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논단

한마당 철학으로 이르는 길

-한국문화의 예술적 이해를 위한 시론 (III)




박정진(세계일보 문화부 차장)

1. 무교 문화, 컨텍스트 문화의 측면

한국문화의 핵심은 신내림의 문화이다. 신내림이란 우주의 구조로 볼 때 위로부터 영감을 받는 문화이며 이러한 문화는 대체로 정감이 발달한 문화적 특성을 갖는다. 정감의 발달은 상대적으로 분석적, 개념적 언어의 축적이 결여되는 경향이 많으며, 따라서 학문보다는 예술, 종교가 성하다. 김택규교수(영남대, 문화인류학)는 우리 민족의 삶의 구조를 신, 멋, 한으로 파악했다. 신을 종교, 멋을 예술로 본다면 학문을 나타내는 진 대신에 한이 자리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학문을 추구하는 정신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예술과 종교가 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이며 우리 역사의 의미구조인 것이다. 여기에 예술인류학이 주장되는 이유가 있다.

신내림 문화, 그 전통

학문이 아래로부터 축적된 문화라면 종교는 위로부터 신내림의 문화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위로부터의 영감과 아래로부터의 훈련(교육)이 결합된 중간적 문화형태라고 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지금까지 간간이 언급한 예술인류학의 목적과 의의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술인류학은 토착인류학 또는 인류학적 사회학Anthropological Sociology의 모색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구조(상징)인류학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지만 보다 직관이나 감정이입 등과 함께 감성 쪽에 비중을 두는 점이 구조(상징)인류학과 구별된다. 이같은 점은 자문화(自文化) 연구를 하는 데는 타문화(他文化) 연구 때보다 더 정적인 부문에 디테일한 묘사가 필요하다는 점과 또한 자문화 연구에서야말로 문화에 대한 예술적(예술가적)인식이 용이하며, 연구의 효용성도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좀더 구조인류학과의 대비를 한다면 구조인류학은 사실(사건, 사태)사이에 존재하는 의미구조(법칙)를 찾기 위해 이항대립항 binary opposition을 만들지만 예술인류학은 의미구조(법칙)이전의 사물이나 사건의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회복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이항대립을 시킨다. 왜냐하면 이항대립 속에 그것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구조인류학이 목적하는 것이 상징을 통한 법칙의 발견이지만 예술인류학은 상징(이미지)을 통해 기를 회복하고자 한다. 이 부분은 다음에 좀 더 자세히 논의될 예정이다.

⸂예술인류학은 학문과 예술과 종교의 유기적 파악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훼손하지 않고 총체적으로 보고자 한다. 이것은 인류학이 문화를 복합적 총체 complex whole로 규정해 놓고, 실지로 이에 대한 연구를 총체적으로 실현한 적이 매우 드물었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자구책이라는 실현한 적이 매우 드물었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자구책이라는 의미도 있다. 조동일교수(서울대, 국문학)의 「한국소설의 이론」전통적 이기(理氣)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득지학(自得之學)의 문학장르론이라면 예술인류학은 인간의 모습을, 학문, 예술, 종교를 통합하는 차원에서 바라볼 수 없을까 하는 자득지학의 인간, 인간문화론이다.

토착인류학으로서의 예술인류학

조동일은 「전체는 부분의 대립적 총체」라는 관점에서 소설의 장르를 논하면서 작품 내적인 내포적 대립과 함께 작품 외적인 외연적 대립을 동시에 파악함으로써 이기철학에서 출발하는 국문학이론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하면 예술인류학은 학문, 예술, 종교라는 문학의 장르를 장르 내적, 외적 총체성으로 파악하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동일의 문학이론이 일원적 주기론(一元的 主氣論)을 바탕으로 즉, 이(理)는 기(氣)의 조리(條理)라는 입장에서듯이 예술인류학도 일원적 주기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인류학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예술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연행(演行)한다.

⸃예술인류학은 구조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구조론 가운데서도 특히 역동적 구조론(발생적 구조론이라고도 함)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예술인류학 Artisitic Abthropology은 예술을 연구하는 인류학 Anthropology of Art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를 연구대상으로 한다. 이는 마치 역사사회학 Historical sociology이 역사에 대한 사회학 Sodiology of history이 아닌 것과 같다. 물론 예술인류학은 예술작품에 대한 연구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예술인류학의 많은 대상 가운데 하나로서이다.

⸄예술인류학은 보편적 인간상으로 샤만 Shaman을 상징하고 있다. 예컨대 예술인류학이 학문, 예술, 종교를 통합함으로써 인간과 인간문화를 연구할 경우 이같은 세 요소를 한몸에서 가장 잘 표출하고 있는 것이 샤만이기 때문이다.

메타포를 찾는 시인

⸅예술인류학은 예술의 필수요소인 메타포 metaphor를 연구의 기본적인 분석도구로 삼는다. 따라서 예술 인류학자는 메타포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의 모습과 흡사하다. 예술인류학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기의 커뮤니케이션 communication of chi이며 거기서 학문적 보편성을 얻고자 한다. 따라서 언어나 상징을 쓰고 있지만 그것을 초월하고자 한다.

⸆예술인류학은 다차원의 철학(구조)관을 갖고 있으며 동태적 우주관을 지향한다.

또한 학문적 분석무델로서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한 모델보다는 수직, 수평, 수직, 수평(圓)구조의 모델을 채택하고 있다. 여기서 수직 또는 수평모델은 정태적, 분석모델, 수직, 수평모델은 동태적 통합모델로 정태적이면서도 동시에 동태적인 설명을 함으로써 수직과 수평의 축이 방향성을 갖는 게 특징이다.

예술인류학의 수직, 수평모델(圓)의 한 예로서 「동서양 문화론과 학문, 예술, 종교의 통합」을 언어와 감각이라는 축으로 보면 표2와 같다. 표2의 가장 큰 특징은 언어와 감각의 축이 자체적으로 방향성(운동성)을 갖고 있으며 축의 반대편에 상징과 통각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축은 고정된 것으로 보는 것(변화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과는 달리 축 자체를 가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을 뜻하며 이는 나아가서 축상호간의 통합적 원운동으로 발전한다.

서양(서구)문화는 「언어와 시각」에 대한 종속문화이다.

오늘날 소위 과학(학문)이라는 것은 언어와 시각의 교직물이다. 이것은 또한 텍스트를 추구하는 문화이다. x, y축의 오른쪽 상단은 서양문화의 특징을 나타낸 것이다. 서양의 언어는 표음문자로 대표되는데 이것은 주지하다시피 시각적 이미지를 부호(알파베트)로 환원시켜 부호의 조립을 통해 의미를 고정시키는 언어체계이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음이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문화는 음과 뜻이 임의적arbitrary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개념 규정하거나 언어의 사물화, 사물의 결정화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이 문화는 시각지향적 문호(또는 미술지향적 문화)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x,y축의 왼쪽 하단은 동양(동아시아)문화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동양문화는 「상징과 청각」에 대한 종속문화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텍스트 보다는 컨텍스트를추구하는 문화인데 과학보다는 예술, 종교가 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동양의 언어는 표의문자로 대표되는데(예, 중국)이것은 시각적 이미지를 부호로 완전히 환원하지 않기 때문에 음과 뜻이 임의적이지 못하다. 한글은 표음문자이지만 표의성을 갖고 있어서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개념규정이나 언어의 사물화, 사물의 결정화에 대한 강박관념이 아니라 언어의 상징적 사용(언어의 상징화), 사물을 기로 환원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문화는 청각지향적 문화(또는 음악지향적문화)라 할 수 있다. 이 문화는 전체적으로 감각의 통각화(감각의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표2의 x, y축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고정된 축으로의 기능 뿐 아니라 x, y축의 통합적 원운동을 하고 있다.

즉 서양의 「언어와 시각」종속문화는 상징을 기호화하려는 인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기호학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동양의 「상징과 청각」종속문화는 텍스트의 상호텍스트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호학이 서양에서 나오고 대화문호(민주주의)가 서양에서 정착된 것은 매우 아이러니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기호학이 추구하는 다양한 의미세계와 사람과 사람의 대면을 통한 대화는 동양의 문화에 더 풍부하고 생활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서양은 랑그langue, 동양은 파롤parole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는 표층on-stage과 심층off-stage구조라는 이중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서양문화와 동양문화는 표층과 심층관계에 있다. 표층과 심층은 마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와 같이 상호보완적이며 이를 통해 세계문화가 은밀하게 서로의 욕구충족을 실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또한 동, 서양문화의 표층이 상대 문화에 대한 심층의 콤플렉스의 노출이라는 점도 깨우쳐준다.

지금까지 과학하는 한 방법으로서 메타포를 사용한 경향은 드물었다. 예술인류학은 연구대상으로서의 상징, 구조가 아니라, 연구도구, 학문방법론으로서의 상징, 구조를 뜻하고 있다.

상징, 구조인류학과 예술인류학의 근본적인 경계는 전자가 상징의 언어적verbal 또는 비언어적non verbal 형태로 표현된 문화를 다룬다면 후자는 전자가 다루는 내용도 포함하면서 신내림과 같은「기」의 형태를 상징에서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이상의 논의를 연관학문과 비교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사회언어학이나 또는 언어사회학, 예술사회학, 문화(예)사회학, 미학, 그리고 예술철학 등은 언어사회, 예술, 철학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분야이긴 하다. 그러나「보통사람의 일상생활」을 예술(상징)이라는 방법으로 보편적 차원에 올리는 노력은 아니었다.

사회언어학은 언어의 사회적 측면에서 언어 사용의 상황적 맥락에 관심을 갖는 반면에 언어사회학은 언어와 사회구조를 결합시키는 시각에서 언어체계를 사회체계에 관련시키고자 노력한다.

즉 언어와 사회구조에 관한 일반 이론을 추구하는 역사적 맥락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상에서 볼 때 사회언어학과 언어사회학의 경우 전자는 사회구조를 독립변수로, 언어의 활용을 종속변수로, 후자는 언어구조를 독립변수로, 사회구조의 역사적 변화를 종속변수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하면 예술인류학은 다분히 언어사회학의 경향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즉 언어체계(구조)대신에 예술체계(방식)를 대입하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예술인류학이 언어사회학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예술인류학은 언어가 아닌 비언어적 언어nonverbal language의 체계를 주로 다루며 이러한 대상의 비언어적 성격을 잘 다루기 위해서 예술가의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을 그대로 학문 연구에도 적용한다는 점이다. 마치 예술인류학의 학자는 예술비평가와 같이 예술작품을 가장 가까이서 감상하는 자이면서 어느 순간 비평가로 돌아서는 상황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접근방식 자체가 내용(연구)을 결정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이는 예술의 형식이 곧 내용이요, 내용이 곧 형식이라는 「내용과 형식」이 가장 가까이서 서로를 숨쉬는 것과 같다. 언어의 차원에서 논의를 한다면 이미지의 개념화나 사회적 타성 때문에 「내용과 형식」이 그렇게 가깝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술인류학은 따라서 마치 시인의 감수성이 요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생활 속의 메타포의 세계를 시적 감수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어떻게 들출 수 있을 것인가? 요약하면 일상 생활의 비언어적 언어세계의 숨은 메타포를 찾아내는, 그리고 메타포의 현란한, 급속한 변환을 파악하는「생활의 시인」을 예술인류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인류학이 문자사회의 연구에서 계승되어 비언어적 언어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예술인류학의 특징은 예술가의 연구, 접근방식과 비언어적 언어세계로 압축된다. 비언어적 언어세계에 대한 관심은 소위 예술철학과의 비교가 요구된다.

예술인류학, 그 학제적 입장-사면체의 다이아몬드

예술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경험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즉 예술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학이 될 것이고 개념적인 차원에서 추구되는 것이 바로 예술철학이다. 예술인류학은 경험적인 차원에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매우 역동적으로 논의된다는 점에서 예술학과 예술철학, 어느 것과도 다르지만 무엇보다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개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집단적인 삶(사회속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점이 다르다. 이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예술인류학이 예술사회학, 문학인류학은 예술(문학)과 사회의 상호작용이나 상관관계를 구명, 해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기를 역사 속의 시적 메타포에서 찾아냄으로써, 인간을 시, 공간적 텍스트에서 해방되도록 하여 끝내는 종교적 경지로, 초월적 경지로 승화되도록 함을 목적으로 한다. 즉 우주적 구조의 즐김을 느끼게 한다.

결국 예술인류학은 예술(생활), 철학(규범), 사회(비문자사회), 언어(비언어적 언어)가 만드는 사면체(다면체)의 공통공간에 속한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들 영역의 연구가 경우에 따라서는 접근 또는 중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민족예술론이나 상징, 구조인류(심리)학의 상당부분의 연구 영역이 이와 관련이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예술인류학의 가장 독자적인 영역은 학문적 연구방법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예술가적 접근에 대한 자각이다.

혹자는 그것이 어떻게 학문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히 정감적인 문화, 느낌에 의해 살아가는 문화, 사회를 이룬 집단이 있다면 이 방법에 의하지 않고는 그 문화의 핵심적 정체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인류학은 연구대상이 되는 문화(사회)에서 수많은 메타포(비유, 구조)를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삶의 장에서 발견되는 비언어적 언어의 세계에 초점을 두고 말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의 장인 우주는 무한한 구조, 상징의 세계이다.

필자가 굳이 기존의 구조, 상징인류학의 영역일 수도 있는 것을 예술인류학으로 이름하는 것은 한 문화(사회)의 메타포를 찾아내는 일이 예술가적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또한 조사자가 어느 시점에서 찾아낸 메타포가 과연 얼마나 영속적인, 구조화된 것인지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시인의 감수성으로 메타포를 다루지 않으면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문화의 메타포를 조사자가 선입견이나 일종의 고정관념 또는 조사과정의 나태함으로 왜곡시킬 수 있다)을 주지시키고 싶어서이다.

이 점을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메타포(비유, 구조)가 매우 전자기적인 성질을 띠고 의식, 무의식 속에서 의미작용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메타포의 구조적인 것이, 어떻게 전자기적인 성질로 바뀌고 반대로 전자기적인 지각이미지가 어떻게 구조적인 코드로 바뀌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인간)몸의 어디에선가 그러한 전환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과정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문화의 메타포(비유, 구조)를 다루며 보다 정확한 메타포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단 속의 인간은 사회적 타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가 염려하는 만큼 그 메타포가 자유분방하지 않다는 점이 논의의 심각성을 덜어주기는 한다. 또한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이같은 메타포에 대한 연구도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즉관법(卽灌法)의 새로운 메시지

예술인류학에서 사용하는 메타포(비유,구조)는 사실 서구적인 학문의 추리, 직관intuition, 실험, 변증법과는 다르다. 오히려 우리네의 전통적인 음양론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상(象)으로 관찰하는 법을 말한다. 즉 觀(取)象法(卽物, 格物)이다. 이것은 서구의 상징주의symbolism와 견줄 수 있지만 같은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직관법에서 나왔다는 편이 적합하다. 그러나 서구의 직관법은 역시 아니다. 가장 직접적인 현상을 포착하는 즉관법이 더욱 적합할 것 같다.

여기서 제기된 즉관법이라는 용어는 예술인류학이 구조, 상징인류학과 결별하는 분기점의 요체가 되는 것인데 즉관법이야말로 정태적인 구조나 상징을 극복, 초월하는 방법이다.

「예술」이라는 단어와「인류학」이라는 단어가 합쳐졌을 때에 파생하는 의미는 이상과 같이 매우 크다. 이것이 왜 한국에서 처음으로 주장되는가 하는 특수성(즉 한국역사, 문화의 특수한 맥락에서)은 더욱 관심을 끄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예술인류학, 사회과학 가운데에서 가장 조서, 연구자의 직관이나 감정이입, 느낌을 인정하고 요구하는 것이, 또한 이에 대한 학문적 자각을 가장 먼저 한 것이 인류학이다.

이를 학문의 방법론 차원에서 단적으로 말하면 주지하다시피 참여관찰participant observation과 민족지ethnography이다. 이것은 20세기 구조인류학의 등장과 함께 에틱에믹 etic-emic 관찰이라는 신 민족지 작성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와 주장으로 새롭게 떠오른다. 어쨌든 구조, 상징인류학은 이같은 배경 위에서 타민족에 대한 엄청난 의식-무의식의 세계를 이해하는 결정적 기여를 했다.

물론 아직도 민족지 작성에「직관, 느낌의 언어적 기록」이라는 딜레마를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며,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술인류학, 새로운 신조어를 만드는 이유

예술인류학은 넓게는 구조, 상징인류학의 전통과 배경 위에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술인류학이라는 신조어를 만드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예술인류학은 구조, 상징인류학의 정태적 분석과 경향에 대해 동태적 분석을 주장한다. 물론 구조, 상징인류학의 탁월한 연구가는 자연스럽게 동태적 분석의 능력을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실은 필자가 주장하는 의도를 이미 알고 있거나 찬동할 수도 있다. 구조, 상징인류학의 이론적 경향과 토대는 자칫하면 언어(또는 개념과 문헌)나 특정 시점이나 공간의 연구결과(구조나 상징)를 조사대상 주민의 대표성으로 고정, 결정화시킬 위험이 많다.

특히 가장 주목되는 점은, 구조, 상징인류학은 인간의 지각이미지의 역동적, 통합적 성격을 특정 감각이나 언어로 제한(또는 환원)함으로써 그 본래의 면모(언어와 지각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 하는)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예술인류학의 연구결과도 구조나 의미분석을 위해서는 구조, 상징인류학의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예술인류학의 학문과 예술의 변경적marginal 성격이 상기된다. 예컨대 인간의(예술가의)자유분방한 느낌이나 기를 언어나 상징으로 잡는다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또 학문은 종국에 가서는 연구자의 언어로 기록되어야 하는 이중의 숙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정은 더욱 악화된다. 그러나 인류학의 연구가 자민족을 대상으로 할 경우 위의 딜레마는 약간 약화된다.

자민족 연구의 새 지평을 위하여

왜냐하면 자문화의 경우 엄청난 느낌의 교환이 가능하고 지각이미지sence image의 활발한 교환(예컨대 소리, 언어, 이미지의 상호전이)이 타민족문화 연구에 있어서보다는 보장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인류학에서 예술인류학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를 한국의 역사(생활의 규범으로서의 역사)에서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생활의 규범으로서의 역사라는 차원에서 논의해 보자.

생활의 규범으로서의 역사라는 관점은 사실 전통적 의미의(시간의 축을 따르는)역사라기보다는「역사 속의 변형되는 구조」라는 측면의 논의이고, 실은「일상생활 속의 구조」와 백을 같이한다.

사실 신선사상에 대한 얘기는 한국사람이라면 가장 친근하게 어릴 때부터 들어온 것이다. 옥황상제니, 바둑 두는 신선의 이야기, 선녀의 이야기......등을 들어보지 않은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이들 신선이야말로 은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이 은자의 일반사람과 격리당하거나 스스로 격리되어 사는 사람들인데 이들이야말로 가장 느낌에 의해 살았던 존재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느낌에 의해 사는 사람들은 사실 매우 우주의 구조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즉 보통 인간들이 그 구조속에서 삶을 영위한다면 은자들은 구조 위에서 구조를 즐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네 전통은 이들을 보통사람의 삶과 이분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공동체 정신의 발로인지는 모르지만 보통사람이 이들을 장에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물론 서양에서도 예외적인 사례로 우리와 비슷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심적인 흐름이 아니다. 어쩌면 서양에서는 그러한 은자들이 수학자나 절대성을 가진 종교적 인물(메시아)의 형태로 수용된 경향이 강하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신선이 따로 있나, 무당이 따로 있나, 신내리면 그만이지

우리네 전통에서는 보통사람의 생활 깊숙이, 이질감이 별로 없이 은자들이 공존했다. 예컨대 서양에서는 「성(聖)과 속(俗)」의 철저한 이분법이 이루어졌지만 우리네는「성과 속」이 한데 어우러졌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일부 학자는 우리네 종교현상을 위의 이분법에 의해 설명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설명의 편의나 분석을 위한 것으로 인정해야지 사실, 사건, 사태 자체가 그렇게 존재했다고 보는 것은 엄청난 오류이다. 바로 이것이 구조분석의 한계상황, 함정의 대표적 예이다)

어쨌든 우리네는 은자를 일상생활에서 수용했다. 그런데 그 은자들은 일상에 참여함으로써 엄청난 드라마를 우리의 역사속에 연출했던 것이다. 그 은자는 우리의 역사구조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그 은자의 정체가 우리 역사를 지금까지 이끌어왔으며 이에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적극 동조했던 것이다. 역사의 위기 때마다-.

아마도 이같은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이 논의는 예술인류학의 방법론에 대한 정합성의 배경을 위해 서술되는 것이지 신선사상 등 각종 전통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나 연구 취지의 글은 아니다)

우리 역사상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샤머니즘인데 샤머니즘은 보통사람과 영적인 세계와의 중개자로서 일종의 제도적 모습을 갖춘 점이 신선사상과 다르다. 그러나「깨달은 자」의 맥에 이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제도적 차원이라는 것은 이미 샤만이 특정의 영과 구속된 교류관계를 갖고 있거나 보다 제도화된 사회의 지위(예컨대 왕이나 제사장)를 가진 것을 뜻하는데 그런 점에서 신선보다는 더 세속화된 형태이다.

화랑도와 수도승 그리고 화정(和정)→교선(敎禪)→이기(理氣)

현상적으로 볼 때 신선은 「우주구조의 극단적인 즐김」이지만 샤만은 「강신(降神)」의 형태를 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화랑도와 수도승, 선비(양반), 각종 연희자에서 그 은자의 맥을 찾아볼 수 있다. 화랑도의 세속오계, 원효의 화정사상, 퇴계, 율곡의 이기사상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점은 계(戒), 정(정), 교(敎), 이(理)를 중시하면서도 항상 그 무예(武藝), 화(和), 선(禪), 기(氣)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전자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즐기는 여유를 잃지 않고 언어보다는 몸이 갖고 있는 비언어적 언어를 보존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한국이 오늘날도 가장 풍부하게 그 전통을 잔존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 풍류를 좋아함도 그 탓이고 역사적 드라마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이다. 한국에 철학이 있는가? 하고 반문할 飁 흔히「철학은 없고 철학사상만 있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 철학의 언어적 제약을 뛰어넘은, 말하자면 어떤 철학, 종교도 수용할 수 있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철학의 언어적 의미구조를 즐길 수 있는 여력, 능력이 한국인에게 있었기 飁문에 이같은 연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인이 가장 심도있게 이것을 발견, 인식했다는 주장도 성립될 것이다. 한국인에겐 역사란 하나의 드라마, 연행(演行, performance)적 성격을 가졌던 것이다.

태권도 붐, 주류 소비량과 풍류, 학생들의 실천운동, 「하면된다」, 한국학, 예술 붐......

이같이 드라마적 성격의 역사는 기실 몇몇의 뛰어난 지도자에 의한 역사의 진행이라기보다는 역사 속의 숨은 주체인 보통사람(대중)들이 그 드라마 속에서 맡은 역할을 잘 수행했다는 얘기가 된다.(지도자<대중). 오늘날 서구문화와의 극심한 문화접변과정에서도 우리의 정체를 지키고 연행을 계속하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이 문화현상 곳곳에서 보인다. 예컨대「태권도 불」이나 「주류 소비량과 풍류」,「학생들의 실천운동」등도 이 자리에서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모두 앞에서 열거한 역사구조와 맥을 같이 한다. 「경제발전(「하면된다」,「잘살아보자」)」이나 「민족(토착)종교운동(종교복합현상)」, 그리고 「한국학, 예술붐」도 마찬가지이다. 즉 학문과 예술, 종교, 생활 속에서 그것은 면면히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그것은 면면히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생활 자체가 그럴진대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그런 전통을 찾는 것은, 특히 예술분야에서는 매우 쉬울 것이다.

인류학사적으로 볼 때도 유, 불, 선에 대한 연구붐과 샤머니즘에 대한 연구의 집적이 특히 이미 민속학(한국학)분야에서 이루어져왔고 이러한 전통 위에서 인류학, 특히 구조, 상징인류학의 토착화된 형태로 예술인류학의 등장이 내적 필연성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과 같은 드라마적인 역사 속에서 「생활의 규범으로서의 역사」를 설명하는「이론적 틀」을 마련해야 하는 시대적구조의 다양한 변이, 변환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거의 직관과 느낌에 의존하면서 구조의 수많은 구조의 수많은 변형을 미리 염두에 두면서 접근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예술의 방법화, 예술적 접근방법의 방법론화

따라서 예술인류학은 결국 구조, 상징(언어)보다는 느낌을 우선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끝으로 다시 말하지만 예술인류학이 흔히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그 속에서 문화의 문법과 그 변형을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예술작품도 예술인류학의 연구대상이 됨은 물론이다. 그러나 예술인류학은 어디까지나 연구대상보다 예술의 방법화에 있다. 그리고 예술작품보다 「보통사람의 삶」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 핵심은 비유로, 그 비유를 문화 속에서 찾는 일이며 이것은 크게는 문장이나 문화의 구조분석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의미를 읽기 위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 가운데서도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시키고 촉발하여 각 민족마다 특유한 기의 형태와 운동을, 기질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어떤 점에서 학문은 이 메타포를 하나의 결정론이나 구조에 얽매는 작업이며 그것의 가장 보편적인 표현물이 문장이요, 좀더 논리적인 형태를 띠는 것이 논문이다. 또 그것의 집단적 타성태가 제도이다. 예술인류학은 이 타성태를 해체하고 구조적 의미를 밝히는, 즉 구조적 의미복합체를 해명하여 공명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역동적 장(場)의 개폐(開閉) DSCO 모델과 대대적(對待的) 인지구조 BSTD 모델

예술인류학의 연구모델이며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 문화로서의 우리 문화에 대한 연구모델이 「역동적 장의 개폐이론」이다.

역동적 장의 개폐이론을 설명하기 전에 이미 알려진 기존의 한국문화의 연구모델과 비교를 먼저 하고자 한다. 그런 후면 자연히 이 모델(이론)의 면모를 터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론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이에 가장 유사한(접근되어 있는) 인류학적 모델인 강신표 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의 「대대적 인지구조(對待的 認知構造)」나 「집단, 급수, 의례」모델로 구체화되고 있는 그의 「시간과 공간의 이원적 장치의 상호교환의 변증법적 호혜성」즉 BSTD모델과의 비교가 될 것이다.

B S(T) D 對 DSCO

T(S)

두 모델을 가장 단적으로 비교하면 DSCO는 「일원적, 기이」의 입장이고 BSTD는 「이원적, 이기」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DSCO는 「선(先)동태론 후(後)정태론」, BSTD는 「선정태론 후동태론」의 입장이다. 표4을 참조하면서 논의를 계속하자. 두 모델의 차이는 예컨대 그 모델이 어떻게 활용되느냐의 차이에 따라 입장이 역전될 수도 있는 미묘한 것이다. 도대체 일원적이냐, 이원적이냐? 이(理)냐, 기(氣)냐? 동태론이냐, 정태론이냐? 는 이미 적어도 언어적으로 상대개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실은 같은 모델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호경향과 뉘앙스의 차이는 있다.

대대적 인지구조/역동적 장의 개폐이론

대대적 인지구조는 관념적 코드conceptual code 또는 의미소를 존재being의 형태로 규정하는 반면, 역동적 장의 개폐는 생성becoming으로 보고 있다. 물론 코드나 의미소자체를 역동적으로 볼 경우 이와 같은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그렇지만 전자가 의미를 마치 사물처럼 취급하려는 언어의 특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후자는 언어적 경향에 계속 반발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즉 장(場)이 닫힘(閉, closed)상태에는 언어적 입장 열림(開, open)상태에는 기의 입장에 선다. 그러나 마음의 원초적 형태는 오히려 기의 상태로 있기 때문에 열림상태가 우선한다. 즉「폐쇄적 체계, 개방적 마음」이다.

일원적 이원론(이원적 理氣. 이분법)/이원적 일원론(일원적 氣理. 이진법)

앞서의 기술에서도 파악할 수 있듯이 BSTD는 시간과 공간을 이원론으로 보고 그것의 동적 관계에서 일원론의 표현형으로 개, 폐상태라는 이원적인 것을 취급하고 있다. 전자를 이분법(+, -, 0), 후자를 이진법(+, -, 0)이라 한 것은 이분법과 이진법이 모두 구조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분법은 분석적 입장, 이진법은 역동적입장임을 나타낸다.

언어(구조), 사물/비언어(상징. 氣)

BSTD는 언어를 구조화하려고 하고, DSCO는 느낌의 세계를 언어화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의 표현형이「비언어의 상징화」이다. 반면에 BSTD는 「상징을 언어화」한다. 이것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호작용과도 연결된다.

의미구조/의미작용

BSTD는 지각이미지를 정태적, 분석적, 단편적으로 보는 반면 DSCO는 동태적, 종합적, 포관적으로 지각이미지를 보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즉 전자는 의미구조에 치중하고 후자는 의미작용에 치중한다. 전자가 구조에서 기능을 발견하는 반면 후자는 기능에서 구조를 유추한다.

일상언어, 문법/비언어, 상징

BSTD는 언어의 사물화 경향 때문에 언어를 구성케 하는 문법의 발견에 치중하고 DSCO는 비언어의 상징체계를 발견하는 데에 관심을 집중한다. 전자는 따라서 일상언어나 문헌, 문예물을 연구대상으로 하고 후자는 행동, 실천, 연행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하기 쉽다.

텍스트/컨텍스트

따라서 BSTD는 의미구조, 체계를 텍스트화(일종의 변형생성문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DSCO는 텍스트를 컨텍스트화함으로써, 즉 의미작용을 동태적으로 둠으로써 지각이미지를 생성구조(일종의 변형생성구조)로 파악하려고 한다.

선(先)정태적 후(後)동태적 모델/선(先)동태적 후(後)정태적 모델

이상의 기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초적으로 BSRD는 정태적 모델, DSCO는 동태적 모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입장의 문제 또는 차원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전자도 변증법적 호혜성을 표명하고 있고 후자도 기의 결정성이 높은 폐(閉)상태closed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이미지(氣素)

BSTD는 따라서 지각이미지를 관념화(개념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DSCO는 관념과 이미지의 상호작용,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지각이미지의 전이transition에 치중한다. 그리고 DSCO는 기소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있다.

환유metonymy/비유metaphor

이러한 경향 때문에 BSTD는 환유에, DSCO는 비유에 지각이미지를 끊임없이 소속시킨다. 이것도 정태적 모델, 동태적 모델과 마찬가지로 입장이나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환유도 비유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관념적 코드conceptual code가 바로 비유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음양의 구조적 운동/음양의 전자기(파)적 운동

결국 BSTD는 언어적 경향 때문에 음양의 구조적 운동을 한다고 말할 수 있고 DSCO는 비언어적 경향 때문에 음양의 전자기(파)적 운동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전자기(파)적이라 함은 단순히 물리적인 전자기법칙이라기 보다는 보다 폭넓은 지각이미지의 느낌 또는 상호교감을 말한다. 말하자면 구조적 교감도 내포하고 있다.

이성(理性)/상상력(신내림)

그렇다면 이같은 모델의 근본적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BSTD는 이성이고 DSCO는 상상력이다. BSTD는 「이성→구조」로 DSCO는 「상상력→이미지」로 향하고 있다. 또한 DSCO는 신내림을 포용하고 있다.

구조(상징)인류학/예술(상징)인류학

BSTD는 결국 기존의 구조인류학적 전통 위에 성립되어 있고 예술인류학은 그러한 전통을 기초로 느낌이나 비언어의 커뮤니케이션 쪽으로 문호(마음, mind)를 열어놓고 있다.(폐쇄된 체계<열려진 마음)

이상이 예술인류학이고 구체적인 모델로 제안한 DSCO모델에 대한 지극히 편의적이고 효율적인 논의이다. 지금까지의 논의과정에서 편의상 개념들이 예컨대 언어와 비언어 또는 이(理)와 기(氣)가 마치 이분화된 것처럼 일견 오해토록 된 것은 이 글이 어쩔수 없이 언어로 기술됨에 따른, 즉 순차적인 개념조작을 위한 방편임을 밝혀둔다.

필자는 이분화된 것들이 실은 매우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앞장에서도 언급했지만 DSCO모델은 동태적인 것을 우선하기 飁문에 정작 대상을 분석하는 데는 약점을 가진다. 이는 BSTD모델이 정태적인 것을 우선하기 飁문에 「변증법적 상호호혜성」을 나타내는 「D」를 설정한 것과 정반대의 상황에 직면하여 「C」를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DSCO모델은 역동적 장을 분석하기 위한 수직과 수평의 축, 다시말하면 좌표의 개념이 필요하며 이것은 역동적 장의 닫힘상태에 해당한다. 그러나 역동적 장은 정지된 축이 아니라 방향성을 갖는 축을 상정하고 있기 飁문에 필연적으로 수직과 수평을 통합, 본래의 동태적인 장으로 대상을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역동적 장의 열림 상태라 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DSCO모델의 닫힘상태 즉 표2의 수직, 수평모델은 BSTD의 이원적 상태를 나타내는 「공간, 시간」에 해당되고 DSCO모델의 변증법적 상호호혜성의 상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BSTD모델과 DSCO모델을 대입하면 BSTD의 공간=DSCO의 수직, BSTD의 시간=DSCO의 수평, BSTD의 변증법적 상호호혜성=DSCO의 수직, 수평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관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BSTD모델은 이(理) 철학에서 출발하여 대상의 본질에도달하고 있고 DSCO는 기(氣)철학을 바탕으로 대상의 본질에 도달하고 있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DSCO는 BSTD의 T, 즉 시간을 제외시킨 점이다. 필자는 ▶수직, ▶수평, ▶수직, 수평(圓) 모델은 인간의 심리에서부터 사회,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원형적 모델로 일반화할 뜻을 갖고 있다.

「집단, 급수, 의례」대 「상징, 의례」

강신표교수가 인지인류학적 차원에서(사회, 생태적인 영역도 포함하고 있지만)제안한 가설「BSTD」이론을 사회인류학적인 영역으로 확대하여 경험적 차원으로 보다 구체화한 「집단, 급수, 의례」모델은 필자의 「상징, 의례」모델과 정반대 방향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모델은 확연히 갈라선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연속체continuum 상에서 만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 단지 교수는 「급수」라는 기존의 위계체계를 우선하고 그같은 기존 질서가 「의례」에서 전도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존의 위계질서를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 따라서 항상 변하고 있으며 변화를 종용받고 있다는 입장이다. 상징은 기존구조를 변화시킨다.

즉 강신표교수는 구조주의자의 입장이고 필자는 상징주의자의 입장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상징은 구조를 생산(또는 재생산)하고 있으며 그것은 언어적인 것 뿐 아니라 비언어적(신체적)인 의례로 나타난다.

강신표교수는 구조의 한 변형(돌연변이)을 의례로 보는 반면 필자는 상징의 한 표현형으로 구조를 보고 있다.

또한 구조는 매우 의식적인데 반해 상징은 무의식적인 성격이 강하다.

3. 기(氣)철학과 신과학new science에서 본 예술(상징) 인류학

여기서 기(氣)철학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기(氣)철학적 입장이 적어도 인류학에서는 어떻게 활용되느냐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기(氣)는 확실히 인간의 사물에 대한 언어(이해구조)를 파괴, 생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류학에서는 이것을 감정emption, 욕구need, 정서sentiment, 느낌feeling 등으로 이해한다. 또는 최근에는 실천praxis이나 연행performance의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예술(상징) 인류학은 확실히 이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각이미지를 통합하여 동태, 포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구조인류학이 구조언어학의 전통위에서 음성sound을 음소(音素, phoneme), 형태소(形態素, morpheme) 등으로 묶어 최소한 영속적인 의미를 갖게함으로써 종국에는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것과 사실 반대방향을 갖고 있다. 즉 지각이미지를 원초적인 기(氣)의 형태로 파악하려 함으로써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구조=개념화, 의미작용=상징화

언어는 인간의 신체와 사물의 원초적인 교감을 왜곡시키거나 은폐시키는 작용을 한다. 언어의 사물에 대한 우위는 문자문화권의 오랜 전통에 기인하는 것인데 흔히 인간이 본래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예술인류학은「의미구조=개념화」라는 종래의 등식을 「의미작용=상징화」로 확대하고자 하는 기도를 함의하고 있다. 기의 한 형태인 소리를 언어로 환원시키는 것을 구조언어학, 구조인류학이 밝혀냈으나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인류학은 언어를 다시 기로 환원시키는 작업, 또는 기의 상태에서 파악함으로써 보다 많은 상징, 의미구조를 통합적인 차원에서 발견할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우리 전통문화에는 정, 기, 신의 개념이 있다. 적어도 이 가운데 기의 개념은 서양문화권에는 생소한 개념이며, 굳이 대응시킨다면 에테르 또는 에너지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딘가 기계적 우주관이 냄새가 난다. 기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기계적 우주관이 아닌 생성적 우주관의 산물이다.

기는 모이고 흩어진다. 즉 취산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한히 역동적으로 교환관계를 이루는 우주의 본원적 세계이다. 기를 논할 때는 우선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서양철학에선 아직 기 개념이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서양철학의 용어로 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인도철학의 공의 개념이 기의 개념으로 통하는 중간개념이다. 즉 서양철학의 유개념과 동양철학의 무개념을 연결하는 개념이 공개념이라는 뜻이다. 다음의 표를 참조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有←物. 心←空間(空+時間)←空(構造)→空氣→氣(無).

위의 표에서 공과 구조가 만나고 있다. 서양의 구조주의가 후기구조주의에 이르러 「구조는 텅 빈 것이다」라는 것으로 발전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따라서 서양의 구조라는 개념은 동양의 기와 통하는 개념이다. 예술인류학이 기철학의 토대 위에 서양의 구조, 상징인류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이를 토착인류학의 한 모색으로 필자가 상정하고 있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즉 기철학과 구조, 상징인류학을 통합함으로써 예술인류학은 그 학문적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구조주의가 구조언어학에서 체계화되고 구조인류학으로 확대 발전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구조언어학의 가장 큰 업적은 음의 자기완결적 독립적 체계를 바탕으로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등으로 언어가 조립,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밝힌 점이다.

코드. 문법. 텍스트. 메타포. 상징. 기

하나의 언어는 선택된 음phone을 기초로 하고 있고 두 개 이상의 단음이 조합되어 의미가 부여된다. 이것을 부호화(기호화)과정이라고 한다.

부호화는 다시 말하면 코드화인데 자연과학이란 이 코드의 한 면만을 시각에 의지해서 연결하고 텍스트화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 시각은 현미경이나 망원경에 의해 연장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부정하는 게 자연과학의 특성이다. 인문과학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말로 표현된 것은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두 가지 학문적 전통-언어, 보이는 것-에 의지해서 소위 과학 해 온 것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구조주의적 학문적 전통이 인문과학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명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코드의 양면성을 밝히고 코드를 컨텍스트화 함으로써 코드의 이분법이 사실 결정론적인 성질의 것이 아님을 입증한 셈이다.

코드도 관계 속에서 유의미하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타포이다. 따라서 예술인류학은 인문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던 예술적 표현물들이 이제「대상이 아닌 수단」으로, 즉 코드로 전환됨을 뜻한다. 즉 이는 표현으로서의 예술이 아닌「방법으로서의 예술」을 뜻한다. 코드와 메타포는 서로 중층적 구조를 이루며 상호작용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생성적 우주관은 비유metaphor 즉 시(詩)적 언어 속에 유지되어 왔다. 이 시적 언어(상징언어)는 잊혀진 채로 사실언어에 봉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시적 언어, 상징언어를 위해 사실언어는 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만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한다.

시적(상징)언어는 단순한 언어적 창작물이 아니고 생성적 우주의 구조적 반영이었으며 이를 역원적(逆源的)으로 고찰하기 위해서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n의 문확사회학의 발생적 구조주의나 리꾀르Ricoeur의 현상학적 해석학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안된다.

초월적 언어metalanguage의 마술사

예술인류학자는 이「시적(상징)언어」를 역사 속에서 찾는「지식(상징)의 고고학자」이다. 예컨대 이 고고학자로서의 예술가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초월함으로써 사회적 연관성(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을 드러내 보여주게 된다.

예술인류학자들이 다루는 상징들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것이며 초시공적(超時空的, 시간과공간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미래)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상징이란 비행기를 타고 역사를 즐기는 여행가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 상징을 대상으로서 고정시킨다면 고정시킨만큼의 상징만을 볼 수밖에 없다. 이는 상징의 표현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상징>언어) 언어의 표현으로서의 상징 (언어>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의미를 함의하는 것이라면 상징은 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을 통해 실은 기의 역사적, 현재적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인류학은 이 기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며 사실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우주의 교감의 세계를 예술적 언어 즉, 메타포로 설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언어 이전의 우주는 어떻게 기능한 것일까. 우주는 매우 메타포리칼한 세계이다. 언어 이전의 세계는 개방된 마음open mind만이 아니라 개방된 세계open physics를 가정하고 있으며 우주 만물이 하나로 통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어떤 결정론이나 타성적인 구조나 제도, 그리고 일정한 텍스트가 없는 세계이다.

단지 인간은 우주 속에서 마치 항해를 위해 나침반을 만들 듯 텍스트를 만들었을 따름이다. 삶의 방편으로서-. 우주가 바다라면 텍스트는 나침반에 불과하다. 나침반은 항해를 도울 수는 있어도 바다가 되지 못한다. 나침반은 인간이 알고자 하는「남과 북」을 가리켰을 따름이다.

라이프니쯔의 단자(單子), 기(氣) 철학의 기소(氣素)-사방에 유리창 없는 물체, 사방에 유리창 있는 물체

예술인류학은, 기존의 인문과학이 소위 과학의 입장에서 예술을 본 것에 반해 예술의 입장에서 과학을 보며 이를 종교에 연장시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과학의 대상이 되던 예술이 이제 수단이 되어 과학과 종교를 향하고 있는 셈이다.

표5는 기존의 과학(학문)체계와 신과학체계를 비교하고 이러한 체계 속에서 예술인류학이 어떻게 양 세계를 통합하는가를 도표로 간략하게 표시한 것이다.특히 신과학의 입장에서 기소라는 새 용어를 필자는 사용했다. 기소란 라이프니츠가 단자를 「사방에 유리창이 없는 물체」를 가상하여 개념규정한 신용어이다. 따라서 기소는 마이너스 단자의 의미를 갖고 있다.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생성적의 세계를 위해서는 기소라는 개념이 유용하리라고 본다. 기철학적 우주관은 이 기소가 가득 차 미분, 적분, 취산하는 세계일 뿐 아니라 무한히 교환되는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표6은 과학과 종교의 특성을 극도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좀더 쉬운 말로 즉 대중적 용어로 표현하면「코드와 메타포」대신에「거울과 가면」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라는 말은 다름아닌 사물의 거울성을 강조하고 예술은 사물의 가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과학은 사물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노력을 하고 예술은 사물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여러 겹의 가면이 있음」을 암시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거울은 가면의 한 역할, 가면은 거울의 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와 상징의 관계를 말함이다. (코드=언어=환유=거울, 메타포=상징=가면) 상징은 언어와 기의 변증법적 역동관계의 산물이며, 따라서 상징을 언어적 맥락에서 해방시킨다면 상징을 통해 기를 추적할 수 있으며 상징은 기소의 캡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language↔ 상징symbol ↔ 氣)

상징을 텍스트로서 구속시키지 말고 컨텍스트로 해방시키면 기가 샘솟는다.

이것을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로 바꾸어 말하면, 상징(구조)을 텍스트 속에서 구속하지 말고 컨텍스트로 해방시키면 기(氣)를 느낀다는 말과 같다. 우주는 컨텍스트의 연속이다. 단지 인간은 역기서 텍스트를 찾을 뿐이다.

「예술」이라는 말을 인류학의 접두어로 사용한 것은 이밖에도 사실 모든 기존의 학문에 대해 도발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인류의 문명사를 볼 때 어쩌면 그 문명사는 「종교 또는 예술에서 학문으로의 길」이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학문이라 함은 물론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그 중간적 존재인 사회과학도 포함한다. 이 학문의 길은 물질에의 복종, 재구성(자연과학) 또는 그것에의 뒷받침(물질주의, 유물론)이 아니면 언어에의 환원reductionism 또는 환류feedback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 부단히 인간의 본성을 외쳐온 부류의 인간이 이름하여「예술가」라는 존재이다. 이 말은 우리의 잃어버린 본성을 오늘에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예술가이며, 각종 예술적 형태(또는 작품)에서 우리는 본성을 되돌아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통한다. 이러한 예술과 학문의 갈등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분야가 사실 사회과학 분야이다. 사회과학의 제도institution 연구는 사회적 언어 연구를 말함이며 그 사회적 언어가 어떤 주기나 체계(구조) 또는 여러 형태의 변형으로서 존재하며, 변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고 그 제도의 변화의 원동력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렇게 선명한 결론을 얻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에 예술인류학은 예술 그 자체를 특정의 예술작품이나 예술가에게만 전유물처럼 관련짓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편적 삶의 방식」으로 보편화, 일반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보통 인간의 삶, 그 황홀한 예술

부연하면「보통사람들의 삶」자체를 예술의 입장에서 연구, 이해하다는 뜻이 된다. 이는 학문과 예술과 종교를 「인간화」하는 매우 인간중심주의 경향을 깔고 있다.

예술인류학은 앞에서 언급했지만「기철학적 입장」을 깔고 있다. 이 말은 언어적 언어를 비언어적 언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것을 뜻하며 사물을 소위 객관화한다는 미명하에 언어로 환원시키려는, 또는 언어를 사물화하려는 끊임없는 과학적 노력에 대한 시니컬한 비난도 섞여 있다. 이것은 성(性, 몸)을 언어(제도. 이데올로기)로 구속해 온 문명사에 대한 도전이며, 성에 대한「구속」보다는 이에 대한 보다 적절한「조절」이 바람직하다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다. 그 조절은 매우 자유주의적인 의미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의 구속보다는 성의 표현으로서의 언어의 중층적 각 단계(여기서는 비언어적 언어를 언어에 포함한다)를 해방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이것은 문명사의 방향과 반대방향이다. 예술인류학은 구조와 상징의 의미를 동태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4. 「한」철학과 예술인류학

총체성과 방법론의 모순

근대 학문이 서구문명에 의해 주도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근대학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그 분석적인 능력에 있으며 그것은 또한 기하학적인 것에서 함수적인 것으로의 이행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이행과정은 정태적인 분석에서 동태적인 분석이라는 특징을 보이는데 비록 정태적인 이분법에서 출발한 서구문명이 동태적인 우주를 잡으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학문은 실체론적 수학이나 존재론적인 철학, 진화론 등 종국에는 물리학적인 환원으로 특징 지워지는 데 이러한 업적들을 결국 자기가 쪼개어 놓은(분석한) 사물(사실)들을 원모습대로 돌려놓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편의(수단)는 달성했어도 진리(진실)는 왜곡하거나 한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고마는, 잘못된 해부학의 미봉책에 불과했던 점이 많다.

이같은 맹점은 인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인류학이 인간을 연구하면서 그 장르를 문화와 체질로 나누는 전략을 택했어도-그 하위분야는 더욱 많이 나누어지지만-그것을 끝내 통합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문화는 학습에 의해 전해지고 체질은 유전에 의해 전해지며 전자는 후천적이고 후자는 선천적인 것으로 만족해야할 것인가.

양자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궁극적으로 존재하는가를 동태적으로 파악하는 길은 없을까. 계급적 대립이나 성의 대립, 문화적 지배, 종속 등 전반적으로 제국주의적 생존경쟁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

실제로 인간은, 세계는, 우주는 우리가 보는 대로 운행되고 있는가. 대상은 어떻게 있든 보는 만큼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가「보아온 것을」그대로 「있는 것으로」등식화해도 문제는 없지만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보는 것도 현 학문적 딜레마를 푸는데 유의미할 것이다.

현대인은 분석하는 힘에 의해 많은 편의와 혜택을 누려왔다. 그러나 분석이 만능은 아니다-특히 행복은 그러하지 못하다. 적어도 상호보완적인 입장에서도 처음부터 분석보다는 사물을 관계로 묶고 생성적으로 보는 학문적 혁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는 것을 나누는 방법보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 내재하는 것의 변화를 해석할 수 있는-이런 점에서 동양의 역이 대표적인 자리를 확고히 굳히고 있지만-방법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모든 학문의 이면에는 철학이 존재하고 있다. 근대학문이 위와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것은 서양철학의 인식-존재론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분석철학과 현상학이, 전자는 객관성을 후자는 안에서 본질을 찾는, 철학적, 문명적 괴리를 보이는 것이 적나라한 예이다-이것조차 포용하는 「통합」의 철학이 요구되고 있다.

「한」철학

인류학은 문화를 총체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총체적인 것을 총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위한 철학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신축성있는 철학의 모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존재(론)와 생성(론)을 한꺼번에 포용할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

「한」철학은 아직 국내에서 조차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용어의 어원까지도 토착적인 것으로-예컨대 이기철학은 전통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삼국에서 유행한 것이다. 그러나「한」철학은 한국만이 철학이라는 점에서-그 개념의 탄력성이 매우 높다.

「한」은 우리문화의 정체성identity을 논할 때 쓰이는 말이다. 예컨대「한」은 한국, 한겨레, 한글, 한식, 하느(나)님, 한얼 등 국가 민족 사상, 그리고 생활전반에 걸쳐 「한」은 우리 문화의 원형(원리)로 작용해왔다. 「한」은 한문으로 韓, 漢, 汗, 旱, 寒 등 여러 가지 글자로 표기된다.

「한」의 사전적 의미는 - one, 多 many, 同 same, 中 middle, 不定 about 등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한」은 따라서 확정성과 불확정성을 동시에 포함한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종래 학문(철학)이 확정성을 치중한 것을 감안 할 때(확정성을 내포한) 불확정성을 그 특성으로 한다.

이것은 매우 상황적인 것을 뜻할 뿐 아니라 탄력적인 개념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연과 더불어 매우 적응적adaptive 이었으며 적응의 전략을 상징적symbolic인 차원까지 끌어올렸다.

상징과 적응symbol and adaptation 은「한」을 통해서 하나oneness의 우주상을 구현했던 것이다.

「한」은 일(一)과 다(多)로 대변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이면서 둘인 어떤 것을 가정하게 되는데 우리의 전통철학 중에는 저 유명한 이기(理氣)논쟁도 여기에 속한다.

이(理)는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반면 기(氣)는 그것을 부정한다. 이(理)와 기(氣)는 그래서 끊임없는 물고 물리는, 서로가 내포하는 자기생산을 한다. 생물학에서 DNA의 신비스런 자기복제도 이와 유사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자기완결적 체계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존재적인 것에, 기는 생성적인 것을 대변함으로써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다. 「한」은 양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완성체(원형)이며 그 변형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다원다층의 음양학

기(氣)를 이(理)로 표현한 가장 완벽한 체계는 우리가 흔히 접한 음양학이다. 그것은 태극(太極)으로 표상되기도 했다.

음양은 끊임없이 변천을 할 뿐만 아니라 사물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매우 편리하다. 그래서 관계를 즐기고 추구하는 학문이 파생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다원적이고 타층적인 음양관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원다층의 음양학은「관계」를 치중하면서 동시에 「실체」를 논함으로써 「안과 밖」의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 앞에서 예를 든「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신화학」,「커뮤니케이션 인류학의 신화학」이었다.

우리는(한국인은) 사물이나 사건(행위)를 상징으로 바꾸는 데 명수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실체가 있지만 그것은 쉽게 상징으로 변하고 태극은 소용돌이, 나아가서 순수한 힘의 표시로만 남는다. 이러한 힘의 표시는 때로는 정치적 파당을, 때로는 무질서로-이것은 부정적인 경우이다-때로는 상부상조로, 때로는 화평으로-이것은 긍정적인 경우이다-나타난다.

전자가 부(負, -)의 페스티벌, 후자가 정(正, +)의 페스티벌의 한 예이다.

예술인류학

페스티벌은 인류학에서 상징-의례symbol-ritual 분야에서 많이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언어(상징)와 행위(의례)를 동시에 포함한다.

인간의 활동은 주로 언어나 상징으로 나타나고 활동의 원동력은 기운(氣運)이며 그 대상은 사물이다. 그런데 근대학문은 주로 언어중심이었으며-상징조차 개념이나 결정적인 언어로 고착되기 일쑤였다-언어는 시가의존에 의해 사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개념이나 언어에 대한 절대권의 부여는 인간의 지각이미지 과정을 무시한 처사이다. 언어보다는 이미지가 훨씬 본질적이며 이미지는 더욱이 통각적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신체를 총체적으로(머리를 몸과 분리하는 잘못된 서구의 관습과 달리) 본다는 점에서(나아가서 총체적인 문화= 생활을 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이접도 갖추고 있어)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적 노력이 기대되고 있다.

이미지를 다른 말로 하면 상징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사물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각이미지는 서로 통합적 매커니즘을 우리 신체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 신체 속의 매커니즘은 현재 완전히 해명된 것은 아니지만 제 감각의 관계는 매우 상징적인 것엠에 틀림없다.

따라서 필자는 표7에서와 같이 언어, 상징, 사물, 기라는 네가지 변수를 설정하고 이들의 관계가 「한」철학의 특징인「蝡이면서」의 관계양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정했다.

즉 언어, 상징, 기, 사물이 「언어 ↔ 상징 ↔ 기 ↔ 사물」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이들 변수들은 매우 역동적이며 이것은 표7의 중앙에 태극문양으로 표시되고 있다.

예술인류학은 또한 과학(학문), 예술, 종교를 네가지 변수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이들을 통합적으로 보고자 한다. 마치 지각이미지를 통합적으로 보듯이-.다시말하면「문화(생활)=지각이미지=학문,예술,종교=인간」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킴으로써 인간의 진면목을 전인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예술은 언어와 상징사이(④영역), 과학은 언어와 사물사이(③영역), 종교는 사물과 기(氣)사이(②영역)에 존재한다.

그러나 표7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의 영역이다. 신(神)은 상징과 기(氣)사이에 속하는데 기(氣)가 사물처럼 되는게 종교라면 기가 상징으로 나타나는게 신의 영역이다. 전자가 「죽은 신」을 말한다.

이러한 네 가지 변수를 한 몸에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당shaman이다.

특히 ⸁의 영역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무당의「빙신posession」인데「신(神) 지핀다」,「신들린다」등으로 표현된다.

그들의 주문, 굿ritual, 신내림의 세 요소는 언어, 상징, 기에 해당하며 이것이 그들의 몸에서 통합되어지고 어떻게 반응관계에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준다. 예술인류학은 과학(학문)절대주의에서 예술, 종교 -여기에서 신이 가장 문제가 된다- 의 시민권 확보 또 독립선언, 나아가서 주도권 주장을 의미한다. 즉 과학과 신의 자리바꿈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과학자라기 보다는 무당이다. 예술인류학은「문화의 무당론」또는 「무당의 커뮤니케이선」을 추구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예술인류학은「커뮤니케이션 무당론의 신화학」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한」철학과 결부시키면「커뮤니케이션 한의 신화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라는 총체성, 인간이라는 전인성은 「한」에 의해 그 기본철학(원리)를 마련하고 예술인류학으로 추구되는데 끝내 찾아낸 신화적 원형은「음양(태극)」,「음양의 조화」이다.

5. 한마당(철학)론

결론과 새로운 제안

지금까지 예술인류학의 기본이 되는 철학과 방법론, 나아가서 모델(패러다임) 제시를 통한 사례연구를 살펴보았다.

또 예술인류학의 생성배경이 된(한국)문화와 비교문화론, 문명사적 관점에 서 본 예술인류학의 등장의 당위성을 고찰했다.

앞서 기술된 내용중「역동적 장의 개폐이론」DSCO과 「한철학」은 특히 예술인류학이 지향하는, 단적으로 말하면 축제적 성격의 문화, 축제로서 진행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문화를 설명하는 훌륭한 틀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DSCO이론은「역동적 장」의「장」, 즉 공간space에 역점을 두고 시간time을 공간에 포함시켜버린 것이다. 반대로 「한철학」의 「한」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장소, 즉 공간에 구애되지 않는 내용을 표방하는, 다시말하면 시간이 공간을 표함하는 것이다.

「역동적 장」은 장소에, 「한」은 시간에 역점을 두고 있고, 따라서 양자는 서로가 걸맞는 그릇과 내용물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같은 내용을 우리네가 흔히 듣고 쓰는, 우리의 귀에 익숙한 「한마당=한time+마당space」철학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한」과 「마당」은 둘다 순수 우리말이고 가장 변화와 포용력이 풍부한 우리말이다.

우리 민족은 축제를 일컬어 「한마당」(굿판이라고도 표현한다)벌인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용해되고 만다. 인간이 이룩해 놓은 모든 분류classification-분류학taxonomy-는 그 경계선을 잃고 만다. 심지어 하늘과 땅도 하나가 된다. 말하자면 천, 지, 인이 인(人)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예술인류학의 모델에서 보면 「사물↔언어↔상징↔기」에서 보면 「사물→언어→상징」이 氣로 환원되는 과정이다.

가장 반철학적(反哲學的) 개념인「한마당」이 예술인류학의 철학(원리)이다.

이 말은 서양철학의 언어-사물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도전이며 혁명적 선언이다. 서양철학은 세상을 찢어놓은 죄인의 자기합리화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정신분열자의 추상화에 불과하다. 하나one, the first cause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전체oneness를 상실한 비극이다. 오늘날 그것은 그리이스, 로마 등 유럽을 거쳐 미국과 소련에 와 있다. 서양, 그것은 자연에 대한 무지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에 직선을 긋는다. 그리고 단면만을 본다. 그러나 자연은 입체적 곡선이며 드라마이다. 곡선은 직선을 포용하고 스스로 완전무결하다. 따라서 시작과 종말이 한곳에 있다.

이제 우리가 가장 흔히 접하고 사용하는「한마당」이 세계를 주도하는 철학으로 부각될 것이다. 그것은 예술인류학으로 구체화된다. 「한마당」에는 시간적인것(족보학), 공간적인것(고고학)이 모두 상징으로 변한다. 상징은 기를 나타낸다.

모든 것all the thing은 매개항(媒介項)에 불과하다. 매개항은 커뮤니케이션의 한 단계로 궁극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서로 대화케 한다. 상징은 매개항이다. 상징은 중용의 언어이다. 각 시대는 이것에서 신화적 원형을 찾아야한다.

여기에서 초역사적인 신화만이 영원하다. 신화적원형은 끝없이 재생산된다. 역사학자의 텍스트작업은 신화의 한 장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