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음악

민족주의 음악 창출, 양대 산맥 이룩




노동은 / 목원대 교수

한국 역사상 해방공간(1945 .8. 15∼1948. 8. 15)은 그 이후의 분리공간(1948. 8. 15∼1950. 6. 25)이나 해방 직전의 식민공간(일본제국주의 침탈시대)보다 역동적 시기였다. 그 동안 일본과 서양의 음악언어를 익혀 지배권력을 형성한 식민주의자가 그 식민지 언어로 민족 공동체 구성원에게 의사소통시키다가 점차로 그 언어관습에서 사고관습을 일본과 서양 본국의 그것에 일치시킴으로써, 이 땅의 민족이 식민주의 문화로 종속화외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해방공간의 민족현실 앞에서는 이제 민족적 양심선언이라는 윤리성을 제기시켜야 했고, 민족분단에서 체제분단으로 점차 고착화되는 냉전체계를 어떻게 극복하여 자주적 인식으로 민족의 통일을 함께 하는 음악이 어떤 얼굴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를 해방공간에 들어와 비로소 절실하게 펼쳐졌기 때문에 해방공간은 격동의 공간을 점증시키고 있다. 민족의 자주적 음악정립은 적어도 조선시대이래 한국 음악역사의 과제였으나 식민지 시대의 음악언어가 민족정신과 그 정서를 크게 훼손·폭행하였기 때문에 이 과제는 해방공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 과제였다.

따라서 민족현실은 누구나 이 땅의 역사적 존재이기를 바랬고, 그 존재성의 깨달음은 민족주의 음악이 창출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합의하고 있어서, 누구나를 가리지 않고 민족주의 음악에 관한 해석자의 윤리성, 정치성, 미적 표현성이 동일 지평에서 접근·유도되고 있었고 이 상황은 한국 음악역사에서 음악인 스스로가 대자적 의식으로 집단역량화하여 민족주의 음악운동을 본격화시켰다는 데서도 참으로 역동적 .해방공간이었다.

그만큼 민족주의 음악운동은 윤리적·정치적·미적 표현성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 음악수립에 관한 해석자의 관심과 풀이는 다르게 나타났으며 그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 다름의 한 날개는 전통과 대화 없는 순수미학관에, 또 다른 한 날개는 마르크스 미학관과 역사관에 시각화히였으니, 이 시각들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이 각각의 자국 이익과 체계를 냉전체계로 이끌고 가면서 선점 한 해방정국이었기 때문에 그 해석 접근은 필연적 결과로서 대립·갈등의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또 그것은 이 땅의 민족공동체가 구체적으로 의사소통시켜 온 전(前)·전(全)시대의 문화해석을 현재화시킬 수 없는 벅찬 해방정국의 상황에다 늘 세계화라는 명분아래 다른 민족의 텍스트에 의한 문예해석을 일방적으로 적용시켰기 때문에서도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인에 의한 그 해석들은 비교적 최근(1910년대이래)의 일로서, 전자가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시대에 이미 형식화되어 왔고 후자는 해방공간에 구체화되었지만 무엇보다 한국인의 전통적 사유체계를 다른 문화의 언어로 해석한 날개였다는 사실이다.

전자가 서양음악의 형식을 배제한다면 일반적으로 불변성에 접근하려는 해석이고 후자는 생성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그것인데, 이것은 변하지 않음(불역(不易))과 때에 따라 변함(변역(變易))의 역사철학을 근대의 이분법적 범주로 도식화한 결과이다.

물론 이 도식을 획일적으로 규정한다는 그 자체가 무리이다. 그것은 두 개의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전일적인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한 날개는 다른 한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 한 날개가 우리 눈에 클로즈업되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분리공간이 시작되는 1948년 8월 15일에 남한에서 미국과 이승만(李承晩)에 의하여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민족음악론은 악몽의 해석공간으로 돌리어 스스로 다른 한 날개들을 쳐내기 시작하였다.

반일→반미→반체제 대신 친일→친미→애국자로, 다른 날개에서는 친일→친미→민족 반역자·반일→반미·친소→애국자로 도식화되어 오직 그 두 날개(이데올로기 )의 하나만을 선택하는 길과 이에 따른 음악공간만 허용·대비질하여 버린다.

따라서 자주적인 민족음악이론의 회복과 성숙으로 창출하지 못한 채 종속의 길을 걸어간다.

해방공간에서 민족의 통일·민족정서의 통일의 과제는 역사적 반성의 공간으로 해석되지 못하고, 비자주적인 두 이데올로기에 의한 해석이야말로 생산적이지 못하다.

이 글은 한국 음악역사에서 무엇이 반성되어 생산적이고도 실천적인 공헌을 하였는지를 지금까지의 역사철학관과 비교하여, 그 수용의 근거를 마련하면서 이를 1945년 8·15부터 1950년 6·25까지의 해방→분리공간의 궤적을 따라 밝히는데 관심을 가진다.

1948년 8·15를 분기점으로 앞의 해방공간(1945. 8. 15∼1948. 8. 15)과 그 뒤의 분리공간(1948. 8. 15∼1950. 6. 25)으로 크게 나누고, 해방공간은 다시 3기로 구분하여 접근한다.

해방공간은 제1기(1945. 8.15∼ 1945. 12. 31), 제2기(1946.1. 1∼1947. 8. 15), 제3기(1947. 8. 15∼1948. 8. 15)로 각각 구분하였다.

제2기는 다시 전기(1946. 1. 1∼1946. 8. 15)와 후기(1946. 8. 15∼1947 8. 15)로 나누었다

제1기는 주로 악단의 정비·분화·결성시기이다.

제2기는 민족현실과 음악문화에 대한 해석집단의 입장에 따라 크게 양분되는 시기로, 민족좌파와 민족우익 중도파 그리고 극우의 해외파의 입지가 형성·활동하는 시기이다. 민족좌파로 「조선음악가동맹」과 「국악원」이, 민족우익 중도파는 채동선의 해석집단(고려음악협회), 극우의 해외파는 현제명을 중심으로 한 계열로서, 결성순으로 보면 극우의 해외파·민족좌파·민족우익 중도파 순이다.

제2기의 구분은 민족좌파의 음악운동이 1946. 8. 15를 기점으로 미군정과 관계 당국에 의하며 금압이 강화되자 새로운 문화전략으로 대응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기에는 채동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집단형성으로 좌와 극우를 비판하고 후기 전면에 부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2기 전기간 민족좌파의 「조선음악가동맹」의 역량은 해방공간을 주도하는데, 그 대표자는 김순남(金順男)·이건우(李建雨)·박영근(朴榮根) 등이다. 이들과 별도로 평론가 박용구(朴容九)의 비평은 해방공간을 구조화시킨 전방위적 공헌을 한다 .

제3기는 미군정과 관계 당국이 「조선음악가동맹」을 비합법화 시킴에 따라 우파 진영의 입지가 전면에 부각되고 새로운 질서가 유도된다.

분리공간에서는 좌우대립의 종언을 가져온 남한의 정부수립으로 좌파는 전면에서 사라지고 분단이 고착화된다. 민족좌파가 반체제 집단으로 희생당한다.

6·25는 분단 고착화를 확인한 비극이며, 동질성 회복을 각성시킨 오랜 민족의 비극이다.

해방 직전의 악단 상황

해방이 되었을 때 음악인들 스스로 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일본제국주의 침탈시대 특히 40년대 직후부터 「일본신」을 섬기게 함으로써 이 땅의 민족정신과 정서를 폭행한 친일적 음악행위를, 그 문화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롭게 민족음악을 정립·창출하는 일이었다.

이미 「일본 민족이 아주 먼 옛날부터 천조대신이 내려주신 나라의 역사로서, 이를 중심으로 한 이상 및 신앙을 구축하는 국민정신」 즉, 「일본정신」은 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자기를 바치고 그 관계에서 자기 생명의 의의와 가치를 찾는 정신만이 일본정신을 실천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이를 문화의 각 부문에 구체화해서 실시되어 왔었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가 자본주의 경제사회의 내부적 발전의 결과로 한국을 강점한 군국주의적 정치체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도 「일본정신」은 필요조건이었음을 말한다.

국체명징(國體明徵)·신사참배·내선일치·황국신민의 서사 등의 슬로건은 일본정신을 공고히 함으로써 일본의 파시즘에 의한 황민화 정책을 도식화한 끄나불이다

이와 함께 음악지배계급은 일본의 음악언어를 익히고 이 땅을 일본 정서화시킴으로써 민족정신과 정서를 배반하게 된다. 왜 그 언어가 문제인가 ? 그것은 일본정신을 찬양하는 글과 그 정서를 반영하는 일본음계(요나누키 음계 · 미야코 부시 음계 등)에 의한 창작, 그리고 앞의 창작품 소통에 함께 숨은 서양 음악언어의 소통 등은 일본정신과 정서를 받치는 토대인데, 필연적으로 총독부와 함께 악단을 조직화한다거나 학교 교육을 거미줄처럼 통제·강화한다거나 그리고 방송을 통하여 우리의 이목을 시청(視聽)에 맞추어 그 일본 음악언어를 익히도록 강요·각인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음악언어는 감관서부터 사물에 대한 해석의 권리까지 온통 일본정신과 그 정서만으로 정신적 영상의 그림을 그리게 한 것으로서, 상대적으로 민족정신과 정서를 박제화시켰다.

미나미 총독의 폭행기간에서부터 총독부와 함께 결성된 조직체 「조선음악협회」(1941, 1944 개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부」(1938 결성, 1945. 7. l0. 해체), 「경성후생실내악단」(1942, 1944 개편)·대화(大和)악단(1944) 등이 이 일에 앞장섰다. 이들은 신체제음악, 내선일체의 정서강화, 일본국민음악보급 정신대(挺身隊), 일본음악수립 등을 목표로 음악회장·방송국·학교·남산신궁·부여신궁·공장·광산·농촌·북지(北支) 등을 뒤덮고 있었다.

이처럼 악단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익힌 식민주의자의 음악언어의 이론과 실제를 통하여 조선의 사물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지고 문화적 종속으로 이루어 놓는 대신 일본의 이익에 합치시켰기 때문에 해방공간에서는 일본적 잔재의 숙청과 자기비판에 따르는 민족양심선언의 과제에서 거의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해방공간 제1기

일본이 떨리는 목소리로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 땅의 어느 곳이든 해방거리와 그 공간이 분출되고 있었다.

드디어 그리고 마침내 악몽이 걷히고 눈부신 아침의 빛나는 조국의 산하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이제 「빼앗긴 들」이 아니라 「푸르른 들에 뜨거운 여름」이 왔다. 훼손된 민족정서와 훼손시킨 친일음악행위를 청산하기 위해서도 민족음악을 정립하고 새롭게 창출하는 길이 역사적 과제였다.

해방 당시 50대 초반의 함화진(咸和鎭), 40대의 안기영(安基永)·박태준(朴泰俊)·채동선(蔡東鮮)·현제명(玄濟明)·이종태(李鍾泰)·김재훈(金載勳)·박경호(朴慶浩)·김세동(金世尲)·계정식(桂貞植), 30대의 임동혁(林東爀)·이애내(李愛內)·김원복(金元福)·이승학(李升學)·성경린(成慶麟)·이흥열(李興烈)·박태현(朴泰鉉)·김성태(金聖泰)·최창은(崔昌殷)·박영근(朴榮根)·정종길(鄭種吉)·이범준(李範俊)·박용구(朴容九)·신막(愼幕) 등이 악단의 중진으로, 일본에서 학습한 제2세대의 김순남(金順男)·이건우(李建雨)·박은용(朴殷用) 등이 20대 후반을 형성하고 있었던 바, 일본학습 제1, 2세대는 이미 40년대를 전후하여 귀국,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포진된 악단 기후는 역사인식이나 미에 대한 해석이나 경험이 이미 다르게 형성되어 있었고, 일반적으로 30대 선후의 세대들은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류는 해방공간뿐 아니라 한국음악사의 새로운 해석집단을 이룬 기류이었다. 여기에는 안기영(安基永)·박영근(朴榮根)·박용구(朴容九)·신막(愼幕)·김순남(金順男)·이건우(李建雨)·박은용(朴殷用)·이범준(李範俊)·정종길(鄭種吉) 등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악단의 중진과 새로운 신진의 해석집단은 민족음악을 새로이 정립하고 창출하자는 대의명분 앞에서 너와 내가, 중진과 신진이, 국악인과 양악인이 따로 구별 없이 어울릴 수가 있었다.

해방 다음날인 8. 16에 전음악인이 모여서 「조선음악건설본부」가 이렇게 태어났다.

언젠가 악단의 왼쪽·오른쪽 날개뿐 아니라 한국 음악역사의 해석의 양대 산맥으로 갈라질 운명을 안고 말이다. 1945년 8월 15일부터 동 연말의 제1기간 동안에 6개의 대표적인 음악단체가 조직을 정비한다.

즉, 최초의 조직체인 8. 18의 「조선음악건설본부」, 9. 15의 「조선 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과 「고려교향악협회-산하의 고려교향악단」, 10. 10의 「국악원」, 10, 22의 「조선음악가협회」 그리고 12. 13의 「조선음악가동맹」 등이 결성되어 다음 「표 1」처럼 윤곽이 잡혀간다.

1945년 8월 16일에 합의된 최초의 음악 조직체 「조선음악건설본부」는 「조선문학건설본부」·「조선미술건설본부」·「조선영화건설본부」 등과 함께 「문화전선의 통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이하 문협)가 8월 18일에 협의체로 결성될 때 공식적으로 출범한다.

해방 직전부터 비교적 20대 후반∼30대 초반인 김순남(金順男)·강장일(姜長一)·신막(愼幕)·이범준(李範俊) 등이 음악서클을 조직하여 왔는데, 이들이 해방이 되자 8월 16일에 악단조직을 발의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문협」으로부터 악단조직종용을1) 받은 음악인들이 함께 서둘러 조직한 단체가 「조선음악건설본부」이다.

따라서 취지나 강령이 없는 대신 8월 18일 「문협」과 공동 출범할 때 「문협」의 「선언문」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선언(宣言)

친애하는 3천만 동포여 !

오랜 굴욕의 날, 압박과 착취의 긴 날은 나고 자유와 해방의 화려한 날은 왔다. 우리의 거룩한 조국, 자랑스러운 민족의 머리 위에, 현란한 자유의 광망(光芒)은 비치엇다. 이 모든 것이 해방과 더불어 30유여년의 장구한 동안 제국주의 일본의 노예적 지배하에 잇던 우리 조선의 문화도 오늘날 그 무거운 철쇄를 끊었다. 유구한 역사, 아름다운 언어, 전아(典雅)한 예술의 전통과 더불어 혈한(血汗)의 투쟁 속에 자라나던 신문화 30년의 노력도, 이제야 이 해방의 대평원에서 일로 전진할 날은 왔다.

친애하는 독립조선 동포 제군 ! 친애하는 자유조선 동포 제군 ! 문화의 해방이란, 곳, 문화의 건설이다. 신조선 문화의 건설 ! 그것은 자유와 독립의 정신 위에서 세계문화의 일환으로서의 새조선문화를 건설함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조선의 모든 해방된 문화종사자, 예술가의 쌍미(雙眉)위에 부과된, 유일하고 신성한 임무다. 이 임무는 전조선 문화종사자급 예술가의 일치단결의 토대에서만 비로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는 장래에 성립할 우리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이 서고 그 기관이 탄생하여, 이 모든 임무를 수행하게 될 때까지, 우선, 현 단체의 문화 제 영역의 통일적 연락과 각 부문 활동의 질서화를 위하여 형성된 협의기관으로서 현하 모든 문화의 총력을 ꆽ아 신조선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조선문화의 해방 ! 조선문화의 건설 ! 문화전선의 통일 ! 이것이 우리 문화의 연합전선이 전진하는 구호다 !

두 손을 들고 소리 높여 부르자 !

독립조선 만세 ! 자유조선 만세 ! 조선민족해방 만세 ! 연합군 만세 ! 국제평화 만세 !

카프KAPF의 2차 방향전환(1931)을 주도한 임화(林和)와 김남천(金南天: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의장과 서기장)은 이 선언에서 계급대신 민족을 앞세워 「조선문화의 해방 ! 조선문화의 건설 ! 문화전선의 통일 !」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것을 보더라도 「문협」의 악단조직 종용방법은 포용적이었을 정도로 그 문턱이 낮았기에 「조선문학건설본부」의 그것처럼 「조선음악건설본부」도 음악인 영입은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음악건설본부」(이후, 음건)는 회원이 완전히 확보되어있지는 않았지만 전 분야에 걸쳐 조직을 하고 있었으며 다음「표 2」와 같이 주요간부를 선정하고 숙명여고에 연락사무소를 두었다

그리고 이들 중 김성태(金聖泰)·박경호(朴慶浩)·안기영(安基永)·안병소(安炳曇)·채동선(蔡東鮮)·함화진(咸和鎭) 등 4개 부서 위원장과 김재훈(金載勳)·김순남(金順男)이 문협의 5개 부서 중 「음악건설부」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

음건은 「표2」 이외에도 이상춘(李想春)·김노경(金慈景)·정영재(鄭榮在)와 이흥열(李興烈) 그리고 강장일(姜長一)·신막(愼幕)·이범준(李範俊)2) 뿐 아니라 9월 15일 「조선프를레티리아음악동맹」과 「고려교향악협회」(산하 고려교향악단) 결성으로 이탈한 것을 보면 음악인 상당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조직은 무원칙하게 모인데다 음악인들도 정당이나 각종 사회 정치 단체에서 활동, 경제적 기반의 약세 등 때문에 처음부터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었다.

해방의 감격과 음악인이 단결하여 민족음악을 정립해야 한다는 명분아래 조급히 결성된 「음건」은 감격 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해방정국의 현실 앞에 처음부터 대응책을 가지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표 2 조선음악건설본부 중앙조직 임원>

부 서

이 름

중 앙 서 기 장

박경호(朴慶浩)

서 기 장

채동선(蔡東鮮)

작 곡 부

위 원 장

위 원

김성태(金聖泰)

김순남(金順男) 이건우(李建雨)

기 악 부

위 원 장

위 원

안병소(安炳曇)

김순도(金順道) 김동래(金尲來) 박태현(朴泰鉉)

성 악 부

위 원 장

위 원

안기영(安基永)

박태준(朴泰俊) 이승학(李升學) 최희남(崔熙南)

국악위원회

위 원 장

위 원

함화진(咸和鎭) 김석구(金錫九)

김유덕(金潤德) 박헌봉(朴憲鳳) 성경린(成慶麟)

이주환(李珠煥) 장인식(長寅湜) 최경식(崔景植)


상처받은 민족양심과 정서에 대하여 누구 하나 치열한 비판-반비판-자기 비판의 비평문 없이 「문화전설 통일」 슬로건은 막연하였다 .

더욱이 우리가 경험한 일본제국주의의 음악언어가 민족음악의 정통성을 크게 훼손시켰기에 이에 대한 자기반성과 사회반성 없는 현실은 늘 윤리성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이 때의 민족음악 창출은 「민족윤리음악」 성격이 강하였다.

「음건」은 전시대 반민족 음악단체의 간부이거나 회원을 그대로 수용한 것 자체가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1938년의 「국민총력조선연맹」, 1941년의 「조선음악협회」, 1942년의 「경성후생실내악단」, 1944년의 「대화악단」 등의 간부나 회원을 그대로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음건」은 그 조직상에 문제를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

더욱이 「음건」은 「문협」이 요청한 「문화활동의 기본적 일반방책」 즉, 1.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하고 이에 침윤된 문화 반동에 대하여 투쟁 전개, 2. 봉건적 문화의 요소와 잔재, 특권 계급적 문화의 요소와 잔재, 반민주적 지방주의적 문화의 요소와 잔재를 청산하고 인민적 기초의 완성을 위한 투쟁 전개, 3. 민족문화의 계발과 앙양, 4. 문화의 통일전선 형성, 5. 각 부서의 구체적 활동을 위한 우의적 논의 전개 등에 관하여3) 인식할 수 있는 이론이나 그 실천방안에는 더더욱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화활동의 기본적 일반방책」은 박헌영(朴憲永)이 작성(8. 20)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이른바 「8월 테제」와 맥을 같이하는 문화의 활동 지침서이기에 원로 음악인들은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확고한 이론 부재 상태에다가 순수음악 지상주의자로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더욱 치열해 가는 민족현실의 해방정국 상황에서 해소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4) 상대적으로 일군의 비판 신진들, 김순남(金順男)·강장일(姜長一)·신막(愼幕)·이범준 (李範俊) 등의 현 단계에 관한 해석의 간격은 이들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으로 기울어져가게 했다.

이와 달리 박경호(朴慶浩)·함화진(咸和鎭)은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9. 4 우익중심의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회(위원상 권동진(權東鎭))가 조직될 때 실행위원(설비부)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채동선(蔡東鮮)은 우익의 국민대회준비위원회의 9. 7 결성시 발기인으로, 특히 현제명(玄濟明)은 반공세력이면서 친일적이었던 세력이 집결한 「한국 민주당」 발기인에 유일한 음악인으로 선정되어 인공타도·임정 절대지지와 미군정 협조운동에 참가하고 있었으며(9. 8 이후), 「한민당」(한국 민주당) 창당대회(9. 16) 이후(9. 21∼22) 「한민당」의 문교부 위원의 한사람으로 정당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경제적 환경이 안 좋은 음악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탈퇴하여 나가고 새로운 민족이론의 당위성을 앞세우는 일군의 신진 비판세력과 교향악단의 조직을 원하는 집단들은 속속 이탈하여5) 1945. 9. 15 두 개의 단체 즉,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과 「고려교향악협회」가 그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결성되자 해산 운명의 충격은 심하였다.

음악활동도 노래운동을 제외하고는 1945. 10. 18 부민관에서 안병소(安炳曇)·이상춘(李想春)·김자경(金慈景)·정영재(鄭榮在) 등이 출연하여 「미군환영음악회」를 개최한 것이 「음건」의 유일한 프로젝트였다.

이때에는 「음건」·「조선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 등 세 조직체가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운영되었다. 해산상태에 있는 「조선음악건설본부」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으므로 이제 발전적 해소 명분을 찾아야 했다.

1945. 10. 22 드디어 「연합군 환영준비를 위한 잠정적 기관이던 음악건설본부는 그 취지를 달성하였음으로 해소한다」라는 궁색한 성명발표6)로 명분을 찾고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이렇게 하여 누구나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긴박하고 절실한 민족현실 앞에서 호흡하고 있는 음악인은 또다시 대동 단결하여야 한다는 전제아래 「음건」의 해소 성명발표와 동시 「음건」측·「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측·「고려교향악협회」측이 함께 음악가 단체대회를 열고(10. 22), 동시에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함으로써 「음건」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한편 「음건」이 존속기간 동안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은 노래를 잃었던 민족에게 일본 군가 중의 노래가 아닌 「해방의 노래」를 새로이 지어주는 일이었다. 새로운 노래 창작과 보급이라는 「음건」의 노래운동은 큰 공헌이다. 노래운동의 필요성은 해방의 감격을 그려준 새로운 우리의 노래가 있어야 했고, 일면 누구나 민족의 공동체임을 노래를 통하여 소통·확인할 수 있어야 함을 그 시대는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에 「조선문학건설본부」도 절감하고 있어서 여러 문인들이 새로 지은 가사를 「음건」 사무실로 보내 왔다.7)


「음건」작곡부 위원장인 김성태(金聖泰)의 「아침해 고을씨고」(임학수(林學洙) 작사)와 「독립행진곡」(박태원(朴泰遠)), 그리고 성악부위원장 안기영(安基永)의 「해방 전사의 노래」(임화(林和)), 작곡부위원 김순남(金順男)의 「건국 행진곡」(김태오(金泰午)), 역시 같은 위원인 이건우(李建雨)의 「여명의 노래」(화암(華岩) 작사), 박은용(朴殷用)의 「충성가」(정몽주(鄭夢周)) 나건영(羅建榮)의 「건국의 노래」(김태오(金泰午)), 이흥열(李興烈)의 「농군(農軍)의 노래」(여상현(呂尙玄) 작사) 등이 잇달아 만들어졌다.8)

이들 중 김성태(金聖泰)와 안기영(安基永) 그리고 이건우(李建雨)의 작품이 널리 알려졌다.

거의 파·시를 빼고 첫 음을 솔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요나누키 음계를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노력이 엿보이지만, 리듬을 타고 있으므로 해서 창가조와 군가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김순남(金順男)에게서 전체적으로 그 형식감이 조잡함에도 불구하고 셋잇단 리듬을, 이건우(李建雨)는 후렴에서 서양의 3화음을 솔직하게 적용시킨 덜 사고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연스러운 가락조(계면조)를, 안기영(安基永)의 박자리듬을 제외한다면 임화(林和)의 작시로 인해 해방조선의 나라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는 등의 당찬 모습에서 가사, 장단, 선율 등에 해방의 노래 얼굴이 잡혀가고 있었다.

특히 「해방전사의 노래」는 「음건」과 「문건」이 공동 선정하여 노래를 적극적으로 보급시켰다(상대적으로 을 김성태(金聖泰)의 작품은 후에 군가조로 비판받는다).

거의 모든 노래들의 보급경로는 방송국에 보내어져 매일같이 전파를 타거나, 「음건」 회원들이 직접 거리에 나서서 노래를 지도하는 등이었다. 또 하나의 중요 보급경로는 당시 「임시 중등음악교본」에 모두 게재되어 이 음악책이 중등학교 현장에서 폭발적인 수요가 있었음으로 해서 인기를 얻은 점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민족음악이론은 이론과 실천면에 미숙하였고, 그 노래들은 거칠거나 형식이 조잡했으니, 민족노래이론은 더 충분한 반성이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이 노래운동은 해방공간 전체에 일관하고 있는 주요 음악운동이었다. 그것은 민족전체를 자의식으로 우리화시키며 민중과 함께 하려는 자각된 음악인의 확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숙은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을 거쳐 「조선음악가동맹」이 공간을 만들어 가는 1946년 제2기부터 본격화된다.

여기에 신진 해석집단 특히 새로운 역사인식과 미의식을 소유한 작곡가 일군을 해방공간에 확보함으로써 성숙할 수 있었음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조선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

분명한 해방의 민족이론 없이 성급히 악단을 망라하여 조직한 「음건」이 민족음악의 방향에 대한 제시가 없기도 하였지만, 이에 앞서 처음부터 현 단계에 관한 뚜렷하게 역사 인식을 하고있는 일군의 신진 비판세력이 「음건」과 결별하고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이하, 프로음맹)을 1945. 9. 15에 결성할 것에 합의한다. 9. 28에 서울 관훈동 임시회관에서 결성식을 가진 뒤 9. 30에 문학·연극·미술동맹 측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하, 프로연맹)을 결성할 때 합류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음악인이나 단체와는 처음부터 음악의 해석이나 실천이 달랐다. 45. 10. 11 경성방직 근로자들의 해고 반대와 임금인상에 대한 노동쟁의가 일어나자 프로음맹원들은「프로연맹」과 함께 이곳을 찾아 위로음악회를 여는 한편 여성근로자들과 하루를 지새는 등 노동현장을 함께 체험하고 있는 실천행위에서 그 다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프로음맹 」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 즉 근로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고 이와 함께 음악을 반영하고 정초화시키려는 세계관은 그 행동강령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프로음맹」은 프롤레타리아 음악을 매진하기 위하여 그 이론과 실천을 「프로연맹」과 같은 유대에서 조직적 체계를 확립하고 강화하여 간다. 예술 자체의 특수성에 의한 주체적 예술활동과 그 동지적 결합체로서 조직적 강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광범위한 지지와 중간층의 획득을 위한 실천강령을 마르크시즘에 입각하여 예술운동을 전망한 「프로연맹」은 자연히 예술이론의 확립과 그 정당성의 지향을 위한 비평정신을 먼저 정초화하려고 했다.

「프로연맹」은 이어서 창작 상에 리얼리스틱한 진실성과 반영의 원리를 가지고있는 예술의 특수성에 만일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 선전도구로 시각화한 정치 지상주의적 견해이며 동시에 마르크시즘에서도 이탈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중간층의 획득과 광범위한 문화층의 조직화를 당면과제로 삼았다.9)

<표 3 프로음맹의 강령과 조직명단>

강 령

1.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음악건설을 기함

2. 우리는 반동적 음악에 대한 적극적 투쟁을 기함

중 앙

조 직

위원장 신막(愼幕), 서기장 이범준(李範俊),

작곡부장 김순남(金順男), 기악부장 윤기선(尹琦善),

성악부장 정종길(鄭鍾吉)

중앙집행

위 원

신 모(愼幕)·이범준(李範俊)·김순남(金順男)

윤기선(尹琦善)·정중철(鄭鍾吉)·강장일(姜長一)

박현복(朴賢福)·이호섭(李湖燮)·김혜란(金惠蘭)

김현숙(金賢淑)·이건우(李建雨)·이강열(李康烈)

정희석(鄭熙錫)

프 로

연 맹

음 악 부

중앙위원

신 막(愼幕)·이범준(李範俊)·김순남(金順男)

정중철(鄭鍾吉)·강장일(姜長一)

음 악 부

상임위원

위와 같음


「프로연맹」이 바라고 있는 「프로음맹 」의 기본방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맹 자체가 성숙한 기량의 음악가를 확보하기 위하여 동맹에 가입시키지 않더라도 유기적 관계를 맺고 그 영향하에 두는 것,

둘째, 전 조선음악가를 민족통일전선적인 성격으로 구성하여 이익집단이 되기 위한 고전음악연구회·향토음악연구회 등의 연구단체와 지방별·학교별·직장별 음악단체를 적극적으로 육성지도하여 음악대중의 조직적 앙양을 피하는 것,

셋째, 연극동맹과 긴밀한 관계로 각 가극단·악극단 등을 동맹의 영향하에 두고 곡과 가사 등을 제공함으로써 비속화를 방지하고 질의 향상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끝으로 음악학교·음악강습소를 개설하여 음악인을 양성하고 공장·사업장 등에 음악서클을 두고 지도하는 문제 등이 그것이다.10)

「프로음맹」은 실제로 衁. 프롤레타리아 음악이론을 확립하기 위한 비평적 작업, ㄴ. 프롤레타리아의 광범한 지지와 중간층 획득을 위한 실제적 음악작업, ㄷ. 비음맹 음악가와 통일전선적인 관계설정으로 그 성격을 동맹의 영향하에서 구축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ㄱ. 프로음맹의 위원장인 신막(愼幕)은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자본계급의 독재로 말미암아 근로계급이 정치적 무권리 상태에 놓이기 때문에 「좀 더 고급한 사회형태를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음악도 이와 같은 본질적 이념에서 발전해야한다고 인식한다.11)

이들은 생산관계의 총화인 경제적 관계를 토대로 그 위의 정치·문화 등 상부구조가 반영되어 있는바, 정치관계도 그 토대가 변화 발전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정치관계는 착취자가 피착취자를 지배하는 관계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를 지배하는 수단인 정치권 권력을 탈취하여 노동계급과 그를 지지하는 근로인민층에 옮겨 올 때만이 종래의 모든 불평·갈등·투쟁·전쟁을 해소하고 영원한 평화와 완전한 민주·독립이 보장되는 사회가 된다고 보고 있었다.

음악이 근로인민층에 토대를 두고 반영하는 음악이어야 한다는 이론은 동 성악부장인 정종길(鄭鍾吉)도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12)

즉, 현 단계의 조선 근로대중은 과거에 항상 「혹독한 압박을 받아 왔고 그 생활에 신음하는 까닭」에 「퇴폐적·허무적·유탕적(遊蕩的) 음악」만 있어 왔고, 이제 신국가의 건설을 위해서는 「씩씩한 근로대중의 음악」이 있어야 하며 동시에 착취하는 계급에 대하며 싸워 나갈 「투쟁가」를 제공하는 것이 현하 조선음악가의 급선무인데도 불구하고 예술지상주의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 그것이다. 아울러 근로대중을 위한 음악이 결코 저열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근로대중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오히려 현 단계에서는 우리 음악가가 근로대중을 절대 지지하여 그들에게 진정 건전한 음악을 공여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들이 선민(選民) 이데올로기로 착취와 피착취로 분리하여 인간과 음악을 규정하는 급진적 요소로 계급화 한 것은 스스로입지조건을 좁히고 있었기 때문에 이 미학적·사회적 이론에 익숙하지 않은 음악인은 스스로 놀래어 「프로음맹」에서 탈퇴하기도 한다.13) 그리고 바로 이 점을 같은 맹원인 김순남(金順男)조차 비판하고 있다.14)

그러나,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용어를 배제한다면 역사적·사회적으로 조건 지워진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조선의 근로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고 삶의 진실을 제공하여 새로운 음악현실을 구축하려고 한 것은 한국 음악역사에 있어 음악인에 의하여 새로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조선후기의 악학인(樂學人)에게서도 그러한 역동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년대 초 신채호나 30년대 전후의 카프KAPF에게서도 연계되어지고 있었다.15)

ㄴ. 먼저 작곡부장인 김순남(金順男)은 새로운 노래를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해방의 노래」·「우리의 노래」(이동규(李東珪) 작사)·「농민가」(박아지(朴芽枝))·「독립의 아침」(이주홍(李周洪)) 등을 내놓았다. 그 밖의 「자유의 노래」·「애국가」·「적기가」·「부총가(婦總歌)」 등과 앞서 「음건」 활동 시 나온 김순남(金順男)의 「건국행진곡」, 김성태(金聖泰)의 「독립행진곡」 등과 함께 프로음맹은 각종 집회에서 독창·제창으로 지도·보급시키면서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의 일체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예컨대, 45. 11. 5∼12 24 기간에 결성대회를 연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국농민조합 총연맹·전국청년단체 총연맹·전국부녀 총연맹 등에 집단적으로 소통을 시킨다.

특히 「해방의 노래 」(악보참고)는 개화기이래 각종 독립·애국·.계몽가에서부터 익힌 ┗리듬에다 민요에서 흔히 젖어본 셋잇단 처리,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의 가사 내용이 노동자 농민들의 역사적 현실성을 노래의 간결한 형식에다 절묘이 표출시켜 모두들 해방을 상징하는 당찬 동질감으로 급속히 불려지며 파급된다. 이 노래와 함께 많이 불려진 「농민가」(악보참고)는 민속악 장단과 음제도를 훨씬 더 많이 처리하여 가사와 함께 농민의 음악심성과 시대성을 고취시키고 있으니, 이것은 대상을 충분히 숙고한 결과로 보여진다. 김순남(金順男)은 벌써 자기의 길을 민족현실에서 음악언어가 어떠해야 할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프로음맹은 노래운동 이외에도 최초의 공개 예술제를 10. 18 대륙극장에서 모든 혁명자를 고취하는 「혁명자 구원예술의 밤」을 개최하고 이어 인천·부평·소사 등지로 순회 공연을 계획하기도 한다.

ㄷ. 노선이 다른 음악가와 유기적인 관계로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노력한 점은 「음건」이 10. 17에 해체하고 10. 22 「전국음악가 대회」를 소집, 「조선음악가협회」(이하, 음협)를 결성할 때 그 소집위원과 「음협」의 중앙위원에 프로음맹 측이 참가하여 활동하는데서 확인된다. 그리고 「고려교향악협회」에 가입 활동한 것도 그것이다.


「프로연맹 」을 주도하고 있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후, 프로동맹)은 10. 10 조선공산당이 정치노선과 조직확대, 강화에 대한 결정으로 장안파가 비판을 받고 박헌영의 재건파 노선이 재확인됨에 따라 박헌영 노선 중심의 「문건」으로 통합된다. 「조선문학가동맹」이 탄생, 문화전선의 통일이 이루어지는데 여전히 박헌영의 「8월 테제」는 유효한 행동지침이었다. 「프로연맹」도 해소,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음악전선이 이루어진다.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

해방된 지 한 달만에 현제명(玄濟明)은 음악인을 규합하여 9. 15에「고려교향악협회」(이후, 고교협)를 결성하고 이사장에 취임함으로써 해방공간 악단에 여전히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었다. 현제명은 해방 직전 일본제국주의 침탈시대에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이사장이자 「조선음악협회」의 이사, 그리고 「경성음악연구원」 원장을 지낸 거물급인데다 해방 후 미군이 「남한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등장하자 정치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에 유학한 바 있는 그에게 미군정과 한민당은 힘의 언덕이었다.

해방 후 생산감축 높은 인플레이션·식량부족 등 경제적 난관에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많은 음악인들의 실업 해소는 전기간 동안 긴박한 과제였는데, 「음건」의 일부 음악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급속히 탈퇴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 새로운 관현악단의 출현을 원하는 음악인들까지 가세하여 정치력·경제력 있는 현제명 중심으로 「고교협」과 그 산하의 「고려교향악단」(이후, 고려 )을 조직한 것이었다. 현제명은 이미 「건준」에 불참하고 「인공」을 부인하는 친일·반공세력의 「한국 민주당」(이후, 한민당)에서 정당활동을 하고 있었다. 미군정에 협력하고 있는 「한민당」은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실권을 장악할 기틀이 마련되어 가고 있었다.

「고교협」은 「조선음악예술」의 질적 향상과 이에 관한 사업의 발전을 추진함을 목적으로 하는 강령을 내세웠다. 「고려」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기연주회를 통하여 주로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스트라우스·차이코프스키 등을 연주한 것을 보아도 순수음악 지상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역사적 과제인 일제 잔재의 청산문제나 민족음악 수립은 외면한 채 정치적 순수로 나타났음은 그 강령이나 활동에 잘 나타나고 있었고, 그리고 스스로 일제 잔재를 청산한 수도 없었다.

창단 당시 「고려」는 대충 17명 정도였다. 「고려」의 첫 무대출연은 「한민당」 결성식(45. 9 16)을 낙원동 협성중학교에서 역사적으로 거행할 때였으니, 정치 지향적 순수를 마냥 떨칠 수가 없었다. 「고려」는 46년 초에는 63명에 이른다. 점차 2관 편성을 목표로 단원 확보에 주력 하여왔다. 창립연주회는 45. 10월 수도극장에서 계정식(桂貞植) 지휘로 있었다. 「고교협-고려」는 제1기 기간 동안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다가 제 2∼3기에는 여기에서 탈퇴하여 조직한 「서울관현악단」과 유명한 「땅뺏기」 갈등을 거쳐 분리공간 벽두에 해체된다.

다음 「고교협-고려」 명단은 창립서부터 1947 벽두까지 거쳐간 회원 전부를 기재한 것이나, 회원은 보통 60명 안팎이었다. 주목되는 사실은 미 육군헌병사령관 러치(아놀드)가 제2대 미군정 장관으로 취임(45. 12. 16)하자 현제명은 재빠르게 러치 군정 장관을 명예회장으로 앉히고, 동시에 문교부 음악과 협동과장인 미 육군중위 포크너를 객원 지휘자로 초빙하는 등 미군정 협력 하에 활동한 점이다.

<표 4 고교헙-고려의 강령과 명단>

강 령

조선음악예술의 질적 향상과 이에 관한 사업의 발전을

추진함을 목적으로 한다.

주 요

부 서

명예회장 러치 미군정 장관

이 사 장 현제명(玄濟明)

사무국장 김관수(金寬洙)

총 무 김생려(金生麗)

지 휘 계정식(桂貞植)·포크너·김성태(金聖泰)·임원식(林元植)

회 원

김성태(金聖泰)·김원복(金元福)·김학상(金學相)·김병노(金炳魯)

김혜란(金惠蘭)·남궁요설(南宮堯卨)·이인범(李仁範)·임원식(林元植)

이인형(李仁亨)

회원이자

(고 려)

단 원

김동규(金東奎) 김영규(金英奎) 김인수(金仁洙) 김종대(金鍾大)

김창환(金昌煥) 김흥교(金興敎) 남창현(南昌鉉) 문서운(文瑞運)

문학준(文學準) 민원규(閔元奎) 박형배(朴亨培) 백영준(白榮俊)

신병무(申炳武) 안준교(安駿敎) 류정용(劉廷鏞) 윤낙순(尹樂淳)

이강열(李康烈) 이기윤(李基潤) 이동훈(李東勳) 이동희(李東熙)

이병문(李炳汶) 이봉수(李奉秀) 이영돈(李泳敦) 이유성(李有聖)

이용철(李用哲) 이준식(李俊植) 이희성(李熙성) 전희봉(全熙奉)

정희석(鄭熙錫) 전봉초(全鳳楚) 조봉덕(趙鳳德) 태창원(泰昌源)

최관수(崔觀洙) 허 상(許 湘) 현수강(玄壽康) 홍광은(洪光銀)

권용진(權龍鎭) 강성기(康性基) 강필정(康弼禎) 김윤재(金潤載)

김준덕(金俊德) 김희조(金熙祚) 나순영(羅順榮) 문인연(文麟連)

박국녹(朴國錄) 백해제(白海帝) 송호영(宋昊榮) 송일규(宋一圭)

장하린(張河麟) 조원희(趙元熙) 최영시(崔泳祐) 홍수만(洪壽萬)

홍승학(洪承鶴) 홍현걸(洪鉉傑)

(고 려)

객 원

김길영(金吉永) 김남철(金南哲) 김두철(金斗徹) 김응무(金應珷)

김재홍(金在洪)

(고려)연구

김만복(金萬福) 문길용(文吉容)


강정

-----------

주요

부서

조선음악예술의 질적향상과 이에 관한 사업의 발전을

추진함을 목적으로 한다

명예회장 러치 미군정장관

이 사 장 으렸띠

사무국장 奇寃洙

총 무 令◎麗

지 띠 株1갉f'·포크너 金또泰·林표流


회훤

冷꿸奈 · 뚤業◎ · 룬消H · 淵辨 ·奇닉릿 · ◎淺卨 ·

制 滅·株씨? . 刻 '.7'


회원이자

(고 려)

단뭔







冷◎辛 各榮출 刊 :洙 솥濾犬 ◎"凉

순煦諦 ◎漑 端漣 文깔걸 愷쵸努

朴◎塢 1'滿條 니띤팎 安駿敦 刻理鎬

잣樂◎ 孝凉?,'! 字쳔꺾 李成約 亨車熙

乍‥'湟 刻希 凍쳔? 字」캔 쐈7消

烈端? 李熱성 숫熙準 脚辦鈴 숟鳳送

塏風德 솎닌례 법沈릴 論 쎈 立슬』

,잤兆銀 權龍績 凉◎雄 凉辯淡 奇滯機

烈織_ 憔姉 뀐진 據朧 情脚

r7泳令 ◎텃한 次一令 後河麟 趙군烈

愷◎쳐 깎壽緖 洪希努 팎鈗經

(고 려)

객원

술똔◎ 金兩논 金◎徵 金應鑛 金布,洪

(고려 )연구

◎緖체 丈,'i꿍

























이왕직 아악부→구왕궁 아악부

일본제국주의의 폭행에 의하여 장악원 장악과→이왕직 아악대 (1910)→이왕직 아악부 (1913)가 끊임없이 약체화로 시련의 도전을 받았지만 그 폭행시대를 견디고 전통의 음악을 지켜왔다. 해방과 함께 이왕직 아악부는 45. 11. 8 미군정의 법령 제26호에 의거, 이씨 왕직의 명칭변경 공포에 따라 「구왕궁(舊王宮)」으로 변경되자 자연히 「구왕궁 아악부」(이후, 아악부)로 직제가 바뀌었다.

다음은 그 때의 강령과 명단이다.

<표 5 구왕궁 아악부의 강령과 명단>

강 령

우리에겐 강령같은 것은 없다. 그저 이제까지와는 달리 부질없는 소극적 묵수에 좌좌할 것이라는 신념만은 누구에게나 넘치고 있다. 아악부는 무엇하느냐의 대답은 시간이, 금후의 사업이 말해 줄 것이다.

아악사장대리

장운시

아 악 사

이주환 성경린 주해용 이철천 김영란

김보남 김광득 김성진 김태섭 김창현

김상진 김종성 김보영 김담영 김준철

박장길 박종욱 서상운 심동섭 이득환

이경덕 왕종진 류영수 한재수 홍원기

박경서 윤철영







강 령

우리에겐 강령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이제까지와는 달리 부질없는

소극적 묵수(墨守)에 좌좌(坐坐)할 것이라는 신념만은 누구에게나

넘치고 있다. 아악부는 무엇하느냐의 대답은 시간이, 금후의 사업이

말해 줄 것이다.

아악사장대리

장연식(張演湜)

아 악 사

이주환(李珠煥) 성경인(成慶麟) 봉해용(奉海龍) 이재천(李載天)

김영윤(金永胤) 김보남(金寶男) 김광득(金光得) 김성진(金聖振)

김태섭(金泰燮) 김창현(金昌鉉) 김상진(金相振) 김종성(金鐘聲)

김보영(金寶泳) 김담영(金潭泳) 김준전(金俊錢) 박장길(朴長吉)

박종욱(朴鐘旭) 서상운(徐相云) 심동섭(沈東燮) 이덕환(李德煥)

이강덕(李康德) 왕종진(王宗鎭) 유영수(柳永秀) 한재수(韓在洙)

홍원기(洪元基) 박경서(朴慶緖) 윤철영(尹喆榮)


회원은 약 30명이었다.

「아악부」는 이미 조선총독부가 1941에 조직된 「조선음악협회」 내 「조선아악부」(함화진(咸和鎭) 부장)와 갈등을 겪어 오다가 해방이 되자 악단의 대동단결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독자노선을 걸어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함화진(咸和鎭)이 「음건」의 「국악위원회」 위원장으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악부」는 부민관에서 몇 차례의 미군 위문연주, 방송을 통한 아악해설, 춘천·개성 등의 초청 순회연주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아악부」에 뚜렷한 강령이 없었음은 그만큼 역사적 반성이 없었다. 일본제국주의 질곡 하에 처절한 「아악의 지킴」이 역사적 공헌이라 할지라도, 또 국악의 소통을 적극적 전환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강령의 묵시적 실천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아악 문화권 안에서와 활동이었다

해방의 민족현실에서 왜 아악이 민족음악이며 우리 모두의 음악인가를, 그리고 박(博)과 통(統)의 악학(樂學)을 정립하여 새로운 자리 매김을 모색하면서 전환했어야 했다. 아악이 중국 음악일 뿐이라는 비판에 편협하게 집착하지 말고 말이다. 바로 그 점을 뒤에 성경인(成慶麟)은 자기 반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아악이 여러 사람의 아악일 수 있는가에 조금 생각이 부족했음을 아악인은 뉘우쳐야 할 것이다.」16)

아악은 고악(古樂)으로 밝히기 때문에 「지킴」의 불변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적중시키는 변성(變聲)의 아악(新樂)도, 또 민(民)의 악(樂)도 바로 정악의 역할 수행임을 깨닫고 더 역동성으로 펼쳐야 했다.

한편, 「아악부」의 불변성에 가까운 부단한 노력은 드디어 1948. 11월에 국회에서 「아악부국영안」이 통과되어 1949년부터는 정부 예산이 지원됨과 동시에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란 직제로 탄생, 오늘에 이르렀다

국악원

앞서 말한 「조선음악협회」의 「조선음악부」 부장인 함화진(咸和鎭), 상무이사 박헌봉(朴憲鳳), 이사 김석구(金錫九)·최경식(崔景植) 등은 해방과 함께 「음건」의 「국악위원회」로 자리바꿈을 하고 출발하였다. 누구나 그러하였듯이 전력에 관한 양심선언 없이 말이다. 「음건」의「국악위원회」는 기존의 「이왕직 아악부」와 통합을 시도하였다. 「문협」과 박헌봉의 노력으로 「국악위원회 」가 「국악건설본부」로, 다시 「국악회」로 발전하여 드디어 45. 10. 10에 「국악원」으로 확대·결성하였다.

그러나, 「이왕직 아악부」와는 일부와의 통합이었고 또 중심인물들과 합의된 것이 아닌 일반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에 늘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더우기 창악계 중심으로 조직된 데다,「조선 전통의 음악예술을 확보하고 과거 특권계급에게 독점되었던 음악예술을 조선민중에게 절대개방을 기함」과 같은 분명한 강령으로 방향전환하고 있기 때문에서도 그 긴장은 고조되었다

「국악원」은 서울시 중구 다옥정 92번지에 소재를 두고 10. 10에 다음과 같은 강령과 조직으로 출발한다

<표 6 국악원의 강령과 명단>

강 령

1. 세계음악사상에 독특한 조선 국악의 원리를 파악하여 조선 국악의 체계적

이론을 수립하고 진지한 연구와 완전한 발전을 기(期)함.

1. 조선 전통의 음악예술을 확보하고 과거 특권계급에게 독점되었던 음악예술

을 조선 민중에게 절대개방을 기(期)함.

1. 본악이나 외래악은 물론하고 저열경부(低劣輕浮)한 음악은 철저히 배격하

고 전통적 유아명랑(幽雅明朗)하고 순수한 신조선음악건설을 기(期)함.

회 원

위 원 장

부위원장

총 무 국

문 화 부

사 업 국

국극사원


사 업 부

함화진(咸和鎭)

박헌봉(朴憲鳳)

유기용(劉起龍)

장연식(張演湜) 김윤덕(金潤德) 김천흥(金千興) 정남희(丁南希)

최경식(崔景植) 이병성(李炳星)

임서방(任曙昉)

정원섭(丁元燮) 오태석(吳泰石) 정남희(丁南希) 조상선(趙相鮮)

강장원(姜長沅) 한갑득(韓甲得) 김재선(金在先) 장영찬(張永讚)

박녹주(朴綠珠) 김소희(金素姬) 임소향(林素香) 박귀희(朴貴姬)

조순애(曺順愛)

김주종(金柱鐘) 김주전(金主傳)


국악원이 내건 강령이 국악의 이론확립과 현 단계에 적용시키려는 역사인식이라는, 민중과 함께 자기변혁으로 봉건주의 세계관을 청산하려는 점, 국악의 민중화에 따른 비속화를 막고 예술화시키려는 점등은 분명 국악인들의 역사적인 해석이다.

이들은 실제 해방공간 제2기 후기 직전만 하더라도 창극·민요·풍물을 삶의 예술로 역사화시키고 풍물채보에 관한 토론을 전개하거나, 「조선음악가동맹측 작곡가들과 국악에 관한 쌍방간의 대화가 이루어진다거나,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가입하여 문화전선을 공동으로 펼치고 있었다.

또한 2회에 걸친 전국풍물경연대회, 국악원직속 창극단 「국극사」 조직, 춘향전 등의 창극발표, 전국향토민요 민속무용 발표회, 국악전람회 등을 개최하여 새로운 민족음악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다. 대개의 발표회가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은 한국인들의 음악정서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1947년 8월 직전부터 미군정과 관계 당국이 민족좌파를 비합법화하자 이에 따라 위원장 함화진(咸和鎭)은 피검된다. 자연히 부위원장인 박헌봉(朴憲鳳)이 위원장으로, 사퇴한 간부들을 대신하여 채동선(蔡東鮮)이 연구부장으로 바뀌는 등 그 활동이 위축된다. 더욱이 「아악부 국영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1948년부터 정부의 지원이 있는데다가 함화진이 이승의 삶을 마감하자 그 위축은 극심해진다. 6·25가 일어나자 공기남(孔基南), 안기옥(安基玉), 임동실(林東實), 임소향(林素香), 정남희(丁南希), 조상선(趙相鮮), 최옥산(崔玉山) 등 주로 창악 관계자가 월북하였다. 6·25 기간 동안 북한은 「국악동맹」으로 그 반대쪽을, 남한은 9·28 수복 후 「부역자 심사위원회」에 따른 다른 쪽을 타해 시킨 것은 분단과 체제의 고착화에 의한 비극 그것이었다.

조선음악가협회

「프로음맹 」과 「고교협-고려」 결성으로 타격을 입은 「음건」은 45. 10. 22에 「연합국 환영준비를 위한 잠정적 기관이던 「음건」은 그 취지를 달성하였으므로 해소한다」라는 성명발표와 함께 해소한다. 이에 앞서 악단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인식한 「고교협」측의 현제명(玄濟明)·김성태(金聖泰)와 「프로음맹」측의 신막(愼幕)·이범준(李範俊)·박영근(朴榮根)과 음건측의 채동선(蔡東鮮)·박태준(朴泰俊)·최희남(崔熙南)·한갑수(韓甲洙) 등은 새로운 조직체 결성을 위한 소집위원이 되어 10. 22에 「전국음악가 단체대회」를 열었다. 장소는 기독교 청년강당이었다. 이어서 강령규약과 예산안을 통과시킨 후 임원을 선정함으로써 「조선음악가협회」(이후, 음협)가 결성된 것이다. 사무실은 서울시 종로구 종로 2가 19번지에 두었다.

<표 7 음협의 강령과 임원명단>



강 령1

1 음악가 상호의 친목을 친모하며 조선자주독립의 촉성에 이

바지함

2 음악예술의 진정한 향상과 정당한 발전을 期함

3 음악가의 생활보장을 대면하며 생활향상을 脚함. 諦 珍


회 원




71 훤 장 李永반

부위원장 愼 톤

상 무 朴業楓

위 원 辛導◎,'! 安嫡讀 計奈鐘

兪밸奈 韓턴릅 헐띤商

고 문 據賣植 朴慶冷 業車鮮

求載勳 朴泰條 安輦永





강 령

1. 음악가 상호의 친목을 친모하며 조선자주독립의 촉성에 이바지함.

2. 음악예술의 진정한 향상과 정당한 발전을 기함.

3. 음악가의 생활보장을 대면하며 생활향상을 기함

회 원

위 원 장 이영세(李永世)

부위원장 신 막(愼 幕)

상 무 박영근(朴榮根)

위 원 이흥열(李興烈) 안병소(安炳曇) 박태현(朴泰鉉)

김성태(金聖泰) 한갑수(韓甲洙) 최희남(崔熙南)

고 문 계정식(桂貞植) 박경호(朴慶浩) 채동선(蔡東鮮)

김재훈(金載勳) 박태준(朴泰俊) 안기영(安基永)


「음협 」의 결성은 음악인에 관한 실제적 관심과 자주독립에 관한 역할 등 「음건」보다 강령이 구체화되어 통일적 조직체로 보여졌다.

그러나, 「프로음맹」이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재결성하여 해방공간 제2기부터 흔들릴 수 없는 민족음악이론과 치열한 사회인식으로 활동하고, 「고교협-고려」 역시 활성적인 연주활동이 계속 이루어지자 「음협」은 결성 후 대동단결이 무색하여질 수밖에 없었다.

「전재(戰災)동포 구제음악회」와 「3·1절 기념 야외연주회」, 그리고 「조선음악가동맹」이 불참한 가운데 개최한 「우리 작품발표회」(46. 6. 27∼30)를 끝으로 해산되어 46. 8월에 결성되는 「전국음악문화협회」로 흡수된다.

조선음악가동맹

「프로음맹」은 「프로동맹」의 해소와는 달랐다. 「프로동맹」측 일부가 거센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건」과 전격적인 통합이 이루어져 양 단체가 해소하고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결성한 경우와 달리, 「프로음맹」이 속하여 있는 「프로연맹」이 박헌영의 재건파가 장안파를 제압하고 주도권을 획득하는 조직 정비과정에 따라 해소될 때 함께 해소된 것이다.

45. 12. 13 「조선음악가동맹」은 「조선문학가동맹」과 함께 결성되었다.

「조선음악가동맹」(이하, 음악동맹)은 「프로음맹」과 일부「음협」을 흡수, 7대 강령을 발표하고 결성한 것이다. 해방공간 제2기 기간을 완전하게 주도하고, 제3기부터는 비합법단체로, 분리공간에서는 이 땅위에서 사라진다.

이들 외에도 강철수(姜哲守)·고종익(高宗益)·권원한(權元漢)·김봉진(金鳳鎭)·김영길(金永吉)·김종대(金鍾大)·김태연(金泰淵)·김호진(金昊鎭)·문학준(文學準)·박영서(朴英緖)·박현숙(朴賢淑)·신두성(申斗星)·신용대·안성교(安聖敎)·우달형(禹達亨)·이강열(李康烈)·이경팔(李璟八)·이계성(李桂成)·이규남·이기윤(李基潤)·이용철(李用哲)·이유성(李有聖)·이인형(李仁亨)·이준식(李俊植)·유경호(兪慶鎬)·윤낙순(尹樂淳)·장덕영(張德英)·정수창(鄭守昌)·정순흥(鄭淳興)·정영원(鄭英源)·정영재(鄭永在)·정춘택(鄭春澤)·조경·진학주(陳學柱)·최봉진·최희남(崔熙南)·최성자·황순현(黃舜鉉)·한의송(韓義松)·김인욱(金仁郁)·서오준(徐伍俊)·남궁요설(南宮堯卨)·홍광은(洪光銀)·홍광수(洪光洙)·현수강(玄壽康)·현경섭 등이 「음악동맹-서울지부」 맹원으로 점차 확보되어 갔으며 동시에 중앙집행위원과 더불어 활동하였다. 지방조직으로 맨 처음 「음악동맹-인천지부」가 결성, 신현영(申鉉瑛)·최성진(崔星鎭)·이필상(李弼商) 등이 활동하는데 앞의 두 사람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음악동맹」의 맹원은 처음에 중앙집행위원과 서울지부를 포함하여 50명이었는데, 성악 17, 기악 7, 작곡 4, 평론 2, 합창 20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외에 채동선(蔡東鮮)이 김순남(金順男)과 함께 「음악동맹」 이름으로 「민전」 결성 시 중앙위원에 심사·선임된 것을 보면, 채동선(蔡東鮮)은 「음악동맹」이 결성 직후부터 「대한연주가협회」가 결성되어 참가하는 46. 3월까지는 이들과 함께 같은 이념으로 길을 걸었다.17)

「음악동맹」의 강령은 다른 「문련」의 단체인 문학·미술·무용·연극동맹의 같은 내용보다 두 가지가 더 많다. 즉, 「악단의 반민주적 세력의 몰아냄」과 「음악의 민족적 유산을 정당히 계승함과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 항목이 그것이다. 이 강령은 46. 2. 8∼9 전국문학자대회 이전에 발표한 당중앙위원회의 「조선민족문화건설의 노선」(잠정안)의 항목 중에서 「우리는 고(古)문화의 장점을 계승하고 외국의 진보적 문화론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우리 민족의 특성을 발휘한 문화론 세워야 한다」라는 내용과 같다.18) 말하자면 이 강령이 잠정안 발표 직후에 참조하였을지라도 「음악동맹」은 그만큼 이 분야를 강조·확인한 셈이다.

<표 8 음악동맹의 강령과 임원명단>

강 령

1. 일본 제국주의 잔재음악의 소탕을 기함.

1. 봉건주의적 유물음악의 청소를 기함.

1. 음악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배격함.

1. 악단의 반민주주의적 세력의 구축(驅逐)을 기함.

1. 음악의 민족적 유산을 정당히 계승하고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를 함.

1. 진보적 민주주의 민족주의 문화의 건설을 기함.

1. 국제음악과의 교류협조를 기함.

임 원

위 원 장 김재훈(金載勳)

부위원장 안기영(安基永)

서 기 장 신 막(愼 幕)

총무부장 이범준(李範俊)

조직부장 박영근(朴榮根)

사업부장 최창은(崔昌殷)

작곡부장 김순남(金順男)

연주부장 정종길(鄭鍾吉)

중앙집행 김재훈(金載勳) 안기영(安基永) 신 막(愼 幕) 정종길(鄭鍾吉)

이범준(李範俊)

위 원 박영근(朴榮根) 최창은(崔昌殷) 김순남(金順男) 이건우(李建雨)

정영모(鄭榮模) 김 훈(金 熏) 오창진(吳昌鎭) 신용팔(愼鏞八)

강장일(姜長一) 하길한(河吉漢) 김창섭(金昌燮) 박남수(朴湳洙)

노광욱(盧光郁) 이근락(李根樂) 신현영(申鉉瑛) 윤태섭(尹泰燮)

한평숙(韓平淑) 장보원(張寶媛) 최성진(崔星鎭)


이로써 「음악동맹」이 결성되던 12월말에는 「고교협-고려」·「음협」·「음악동맹」이 양악 쪽에서, 그리고 국악분야에서는 「국악원」과 「아악부」가 모두 건재하게 있었고, 최초의 「음건」이나 뒤의 「프로음맹」은 이 기간동안 사라졌다. 이 조직체는 이제 제2기 해방공간에서 적어도 이념이 같은 끈끼리 묶어지게 되는데, 「음악동맹」과 「국악원」이 왼쪽날개로, 「고교협-고려」·「음협」·「아악부」가 오른쪽 날개를 형성하여 서로를 마주 보며 해방공간을 날아간다.

해방공간 제2기

「해방공간 제2기」(1946. 1. 1∼1947 8. 15)는 모스크바 3상회의 (45. 12. 27)에서 한국 문제를 다룬 신탁통치안이 알려진 뒤 1946년 벽두부터 민족현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좌·우의 날개대립이 본격화되는 기간이다. 제1기 기간동안 조직을 정비한 악단은 제2기 벽두부터 이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기후도가 형성된다. 이 기후도는 사실 제2기뿐 아니라 해방공간 전기간동안 이루어진다. 제2기의 하한기점을 47. 8. 15까지로 잡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이때부터 미군정에 의하여 「문련」뿐 아니라 「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의 모든 정당·사회단체·음악단체가 비합법화 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이 음악단체의 「국악원」·「조선가극동맹」·「대중음악가협회」는 자체 조직개편으로 난국을 대응하는데 비하여, 「음악동맹」은 분명한 자기 세계관 때문에 움직일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제2기의 전기는 46년 벽두부터 46. 8. 15까지, 제2기의 후기는 46 8. 15부터 47, 8 15까지를 각각 구분할 수 있다. 제2기의 전기에 비하여 후기는 군정과 관계 당국의 금압이 강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새로운 단계의 문화운동으로 실천하기 때문이다.

「전재민을 위한 종합예술제」·「3·1기념 종합예술제」 그리고 문화대중화운동을 정점화시킨 「문화공작대」 등의 「음악동맹」 음악회는 실천의 일환이었다 .

한편, 오른쪽 날개가 존재론적 순수미학관으로 서양음악을 해석하는 것에 비하여, 왼쪽 날개는 사적유물관과 그 미학관을 전통과 관련 지워 해석하되 해방공간의 현 단계에 적용·대응하고 있었다. 동시에 후자가 도식화된 계급미학론을 나름대로 자기 비판하면서, 민중·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음악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통을 재해석한 결과이다. 이들의 음악운동을 구조화시킨 물음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음악 할 것인가 ?」에서 실천적 덕목인 인식과 윤리 그리고 미적 표현성을 강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물음은 박용구(朴容九)의 비평에서 방향이 잡혀진다. 기실, 이 물음은 해방공간에서 비롯된 첫 물음이 아니다. 조선후기의 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려 하였던 악학인(樂學人)들의 물음 중 하나였는데, 어느 음악사회이고 역사적 존재임을 깨달은 개인이나 집단은 동시에 던질 수 있는 것으로, 그만큼 우리의 사유체계이기도 하다.

이 해석의 결과 드러낸 작품은 김순남(金順男)·이건우(李建雨)에 의하여 정점화 된다.

다른 한편, 「음악동맹」 출현으로 분명한 성격의 통일적 활동이 펼쳐지자, 우익적 성격의 연주가들이 「대한연주가협회」를 결성(46. 3)한데 이어, 8월에는 전 악단을 망라하는 「전국음악문화협회」(이후, 음문협 )가 결성된다. 그러나 「음문협」이 여전히 현제명 중심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또 다른 음악협의체가 1947. 1. 10에 「전국음악단체협의체」(이후, 음단협)로 발전, 결성되었다.

그 동안 「음협」은 47년의 「우리 작품발표회」(6. 29∼30)이후 「음문협」이나 「음단협」에 흡수, 해체되었다. 기타 군소 음악단체가 해방 전국시대를 맞이한 것도 제2기 기간이다. 「경성음악학교」(교장 현제명, 교무과장 김성태)→「국립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 「민족음악문화연구회」(나운영), 「서울관현악단」·「서울교향협회」(현제명)·「시조연구회」(이병기)·「조선가극협의회」(김상진(金尙鎭))·「음악가의 집」·「전국취주악연맹」·「전국음악교육자협회」 등이 1946년에, 「대중음악협회」(김해송(金海松))·「시온성합창단」(이동일(李東日))·「성종합창단」 등이 1947년에 각각 결성되었다. 이외에도 「경성 3중주단」·「올포이스 4중주단」·「서울합창단」·「연악원」 등이 활동하였다.

이 기간의 새로운 해석집단이 1947. 2월, 채동선(蔡東鮮)을 중심으로 「고려음악협회」(이후, 고음협)를 결성·부각한다. 「고음협」 회원 전체가 규합된 해석이 아니라 할지라도, 채동선은 좌파의 비조선적 내용을 비판한데 이어 극우 경향을 띠고 순수음악지상주의자들의 비순수성을 파헤치면서 「민족자결정신」에 입각한 민족적 양심과 강렬한 조국애를 표방하고 나섬으로써 새로운 해석집단을 형성시킨다.

지금까지의 제2기 기간의 흐름을 주요음악단체 중심으로 도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제2기 해방정국 상황

해방정국은 일반적으로 강력한 지도력의 부재, 정치적 훈련의 결여, 식민지하에서 장기간에 걸친 정치활동의 억압,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미군정의 「인공」 부인과 그 탄압을 위한 정당결성 지원 등의 이유로 수백 개의 정당 사회단체가 난립하고 있었지만 크게 네 가지 세력으로 구별하고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대중적 국민정당을 지향한 여운형 계통의 중도좌파(근로인민 당), 미군정과 쉽게 결탁하고 반공친미정권을 수립하는데 앞장선 민족우파 계열의 한국 민주당, 신민주주의·신민족주의를 표방하다 남한단정론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주장한 안재홍·김규식·김구 등의 중도우파계열(국민당), 박헌영·이강국 등이 조선공산당(조공)을 재건하고 「전평」·「전농」·「민청」·「부총」 등 외곽단체를 조직하여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등의 네 세력권이 그것이다. 특히 「조공」은 여러 외곽단체들을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중심으로 우익과 미군정에 대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가다가 미소공위가 결렬된 46. 7월 이후 남한에서 불법화되자 무장투쟁을 준비하여 나간다. 그리고 좌익정당을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46. 11. 23)하였지만 남한의 반공친미정부수립 이후(48. 8. 15) 제거된다. 당연히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민족우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제2기의 조선음악동맹

이러한 해방정국에서 「음악동맹」은 「8월 테제」를 발전시킨 「조선민족문화건설의 노선」에 입각하여 「강령」을 실천한다. 그리고 당의 전위조직인 「민전」과 그 외곽단체로서 25개 단체가 모인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이후, 문련)에 참여하여 집단 역량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음악동맹 」은 현 단계에 건설되어야 할 과제가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아닌 민족음악문화, 제국주의 잔재와 봉건적 유물의 청산을 기하는 음악운동, 인민 속에서 그리고 인민을 통한 민족음악건설의 목표, 혁명적 로맨티시즘과 진보적 리얼리즘이 바탕이 된 민족음악, 전통음악의 장점을 계승하고 외국의 진보적 문화론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민족음악문화를 창출시키기 위해서도 「문련」과의 공동 문화전선을 펼친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음악동맹」이 이러한 실천을 위하여 「국악원」과 제휴는 물론 「아악부」에서 전통국악기를 연구한다는 사실이다.19)

따라서 「음악동맹」은 민족음악문화를 건설키 위한 방향으로, ㄱ. 조직정비와 확대, ㄴ. 민중·민족을 위한 민족주의 음악 창출과 소통, ㄷ. 비평작업을 구도화 시켜 실천한다.

ㄱ. 먼저 민족통일전선전술에 의한 당의 외곽단체를 주축으로 결성한 「민전」(46. 2. 15∼16)에 참여·연대화 한다.

「민전」 중앙위원에 김순남·채동선이 「음악동맹」원으로 심사되어 선임된다(391명 중). 그리고 김순남은 「민전」의 교육문화대책연구위원(55명)의 한 사람으로 전문위원에 선임되었다(노선 갈등을 겪은 채동선은 「남조선 민주의원」 결성(46. 2. 14) 이후 이에 동조하는 「대한연주가협회」 결성에 참여, 결별하였다). 이로써 김순남은 「민전」과 「음악동맹」의 유기적인 관계로 맺게 할 수 있었다. 「음악동맹」은 이어 「민전」산하의 「문련」에 「조선가극동맹」·「국악원」·「대중음악가협회」와 함께 참가하였다. 「문련」은 가장 합법면을 존중하고 문화의 대중화 및 대중계몽에 주력하였는데, 이들과 함께 「음악동맹」은 경기도 경찰부가 법령 68조를 적용 발표한 「극장흥행취체령」(46. 3. 5) 철폐 요구·수도 경찰청장 장택상이 발표한 「홍행취체에 관한 고시」(47. 1. 31) 철폐·「미소공위」에게 협의체로서 한민당을 제외시킬 것에 공동으로 대응하였다. 특히 「민중의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오락이외에 정치나 선전을 일삼아 치안을 교란시킨 자는 엄벌에 처한다」라는 장택상(張澤相)의 「흥행취체에 관한 고시」에 대하여 한민당 측은 「당연한 조치」로 환영한 반면, 사상 없는 예술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고시가 문화예술인의 자유를 간섭하려는 의도적 탄압정책으로 여긴 「문련」은 46, 2. 13 「남조선문화예술가 총궐기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이 대회의 준비위원으로 김순남·박영근·함화진 등이 선임되었고, 실제 대회에서는 「음악동맹합창단」의 「해방의 노래」·「유격대의 노래」에 이어, 박영근의 「방송의 자유를」과 강장일의 「인민의 음악을 수립하자」라는 보고가 있었다. 이 보고에는 남궁요설·김순남도 하였다. 2천명이 모인 이 대회에서 4시간만에 「문화예술에 관한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제2기 후기 기간에 「문련」과 함께 전국에서 활동을 펼친 「문화공작대」도 「음악동맹」의 연대강화였다.

ㄴ. 「음악동맹 」은 민중·민족주의를 위한 민족주의 음악창출과 소통에 의한 민족공동체 운동을 구체화시킨다.

김순남의 「여맹의 노래」(임화)와 이건우의 「반전가」(이건우)·「민전행진곡」(임화·김광균(金光均)·오장환(吳章煥)·김기림(金起林) 합작), 그 밖의 「유격대의 노래」·「미소공위 경축의 노래」 등의 노래가 새로이 창작되는 한편, 기존의 「해방의 노래」·「건국행진곡」 등과 함께 각종 대회나 집회(전국문학자대회·전국인민위원회 대표대회 등), 그리고 여러 공장과 농촌·거리 등지로 이 노래들을 가지고 소통시킨다. 이 노래들은 「해방가요 신작발표회」(46. 5. 4∼6)를 통하여 소개되기도 한다. 이러한 노래들은 그 가사가 「민전행진곡」처럼 일본제국주의의 남은 뿌리를 소탕하고 봉건주의 잔재의 청산 그리고 반민주주의적 세력의 몰아냄·민중과 함께 하는 민족전선을 구체적으로 나타냈을 뿐 아니라, 대부분 노래양식에 있어서도 전래의 음계를 구조화시킴으로써 민족의 유산을 정당히 계승한 이유 때문에서도 「음악동맹」의 강령은 확인되어가고 있었다. 「노래 운동」이 가사에서 민족현실의 인식이, 곡에 있어서 민족공동체의 정서를 함께 정초화시키려는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음악동맹」은 제2기 후기(46 8. 15∼47. 8 15)에 역량을 가장 집중적으로 드러내면서 강령을 세 가지 측면에서 실천하였다.

첫째는 「문련」과 합동으로 「예술의 밤」(46. 10. 18)·「조국에 바치는 밤」(46 12. 26) ·「시와 음악의 밤」(46. 12. 25)·「제1회 종합예술제」(46. 12. 25)·「3·1절 기념 종합예술제」(47. 3. 1)와 「청년신인음악 경연대회」(47. 8. 5), 조미(朝美)문화협회와 공동 주최한 「8·15 기념음악회」(47. 8. 13) 등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예술의 밤」이나 「종합예술제」들은 주로 전재(戰災)동포를 구제하기 위한 음악회라는 점에서 「누구를 위하여 음악 할 것인가」의 물음과 해답을 확대시킨 바, 음악인의 자기반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시기적으로 겨울에 거리에서 헤매는 전재민의 참혹한 생활에 대하여 구제하자는 운동에 앞장 섰기 때문이다.

특히 47. 1. 8∼13까지 중앙극장에서 계획한 「제1회 종합예술제 」는 「근로자권」을 발행하였다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술제가 수류탄 껍질과 방공용 연막탄으로 두 차례에 걸친 백색테러가 일어나자 미군정과 관계 당국의 노골적인 탄압이 가세되어 중지되기도 하였다.(1. 15∼19에 제일극장에서 속개되었다) 이 예술제는 연극·무용·시·미술·국악원 동맹측과 음악동맹 그리고 비동맹원까지 동원된 예술제로서, 인민대중을 위한 예술, 각 예술단체의 협동정신, 관객의 조직적 동원과 공동체 확인이었던 예술제이었음을 평가받았다.20) 다음이 출연하였다

계정식(桂貞植)·김생려(金生麗)·김순남(金順男)·김천애(金天愛)·권원한(權元漢)·강장원(姜章元)·남궁요설(南宮堯卨)·문학준(文學俊)·박상근(朴相根)·윤기선(尹琦善)·이경팔(李璟八)·이강열(李康烈)·이호섭(李湖燮)·정태열(鄭泰烈)·정희석(鄭熙錫)

47. 2. 8에는 전재동포원호회 중앙본부 요청으로 전재민을 위한 음악회를 「음혐」 소속의 음악인이 참가하고 있는 것을 상기한다면, 제2기의 「전재민원호음악회」는 음악의 사회환원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두 번째는 「음악동맹」의 일부 음악인이 「음악가의 집」에 참가하여 순수 실내악 음악활동을 펼쳤다.

「음악가의 집」(46. 9)이란 조직에서 실내악 활동은 동맹측이 바로 음악의 고유한 자율성을 인정하고 음악미의 해석을 확대시킨 점에서도 큰 의의를 찾아 볼 수 있다. 「음악가 집」은 김순남(金順男)·김원복(金元福)·김흥교(金興敎)·남궁요설(南宮堯卨)·문해종(文學俊)·박민종(朴敏鍾)·박은용(朴殷用)·윤기선(尹琦善)·이강열(李康烈)·이건우(李建雨)·이영세(李永世)·이인형(李仁亨)·정희석(鄭熙錫) 등 13명의 일본학습세대로 조직되어 있었다. 제1회 실내악 연주회(46. 9. 26, 배재중학교 강당)와 11월의 제2회 공연을 끝으로 활동이 끊어졌다. 이러한 순수 실내악운동은 47. 1월의 「연악회(硏樂會)」의 발표회와 정부수립 이후 조직된 「문화의 집」에서 부활, 분리공간 기간 동안 중요한 실내악 운동으로 발전한다.

세 번째는 「음악동맹」이 「문련」과 함께 「문화공작대」를 펼치는 점이다. 문화가 민중을 지배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해방시킬 수도 있다. 후자에 서서 민중의 속에서, 민중을 통하여 음악문화를 발현시킴으로써 민족·사회를 화해시키려는 음악인들의 「문화공작대」 활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동맹이, 「문화공작대 」를 통한 대중화 운동이 백색테러에 의한 방해공작과 경찰의 공연중지 명령 속에서도 오히려 그 인식과 실천을 공고히 하여 계획대로 실행한 점은 바로 후자의 확고한 신념의 결과였다. 강장일(姜張一)·한평숙(韓平淑)·이경팔(李璟八)·최창은(崔昌殷)·정영원(鄭英源)·장덕영(張德英) 등 「음악동맹」소속 맹원들이 「문화공작대」에 동행하였다. 30명을 1대로, 모두 네 대의 대로 된 「문화공작대」는 「문화를 인민 속으로」·「문화인은 인민에 복무하자」라는 슬로건아래 제1대가 47. 6. 30에 경남으로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제3대가 7. 15에 강원도로, 제2대가 7. 21에 충남·북으로, 제4대가 7. 21에 경북으로 각각 출발, 7월 한 달간 지방 각지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부산 공연 2일째인 7. 6의 「종합예술제」를 주최한 제1대는 밤 공연 중 폭탄테러 소동으로 한평숙(韓平淑)이 가슴에 화상을 입었고, 제3대는 춘천공회당에서, 제4대는 대구에서 각각 테러를 받았지만 계획대로 속개하였다.

한참 「문화공작대」 활동이 있는 상황에서 「음악동맹 서울지부」는 「제1회 근로자음악경연대회」를 「독립신문사」 후원으로 47. 7. 25∼28, 제일극장에서 열기로 한 것도 음악의 대중화로 공동체 확인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이 기간동안 「음악동맹」은 뚜렷한 역사관과 미학관에 의한 비평적 감각을 지닌 신진해석집단이 있음으로 해서 민중민족주의 음악이론을 다져갈 수 있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의 막바지 침탈시대에 음악 제도권 밖에서 어떻게 구조적으로 민족정신과 정서가 훼손되는지를 체험적으로 지켜볼 수 있음으로 해서 해방 직후 역사적 부담이 없는데다, 20대 후반의 젊은 세대였기 때문에 해방의 민족현실에 스스로 역사적 존재화를 자각할 수 있었다.

김순남(金順男)·박은용(朴殷用)의 비평작업이 이를 대표한다. 30대 초반의 정종길(鄭宗吉)·신막(愼幕)도 이 분야의 큰 몫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해방직전 제도권에 있었지만 이를 상쇄하기 위하여 민족주의 음악운동을 비평으로 본격화시키는 박영근(朴榮根)도, 그리고 전천후 평론가 박용구(朴容九) 등이 시각을 같이 한 것도 「음악동맹」의 음악운동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 비평학동을 한 김관(金管)은 해방공간에 가장 분명하게 절필, 전면에서 사라졌고(1950에 횡사), 30년대 벽두 카프음악운동과 치열한 대결을 한, 그리고 해방공간에 이들과 대처할 수 있었던 홍난파(洪蘭坡)는 이미 1941년에 죽었기 때문에서도 이들 비평집단은 제2기를 압도해 갔다.

특히 「음악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인식을 하고 있는 박용구의 비평적 안목은 해방공간 전체의 민족주의 음악운동을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라는 역사적 물음으로 구조화시켰다.21)

이들과 달리 우파중도를 주도한 40대 채동선은 1947년 이후의 해방공간 제3기와 분리공간에서 중요한 역할수행을 하며 민족음악 창출에 공헌을 한 비평가이기도 하였다.

鑁. 김순남의 평론, 「악단 회고기」22)는 그의 시대를 모두 흡수하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뛰어넘는 글이라는 점에서 우리를 집중시킨다.

그는 이 글에서 먼저 해방 자체가 진정한 해방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러기에 사회적 존재가 불안정하여 경제적·정치적 혼란과 갈등, 그리고 비민주주의와 제국주의적인 반동적 정치성 때문에 현 단계가 역사적으로 역행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진정한 해방의 역량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 음악 수립도 끊임없이 도전 받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음악인은 「민족적 양심」에 바탕을 둔, 자기반성에 의한 진실한 비판과 과학적인 판단으로 창작과 연주활동을 전개하여 민족음악을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악단의 참된 발전이고 국제적 의의에 도달」 할 수 있는 길이 곧 극복의 길이 된다고 보았다

김순남은 현 단계의 변혁을 원하고 있지만, 늘 일직선으로 수직적 발전에만 착안하는 역사발전이나 프롤레타리아를 지향하는 음악운동을 비판함으로써 음악해석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프로음맹 」이 근로대중음악만을 계급이론화하고 정치에 가담함으로써 「음악의 독자성과 전문성」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입지가 「국한」되었다고 비판하고, 동시에 「반성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를 역선전하는 우익의 음악인 역시 「매우 깊이 반성」하여야 함을 촉구시키기도 한다.

김순남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전통과의 대화로 민족음악의 미적·역사적 이론을 기틀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즉, 「국악원」에서 전통음악 토론을, 「아악부」에서 국악기를 공부하여 작품과 세계관을 성숙시켰다. 그의 가곡 「산유화」와 「진달래 꽃」(이건우의 「금잔디」와 「산길」을 포함하여) 등에서 볼 수 있는 선법과 장단·거문고의 쌀깽주법과 대금 등의 시김새 적용 등은 구체적으로 전통음악과 대화의 결과이다. 이 중요한 사실은 어제를 보고 오늘의 그들 정신과 작품을 조정시켰고, 전통선법을 그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로서 어제를 보는 눈을 조정시킨 것이며, 착취자=아악·피착취자=민요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건너 뛸 수 있었거니와, 결과적으로 오늘과 어제를 왕래한 이해의 지령은 곧 자파의 프롤레타리아 음악이론을 반비판하고, 현 단계의 자기 세계관과 작품을 수정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음을 뜻한다. 그들이 익힌 서양의 최신기법을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음악의 대화로 그 서양기법을 자기화 시킨 경우를 보더라도, 자기비판에 따른 수정의 길을 확인할 수 있다.

신막의 「인민과 음악예술」(인민평론, 46. 7)과 정종길의 「교향악의 존재의의」(예술신문, 46. 9) 등을 제외하면 이 기간동안 이들의 비평활동은 뜸했다. 박은용은 제3기에 가선 두드러진 활동을 한다. 그가 분리공간에서 발표한 논문적 글 「음악과 세계관」(신천지 4권 4호, 서울신문사, 49. 4월호, 191∼196쪽)은 그 자신이나 동맹원들의 세계관을 항변하는 뛰어난 장문의 글로, 그 시대의 대미를 장식한다.

뚜렷한 비평적 감각으로 악단을 구조화시키고 방향을 잡아간 대표적 평론가 박용구를 제2기는 소유하고 있었다.

악단이 은폐하고 있는 허위성을 비판하고 음악사회의 구조적 제도성을 반성시킴으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려고 한 박용구는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자기와 사회적 물음으로 비평활동을 하였다.

그는 「누구를 위하여」라는 물음에서 음악인과 음악사회의 윤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는 이에 따른 방법과 방향이 제시된다. 이 경향은 제2기 전반에 예리하게 열기를 뿜고 있다가, 제3기를 거쳐 분리공간에서는 관계 당국에 의하여 좌절한다.

제2기 기간동안 그는 근 20여 편에 가까운 비평적 글을 발표하였다.

박용구는 남쪽을 미군이, 북쪽을 소련이 차지한 한반도의 현 정세에서 「인민적 토대 위에 민주주의 건국을 이룩하기 위하여 먼저 특권의 꼬리를 늘이고 있는 친일파·민족 반역자의 배제를 원칙」으로 삼는 것이 현 단계의 임무라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특권계급층이 보상받고 있는 일본제국주의 유행가의 정체와 특권층의 일부를 형성하오 있는 친미 기독교음악인들의 선민·특권적 허위의식을 준열하게 비판하며 이들로부터 맞선다. 한편 음악에 있어서 리얼리즘의 성과를 거둔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예술과 같이 현실 속에 생활하는 구체적인 민중, 그 민중에 관한 진실을 반영한 리얼리스트 예술로 민족음악을 수립하는 길이 음악유산의 섭취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조성음악이나 드뷔시의 인상파적 창작태도나 아메리카의 감상적 낭만주의는 우리가 참조할 수 없는 접근임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대한연주가협회·전국음악문회협회·고려음악협회·서울관현악단

「음악동맹」이 현 단계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고 민중·민족음악을 수립하는데 전력을 다하여 음악사회변혁운동을 「민전」·「문련」과 함께 펼치자, 우익측 음악인들은 이에 대응하는 조직체 결성에 나선다. 특별한 민족이론 없이 다만 정치의 무매개성을 표방한 순수음악인들은 합작으로 악단을 통일 결성체로 만들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음악인들은 기계적 반응으로 조직체를 결성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이들 결성체는 구심점을 확보하지 않은 채, 또 정치권을 벗어난 순수도 아니어서 그 대응은 처음부터 지지부진하였다.

「조선문학가동맹」의 「전국문학자대회」에 자극 받은 우익측 인사들은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이념 위에 통일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취지를 세우고, 결성준비위원을 정하였다. 그리고 그 회원을 추천하여 46. 3. 13에 종로기독교당 청년회관에서 「전조선문필가협회」(이후, 전문형 )를 결성하였다. 말하자면 전 문화예술인의 규합체이다.

다음은 준비위원과 추천된 음악인이다.

<표 10 전문협 준비위원과 추천음악인>

결 성 준비 위 원

채동선(蔡東鮮) 박경호(朴慶浩)(43인 중)

추 천 음 악 인

( 442 명 중 )

박정식(朴貞植)·김성태(金聖泰)·김세동(金世尲)·김원복(金元福) 김영의(金永義)·김재훈(金載勳)·박경호(朴慶浩)·박영근(朴榮根) 박용구(朴容九)·박태준(朴泰俊)·안기영(安基永)·안병소(安炳曇)

이승학(李升學)·이영세(李永世)·이혜구(李惠求)·임동혁(林東爀)

김형철(金형喆)·채동선(蔡東鮮)·함화진(咸和鎭)·현제명(玄濟明)


그러나, 결성대회 때 232명이 출석한 것으로 보아 추천과 참여는 달랐다. 「전문협」 결성 후 전위대 격으로 김동리(金東里) 등 청년문인들 중심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이후, 청운협)가 결성(46. 4. 4), 7개 부서 중 평론부에 임동혁(林東爀)이 선임되었다. 말할 나위 없이 「전문협」과 「청문협」은 순수를 표방하고 「문련」에 대응하였다 .

「전문협」과 「청문헙」 결성 사이에 연주가들 중심의 「대한연주가협회」(이후, 연협)가 조직되었다.(46. 3) 「연협」(위원장 계정식(桂貞植))은 「음악동맹」의 좌익적 정치성 때문에 그 반발로 결성되었다고 하나, 「음악동맹」측에서는 기계적 대립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것은 46. 2. 14 군정청과 관계 당국이 「남조선민주의원」을 결성시킨 이후, 「문련」에 대응하는 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전문협」·「연협」·「청문협」 등이 결성·지원하여 우파진영의 블럭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연협」은 채동선·박태현·계정식 등이 협력하여 결성한 바, 「음악동맹」측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음악가협회」가 46. 6 「조선음악협(의)회」로 발 돋음을 꾀하려 하였지만 「음악동맹」측 거부로, 마지막으로 「우리 작품발표회」(46. 6.29∼30) 이후, 해산의 길을 걷는다. 이 때의 작품들은 주로 해방 이전의 작품이 발표되었다.

김성태(金聖泰)·김순애(金順愛)·나운영(羅運榮)·박태준(朴泰俊)·현제명(玄濟明)·김세동(金世尲)·이흥열(李興烈)·홍난파(洪蘭坡) 등의 연주가가 출연한 음악회이었다.

「연협」 역시 46년 8월에 기성 음악단체를 총망라하려고 개편하고 조직을 확대하여 「전국음악문화협회」(이후, 음문협 )로 개칭·재출발하였다

「음문협」은 46. 11. 26에 이승만(李承晩)의 도미를 지원하기 위하여 조직한 「민족대표 외교사절 후원회」 에 박태준(朴泰俊)·박태현(朴泰鉉)·채동선(蔡東鮮)·이종태(李鍾泰) 등이 참가, 우익진영을 대신하고 있었다. 차차 변화가 왔다. 현제명 지지세력과 채동선 지지세력 그리고 「음악동맹」을 지지하는 세력 등 크게 세 지류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서 채동선·박태현·박태준 등이 중심이 되어 1947. 2. 12에 「고려음악협회」(이후, 고음협)를 결성, 비로소 우파중도의 성격으로 독자노선을 이후 걸어간다.

「고음협」이 결성되던 47. 2. 12에 20여 문화단체가 규합하여 「전국문화단체총연합」(이후, 문총)을 결성, 우익 통일조직체로 출범하였다

「문총」에 가입된 음악단체로는 「음문협」·「전국취주악연맹」(46. 10 결성)·「정악회」 그리고 「고음협」이었다.

「문총」의 회장에는 고의동(高義東), 부회장에 「고음협」 회장인 채동선 그리고 박종화(朴鍾和)가 선임되었다. 채동선은 「문총」의 부회장과 그리고 음악대책위원, 또 「고음협」 회장으로 1947년 이후의 역사에 그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로써 1947년 봄에는 민족좌파의 「음악동맹」과 「국악원」, 민족우파에는 현제명 중심의 「음문협」과 「구왕궁 아악부」 그리고 「고려」와 「서울」 양대 관현악단이, 우파중도에는 「고음협」 등이 형성된 셈이다.

한편, 현제명 중심의 「고려교향악단」은 이미 이곳을 탈퇴하여 조직한 「서울관현악단」의 도전을 받고 있는데다, 47. 1에 현제명이 8개월 동안 미국에 감에 따라(47. 9. 3 귀국), 임시로 독고족(獨孤族) 체제로 전환하였고, 현제명이 귀국한 직후에는 고려와 서울의 땅뺏기 결과에 따른 대립이 치열해졌었다.

고려가 노출한 문제점 즉, 단원들의 좌석배치 순서 문제·지휘자의 비전문성·이사장의 일인체제·단원들의 생활보장 전무나 경영난 등의 문제를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탈퇴는 점증되었었다. 46년 3월 김생려(金生麗)와 6월에는 계정식(桂貞植)·이재옥(李在玉) 등 몇몇 단원들이 탈퇴하여 13∼14명 수준으로 「서울관현악단」을 조직, 미7사단 장교클럽 등을 출입하면서 단원을 확보하여 나간 것이다. 46년 연말에는 40명이 확보되었다. 48. 1에 「서울」은 「서울교향악단」으로 발전하여 48. 8. 15 정부수립 때 경축공연에 출연함으로써 「고려」는 약체화를 면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고려」와 「서울」이 민족의 문제로 분열된 것이 아니라, 앞서 지적한 문제점 노출에 의한 것임을 비평진으로부터 질책을 받는다. 「땅뺏기」라고. 한편, 이와 같은 각종음악조직체가 생멸이 잦은 것은 뚜렷한 민족음악이론 없이 「무원칙적이고 관념적인 우호관계로 조직된 기계적 조직체」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라는 김순남의 지적은 새겨 보아야 한다.

「고려음악협회」는 채동선(蔡東鮮)·윤용하(尹龍河)·박태준(朴泰俊)·박태현(朴泰鉉)·이흥열(李興烈) 등이 중심이 되었다. 「고음협」은 「음악동맹」의 「비(非)조선적 유물론」이나 「악계의 대표적 무절조(無節操) 사대주의자인 현제명 세력」을 비판하고, 「민족자결정신하에 정통 음악예술의 연구창작 및 연주활동을 목적함」을 강령으로 출발함으로써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특히 채동선은 민족현실 앞에서는 음악인들이 참 정치인이 되어야 함을 오히려 강조한다. 그것은 현제명 세력이 사대주의에 입각한 기회주의적 정치생활에 대한 비판의 입장이기도하였다.

그는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야수적 정치」에 저항하는 행위나 해방 정국에서 「자유와 독립을 부르짖는」것도 정치이며, 「경제의 민주화와 동시에 정치의 민주화·인간본연성인 유심적 인생관·유심적 예술관을 갖는 자유」를 요구하는 자체도 참 정치이기 때문에 음악인은 이 참 정치를 희구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유심적 인생관과 예술관」을 「음악동맹」의 「유물적 인생관과 예술관」에 대립시킨 것이며, 동시에 「정치의 민주화」를 극우파의 「사대주의에 입각한 기회주의적 정치생활」에 각각 대립시킴으로써, 채동선은 중간파의 논리로 나아간다.

「고음협」이 반탁을 표방함으로써 우익의 조직체와 맥을 같이하나, 제3기 기간에는 미군정과 당국의 문화정책과 사대주의적 극우파를 신랄히 비판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 선 것이다. 따라서 제3기의 그의 움직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방공간 제3기

제 3기는 미군정과 관계 당국이 좌익계열의 모든 단체들을 비합법적 단체로 규정한 1947. 8. 15부터 남한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1948. 8 15까지 일 년간의 기간이다.

이미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46. 3 20∼5. 8)가 실패하자 미군정은 군정당국을 뒷받침할 수 있는 온건한 중간노선을 표방하는 세력을 구축하고자 「좌우합작」을 추진하였으나, 여운형의 피살(47. 7. 19) 이후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대한 구상이 천명되었다. 그 이후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은 이 안을 꾸준히 밀고 간다.

제3기에 들어와서 미소공위가 완전 결렬(47. 10. 21)되어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킨 결과, 47. 11. 14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 등 한국 통일안이 가결되었다. 이어서 미군정 당국이 48. 3 .18 남조선 「총선거법」을 공포, 점차 「분단의 고착화」가 현실화되었다. 반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김구(金九) 역시 김규식(金奎植)과 제휴하여, 남조선 단선 단정을 반대한 북조선과 남북대화를 하기 위해 북행을 한다. 이 북행은 1백 5인의 문화인들이 촉구한 남북대화 촉구성명에 힘입은 것이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46. 5. 7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로 들어가고 소련측 대표단의 철수·정판사 사건(46. 5)에 의한 좌익계 인사의 피검·「해방일보」 정간·반탁진영의 정치공세의 강화·군정에 의한 좌우합작 추진 등으로 불리한 변수로 작용하자 46. 7부터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는 이른바 「신전술」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면서 미군정에 대한 전면적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46년의 「9월 총파업」·「10월 인민항쟁」 이후 46. 11. 23∼24에 결성된 남로당은 「민전」과 함께 단정 반대투쟁을 전국적 규모로 전개한 바 있다.

제3기에 들어와서 48년의 「2·7 투쟁」·「4·3 제주도 투쟁」·「5·10 선거 반대투쟁」 때부터 서울에서는 행동대가, 지방에서는 무장부대로서 「야산대」가 조직되었고, 48. 10 여순사건으로 야산대와 합류하는 무장투쟁이 전개되어 남한 지역에 유격전구가 형성된다. 49년 말부터 50년 초에 이르는 동기토벌작전과 50년 3월 남로당을 총 지휘해온 김삼용(金三龍)과 이주하(李舟河)의 피검에 따라 남로당은 붕괴되었다. 따라서 미군정과 관계 당국은 제3기가 시작되는 47. 8. 15부터 좌익운동을 완전 비합법화로 규정하여 「문련」 등의 인사를 검거·투옥 등 첨예화되는 해방공간 제3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좌·우익으로 점차 분열된 음악단체들도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음악동맹」의 민족주의 음악운동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 우익계의 음악단체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전면으로 부각된 음악단체로는 「고음협」·「서울관현악단→서울교향악단」·「고려교향악단」·「문총」·「아악부」·「전국취주악연맹」·「조선오페라협회」 등이었다.

그 외 「조선오페라협회」의 「라트라비아타」 공연(48. 11. 16 임원식(林元植) 지휘)·48. 1에 창립된 「서울교향악단」의 연주회·「고려교향악단」의 정기연주. 48. 4 「한불문화협회」의 「파우스트」(김성태(金聖泰) 지휘) 공연 등의 음악회는 바로 이러한 맥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점차 입지공간이 좁아지는 민족좌파의 「음악동맹」이나 「국악원」은 변화가 일어난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체포령으로 김순남은 1947년에 은둔생활이 시작되는 한편, 그해 9월 과도 정부의 「문교부」가 개최한 「전국음악경연대회」에서 우익 음악인들이 김순남을 비롯하여 「음악동맹」측 인사의 심사위원 선정을 거부(정치적 당파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하는 결의를 공식화한다.

「국악원」은 47. 8월 함화진이 피검된다. 박헌봉이 위원장으로, 채동선이 연구부장 등으로 개편, 나름대로 활동을 이어간다.

이들과 달리 남조선 단정이 확정, 「분단의 고착화」가 현실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김구·금규식의 북행을 통한 남북대화를 촉구하는 1백 5인의 문화인 지지성명(48. 4. 14)에 박용구(朴容九)·신막(愼幕)·안기영(安基永)·박은용(朴殷用)·이건용(李建用) 등 5인이 참가하였다. 말하자면 두 개의 한국을 반대하는 태도였다.

김순남은 체포령이 내려진 가운데 가곡 「양(羊)」·「자장가」를 만들었다

체포령이 내려진 이유 중 하나인 「인민항쟁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기빨을 덮어다오 ××기빨을

그 밑에 전사(轉死)를 맹서한 기빨

더운피 흘리며 말하든 동무

쟁쟁히 가슴속 올려온다

동무야 잘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끊는 피 용솟음친다.

다른 노래 「남조선 형제를 잊지 말아라」의 가사를 보자.

짐승들 요란히 우는 깊은 밤

××× 높은 산 봉우리마다

기한(飢寒)에 떨면서 용감히 싸우는

우리의 형제를 잊지 말아라

이 노래들이 대중에게 급속히 애창된 점을 박용구는 「구체적인 것이 세차게 뚜렷이 흘러있는 것 때문」이라고 1948년 그의 글 「해방가요와 시」에서 밝히고 있다. 23)

그의 삶과 고뇌는 타해 시키는 민족의 현실 앞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자장가」 시를 쓰고 곡을 만들어 갔다.

바람아 불지마라 물결도 잠자거라

우리아기 잠든다

우리아기 꿈나라 고개 넘으면

엄마의 가슴 위에 눈이 나린다.

너 자라서 이 겨레의 햇빛이 되어

엄마의 이 눈물을 씻어 주렴아

잠자거라 우리아기 착한 아기야

뒷동산에 별 하나 반짝여 준다

그에게 있어 엄마는 자신의 삶이자 민족 그것이었으며, 뒷동산의 별의 반짝임은 자신의 순수한 영혼의 떨림이자 민족 조국의 별이었다.

한편, 김순남은 「양」과 「자장가」 직전에 김소월 시에 의한「바다」·「그를 꿈꾼 밤」·「산유화」·「잊었든 마음」·「초혼」 등 5곡에 의한 가곡집 「산유화」가 1947년 10월 21일에 백석당(白錫堂)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건우 역시 김소월에 의한 「붉은 호수」·「금잔디 」·「가는 길」·「엄마야 누나야」·「산」 등 5곡을 묶은 가곡집 「금잔디」가 어문각에서 48년 5월에 출판되었다.

이미 김순남의 「산유화」, 정종길의 「농부가」, 이건우의 「금잔디」 3편은 무대에 올라서기 전에 눈뜬 민중들의 가슴에 파고들어, 다른 해방가요처럼 민족의 가요로 이 땅에서 널리 불려졌음을 아주 주목할 필요가 있다.24) 해방공간의 음악적 마음이 어떠한 노래가 참 민족의 노래였는지를 확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박은용의 독창이, 김천애의 「봉선화」처럼, 자신의 노래로 만들어 가는 곳마다 불렀기에 급속히 유행하는데 큰 몫을 한다. 이경팔도 그 역할을 했다. 더욱이 공식적인 무대 즉, 48. 4. 23에 「김순남 가곡발표회」와 48. 11. 12∼13의 「우리가곡의 밤」 그리고 48. 12월에 있었던 박은용·이경팔의 각각의 독창회 등에서조차 김순남·이건우의 작품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사실은 박은용의 독창회 「우리가곡의 밤」에서 확인된다. 48. 11. 12∼13 이틀간 배재강당에서 열린 이 독창회에서 김순남·이건우·임동혁·김성태의 가곡이 불려졌는데, 임동혁·김성태의 작품에서는 무반응을 보이다가, 반대로 김순남·이건우 노래에선, 특히 김순남의 작품 「진달래꽃」·「산유화」·「농민의 노래」는 삼청(三請)이 있었을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이 날의 감격적인 독창회를 듣고 김동석(金東錫)은 「음악의 시대성」이란 글을, 노광욱(盧光郁)은 「민족음악의 두 가지 조류」라는 글을 각각 남겼다.25)

해방공간 비평의 성지인 박용구가 지적하듯(해방가요와 시, 「신인」, 1948. 3) 「사회제도의 불합리와 모순이 제거되지 않는 한 투쟁적인 해방가요가 없을 수 없는 동시에 대중이 존재하는 한 일상적인 대중의 노래도 없을 수 없지 않는가」라는 지적은 명쾌하게 옳았다. 그의 같은 글, 또 다른 지적에서 김성태의 「독립행진곡」이 「일제시대의 귀에 젖은 시스템이므로 쉽사리 익힐 수 있었기」 때문에 비조직 대중에게 유행하고, 일련의 해방가요가 조직 청중에게 압도적으로 유행한 것이라고 간파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정서를 떨치고 민족정서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절박한 간파이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김순남의 「산유화」가 지금까지의 3화음 체계나 일본의 요나누키 음계를 버리고, 계면조와 평조에 의한 골격에다 부가화음 처리·전통적인 장단처리·대위법적인 처리 그리고 쌀깽주법의 처리 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해방 직후부터 해방노래를 통한 꾸준한 시도의 결과이자 「국악원」·「아악부」에서 전통음악과의 대화에 의한 결과로, 한국 민족음악사의 새로운 산맥을 이루어 놓은 역사적·미적 작품이다. 더욱이 그가 익힌 바르톡·드뷔시·스트라빈스키 등의 최신기법을 당대의 음악 창작권에 선구적 역할로 등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현실에서 자주적인 자의식으로, 전통과의 대화로 작품을 수정의 길로 들어서게 한 점에서도 그는 역사적 존재이다. 이 창작정신은 「진달래 꽃」에서 계속 분출시키고 있었다.


김순남에 대하여 맨 처음 평가한 이는 박용구이다. 이미 해방직전부터(44. 12. 21, 45. 4. 4, 45. 7. 14일자 논평) 그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그는 「산유화」의 가치를, 국제적 수준에서 겨누어 볼 수 있는 가곡 「산유화」는…자기를 버림으로써 진실로 값있는 자기를 얻은 것이다26) 라고 논평한 것도 기실, 김순남이 처음부터 해방가요를 통하여 민중·민족을 확인하고 치열한 현실감각과 음악 사회, 그리고 자주적인 자기반성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박용구의 민족음악에 대한 의미부여는 이건우에게도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종속노선의 음악인에게는 서양음악이 새것이고 전통음악은 낡은 재료나 정신이었지만, 자주적인 음악인에게는 전통음악이 새것이고 새로운 민족생명의 확인이었음을, 그리고 밖의 서양이나 북양 또 남양을 알되 그것을 똥으로 알고 진지한 대결의 지평을 펼쳐 보이는 것을 그 시대는 우리시대에게 일깨워 준다.27)

그러기에 심지어 채동선이 이들을 일방적으로 「비조선적 유물론」 계열로 비판한 것은, 기실, 「조선음악가동맹」이 치열하게 민족현실을 대응하는 태도의 형식을 이룬 이론을 비판한 것이지 삶 자체가 아닌 것이 되며, 음악도 그 표현된 언어의 전투성 때문이지 작품자체에 대한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들은 너무나 이 땅을 사랑한 음악인이었다.

또 흐름으로 보아 이들은 조선의 생성론자였다 어제와 오늘을 왕래하며 오늘 이 땅에 적용시키고, 지금 여기의 삶을 널리 밝히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사유체계 즉, 고금을 왕래하며 사방을 적중시켜, 늘 지금을 밝히는 사유체계를 다른 말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반면 채동선의 정치적 입장이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음악인이었음은 옳게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민족음악이론에 있어 내용 즉, 우리가 조선인인 이상 우리 민족의 고유한 가사 및 애국시를 사용하는 성악곡은 물론이려니와 기악곡도 민족음악이 된다고 믿어, 안기영과 같은 3화음 체계로 추구한 것은 그 민족이론이 사고에 충실한 반영이지 결코 음악언어에 대한 반성된 성숙이 아니다. 3화음에 따른 기능 화성체계는 바로 서양민족의 언어일 뿐이며, 바로 그 언어가 지난 일세기 동안 제3세계를 종속화 시킨 합리화라는 힘의 언어였기 때문에, 한국의 민족음악이론으로는 대결하여야할 체계이다. 서양민족의 그 언어체계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제3세계에 있어서 민족정서를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나 민족공동체를 해체시키는 힘을 가졌다.

채동선의 가치는 민족자결정신에 있었다. 그는 말한다. 요컨대 민족자결이냐 다시 노예화냐, 민족적 양심과 강렬한 조국애가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 결정적 기본 이념 없이는 단 음악뿐 아니라 모든 문화건설을 논의할 아무 가치도 없다.28)

채동선의 이러한 민족혼은 오히려 한민당과 미군정에 뿌리깊게 관계한 현재명의 주도적 음악권을 비판한 것으로 자주적 민족음악 좌표를 설정하려고 열정적으로 불태운 혼의 드러냄이었다.

따라서 신시대는 확실히 봉건과 독재를 떠나기 위해서도 악단의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가 「국립교향악단」·「국립음악학교」·「국립 대합창단」·「국립육군취주악단」·「국립음악출판사」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기에 「민족음악 운운은 우선 예술로의 음악이 있는 뒷일일 것이다」라고 해방 직후부터 일관성 있게 주장한 김성태 계열과도 채동선은 분명 달랐다.29)

분리공간

민족분리공간은 1948. 8. 15부터 1950. 6. 25까지의 공간이다.

먼저 48. 8. 15에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이어 48. 9. 9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해방 후 통일된 민족독립국가를 건설하려던 민족의 모든 염원이 남·북한 각각의 단독정부가 들어섬으로써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고, 6·25로 인한 남북분단은 지을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분리공간은 훼손된 민족정신과 정서의 정화작업이 요원하게됨과 민족주의 음악정립이 마감되는 현상그것이었으며, 동시에 외세의 음악 언어가 개화기이래 열강의 제국주의→일본의 제국주의의 그것처럼 순수와 합리적인 현대성이라는 이름 하에 정당화되어 종속의 지배언어가 고착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전의 모든 민족음악 창출에 빛나는 눈동자와 뜨거운 가슴, 여기에 치열한 발걸음으로 민족사회에 뛰어들어 간 음악인은 월북·체포·구금·처형·잠적·자수 등으로 이제 그 사회가 삶을 뒤바뀌게 만들어버린다. 동시에 해방공간에 쓰인 「민족주의 음악언어」가 스스로 금기화가 되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음악용어에 학습 받아야 했다. 해방공간의 빈자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신정부에 편승한 음악인·단체가 전면에서 확고하게 메워간다.

1948. 8. 15 서울시가 주최(예술위원회)한 정부수립 경축공연에 「서울교향악단」의 출연은 왼쪽 날개에 대한 오른쪽 날개의 건재함, 「고려」에 대한 「서울」의 승리, 창작가보다 연주가의 우위성 등을 안겨다 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는 임원식 도미로 제26회 공연을 끝으로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임원식은 1년 후인 49. 8월에 귀국한다). 임원식·윤기선에 있어 김자경(金慈璟)·마금희(馬金喜)·지영숙(池英淑)이 미국으로 떠났다. 「서울」의 승리는 48. 11. 27∼12. 1에 있었던 베토벤 합창교향곡(서울대예대합창단)연주를 거쳐 1950. 2. 24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단체로 선정한데서도 전면에 부각되었다.

분리공간에서 활성적인 활동을 전개한 분야는 실내악 운동이다. 「문화의 집」이 그들이다. 서대문에 있었던 「문화의 집」은 동시에 음악 애호 구락부이기도 하였다. 첫 모임이 문학준(文學準) 4중주단(문학준(文學準)·최영우(崔泳祐)·이재옥(李在玉)·김준덕(金俊德))이 주축이 되어 「실내악의 밤」으로 열렸다.(48. 10. 24∼26) 그 뒤로도 「소나타의 밤」·「신정 실내악의 밤」·「베토벤 122주년 기념연주회」·「비올라와 바이올린의 연주회」 등이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는「문학준 4중주단」 외에 계정식(桂貞植)·안성교(安聖敎)·정희석(鄭熙錫)·곽정순(郭正淳)·전희봉(全熙奉)·이경희(李慶熙)·이인순(李仁亨)·홍광은(洪光銀) 등이 출연하였는데, 다른 무대의 열악한 상황에서 이들 「문화의 집」 실내악 운동은 하나의 돌파구였다.

48, 6. 1의 남조선 과정 법령 193호에 의하여 모든 극장은 「극장 입장세 10할」의 짐을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때였다. 이 안을 문화인들이 악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여러 경로로 철폐·개선 운동을 펼치고 있었기도 하였다. 드디어 49. 9. 24 국회에 「흥행장 입장세 법안」이 상정되었던 바, 10. 21에 연극은 7할, 영화는 6할 등으로 조정 공포되었다. 말하자면 조정되기 전에 실내악 운동이었다.

분리공간에서 가장 주력한 당국의 문화정책은 「문련」의 근절과 체제정신의 확립이었다.

이미 「문련」 활동 전반에 걸친 저지 공세가 수도관구 경찰청장 장택상의 정치성을 띤 각종 흥행단체의 공연물은 처벌한다는 고시(47 1.30)가 절정을 이룬 후 단정 후에는 「음악동맹」에 대한 체포령이 맹위를 떨쳤다 .

서울시 지부장이었던 강철수(姜哲守)는 「추도가」 작곡 이유로 피검(49. 1. 14)된 바, 29일간 구류처분을 받은데다, 1949. 5. 27 이후 체포령으로 피검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 「추도가」는 다음과 같다.

먼저간 형제들이 쓰러진 자리

피바다 달리면서 싸우던 동무

조국의 이름 앞에 용감도 했다

그대는 가는가 눈을 감는다

그리고 서울시 지부 서기장 박영서(朴英緖, 49. 5. 27 송치), 서울시 지부원 이준식(李俊植)은 징역 2년과 집행유예 5년, 지부원 황순현(黃舜鉉)은 징역 2년을 49. 9. 5 서울지방법원에서 각각 선고 받았다.

48. 10. 20 여순 사건으로 소프라노 오경심(吳敬心)도 피검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순 사건으로 문화인들이 총궐기하여 「민족이 사는데는 나라가 있어야 한다. 민족이 잘살기 위하여서는 나라를 올바른 이념 위에 세워야 한다」라는 명제로 48. 12. 27∼28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가 시공관에서 열림으로써 체제정신을 확립코자 하였다. 이때 준비위원회로 각계 인사 5백 명을 초청하였는데 그 중 음악인은 다음과 같다.

계정식(桂貞植), 곽상수(郭商洙), 김생려(金生麗), 김성태(金聖泰), 김세동(金世尲), 김영의(金永義), 김용환(金龍煥), 김소희(金素姬), 김순애(金順愛), 김인수(金仁洙), 김천애(金天愛), 김학상(金學相), 나운영(羅運榮), 박경호(朴慶浩), 박민종(朴敏鍾), 박태준(朴泰俊), 박태현(朴泰鉉), 성경인(成慶麟), 송진혁(宋鎭赫), 서수준(徐守俊), 신재덕(申載德), 안병소(安炳昭), 안성교(安聖敎), 이관옥(李觀玉), 이강열(李康烈), 이경희(李慶熙), 이영봉(李令鳳), 이동백(李東伯), 이상춘(李相春), 이승학(李升學), 이애내(李愛內), 이영세(李永世), 이유선(李宥善), 이인범(李仁範), 이인선(李寅善), 이재옥(李在玉), 이정희(李貞姬), 이동일(李東日), 오현명(吳鉉明), 이주환(李珠煥), 이혜구(李惠求), 이흥열(李興烈), 윤석중(尹石重), 임춘앵(林春鶯), 장사훈(張師勛), 전봉초(全奉楚), 정봉열(鄭奉烈), 정남희(丁南希), 정훈모(鄭勳謨), 조상현(曺祥鉉), 진수방(陳壽方), 채선엽(蔡善葉), 최봉진(崔奉鎭), 최희남(崔熙南), 하대응(河大應), 한갑수(韓甲洙), 한규동(韓圭東), 홍원기(洪元基), 황염덕(黃廉德), 현제명(玄濟明), 박만섭(朴萬燮)

그리고 이들 중에서 49. 2. 22 「문교부예술위원회」로 김생려(金生麗)·김성태(金聖泰)·김영의(金永義)·김인수(金仁洙)·김천애(金天愛)·박경호(朴慶浩)·박태준(朴泰俊)·박태현(朴泰鉉)·성경인(成慶麟)·안병소(安炳昭)·이영세(李永世)·이주환(李珠煥)·이흥열(李興烈)·정남희(丁南希)·정훈모(鄭勳謨)·채동선(蔡東鮮)·하대응(河大應) 등 17명이 음악위원으로 선임되었다.

49. 3. 24에는 「서울시 문화위원」 60명 중 음악인 12명이 또한 선정되어 체제 문화체계를 이룩한다. 양악부에 김생려·김성태·박경호·박태준·박태현·안병소·정훈모·채동선이, 국악부에서는 김용승·성경린·이주환·이혜구가 그들이다. 그리고 49. 8에는 해방 직후 월남한 문화인들로 「대한문화인협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김생려, 김천애, 박태현, 안성교, 이승학, 이흥열이 참여하였다.

「문련」의 소멸책으로 49. 11월 이후 자수권유·저작 활동과 저서 판매금지·일본제국주의시대의 「대화숙」을 연상시키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추진·전향인 작품 심사가 실시되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이 「민전」과 그 산하의 「문련」 및 모든 단체에 대한 강력한 근멸시책의 일환으로 조직한 바, 오제도(吳制道) 검사가 주재하였다. 이와 함께 문교부에서도 중등교과서에서 좌익 작품을 삭제·금지·수거 등으로 민족분단은 더 이상 첨예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폭발적인 수요와 인기를 모았던 「임시 중등음악교본」은 수거대상으로 올라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49. 12. 3∼4 시민관에서 「민족정신앙양종합예술제」에서는, 박영근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신막이, 그리고 「북조선음악동맹」에게는 박은용이 각각 경고문을 낭독케 하였다. 김순남 가곡집-「자장가」를 중심으로 「조선가곡의 위치」라는 최초의 김순남론을 발표한 이유를 들어 박용구를 경고문(김순남에게) 낭독자로 선정하였지만, 그는 피신하며 일본으로 갔다. 그 역시 정부수립 이후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이헌구(李軒求)는 1949년 글에서 해방 후 4년간 「민족문화를 위하여 활약한 음악인」으로 박태현·김생려·김성태·박태준·채동선·이흥열을 추천한다.30) 이로써 반체제 음악인으로 몰린 민족음악인은 그 역사적 의미에서 박제화되어 가는 시기가 바로 분리공간이다.

이때, 모두가 체제에 잠들어 갈 때 오히려 채동선은 정부의 문화정책 전반에 걸쳐 매우 래디컬한 비평을 하였다. 즉, 현정부가 국가 예산면에서나 문화정책면에서 꼭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문화와 역사를 말살시키려 했던 것처럼 민족문화말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어떻게 전 민족의 정신을 무장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소위 반민족이라는 이북정권에서는 확고한 계획 아래 문화정책을 시키고 있는 반면 남한의 문화정책은 과연 어떠한지를 지적하고 있다. 이어서 전무한 문화예산정책과 정부가 조직한 예술위원회의 사업허실, 국가수입의 재원확보의 일환으로 1년을 끌어오며 실시하고 있는 10할 세금정책의 부당성, 특히 생생한 민족주의자·애국적 문화인을 약화시켜 민족적 지조를 고수치 못하게 하고 도리어 이북 정책을 동경하게 하는 역효과를 야기 시키는 것 등은 오히려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기에 「민중이 정부를 계몽시키기 전에 왜 정부가 먼저 민중을 계몽지도 육성하지 못하느냐 ? 그 원인이 무엇이냐 ?」라고 집요하게 지적한다. 정부의 무정견한 정책·근시안적 계획을 반성·시정하고 민족문화를 위한 진정한 정치력에 호소하고 있었다.31)

한편 이건우의 가곡집 「산길」이 48. 11. 15에 도향문화사에서, 임동혁은 가곡집 「시조 6수」(서울출판사, 1946)에 이어 「음악과 문화」가 동방문화사에서(1948), 그리고 박용구의 「음악과 현실」(서울: 민교사, 1949.4)이란 저서가 출판되었다.

임동혁의 저서는 대부분 일제하의 서양음악을 계몽시킨 글의 모음집인데 비하면, 박용구는 해방공간의 삶의 전방위를 자기 목소리로 쓴 글을 모은 평론집이다. 끝으로 박은용의 「음악과 세계관」이란 글은 해방직후의 다른 모든 글 중에서 치밀하게, 그리고 사고의 조직력을 논문의 성격으로 전개한 글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일독해야 할 가치가 있는 글이다. 더욱이 분리공간에서 이 정도의 글이 있었다 함은 우리의 시각을 신중하게 한다. 민족사회의 치열한 사유의 결과로 형성한 세계관의 선언서이기 때문이다.

분단체제는 6·25로 고착되어 버린다. 또 한번 음악인의 이동이 일어났다.

김순남은 48. 8에 해주에 있었고, 박영은은 49. 12 이전에 잠적하였으며, 박용구는 50년 벽두에 일본으로 갔다. 남아있는 거의 모든 「음악동맹」 맹원들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가, 6·25 때 월북한 사람을 제외한 남은 사람은 북으로부터 배신자로 남으로부터 회색분자로 몰리는 삶이 또 시작된다. 9·28 수복후 부역자 심사위원회를 음악협회와 아악부에 두었다. 6·25 당시 부산에서 일하던 동맹원 출신의 한의송(韓義松)과 서오준(徐伍俊) 등은 당국에 의하여 체포·처형되었다.

이처럼 체제분단이 모두를 죽이고 있었다. 김순남 역시 1953년 「반동 예술인」으로 숙청되었다가 1986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진(金東振)·장일남(張一男)은 월남하였다.

<표 11 월북음악인>

(겸) 작→작곡, 평→평론, 타→타악, 기→기악

작 곡

평 론

성 악

피아노

현 악

관 악

대중음악

국 악

기 타

김순남(金順男) 안기영(安基永) 이건우(李建雨)

박영근(朴榮根) 진학주(陳學柱)

강장일(康長一) 권원한(權元漢) 고종익(高宗益) 김동희(金尲魯)

박은용(朴殷用, 작·평) 신막(愼幕, 평) 이경팔(李璟八) 이규남

이범준(李範俊) 정덕영 정영재(鄭榮在) 정종길(鄭鍾吉, 작) 조경

최봉진 최희남(崔熙南) 신용대 최창은(崔昌銀, 평)

박현숙(朴賢淑) 이인형(李仁亨)

김태연(金泰淵) 문학준(文學準, 평) 안성교(安聖敎) 윤낙순(尹樂淳, 작)

이강열(李康烈) 이계성(李桂成) 이용철(李用哲) 우달형(禹達亨)

김종대(金鍾大) 이기윤(李基潤) 이유성(李有聖) 현수강(玄壽康)

홍광수(洪光洙, 타) 홍광은(洪光銀)

김인욱(金仁郁)

공기남(孔基南) 안기옥(安基玉) 박동실(朴東實) 임소춘(林素春)

정남희(丁南希) 조상선(趙相鮮) 최옥산(崔玉山)

이효성(기) 이정언(기) 유주용(기)

최복남(기) 최성자(기) 한경섭



통일음악으로 날아서

지금까지 해방 직후의 공간에서 좌우대립으로 음악인과 그 작품들이 분열되어 대립을 초래하였지만 역사적으로 「조선음악동맹」측의 민족주의 음악운동은 민족통일을 갈망하며 반외세운동으로 분명히 나타났다

이들의 민족음악이론이 비록 마르크시즘 시각으로 현 단계의 변혁을 꾀하였지만 그것은 전통의 생성적 역사인식을 다른 언어로 접근한 세계관이었고, 동시에 사회의 윤리적 힘을 가진 민중·민족주의 음악운동이었다. 그들의 이해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선민 이데올로기 즉, 민중=민요만의 도식화를 비판하고, 전통음악과 대화를 하되 그 적용은 늘 해방공간의 민족현실과 작품자체에 두었거니와, 어제의 민족정서와 그 형식을 오늘에 살아있는 진실로 회복시키려는 이해였다.

그들은 전통의 세계가(또는 텍스트가) 해방공간에 향해있음을 역사적으로 깨달은 존재라는 데서 우리들을 주목시킨다. 역사적 과제인 민중-인간-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해석한 점도 그 시대를 반성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라는 물음을 낳았으니, 그만큼 스스로들을 먼저 변혁시켜 수정의 길을 걷게 하였었다. 이 시대의 박용구는 민족음악의 방향을 전방위적으로 잡아 준 민족평론가였다.

서양음악언어로 이 땅을 지배한 순수지향의 음악인이라 할지라도 「서양」이란 형식을 벗기면 음악을 고유한 자율성으로 이해하고 지켜왔다.

그러나 민족현실을 저만치 떨어져 있는 순수음악지상주의는 일본제국주의 폭행시대에 순수음악을 지킴으로서 우회적인 저항과 같은 저항도 아니라 외면이었다. 이들은 서양 음악언어가 「세계성」이라는 이름아래 민족정서를 어떻게 훼손시켜 지배하게 될 것인가를 역사적으로 반성하지 않았다. 특히 일부 음악인들이 미군정과 관계 당국에 길들임으로 민족좌파를 매도하고 음악생활을 보상받는 그 자체가 가장 정치적인 허위의식이다. 이 태도는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음악언어는 민족의 정서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어느쪽도 민족적 양심이라는 기치를 내세웠을지라도 일본제국주의시대의 훼손된 민족정신과 정서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않음으로 해서 이 시대는 스스로 윤리적 기반을 약하게 하였다. 전 시대의 음악작품의 구조와 정신적 조작의 글이 구체적으로 지적되지 않은 채 일본잔재의 청산문제는 그만큼 막연하였다. 일본잔재라면 기실, 해방공간에서 누구나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

또 역사인식이 분명한 민족좌파라 할지라도 그들의 접근은 전통음악과의 대화말고는 그 역사연구가 당대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그 인식은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윤리성은 힘을 가진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할 것인가」라는 물음 역시 부분에 그쳤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철학적 사유체계가 음악은 무엇인가→왜 음악을 하는가→누구를 위하여 음악을 할 것인가→열린 음악사회를 위한 음악의정치적 역할은 ? 이었다면, 그들은 부분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된 자주적 민중·민족주의 음악이 우리 현대사의 변함없는 과제라고 볼 때, 한국 민족의 의식을 자의식으로 전환시키고 민족의식을 공고히 하여 우리화 시킨 민족좌파는 끊임없이 생성성으로 현 단계를 밝혔으며, 음악과 사회의 참 정치의 역할을 밝혀 불변성의 민족혼으로 화해시키려 불태운 우파중도의 채동선을, 그 공간은 소유함으로써 한국 민족주의 음악창출이라는 양대 산맥을 이룩하였으니, 바로 한국사의 역사적 공헌이다. 이러한 양대 산맥·양 날개는 한국 전통의 사유체계였으니, 통일음악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주>

1. 박영근의 「악단회고와 전망」, 『문화통신』, 앞의 책 10쪽에 의하면 「문협」이 악단원 의 총동원을 종용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2. 이상춘, 김자경, 정영재는 45. 10. 18 「음건」 주최 「미군환영음악회」 출연자로, 이흥렬 은 자신의 글(「나의 인생 나의 예술」, 『예술원보』제20호, 예술원, 1976, 28쪽)로, 강장 일, 신막, 이범준은 「음건」 조직 발의자로(박영근, 앞의 글)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렇다.

3. 「문협」서기국은 1945. 8. 31에 「음건」 등에게 문화활동에 관한 기본적 일반방책을 정 하고 구체적인 활동을 요청하였다. 「문화전선」, 경성,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1945. 11. 15. 참고

4. 「8월 테제」는 해방공간의 음악흐름 전체를 조망한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혁명의 단계 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그 과업과 반동적 정치노선을 비판한 이 「8 월 테제」는 음악인을 포함하여 모든 문화단체가 결성되어 당의 지도아래 활동과 동시에 보조단체로서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현 정세, 현 단계 그리고 대중운동과 조직 그 리고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인민정권을 위한 투쟁의 전국적 전개 등 당 면 임무 등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구체적인 상론은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에 서부터 다룬다

5. 「1947년도 조선연감」, 서울, 조선통신사, 1946년 12월, 300쪽.

6. 주보 「건론」 제1호, 경성, 건설출판사, 1945. 11, 14쪽.

7. 이흥렬, 앞의 책, 28쪽.

8. 이 노래들은 모두 해방 후 서울시내 남녀 중등학교 음악 교육자 모임인 「중등음악교과 서 편찬위원회」(김광수, 박은용, 서수준, 최희남, 차정순, 한갑수, 한규동, 이해남) 이름으 로 국제음악문화사에서 발행(박용구 최희남, 박태현 등이 차린 출판사)한 「임시중등음악 교본」에 게재되었다. 이외에도 박태준, 홍난파의 작품외 러시아 민요나 슈베르트 등의 작 품이 모두 50곡이 실려 있다. 아직 음악책이 없었을 당시 문교부 검인정으로 나온 이 음 악책은 45년 말에 초판으로 5만 부가 배포될 정도로 폭발적인 수요와 인기가 있었다.

편찬위원회가 밝힌 바대로 해방 후 앙양되는 건국의식을 반영하기 위한 진취적이고 선구 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미 발표된 예술가곡 중 친일파적 작사자, 작곡자의 가 곡은 이를 제외한다」라는 제재 선택의 이유를 밝히면서도 홍난파, 이흥렬 등의 작품을 선정함으로써 역사인식을 뒤바뀌게 한 오류를 범하였다. 한편 이 교재는 월북 음악인들의 작품으로 말미암아 1948 8. 15 이후 특히 6·25 이후부터 현재까지 자취를 감추었을 정도 로 정당화되지 못하였다. 물론 한국 음악교육사의 주요 연구자료이다.

9. 한효 「예술운동의 전망, 당면문제와 기본방침」, 『예술운동』 창간 12월호 서울,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 1945, 2∼10쪽.

10. 위의 책, 같은 글, 9쪽.

11. 신막,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의 역사적 맹아」, 위의 책, 21쪽

12. 정종길, 「근로대중의 음악」, 『인민예술』 창간 12월호 서울, 연문사, 1945, 17∼20쪽.

13. 박용구, 「해방후의 음악계 3년」, 『민성』 4권 7. 8호 서울, 고려문화사, 1948, 48쪽.

박용구는 바로 이 점이 크게 작용하여 주로 연주가들이 탈퇴, 「프로음맹」이 뒤의 「조 선음악가동맹」으로 결성하게 된다고 보았다 .

14. 김순남, 「악단 회고기」, 『백제』 제2권 제2호 서울, 백제사,1947, 16쪽

김순남은 이 글에서 선민 이데올로기에 의한 계급성으로 가담하여 음악의 독자성과 전문 성을 추구한 점을 반성할 과제라고 지적한다. 그의 이러한 지적은 음악의 대중화를 부정 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15. 노동은, 「한국 음악의 제3전환기 선언」 세 번째 글, 『객석』 통권 48호 서울, 주식회 사 예음, 1988년 2월호, 116∼118쪽.

16. 성경린, 「아악담의」, 『신천지』 4권 8호 서울신문사, 1949. 220쪽

17. 김남식 편, 「남로당 연구자료집」제2집 ,고려대학교 아세아 문제연구소 1974, 274쪽.

18. 「해방일보」 46년 2월 9일자, 또는 인민 2권 2호 한성, 인민사, 1946, 3월호, 72∼74쪽 참조.

19. 박영근, 「음악개관」, 『조선조해방연보』 민주주의 민족전선 편, 서울 문우인서관, 1946, 376쪽 참조.

20. 김남천, 「종합예술제를 앞두고」, 『독립신보』, 1947. 1. 7자.

21. 이 물음은 박용구에 의하여 최초로 던져진 것이 아니다. 이미 1946. 2. 11자 「자유신 문」사설에 나온 제목이었다. 아마 작가가 쓴 것으로 보이는 이 사설의 제목은 「음악 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이었다.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의 근로대중」을 위한 음악이어야 한다는 뚜렷한 글이었다. 그러나 베토벤 등 서양의 문화 텍스트로 접근한 한계가 있었다. 이 물음과 해 답을 구체적으로 구조화시키고 발전한 사람은 박용구였다.

22. 김순남, 「악단 회고기」, 『백제』 제2권 2호, 서울, 백제사, 1947, 15∼19쪽.

23. 박용구, 「해방가요와 시」, 『음악과 현실』, 서울, 민교사, 1949, 57∼61쪽. 그리고 인용 된 가사는 박용구의 같은 책, 같은 곳에서다. 가사 중 삭제된 부분은 1949년의 절박한 상 황에서 글이 남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24. 위의 책, 같은 곳 참조.

25. 김동석, 「음악의 시대성」, 『부르조아 인간상』, 서울, 탐구당 1949, 260∼263쪽.

노광욱, 「민족음악의 두 가지 조류」, 『민성』5권 1호, 서울, 고려문화사, 1949, 62∼63 쪽.

26. 박용구, 「조선 가곡의 위치, 김순남 가곡집 자장가를 중심으로」, 『신천지』 제3권 제8 호, 서울신문사, 181∼185쪽.

27. 노동은, 「사회를 보는 눈에 따라 그들의 소리도 달랐다. 월북 음악인들, 어떤 작품을 썼 나」, 『객석』 통권 제55호 1988년 9월호, 주식회사 예음, 1988, 61∼67쪽.

28. 채동선, 「음악문화 건설에 대하여」, 『예술조선』, 서울, 선문사, 1947, 21∼24쪽.

29. 김성태, 「민족음악의 기초」, 『경향신문』, 1948. 1. 1자.

30. 이헌구, 「해방 후 4년간의 문화동향」, 『문화와 자유』, 서울, 청춘사, 1953.

31. 채동선, '문화시책유감', 『문예』 제1권 창간호, 서울, 문예사, 1949, 173∼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