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멋이 담뿍 찬 소리가락
-잊혀진 이기권의 소리를 찾아서-전주
유영대 / 전주 우석대 교수
다른 인연 없이도 한편쯤 전주를 들른 사람은 누구나 전주를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한다. 전주의 비빔밥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선 음식의 푸짐함을 손꼽는다. 새벽 네 시면 예외 없이 붐 비는 콩나물 해장국밥집의 정겨움을 말하기도 한다. 흑설탕을 막걸리와 함께 끓인 모주의 맛은 또 어떠한가. 전날 밤을 새워 술을 마신 술꾼들의 속 풀이에는 그만이지 않은가. 가짓수를 보면, 타관 사람들은 놀랄 만하다. 상을 그득 채우고, 그 반찬그릇 위에 포개어 놓을 줄 아는 넉넉함, 그 여유는 전주이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런가 하면 전주는 멋있는 고향이기도 하다. 저켠으로 우리의 기와집이 한 동네에 그득 채워진 것을 보면 저절로 「멋있다」는 탄성이 나온다. 그러나 하필 그것만이 멋이겠는가. 전주야말로 진짜 우리의 소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전주대사습에서부터 비롯된 판소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곳이며, 지금도 이 시대의 대표적인 소리꾼인 홍정택, 이일주, 조소녀, 이성근 등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명고수인 송영주의 북 솜씨를 직접 맛볼 수 있는 곳도 바로 전주가 아니던가.
내 생각으로 전주대사습놀이만한 축제도 없을 듯하다. 그 규모에서도 그러하고 내용에서도 그러하다. 예전에는 더욱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춘 이 지역의 축제이자 전국적인 잔치였었다.
더구나 그것이 관의 행사로 제도화된 것이 아니고 통인을 매개로 한 민간주도의 축제였다는 것은 대단히 의의 있는 일이다. 홍현식씨의 정밀한 조사보고에 의하면 원래 대사습은 동짓날의 통인놀음이라고 한다. 대사습날에 통인이 광대를 초청하며 통인청이나 활터에서 판소리를 듣고 즐겼다 한다. 인기 있는 광대의 판소리가 고조되면 밤을 새워가며 경청하였다 한다. 물론 감사나 부사와는 전혀 무관한 진정한 서민들의 축제였었다.
원래 전주야말로 판소리의 고향이다. 모든 광대에게는 전주대사습에서 소리하는 것이 서울에 가서 소리하는 것보다는 더 큰 영예로 생각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전주대사습에 참가하기 위하여 온 광대들이 먼저 고창에 들러 신재효에게 먼저 소리를 들려주고 자신의 기량을 점검하였다고 한다. 일단 대사습에서 소리를 했다는 사실은 광대 스스로에게 도 큰 영예가 되었지만 그것이 경연, 혹은 시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애초의 대사습은 판소리 축제였다. 김세종, 이날치, 정창업 등도 대사습을 통하여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고 제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한다. 판소리 서편제의 대가인 정창업도 전주대사습에 와서 실수한 에피소드가 있다. 춘향가의 초입인 이도령 광한루 구경차 나가는 대목에서, 「방자 분부 듣고 나귀안장을 짓는다. 나귀안장 지을적에 나귀등에 솔질 솰솰」까지 가다가 다음 대목을 긴장한 까닭에 그만 잊어버린다. 그래서 「나귀등에 솔질 솰솰」만을 소리 높여 여러 차례 부르니 좌중이 「저 혹독한 솔질에 그 나귀는 필경 죽고말테니 차마 볼 수가 없다」고 하여 정창업이 퇴장 당했다 한다. 이 에피소드를 참고하면 당대의 청중의 수준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광대와 청중이 함께 즐기는 축제의 모습과 아울러 엄정한 감식능력이 갖추어진 이른바 귀명창들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이 대사습의 전통이 끊어져 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일제의 침략과 그에 의한 우리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이 같은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전주대사습놀이의 전통이 다시 70년대부터 이어져 내려와 금년에는 열 네 번째가 되었다. 그리고 이 놀이의 마당을 통하며 수준 높은 판소리 창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전주가 지녀온 멋의 깊이를 알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판소리의 고향을 점검해 왔다. 그 검토의 대상이 되는 곳은 대체로 판소리 창자의 고향이거나 판소리 성장의 기반이 되는 의미 있는 지역이 되었다. 명창이 사는 지역이 판소리 전승의 거점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 명창을 중심으로 삼아서 다른 많은 창자들이 모여들고, 같은 스승에게 배우다 보니 배우는 이들의 소리의 스타일도 거의 같아지게 된다. 씩씩하고 웅장한 맛이 나게 부르거나, 애원처절한 느낌이 많은 소리를 하는 것은 소리를 독자적으로 수련하여 이루어낸 특정한 명창의 능력이지만, 이것이 일단 전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전승집단의 스타일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른바 판소리의 유파도 생겨 나는 것이다.
검토한 판소리의 고향은 어느 한 유파의 대표성을 갖는 특징이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동편 소리와 신재효, 정정렬과 김연수, 보성 소리 등을 차례로 살펴본 것이다. 이번에는 전주를 중심으로 하며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전주는 몇 번이나 먼저 해보고자 한 판소리의 고향임에도 뒤로 미루어졌다. 그 이유는 전주의 판소리가 가닥이 단순하지 않아서 정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동실에게서 비롯된 열사가를 모두 가지고있는 이성근이 특히 주목되며, 동초제 소리의 명창인 이일주와 조소녀도 또한 중요한 가닥을 이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명고수이자 판소리의 이면사와 이론에 정통한 송영주도 주목할만한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들에 대한 면담 조사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 사실은 없어서 그것을 고민하느라고 늦어졌다.
그런데 이 같은 조사가 진행되면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인물을 찾게 되었다. 그 사람은 명창 이기권이다. 그는 지금은 공백으로 있는 일제 때 전북의 판소리 전수의 큰 몫을 차지한 대표성이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이기권의 판소리를 간략하게 재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소리는 지금은 명창 홍정택이 받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소리내력도 함께 검토하기로 한다.
이기권의 판소리
사실 이기권에 대한 관심은 판소리 학자인 최동현에서 비롯된다. 그는 전북지역의 판소리를 점검하면서 새삼 이기권의 위상이 폭넓고 뿌리 깊음을 느끼게 되었다고 하였다. 전북지역의 판소리 창자치고 이기권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경우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구체적인 생몰연대도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김연수의 사설집인 춘향가의 해설에 붙은 역대 명창의 기록에도 이기권은 순종 때 사람이라는 기록 밖에는 없다.
이기권은 19세기말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며, 해방된 다음, 6·25 나기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판소리는 젊어서 정정렬에게 사사하여 5바탕의 바디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전한다. 흔히 정정렬의 제자로 김여란을 꼽으나, 정정렬의 소리는 그대로 이기권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특히 이기권도 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소리의 기교가 뛰어난 정정렬의 목이 제대로 전승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서 살다가 그 뒤에 이리권번의 소리 선생으로 정착하면서 전북지역의 판소리 전수에 큰 몫을 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기권이 함열에 있을 때 홍정택 등이 그를 모시고 부안의 월명사에서 5개월 동안 소리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이기권은 이리권번에 자리를 정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간간이 여기저기 소리를 하고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당시 유행하던 창극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다. 명고수인 송영주는 다음과 같이 이기권을 회고하였다.
이기권은 한 마디로 멋쟁이라고 헐 수 있지. 다른 광대들허고는 달라서 그 양반은 양복을 잘 챙겨입었지. 왜정 때, 그때는 이리권번에 소리선생으로 있었는디, 우리 집을 한두 차례가 아니라 수십 차례 놀러왔었어. 올 때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 안 매는 군대식 저고리를 입은 적도 입구만. 우리 집이 신태인이니까, 올 때면 가방에다가 한복을 떡 넣고 와 가지고, 집에 와서는 양복은 벗어버리고, 가방에서 한복을 꺼내 입고, 소리를 허셨지. 그전 광대들처럼 갓을 쓰고 소리를 허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소리를 하는 모습이 선연허구만.
이기권을 회상하는 사람이면 그의 늠름한 풍채를 모두 이야기한다. 아주 당당하며 멋진 풍모였으나, 정감 어린 소리가 또한 특징이었다고 한다. 그가 특히 잘하는 소리로는 5바탕소리가운데서도 춘향가와 심청가라고 홍정택은 말한다. 그리고 그의 발림의 우아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의 소리하는 모습을 직접 접한 송영주에 의해서도 이 점은 확인된다. 다시 송영주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다. 송영주도 이기권은 특히 춘향가에 능했다고 말한다.
풍채가 아주 좋았어. 그러면서 발림도 아주 태가 나서 청중을 압도했지. 정정렬의 수제자로 정정렬의 소리를 그대로 한다고 평이 있었지. 뒷짐지는 자세에서부터 부채를 올리는 발림 등이 예전 광대들의 진중한 모양 그대로였지. 그렇게 풍채가 좋으니까 김여란 같은 미인허고 로맨스도 이뤄지는 것 아닌가, 김여란 선생은 권번에 다닌 일류 미인이었지요. 젊어서는 참말로 미인이었지. 그 둘이 정정렬 소리의 수제자이기도 했지만, 함께 살았지. 그가 잘허는 소리는 특히 춘향전이었는디, 이 정정렬제 춘향가 바디 중에서는 내 생각으로 「신연맞이」 대목하고 이도령이 파루치기를 기다려 옥중 춘향이 만나러 가는 「초경 이경 삼사오경」 대목이 제일 좋다고 보는디, 그 대목을 아주 잘했어. 신연맞이의 급창을 설명하는데서 「키 크고 길잘겉고 맵시있고 어여쁘고 영리한저 급창∼ ∼」 이렇게 끌고 나가는데, 이 두 장단 속에 완자걸이 ,잉어걸이, 밀붙임 등 장단의 기교가 다 들어 있지. 「초경 이경 삼사오경」허는 대목도 정정렬 바디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특징이 그대로 들어있지. 이 대목을 특히 이기권 선생이 잘했그만.
그런데, 이기권을 이야기할 때, 그의 소리에 대한 역량보다는 대체로 그의 가르치는 솜씨에 대한 지적이 압도적이었다. 그는 이리권번의 소리선생으로 있으면서 북과 거문고, 대금의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고 한다. 그러길래 홍정택은 이기권을 가리켜 「속 멋이 담북 찬 양반」이라고 표현하였지만, 그러한 찬사에 값하는 듯하다.
최동현은 전북지역의 50대 이상의 판소리 창자들은 대체로 이기권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여성 창자의 경우는 대부분 이기권에게 직접 배웠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래서 「남도에 박동실, 북도에 이기권」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전파되었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박동실은 광주를 중심으로 서편제 소리를 전수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지금도 그의 소리제가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특히 박동실제의 멋은 심청가에 구현되고 있다. 박동실은 창극단을 이끌고 다니며 활약하기도 하였고, 열사가 등을 지어서 반일 감정을 고취시키면서 판소리를 이념적인 것으로 상승시키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역시 그의 가장 큰공으로는 좋은 제자들을 기른 데 있다고 하겠다. 남도에서 박동실이 한 몫을 북도에서는 이기권이 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홍정택, 김원술, 최난수, 이일주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그는 가르치는데 많은 정력을 기울인 것 같다.
목이 좋은 셈은 아니었는디, 남도 일대에서는 선생으로는 제일인자였을거여. 아마 왜정 때, 전북 근처에서 소리헌다는 사람 치고 이기권제로 안 부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김원술씨도 원래는 전도성 명창이 수제자인디, 그 양반이 돌아가시자 나중에 이기권에게 가서 소리를 때왔다고 허지. 목이 굳은 대신 가르치는 솜씨가 좋았던거여.
이것은 송영주의 증언인 바, 시인 정양도 이기권에 대하여 「좋은 선생이었지, 좋은 창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정양은 목소리에 좀 자신이 없는 이들이 가르치는 데는 특히 소질을 발휘하는데 이것은 비단 이기권의 경우만 아니고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말하였다. 예컨대, 박동실의 경우도 실제로 그의 소리는 그렇게 뛰어난 것은 아니라고 말해진다. 소리의 이모저모는 명확히 알지만, 그것을 그려내는 데는 좀 부족하다 싶을 경우, 가르치는 것이 뛰어나다는 반증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길래, 이동백이나 임방울 같은 명창의 제자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목이 너무 뛰어나므로 따라 부를 수 있는 제자가 드물지도 모르겠다.
홍정택의 소리내력
(중모리) 한곳을 바라보니 묘헌 김생이 앉었다. 두 귀 난 쫑굿 두 눈은 도리도리 허리는 늘신 꽁지는 못독 좌편 청산이요 우편은 녹수라. 녹수청산에 애굽은 장송 휘늘어진 양류 속 들랑날랑 오락가락 앙그조촘의 기난 것 화상을 보고 토끼를 보니 산중토 화중퇴가 분명헌 토끼라. 자래가 보고 반겨라고, 「저기 있는 것이 토생원이요」. 토끼가 듣고서 좋아라 「거 뉘라 날 찾나. 거 뉘가 날 찾어. 기산영수 소부허유가 피서가자고 날 찾나. 수양산 백이숙제가 채미허자고 날 찾나. 백화심처 일승귀라 춘풍석교 화립중의 성진화상이 날 찾나. 완월장취 강남태백이 기경산천 허는 길에 함께 가자고 날 찾나. 청산기주 백녹탄 여동빈이 날 찾나 차산중 운심처 대접허는이 전혀 없고 평생 멸시만 당헌 몸을 천안 의외에 거 누구가 생원이라고 날 찾나. 건넌산 과부 토끼가 연분을 맺자고 날 찾나.」 이리로 깡창 저리로 깡창 깡창깡창 내려온다.
이것은 홍정택이 부른 수궁가 가운데 뭍으로 올라온 자라가 토끼를 만나는 대목이다. 홍정택은 수궁가로 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그의 특장이기도 하다. 자라가 토끼를 만나 반가워하는 모습과 토끼의 외로운 심사가 잘 대조되어 있는 재미난 부분이다. 홍정택은 5바탕소리를 다 하는데, 사설은 김연수의 것을 많이 차용했으나 곡조는 김연수의 것과 사뭇 다르다. 바로 이기권에게서 배운 곡조를 그대로 살려서 부른다고 한다. 이기권에게서 배운 사설 가운데 일부를 잃어버려서 부득이 김연수의 사설을 가지오 때웠으나, 소리의 길은 이기권의 것이라고 한다.
홍정택은 1921년 부안읍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음악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특히 그의 감각이 뛰어났던 듯하다. 그는 열 네 살 때 부안에 공연하러온 협률사에 반하여 아예 소리에 뜻을 두게 된다.
나이 열 네 살 때 협률사가 부안에 들어왔는디, 그때 오신 양반이 임방울, 전일도, 조몽실, 이중선, 김옥진 이런 분들이었지요. 그 양반들이 허는 것을 구경허는디, 어찌 마음에 좋게 들던지 그만 꼼짝도 못허겄드라고요. 전일도씨가 흥보가를 했는디, 그 자리에서 따라 부를만 했지요. 그때 임 선생이 부른 「쑥대머리」도 금방 따라 불렀지요.
이듬해, 다시 협률사가 부안에 들어왔을 때는, 그 양반들 앞에서 임 선생 「쑥대머리」를 바로 비양을 내어서 불렀더니, 임 선생님과 조몽실씨가 아조 칭찬을 허는 거예요. 제자를 삼는다고, 나 따라 가자, 그러길래 거그서 바로 따라나섰지요. 말허자먼 집에서는 허락허지도 않았는디, 그냥 협률사를 따라 나선 것이었지.
이렇게 하여 홍정택은 5년을 협률사를 따라다니며 소리도 하고, 창극도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낸다. 물론 술도 많이 마시고, 풋사랑도 여러 차례 경험했다고 한다. 임방울 같은 명창들은 특히 그를 가리켜서 소년명창이라고 예뻐하고 다른 명창들도 임방울과 도신허게 소리한다고 「홍방울」, 「홍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열 여덟 근처에서 변성기가 와서 성대가 갈라져서 소리를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마침 협률사도 해산하고 목소리가 갈라져 낙심한 그는 부안으로 돌아와 집에서 보냈다고 한다.
한동안 집에서 보낸 그는 다시 소리를 하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이기권을 찾게 된다. 거기서 이기권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어렸을 때 말을 들으니까 정정렬 선생은 돌아가시고 서울에서 정정렬 선생에게 소리를 배운 이기권 명창이 함열 공대에 머무른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찾아가서 모셔와 부안에 있는 월명사에서 다섯 달 동안 소리공부를 하게 된다.
그 기간이 홍정택에게는 가장 괴롭고도 유쾌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때 함께 공부한 사람들로는 이기권의 조카인 이운학, 이창선을 비롯하여 윤만중, 홍용호, 강종철 등이었다. 함께 공부를 하는데, 자신의 성대가 약화되어서 소리가 잘나지 않자 이기권은 아예 홍정택을 무시하고 잘 가르치려 하지 않아서 아주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산 아래에 있는 해수욕장의 가게까지 심부름은 자신이 도맡아서 했다고 한다. 담배 심부름이며 과자 심부름, 게다가 절에서 먹을 양식까지 모두 자신이 지어와야 했다 한다. 그 당시 기운은 장사여서 이 같은 일도 별로 힘들지 않고 해내었다 한다.
그러던 중 칠월칠석이 되었는데, 한번은 함께 공부하는 이들이 한 팀이 되고, 용지면에 사는 윤상변씨라고 북 치는 이의 식구들이 한 패가 되어서 씨름대회가 벌여 졌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홍정택이 한꺼번에 다섯 명을 모두 물리치자 이기권이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미워하던 기색이 좀 가셨다고 한다. 「아따, 그 새카마니 먹까마구 같이 생긴 놈이 힘이 저리 세네」하고 칭찬을 했다 한다.
공부를 20여 일 열심히 하다보니까 목이 모아져서 좋아진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십일까지, 채우면서 선생님이 나를 미워허고, 다른 제자들을 예뻐허고 그러드니, 한 달을 넘어가니까 소리가 잡혔다고 달라지드란 말여. 그 절에서 선생님은 마침 웃채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내가 아랫채에서 소리연습을 허는디, 선생님이 갑자기 뿔껑 일어나드니 깜짝 놀래면서 「야, 정택아, 너, 소리 좀 허겄다」이러시는거여. 마침 그 옆에 있던 친구가, 「선생님, 자다가 들으시먼 소리가 좋게 들리는 것이어요」라고 대꾸허니까, 선생님이 버럭 야단을 치시면서, 「야 이놈아, 내가 자다가 듣는 소리를 모르고, 그냥 소리를 모르겄냐」허시고는 그때부터 나에 대헌 태도가 돌변이 되어서 나를 예뻐허시드라고.
그 다음부터는 홍정택을 택하여 특별히 자신의 수제자라고 칭하고 자신의 소리를 이어줄 것을 여러 차례 부탁하였다고 한다. 월명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난 뒤부터 이기권은 소리하는 자리에는 늘 홍정택을 데리고 다녔다. 담양의 유명한 판소리 후견인 국참봉의 집과 함열의 조정읍 집 등 이기권이 소리하는 자리에는 늘상 홍정택이 따라다니면서 배웠다.
원래 이기권은 소리를 가르칠 때 ,사설만 불러주면서 적으라고 하고 소리 대목은 자세히 일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소리를 하는 자리에 데리고 다니면서 그것으로 익히라고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이기권을 따라다니면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다 배운다. 「왠지 모르게 시작했다 하면 줄줄이 나오게 돼있어요. 금방 들으면 금방 외워지는 것이 참 멋지지요.」 이렇게 다섯 바탕을 익힐 무렵에 스승인 이기권이 홍정택에게 「내 제자가 많지만 정택이 너만헌 제자가 없으니 네가 나를 이어야되것다. 지금은 임방울씨, 전일도씨 등 이름이 있지만 이기권이라는 이름은 별 것이 없다. 그런개 내 이름을 네가 좀 내주기 위해서 공부를 더해라.」 이렇게 말했던 적도 있었다. 그 사실만 생각하면 홍정택은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사실 자신의 이 무렵의 소리는 송만갑도 감탄했었다고 한다. 한번은 송만갑이 부안에 공연하러 왔는데, 어느 자리에서 자신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송만갑 특유의 목소리로, 「아, 그렇게 소리를 잘 허먼서 서울로 오제, 이놈. 여그서 뭣을 허냐. 치깐 쥐는 치깐에서 먹고, 들쥐는 들에서 먹는 것이다. 어서올 채비를 해라.」 이렇게 권했다 한다. 스승인 이기권의 말도 있고 하여 서울로 갈까를 많이 망설였으나, 연애에 빠져서 그만 상경할 기회를 놓치고 이것이 스승인 이기권의 존재를 아예 세상밖에 두어버린 듯하여 가장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그 뒤에 해방이 오며, 이기권이 죽었다. 홍정택은 우리 국악단에 들어가서 한동안 창극에 몰두한다. 김연수, 홍갑수, 최한용, 박도화 등 명창들과 함께 장화홍련전, 흑진주 등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전주에서부터 목포까지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는데 그 인기는 상당했었다고 한다.
다시 창극단 활동을 그만두고 50년대 후반부터는 군산국악원을 비롯하여 대전, 대구, 논산의 국악원 선생을 거처서 지금까지 전주에서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도립국악원의 판소리 강사로 있다.
홍정택의 판소리관
홍정택은 판소리의 바탕에는 삼강오륜의 교훈이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교훈적인 것을 살려내기 위하며 우스개 소리와 슬픈 대목이 있다고 하였다. 그의 소리의 밑바탕에는 점잖음이 깔려 있는 점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가 겪었을 맵고 신 체험에 대하여 자세히 물어도 그는 웃을 뿐 별로 그러한 기억을 즐겨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정양은 그의 소리와 김성수의 소리를 비교하면서 「김성수는 소리꾼으로서의 절망감이 체질화되어서 으레 쌍소리도 하고 판을 속되게 이끌어 가는 특징이 있는데, 홍정택은 점잖고 의젓한 모습을 보여서 특히 세련된 판소리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했는데, 정확한 지적이라고 하겠다.
한때 그는 창극에도 열심이었는데 그의 연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품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홍정택은 특히 창극의 발전에 공헌한 바 크다고 하겠다. 그가 「우리국악단」의 활동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으로는 아내인 김유앵을 만난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우리국악단의 여러 단원 가운데서 조그마한 김유앵이 특히 마음에 들어서 젊은 남자 단원들에게 반 협박조로 그녀에게 눈독들이지 말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창극무대에서 함께 주연급으로 활약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홍정택이 이도령을 하면 김유앵은 춘향을 맡았고, 심봉사를 하면 심청이가 되어서 무대에서도 둘이 함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창극만의 활동이 지지부진해지자 창극단을 그만 두게 된다.
50년대에 활약한 창극단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그때부터 홍정택은 여기저기 소리 선생으로 옮겨다니며 제자를 양성한다. 그리고 김유앵과 결혼하여 함께 교습소를 내고 국악보급에 힘쓴다. 두 사람은 여러 국악경연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린다. 남원에서 열리는 춘향제의 명창대회, 전라국악경연대회, 대사습놀이 등의 무대에서 입상을 하면서 기량을 키워왔다. 이후에 시립민속예술단 창악연구소를 거쳐, 그래서 이들 부부는 지금도 함께 도립국악원에서 일하고 있다. 김유앵은 도립국악원의 1층 민요부에서, 홍정택은 2층 판소리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앞에서 흥정택이 소리할 때, 사설은 김연수의 것을 차용한다고 하였다. 이기권이 돌아가고 바로 그 사설을 정리해놓지 않아서 부득이 계통이 비슷한 사설을 빌린 것이다. 그러나 실제 소리는 정정렬에서 이기권으로 이어진 그 그늘 짙은 소리를 낸다. 전체 바디가 그렇지는 않으나, 이른바 이기권의 더늠이라고 할만한 곳은 영락없이 그 특장이 나온다고 한다. 춘향가가운데 이별가나 심청가의 곽씨 부인 장례하고 돌아와서 탄식하는 「집이라고」 대목은 특히 심봉사의 적막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계면성음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듣는 사람도 그 같은 심봉사의 상황에 동화되어 저절로 추임새를 발하게 되는 것이다.
(중모리) 심봉사 집이라고 더듬더듬 찾아오니 부엌은 적막허고 방안은 텅 비었는디 심봉사 실성발광 미치는디 얼사덜사 춤도 추며 허허 웃어도 보고 지청이 거더집고 더듬더듬 더듬거려 이웃집을 찾아가서 여보시오 부인님네 우리 마누라 여기 왔오 부인들이 이 말을 듣고 혀만 끌끌끌끌 차며 아무 대답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와서 부엌을 굽어보며 여보 마누라 마누라 여기 있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지라 방으로 들어가서 쑥내 향 내 피여놓고 던진다시 흘로 앉어 통곡으로 우는 말이 아이고 마누라 날버리고 어디 갔오 혈혈단신 이내몸이 뉘게다 의탁을 하잔 말이요 이리 앉어 울음을 울제 어린 아이 젖달라고 응애응애 심봉사 일변은 서럽고 일변은 반가와 아기를 달래어 아가아가 우지마라 우지마라 내새끼야 너도 너의 모친이 죽은 줄 알고 우느냐 배가 울음을 우느냐 너의 모친은 먼데 갔다.
홍정택은 명고수이기도 하다. 소리를 가르치면서 북 장단도 또한 가르치고 있다. 소리를 전부 알고 있기 때문에 특히 소리에 맞춰서 치는 「따라치기」가 일품이다. 그가 애초에 북을 배울 때는 원박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한다. 그저 소리에 맞춰서 쳐나가 소리의 완급을 조절하고 창자를 도와주는 것이 고수의 임무라고 하였다.
명고수 송영주는 고수의 기능 네 가지를 들어 설명한 적이 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고수에게는 지휘자의 기능과, 보호자의 기능, 반주자의 기능, 동반자의 기능이 있으며 이러한 기능이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소리판이 멋지게 어우러진다고 하였다.
북은 창자의 소리를 뒤따라가서는 안 되며 이끌고 나가야한다. 고수는 창자의 소리를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전체악기의 부분부분을 매순간 해석하고 감시하며 매순간 신호를 보내듯, 창자의 소리를 완벽하게 파악하여 늘어지면 거두어주고 풀어질 때는 졸라매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고수에게 부여된 지휘자와 흡사한 역할이라고 하였다.
고수는 창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곧바로 그 상황을 파악하여 도와 질서 보호해줘야 한다. 창자가 자신의 역량에 넘치는 고음을 질러내야 할 때나, 저음을 깔아낼 경우, 고수의 북소리를 밟고 오를 수 있게, 또는 내려갈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또한 가사를 틀리게 하거나 잊어버렸을 때도 자연스럽게 「아무개야, 너 숨차는가보다, 물 한 잔 마셔라」라고 하여 자연스레 창자를 옆에 불러 틀린 대목이나 다음 사설을 일러줘야 한다. 이것이 보호자로서의 기능이라고 하였다.
고수는 소리를 이끌고 나가되 북 자신을 지나치게 노출시키지 말고 소리의 귀를 정확히 집어내야 한다. 창자가 소리를 내지를 때는 고수는 사정없이 북을 때려주어서 창자를 도와주고, 창자가 자신 있는 대목을 소리할 때는 거기에 맞춰서 장단의 신명을 보여주어야 한다. 만일 소리가 삘 경우에는 대각을 크게 쳐서 소리가 옆길로 빠지지 않게 단속해야 되는 것도 바로 이 고수가 갖는 반주자로서의 기능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고수의 음악행위는 사실 창자의 소리를 도와주면서 한 판을 어우러지게 이루어 내는 것으로 좋은 소리와 그 같은 소리를 살릴 수 있는 북 반주가 어우러지는 것은 고수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고수가 갖는 역할은 중요하며 이 같은 조화를 이루게 해주는 기능을 동반자로서의 기능이라고 하였다.
이는 고수로서의 역할을 말한 것이거니와, 홍정택의 북도 또한 창자들이 편안하다고 하며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북을 치는 자세도 안정감이 있으며 추임새도 일품이다.
그의 제자로는 최승희, 김옥주, 성창선, 조소녀, 전정민, 조영자, 조애선, 김향초, 윤소인, 김소영, 이종달, 강영란, 김세미, 이은숙 등이 있다. 일제 때 이기권이 했던 몫을 그대로 그가 맡아서 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최승희, 조소녀, 전정민 등은 명창의 대열에 끼어 있으며, 나머지 이름도 쟁쟁하여 일가를 이를 만한 사람들이다. 지금도 국악원에서는 20여 명의 제자들이 그에게 소리와 북을 배우고 있다. 우리가 그를 만났을 때 그의 바램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을 물었는데, 그는 「기권 선생님의 이름을 내게 하지 못 한게 못내 죄송하다」고 말을 막았다. 그의 사철가는 그래서 뒷대목이 참 서글프게 받아들여진다.
때마참 봄이로다 나비 날고 꼿이 피니 만산으 봄이 들어 푸른 단장 새가 울어 가득찬 춘수로다. 산양 자치 나는 소리 봄소식을 거래허고, 구월구일 갔든 제비 삼월삼질 돌아오니 중천으 떴난 종달새는 노고지리 잔사설로 청춘호기를 돋아낸다. 전춘하는 동류덜아 봄 간다 한치말고 사월팔일 애끼어라. 봄도 이무 갔거니와 녹음인들 아니들랴. 운산은 중중첩첩 천태만상 벌여있고 평야에 푸른 잎은 격양가로 춤추난듯, 만학이 음음 만소식은 여름이 점점 깊어 두견접동 앵류성음 가을맞어 슬피우니 청천의 기러기는 가을소식을 전하노라. 북방으로 울고 가니 소수춘풍이 그 아닌가. 푸른 강산 어디두고 산천만 붉었으니 황국단풍 무르녹아 꿈결같이 지내간다. 북풍이 살을 쏘고 광풍은 우루루루루루 백설은 분분이라. 화초목실 바이없어 법무원앙이 끊첬난디 삼춘이 그리워 아무리 슬피운들 무정세월 약류파를 어느 뉘라서 막을손가. 세월아 가지를 말어라 아까운 청춘이 다아 늙는다. 청춘을 허송허고 백발을 슬퍼헌들 후회자탄 쏠디가 있오. 우리도 가는 광음같이 쉬지 말고 일을 허여 부국강병으 힘을 쓰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