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의 90년대를 기대한다
한상철 / 연극평론가, 한림대교수
89년 올해로 80년대를 마감한다. 그리고 90년대를 바라보게 된다. 시간의 흐름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이 시간 속에서 시간과의 관계 하에서 진행되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은 역사화 한다. 그리고 비로소 시간은 의식의 지평으로 떠올라 어떤 의의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제 우리는 80년대를 역사에 넘기고 90년대를 새 역사의 시작으로 맞이하게 되는 시점에 섰다. 이 시점은 지낸 80년대의 한국연극이 어떠한 뜻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따져보면서 90년대의 그것을 위해 80년대가 넘겨주어야 될 유산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80년대의 한국연극을 평가하는 데는 70년대의 연극을 비교하고,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80년대가 70년대의 유산으로 무엇을 물려받았고 어떠한 과제를 떠맡게 되었는가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80년대의 연극현상의 성격과 특징을 보다 분명히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연극의 발전
필자는 70년대말 다음과 같이 70년대를 청산하는 글을 발표한 일이 있다.
「70년대 연극의 변화는 어느 의미에서 그 전 시대의 연극적 유산을 청산한다는 의미와 아울러 80년대에 있을 연극의 방향과 성격을 예시해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70년대에 있었던 큰 변화가 한국연극의 발전이라는 대전제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는 80년대로 넘겨보아야 될 것 같다」
이것은 70년대 한국연극의 전체적인 평가를 80년대라야 올바르게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70년대 연극의 특징을 하나의 커다란 변화로 규정하고 그 변화의 내용이 80년대 연극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방향설정의 기준이 될 것을 예상한 것이었다. 필자는 70년대가 신극이후 60년대까지의 연극전통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자의식의 실현 및 자아 재발견의 획기적인 노력을 경주한 시대라고 평가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연극이 서구연극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고유한 연극양식을 수립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의 전통연희를 재발굴, 현대화하는 작업을 과감하게 시도한 점과,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만 신극 이후의 지배적인 연극 양식이었던 리얼리즘 양식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형식의 연극을 발전시켰다는 점을 뜻하는 것이다. 이같은 새로운 의식과 실천은 이 시대에 많은 우수한 극작가와 연출가들이 새로 등장하고 그들이 주도함으로써 가능해졌으며 그들은 공통적으로 과감한 실험정신에 충만했었다. 70년대는 무엇보다 매우 개성적이고 뛰어난 연출가들이 연극을 지배한 시대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덕형, 안민수, 오태석, 허 규 등의 영향력이 절대했다. 그들은 70년대 연극개혁에 앞장선 아방가르드들이었다. 한편 오태석, 노경식, 윤대성, 이재현, 이강백, 최인훈, 이현화, 김의경 등 극작가들은 번역극에 대항하여 창작극의 지위를 높이고 한국연극의 제자리 찾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들의 활약이 없었던들 새로운 연극의 탄생과 활기는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70년대는, 이점은 80년대까지 계속되는데 연극에 대한 제도적인 제약이 극심하였던 때이다. 공연법과 사전심의(검열)제도는 한 연극인의 말대로 극작가의 「수족을 묶어놓았으며」연극인의 활동무대인 공연장 확보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연극에 대한 이같은 탄압과 사회 전체에 대한 자유 민주의 극심한 억압은 군사독재와 전체주의를 공격하는 저항적인 연극을 체질화시키고 그 악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사회. 정치극을 만연시켰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대학가로부터 시작되어 기성 연극제로 확산된 마당극 운동은 민중을 위한 민중의 연극이었다는 점, 외래문화를 배격하고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연극의 기본 재료로 사용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운동은 88년 처음으로 전국규모의 축제를 열어 전국민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치적 상황과는 별도로 70년대의 한국사회는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고 물질주의, 금전만능의 풍조가 일면서 수많은 사회문제가 야기되었고,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의식, 취미, 생활양식 등 전반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연극계 자체에도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나는 조짐들과 상호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연극의 팽창이 시작된 것은 70년대 중반이후부터였다. 연극인구가 급증하고 소극장이 다수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공연 작품 수와 공연횟수가 대폭으로 증가하였다. 극단의 동인제 체제가 무너지고 중견 배우들이 TV로 전출하였다. 따라서 극단 운영방식과 공연방식이 변화하였다. 연극인의 생활문제가 절실해지면서 처음으로 배우에게 출연료를 지불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서 연극의 상업주의가 대두되고 상업연극이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빠담 빠담 빠담」은 한국에서 해방후 상업주의 연극을 표방한 첫 사례가 되었다. 그밖에 70년대는 봉산탈춤과 동랑레퍼토리극단의 구미순회공연으로 연극의 본격적인 국제교류를 개시한 시대였으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설립되어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유사이래 처음 비롯된 시기였다.
80년대 한국연극
필자는 이상에서 70년대 연극이 어떠했으며 그것의 유산으로 80년대가 이어받은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대충 살펴보았다. 그 결과로 볼 때 필자는 80년대의 한국연극은 독창적인 발전을 했다기보다 대체로 70년대 연극의 연장선상에서 있었다고 판단하며 이미 7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좋지 않은 조짐들이 개선된 점은 별로 없고 오히려 70년대의 좋은 점들을 더욱 발전시키기 보다 답보상태 아니면 부정적인 면은 더 강해지고 긍정적인 면은 더 약화되는 현상을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 1989년의 한국연극을 진단해 본다면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무슨 문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실로 난감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만약「내일의 연극에 기대를 건다」는 표제 하에 꼭 해결되어야 할 희망 사항을 열거하라 한다면 그 내용에는 오늘의 한국연극의 거의 모든 문제들이 포함될 것이며, 그만하면 만족할만하다는 그와 반대되는 사례들은 극소한 형편이기 때문에 아예 열거하지 않는 것이 편할는지 모른다. 연극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오늘 한국연극에서처럼 현격할 경우,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가 오늘의 전망에서 확실한 가능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옛부터 내려오는 명구인「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는 기적을 믿는 매우 위험한 위안꺼리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연극의 성패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희곡, 무대, 관객의 상호관계에 좌우된다. 이 삼자가 상호 협력하여 연극문화를 향상 발전시켜주지 못할 때 연극은 언제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세계연극사의 빛나는 황금시대는 이 삼자가 조화롭고 건강한 삼박자를 이루어 나간 시대였음을 연극사는 보여주고 있다. 오늘 한국의 연극은 이 삼박자에 조화가 깨지고 저마다 큰 문제점을 안고 있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오늘 한국연극의 불안과 위기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연극예술가들의 상상력의 부족에 있다고 보여진다. 오늘날 극작가, 연출가, 배우, 무대 뒤의 예술가 모두는 독창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공연에 창조적으로 기여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작업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아이디어가 넘친 표현으로 닦여진 작품을 창조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터 반복된 동일한 작업을 통해 또 하나의 유사한 작품을 제작하는데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창조에의 모험과 실험적인 정신은 찾기가 어려워 70년대에 왕성하던 이 가장 귀중한 정신을 그들은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새로움에의 도전없이 훌륭한 연극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같은 상상력의 고갈은 군사통치 26년의 억압과 획일화가 초래한 가장 큰 불행의 하나일 것이다. 상상력의 에너지인 자유를 박탈당하고 폭력적인 힘 앞에서 정신적으로 무력감에 빠지게 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연극을 엄격한 규율로써, 고도의 예술로써 간주하기보다 다만 연극을 하는 사람 자신들의 놀이나 자기도취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데 원인이 있다. 요즘 연극은 흔히 음악이나 무용과 달리 어떤 전문적인 훈련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자신의 재능과 충분한 수련을 전제로 하지 않고 연극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다. 70년대 후반 이후 급격히 팽창한 연극인구와 공연연극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심각한 재정궁핍을 빼놓을 수 없다. 물질주의 금전만능 사상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연극은 가난해도 좋다는 주장이 용인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연극 자체가 상당한 제작비를 요구하는 예술형식이라는 사실을 흔히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연극이건 상업주의 연극이건 마찬가지이다. 연극에서의 투자는 어느 선까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성과도 좋아진다. 그렇다고 연극이 관객의 매표수입으로 제작비를 회수한다는 것은 상업주의의 장기 공연을 제외하고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나라는 국가에서 연극에 상당한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극단은 오로지 매표수입에만 의존하고 열악한 무대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예외적인 공연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 적자를 보고 있는 형편이다. 극단은 무대 자체의 경비만이 아니라 배우들의 많은 출연료 지불은 당연한 관례로 정착되었다. 그것은 환영할만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연극제작에 대한 국가나 사회의 재정지원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개선될 전망은 보이지 않고 있어 심각하다. 세상은 예술의 중요성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데 예술은 거의 언제나 사실보다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처럼 보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역설이라고 한 외국비평가는 말하고 있다. 이 역설이 한국에 적용되면 역설도 되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연극의 중요성을 진실로 믿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히 연극은 언제나 사실보다 더 중요치 않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연극인들 자신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방어 메커니즘이 때로 공격적인 메커니즘으로 변할 때가 있다. 이때 급진적인 래디칼이 된다. 한국의 연극인은 모두 래디칼이 되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이 양자 사이에서 연극인들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계 원로인 이원경씨는 79년 「연극평론」에 다음과 같이 80년대를 전망하였다.
「80년대에서는 과거의 신파 연극과 신극에 물들어 있던 노장 연극인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곧 일본적인 혹은 근대적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새로운 장이 열리는 새해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우리 극작가에 의하여 참다운 우리 연극을 수립하는 시대가 전개되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는다」
80년대의 창작극은 70년대에 이룩한 과거의 영향으로부터의 해방을 더욱 다져 나가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결국 70년대가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처럼 80년대가 「참다운 우리 연극을 수립하는」돌파구는 열지 못하였던 것이다. 80년대 전반은 모두 70년대에 등장해서 활약한 극작가들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들은 70년대와 같은 새로운 연극의 돌파구를 여는 작업이 아니라 70년대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80년대 후반에는 전반적으로 활동마저 저조해서 그들의 상상력과 정열의 쇠퇴를 암시해 주었다.
작년 한국의 중견 극작가 윤조병, 이재현, 윤대성은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였지만 그들의 작품은 극작술에 있어서나 사상에 있어서 전과 다른 깊이나 신선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윤조병은 80년대에 주요 작품들을 발표, 두각을 기대를 모았으나 한국 리얼리즘연극을 진일보시킬 극작가로 기대를 모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기성 극작가 가운데 중요한 작품을 계속 써 오고 있는 작가는 오태석과 이현화인데 그들은 특유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지만 역사를 다루되 그것을 해체하여 오늘의 현실과의 맥락을 일층 강화시키는 진경을 보였으며 역사를 서술하는 대신에 연극적 놀이에 더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80년대 작가라면 정복근 한사람 정도만이 비교적 수준 급인 사회극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밖에 소극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젊은 극작가들이 있지만 극문학으로서의 가치 있는 작품보다 감각적 센세이셔널리즘을 주로 하는 오락상업극에 치우쳐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연극협회에 가입되어 진실을 밝혀 줄만한 극작가는 거의 없다. 이렇듯 역량있는 극작가와 작품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연극의 발전은 기약하기 어렵다. 그런데 반대로 오늘의 한국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급격한 변혁과 불확실한 혼돈이 계속되는 와중에 있으며 개인의 삶이 외적인 힘에 의해 가속적으로 침해받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 로버트 브르스틴은 전자공학과 기타 고도기술의 발달로 모든 일을 집안에서 처리하게 되었고 사회와의 단절이 심화됨으로써 미국사회가 섬으로 화하고 있음을 경고하면서 「당시의 정신적, 정치적, 지적, 정서적인 문제들과 접하고 그러한 것들을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아직 살아있는 곳이 유일하게 극장밖에 없기 때문에 극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 여석기 문예진흥원장은 「후기산업사회로 들어가면서 잘못하면 인간의 소외 현상이 심화되고 사회는 불안해진다」라고 피력하고 있다. 이처럼 극작가는 어느 때보다도 연극을 통해 이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이끌어가고 인간의 지적 정서적 동질감을 확인시켜야 될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다. 오늘의 시대에서 극작가는 다만 글로 극을 만들어 가는 장인이 아니라 예언적 진리를 말하는 사람, 진실과 거짓을 분명히 구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 점에서 그는 철학자이며 시적 상상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극작가를 못 가지고 있고 앞으로 젊은 극작가 중에 그만한 역량이 잠재한 작가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한국연극은 현재도 물론이거니와 앞으로도 암울하다. 만약 80년대 극작가의 부진을 70년대에서 90년대로 가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본 여석기원장의 진단을 믿는다 하더라도 극작가의 발굴과 육성은 한국연극이 아직까지도 짊어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시급히 실효성있고 효율적인 정책을 수립해야 마땅하리라고 본다.
화제가 되고 심각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극작가와 작품이 없을 때 화제의 무대가 탄생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도 무대가 창출할 수 있는 효과를 극대화하는 노력조차 기울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창의력이 번뜩이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절묘하고 현란한 연기, 마력과 신비의 무대기술, 이들은 극작가의 원작가는 별개로 관객을 흥분시킨다. 인간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서커스의 곡예는 얼마나 관중을 흥분과 감동의 세계로 몰아넣는가. 그런데 우리의 연극은 그것에 대해서 언제나 돈 없는 가난만 한탄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돈이 있다면 우리 무대를 하루아침에 신데렐라로 둔갑시킬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한다. 무대는 상상력의 세계이고 아이디어의 세계인 것인지 돈만의 세계는 아니다. 돈은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작년 실험극장이 제작한「사의 찬미」가 동아연극상의 대상을 수상한 것은 이 극단이 모처럼의 대형무대 제작에 쏟은 정열에 관객이 보낸 감사의 표시를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이만한 무대를 우리 연극은 꽤 오랫동안 보여주지 못했다.
90년대 한국연극의 전망
80년대는 훌륭한 연출자, 연기자도 별로 낳지 못하고 많지 않은 유능한 연기자마저 생업을 위해 무대를 지키지 못해서 미숙한 연기자들이 무대를 독점했다. 때문에 한국 공연 무대는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배출된 연출자들은 있지만 누구도 연출의 새 경지를 개척하지 못한 상태이며 김석만, 김광림 등은 90년대에 가서야 그 진가를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에 나온 윤호진, 손진책, 김상열, 김도훈, 정진수 등 중견연출가들은 이제 어떤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느냐 못하느냐가 하나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원로급 김정옥이 80년대에 와서 그의 연출스타일과 방식을 일신하고 새로운 연극관과 무대조형미를 개척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초기에 주로 번역극, 그 중에서 구조주의 연극연출로 참신한 자극을 주었던 김우옥은 근년에는 청소년 연극에만 전념하고 있다. 한국에 본격적인 청소년 연극의 개념을 도입하여 실천하고 있는 그의 작업은 미래의 관객을 훈련시키고 황폐해 가는 청소년의 정서를 가꾸어준다는 의미에서 뜻 있는 일이다. 아울러 별 창의력도 없고 아름다운 무대를 꾸밀 재정적 능력도 없는 많은 아동극 단체들의 각성이 요망된다.
한국연극의 불안은 소극장의 증가 때문이라고 하면 매우 역설적으로 들릴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소극장의 증가는 80년대의 괄목할만한 일중에 하나이다. 공연장이 없어 연극을 하고 싶어도 못하던 많은 연극인들은 도처의 소극장 덕택에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연 욕구를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좀더 깊이 관찰해보면 대부분의 소극장들이 3백개가 넘는 젊은 연극단체들에 의한 무책임하고 자유방임적인 공연의 온상 처로서 점차 연극의 슬럼화를 재촉해가고 있다. 이들 소극장들은 한국사회가 이행해 가고 있는 대중사회, 대중문화의 모든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설적, 폭력적 취향, 사회풍자를 빙자한 유치한 사고와 쌍스러운 언어구사, 보다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기 위해서 동원되는 갖가지 방법들은 대중문화를 건강하게 이끌고 고급 문화에 대한 욕구를 자극시켜 줄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을 저해하고 있다. 이들과 달리 전문 극단들은 소극장을 계속 이용함에 따라서 연극의 크기에 대한 기준을 잃게 되고 모든 연극을 축적으로 가늠하게 되었다. 한국의 수많은 화랑들의 왜소함 때문에 한국 화가들이 화폭이 축소되는 것처럼 한국연극도 축소되고 왜소해지고 있다. 80년대에 새로 신축한 대극장은 문예진흥원 대극장과 호암아트홀 단 둘 뿐이었으며 연간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수는 200편이 넘는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한국의 연극은 한마디로 소극장 연극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주 문화의 고급화와는 반비례로 연극문화는 품위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성인 관객의 극장 출입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올해 동숭아트센타가 개관함으로써 오랜만에 대극장을 하나 더 갖게 되었지만 앞으로 더 많은 대극장 건립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의 연극은 완전히 난쟁이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관객의 문제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는 작년 깜짝 놀랄만한 현상을 발견했다. 88올림픽 연극축전에 참가한 외국단체들의 공연에 관객들이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들은 젊은 여대생 계층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관객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젊은 학생들뿐이라는 가정이 진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젊은 학생들뿐이라는 가정이 진실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쾌거였다. 이것은 한국연극이 무대와 객석간에 엄청난 괴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보다 훌륭한 연극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의 열망을 정작 우리 연극은 외면해왔다는 사실이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연극에 그처럼 관객이 몰려든 것은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둘러댄다면 관객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연극으로 내 가슴을 뛰게 해 달라고 요구하거나, 그리스국립극단의 「오이디프스왕」의 반만이라도 가슴 벅차게 해달라고 외칠 것이다.
공연과 관객의 관계는 자칫하면 닭과 계란의 순환논리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연극예술가는 관객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서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상업주의 연극의 일차 목표는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그들의 예술가적 정신을 불태우고 스스로 더 정진하기 위해서 좋은 연극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관객이 많은 것은 그들의 고귀한 정열에 대한 관객의 존경의 표시인 것이다.
80년이 다 가는 올해로 통일로 주제가 전면에 무상할 것이며 북방정책에 의한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가 활발해 질 전망이다. 이 새로운 변화는 90년대 연극의 방향을 암시해주며 여기에 대응하는 연극계 자체의 자세의 태도를 재검토하게 된다. 마침 88년을 마지막으로 말썽 많던 사전심의(검열)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공연법도 올 해안으로 개정될 것이다. 한국연극은 이제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해야 할 입장에 섰다.
한국연극은 그동안 정치적인 영향을 심히 받아왔고 지난 80년대, 특히 마지막 몇 년간은 사회, 정치극 일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으로 보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극은 올바른 의미에서 사회극다운 사회극, 정치극다운 정치극을 만들어 내지 못했었다. 마당극은 프로퍼갠더로 경사 되었으며 다른 일반극들도 고발, 폭로, 아니면 풍자, 야유로 일관해 왔다.
이와 같은 시사성이 강한 연극들이 고전으로 남을까 하고 구희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전 연극을 만든 사람들은 그 의문을 일소에 붙일지 모른다. 그들은 고전으로 남기 위해서 작업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의 연극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프로퍼갠더적인 요소가 없을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두 연극을 다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연극 속에 비프로퍼갠더적인 요소 즉 좋은 연극이면 의례히 가지고 있는 장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사극, 버나드 쇼의 극들은 그렇다. 그것들은 오늘에 와서 그 시대의 문제의 절박성도 상실했고 개연성도 상실한 처지인데도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훌륭한 작품은 예술과 프로퍼갠더가 뒤섞인 복합적인 것이 될 때 가능해진다는 것은 뜻한다. 모든 훌륭한 연극은 궁극적으로 마음에 호소하는 연극이고 개인의 생활에 공헌하는 연극이다. 이러한 정의를 적용하면 훌륭한 사회극은「사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에 대한 존경, 무엇보다 그들 개개인의 체험에 대한 존경심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에릭 벤틀리) 그러나 한국 사회극이나 정치극은 비판 매도되고 고무 찬양되는 사회 또는 정치만 있지 개인의 체험은 묘사되어 있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바로 프로퍼갠더의 특징이고 비난받는 이유가 된다. 그러한 연극은 토론이 없고 일방적 압승만 있어서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연극이 대상으로 하는 관객은 그 연극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것이 주장하는 바를 믿고 있는 관객이며, 그 중에서 좀더 지적인 관객이라면 그 연극을 설교의 연극으로 멸시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잘 만들어지지 못한 사회, 정치극은 잘 만들어지지 못한 멜로드라마와 같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