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시장의 형성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예술가
박정진 / 세계일보 문화부 차장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예술이 없는 인간생활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의 세련 정도는 다르지만-. 예술은 그만큼 인간생활의 불가분의 것이고 나아가 인간생활의 표현은 바로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생활」하면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끼기 일수다. 그러나 이 같은 생활과 예술의 분리는 인간의 본질을 너무 이분법 또는 한정적으로 규정하는 폐단에서 비롯된다. 또 예술(상품)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다른(다르다고 느끼는) 역사(인식)의 오류에서 기인한다.
수백·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 넘은 고고미술품이나 민속공예품의 독창적인 미나, 전통·민속공연(놀이)의 미를 새삼 확인하고 생활과 예술의 조화를 깨달으면서 우리는 이 같은 분리가 잘못된 사고방식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예술과 생활, 생활과 예술의 불가분리성을 체험하게 된다. 수렵채집사회나 농업사회에서는 예술과 생활이 자연스럽게 공존했으나 국가가 형성되고 직업의 분화 및 전문화와 함께-산업이 발달함에 따라-예술은 생활 속에 묻혀있기 보다는 일종의 전문직업집단(예술가)의 생산품(상품)으로 성격을 강화하게 된다.
그후 민속과 관련된 분야를 제외하고 일반 민중의 생활과 예술이 멀어지고 예술이 일부 지배·상류층의 독점물인 것처럼 다루어지던 오랜 기간을 거쳤지만 오늘날 고도산업사회는 그「대량 mass」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술의 생활화(대중화)가 재촉되고 있다.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동일하던 자급자족 시대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던 시대를 거쳐 이제 누구나 생산자와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예술의 자유와 평등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 셈이다. 예술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점차 높아져 가고있는 것은 현대의 추세이다.
따라서 예술시장의 생산과 소비-유통구조를 잘 정비하는 것은 균형 있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선진복지사회(국가)를 이룩하는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또한 예술의 사회적·계층적 독점과 예술가 집단의 정치 지향성, 예술 내용의 권위주의 청산도 불가피하리라고 본다.
문화산업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예술의 대중화 또는 대중예술의 급증은 예술적 상업주의라든가 그 나름의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특정의 형식, 기존의 사회적 권위에 종속되어 오던 예술에 자유분방함과 창의성, 실험성을 주고 시장의 개방과 예술적 표현의 자유로 인한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매우 양가적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대일수록 예술의 양과 질의 균형 잡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대중사회는 어쩌면 일부 계층에 봉사해 오던 예술이 본래의 생활과의 불가분리성을 또 다른 방법으로 회복하면서 특히 예술상품의 선택에 있어서 대중의 주체성을 되찾게 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의 예술은 전반적인 생활 속에 그 메커니즘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시장구조 속에서 공급과 수요를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이라는 상품도 (자유)시장법칙에 맡겨야 한다는 당위성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 예술시장이 정비되어 있을까. 사회생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혹시 예술시장이 뜻밖에 빈혈이나 고혈압, 동맥경화증, 아니면 간장질환, 당뇨병, 나아가 소화기, 순환기 계통 등에 병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한국 사회는 70∼80년대의 경제적 성공으로 일단생활의 양(기본 식량을 비롯하여 의·식·주)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 이제 그 질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으며 이 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선진국으로의 길도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사회 모든 부문에서 예술적 발상으로의 전환이 요청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배경으로 우리의 예술시장과 이 시장에서의 수요-공급, 여기에 참가하는 예술생산자(창조자)와 수요자(향수자)의 자원, 이들의 데뷔양상과 수용미학, 그리고 정책당국의 지원과 그 문제점을 예술인류학과 문화산업론(방송을 비롯한 이미지 매체들이 정보를 기존의 권위구조에 종속되도록 조작한다는 부정적인 입장이 아닌)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예술시장의 「수요-공급」
생산자
인간은 상징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곳곳은 상징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 인간은 인간관계에서도 상징을 가장 큰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근·현대의 한국 사회는 그 동안 너무 정치적 상징에 매달려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기본 생활 그 자체가 여러 원인에 의해 위협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점차 정치적 상징활동(운동)을 줄여 나가면서 생활 각 부문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단계에 들어서야만 하는, 예술적 상징활동을 늘려가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예컨대 옷 한 벌을 구입한다 해도 단순히 몸을 가리거나 추위와 더위라는 자연·물리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디자인의 옷을 어떤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서 선택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이는 대량생산 시대라 하더라도 고객들의 기호와 미적 감각을 충족시켜줄 다양한 상품이 공급되어야 하는 것과 통한다. 예술상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제 다원다층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시장의 수요-공급은 언제나 서로 피드백 관계에 있다. 따라서 예술시장의 문제는 편의상 어느 한 쪽(공급자)을 중심으로 서술해 들어간다 해도 다른 한 쪽(수요자)도 마찬가지로 연루되는 것이다.
먼저 우리의 공급자는 어떤가 ?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예술가는 제대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예술가 인구와 그 자질을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예술교양지 월간 「객석」('88년 4월호)은 「놀고 있는 음악 전문인력 얼마나 되나」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이 특집은 음악 전문인력을 길러내기 위해 막대한 돈과 개인적·국가적 에너지가 소요되는데 그들이 실업상태에 있음으로써 연간 8백억 원의 돈이 사장되고 있다는 충격 리포트였다. 이 특집은 전반적으로 음악 시장구조의 난맥상을 지적했다.
지난 87년 국내 음악대학 졸업자의 취업 현황을 보면 졸업자 3천 2백 92명(여자 2천 8백 30명) 중 39.1 퍼센트인 1천 2백 87명(여자 1천 77명)이 취업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통계자료는 실업을 문제삼고 있지만 역으로 적어도 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기본 인적 자원은 우리에게 충분함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음대 지원자는 해마다 늘어나 경쟁률이 치열해 진다고 한다(83년 1.6대 1, 85년 2.4대 1. 87년 3.5대 1).
이 같은 현상은 비단 음대뿐만 아니라 미대, 체대 무용과, 연극영화과 등의 기타 예능계열도 관계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예능계 대학졸업자의 과잉배출 현상은 예체능계를 별도로 취급하는 대입제도에서 기인하는 점도 없지 않다. 단순히 대학간판을 따기 위한 소질 없는 학생의 예능계 입문을 감안하면 기본 인적 자원이 충분하다는 위의 잠정적인 가정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여학생의 비율이 압도적인 것은 이 같은 염려를 더욱 설득력 있게 해준다. 조물주가 여자에게 예술적 소질을 특별히 더 주지 않은 이상-. 여자의 구성비가 남자를 압도하는 것은 우리의 예술 인적 자원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이 같은 숫자놀음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닭이 백 마리면 봉이 한 마리」라는 속담에 견주더라도 일단 예술가의 자원은 확보되었다고 보아도 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대학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고 나온 학생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에서 예술가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 중도하차 하게 된다. 결국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사회가 인정하는 「등용문」을 거치거나 「그룹」 활동을 통해 전문가의 자리를 굳히는 인원은 그야말로 몇이 안 된다.
지난 87년 말을 기준으로 예총 산하 회원수는 전국 14개 시·도, 10개 분과에 5만 1천 3백 21명(해외 및 명예회원 포함)이다.
대략 5만여 명이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예술가 인구도 많을 것이다. 예술시장을 따지는데는 예술가의 숫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들이 어떤 작품(상품)을 얼마나 창조하며 그 작품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수요자(향수자)에게 전달되고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가 이다.
작품의 질과 시장적 성공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베스트셀러가 곧 문학성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최다 관객동원이라고 해서 예술성이 자동적으로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베스트셀러나 최다 관객동원이 결코 상업주의에 편승한 저질로만 취급될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술의 생활화나 대중화를 전제로 할 때 시장적 성공이 우선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상품)도 시장구조나 커뮤니케이션 메커니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예술의 사회성(사회적 존재) 때문이다. 일단 예술상품은 대중(이때의 대중은 여러 계층으로 형성되어 있다)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사회에서는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작품이 형편없는 저질이라던가 훌륭한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는 우리가 우려하는 만큼 많지 않다. 대체로 인기의 이유는 나름대로 사회성과 관련된다. 비록 최악의 경우는 형편없는 작품이 인기를 누릴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어떤가. 작품(예술)을 위해서만 인간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대중사회는 기본적으로 열려진 사회이다. 열려진 사회는 비록 계층적으로 이루어져 있더라도 그것의 폐쇄성이 덜할 뿐만 아니라 계층의 이동성 mobility이 높고 또한 각 계층마다 적절한 예술상품(적당히 즐길 거리 )이 있기 마련이다. 또 그렇게 될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월수입이 적어서 예술을 즐길 여유가 없다」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이렇게 답하는 경우 대개 예술을 즐기는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드시 비싼 입장료를 주어야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대중사회에서는 대중과 대화를 할 수 없는 작품-시대를 앞선 것이든, 뒤떨어진 것이든-을 제작한 예술가가 대중의 감식안에 그 책임을 미를 수만은 없게 된다.
사실 우수한 작품은 전문적인 평론가에 의해서 인정받기도 하지만 대중의 무의식적인 감식에서 평가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쩌면 무의식이야말로 가장 본능적이면서도 집단적인 것이고, 집단적 전통과 가장 가까이 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도 예술가 개인의 창작활동이면서도 동시에 집단적(민족적) 형식-이것을 예술의 신화성이라 할 수 있다-의 산물로서 단지 역사적 현재로 개인을 통해 솟아오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중과 무언가 대화할 수 있는 예술작품, 그것은 때로는 센세이셔널리즘이나 값싼 상업주의의 범주에 드는 경우도 있지만 크게 볼 때 장기간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예술은 결코 전통과 단절된 상태로 존재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전통의 재창조인 경우가 많다. 대중이야말로 예술감상에서도 어리석지 않다. 대중은 예술을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이전에 생존가치 survival value로 지키고 있는 장본인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술작품은 「대중과의 대화」 또는 「전통의 재생산」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 ?
이는 물론 예술 장르마다 또는 예술가 개인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
이것을 가늠하는 상징적인 예로 가장 대중성이 높은 연극공연 실태를 살펴보자.
지난 86년 한 해 동안 공연되었던 연극작품 수는 총 4백 9편이었다. 이 중 창작극의 비율은 47.2 퍼센트, 번역극은 52.8 센트로 나타났다. 87년의 경우도 7백 20편 중 50 퍼센트인 3백 60편이 창작극이었다. 창작극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지만 50 퍼센트 또는 그 이상을 번역극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문화의 국제적 교류나 우리 문화의 국제성 획득을 위해, 또는 인간의 보편성에 바탕 하여 볼 때 번역극의 공연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딘가 수입상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번역극 공연에도 재해석 과정을 통해 주체적인 수용과 공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창작극보다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잘 평가해도 수입상품은 원천적인 한계성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한국적 정서를 한국적 미의식(형식)으로 표출하는 작품이 없이는 진정한 한국인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번역극이 압도하는 상황」, 이것은 비단 연극만의 것이 아니고 어쩌면 전 예술 장르에 확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외국문화의 번역이란 「문화적 근대화」에 비할 수 있는 것이고 근대화야말로 「사회적 번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극의 상황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외국의 수입상품은 그것을 설사 국내에서 2차 가공한 경우라도 종국에는 그러한 상품을 만들어낸 나라의 역사적 배경이나 기법에 종속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보편성의 문제 이전에 특수성의 문제이다.
더욱이 문제의식이나 발상법까지도 그들에게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성까지 내포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예술의 토착화나 생활화, 나아가서는 예술(상품)의 수요-공급이 원활히 되는 시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시장에서의 교환이란 적어도 가치에 대한 공감과 가격이 형성되어야 가능한 것인데 상품 자체에 대한 이해(가치평가)가 선행되지 않으니 대중적 교환이 어려울 것은 뻔하다. 기껏해야 일부 계층에서 불완전하거나 기형적인 상태로 교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필자가 연극계의 번역극 공연 압도를 예로 든 것은 연극계가 「대중과의 대화」나 「전통의 재생산」에 가장 불성실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연극의 대중성과 종합예술성 때문이다. 삶을 가장 종합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대중적 언어로 표출하는, 대중과 가장 가까운 연극이 예로 적절했기 때문이다.
연극은 오히려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대중과의 거리를 좁혔다고 필자는 본다.
예술작품의 전통과의 괴리, 외국예술 조류의 자기체질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엉거주춤한 상황-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예술적 미각에 맞는 음식물이 없어 허기진 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낮선 음식물의 과다섭취로 소화불량 상태에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예술작품들이 아직도 대중과 쉽게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은 대중의 수준이 낮아서라기보다는 작품 속에 우리의 목소리, 색깔, 체취가 부족한 탓이고 이 때문에 쉽게 작품에 대중이 접근하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적 예술양식의 완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우리 예술의 생활과의 괴리는 근대 예술(학문과 종교도 마찬가지이지만)이 서구에 크게 의존해왔고 이를 토착화하기보다는 이미 서구에서 만들어진 제품의 계속적인 수입 아니면 그것을 약간 변형한-심하게 말하면 흉내내기에 급급했던 것에 주된 원인이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술계의 비생산적인 파벌적 분위기도 그 한 원인이 되었다. 작품의 내용이나 작품경향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건전한 그룹활동이 아니라 특정인물을 중심으로 한 파벌은 작품 외적인 것에 예술가들을 신경 쓰게 만들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발전을 저해하기까지 했다는 관계자들의 주장도 있다. 이러한 파벌적 분위기는 젊은 예술가들의 「등용문」에까지 영향을 미쳐 참신한(주체적이고 대중적인) 작품의 출현을 방해해 왔다는 주장도 있다. 앞으로 창작과 판·구매활동(공급과 수요)이 보다 개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국내 예술시장의 구조개선이 크게 요청되고 있다
최근 몇 해 사이 문단에는 파벌적 분위기와 종래의 권위체계를 무너뜨리는 새 바람이 몰려오고 있다. 시장의 다변화와 함께 신춘문예나 문학잡지를 통해 등단해 오던 종래 등단방식이 출판사의 급증과 과감한 작가선택 및 출판으로 처음부터 저작으로 등단을 한 작가도 생겨나고 있다. 예년에 수십 년 걸리던 문단의 자리 매김을 불과 수년만에 달성하는 「무서운」 작가 시인도 적지 않다. 책을 통해 독자에게 직접 심판을 받는 시대도 멀지 않은 느낌이다.
이것은 새로운 예술시장의 메커니즘의 형성이나 재편성을 예고하는 지도 모른다. 이를 두고 문학작품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는 측도 없지 않으나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측도 적지 않다.
출판사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작가들을 발굴·육성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출판사 사단」으로 표현되는 이 같은 상황은 출판사들이 시장구조를 바꿔놓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최근 국내 20여 군데의 출판사가 수십 종씩의 시집을 연속적으로 펴내 「시집의 시대」를 구가한 것도 같은 예이다.
등단 후 몇십 년만에 처녀시집이나 창작집을 내기 위해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고 다니던 시대는 이제 옛말이 됐다. 베스트셀러의 상당수가 문단에서의 경력이나 위치와는 상관없이 젊은 기성작가나 신인들에 의해 점령되는 것은 「출판등용시대」를 상징하고도 남는다. 아마도 다른 예술 장르에도 이와 유사한 새로운 시장구조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는 적지 않다. 우리도 문화산업 시대에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86년 말 현재 전국의 출판사는 2천 6백 35개소에 이르며 한해 동안 총 도서발행종수는 2만 2천 1백 32종(초판)으로 이중 문학도서는 4천 2백 19종(초판). 장르별로 보면 시 4백 97, 희곡 32, 소설 2천 9백 36, 수필 3백 44, 평론 1백 84, 기타 2백 26종이다.
문학의 경우 초판과 중판을 합치면 10년간 약 2배 이상(77년 3천 4백 21종, 86년 7천 2백 13종) 발행종수가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얼마나 문학출판시장이 확대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평균 발행부수면에서도 문학은 지난 77년 2천 50부이던 것이 86년에는 2천 1백 6부로 늘었으며 타 분야를 월등히 앞서고 있다(타 분야는 대개 2천부미만). 평균 가격면에서도 지난 77년에 1천 26원이던 것이 86년에는 2천 8백 50원으로 물가상승을 감안하더라도 크게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출판사들의 좋은 작가 발굴 경쟁은 사운을 걸 정도로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다. 작품이 되기도 전에 취재비 등 각종 명목의 선도금을 주거나 집필실을 제공하는 한편 아예 작품과 관계없이 월정 생활비를 대주는 경우도 있다. 또 작가들은 계약 당시 출판뿐만 아니라 광고도 조건으로 내걸고 있을 정도이다.
이와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대중예술인 가요계에는 젊은 신인가수들이 특정 작곡가의 사사나 레코드 회사와의 계약 등의 과정을 생략하고 자비출판하거나 직접 대학 주변이나 밤무대에서 고객들과 만나면서 대중(주로 젊은층이긴 하지만)에게 직접 심판을 받는 광경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이 결코 실력이나 내용면에서 기성과 비교해 볼 때 만만치 않으며 오히려 기성을 뺨치는 감각과 소양을 쌓은 경우도 많다고 한다. 산업사회가 아니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산업사회는 어쩌면 직업으로서의 예술을 먼저 요구하고 성급하게 설익은 예술을 시장으로 끌어내는 생리를 가졌는지 모른다. 이 때문에 예술성보다는 상업성이 우선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산업사회의 메커니즘은 생산자와 수요자를 빠르고 다양하게, 그것도 대량으로 연결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새로운 예술시장의 중개(촉매 )자나 후원자를 형성하고 또한 문화촉매운동도 펼치고 있다.
매니지먼트, 임프레사리오와 커미셔너, 프래너 등의 등장은 그 좋은 예이다.
소비자
작품을 생산하는 예술가의 맞은편에 있는 존재가 예술시장에서 작품을 만나는 수요자(일반대중)이다. 이들의 예술감상 태도와 훈련, 크게는 이들의 수용미학도 예술시장 구조개선에 큰 몫을 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 있어도 독자나 관객의 외면을 받는다면 제 빛을 발하기 어렵고 시장구조에 한 변수로 큰 작용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일반의 예술감상 태도와 수준은 어떤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회관의 지난 12년간 관람객 증감과 유료 관람객 비율 등을 토대로 일반의 예술감상 태도 등과 예술의 생활화 정도 등을 살펴보자.
문예회관은 지난 74년 7월 개관하여 81년 4월, 서울 종로구 동숭동 현재 자리로 이전한 공연예술의 종합발표공간이다.
지난 75년부터 86년까지 관람객 총수는2백만 6천 57명으로 집계됐다. 개관 첫 해에는 8만 6천 4백 61명이던 것이 해마다 증가추세를 보여 86년에는 22만 7천 24명으로 12년 사이 약 3배 가량 늘어났다. 이를 유료 관람객과 초대 관람객으로 나누어보면 유료 관람객이 1백 6만 9천 9백 98명, 초대 관람객이 64만 6천 4백 5명으로 약 60 퍼센트 대 40퍼센트(6대 4)의 비율을 보였다.
초대 관람객이 이처럼 많았다는 사실은 공연예술의 시장규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이들 공연이 대중의 생활 속에 침투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아직도 일부 계층에 의해 관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더욱이 가장 최근인 지난 86년의 관람객 실태를 보면 유료 관람객이 12만 3천 6백 46명, 초대 관람객이 10만 3천 3백 78명으로 전년도보다 유료 관람객이 5천여 명(85 유료관람객 12만 8천 5백 97명)이 줄어든 반면 초대 관람객은 1만 4천여 명(85년 초대관람객 8만 9천 3백 44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초대관람 위주의 종래 관람 패턴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연도별 유료 관람객 증가율은 평균 4.4 퍼센트인데 반해 초대관람객 증가율은 19.6 퍼센트인 것도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 4년간(83년∼86년) 공연예술 각 분야별 관객 구분을 보면 연극은 유료 대 초대가 60.8 퍼센트 대 39.2 퍼센트, 무용은 61.8 퍼센트 대 38.2 퍼센트, 음악은 33.9 퍼센트 대 66.1 퍼센트, 전통(공연예술)은 34.7 퍼센트 대 65.36 퍼센트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볼 때 연극과 무용은 대체로 유료와 초대가 6대 4의 비율을 보이고 있으나 음악과 전통은 역으로 4대 6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상에서 연극과 무용은 그래도 입장료를 주고 적극적으로 보고자 하는 관람객이 음악이나 전통(공연예술)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만큼 대중과의 접촉(친밀도)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음악과 전통은 아직도 자유시장 법칙에 맡겨둘 수 있을 만큼 뿌리를 내리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전통(공연예술)의 이 같은 취약한 시장구조는 그 내용들이 역사적으로 내려온 우리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위에서 지적된 예술 창조자들의 수입의존이나 주체성의 결여와 똑같은 비중으로 반성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 대중들도 자신의 민족예술과 그 전통에 대한 자각이 미진한 상태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로 미루어 전반적으로 수요(소비)-공급(생산), 양쪽에 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미술의 경우도 87년 한 해 동안 전국의 총 행사(전시회)는 2천 5백 5회로 이중 서양화가 6백 88회(27.5 퍼센트), 한국화가 3백 74회(15.0 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밖에 공예 2백 73회(10 퍼센트), 서예 2백 5회(9.0 퍼센트), 사진 1백 86회(7.4 퍼센트), 조각 1백 49회(5.9 퍼센트), 판화 45회(1.8 퍼센트), 건축 10회(0.4 퍼센트)로 나타났으며 종합전시회는 5백 75회(23.0 퍼센트)였다.
이 같은 행사는 숫자적으로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행사를 통해서 많은 작품들이 고객의 손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미술의 경우도 지난 83년의 총 행사 9백 53회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으로 작가와 고객이 만나는 회수가 해마다 급증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일부 미술관이나 화랑에 따르면 전시회장에서 작품의 거래는 여전히 작품내용보다는 작가의 이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일부 수집가의 손에 머물러 대중화의 단계는 아니라고 한다. 물론 「어느 작가는 호당 얼마」라는 가격설정이 비합리적이지만 실지로 호당가를 대신할 마땅한 대안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 시장구조의 개선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고 한다. 작품 당 가격설정과 함께 이름에 구애되지 않는 풍토의 마련이 서서히 정착되어야 할 때도 되었다고 뜻 있는 관계자들은 말한다. 대중(일반 수요자)의 수준이 올라가면 작품의 수준과 시장구조도 달라질 것이라고 역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공연예술과 같은 시간종속예술-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고 감상자가 공연시간 만큼의 시간을 바쳐야 하는-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미술이나 문학과 같은 비시간종속예술은 특히 수요자들의 수용미학이 더욱 요구되는 분야이다.
미술품과 같이 고객들이 얼마든지 장시간 감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일수록 감식훈련과 나름대로의 미학(미적 기준)이 없으면 결국 작가들의 이름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있게 자기가 좋아하는 미술품(문학작품)을 구입하고 가정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고객들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이 생활 속의 예술을 정착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미술의 경우도 앞에서 얘기한 문학과 마찬가지로 국전 출신이나 특정 대학 출신이 아니면 빛을 보지 못하는 파벌적 풍토의 불식이 미술시장 구조개선의 선결 과제이다. 소비라는 측면에서도-.
미술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체질개선을 주장하고 있고 또한 아직도 그 힘이 미약하긴 하지만 젊은 미술학도들에 의해 어느 정도 본격화되고 있기도 하다 .
한편 지난 87년 한 해 동안 음악분야의 총 행사는 1천 9백 59건으로, 기악이 7백 96회(40.6 퍼센트), 성악 4백 72회(24.1 퍼센트), 국악 3백 41회(17.4 퍼센트), 작곡 56회(2.9 퍼센트), 오페라 27회(1.4 퍼센트)이며 종합행사가 2백 67회(13.6 퍼센트)였다.
이는 지난 87년의 총 행사 6백 72회에 비해 약 3배에 달하는 양적 팽창을 말해주고 있다.
연극의 경우도 지난 87년 한해 동안 7백 20회의 공연을 가졌으며 이는 지난 83년의 2백 83회에 비해 크게 신장된 것이다. 미술·음악·연극 등의 행사건수는 대체로 80년대 들어 2∼3배의 성장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예술시장도 이제 그 규모가 급속히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예능계 대학 출신자들에게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요창출을 하는 것도 잠정적이긴 하지만 예술시장을 질적으로 높이고 선도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서울과 지방의 심각한 격차
예술행사의 양적 팽창이 전국민의 생활 속의 예술의 정착을 나타내는 지수가 될 수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중앙)과 지방간의 극심한 격차, 다시 말하면 예술행사의 서울 편중 현상은 그 파행성을 잘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 미술, 연극 등 세 분야의 서울 대 지방의 행사건수를 87년을 기준으로 비교해 보자.
음악부문은 1천 9백 59건 중 51.8 퍼센트인 1천 14건이 서울에서 치러졌으며 부산이 2백 4건(10.4 퍼센트), 대구가 1백 87건(9.6 퍼센트), 광주가 1백 12건(5.7 퍼센트), 인천이 39건(2.0 퍼센트)으로 5개 특별·직할시를 합치면 총 1천 5백 56건으로 전체의 79.5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머지 시·도에서는 활동이 거의 미미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문화공간이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고 음악인들의 주활동무대가 대도시에 한정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미술부문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나타났다. 87년 한 해 동안 2천 5백 5건의 행사 중 59.1 퍼센트인 1천 4백 81건이 서울에서 치러져 서울 집중도가 더욱 심함을 보였는데 부산·대구·광주·인천 등 4개 직할시의 전시회 총 수도 4백 78회(19 퍼센트)에 불과했다.
연극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87년 한 해 동안 공연된 총 7백 20건 중 약 50 퍼센트인 3백 67건이 서울에서 공연됐다.
지방에서의 문화공간의 확충과 예술행사에 대한 지방민들의 참여가 없이는 전국가적으로 예술의 생활화, 생활 속의 예술, 예술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문화국민으로의 길은 요원함을 알 수 있다
신구전문대학 민속문화연구소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용역을 받아 펴낸 「지역문화예술활동 사례조사보고」(86년)는 경제에 종속된 문화의 중앙집중현상이 지역간의 균형발전을 와해시키고 관주도의 문화행정에 흡수되어 가고 있는 사정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지역사회가 소외감과 비참여, 심성적 단절, 분절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문화정책의 소극성과 무분별한 외래문화 수용으로 뿌리와 색깔이 모호한 모습의 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문화예술인과 시설의 60 퍼센트 가량이, 예술행사의 70퍼센트 이상이 서울(중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 지역문화의 문화촉매운동을 전개하지 않고는 이 같은 지역간 예술생산 및 수요활동의 불균형을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문화관계자들의 전망이다.
신문과 방송의 보다 많은 증설과 자유경쟁은 물론 잡지 등의 기타 정기간행물의 활성화가 특히 지방에서 이루어지고 기타 문화시설의 지방확충이 전제되어야 한다.
각 지방에서는 현재 문화원(87년 말 현재 전국 1백 55개소)과 커뮤니티 시설(87년 말 현재 전국 1백 13개소)이 문화공간의 중추가 되고 있으며 지방소재 박물관은 국공립·사설·대학박물관을 합쳐 총 65개에 그치고 있다. 전통예능의 전수시설은 11개소. 국악원은 7개소에 불과하다
또 공연시설은 종합·일반·대학 소공연장을 합쳐 57개소에 불과하며 전시시설은 미술관과 화랑을 합쳐 74개소로 집계되고 있다. ((표1) 참조)
(표1 지방문화공간시설 현황)
시도 시설 |
박물관 |
전수시설 |
국악원 |
공연시설 |
전시시설 |
커뮤니티시설 |
문화원 |
부산 |
8 |
2 |
|
7 |
13 |
1 |
|
대구 |
5 |
|
|
9 |
11 |
1 |
|
인천 |
2 |
1 |
|
3 |
7 |
1 |
|
경기 |
1 |
1 |
|
3 |
6 |
15 |
23 |
강원 |
5 |
|
|
3 |
4 |
17 |
18 |
충북 |
5 |
1 |
|
2 |
2 |
6 |
10 |
충남 |
6 |
|
2 |
5 |
5 |
7 |
17 |
전북 |
6 |
|
2 |
3 |
3 |
13 |
11 |
전남 |
7 |
1 |
3 |
9 |
10 |
17 |
28 |
경북 |
7 |
|
|
3 |
1 |
16 |
28 |
경남 |
8 |
5 |
|
6 |
8 |
16 |
30 |
제주 |
4 |
|
|
2 |
4 |
3 |
|
계 |
65 |
11 |
7 |
57 |
74 |
113 |
115 |
현재 전국 각 지방은 문화공간의 절대부족 속에 문화·예술의 불모지에 가까운 실정이다. 양적으로 볼 때도 빈약하지만 그나마도 수준 이하의 시설이 주류를 이루고 수만 채운 것이 많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지방이 예술활동에서 소외되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계층간의 문화예술활동의 불균형보다는 훨씬 더 지역간의 불균형이 문제가 된다.
지금까지 예술가 지망의 인적자원은 급증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서 전문예술인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는 기회가 적다는 것, 이것은 예술시장이 화대 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주체적이고 전통적인 예술작품의 부족으로 생산자와 수요자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못한 점에 기인한다는 것이 지적됐다. 이때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비단 물질적·가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비가시적인 것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생산자와 소비자, 양측에 다 과실이 있으며 생산자는 보다 민족성(특수성)과 국제성(보편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작품을 내놓도록 노력하여야 하고 수용자도 자신의 수용미학을 길러 스스로 예술상품의 진가를 판단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지도록 훈련되어야한다는 점이 거론됐다.
이와 함께 산업·대중사회는 불가피하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다원생산과 다원소비 )를 재촉하는데 문화예술상품도 예외는 아니어서 종래의 「등용문」이나 「파벌」을 둘러싼 권위가 일부에서 무너지고 새로운 시장구조가 형성됨에 따라 이에 대한 적응이 생산·수요자 양쪽에서 가속화될 것이란 점이 지적됐다. 아마도 작품을 통해 대중과의 대화를 원활히 하는 예술가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대중에게 아부하는 예술가가 살아남는다는 말이 아니다. 대중은 더 이상 무지하고 소극적인, 무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끝으로 지적된 것이 서울(중앙)과 지방간의 격차를 줄이지 않고서는 예술의 생활화, 생활 속의 예술이 전제되는 선진사회로의 길이 순탄치 않다는 사실이 지적됐다. 지방은 문화공간 자체가 절대부족으로 예술상품이 놓이는 장소 자체가 구비되지 않아 원천적으로 예술에서 소외되어 있다.
우리의 예술시장은 한마디로 수급은 원활하지 않지만 70∼80년대의 경제적 성공에 따른 소득의 증대로 예술상품에 대한 수요욕구는 급증하고 있으나 이러한 시장 재편성의 과도기적 부산물로 예술상품의 계층독점·지역독점이라는 병리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국가성과 국제성의 마찰과 갈등이 예술생산자와 수요자 사이에 공통적인 현상이다. 특히 일반 수요자의 경우 자신의 소득과 사회적 지위에 알맞은 예술상품의 구입에 혼란을 겪고 있다. 급속한 사회발전(문화변동)과 계층이동 때문이다
아마도 '88 서울올림픽은 우리 문화를 재정비하고 문화 항목을 정리하는 한편 민족문화예술의 상품화와 그것의 국제성 획득, 그리고 민족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적 자각을 동시에 실험하고 실현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올림픽 후 국내외 문화예술상품의 가치와 이에 대한 적당한 가격을 매기는 능력이 우리 국민에게 더욱 배양되리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