제로 사용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반영시켜주고 또 그것에 비전을 제시해주어야 할 문학공간에 처절하고 심각한 투쟁만이 있게 되면, 우리 독자들은 호흡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파열해 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긴장과 강박관념, 그리고 편집병적인 이기주의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켜 다시금 화합과 조화를 위한 마음자세를 갖도록 하는 웃음이다.

낭만주의와 리얼리즘

웃음은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서 희극과 비극의 언저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물과 함께 오는 것이다. 웃음과 눈물, 그것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리얼리즘과 낭만주의,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하나로 묶는 형제애와도 같은 조화의 신비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과 같이 경직된 우리 문단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진정한 눈물의 감동이 있는 비극과, 긴장과 갈등을 풀어주는 진정한 웃음이 있는 희극이다. 우리 문단의 주변을 돌아 보라. 인간이 지닌 존엄성의 위대함을 웅변적으로 증명해 줄 수 있는 비극과 참된 조화와 화합의 꽃을 피울 수 있는 훌륭한 희극작품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이데올로기 분쟁으로 희생된 원한의 얼굴과 기계문명으로 왜소하게 된 자들의 창백한 얼굴, 그리고 눈물이 없는 허위적인 웃음만을 웃는 저속한 희극배우들의 추하고 못생긴 얼굴들뿐이다.

우리는 못생기고 추한 얼굴을 한 하급 배우들이 결코 우리들을 기쁘게 하거나 감동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문학작품이 아무런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불쾌감이나 권태감만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존재 가치가 없는 낭비이다. 오늘날 많은 잡지를 통해 이른바 문제작을 발표한다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이렇다 할 새로운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판에 박힌 언어로써 꼭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수 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분단문학」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부한 이산가족의 아픔이 아니면 분단 현실의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 장치만 바꿔 놓고 재생산을 수 없이 거듭하고 있다. 그들은 낯설음의 발견이 예술의 중요한 본질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틀에 박힌 식상한 이야기를 기계처럼 되풀이해서 우리를 피곤하게 함은 물론 슬프게 까지 하고 있다. 그들의 작품에 비극미는 물론 인간적인 유머마저 빈곤한 것은 소재의 선택에서 자유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오늘날 우리 문단 풍토는 작가로 하여금 지극히 제한된 범위의 소재만을 선택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정말 분단 현실과 경직된 노동자 농민상 아니면 쓸 소재가 없을까. 훌륭한 작품은 소재를 자유로이 선택하고 그것을 상상력 속에서 융합하고 여과시켜 잉태되는 것이다. 경직된 교조주의나 리얼리즘의 기치아래 강요된 소재는 작품을 허위적인 것으로 만들어 예술이 아닌 프로퍼갠더로 전락시킨다.

우리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작품은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이 함께 하는 유기적인 작품이다. 문학작품이 기계적이 아니고 유기적이 되려면 형식에 속하는 영원한 본질문제와 변화과정을 함께 수용해야만 한다. 문학작품에 서정성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삶과 꿈 그리고 생명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품은 이데올로기의 선전물이 아니라, 삶의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시켜 주고 또 그것이 지닌 의미를 심층적으로 표출해 주는 것이다. 문학은 분노와 저주 그리고 복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박애와 진실 그리고 조화와 화합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문학은 궁극적인 이데올로기의 목표와는 먼 거리에 있는 삶 그 자체를 반영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우리 문단이 왜 이렇게 살벌하고 분노에 가득 차있는가를 반성해 보고 그것을 조화의 길로 인도할 방법이 없는 가를 다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