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문성 / 여성신문 차장
6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탈춤·마당극의 열기가 70년대 문학계의 괄목할 만한 변모와 더불어 80년대 중반을 들어선 지금 소위 예술활동 전 영역을 통틀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일련의, 현장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예술 중심의 움직임들은 이른바 「문화운동」이란 이름으로 정착되고 있는데 이들 「문화운동」이란 명제 속에 포함된 문화활동들은 대체로 기존의 기성문화에 대칭 되는 견해와 역할 등을 맡고 있어 변화와 발전이란 문화의 지향점을 놓고 볼 때 문화운동의 역할은 우리 시대의 주요한 변화의 틀을 갖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실제로 문화란 말의 포괄적인 의미를 놓고 본다면 「삶을 위한 모든 형태의 활동과 양식」을 문화의 차원 속에 포함시켜야 하나 실제로 현재 「문화운동」의 정의 속에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은 예술운동의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것은 또한 문화운동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점이라 할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문화의 개념 속에 포함된 주요한 부분인 예술운동을 중심으로 오늘날 우리 문화의 커다란 변화요인이 되고 있는 문화운동의 현황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오늘날 문화(예술)운동이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자체에 의미를 두던 초창기 활동을 지나 놀랄 만한 대중성과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를 여러 가지 들고 있으나 이러한 문화운동의 영역 확장은 우선 일련의 문화활동이 지극히 정치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데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상과 정치적 상황을 주요 소재로 하여 그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 그에 따른 영향력과 관심도는 여타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화활동과는 달리 현실적이다.
문화운동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문화운동은 문화란 말과 운동이란 말이 합쳐진 복합어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문화운동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문화」보다는 「운동」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운동을 전제로 하고 있는 문화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 운동에 의해 그 내용이 규정된다는 점에서 문화에 비중이 주어진 문화활동이라는 말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따라서 운동이란 말을 「한 사회가 요구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의 집단적이고 지속적이며 계획적인 움직임」이라 정의한다면 「문화운동」은 일련의 복합적인 문화활동을 통해 보다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운동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화란 「인간에 의한 물질적인 생산과정과, 이것에 관련된 정신적인 창조물」이라고 정의한다면 생산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의 삶에 필요한 물질을 얻기 위한 여러 과정을 거치게되며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유형의 생산물뿐 아니라 무형의 생산물까지 얻게 된다. 이런 무형의 생산물을 우리는 「문화」라 할 수 있으며 이 무형의 생산물인 문화는 우리가 가시화 할 수 있는 일정한 통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 일정한 통로로 예술활동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화의 통로에는 예술뿐 아니라 정치, 교육, 종교 등의 여러 분야가 포함될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현재 문화운동의 주요 영역이 되고 있는 예술활동으로 그 범위를 제한하고자 한다.
문화운동의 내용과 역사
문화운동은 문화라는 기능을 통해 정서적인 면에 접근하며 인간을 변화시키고 또 그 변화한 인간인 이루고 있는 사회 전체 구조에 변화의 분위기를 확산시키고자(운동)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운동은 변화와 발전이란 지향점을 그 주요 목표로 하고있다. 한 마디로 문화운동은 기존문화에 대한 대칭점에 놓여져 있으며 기존문화에 대한 대항문화를 건설하고자 한다. 문화운동의 대칭점인 기존문화에는 우선 「상업적인 대중문화」가 있다. 퇴폐, 성문화를 중심으로 한 향락적 대중문화가 있으며, 둘째로는 주로 상류, 지식계층에 독점되고 있는 고급문화가 있고, 셋째로는 전통문화를 들 수 있다.
이처럼 문화운동은 기존문화의 반사회적인 요소에 대항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그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주로 공연 분야에 마당극, 마당굿, 연극 등이 있으며, 노래 분야에는 기존의 대중가요에 반하는 운동가요 중심의 노래운동이 있고, 또 미술운동, 출판운동, 여성문화운동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있다.
80년 들어 사회변화의 주요한 특징인 이러한 문화운동의 자리 매김과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화운동의 단초가 되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문화운동의 실질적인 계기가 되고 있는 몇 가지의 문화운동사적인 사건들로 인해서 오늘날 광범위한 자리를 잡고 있는 문화운동의 영역이 확립된 것이다.
문화운동사의 단초를 여는 일들을 사건별로 짚어보면,
첫째, 1965년 5월 20일 향토의식 초혼굿-「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문화운동의 모태라 일컬어지는 이 일은 당시 한일회담 반대운동과 함께 정치세력의 슬로건이었던 「민족적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행해진 전통문화 형식에 대한 반대 문화운동이었다.
둘째, 1970년 김지하의 시 「오적」 필화사건. 이것을 문학계를 필누로 전 예술영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므로 시의 사회적 영역 확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셋째, 1960년대 후반의 창작극 운동 및 마당극 운동과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각 대학의 탈춤 부흥운동.
사실상 문화운동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기이며, 전체 대학으로 확산되어 종교계, 생산현장으로 범위가 넓혀져 문화운동의 양적인 팽창과 함께 재생산 구조가 확립된 시기이다. 이후 계속되어 마당극, 마당굿, 대동놀이 등이 발전되고 있다.
넷째, 1974년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 계속되는 문인들의 연행, 투옥 및 발표의 제한에 대해 문인들이 결성한 문화운동사상 최초의 조직체로 문학계를 중심으로 문화운동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다섯째, 1975년 5월 22일 서울대학교 김상진 장례식 시위. 시위를 구성했던 주요 구성원 모두가 문화패(연극, 탈춤, 문학)로 중심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문화패가 단순한 문화적 기능이나 방식을 통해서 활동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들의 문화적 기능을 통해 정치적 운동으로 전개시켰다는 데 주목받은 사건이었다.
여섯째, 1980년 봄 문화패 활동·광주사건 등의 정치적 사건을 맞이하여 문화패가 선전활동을 맡았다.
일곱째, 1984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창립.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공연, 문학 중심의 문화운동에서 노래와 미술, 여성문화운동 등의 새로운 장르가 가세함으로서 문화운동의 영역이 대폭 확산되었다고 평가한다. 또 이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탄생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사를 살펴보건 데 문화운동은 주로 문화적인 활동을 통해서 어떻게 운동으로서의 대중성을 확보하는가 하는데 자리 매김을 하고 있으며 문화적 활동기에서 시작된 이 일이 운동으로서의 정치적 영역 확보를 해나가는 것이 변모의 개략이라 할 수 있다.
문화운동의 분야별 현황
노래운동
실제로 전체 문화운동의 한 영역으로서 「노래운동」이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4, 5년 전부터의 일이다. 이것은 노래라는 문화적 형식이 문화운동의 절대과제인 대중성 확보에 현실적으로 커다란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공식적인 함의사항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란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래는 문화양식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벽인 작가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최소화할 수 있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연희자와 관객 사이에 놓여진 불가피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벽을 같이 노래부름으로 해서 쉽사리 해결할 수 있다는 데 노래운동은 큰 효과를 지닐 수 있다.
이러한 노래만이 갖고 있는 커다란 장점, 쉽게 얻을 수 있는 공연장(마당성), 쉽게 만날 수 있는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는 노래운동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행 문화운동의 주요 부분으로 떠오르게 했다.
노래운동이 문화운동의 양식으로 규정된 연륜은 짧다 하겠으나 애초에 지닌 노래의 장점 때문에 문화운동으로 활용되고 만들어진 것은 그 보다 더 이전부터였다. 따라서 누구도 쉽게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의 삶과 의식에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노래의 매체적 특성을 확인하는 것이 실질적인 노래운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문화운동이 기존문화에 대한 대칭개념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노래운동 또한 사람들의 삶의 과정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존의 대중노래에 대한 문제제기에서부터 그 형태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노래운동에 관계된 최초의 전문적인 책이라 할 수 있는 「노래 ·I」이 그 첫 작업으로 기존의 대중노래인 유행가의 성립과 대중가요 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을 싣고 있는 것도 노래운동이 일시적인 운동 도구적 매체로서의 노래가 아니라 기존의 문화현상에 대한 「궁극적인 대안으로서의 노래」를 염두에 두고 있는 데 있다. 따라서 노래운동은 그 기반을 사실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주로 불리어진 운동가에 두고 있으나 나아가 궁극적인 노래문화의 한 틀을 만들겠다는 데 여타 문화운동과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노래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70년대 말, 대학가의 노래모임은 현재 노래운동에서 요구하는 집단성, 조직성, 실천성 등의 조건에서는 사실상 제외되어 있기도 하다.
77년에 결성된 서울대의 「메아리」, 78년에 만들어진 이대의 「한소리」 등은 기존의 대중가요와는 다르게 세련, 섬세, 정돈된 대학생 중심의 관념적인 정서를 만들어냈다는 비판과 함께, 기존의 대중가요에 대한 철저한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당시의 노래들로는 김민기로 대표되는 일련의 모임들로 김민기의 초기 작품인 「친구」, 「아침이슬」, 「꽃피우는 아이」,「가뭄」 등과 한대수의 「바람과 나」, 양병집의 「역」 등을 들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의 반문화 반전가요들과 포크송 계열의 노래들이다. 주로 밥 딜런의 노래인 「바람만이 아는 대답」, 「들에 핀 저 꽃들은」, 「우리 승리하리라」, 「가라모세」, 「오, 자유」 등의 60년대 미국 포크송들이다. 세 번째로는 「타박네야」, 「진주난봉가」 등의 전래민요와 「사노라면」 등의 구전가요를 들 수 있다. 그밖에 「진달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농민의 노래」 등의 전향적인 노래도 당시에 있던 노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 노래운동은 정치적 사건과 함께 전환기를 맞게 되며, 「가자가자」, 「님을 위한 행진곡」 등의 전투적인 운동가요들이 노래운동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또 한편으로 대학의 노래모임을 중심으로 「메아리」, 「한소리」 등에서 행해진 대학가요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많은 모임들이 생겨났다. 80년 이후에 생긴 대학가의 노래모임으로는 고대의 「석화」, 성대의 「소리사랑」, 연대의 「울림터」, 부산대의 「소리터」, 숙대의 「한가람」, 명동성당의 「신새벽」 등이 있는데 이들 모임이 노래운동의 활성화에 큰 몫을 했다. 이후 84년 간행된 「노래·I」이란 책자와 함께 이 책의 저자들이 주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노래모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란 단체가 대중노래모임으로 결성되어 수 차례의 공연을 계속하고있기도 하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출발은 노래운동의 대중화와 실천을 위한 최초의 전문공연모임이란 점에서 노래운동 전체의 비중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미술운동
문화운동으로서의 미술운동은 기존의 미술이 전시회 중심의 공간적 제약과 「와서 보는 관람객」들의 제한성이란 한계를 지닌 것에 비하여 대중운동은 현장에 직접 뛰어 듦으로 해서 장소적 제한과 관람의 한계를 동시에 뛰어 넘고 있다. 대중집회 현장에 등장하는 대형 걸개그림과 판화작업, 그리고 대중벽화와 포스터 등의 작업으로 미술운동은 실제로 기존의 미술이 회화와 조각 등의 전시행위의 틀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표현에 있어서의 탄력성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미술운동은 1969년에 결성된 「현실과 발언」 동인에서부터 현대미술운동의 뿌리를 두는데, 1980년 광주사건을 계기로 미술운동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식민지 시대에서부터 해방 이후 6·25 직전까지의 기간 동안 있었던 미술계의 반제국주의, 봉건주의 운동이 끊어진 이래 미술운동에서의 현실주의의 등장은 유신정권의 몰락과 함께 결성된 「현실과 발언」, 「광주자유미술인회」라는 두 집단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83년 미술운동은 창작방법, 형식과 내용 전반에 걸쳐 「민중성 회복」이란 명제를 걸고 대중 앞에 나서게 되었다. 「민족미술협의회」와 「시각매체연구소」 등의 모임에서 제기된 미술영역에서의 운동이란 명제는 미술운동의 표현영역 확장과 정치현장에의 참여 등의 행위로 확장된다.
따라서 미술운동은 각 운동단체에서 발행하는 회보, 팜플렛, 벽보 등에 참여함으로써 대중성을 회복하고 걸개그림, 벽화, 벽보 등을 제작하여 표현매체를 다양하게 하고 있다.
활용매체별로 미술운동의 변화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83년 무렵 소위 민중판화기법이 벽보에 도입되어 시간적으로 빨리 만들어야 하는 정치현장의 필요와 함께 판화벽보가 널리 활용되기 시작했다. 대학가와 각 생산현장에서 구호와 함께 판화를 제작하여 강력한 선전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② 판그림, 소묘와 만화 등이 어느 정도 확대되어 벽면이나 따로 마련된 판에 부착시키는 새로운 형식이다. 판그림은 그림과 제한된 문자로 만들어져 내용을 보다 압축시키고 극적으로 상징화시킨다. 1985년 주로 대학가에 확산되었는데 사실의 전달보다, 풍자하고 희화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③ 걸개·깃발그림. 회화기법을 활용한 매체로, 1985년 무렵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 1986년 대중집회 현장과 대학집회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1987년 6월 대중집회와 양대 선거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미술운동의 주요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굿판이나 불교 사찰의 집회에서 사용된 양식으로 1985년 이후 현대 대중집회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 양식이다. 특히 1987년에 이르러서는 미술운동과 함께 가장 많이 제작·활용되었다. ④ 벽화. 걸개그림과 같은 양식이나 벽화는 지속적인 전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철거되는 일이 많아 전시현장의 요건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간행물의 표지, 달력, 엽서, 포스터 등에서 미술운동의 참여가 1985년 이후 대폭 늘어나고 있으나, 여타 문화운동과 같이 전문성 확보의 난제를 같이 안고 있기도 하다. 미술운동을 책으로 정리한 「예술운동·1」에 따르면 미술운동은 「광주자유미술인회」와 「현실과 발언」이 유신정권의 몰락과 함께 시작하여 83년까지 홍성담, 오윤 등의 전시회와 소집단 모임인 「횡단」, 「한국현대미술모색」, 「서울다큐멘타」, 「젊은 의식」, 「현실과 발언」, 「임술년」 등의 전시회를 중심으로 펼쳐지다가 1983년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광주자유미술인회」의 재편과 「두렁」의 구성작업, 「미술공동체」 구성 등과 함께 대학내 만화반과 판화반의 조직, 「시민미술학교」 등의 개설로 미술운동은 이후 시작된 판화 전시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여성예술운동
여성예술운동은 예의 문화운동과 같은 궤를 갖고 있으나 그 목표점이 여성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하나 더 추가된 짐을 지고 있다. 기존의 문화를 가부장적 지배문화라 규정한 여성운동은 예술운동을 통해 대중성 확보를 시도하고 나선 것이다. 주로 각 민주운동단체의 여성분과와 여성단체연합 등의 여성단체에서 담당하고 있는 여성예술운동은 84년 여연 주최로 있었던 제1회 여성문화제를 시초로 출판, 문학, 연극, 춤, 노래 등 모든 장르에서 여성해방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출판운동은 주로 「또 하나의 문화」 모임에서 대체문화로서의 여성문화를 기존의 가부장제 문화의 대응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여성민우회」에서 87년 9월, 단체 창립과 더불어 시작한 창립대회에서 여성문제를 포괄하는 내용의 「불꽃이여 이 어둠을」 등을 공연하였다. 또 「여성노동자회」, 「여성민우회」, 「여성의 전화」 등이 공동으로 여성극단 「미얄」을 창단하여 매춘관광 문제를 다룬 연극 「꽃다운 이 내 청춘」 등을 공연하기도 했다.
한편 민족미술협의회 여성분과에서도 여성의 삶과 현실문제를 주제로 다룬 기획전 「반에서 하나로」를 86년 열었으며, 87년 가을 「여성과 현실전, 무엇을 보는가」, 88년 10월 「두 번째 여성과 현실전」을 그림마당 민에서 열기도 했다.
이들은 걸개그림, 만화, 판화 등의 방법으로 여성해방주의를 표현하고 있는데 지배문화의 희생자가 여성이며 당면한 민족적 과제는 여성문제의 해결 없이는 풀릴 수 없다는 인식 아래 대중활동을 하고 있다. 또 노래운동의 하나로 안혜경 등의 작품이 여성민우회를 통해 발표된 바 있으며 대학을 중심으로 놀이패, 탈춤반 등이 노동현장, 대중집회에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공연운동
공연운동은 매체 자체가 종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앞의 여러 분야별 운동적 성격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분야이다. 공연운동도 문화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기존의 문화활동과 커다란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그 주요한 것이 마당극과 마당굿의 형식이다.
70년대 한국 사회의 제반 현상을 반영하는 문화적 움직임의 하나로 새롭게 부각되었던 마당극은 기존의 연극개념의 틀에서 벗어나 전통 민속극의 현대적 계승 및 재창조의 맥락에서 출발하여 기존의 연극계나 민속극계의 소극적인 반응과는 달리 각계에 파급되어 전국의 대학생층과 지식인은 물론 농촌 및 공장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호응과 참여를 불러 일으켰다.
이처럼 마당극이 놀라운 호응과 참여를 불러일으킨 데는 마당극이 민중 자신의 생황체험과 미의식에서 비롯된 경험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기도 하거니와 기존의 문화장르가 수용하지 못했던 정치적 사건과 그들 자신의 고뇌를 과감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당극은 80년대 들어 특히 널리 공연되기 시작했는데 80년 이후 85년까지 공연된 마당극을 주제별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
ㄱ) 농촌문제: 진오귀, 고구마, 돼지풀이, 나락놀이
遁) 공장 근로자문제: 공장의 불빛, 통일마당, 노동의 횃불
鑁) 변두리 외곽지역문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검은 땅 검은 강, 살아가는 이야기
ㄹ) 종교극, 역사극: 예수전, 민중의 예수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라, 항피두리 놀이, 1976에 서 1984까지, 노비문서, 장산곶매, 돌풀이, 녹두꽃
ꁁ) 일반 사회 및 지식인 계층문제: 소리굿 「아구」, 진동아굿, 햇님달님, 남새굿놀이, 먹물 패, 장사의 꿈
ꑁ) 전반적인 문제: 4월굿, 두한춤, 땅풀이, 호랑이놀이, 무등산 병신굿, 밤하늘의 별처럼
걁) 민속의 재해석: 다시라기, 배뱅이굿, 토선생전
(채회완·임진택 저,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 『문화운동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당굿은 사회적으로 알려진 큰 사건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문화운동의 실천 방향
이상에서 우리는 문화운동의 역사와 분야별 현황을 간략하게 짚어보았다. 80년대 들어서 사회적 현상의 주요한 특징이 되고 있는 문화운동은 그것이 광범위한 호응과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로 정치성과 대중성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리한 문화운동의 대중성에 반해 한계 또한 없지 않으며 그것의 극복 여부가 문화운동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우선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대중성의 문제이다. 문화운동은 민중 속에서 민중의 문제를 민중의 말로 표현하고자함으로 해서 대중성 확보는 문화운동의 시작과 끝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화운동이 기존의 기성문화에 대한 대칭점에 서 있음으로 대중과의 영합은 피해야 할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렇다고 자기위안적인 고립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이른바 지식인적 ,논리적 주제와 민중의 생활정서를 어우를 수 있는 양면의 통일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양갈래에 걸쳐 있는 대중성 확보는 문화운동의 한계이자 지향점이기도 하다. 또 전문성의 문제와 함께 예술성의 문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문화운동 자체가 운동적 성격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에, 전문성과 예술성을 제이의적인 개념으로 포괄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앞의 대중성 확보 또한 전문성과 예술성의 충분조건임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그밖에 전통과의 문제, 장르의 문제, 생활문화, 연대의 문제 등이 있으나, 이상 두 가지 문제가 문화운동의 실천방향으로서 큰 굴레라 하겠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80년대 주요한 문화적 현상인 문화운동의 현황과 성격에 대해 알아보았다. 기존문화의 대칭점으로서 문화운동은 변화와 발전이란 문화의 속성으로 볼 때 우리 시대의 주요 변화로 부상하고 있으며 그 몫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