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운동

항구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문화열풍

-부산의 토향회를 중심으로




허권 / 유네스코 문화과장

지난 70년대부터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던 주제 중의 하나로 지역사회의 발전을 손꼽을 수 있겠는데 이는 산업화 과정 속에서 파생되었던 갖가지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한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빈곤의 문제, 인구이동과 집중화 현상, 교통·주택의 부족부터 시작해서 문화적 가치관의 충돌, 한국 문화와 외래 문화의 공존 등 각분야에서 지역사회의 발전방안에 대한 실증적이고 전문적인 의견들이 제시되어 왔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화적 차원에서 지역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으며, 지역의 독특한 문화전통과 개성을 살리면서 경제·교육·복지 분야를 육성 발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 즉 문화 발전적 측면에서 지역사회의 발전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는 미진한 감이 없지 않다.

문화정책의 운용지표

분명히 지역문화는 지방문화라는 용어와 다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문화행정가 및 예술가들은 「우리 현실에 있어서 지방문화의 발전이 정책적 목표가 된다」 혹은 「지방 화단의 진흥을 위해서 지방 예술인의 창작의욕이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지방」이라는 용어는 「중앙」이라는 말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종속성, 열등성, 저급한 수준이라는 어감이 풍기는 용어이지만 「지역」, 「향토」라는 용어는 이에 반해 지역의 특성과 개성 그리고 역사성이 반영된 어감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 거주하지 않고 있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비하성 발언을 들을 때마다 위압감과 함께 자신의 무능을 탓하곤 한다. 또 하나, 지방문화라는 용어는 화자의 입장에 따라 대상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즉 부산지역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예술인들이 볼 때 서울과 함께 부산의 문화도 중앙문화로 비춰질 수 있으며, 혹은 생활터전이 부산과 밀접한 경우에는 부산의 문화가 개별적인 문화권 혹은 그보다 우월한 문화권이라는 인식을 쉽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꼬리를 물듯이 지역에 따라 전개되는 가변적인 논리인 동시에 문화적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더욱 고압적이며 비민주적인 발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민족문화의 특질이나 전통은 그 민족에게만 있는 고유한 양식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그 민족의 「민중적인 보편성」에 입각해 있느냐가 더 중요한 쟁점이 되어야 하듯이1) 지역문화의 특이성과 정체성은 지역주민의 문화적 행위와 패턴 그리고 참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부산지역의 자생적인 문화활동을 분석함으로써 국가 문화정책의 운용지표를 제시하는 데 있다.

지역문화의 발전

지역문화를 경제·정치·교육 등과 같은 분야별 차원에서 인식하고 이에 대한 진흥대책을 수립한다면 폭넓은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지역문화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외형적인 모습만 꾸미게 될 것이다. 지역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이며 개성이기 때문에 정책입안자의 시각은 문화라는 테두리 속에서 그 지역의 정치·경제·교육 등을 바라볼 수 있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러한 총체문화의 개념은 70년대 말에 들어와서 서구의 지역사회 발전모델의 중요한 출발점이었고 동시에 귀결점이었다. 더 나아가, 지역공동체 문화 Community Culture의 발전이 곧 지역의 진정한 발전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러한 인식상의 변화는 과거 지역사회의 현상적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사회과학적 방법론이 많은 측면에서 적용되었으나 그 결과는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다는 자체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고도로 개발된 조사방법론은 문제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문제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으나, 문제의 해결점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근본적인 대안으로 문화적 접근 Cultural approach방식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2)

세계사적으로 볼 때, 중세시대까지 지역발전의 모델은 종교적 접근 속에서 논의되었고 또 지역의 중심지는 교회였다. 교회를 중심으로 도로가 연결되었으며 지역주민의 정신적·육체적·경제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다 했기 때문에 높이 솟은 종탑을 중심으로 해서 지역사회가 형성되었다. 심지어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한 운명의 공동체로 구분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지역사회는 광장을 중심으로 발전되고 지역의 상권이 형성되었다. 즉 중세의 교회가 가졌던 지역사회의 중심이 광장으로 대체되었으며 이 과정 속에서 교회는 더욱 신성시되어 정신적·종교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반면 광장은 주민의 사회적 중심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주민들은 벗을 만나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소요했으며 크고 작은 집단의식이 거행되는 커뮤니케이션·문화적 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지역의 중심체는 교회도, 광장도 아닌 경제라는 유무형의 실체로 교체되었다. 이론상 경제적 행위는 인간본능의 만족에서 출발할 수 있으나 이의 부정적인 효과는 지역사회의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일자리를 찾아, 고등교육을 위해 오지에서 밀려드는 인구의 집중과 급격한 신장, 이로 인한 교통량의 과다, 주택난, 위생시설 등과 같은 외형적 변화와 함께 상이한 전통적 배경을 갖는 여러 지역주민들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가치관의 문제 등 경제에 초점을 맞춘 지역개발은 오히려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훼손하거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는 폐단이 많았다. 기득권을 갖고 있는 주민은 자신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타 계층을 불신함으로써 지역사회는 점차 고립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주민들은 고독한 군중 속의 얼굴 없는 존재 faceless people in a lonely crowd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3)

이러한 세계사적인 변천과정이외에도 우리의 역사는 전통적인 삶의 몰락과 현대화 과정 속에서 도입된 외래의 문화적 산물과의 사이에서 주체적인 선별의 여유가 없이 적응을 해야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제하의 내선일체화 정책은 고유한 한국 문화의 말살정책이었으며, 동시에 친일 문화의 잔재를 이 땅에 남겨두게 되었다. 한국민족은 자생적 근대화를 시작하려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일제의 강점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수많은 아름답고 창조적인 민족적 전통과 민족문화유산을 근대적으로 계승·발전시키지 못하고 잃어버리게 되었다.4)

해방과 함께 밀어닥친 구미 문화, 특히 미국 문화의 범람으로 일제의 식민지 유산을 청산할 기회도 갖지 못했으며 나아가 전통문화에 대한 보존과 발굴도 체계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서구문화로 인해 우리의 감각은 마비되어 버렸다.

이처럼 한말이래 한국사회의 문화·예술이 성장해온 궤적은 정상적이 아니다. 일상적 생활과 유리된 문화예술 행위가 비대했으며 우리의 것에서 출발하지 않은 남의 것이 주종을 이루게되어 우리의 진실된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실정이라 하겠다.5)

그러나 1970년대부터 문화계에서 일기 시작한 새로운 문화운동에 대한 논의와 전통문화·지방문화에 대한 정부의 활성화 방안 등이 발표된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특히 한국사회에 있어서 정치·경제·문화의 서울 독점현상이 두드러지고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이즈음 지역공동체의 자생적인 문화운동은 누가 문화의 향수층이 되어야 하느냐는 이념적 논의를 배제하더라도 한국 문화 발전을 위해 활발한 논의가 있어야 하며 국가적 차원에서 이에 대한 행정적·재정적 고려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오늘날, 각 지역의 문화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순위가 달라지겠으나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의 문화행정 담당자들은 특히 다음의 다섯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① 외래문화의 범람 ② 문화의 서울집중 ③ 지방 문화예술인들의 어려운 처지와 문화창조 조성기금의 결핍 ④ 문화공간의 전무상태 ⑤ 문화적 유적·민속발굴·복원의 부진 등을 열거하고 있다.6) 그러나 예술가들은 위의 문화행정가의 문제점과는 다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지방자치기관의 문화예술에 대한 몰이해와 왜곡 그리고 무지로 인한 차가운 냉대에 큰 실망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문화예술정책은 보다 민주적으로 이행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물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적인 의사전달과 정책결정이 소망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특히 문화예술에 있어서는 단기간내에 외형적인 효과를 이를 수 없는 속성을 십분 감안하여 인내하며 통제는 하되 간섭 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시행해야한다. 이러한 커다란 인식의 차이는 충분한 지원금과 공간이 주어진다고 해서 그리고 창작의 풍토가 호전된다고 하더라도 하루 빨리 불식해야 할 단점임에 틀림이 없다.

비록 우리의 문화적 여건이 기대에 부응치 못한다는 지적이 많지만, 오늘날 서울과 각 지역에서 많은 대중들은 점차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보다 많은 문화생활로의 참여를 요구하고있기 때문에 동호인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자생적인 문화운동은 그 자체가 전문적이건 아마추어적이건 우리의 문화발전에 대한 전망을 밝게 해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부산의 문화예술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문화예술은 정책적으로 중요한 고려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여러 개발도상국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매스로우 Maslow의 욕구단계론을 원용치 않아도 문화생활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물질적·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함은 자명하다. 그러나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곧 문화생활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여러 영역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예술계 인사와 부산 시민들로부터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서 부산은 미약한 점이 많이 있으며 또한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예술활동이 위축되어 있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이러한 부산의 문화 예술적 현상에 대해 치밀한 연구조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러한 의견을 실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감상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부산의 문화예술의 환경은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근자에 실시된 부산 시민의 문화생활과 의식에 대한 한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대다수가 부산을 문화예술의 불모지라고 스스로 자인하고 있어 문화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진 적이 있었다.(1984년 10월 부산지구 청년회의소와 부산대학교 사회조사연구소의 공동조사 「부산문화의 발전을 위한 조사연구」에서 발표된 내용을 참조하기 바람. 책임자: 김성국 교수) 이 조사에 부산의 문화예술인 2백 26명과 일반 시민 9백 59명이 응답하였으며 문화예술계 인사와 일반 시민의 두 집단으로 분류하며 조사를 실시하되 대상자는 무작위로 추출하였다. 또한 응답자의 교육 수준은 문화예술인의 경우, 대학 중퇴 이상이 전체 응답자의 82.7 퍼센트이었고, 일반 시민은 고졸 혹은 고퇴가 41.2 퍼센트, 대학 중퇴 이상이 24.4 퍼센트, 그리고 중졸 이하가 34.5 퍼센트이었다.

부산을 문화의 불모지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렇다

그렇지 않다

잘 모르겠다

관심없다

%

문화예술인

81.9

12.0

5.3

0.9

100

일반 시민

55.4

14.1

26.6

3.9

100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은 문화예술인들 조차(81.9 퍼센트) 부산의 문화예술활동에 대해 큰 회의를 느끼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도 절반 이상이 부산을 문화예술의 불모지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밖에 1/4 이상이 잘 모르겠다는 모호한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이렇듯 자기 지역의 문화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데에는 부산지역 자체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이유와 문화적 구조에 연유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은 국내에서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이지만 산업도시라기보다는 상업도시적인 면모가 강하게 풍기는 도시이다. 이곳이 근대도시로 성장하게 된 것은 1876년의 강화도 조약에 따라 개항이 되면서부터이며 1945년에 해방을 맞아 귀국한 해외동포가 이곳에 많이 머물게 되었고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피난민들이 몰려들게 됨에 따라 부산은 대도시로서 급속히 성장하였다. 개항이 되기 전까지 부산의 중심은 지금의 동래구 수안동 일대의 동래부 읍내면이었다. 그때의 동래부는 지금의 김해 지방을 뻔 부산시 전역과 양산군의 일부를 관할하고 있었다. 개항이 될 당시 동래부는 가구가 5천 4백 63호였고 인구는 2만 5천명 정도였는데 이중 20 퍼센트 정도가 읍내면에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개항 뒤의 격동기에도 줏대를 잃지 않고 부산 사회를 근대화로 이끌어간 중심세력이었다7)고 한다. 그러나 개항 이후 부산의 중심은 일본 거류민들의 집단 거주지를 따라 부산진, 초량, 남포 등으로 옮겨졌으며 최근에는 서면이 새로운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다. 부산은 우리 사회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많은 인구의 이동을 경험하게 되어 통계에 의하면 현재 부산시 인구의 약 25 퍼센트만이 부산 문화권의 후손이며 나머지가 모두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이유로 최근에 부산에 거주한 외지인이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부산의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보다 양질의 고급문화를 접하고자 할 때 참여자 즉 지역주민들은 시간과 경제적 요인을 문화생활의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거론하곤 한다. 이러한 의견은 부산에서만의 특징적 현상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부산의 경우 주민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서울의 경우 문화향유자인 중산층이 두텁기 때문에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가능하지만 부산은 이러한 중산층이 상대적으로 적고 항구도시의 특성에 따라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층이 두터워 대다수 주민들은 문화예술 행사에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민들의 문화생활 증진을 위한 새로운 문예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하나 이러한 시도의 노력은 보이지 않고 서울에서 개최되는 프로그램과 유사한 성격의 문예사업만이 진행되어 가고 있다. 또한, 대도시답지 않게 문화공간도 여의치 않고 문예진흥을 위한 기금도 충분치 못하다는 문화여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무대예술의 경우, 부산은 1973년 개관된 시민회관과 문화회관 그리고 카톨릭회관의 소극장을 갖고 있다. 그나마 카톨릭회관의 소극장은 무대와 천정이 낮아 1인극 공연만이 가능한 실정이고 문화회관도 좌석이 1천 7백 석이 되어 소극장을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영세 연극인들은 감히 그곳에서 공연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부산소재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동래 들놀음

원양반, 가면제작

할미

악사, 가면제작

양반

말뚝이

말뚝이 가면제작

수영 들놀음

가면제작

악사(깽쇠)

영노

악사(장고)

말뚝이

대금산조

산조

좌수영 어방놀이

어로장

어로요

(출전: 「한국의 발견: 부산」, p.86.)

또한 부산시에 45개 연극단체가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활동 중인 단체가 11개에 불과한데 이나마 누적되는 재정 결손으로 몇몇 극단이 와해상태에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부산 예술인은 그래도 부산의 문화예술은 장차 육성발전 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최근 TV, 신문 등 매스컴의 협조와 계속 증가되고 있는 고정 관객은 부산의 문화예술이 과거와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며 곧이어 있을 지방자치제를 통해 지역 특성에 맞는 문화가 생성되리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태동케 하고 있다.

토향회를 중심한 문화운동

부산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자생적인 문화운동을 전개하는 단체의 하나가 「토향회」이다. 1982년 8월에 설립되어 6여 년이 지난 토향회는 오늘날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급박한 상황하에서, 또 전통적인 문화유산이 도처에서 사라져 가는 여건 속에서 우리 것을 찾고 배우려는 데 기본 목적을 두고있다. 한 마디로 속절없이 훼손되고 핍박해져 가는 우리의 정신문화를 가장 주체적인 입장에서 가꾸어 가자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부산의 문화적 여건을 고려해 볼 때 이 단체의 발기가 가지는 의의는 사뭇 진지하다. 토향회의 회장인 김해진씨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흔히들 부산을 가리켜 「문화가 없다」, 「문화의 불모지다」라고 말해 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본인은 확실하게 말해두고자 합니다. 아득히 역사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부산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문화도 실로 괄목할 만한 데가 있습니다. 도처에 산재해 있는 패총과 지석묘를 중심으로 하는 선사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가야와 신라문화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그 뛰어남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각 지방마다 세워져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더라도 부산의 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는 고문화는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찬란한 면면들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런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현재 우리의 눈에 띄는 피상적인 것만을 보고 흔히들 문화가 없다느니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을 면면이 이어온 전통과 맥락을 찾자는 데, 우리 토양회의 뜻과 정신이 있습니다.

따라서 토향회의 53명에 달하는 회원들은 우리의 주체적인 정신문화의 편린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고 토론하고 배우면서 살아가기를 염원하고 있다.

토향회의 구성회원은 여러 다른 문화단체와 색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흔히들 문화단체는 개방성보다 폐쇄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관심 분야에 전문성을 갖고 있거나 활동을 한 사람들끼리 모이기가 쉽다. 그러나 토향회에는 향토문화의 전문가, 교수, 학생, 또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인과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구성원이 실로 다양하다. 즉 지역문화와 유산을 발굴하고 기여하는데 관심이 있는 시민이면 모두 다 회원이 될 수 있도록 개방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회원의 다양성은 전통유산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인적 구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형태의 문화는 창작자, 전달자, 전수자의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갖게 마련이며 특히 향토문화는 전수되고 계승되기 때문에 문화단체에서의 전달자와 전수자의 역할 분담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고장의 역사, 생활양식, 민담, 전설, 음식, 종교 등은 대인관계에서 촌락사회, 지역사회의 범주내에서 전승된다. 토향회의 인적 구성을 보면 회원간의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1982년 8월 창립회원의 수는 총 45명인데 전통문화를 이수시키는 기능을 맡은 성인이 23명, 그리고 전수 받는 청년(학생)이 22명의 균형 된 구성비를 보여주고 있으며, 성인그룹은 교수 언론인 5명, 예술가 3명, 향토문화 전문가 3명, 일반직업 종사자 7명을 비롯하여 주부가 5명이 포함되어 있다. 초창기 때의 학생 신분을 가진 일부 회원들은 졸업 후 토향회 회원의 상하를 연결시키는 구심적 역할을 하게 되면서 새로 가입한 학생들에게 향토문화를 전수하는 기능도 아울러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인적 구성이 잘 이루어졌다고 해도, 전달자의 인격과 지식은 단체의 운영에 절대적인 역할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부산산업대학교 문과대학교의 김무조 교수, 동래향교의 김해진 이사, 수영민속보존회의의 앙명환 이사, 부산일보사의 배승원 문화부장, 부산전문대학의 양근석 교수 등이 향토문화의 전달자 혹은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토향회의 성격

굳이 토향회의 성격을 간단하게 정의 내린다면 향토문화의 진수를 발굴·보존하고 이의 교육 및 현대적 재현에 역점을 둔 개방적인 문화단체라고 할 수 있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향토문화의 발전은 지역주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호응이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문화영역이다. 연극, 문학, 음악, 무용 등의 예술단체와 달리, 지역주민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문화가 전통과 역사성을 갖고 있는 향토문화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국의 문화원과 향토사연구회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향토문화운동은 지역문화의 진홍을 위해서라도 정책적인 우선권이 주어져야한다. 지역주민의 문화생활을 유도하기 쉽다는 속성 이외에 향토문화의 발굴과 현대적 재현은 우리 문화의 실체를 파악할 뿐 아니라 학문적 발전에도 매우 긴요하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이기백 교수(한림대)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향토사는 우리나라 전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는 중앙 중심·지배층 위주로 되어왔는데 이는 서민에 대한 기록이나 문헌이 빈약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오늘날 향토사의 연구자세는 중앙 중심에서 지방 중심으로, 지배층 중심에서 서민 중심으로, 정치 중심에서 생활 중심으로 중점을 옮기는 것이 바람직한데, 이때 지방에서의 향토문화진흥운동은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토향회의 회원들은 월례회와 사적지 답사를 통해 지역과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 왔다. 1982년 8월 창립된 이래 1986년 3월까지 이 문화단체는 20회의 월례회와 13차례의 고적답사를 실시하였는데 월례회에서는 향토문화 전반에 대한 주제발표를 갖고 이때 발표자는 회원 중의 한 사람이 선정되는데 특별한 주제에 대해서는 외부에서 전문가를 초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발표된 주제는 다음과 같다.

-미학이란 무엇인가

-가락국 유적답사 보고

-선사시대의 문양

-현대시의 세속화와 그 아이러니

-문단데뷔에 즈음하여

-탁본소고

-한국고도자기고

-신모설화고

-한국 무당굿의 이해

-한국 유학의 현황

-향교와 서원에 대하여

-영감할미과장과 그 의미

-한글시대와 한문이 나아갈 길

-해방 후의 부산

-차 생활과 우리 문화

-문화재 발굴 기록영화 상영

-송공단의 유래와 의의

-식사의 용어문제

-정공단과 정발장군

-화랑사상의 현대적 이해

-다대포 첨사영과 윤공단

-한국의 고서화에 대하여

토향회의 회원들은 부산지역의 문화유적뿐 아니라 학문적 관심에 따라 전남 일대의 유적지도 직접 답사하고 그 결과를 비록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회원들에게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있다.

제1차 답사: 김해 가락국 유적지

제2차 답사: 경북 경주 일원, 건천 여근곡, 낭산 백률사

제3차 답사: 지리산 청학동

제4차 답사: 전북 실상사, 경남 남계서원·덕천서원 등

제5차 답사: 옥산서원, 양동이씨 종택, 양동손씨 종택, 감은사지, 이견대, 기림사 일원

제6차 답사: 경남 남해 용문사, 서사과차, 남해 충렬사, 김구 선생 유허비

제7차 답사: 경북 경주, 청도 운문사, 가슬사, 단석사

제8차 답사: 경북 영천 은해사, 군위 인각사 등

제9차 답사: 경남 창녕군 진흥왕 순수비, 관룡사 일대

제10차 답사: 범어사, 금정산성 등

제11차 답사: 경북 영일군 오어사 일대

제12차 답사: 언양 반구대, 화랑 서석대

제13차 답사: 경북 선산 도리사, 안동 하회마을 등

토향회의 회원들이 정기 월례회와 답사를 통해 전개하는 문화보급운동은 단체내에서 이루어지는 자생적인 문화운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서의 지역문화운동은 단체의 문화행사가 지역주민에게 알려져 함께 호응할 수 있는 적극적인 문화운동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토향회가 추진했던 정과정비(鄭瓜亭碑) 건립은 부산주민에게 문학적 역사와 전통의 자긍심을 심어 준 문화확산운동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부 경남지방은 구지가, 처용가, 정과정곡, 태평사 등의 발상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산 시내에 있는 시가 작품의 발상지를 부산 시민 대부분은 「그런 곳이 있었는가」할 정도로 까맣게 모르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더러는 사적,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어느 정도 역사 현장이 보존되고 있지만 더러는 옛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 곳도 많다. 사적지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도 단순히 행정적인 안내표시판 정도만이 게시되어 있을 따름이다. 토향회는 고려 의종 때 정서가 북망요배하고 정과정곡을 지어 불렀던 부산시 남구 망미동 산4의 7번지에 「정과정비」(높이 180cm, 넓이 120cm, 폭 25cm, 화강암)를 1천 1백만 원을 들여 1985년 2월 2일 준공하였다. 이를 위해 김무조, 김해진, 양명환 등으로 구성된 정과정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김무조 박사는 이 비의 건립에 대해 「정과정 옛터에 돌을 깎아 새기고자 하는 것은 한갓 옛것을 그리워하는 호사적 취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정과정 노래에 내 님을 그리워 우는 것은 산 접동새와 깜박이는 별과 새벽달이 함께 알고 있다고 했듯이 이 땅과 하늘에 대한 애착에서인 것이다. 비를 세우는 것은 몇 사람의 정성인 것이지만 조상이 남긴 자취를 잊지 않고 전함으로써 이 땅을 우리 모두의 고향으로 삼으려는 모든 시민의 바램이기 때문이다」라는 담백한 의사를 표시하였다.

토향회는 부산에서 유일한 향토문화단체이다 과거 1968년 10월 고 박원표씨 등 14명이 발기하여 부산향토문화연구회가 발족되었으나 「향토문화」 3권, 부산 지방 고성터의 조사, 지방

문화재의 발굴 등 약간의 업적을 남기고 1972년 자진 해산한 것이 부산의 향토문화운동의 전부였었다. 「부산향토문화연구회」 이후 아직까지 부산에는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향토문화단체가 발족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토향회는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문화연구단체로 알려져 현재 한국향토사연구협의회에 가입되어 있다. 그러나 토향회 회원의 인적 구성과 자생적인 문화운동으로 볼 때, 연구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기보다는 아마추어적인 향토애호가들의 집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토향회가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발간한 회지 「토향」에 잘 반영되어 있다. 여타 향토연구단체가 발간한 회지와 달리 「토향」은 향토문화종합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향토사·향토문화에 대한 논문과 함께 회원의 답사기, 시, 수필, 콩트, 동화 등의 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회원들은 비록 제한된 지면이지만 답사에 대한 글이나 답사 중에 느낀 감상문 등을 부담 없이 자신들의 회지에 담는 것이다.

그러나 작년부터 토향회의 활동과 회원들의 문화운동은 여러 이유로 정체되고 있는데 모처럼 부산에서 자생된 문화운동이 꽃을 피기도 전에 몰락할 지 모른다는 우려와 걱정이 앞선다. 그 동안 토향회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박원표 고문과 알찬 강연을 해주신 박진계 선생께서 작고했다는 사실이외에 토향회라는 단체를 범 문화운동으로 확산시키기에는 자생력이 부족했다고 봐야겠다. 따라서, 토향회가 직면했던 유무형의 어려움을 정책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와 유사한 문화단체의 자생력과 건전한 운동을 지원함으로써 지역의 문화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국가 문화의 초석을 굳건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문화운동의 목적

지역문화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주민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것이므로 주민 모두를 위한 그리고 지역인 모두에 의한 문화활동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운동이 지역주민의 자생적인 활동이 되기 위해서는 그 지역과 지역주민의 특성이라는 문화적 토양에 문화운동의 뿌리가 내려져야 한다. 부산 토향회의 창립배경에서 언급되었듯이 지역의 문화운동은 첫째, 타 도시나 타 지방과의 문화수준을 비교하기 전에 자기 고장의 특징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애착심과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이러한 관심이 희박하거나 열정이 없이는 자생적인 문화운동을 기대할 수 없는데 이는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도시에서의 문화운동이 자기 생활의 희생을 동반하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문화는 전승되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변화하지만 전수자의 주관적 관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각 지역의 예술가, 교수, 행정가들은 지역공동체를 문화적으로 풍요하게 만드는 행사나 강연회를 주기적으로 개설하여 문화에 대한 지역주민의 관심과 의식변화를 유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일단 문화운동의 방향과 목표가 정해지면 그 다음에 필요한 재원과 인력이 확보되어야 한다. 토향회는 자생적인 문화활동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전액 회원이 부담하여 왔다. 특히 가입회원의 절반이 학생층이기 때문에 유적지 답사에 응하고 싶어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에 참석치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약 6년간 토향회가 부산에서 여러 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부산 시청이나 기타 문화기관으로부터 받은 지원금은 전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대우재단으로부터 회지 발간의 예산 일부를 지원 받았지만 토향회 회원이 희구하는 문화운동예산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 처지였다. 각 시도군의 문화원은 지역의 공인단체로 승인이 되었기 때문에 지역 행정부서나 문예진흥원으로부터 기관 운영비·사업비의 일부가 지속적으로 지원되고 있으나 부산은 문화원이 없기 때문에 향토문화를 위한 공동 부문에서의 재정지원은 극히 미약했다는 것이 지적될 수 있다. 앞으로 향토문화를 위한 자생적인 기관이 설립되었을 때(특히 부산과 같이 문화원이 없는 경우) 문예진흥기금을 지원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표 문화발전의 중심세력(부산)>

문화발전을 위해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사람은 ?

(단위: %)

유형

응답자

교육기관

문화예술인

정치행정가

기업가 일반시민



문화예술인

29.0

34.8

7.1

7.1

21.9

일반시민

18.4

18.8

12.12

4.7

45.9

1984. 10. 「부산문화 발전을 위한 조사연구」

(출전: 자생적 지방발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1986, p.319.)

그리고 자생적인 민간문화기관의 협의체나 협회의 설립도 시급히 요망된다. 부산의 시민회관에는 부산 예총과 각 지부가 사무실을 가지면서 독자적인 사업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꾸려나가고 있다. 그러나, 토향회와 같은 민간인 주도의 문화단체는 행정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에 회의실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용해야할 형편이었다(부산에는 카톨릭회관, 부산시립박물관 회의실 등 문화단체의 회의장으로. 마땅한 곳이 3∼4개에 불과함). 부산 시내에 이런 단체들이 사용할 공간을 마련해 꾸거나 시 관할 청사에서 회의를 하거나 문화운동을 할 때 임대료를 감면해 주는 행정적 지원이 있어야한다. 이곳을 구심점으로 해서 각 문화단체는 개성 있는 프로그램을 서로 교환하거나 경험을 나누게 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나아가 부산내에 협의체를 구성하여 부산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문화예술 행사를 전개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역의 지식인과 예술인의 전향된 자세와 협조체제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하겠다. 일부 예술인과 교육자들이 보여주었던 초월적이고 군림하는 자세로부터 일반 시민들과 직접 호흡하면서 참여해야한다. 지역의 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것은 전체 시민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일단 시민들을 문화사업에 적극 참여시키지 못하게 한 데는 지역의 문화예술인의 책임도 크다. 따라서 자생적인 문화단체에 전문지식과 경험을 제공해 주며 이들의 움직임이 지역사회 발전에 얼마나 귀중한 초석인가를 환기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주-----------------------------------------------------------------

1) 임헌영, 「민족의 상황과 문학사상」, 1986, 한길사, p.42.

2) Paul Schafer, 「Culturespace: Self Awareness of Communication」, 『Culture』 Vol. 5: 1, p.34

3) 같은 책, pp.34∼35

4) 신용하, 「두레 공동체와 농악의 사회사」, 『한국사회연구 2』, 한길사, 1984, p.52.

5) 김성국, 「지방문화운동의 의의와 전개」, 『자생적 지방발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1986, p.302.

6) 부산일보, 1984. 11. 11.

7) 「한국의 발전: 부산」, 『뿌리 깊은 나무』, p.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