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회화의 모더니티
-57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와 이념을 중심으로
서성록 / 미술평론가
요즈음 한국 현대미술의 근원을 묻는 작업이 몇 차례 걸쳐서 펼쳐져 자못 흥미를 자아내게 하고있다. 금년 초 워커힐미술관에서 기획한 「현대회화 '70년대의 흐름전」(2. 20∼ 3. 31), 조선일보사 미술관 개관에 즈음하여 개최된 「현대작가초대전(4. 15∼5. 25), 역시 무역센터 현대미술관의 개관기념행사로 열린 「한국 미술의 모더니즘전」(9. 29∼10. 20) 등이 그 예이다. 「현대회화 '70년대의 흐름전」은 말 그대로 70년대 미술 전반의 현대회화의 추이와 경향, 그리고 70년대의 우리 화가들이 세계미술의 물결에 어떻게 대응해갔는지를 재확인하는 전시회였고, 조선일보사 미술관 개관 기념전은 57년 한국 현대미술의 선봉에 섰던 「전위미술가들」(지금 이런 말은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의 척박한 미술상황에 비추어 현대성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펼친 화가들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경우에 지나치지 않으리라 된다)을 초청해 미술동향을 가늠하려 했던 「현대작가초대미술전」의 작가들을 다시 초청해 그간에 변모된 이들의 작품내용과, 이와 함께 이들이 국내 미술에 끼친 영향을 고려하며 단편적이긴 하지만 우리 미술의 역사적 변천을 짚어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열린 「한국 미술의 모더니즘전」은 시기를 70년∼79년까지로 제한하여 이 기간에 일어난 미술적 특질 및 흐름을 조망케 해주는 알찬 기회가 되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전시회는, 물론 그 시기를 한정짓는 입장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점검해보자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술의 질적 수준 향상과 심화에 기여를 한 미술의 정체는 무엇이고, 나아가 그 본질 및 그것이 내포하는 이념은 무엇인가를 묻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한국 모더니즘의 특질
70년대 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50년대 말부터 표출되기 시작한 소위 앙포르멜운동이 우리에게는 이례적으로 추상미술이라는 것을 소개하였고, 그것이 한동안 국내화단을 지배하다가 70년대 들어와 A·G 그룹의 탄생과 함께 한국 미술은 다양한 양식과 이념에 다가서기 시작한다. 환경예술, 해프닝 및 이벤트, 인스탈레이션, 미니멀 아트, 비디오 아트 등이 선보이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러한 다양성의 징후는 이미 나타난 바 있다. 68년 제12회 「현대작가미술전」(조선일보사 주최)의 전시 평에서, 이경성(李慶成) 선생은 이 전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오프 아트」 및 「하드에지의 등장이다」라고 지적한 적이 있거니와 60년 이후 국내화단은 팝 아트, 다다류의 실험미술 등을 수용하여 방향타진의 문을 두드렸다.
이러한 의욕적인 서구미술의 수용과 함께 1955년 이후 계속된 화가들의 해외진출(남관, 김환기, 이성자)과 국제전 참가(파리 비엔날레 61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63년)는 한국 미술을 좀더 국제적 반경으로 넓히고 해외에서 새로운 자극에 감응 받는데 커다란 구실을 했다. 미술의 현대성 확보, 그리고 국제화에의 열기는 62년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주최한 「문화자유초대전」 개최 요지에 잘 나타나 있다.
문화자유초대전은 혁신적인 현대미술의 세계적 양상과 호흡을 같이하며 창조적인 이념을 발판으로 한국 미술문화의 발전을 꾀하고 국제교류를 적극 추진하여 지방주의에서 벗어나 전통과 영향의 상호작용을 평가하는 동시에 조형미술의 자유로운 문화적 참여를 실현하기 위하여‥‥‥(중략)
같은 해 「현대작가미술전」에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담긴 선언을 발견할 수 있다 「문화자유초대전」이 소수의 작가를 정선, 응집된 추상미술의 성격을 보여주려 했던 데 비해 이 전시는 이른바 「아방가르드」 미술에 초점을 맞추어 작가선정을 하면서 전시회의 현대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우리 민족문화의 현대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조류와 호흡을 같이하는 일이 시급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본사는 이러한 이념과 정신 밑에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계에서 현대미술의 가장 첨단을 걷고 있는 미술 부문의 전위화가들의 활동무대를 마련하여 언제나 새로움을 창조하는 이 예술들을 도와 세계미술에 이르는 길을 닦고자 현대작가미술전을 마련한지 금년 들어 어언 6회를 거듭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현대작가미술전은 이 나라 현대미술계의 일대 르네상스를 마련하여 한국 미술로 하여금 세계 미술의 가장 첨단적인 사조의 전위적 대열에 서도록 꾸준한 노력과 전진을 거듭하고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발표문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우리 미술 초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대두된 것은 「전위미술에의 갈증」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미술계에의 도약」이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62년 창립전을 가진 신상회(新像會) 는 「국제적인 진출」을 그룹의 성격으로 표방하는가 하면 뒤이어 출현한 창작미술협회, 신조형파, 60년 미술협회, 앙가쥬망, 악튀엘, 오리진, 무동인회 등도 미술양식 및 그 성원은 달리 하지만 새로운 미술의 탐색과 그에 따른 세계화 추세의 조응에 주력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한동안의 혼란에 잇대어진 갇혀진 상황을 서서히 벗어나면서 국제화에로의 도약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열려진 상황은 외부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스타일의 범람을 일으키고, 그것에 대응하는 자주적 미술의 역량이 부족한 무렵이었으므로 무비판적인 서구미술의 수용이라는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베껴 그리기」, 「흉내내기」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논리귀착이라 할 수 있으며, 누구나가 졸지에 추상화가가 되어 활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풍토에서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가 「맹목적인 외래 양식의 수용과 재빠른 국제화의 논리가 반성되기 시작한 것은 추상미술의 포화상태를 거치면서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체로 그 시기는 A·G 그룹이 출현하고 일련의 현대미술제, 즉 앙데팡당전, 에콜드 서울전, 한국현대회화제 등이 확산되던 70년대 초반에 해당된다. 두서없는 미술활동 내지는 구호의 남발, 무분별한 경향의 수입, 각종 미술이념의 속출과 혼재 현상은 서서히 감소되어 가면서 선별적 수용이 가해지고 예술이념의 논리화가 진행되고 한편으로는 각종 그룹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 미술활동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의 이념을 내걸고 이 땅에 모더니티라는 씨앗을 뿌린 모임이 나타났다. 69년에 창립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곽훈, 김차섭, 김구림,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이승조, 최명영, 하종현, 평론가 이일, 오광수)는 종래의 그룹체제를 지양하고 전위적 구심체로서의 기능에 중점을 두면서 「확장과 환원의 역학」(70년), 「현실과 실현」(71년), 「탈·관념의 세계」(72년) 등의 일련의 테마전의 개최를 통하여 전위미술에의 의식을 전제로 이념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하려는 의욕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약칭 A·G가 표방한 문제의식과 그룹의 성격은 「확장파 환원의 역학전」(70년 5. 1∼7, 중앙공보관)의 카탈로그에 붙여진 비평가 김인환(金仁煥), 오광수(吳光洙), 이일(李逸) 세 명에 의한 서문에서 엿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부터 우리 일상생활의 연장선에서 벌어지는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또는 가장 근원적이며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관념의 응고물로서의 물체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미술은 일찍이 없었던 극한적인 진폭을 겪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제 미술 행위는 미술 그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으로써 온갖 허식을 내던진다. 가장 원초적인 상태의 예술의 의미는 그것이 「예술」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생의 확인이라는 데에 있었다. 오늘날 미술은 그 원초의 의미를 지향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예술은 가장 근원적이며 단일적인 상태로 수렴되면서 동시에 과학문명의 복잡다기한 세포 속에 침투하며, 또는 생경한 물질로 치환되며, 또는 순수한 관념 속에서 무상의 행위로 확장된다. 이제 예술은 예술이기를 그친 것일까 ?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 어떤 의미에서건 「반=예술」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 나 예술의 이름 아래서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그것은 바로 이 영점에 돌아온 예술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과하는 데 있는 젓이다.
서문이긴 하지만, 글의 내용상 무슨 선언문과 흡사한 느낌마저 가지게 한다. 예술의 의미를 「생의 확인」이라고 천명하는 점이나 예술의 과제를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부과하는 데」두는 점은 단호하고 직선적인 표현으로 인해 회화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분명한 궤도를 설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실상 당시의 출품작을 보면, 그 방향을 찾기 위한 전단계로서의 대담한 실험정신이 깔려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하종현, 최명영, 이승택, 심문섭 등은 야심만만한 커다란 스케일의 입체작품 내지는 설치작품을 위한 에스키스를 각각 내놓았고, 김구림, 김차섭은 환경작업을, 그리고 서승원과 신학철, 이승조, 김한 등은 각각 유형은 달리 하면서도 평면에서의 현존성 획득을 줄기차게 모색하였다. 70년대 미술의 출발은 A·G전을 기화로 열성적이면서도 자신에 찬 또 도전적인 30대와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현대미술의 이론화 및 예술개념의 정립을 도모하고 추진하는 몇몇 야심만만한 비평가들이 공동보조를 취함으로써 커다란 변혁을 예고하는 현대미술의 중심집단으로 점차 인식되어 갔다. 75년 제4회전이 있기까지 그룹의 이론지침이 되어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 현대회화의 방향을 제시해 준 잡지 「AG」 및 전시회의 서문은 새로운 탄생을 노리던 당시의 엘리트 집단이 「어떤 정신」을 갈구하였는가의 파악에 유용하며, 나아가 그것은 우리 미술의 전환기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요약한 귀중한 텍스트로서도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다.
AG 그룹의 공동작업과 예술에의 진지하고 탐구적인 이론적 타당성의 탐색과 검증에 뒤이어 비슷한 「학구적인」 그룹이 탄생했다. 이건용, 박원준, 김문자, 한정문, 여운 등에 의해 1971년 발기된 ST 미술학회가 그것이다. 이 모임은 1977년까지 여섯 차례의 전람회 및 수차에 걸친 세미나, 그룹 토론 등을 분주하게, 활력적으로 개최함으로써 입체, 퍼포먼스 그리고 개념예술의 도입과 그 전개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ST는 AG 그룹에 의해 발화된 실험정신을 한층 확산시키면서 70년대 초 화단의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고, 인간과 물질의 왕복운동, 작품과 환경의 상관관계, 행위와 사고의 일체감 조성 등과 같은 물음들을 대담한 작품들을 통하여 제기함으로써 종래의 회화에 대한 범주 및 그것을 지배하는 생각들의 제고를 요청하게 만들었던 듯이 보인다. 우리가 개념예술 및 이벤트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이다. 이러한 미술을 통해 나타내려고 한 바와 작가 자신의 투철한 방법론 획득, 그리고 과연 이러한 미술이 필요했는가 하는 의문, 마지막으로 그것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냉철한 평가의 문제를 논해야겠지만, ST에 의해 주도된 미술의 방법은 어떻게 보면 지나친 제스처 및 개념성에의 일방적 집착으로 공감 받기 어려운 한계를 안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단지 한 시대를 통한 주요 미술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 실정에 맞게 스타일을 분절, 소화시키는 문제와 거기에 따르는 접근의 시각이 다소 미약했던 이유가 미술의 맥을 단절시킨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70년대 미술의 흐름
70년대 미술은 AG와 ST에 의해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타당하다. 이제까지의 흐름과는 달리 AG와 ST가 출범하면서부터 다양한 미술의 도입과 그에 따른 자기적 방법의 천착이 충분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우리 미술은 여전히 일정 유파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며 「국제화의 물결」을 다만 경제나 산업에서의 현대화처럼 양적 수준의 향상으로만 이해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들의 활동이야 어떻든, 70년대에 들어와 한국 현대미술은 양식적·이념적 뼈대를 갖추고 비로소 「한국 현대미술」이라 부를 만한 회화구조를 탄생시키게 된다. 한 마디로 그간 추구해오던 「국제화에로의 도약」이라는 과제에서 어떤 결실을 얻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이 무렵 미술이 자체적 언어로 모양을 갖추고 나름대로의 방향 좌표, 성격을 설정했음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 과정을 집약해서 말하면, 초기에는 탈앙포르멜을 숙제로 내걸다가 중간에는 이러한 목표가 「한국적 미니멀 아트」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얼마 후 이 미술은 다시금 주체적 미술을 타진하는 전기를 마련하기에 이른 셈이다.
그러나 「한국적 미니멀 아트」의 탄생이 불행히도 우리 자신의 눈과 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일본에서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주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은 미술평론가 이일 씨의 글에서 확인된 바 있다
한국의 이 「제 3기 추상」(국내의 미니멀 아트를 지칭 )이 각별한 주목을 받은 것은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이다 1975년 동경화랑에서의 「5인의 화가·다섯 가지의 횐색전」을 시발점으로 하여, 2년 후인 '77년에는 동경의 센트랄 뮤지움에서의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을 계기로 우리의 추상회화는 같은 극동권의 미술과에 하나의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들에게는 한국에서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추상회화의 물결이 미니멀 아트가 제기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보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한국 고유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비추어진 것이다.
한국의 미니멀 아트가 일본에서 인정을 받고 극동권 미술의 주역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이 미술양식은 진원지 자체가 미국이고 그래서 서구 미니멀 아트에서 유래된 것이고 국제적 흐름에 동승한 「국적 없는 미술이 아니냐」는 호된 비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의 미니멀 아트가 언젠가는 해결해야 될 숙명적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미니멀 아트가 무엇이길래 이러한 비난과 문제해결의 필요성을 한 몸에 지니게 됐을까 ? 그것은 과연 미국의 미니멀리즘과 한치 다를 바 없는 미술일까 ? 이 물음을 푸는 열쇠는 미니멀 아트의 개념 자체에 있다고 보아진다.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미니멀 아트는 서구 합리주의가 취해온 정신의 결정물인 동시에 사회적 부정정신의 한 유형이다. 전자의 경우, 과학정신에 바탕 한 현대미술은 기계적 표현과 사물의 가장 근본적 형태연구의 귀결로 네모꼴을 택하게 된 것이 그 배경을 이루게 된다. 가장 적은 것이 가장 큰 것이라는 미에스 반 로헤 Mies Van Rohe의 명언처럼, 미니멀 아트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및 세잔느의 조형원리에 입각하여 사물의 근본형식에 대한 질의 및 확인을 계속했다. 말하자면 형태에로의 환원, 물질성에로의 환원 그리고 회화에로의 환원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적절한 본보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최종 지점은 정당성 여부야 어쨌든 회화언어의 절대성 보장, 비(非)휴머니즘의 두든, 객관적 보편주의의 만연으로 모아졌던 것이다.
서구 미니멀 아트가 이러한 예술적 및 정신적 배경 아래 태동되고 전개되었음에 반해 우리의 미니멀 아트는 애초부터 필연성을 갖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확히 70년대의 그것을 「미니멀 아트」라고 부르기 힘든 속사정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한국의 70년대 미술은 한마디로「유사 미니멀 아트」라 일컬을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으며, 따라서 미니멀 아트라는 말 앞에 「한국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미술을 적어도 한국 현대미술의 개념 규정에 있어 결정적 계기로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적」이라는 말의 뚜렷한 풀이가 부수되어야 하리라 본다. 도대체 어떤 구석이 「한국적」인가 하는 성질규명이 있어야할 것이다.
미니멀 아트의 개념
앞에서 말했듯이 서구 미니멀 아트는 과학적 합리주의의 소산이다. 모든 사물을 분석·해명하고 그것의 원래 속성 및 원리를 검증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수준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 뒤따른 하나의 중요한 접근의 태도가 「환원주의」였던 셈이다. 그리하면 환경은 물질로, 형태는 기본요소로, 현상적 사실은 관념적 구조로 각각 환원되고 축소되고 귀납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인지 모른다. 미니멀 아트에서의 단일색조, 이른바 모노톤의 추구와 형식적 「엄숙주의」의 보편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됨직한 사항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 우리 미술에서도 빚어진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일까 ? 한 예를 들면, 75년에 개최된 첫 「에꼴드 서울전」(7. 30∼8. 5,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참가자 대부분은 입체이건 평면이건 가릴 것 없이 거의가 단일색조의 작품을 선보였다 .
김용익의 무색 오브제, 김종근의 그을림 회화, 김흥석의 실작업, 박서보의 서체식 타블로, 서승원의 금욕적인 기하학의 구사, 이동엽의 혼적 남기기, 이반의 빛 묘사, 최대섭의 물감자락, 최명영의 화면표정에의 의미부여 등은 누가 보아도 서구미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단색조에 의한 집단적 감성의 항상성(恒常性)은 잇따른 일본에서의 한국전람회, 즉 「한국미술의 단면전」, 「현대미술의 위상전」, 「현대미술, 70년대 후반의 한 양상」 그리고 파리 및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기린, 이우환의 작품을 통해서도 각각 확인되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횐색전」(75년 5. 6∼24, 동경화랑, 참여작가: 이동엽, 서승원, 박서보, 허황, 권영우)은 일본의 시각에서 본 한국미술의 조명이라는 소극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미술적 특질을 특히 「백색 모노톤」으로 규정 짓고자 한 미술비평가 나까하라유스케(중원우개(中原佑介))의 의도가 유감없이 노출된 전시회였다. 전시회 서문을 인용하면,
한국의 현대회화가 모두 구미와 똑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화가의 작품에는 다른 나라의 현대회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봄,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여 어떤 화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중간색을 사용함과 동시에 화면이 매우 델리케이트하게 처리되어 있는 회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찾아 화가의 아틀리에를 방문하였을 때, 나는 단순한 화면의 조형기교 때문이 아니라 어떤 회화사상의 표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물론 한국의 모든 화가가 이 점을 철저하게 느끼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사람에 의해서 그러한 특질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개인의 감수성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개인을 넘어선 상태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게 아닐까.
나까하라는 계속해서 자신이 기획한 이 전람회가 개인적 차이를 초월한 공통적 정서의 발견에 취지가 있음을 밝히면서 이 같은 공통적 정서의 표상이 다름 아닌 「흰색」이라는 조형언어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 화가들(전시에 초대된 5명의 한국 작가를 지칭함)의 작품을 보면 흰색은 화면색채로서의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회화를 성립시키는 근원적 요소인 것처럼 여겨진다. 형태 및 색은 그 흰색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반대로 사라지기도 한다. 흰색은 비전의 모태인 셈이다. 우리는 흰 모노크로이즘의 회화를 알고 있을 뿐더러 흰색을 기조로 삼는 회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반해, 여기서 발견되는 작품은 색채를 고의로 회피함으로써 남는 백색 화면, 또는 형태를 배제한 극한으로서의 백색 공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흰색은 도달점으로서의 하나의 색채가 아니라 우주의 비전을 틀 짓는 그 자체인 것이다.
나까하라는 한국 회화에서 보이는 흰색을 색깔 자체의 고유성을 배제하는 비색(非色)으로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우주의 비전을 틀 짓는」 요소로 파악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점을 통해 한국 모노크롬 회화를 서구 미니멀 아트와 전적으로 구별되는 현상으로 특징 지으려 했던 것 같다. 흰색에 의한 표현구현을 한민족의 정신세계의 상징적 단면으로 이해하는 나까하라의 지적과 더불어, 그것을 「우리의 사고를 규정짓는 가장 본질적인 하나의 언어」로 이해한 사람은 미술평론가 이일씨이다.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의 흰색전」에 나란히 실은 이일 씨의 서문은 흰색을 정신세계에 흡수되거나 그것의 거울로써 해석한 나까하라의 입장과 흡사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일씨의 백색에 대한 견해는 좀더 구체적이고 거기에 어떤 미적 본질을 담고 있다.
「백」 또는 「백색」이란 무엇인가 ? 좀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회화에 있어 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것이 이번 전람회에 맞추어진 초점이다. 실상 백색은 전통적으로 한국 민족과는 깊은 인연을 지녀온 빛깔이다. 그리고 이 빛깔은 우리에게 있어 비단 우리 고유의 미적 감각의 표상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 기상(氣象)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우리의 사고를 규정짓는 가장 본질적인 하나의 언어이다.(‥‥‥)
요컨대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하나의 「빛깔」 이상의 것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빛깔이기 이전에 하나의 정신인 것이다. 「백색」이기 이전에 「백」이라고 하는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그 어떤 물리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백색은 색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우리의 백색은 (역시 흑색과 더불어) 모든 가능한 빛깔의 현존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즐겨 수묵으로 산수를 그린 것은 그들이 자연을 흑백으로 밖에는 보지 못했고 또 그렇게 밖에는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수묵으로서 삼라만상의 정수를 능히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그들에게 있어 자연에 대한 초감각적인 컨셉션을 통해서만 파악이 가능한 것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백색을 하나의 빛깔 이전에 자연의 「에스프리」-생명의 입김이라고 하는 그 본래의 뜻에서의 에스프리로 받아들여온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입김은 바로 우리들 스스로의 정신 속에 숨쉬고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자연과 동일한 정신적 공간을 사는 것이 된다. 한 마디로 백색은 스스로를 구현하는 모든 가능의 생성마당인 것이다.
두 비평가의 한국 회화에 대한 기본적 입장은 상기의 글을 통해서 보건대 백색을 자연의 에스프리, 즉 우주의 비전에 도달하는 언어로 본다는 점, 동시에 그것을 우리 민족의 숨결을 실은 상징적인 조형형식으로 본다는 점 등의 일치에 도달하고 있다. 또 두 비평가 모두 서구 미니멀적 아트의 관점이 한국 회화에 적용되기 어렵다는 점을 토로하고 있으며 그 발상 자체에서도 전혀 다른 세계관의 바탕 및 방법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미니멀리즘이 어디까지나 합리주의적 조형사고의 소산물이며 따라서 분석적이요 나아가 개념적·엄격주의적 조형논리를 표방하고 있음에 반해, 우리의 미니멀적 추상은 직관적·신체적, 그리고 전인적(全人的) 체험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이일씨는 최근에 강조한 바 있다.
「한국적 미니멀 아트」의 당위성은 이처럼 타민족의 미술과 구별되는 고유의 특질을 갖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주의적 사상을 저변에 깔고 사물과 대상의 표정을 모두 수렴, 용해시키는 넉넉한 조형언어의 세계를 백색은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은 우리의 잠재된 정서를 표출함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우주관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이러한 주장을 한층 설득력 있게 해주는 요인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로 인해 70년대의 미니멀 아트는 우리 자신에 맞는 미술을 개발하고 승화시키기에 성공한 경우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해두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미술을 통해서 비로소 서구문화를 우리의 시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며 결국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리하여 우리 미술이 성숙의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실인즉 이 점이야말로 70년대에 있었던 갖가지 미술, 그 중에서도 특히 미니멀적 아트의 경향을 유난히 빛나게 해준 키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러할 백색 기조의 작가가 국내 화단을 대표할 만큼 수적으로 많았고 사실 백색 자체만을 놓고 고민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회의적인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한국 작가들이 희물그레한 색깔을 선호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백색주의를 낳은 적도 없거니와 거기에 어떤 이념이나 사고를 위한 의견개진을 꾀한 적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흰색을 사용하는 작가에 있어서도 모두가 양식적 패턴의 일체성을 꾀한 것은 아니다.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는 유백색이지만 그것은 드로잉의 논리화를 위한 한 방안으로 보였다고 보아지며 서승원과 이승조는 유클리드적 기하학을 도상화시키면서 연구성을 시도하고 있었으며 정상화·김기린·권영우 세 사람은 회화의 탈일루션 작업을, 그리고 김창열·김진석은 안료가 갖는 물질성과그것의 착각문제에 유사한 방법으로, 하종현은 평면의 이완 및 긴장의 역학관계를 통한 구조문제에 각각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안료가 표면의 조직 속으로 침투해 가면서 깊이로서의 회화의 정서적 구조를 천착해 보인 대표적인 경우로는 윤형근, 정창섭, 최명영을 들 수 있고, 이미지의 존재상황 표출에 주력한 경우로는 박장년, 김흥석, 이동엽을, 이밖에도 이강소는 회화와 프린트 작업에 의한 오리지널리티와 복제성의 문제관계를 연구했고 김용익은 오브제를 도입하여 그것의 늘어뜨림에 의한 개념포착 작업에 골몰했다. 평면에서의 이러한 다채로운 문제설정과 함께 새로운 미디어 및 탈회화외 바람도 일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박현기가 비디오 작업에 손을 댔고 이건용, 김장섭, 김구림 등은 이벤트와 입체, 환경으로까지 영역을 확대시켜 현대미술을 한층 볼품 있게 꾸며주었다. 70년대의 미술은 백색 패턴의 부류와 함께 이같이 풍부한 회화적 깊이와 방향에 대한 실험이 가해졌던 복합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 예술의 이입
70년대 초반의 격정적 실험성이 중반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누그러지는 가운데 회화의 기틀이 잡혀가던 무렵 거기에 이념을 불어넣은 것은 재일 미술평론가 이우환이라는 인물이었다. 이우환씨는 나까하라의 한국 미술에서 나타나는 백색에 대한 해석과는 달리, 동양정신에 입각해서 철학적으로 현대미술을 설명해 갔다 .
이우환씨는, 현대미술의 신선한 정신과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충격을 국내에 소개, 보급시킨 이일씨도 「70년도에 들어 와서의 우리나라 미술계에 끼친 이우환의 작품이론 양면에 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라고 토로할 만큼 탄탄한 예술적 입지를 국내에 마련하고 있었다.
이우환씨는 일본 미술출판사 예술평론모집에서 「사물에서 존재에로」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주목받는 히로인이 되었다. 같은 해에 발표된 「관념예술은 가능한가」(미술수첩, 69년11월), 「발언하는 신인들」(미술수첩, 70년 2월), 「변혁의 풍파」(미술수첩, 71년 3월) 등 무수한 논문들은 일본의 젊은 세대를 매료시켰고 급기야 이 같은 철학적 예술론의 개진은 「이우환 시대」를 여는데 촉진제가 되어 주었다. 그의 글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75년 「공간」지에 게재된 「만남의 현상학적 서설」을 통해서이다 .
신체가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요컨대, 「만남」을 이룩한 순간에 있어서의 그것은 자기 완결화 된 대상이 아니고 대상적 사실로 있으면서 대상성을 투명하게 만드는 그러한 「무(無)이면서 유(有)를 보는 자기한정」에 있는 절대모순의 자기동일인 것이다. 즉 무를 매개로 하여 장소를 나타내고, 그 속에 자기의 대상성을 녹아들어 가게 하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거꾸로 자기의 유를 진정 열린 세계에 해방한다는, 이를테면 생(生) 양의적인 매개항임이 양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리라. 그리고 표현은 바로 이러한 신체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를 매개로 하는 표현자의 자기한정작업으로써 그러므로 표출 즉 표현, 표현 즉 표출의 장소의 자기현전의 창조작업이 되는 것이다. 되풀이할 필요도 없거니와 「세계하고」 장소가 장소 자신을 자기한정한다고 해석됨은 표현적인 신체가 그 자기모순의 양의성 때문에 오히려 무를 매개로 장소를 나타내는 행위적 직관적인 자기작용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우환씨의 예술관의 본질이 어떻든, 이러한 「투」의 의사개진은 우리 화단에 강력한 바람을 일으켰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관념적 어휘의 채택, 철학적 정신세계, 논리에 바탕 한 예술이념 등은 어떤 여과 없이 국내 화단에 이식되었고 그리하여 작가들은 대다수 그의 이념에 거리낌없이 동화되어갔다. 그의 글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선(禪)의 경지를 논리화시킨 철학자 서전(西田)이 살던 명치시대 이후의 일본에 흐르던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대한 고찰이나 메를르 퐁티, 미셸 푸코의 이른바 지각구조라든가 서전(西田)철학의 골자를 이루는 「순수경험과 실재의 관계」, 「장소논리」, 「행위적 직관」, 「현실적 세계」 등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화단은 너무 쉽게 달아올랐고 논리로 「무장」한 회화를 분별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철학적 예술론의 이입은 우리가 회화론 좀더 넓은 범주에서 바라볼 수 있게 유도하는데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나 한편으로 그것은 충분한 비판적 여과 및 그것을 수용할 만한 조건의 미성숙으로 인해, 「철저한 논리성과 철학적 발상」에 의해야만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끔찍한 오해를 낳았고 개중에는 실제로 사변과 관념으로 가득 찬 작품이 공공연하게 나돌게 되었다.
부정적인 측면만 들추어낸 감이 있지만 이우환씨의 활동 및 이론의 소개는 어떤 점에선 비평의 차분한 정착을 이끄는 역할에 기여했고 한편으로는 현대회화가 서구적 어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양정신의 체계로 재해석할 뿐 아니라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엿 보였음이 분명하다. 회화의 저변을 둘러싸는 사상(事象)들을 경미하게 취급한다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미니멀 아트를 현상학의 맥락에 포함시켜, 그것을 서구문명을 넘어서려는 서전(西田)의 독창적 해석에 의거해 재검증한 태도의 가치는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다만 이 같은 이우환씨의 논지를 미니멀 아트의 전부인 양, 그리고 서구 모더니즘의 전체인 양 잘못 받아들인 국내 화단의 풍토의 문제를 꼬집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적 미니멀 아트」를 자신의 「비물질화 경향」이라는 논리에 맞추어 해석한 미술평론가 오광수씨의 생각은 한국 현대회화의 특이성을 서구미술과 비교함에 있어 한층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미술의 성격을 가장 명료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한 사람중 한 명인 듯이 보인다 오광수 씨는「미니멀리즘과 컨셉추얼 아트가 적어도 50년대나 60년대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국제 보편적인 조형언어로 수용되지 않고 그것을 변주된 양상으로 소화하고 있다」고 전제, 수용적 측면에서 단순한 이입이 아니라 「문화적인 특수한 반응관계 」를 거쳤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반응관계를 오광수 씨는 「비물질화」라고 설명한다. 이때의 「비물질화」란 색으로서의 물질이 아니라 물질을 지워 나감으로써 도달한 어떤 지점의 현상이라는 입장이다.
김기린의 흑색 모노크롬의 화면과 여타의 한국 작가들의 모노크롬을 대위 시켜 본다면, 우리는 김기린과 여타의 한국 작가들이 실현하고 있는 정신적 톤에서 빚어진 모노크롬이 크라인의 그것과는 퍽 대비적인 위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크라인의 청색이 청색이라는 물질의 확인과 그것의 드러냄이라고 한다면, 김기린이나 여타의 한국 작가들이 시도한 모노크롬은 색채가 지닌 고유한 물질성을 지워가려는 공통된 의식에 유대 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백이나 흑은, 백이나 흑이라는 색으로서의 물질이 아니라 그러한 물질을 지워감으로써 도달한 어떤 지점의 현상이 된다.
오광수 씨의 모노크롬에 대한 나름의 표정지움은 한국 회화가 조형논리에 입각한 색의 부정이 아니라 이와는 무관한 「비물질성에의 이끌림 」을 도출함으로써 미니멀 아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어서 오광수씨는 「색깔이 빛으로 환원되고, 색이라고 하는 물질이 빚이라고 하는 투명한 인식으로 치환되는 세계를 체험한 결과로 백색과 흑색의 모노크롬이 갖는 중성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노크롬은 색이 갖는 물질적 포화를 탈각하여 인식의 상태에서 진가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광수씨는 「인식의 상태」라 표현했지만 그것은 물질과 인간의 생각이 교차되고 중복되는 지점에 다름 아니다. 「한국적 미니멀 아트」는 어느새 회화의 장을 넘어 사고하는 장으로, 나아가 우주합일의 장으로 승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점은 비단 오광수씨의 주장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작가들의 입장을 빌면, 「정신과 물질의 만남으로 일어나는 질서의 무한성 추구」(윤명로), 「물질과 행위의 일체」(박서보), 「정신적 구조성에의 추구」(하종현), 「무한을 향해 열려진 위상의 현장」(최명영), 「바탕과 신체의 극도로 긴장된 접합」(권영우) 등은 물질과 정신의 연결 내지는 그것의 초극을 나타내는 주장들이다. 그리하여 오광수씨는 「70년대 한국 미술에서 만나는 그 특유한 모노토니즘은(‥‥‥) 단순한 미니멀리즘이나 컨셉추얼 아트의 인식이나 그 아류가 아니란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우리의 70년대 미술은 최초의 자신의 시각과 발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모더니즘의 출발이 된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 미니멀 아트의 위상
이상에서 살펴본 바 한국현대미술은 58년의 현대미협, 창작미협, 모던아트, 신조형파를 출발로 악튀엘을 거쳐 AG 및 ST 그룹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고리타분하고 도식적인 구상회화를 뛰어넘어 획기적이고도 때로는 파괴적인 미술양식 및 감히 자발적인 미술이라 칭할 만한 독특한 모던 스타일을 가져왔다. 「한국적 미니멀 아트」와 같은 양식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는 회화에 인간의 체취와 자연의 포근함을 용해시키는 친화적 성질을 투사하기도 했다. 50년대 말 본격적으로 구미의 미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무렵에서, 60년대 중엽 이후의 일련의 과감한 실험미술 및 표현해체 작업과 70년대에 있어서의 평면을 통한 자연적이고 상징적인 표현력 창조는 다소 차이는 나지만 한국 미술의 모더니티를 말하는 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며, 우리는 이 같은 과정에서 그 동안 자아(自我)의 모습을 틀 짓고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론화하여 다시금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게을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흑백 모노크롬이라던가 서구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관을 중시하는 입체 내지는 설치 작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명쾌하게 해석하고 정당화시키는 사색적 및 철학적 노력은 현상적 및 사실적 측면을 고려하면 대단히 적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그만치 서구의 조형논리 및 이념이 화단을 압도해왔고 상대적으로 우리의 것에 대한 애착이 덜 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우리 미술에의 무관심은 특히 77년대 말에 들어와서 「정신적 중심의 상실」, 「단색주의의 과다현상」, 「한국적 미니멀 아트」의 비판은 사실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예술적 연계이론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들의 집단화와 그에 따른 유파 및 인맥형성, 또 그 결과로서의 작품자체의 「진지성 결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뭉쳐야 산다는 식의 예술적 편린과 그 결과로서의 창조적 상상력의 고갈이야말로 이 미술이 헤집고 나가야만 했던 가장 커다란 암초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미술의 모더니티를 확인함에 있어 이 양식은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노크롬에서의 색깔의 환원성, 회화자체에 대한 과학적 인식, 평면에 대한 목적성 부여 등은 우리 미술이 서구의 변방으로서가 아니라 50년대 말의 각종 탈근대화를 위한 작업에 힘입어 독자적인 방법과 가치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형별 및 성격별 실험이 꾀해지면서 성향의 집약을 도모했지만 최종적으로 조형의 결실을 본 것은 역시 모노크롬으로 대표되는 미니멀 아트이자 여기서의 신선한 물음제기 및 그것의 구체적인 접근 방법론의 심화라 하겠다. 어떤 면에서는 근대화를 외치던 초기의 미술이 굴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서구 미술의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의미의 무게를 우리는 그 속에서 느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하며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나타난 모더니즘류의 미술은 한편으로는 70년대 미술의 조형논리를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서 제기된 「한국적 미술의 모색」, 「나름의 어법 개발」, 「새로운 민속적 소재 및 매재 발굴」, 「시대감각에 걸맞은 표현의 관점 설정」 등의 문제를 다양하고 폭넓게 다루어가고 또 그 속에서 한층 탄탄한 미술의 형식적 질서를 다져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70년대의 미술」은 이제까지의 서구 미술의 도입을 고유한 조형발견으로 일단락지면서 다시금 다음 세대의 양식적, 회화적 근거로서 남아있는 셈이다. 그러한 매개 역할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역시 「한국적 미니멀 아트」의 돋보이는 회화형식의 창출 탓에 있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미술이 우리 모더니즘의 위상을 효율적으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미술의 성숙된 국면을 의심할 바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