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의 위상과 과제
최인학 / 인하대, 민속학
민속학의 현대적 의미
민속학이란 민속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고 민속은 그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다. 문화의 개념에는 「문화국가」,「문화적 생활」,「문화인」과 같은 이를테면 지적 수준, 지성이나 교양의 정도를 말할 수도 있고「한국문화」,「고대문화」,「미개문화」와 같이 주로 생활양식을 의미하는 문화의 개념으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뉘앙스를 보면 독일어의 Kultur는 전자에 속하고 영어의 Culture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민속을 전통문화라고 할 때 당연히 민속학은 어떤 민족의 교양이나 지적 수준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그 민족의 생활양식을 연구하는 학문이어야 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클라크혼의 문화의 정의를 빌리기로 한다. 그는 문화의 정의를 후천적 역사적으로 형성된 외면적 내면적인 생활양식의 대계이며, 집단의 전원 또는 특정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요약하면 전통문화란 ⸁역사성⸂집단성⸃공유성이 구성요건이 된다는 말이다.
즉, 한국민족이 오랜 역사를 통해 공간적으로 상호 연대관계를 맺으면서 통시적으로 지켜 내려오는 생활양식이 곧 한국의 전통문화요 민속이라 할 수 있겠다. 일시적으로 유행했다가 사라진 것들, 어떤 특수 그룹이나 계층만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들은 이 개념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민속학의 궁극적 목표는 한국민족이 역사적으로 집단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외면적 내면적 생활양식을 연구하고 체계화하여 보편성의 원리를 규명하는 데 있을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민속학
초기의 성립배경
한국민속학이 언제부터 시작했느냐하는 문제는 민속학의 개념과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16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사이에 나타난 학풍의 하나인 실학에 민속학의 성립을 두려는 의견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실학이 공리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떠나 현실주의이고 민족적 자아와 주체의식의 발견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것을 국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하여 실학의 마지막 주자로서 민속학의 개척자라고 보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학자체가 하나의 구체적 학파라기보다는 그 시대에 있어서 종합적 사상이고 철학이라고 볼 수 있으며 현재로 실학의 성격과 개념에 대해서는 계속 논의가 되고 있기 때문에 실학의 이러한 성격과 개념이 완전히 정립되기 전에 민속학의 기원을 실학에 연관시키려는 태도는 조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논문들 중에는 일부 민속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그 업적으로 보아 실학의 마지막 주자로서 실학과 민속학의 중간적 민속학에 대한 개념과 의식이 전제되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실학과 국학, 그리고 민속학의 삼각관계는 개념상의 상호관련성이 존재하며 한국민속학의 성립배경을 깊이 연구하는 데는 이들이 검토가 선행된 후에야 그 해 답이 가려지리라 생각한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민속학이 학문으로서 의식을 가지고 출발한 것은 1920년대이며 10여 년간의 여과를 거쳐 1932년 한국민속학회가 조직되고 이 기간이 현대민속학의 시작이라고 일단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27년에 최남선의 「薩滿敎嬤」이능화의 「조선무속고」가 발표된 것은 민속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것들이 비록 문헌사적 정리라는 단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당시에 있어서 무속관계를 중시했던 의식의 저변에는 민족문화의 기층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속이라는 데 공통점이 발견된다.
드디어 1932년에 조선민속학회가 발족함에 이른다 宋錫夏, 孫普泰, 鄭寅燮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이 학회는 이듬해 학회지 창간호를 낸다. 학회 창설의 목적은 첫째 자료수입, 둘째 민속학 지식의 보급, 셋째 학자간의 교류, 넷째 외국학회와의 교류 등이고 창설동기에 대해서는 첫째 민속학이 개인별로 연구해 온 탓으로 이론의 체계가 없으며, 둘째 민속자료가 없어져 가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시급히 자료채집을 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인상은 서구에서 수입되는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민속의 (특히 영국민속학)에 자극을 받으면서 한편 일본 학자들이 일방적으로 실시하는 한국민속학연구에 일련의 거부반응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식민지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가 행정기관을 동원하여 수집된 방대한 자료들을 보고 형식으로 이루어진 자료들이 태반이었다. 이렇게 수집된 자료들은 몇몇 일본인 학자들의 논문자료로 원용되었고 식민지 정책을 펴 나가는 데 기초자료로 삼았다.
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암담한 시기였다. 이 무렵 일본내에서는 소위 일조동조론(日朝同祖論)이 대두되고 한글을 없애는 정책과 모든 출판물은 일본어로 할 것을 강요당했다. 민속학회지도 이 때문에 1940년, 제3호로서 중단된다.
외부적 요인에 의한 장애요소
1945년 일본의 폐망으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게 되나 1950년 다시 동란을 맞게 되어 민속학연구는 침체를 거듭한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학과 국문학에서 민속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54년 국학대학에서 민속학 강좌를 개설하기 시작했고 1957년에는 국어국문학회에 민속분과위원회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민속학이 국문학 연구의 보조과학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국문학자들이 주축이 된 민속학연구는 구비문학이 역시 연구의 중심이 되었고, 서사문학연구의 일환으로 무가가 다루어졌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민속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요인을 굳이 찾는다면 이승만 정권이 펼친 근대 의식화운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미신타파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문맹자 퇴치와 미신타파운동은 관 주도하에서 베풀어진 당시의 근대화운동이었다. 나름대로의 성과는 있었겠지만 민간신앙 부분의 연구에는 장애요소가 되었다. 이 무렵, 무당들은 떳떳이 굿을 할 수 없었고 모두 음성적으로 맥을 유지했었으며 학자들의 접근은 타부시 되었다.
다만 정부 주도하에 1958년부터 시행된 전국민속경연대회는 본질의 민속예술이 호도된 채 축제로서의 효과만을 의도한대로 성과가 있었다. 이 축제는 수를 거듭함에 따라 상금에 집착된 보이기 위한 경연대회의 성격으로 변이 하면서 문제점을 계속 안고 있었다.
1960년 4.19데모가 일어나고 윤보선 정권이 들어섰으나 이듬해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다른 학문분야에도 발전하는 데 장애요소가 되었겠지만 특히 민속학연구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다 할 업적 없이 겨우 소극적 연구가 맥을 잇다가 1960년 후반에 들어가서야 한국민속학은 비로소 이론정립을 위한 몇 차례의 논쟁을 거듭하게 된다.
하나는 민속학이 보조과학이냐 독립과학이냐 하는 주제였고 또 하나는 연구방법론이었다. 말하자면 민속학의 위상정립을 위한 생존논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보다 앞서 1969년에 한국민속학연구회가 구성되고 이듬해 민속학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문화인류학회와 공동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전국민속종합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민속학 발전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민속학 발전에 또 하나 외부적 장애요소 밀어 닥쳤으니 그것은 박정권이 농촌의 근대화를 목표로 시작한 새마을운동이었다. 생활환경의 개선, 현대화 의식, 생산증산 등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시도된 이 운동은 마침내 비생산적이라 하여 지붕의 짚을 함석이나 슬레이트로 개조했고, 흙담을 헐고 시멘트 블록으로 개조했으며, 길을 넓혀야 했기 때문에 마을의 수호신격인 신목들을 베어내거나 장승을 뽑아 태워버리는 등 농촌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변모해 갔다. 이것은 전통적인 민속문화를 고수해 오던 일부 노인층과 젊은 세대간의 갈등으로 심화되어 갔고, 일부 민속학자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애당초 전통문화의 보존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시행하다가 저항의 기운이 일기 시작하자 도중에서 시행착오를 느껴 일부 시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운동으로 말미암아 민속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사라져가는 잔존문화에 대한 수집과 정리의 시급성을 인식하게 된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유실된 민속의 복원은 매우 어려워진 상태에 놓였다. 무엇보다도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부담만 안겨주고 정신적 유산의 굴절을 초래하여 민속학연구에 장애가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으로 인한 부정적 요인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술한 긍정적인 측면 즉 민속학자들에게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민속학계 스스로 자활의 의식화 운동이 싹튼 점은 곧 몇 차례의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를 통해 반영되었다.
1971년 원광대학교에 한국 최초의 대학부설 민속학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이 연구소는 「전통과 민속학의 현대적 방향」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고, 같은 해에 「민속학의 전환적 과제」라는 토론회가 가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민속학적 위상정립을 시도한 업적을 쌓아가는 데도 불구하고 시민의 반응은(여기서는 전반적인 기존 학계를 말함)냉담했다. 결국 민속학을 전공하는 몇몇 학자들 스스로의 목소리에만 그치는 곳 같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고독한 학문임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결국 위정자에게 수용이 되었고 그 결과 1979년 안동대학에 민속학과가 정식으로 신설 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민족주의 정통성 확립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문화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사실 이러한 캐치프레이즈는 박정권 당시부터 실시한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그 산파역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개설되고 정통성문제로 여러 차례 학술회의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자생적 필연성이 결여되어 많은 학자들의 호응이 부족했고 많은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투자한 만큼의 효과가 있었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다. 지나친 정권의 간섭과 관 주도하의 연구기관의 한계를 엿볼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전술한 문화정책의 획기적인 계기를 노려 1981년 「국풍81」을 기도했다. 이것은 다분히 정치성이 개재되어 대학생들의 저항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군사정권에 대한 대학생들의 시위는 날로 더해 갔고 사회의 소요는 심화되었다. 「국풍81」은 이러한 물결을 잡아보려는 제동적 장치로 발기 되었다는 대학생들의 주장이 계속 소요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전두환 정권을 상징하는 제5공화국은 민속학에 있어서 새로운 시야를 펼쳐주었다. 대학생들의 저항운동은 캠퍼스를 놀이의 마당으로 전환시켰다. 이와 같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1980년대 초반은 민속의 변이가 초래되는 시기였다.
민중의 의미를 독재정권으로부터 고통받는 시민(노동자나 농민)이라고 단정하고 새로운 민속놀이가 개발되었다. 시위때마다 등장하는 탈춤은 대사 뿐 아니라 등장인물까지도 대체되었으며 마당굿은 아예 새로운 장르로 등장했다. 이 무렵의 마당굿은 정권을 대상으로 한 비판을 담은 내용이었으며 시국굿, 시국노래, 해방굿이란 새 용어들이 부각되었다.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민속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변이를 초래한 것이며 연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발전기의 이정표
1920년대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걸어온 한국민속학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장애를 받아가면서 생성해 온 과정을 부정적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요컨대 민속학이 발전하지 못한 변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속이란 민족과 더불어 자생하여 성장하는 생활양식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시대적 바람을 가장 많이 타는 학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의도에서 회고해 본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70년간에 학사적 의미를 평가하여 10년 단위로 형성기, 정립기, 침체기, 발전기로 구분 짓는가 하면 여명기, 중흥기, 발전기, 정리기로 표현하기도 하고 개괄해서 발아기, 여명기, 성립기로 분류하기도 한다. 물론 편의상 이와 같은 구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민속학사를 정리하는 데 따르는 사관의 정립과 민속학에 대한 의식과 개념의 설정이 전제되어 검토를 거친 연후에 사적 평가가 내려져야 하리라 본다. 그러므로 지금 획일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속학이 아직도 방황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학적 기반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분야에 따라서는 상당한 수준에 이른 만큼 업적은 많다. 개괄적으로 볼 때 1968년에 조사가 실시되어 1981년에 완성된 전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를 비롯하여 1980년에 착수하여 84년에 전 59권을 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낸 한국구비문학대계 그리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낸 한국민속대관전6권 등의 업적은 분명히 민속학 발전기로 이어지는 이정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밖에 1957년 국어국문학내에 민속분과가, 1969년에 한국민속학연구회가 조직되고 70년에 민속학회로 개칭되면서 오늘까지 학회지 21호를 냈다. 이어서 1983년 동북아시아 민속권의 비교연구를 지향하는 의도에서 발족한 비교민속학회는 회지 4집을 내고 있다. 이러한 학회활동이 활발한 것은 민속학의 개념정립을 딛고 이미 발전기로 들어섰다고 자부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민속학의 위상과 과제
한국인의 연구하는 학문
현재 민속학을 강의할 수 있는 교수가 있는 대학에서는 거의 강좌를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에 접어들면서 대학가는 민속에 대한 인식이 대학생들 사이에 고조되고 있다. 앞장에서 필자가 언급한 대로 민속학의 연구업적도 양질로 향상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한국민속학이 발전하고 매년 우수한 논문들이 축적되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론의 체계화는 아직 답보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71년도에 있었던 안동대학 민속학과 주최 학술회의에서 교수는 금후의 과제로 세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는 이론화의 정립이고, 둘째는 민속학 자료정리의 시급성, 셋째는 사유화되고 있는 자료의 공개를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이 있은 지 18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이 과제 중에 어느 하나 만족할 만큼 해갈된 것은 없다.
매년마다 축적된 논문들을 통관해 볼 때 주제의 획일성이 없고 산만한 상태에서 분야별 주제별로 각자의 방법론으로 양산만 일삼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일본의 경우를 잠깐 살펴보자.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야나기 다쿠니오가 생존시에는 그를 중심으로 한 일본민족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생각을 해 왔는지를 규명하는 데 연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지금은 기존 학풍에 저항을 느낀 일부 중견 및 젊은 학자들간에는 유전의 과거학으로부터 탈피하여 현재학으로 민속학을 이끌어가려는 기운이 싹트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학풍의 선맹성이 아직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학회는 있어도 학풍이 없는 것이 실정이다.
민속학이란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것이라 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각 분야의 연구업적이 현재와 격리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과거는 현재와 수평적 통시적을 가졌고 이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미래에 우리의 생활양식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제시하는 학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민속학의 전체적인 중심주제는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생활해 왔으며 어떻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 왔는지 그 기층에 흐르는 저력(그것은 정신적 지주일 것이다)은 무엇이었는가를 추찰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와 조선조시대를 거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문화양상도 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민족의 정신적 지주마저 바뀐 것은 아니다. 바뀐 것은 표층이고, 권력구조이며 외래문화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 민족의 정신적 흐름이 많은 상처를 입기도 하고 본래의 형상에 점감이 있는 것은 인정하나 내면에 흐르는 물결은 바뀐 것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조선시대의 양반과 상민의 계층간의 갈등을 가지고 한국민족의 의식구조를 조명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노출된 문화양상으로 정치, 사회제도를 연구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언정 민족의 정신사적인 면에서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양반이라고 일컫는 상류계층사이에서도 서민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남긴「고대소설」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요즘「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타이틀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여러 측면에서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규찰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민속학이야말로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찾는 가장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민족에 내재하는 계통의 논리는 무엇일까. 즉 시공을 관통해서 흐르는 한국민족의 심층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민속학이 당면하는 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동체에 바탕을 둔 민속예술
민속학 분야중에 민속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어느 분야보다도 이 민속예술이 가장 활성화된 데에는 정책적인 배려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매년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는 언제나 행사 후에는 잡음을 남기고 있지만 그런 것은 모두 행사에 따르는 절차상(심사기준과 시상 등)의 문제이며 본질적으로 사라져간 민속예술의 복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민속예술이 공동체의 예술활동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의할 것은 각각의 공동체에서 자생되어 연예된 것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공연하는 주체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기와 장소는 공연물의 핵심이다. 따라서 민속예술에는 두 가지 관점이 성립된다. 즉 국민적 화합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 축제를 발전시켜 나가려는 의도라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와 같은 행사는 재정이 허락하는 한 자주 개최되어도 좋다. 그러나 공동체적 지역 사회의 활성을 위해서는 그 지역 주민들에 의해 베풀어지는 한마당 굿판처럼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전자의 효과만을 기대한 것 같은 인상이 짙다. 몇 배의 예산이 들더라도 지역으로 분산 개최하거나 적절한 시기에 지역 주민들에 의해 개최될 수 있도록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학제간 연구의 시급성
끝으로 한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속학의 연구 목표가 원만하게 달성되기 위해서는 학제간의 연구가 필수적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전연 이 분야가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정신 심리학적 측면에서 무속연구학자와 공동으로 이루어 논 성과가 있고 문화인류학과 민속학이 상호 학회를 통해 공동연구를 하고 있는 점도 인정된다. 그러나 가장 긴요한 분야의 공동연구인 역사학과 민속학, 사회학과 민속학, 종교학과 민속학, 인문지리학과 민속학, 언어학과 민속학 등 인접한 학과와의 공동연구는 상호간의 연구발전을 위해서도 긴요한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학제간의 연구를 통해서만이 민속학의 이론 정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민속학의 이론은 거의가 외래의 것이다. 선진외국의 방법론을 수용해서 우리의 자료를 대입시켜 개연성이나 보편성을 찾아내 봤자 그것은 시도일 수는 있으나「한국인」,「한국인의 생활양식」의 법칙을 규찰하는 데는 오히려 장애요인이 될 것이다.
자료의 정리, 분야별 공동연구, 학제간의 연구를 통해서 한국민속학이 이론화와 체계화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