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소설

민족문학의 정신적 성과




권영민 / 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한국의 현대문학사에서 1945년 8월의 해방은 식민지 시대의 문학을 청산하고 새로운 민족문학의 건설을 도모할 수 있는 중대한 전환적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식민지 문학에 대한 청산은 일제의 강압 속에서 이루어진 민족문학의 정신적 왜곡을 바로잡고, 위축된 민족의식을 새롭게 일깨우는 작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민족적 자기 비판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민족문학의 지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강요된 민족과 국토의 분단, 정치적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민족의식의 분열에 직면하면서 문단적 상황 자체도 갈등과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문단 조직의 좌우 대립과 분열이 계속되는 동안, 문학에 대한 정치적 요구가 새롭게 관심사로 제기되자, 이른바 「문학의 정치시대 」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민족문학의 실천과 그 이념적 지향 자체가 문학의 영역 내에서 제대로 조정되지 못하고 뚜렷한 논리적 진전도 보이지 못한 것은 상황성의 변화에 민감했던 문단의 속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의 창작 영역에서 볼 때 문학의 실천적 성과는 그리 간단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변화의 조짐과 함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중대한 속성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해방과 함께 모국어를 되찾고, 민족의 정신을 되찾은 감격 속에서 문학은 급격한 양적인 증대현상을 드러낸다. 붓을 놓았던 시인들이 다투어 작품을 발표했고, 은거했던 작가들이 소설적 창작에 의욕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의 정신적 해방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식민지 시대의 억압과 고통 속에서 위축 상태에 빠져든 창작적 의욕이 회복되고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의 잡지와 신문이 새롭게 간행되자 그 지면의 상당 부분이 문단의 움직임을 대변하게 되었으며 작가들 자신도 고통의 세월을 벗어난 감격 속에서 작품창작의 태세를 정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단적 상황 자체가 이념적인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작가 개인의 소설적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길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문학적 주장 자체가 순수와 계급의 논리로 대립되고 식민지 체험에 대한 비판과 변명이 서로 충돌하는 과정을 보면 작가적 상상력이 균형을 이루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직후의 소설문단

해방 직후의 문단에서 작가들이 고심하게 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환희와 감격 속에서 소설은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주제의식의 혼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혼란된 현실에 직면하여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고 소설적 세계로 형상화하여 놓을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세계관을 강조하고 이념적 지향을 분명히 내세운 작가라 하더라도 관념의 테두리를 배회하거나 자기감정의 과잉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많다. 모든 작가들에게 있어서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소설적 대상으로서의 주제의 선택과 직결된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요구에서 벗어나 소설 자체의 본질적 속성에 따른 리얼리티의 추구에 전념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었음을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의 개별적인 작가들의 지향하는 바를 볼 배에 아직도 19세기 말엽에 일세를 풍미하던 프로문학을 흉내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자연주의 문학의 구간을 벗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하는 작가들도 있다. 제3휴머니즘이 비록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려고 의기를 보이고 있으나 아직 이론의 확립에 바빠서 작품으로서의 뚜렷한 지반을 닦지 못한 채 있고 그밖에 군소 조류가 착잡하게 얼크러져 있다.

우리가 문예 사상적으로 보아서 그 주류의 포인트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현상이 나타나도록 된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를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문학이 재출현한 8·15 해방 후로 아직 짧은 시일에 주체 구성의 준비가 미흡했다는 것도 그 하나일 것이요,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상이 양대 세력으로 분열을 가져오게 하였고 그것이 다시 파생하여 사분오열된 현상을 빚어낸 것도 그 하나일 것이며, 또한 사회 정세의 혼란과 경제적 파탄이 작가들로 하여금 가장 올바른 문학관을 가지고 새로운 문학사조의 방향과 지향할 바를 연구하고 공부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도 그 하나일 것이다.

--곽종원 「창작계 4년의 개관」(민성, 1949. 8.)

해방 직후의 소설문단을 점검하고 있는 앞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소설적 경향은 그 주조를 분명하게 밝혀낼 수 없다. 민족문학의 확립이라는 해방 직후 문단의 근본 과제만 하더라도 그 개념정립에 있어서 계급문학과 순수문학이라는 상반된 주장이 엇갈려 논쟁의 형태로만 확대되었을 뿐이다. 소설의 세계를 통한 문학적 실천과 그 이념의 구체화를 꾀할 수 있는 방법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해방과 더불어 민족의 자유분방한 삶과 그 현실적인 제반 양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소설화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요청임에 틀림없다. 식민지 시대의 문학적 제약성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이미 소설적 수법 자체의 과감한 혁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통적인 문학적 관습에 대한 전체적인 반성과 함께 민족적 자기인식에 기반을 둔 문학의 사회적인 요건이 새롭게 인식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소설이 그 이전의 모든 소설적 전통을 외면해버려 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30년대 중반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소설미학의 추구방향이나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 등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문제들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전제하고 문단적인 측면을 검토해 본다면 해방과 더불어 문단의 세대교체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문학의 제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광수(李光洙) 이후의 1920년대 작가들이 염상섭(廉想涉)을 제외하고는 거의 뚜렷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해방 직후 소설은 30년대 소설문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이른바 「구인회(九人會)」의 구성원들과 그 이후 신세대 작가들의 문학적 활동을 통해 몇 가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태준(李泰俊) 「세 동무」(1946. 5.)·「해방전후」(1947. 1.), 채만식 (蔡萬植) 「제향(祭饗)날」(1946. 12.), 김동리(金東里) 「무녀도(巫女圖)」(1947. 5.), 정비석(鄭飛石) 「파수(波壽)」(1946. 7.), 박영준(朴榮濬) 「목화씨 뿌릴 때」(1946. 8.), 박태원(朴泰遠) 「성탄제(聖誕祭)」(1948. 2.), 염상섭(廉想涉) 「삼팔선」(1948. 1.), 박노갑(朴魯甲) 「사십년」(1948. 7.), 안회남(安懷南) 「전원(田園)」(1946. 10.), 황순원(黃順元) 「목넘이 마을의 개」(1948. 12.) 등의 작품집이 그 구체적 예에 속한다.

이러한 작가들의 소설적 경향은 대체로 두 가지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문학이라는 것을 사회적 행위의 제어수단으로 보며 그 수단을 사회적 이념의 지표에 연결시켜 보고자하는 움직임이다. 삶의 현실 문제를 계급적 의식에 대응시켜 보고자했던 이태준(李泰俊), 박태원(朴泰遠), 안회남(安懷南), 박노갑(朴魯甲) 등이 이 부류를 대표하며 김남천(金南天), 홍효민(洪曉民) 등이 강조했던 리얼리즘의 방법이 이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경향은 문학과 인생에 대한 폭넓은 조망을 통해 인간의 삶의 모습과 그 존재의 의미를 구하고자 하는 작가들을 들 수 있다. 염상섭(廉想涉)과 채만식(蔡萬植)을 위시한 김동리, 계용묵, 정비석, 최정희, 황순원, 최인욱 등이 이에 속한다. 이 두 가지 부류의 소설적 경향은 물론 당시 문단의 좌우대립 양상과 직결되는 것인데 그 문학적 충동이 해방 직후 소설의 고통스런 자기정립 과정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밖에도 「여수(旅愁)」(백민(白民), 1949. 5.), 「밀회(密會)」(문예(文藝), 1949. 10.) 등으로 창작 활동의 새로운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안수길(安壽吉)을 비롯하여 최태응(崔泰應), 곽하신(郭夏信), 임옥인(林玉仁), 박연희(朴淵禧) 등의 작가적 재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남이와 엿장수」(신천지(新天地), 1949. 9.)의 오영수(吳永壽), 「번요(煩擾)의 거리」(백민(白民)1949, 11.)의 유주현(柳周鉉), 「내일이 없는 사람들」(신천지(新天地), 1949. 11.)의 한무숙(漢戊淑) 등의 등장, 순문예지 「문예(文藝)」(1949. 8.)의 창간도 이 시기 소설문단의 중요한 문단적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식민지 체험과 비판적 형식으로서의 소설

해방 직후의 소설에 나타난 중요한 특징은 작품의 깊이보다 소재의 폭이 중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서 다루어진 사실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더라도 소설이 목표로 하는 총체적인 삶의 세계를 깊이 있게 포괄한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청산하는 일에서부터 해방의 감격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에까지 모든 작가들은 사회적 상황에 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개인적인 삶을 통해 구체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설이 체험의 형식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사실성의 추구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객관화할 수 있는 시간적 간격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심정적 진술의 주관성을 피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작가의식을 내세워 비판의 형식으로서의 소설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할 경우에도 현실 인식의 철저성이 문제가 된다. 해방 공간의 사회적 혼란이 문학정신의 혼돈마저 초래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소설적 양식의 균형이 더욱 큰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해방 공간의 소설적 성과로서 가장 커다란 역사적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체험을 소설적 상황 속으로 끌어들여 비판하고자 한 작품들이다. 박종화(朴鍾和)의 「청춘승리(靑春勝利)」(수선사(首善社), 1949.), 박노갑(朴魯甲)의 「사십년」(육문사(育文社), 1948.)은 식민지 시대의 수난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으며 김동인(金東仁)의 「반역자(反逆者)」(백민(白民), 1948. 10.), 채만식(蔡萬植)의 「민족의 죄인」(백민(白民), 1948. 10.∼1949. 1.), 이태준(李泰俊)의 「해방전후」(문학(文學), 1946 8.) 등은 식민지 체험에 대한 지식인의 자기 비판을 문제삼고 있다.

「청춘승리」는 작가 박종화(朴鍾和)가 즐겨 다루어온 역사소설의 부류와는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장편이다. 우선 소설적 무대가 자신의 경험적 영역에 해당하는 식민지 시대로 고정되어 있고 그 구성에 있어서도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인물의 소설적 결합을 꾀하고 있다. 광주학생운동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스무 해 가까운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민족 수난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재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내용은 식민지 지배하에서 불행하게 태어난 젊은 세대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겪어야했던 고통스런 투쟁과정의 회고, 수난, 치욕, 해방의 네 단계로 나뉘어 전개된다. 작가의 개인적인 감격과 심정적인 진술로 인하여 서술상의 객관적인 거리 조정에 실패하고 있으나,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 체험을 허구적인 인물을 통해 형상화하면서 해방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사십년」의 경우에도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가 한 개인(환찬이라는 주인공)의 삶의 과정으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일제 식민지 지배의 참상과 황폐화된 개인의 삶이 함께 부각되고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일제의 억압적인 통치질서와 그 속에서 궁핍화되고 있는 민족의 고통스런 현실을 함께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에 대한 작가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과 사회의 상황이 만족스럽게 통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의 삶의 단계도 개인적 운명과는 관계없이 시대적 상황 변화에 따라 꿰어 맞춘 듯한 작위성이 없지 않다.

「청춘승리」나 「사십년」이 보여주고 있는 식민지 시대의 삶은 그 경험적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심정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방의 감격이 경험적 사실 자체의 서술에 균형을 이루기 어렵도록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체험의 영역을 역사적 지평으로 끌어올려 객관화시킬 수 있는 시간적인 거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식민지라는 비극적 역사 체험이 문학적 감응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의 사실적 재현이나 회고적 진술보다 자기비판의 작가의식을 통한 역사의 재인식이 더욱 긴요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식민지 시대의 삶은 그것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비판적 반성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 문화 잔재의 청산문제가 해방과 더불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으며 상당수의 문학인들이 민족의 죄인이라는 자기비판의 논리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동인의 「반역자」는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망국인기(亡國人記)」(백민(白民), 1947. 3.)와 대립적인 선상에 놓여 있다. 「반역자」는 이광수의 행적을 모델로 하고 있는데 비해 「망국인기」는 김동인 자신이 겪었던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역자」의 주인공은 평안도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거친 후에 조선 민족의 문화적 향상을 위해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조선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지만 만주사변이 확대되면서 일본이 전쟁에 몰리자 일본에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일본이 승리하는 날에 조선에 돌아올 여덕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일제에 협력했던 주인공은 조선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힌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는 일본 천황이 항복을 포고하는 방송을 듣고 눈물을 짓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가 김동인은 민족의 현실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몰주체적 인식으로 인하여 파멸해버리는 지식인의 면모를 추적하고있는데, 그 속에는 「망국일기」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자기 모럴의 대타적인 암시가 담겨져 있다. 「망국인기」의 경우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고백록과 같은 작품이다. 김동인은 이 작품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자기 행적을 펼쳐 보인다. 오직 소설이라는 외곬만을 고집하다가 가산을 탕진해버린 점이라든지 소설문학의 발전을 위해 고투했던 점들이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반역자」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비판적 의식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자기 변명에 가까운 개인적 진술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김동인의 자기변명이 비판의 대상에서 자신을 제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정신적 몰락이 개인적인 비판이나 변명에 의해 해명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동인의 「망국인기」와 「반역자」가 변명과 비판의 논리를 담고 있는 듯 하면서도 현실적 체험을 객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데에 비해 이태준(李泰俊)의 「해방전후」와 채만식(蔡萬植)의 「민족의 죄인」은 비판과 지양의 변증법적 논리를 포괄해 보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해방전후」는 일제 말기에 붓을 꺾고 낙향한 주인공과 고향 마을 향교를 지키고 있는 노인의 삶의 방식을 대조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젊은 주인공은 강압에 못 이겨 친일적인 문필활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 해방이 되자 모든 것을 떨어버리고 새로운 진보적 이념을 신봉하며 문학운동에 앞장선다. 봉건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인이 끝내 자기의식에 함몰되어버리고 마는 것과는 달리 주인공은 과거를 청산하고 이데올로기의 지향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이데올로기 선택은 식민지 시대의 무의지적 정신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처럼 설명됨으로써 이태준 자신의 작가적 변모과정이 노출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민족의 죄인」은 자기변명이나 자기합리화의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정신적 상처를 자기 모럴의 확립을 통해 극복해 보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일제시대 지식인들이 보여준 삶의 세 가지 방식을 각각 대변하고 있다. 자기 신념에 의해 절필한 인물과 강요에 의해 친일적인 문필활동을 행한 인물, 그리고 경제 사정으로 친일적인 신문의 기자로 끝까지 남아 있었던 인물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이 세 인물은 모두 해방 직후에 함께 만나 새로운 조국의 문화건설 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끝내 은거하면서 절필했던 인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노골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서 친일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머지 두 사람은 자기혐오에 빠져들긴 하지만 민족의 죄인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생존의 조건과 모럴의 선택이 서로 대응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철저한 자기비판만이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제시하고 있다.

귀환의 과정과 현실인식

해방 직후의 소설 가운데에서 식민지 체험에 대한 작가들의 비판적 정리 못지 않게 중요한 주제로 취급되었던 것은 해방 공간의 소설적 형상화 작업이다. 해방의 의미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았다는 역사적 사실로 규정되고 있듯이, 잃어버린 고향으로의 귀환의 과정이 소설의 장면 속에 자주 등장한다. 새로운 삶의 시작과 그 지향을 동시에 문제삼고 있는 작품으로서 특히 주목되는 것으로 계용묵(桂瑢默)의 「별을 헨다」(동아일보, 1946. 12.)·「바람은 그냥 불고」(백민(白民), 1947. 7.), 김동리(金東里) 「혈거부족(穴居部族)」(백민(白民), 1947. 2.), 최인욱(崔仁旭)의 「개나리」(백민(白民), 1947. 7.), 허준(許俊)의 「잔등(殘燈)」(대조(大朝), 1946. 1.), 정비석(鄭飛石)의 「귀향(歸鄕)」(경향신문, 1946. 10.) 등이 있다.

「별을 헨다」·「바람은 그냥 불고」 등에서 계용묵(桂瑢默)은 해방 직후의 현실 공간에서 가장 문제적일 수 있는 상황성의 국면을 깊이 있게 천착한다. 「별을 헨다」의 주인공은 해방과 더불어 만주에서의 고통스런 삶을 청산하고 귀국하지만, 38선 이북의 고향을 찾지 못한다. 북쪽에 소련군이 주둔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수월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노모와 함께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삶의 곤궁함을 이겨낼 수 없고 방 한 칸 마련도 어렵게 되자 두 모자는 결국 북쪽의 고향에 마지막 희망을 걸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서울역에서 북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두 모자는 북쪽에서 밀려 내려오는 많은 피난민들의 행렬을 만난다. 이북에서의 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서울로 피난 오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들은 대합실에 우두커니 서버리고 만다. 고향마저 잃어버렸다는 허탈감과 함께 행렬이 빠져나간 역구내에 차가운 기운만이 감돌뿐이다.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해방 공간의 상황을 보면 해방의 감격이 삶의 현실에서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감상에 지나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귀향의식의 도달점이 상실성의 극복으로 통하지 않고 오히려 국토의 분단과 또 다른 고향 상실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 자신의 시선 역시 비록 잠정적인 선택이라 하더라도 현실에 대한 환멸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해방 공간의 상황을 뚫고 나아가는 길이 「별을 헨다」는 행위의 막연성으로 표상 되고 있는 것처럼 ,삶의 좌표를 찾기 어려움을 암시하고 있다. 이 소설의 핵심은 「별」이 지시하는 새로운 삶의 세계가 과연 어디일까 하는 질문에서 비롯되지만, 오갈 수 없는 운명적 상황을 놓고 누구도 그 해답을 준비하기 어려움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작가 계용묵이 포착하고 있는 상황적 아이러니는 되찾은 조국과 또 다시 잃어버린 고향의 의미로 인하여 비극성을 드러낸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바람은 그냥 불고」에서는 징용에 끌려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기다림이 간절하게 그려진다. 물론 작가는 기다림의 과정보다는 일제의 앞잡이로 징용을 강요했던 한국인이 해방 후에도 여전히 득세하며 살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에게는 해방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추상적 의미보다 여전히 「바람」이 불어대는 황량한 삶의 공간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을 뿐이다. 백철(白鐵)에 의해 기교의 작가로 평가된 적이 있는 계용묵의 작가적 태도는 단순한 기교주의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은 물론이다.

기교를 무시하고 좋은 작품을 말한다는 것은 한낱 망상이다. 기교라면 거기 세련된 문장, 구성의 묘법이 혼연일치 되어 표현되는 그 과정을 말하게 되는 것으로 이 과정이라는 것이 내용에 피가 되어 엮어 나가는 것이다. 여기엔 문장의 재주가 지대한 조건이 된다. 이렇게 절대적인 이 기교를 가리켜 기교 치중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는 말밖에 더 되지 않는다

기교를 부리다가 재주에 넘었다는 말을 나는 어떤 평론가에게서 일간 들었다. 예술은 씨름과 다르다. 씨름은 운동이니까 제 재주에 넘을 수가 있어도 작품은 예술이니까 절대로 기교에 실패보지 않는다.

----계용묵 「작품과 기교」(백민(白民), 1948. 3.)

이러한 견해는 소재주의가 만연해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기법을 말한다는 것은 문학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 주제의식에만 매달려 있던 소설의 경우에는 특히 기법의 인식이 필요하다. 소재를 다루는 방편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소재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과정에 있어서도 기법이 그 성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계용묵은 아이러니의 방법을 통해 해방 공간의 비판적인 현실인식과 그 소설적 형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귀향의식의 추이를 인간성의 내면을 통해 묘사하고 있는 김동리(金東里)의 「혈거부족」에서는 만주에서 고국을 그리며 죽어간 남편의 유골을 안고 귀국한 여인의 고뇌가 그려진다. 삶의 고통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개가하여 생활을 새롭게 꾸릴 수 있지만 주인공은 죽은 남편의 소망을 떨치지 못한다. 이와 비슷한 소재는 최인욱(崔仁旭)의 「개나리」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는데,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이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귀향의식의 상황적 한계를 짐작하게 한다.

허준(許俊)의 「잔등」은 만주에서 서울까지 돌아오는 귀환의 과정이 소설화된 작품이다. 회령과 청진을 경유하는 주인공의 귀환과정은 이 소설의 내면구조에 해당되는데 그 귀환의 여정에는 해방의 감격도 고통스러웠던 만주 생활에 대한 푸념도 새로운 희망도 끼어 들고 있지 않다. 주인공은 조국이 해방되었으니 그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피난민의 대열에 끼어 무개화차 위에 올라타게 된다. 작가는 「새시대의 거족적인 열광과 투쟁 속에 자그마한 감격은 있어도 좋은 것이 아니냐고들 하는 사람이 있는 데는 나는 반드시 진심으로는 감복하지 아니한다. 민족의 생리를 문학적으로 감득하는 방도에 있어서 다시 말하면 문학을 두고 지금껏 알아오고 느껴오는 방도에 있어서 반드시 나는 그들과 같은 소망을 가질 수 없음」을 이 작품의 후기에 기록하고 있다. 「잔등」의 작가가 보는 해방 공간의 현실에는 흥분과 광기가 넘쳐 있을 뿐이며 그 한 구석에 비애와 허무가 곁들여 있는 정도이다. 청진역전에서 만난 노파의 국밥집에 어린 희미한 불빛이 명멸하는 것을 보면서 주인공은 서울까지의 여정에 절반을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피난길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알게 된다. 길은 남아 있으나 이미 여행이 끝난 것이다. 남아있는 여정이 색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라는 주인공의 생각이 작가의 의식에 이어지는 것이라면 바로 그러한 냉정한 자기 정리가 해방공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귀향의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귀항 이후의 현실적 귀착점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해방 공간의 상황이 그러한 판단을 유보하게 한 것이라면 그 현실 자체에 대한 접근법도 용이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채만식(蔡萬植)의 「맹순사(孟巡査)」(백민(白民), 1946. 3.)·「미스터 방(方)」(대조(大朝), 1946. 7.), 이무영(李無影)의 「굉장소전(宏壯小傳)」(백민(白民), 1946. 12.) 등이 보여주는 세태풍자는 작가들에 의해 선택된 현실비판의 방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채만식(蔡萬植)은 자신이 겪었던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굴욕을 스스로 과감하게 노출시켜 자기비판에 앞장섰던 작가이다. 자신의 죄의식을 어느 정도 수습하면서 채만식이 해방 공간의 현실에 눈을 돌렸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식민지 시대와 다름없는 혼란과 비리의 상황이다. 그가 해방의 허구성과 모순을 비판하기 위해 활용하고 있는 것은 풍자의 빙식이라는 우회적인 접근법이다. 소설 「맹순사」는 일제시대의 순사가 다시 해방 후에도 순사의 자리에 앉을 수 있고, 일제시대의 살인강도가 해방 후에 순사가 될 수도 있는 현실의 비리를 꼬집는다. 순사와 살인강도의 등식화는 윤리 부재의 상황에 대한 비판이지만 일제시대의 순사가 실상은 살인강도에 다름 아니고 해방 후의 순사도 마찬가지의 존재일 수 있다는 판단이 그 속에 담겨 있다. 「미스터 방」의 경우에는 주둔한 미군 세력에 빌붙는 아첨배들의 형상이 희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인물의 풍자 자체가 작위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혼탁한 사회적 풍속을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무영(李無影)의 「굉장소전」도 「미스터 방」과 비슷한 패턴의 인물풍자에 속한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의 비위를 맞추고 해방 이후에는 권력자를 찾아다니는 기회주의적인 주인공의 행태가 속속들이 파헤쳐지고 있다. 시대상황의 변화에 급급하면서 자기성찰을 기하지 못하는 주견 없는 인간 군상의 표상을 우리는 이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방 공간의 현실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소설은 비판의 형식에 대응한다. 이것은 시대 상황 자체가 방향성을 잃고 있다는 조건이 문제이긴 하지만 전체로서는 삶에 대한 인식이 소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어려웠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소설적 방법의 모색과 선택

소설이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해방 공간의 상황은 그것을 거쳐야 하는 작가들에게 충격과 부담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충격과 부담을 극복하는 방법이 소설의 측면에서 모색되어야만 한다는 명제를 놓고 볼 때 체험적 진술이든 비판적 진술이든 소설적 방법 자체에 대한 논의가 요청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작가의 세계관의 선택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커다란 변수를 내포하고 있다

창작방법은 창작에 있어서의 규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창조적인 부면에 있어서 작가의 능력과 사회적 투쟁을 인도할 수 있는 원칙적인 것 다시 말하면 예술적 창작의 기본적인 방법이라는 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라 믿어진다. 물론 창작방법은 고래불변인 것도 아니요, 또 만인 공통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문학예술가가 민주주의 조선의 탄생과 육성이라는 위대한 역사시대에 처해서 무엇을 들고 이에 이바지하고자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공통인 것이며 이것이 토대가 되어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창작이론인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자체내의 커다란 계기로 하는 진보적 리얼리즘의 제시가 그 의의를 완전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남천 「새로운 창작방법에 관하여」(전국문학자대회 강연, 1946. 2. 8.)

좌익 문단에서 제기되고 있는 진보적 리얼리즘이란 이데올로기의 소설적 실천을 의미한다. 진보적 리얼리즘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소설에서 가장 중시되고 있는 것은 행동이다. 여기서의 행동이란 다른 말로 바꾸어 볼 매 계급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리얼리즘이란 대상의 객관적 인식이 문제가 아니라 이념적 통일을 문제삼는 규범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조차도 개성적인 면모보다는 이념적 투철성 여부에 그 성패의 판단 기준을 두고 있다.

이러한 방법적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 가운데 안회남(安懷南)의 「폭풍의 역사」(1947)를 보면 그 문학적 실상이 쉽게 드러난다. 해방 전의 기미년 만세운동과 해방 후의 3·1절 기념식에서의 민중폭동을 계급투쟁이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묶어보고 있는 이 작품은 역사와 현실을 이데올로기의 요구에 따라 재편성하고있는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물론 안회남 자신은 소시민적 자의식을 벗어버리고 일상적인 자기 체험의 변두리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동석(金東錫)에 의해 「비약하는 작가」로 평판을 얻었던 그가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인물을 통해 그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리얼리즘의 정신에 대한 추구의 한계에 다름 아니다. 신변적 체험을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식민지 시대를 벗어난 안회남이 작가 내부의 욕구와 현실의 상황을 통합시킬 수 없었던 것도 문제이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소설적 형상화도 문제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안회남의 한계는 이데올로기에 이끌려 모스크바에까지 서성거렸던 이태준(李泰俊)의 경우에도 해당되며 「태평성대(太平盛代)」(경향신문, 1946. 11.)와 「군상(群像)」(조선일보, 1949. 6∼?)을 쓰고 있던 박태원(朴泰遠)의 어정쩡한 포즈에도 함께 해당된다.

진보적 리얼리즘이 소설적 미학의 구현이라기보다는 계급이념의 소설적 수용을 위한 방법처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동안 그 반대편에는 문학의 본질적인 정신을 휴머니즘에서 찾고있는 김동리(金東里)의 활동이 파장을 일으킨다. 개성의 자유와 인간성의 존엄을 내세운 김동리의 「제3기 휴머니즘론」은 순수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진영의 문학론을 대변하게 된다. 문학을 통한 인간 운명의 발견은 그가 자주 거론해온 「생의 구경적(究竟的) 형식으로서의 문학」에 직결되지만 그 방법과 정신이 삶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모든 인간의 삶에서 본래적으로 부여된 운명을 발견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해방 이전에 김동리가 발표한 「바위」, 「무녀도(巫女圖)」, 「황토기(黃土記)」 등이 식민지 현실의 경험적 상황과 무관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의 「달」(문화(文化), 1948. 4.), 「역마(驛馬)」(백민(白民), 1948. 1.) 등이 관념적 주제의 반복에 해당됨을 확인할 수 있다. 확실히 김동리의 경우에는 주제의 확대나 심화보다는 동일한 테마의 반복성이 문제가 된다.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생의 구경적 형식」에의 지향을 뜻한다면 그 유형화의 위험을 반드시 지적해야만 할 것이다.

「역마」의 소설적 구도는 당사주(唐四柱)의 「역마살」을 타고난 핏줄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미묘한 삶의 양상을 보여준다. 「역마살」이라는 당사주의 운명으로 표상 되는 한 사내의 비극적인 삶은 어머니의 이복동생을 사랑하게 되는 고비에서 하나의 반전을 일으킨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체념해버림으로써 사내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기 때문에 혈연에 대한 거역을 모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운명에의 도전보다는 인륜에의 추종으로 결론 지워진 이 작품에는 현실이나 사회적 문제성이 거와 드러나 있지 않다. 현실적인 제반 조건으로부터 유폐된 공간이 한 인간의 삶의 테두리로 설정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운명이란 삶의 현실을 떠나 구체화될 수 없다.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것도 현실 속에서의 삶의 과정과 그 행위의 방향에 따라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과 궁극적인 삶의 태도를 따지기 위해서는 삶의 조건을 문제삼지 않으면 아니 된다. 김동리의 「제3기 휴머니즘」이 역사의 진보에 대한 회의와 해방 직후 혼란된 현실에 대한 외면이라는 비논리에 빠져들어 본격문학에 대한 지향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당시의 반론이 이유 있는 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학의 계급적 실천이 리얼리즘론을 무색하게 하고 순수문학이 반역사적 관념에 함몰될 수 있는 위험성을 드러낸 것이 정치적 상황성의 영향이라고 한다면 이를 비켜 나아가기 위한 이른바 「중간파」의 논리가 검토되어야 마땅하다. 백철(白鐵)의 좌우문단 통합론에서부터 구체화된 「중간파」적 입장은 정치 추종의 문학에서 벗어나 문학적 건강성을 회복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백철 자신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훼손된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고 문학의 독자적인 세계를 확립하며 혼란된 시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이 새로운 윤리의식의 창조에 앞장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윤리의 개척과 신인간의 창조」를 내세운 백철의 주장은 계용묵, 이무영, 정비석, 황순원, 박영준 등의 호응을 얻고 염상섭도 이에 동조함으로써 문단의 중간 지대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더구나 시단의 경우에도 김광균, 장만영 등이 문학의 위기를 지적하여 좌우문단 대립을 비판하고 나서자 그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백철은 스스로 「중간파」라는 명칭에 불만을 갖고 오히려 이 명칭 대신에 「신현실주의파」라는 문학사적 경향과 세계관에의 지향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명칭을 쓴 적도 있다. 그는 현실의 상황을 통과할 수 있는 역사관과 의지를 내세우며 문학의 자기 정립을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시기 편승적 기회주의라는 비난이 뒤따랐던 것이다. 중간파의 문학적 지향이 백철의 주장대로 현실적이며 신윤리적 의식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지목하고 있는 염상섭의 「첫걸음」(신문학(新文學), 1946. 1.)·「이합(離合)」(개벽(開闢), 1948. 1.), 황순원의 「술 이야기」(신천지(新天地), 1946. 2 )·「담배 한대 피울 동안」(신천지(新天地), 1947. 2.), 그리고 박영준의 「배신(背信)」(민성(民聲), 1946. 4.)·「고향 없는 사람들」(백민(白民), 1947. 2.) 등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염상섭의 문단적 재등장을 의미하는 소설 「첫걸음」은 만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후에 발표한 첫 작품이다. 일본인 행세를 했던 사내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 소설은 개인적인 자기비판과 반성을 통해 해방의 감격을 민족과 함께 맞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떳떳한 한국인으로 돌아오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김동인(金東仁)의 소설 「김덕수」(대조(大朝), 1948. 8.)의주인공과 전혀 다른 입장을 나타낸다.

「이합(離合)」은 속편으로 발표된 「재회(再會)」(개벽(開闢]), 1948. 8.)와 함께 민족분단의 비극을 한 가정의 경우를 통해 제시해 놓고 있다. 만주에서 해방과 함께 귀국한 주인공은 이북에 생활 근거를 마련하지만 부인회 활동에 가담하면서 좌경해 버린 아내와의 갈등 때문에 아들만 데리고 월남한다. 이데올로기의 충동으로 인하여 한 가정이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속편에서 아내의 회개와 반성으로 온 가족이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행복 된 결말을 맺고 있다. 일시적인 남북분단이 결코 장기화될 수 없으며 다시 통일을 이를 수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의지가 스며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황순원은 해방과 함께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의 문제에 접근하는 작가적 태도를 보여준다. 비록 단편적인 것들이긴 하지만 그의 소설들이 사회적 문제성을 밀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술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일본인이 경영했던 양조장을 인수하며 경영하게 된 한국인의 자세를 비판적으로 그려놓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른바 「적산(敵産)」의 처리문제와 그 인수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비리와 모순을 함께 지적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것이 단순한 물질적인 측면의 문제가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것을 한국인이 다시 되찾는다는 것보다는 그것이 한국인들의 새로운 삶을 위해 공평하게 분배될 수 있는 상황까지도 작가는 이 작품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직후의 소설문단에 제기된 창작방법과 그 실천방향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제외할 경우 삶의 내적 의미와 외적 조건에 대한 관심 여하로 집약된다. 하나는 소설미학에 치중하면서 인생파적인 관점을 유지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리얼리즘의 정신에 주력하여 현실 인식을 문제삼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의 장르 자체가 갖는 개방성에서 본다면 오히려 크게 문제삼을 만한 것은 아니다. 문단적 상황과 그 변화에 따른 편의적인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매듭

해방 공간의 소설을 문제삼으면서 반드시 지적해 두어야 하는 문단적 사실은 문인 집단의 월북과 연관된 소설문단의 재편성이다. 좌우 문단의 분열과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제기된 민족문학의 건설 문제를 농고, 좌익 문단은 진보적 민주주의 문학 또는 노동 계급의 이념에 기초한 인민의 문학을 주장하였고, 우익 민족문단은 순수문학을 내세웠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남북 분단이 기정 사실화되고 남한의 단독 정부수립이 구체화되는 단계에서 상당수의 문인들이 북쪽을 택하는 경로에 대해서도 이제는 그 윤곽이 밝혀져 있다.

소설가의 경우, 월북 문인에 포함되어 있는 작가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계급문학운동을 주도했던 「카프」 계열의 작가들이며, 다른 하나는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던 순수파 문인들이다. 「카프」 계열의 작가로서 이기영(李箕永)은 「해방」(시문학(詩文學), 1946. 4.)을 발표하였으며, 한설야(韓雪野)의 경우는 몇 편의 평론이외에 창작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남천(金南天), 엄흥섭(嚴興燮), 이근영(李根榮), 송영(宋影) 등이 비교적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지만, 「고민」(송영 1945), 「동맥(動脈)」(김남천, 1946), 「쫓겨온 사나이」(엄흥섭, 1946) 등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관심을 모으지 못한다. 이들은 창작적 실천보다 조직운동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운동의 실천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모두 월북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태준(李泰俊), 박태원(朴泰遠), 안회남(安懷南), 박노갑(朴魯甲), 김소엽(金沼葉), 허준(許俊), 현덕(玄德) 등의 월북은 앞으로도 더욱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들은 모두 예술파적 기질을 안고 있는 작가들이었기 때문에, 이념에 대한 선택 문제가 예사롭지 않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소설의 시학의 정립에 근접했던 박태원(朴泰遠), 이태준(李泰俊) 등이 근대성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을 이데올로기에 대한 추종으로 바꿔 버린 것은 우리 문학의 정신사적인 계보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새롭게 재검토되어야 할 문제라고 할 것이다.

해방 공간의 소설은 이념의 개방지대 위에서 그 창작적 실천이 가능했지만, 실제의 작품 내용 속에서 이념의 대립에 의한 민족의 분열을 총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의욕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식민지 체험을 문학적으로 정리 비판할 수 있는 여유를 누리기도 전에, 민족 분단을 초래하는 이념의 대립이 노정 된 점에 기인한다. 과거에 대한 정리가 제대로 시도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작가들은 새로이 전개될 민족사의 불투명한 전망을 다시 문제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공간의 소설은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 체험을 다룬 것이든, 당대 상황의 문제성에 접근한 것이든 간에 모두가 문제제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설적 경향이 결국 분단 문학의 형국을 예견하게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