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에 담긴 명창의 소리
유영대 / 전주 우석대 교수
그동안, 판소리를 듣고 그 현장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예견의 판소리 자료를 뒤적이기도 하면서 맹목에 가까운 애착이 생겼다. 판소리에 관련된 몇편의 글을 쓰다보니까 가장 아쉬운 점은 직접 인용한 소리를 들려줄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글 가운데 언급된 작품을 모두 녹음테입에 담아서 부록으로 붙여주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내가 전하고자 하는 그 느낌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원래 판소리는 그것이 연행되는 판에 들어있어야 비로소 구체적인 실체로 우리에게 작용한다. 그 판을 담기에는 녹음자료만으로 부족하다.
판소리와 축음기
모든 음성예술행위는 원래 일회적인 것이다. 작곡가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음에도 우리에게는 아주 구체적 존재이다. 작곡가는 그의 작품인 악보를 통하여 우리의 곁에 있다.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자리에만 가면 언제고 그 실체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수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으며, 오래될 수도 없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어떤 유명한 가수도 사실은 추상적인 이름만 남아있을 뿐, 실제로는 가수가 아니다. 황진이가 시조창을 잘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언급일 뿐, 어떤 객관적인 증거가 우리 앞에는 없다. 다만 우리가 김월하를 들으면서 황진이의 정창을 짐작할 수 밖에 없다.
송흥록의 기가 막힌 「귀곡성」이나, 이날치의 「새타령」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소리할 때면 귀신이 동무하자고 오거나, 새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들이 소리할 때, 그 자리에 모인 우리의 조상네들이 얼마나 애달파하고, 휘파람으로 환호했을 것인가, 그러나 그들이 소리를 들을 길이 영영 우리에게 없으며, 그런 한에서 송흥록이나 이날치, 모흥갑이나 박유전 등은 모두 추상적인 기호일 따름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소리를 가둘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를 거의 그대로 녹음했다가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 소리를 몇 벌이고 기계로 복제할 수 있는 일도 벌어졌다.
이것은 서양에서는 19세기 말의 일이었으며, 우리나라에도 20세기 초가 되면서 이같은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소리가 기계에 의하여 복제된다는 경험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으며, 기존의 음악예술의 흐름에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
판소리 명창의 소리를 듣고자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현장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명창의 음반이 상업적으로 제작되어 팔리면서 안방에 누워서, 거듭거듭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단 오늘의 명창 뿐 아니라 예전의 명창이라도 음반이 있는 한, 그 만남은 가능한 것이 되었다.
우리의 판소리사에서 맨 앞자리에 서있는 전설적인 인물은 하한담과 최선달이다. 그리고 대개 우리가 더늠을 통해서라도 소리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인물로는 순조때 주로 활약한 권삼득, 송흥록, 신만엽,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계철, 박유전 등 전기 8명창과 바로 그들의 다음 세대이자 철종 때 활약한 송우룡,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 장자백, 김창록, 정창업 등 후기 8명창이 뚜렷하다.
그런데, 이들은 19세기까지만 살았던 인물들로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들의 소리에 접할 기회는 없다.
고종 이후부터 주로 활약한 명창으로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박기홍, 유성준, 이선유, 김채만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완벽한 재현은 아니지만 이들의 소리가 sp음반으로 남아있으며 당대의 소리의 양상과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다만 이들 가운데서 박기홍과 김채만은 20세기 초반에 주로 활약하고, 활동의 무대가 지방이어서 sp음반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는 듯하다.
sp음반의 덕을 가장 많이 본 명창은 아마도 임방울과 이화중선이 아닌가 한다. 그들의 「쑥대머리」와 「추월만정」은 각각 수 십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수효이다. 일제 때는 웬만한 집이면 축음기가 있었다. 큰 나팔과, 그 옆에 개가 나팔통에 소리를 기울이는 빅터 상표의 유성기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필자도 그 축음기의 태엽을 감고 이화중선의 판을 걸었던 생각이 난다.
일제시대에 축음기를 상당히 싼 값으로 대내적인 보급을 하였다. 이 점은 사실 일제의 식민지 장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들의 공산품을 팔아먹으면서, 그들이 문화를 거의 강제로 주입시키고, 아울러 우리의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의도를 한꺼번에 충족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장사꾼들은 우리의 국악도 레코드로 만들어서 팔았고, 그 결과 우리에게는 1천장 안팎의 단가 및 판소리 음반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남아있는 판소리 관련 sp판의 종류와 구성, 창자와 내용 등을 검토하기로 한다. 먼저 20세기 초반 판소리가 무대를 얻으면서 급격히 창극화하는 모습을 개관한 다음 판소리전집 음반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들 음반의 내용을 살펴보고, 당대의 명창들의 세계를 sp판을 통하여 조망하기로 한다.
창극의 전개와 SP음반
개화기에 이르면서 원각사와 협률사가 생겨나고 그런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판소리의 창극화가 이루어진다. 판소리가 창극으로 전개되는 과정에 대하여 두 가지의 서로 어긋나는 가치평가가 있어왔다. 하나는 당연한 역사적 발전의 흐름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판소리의 타락한 형태로 이해하는 시각이다. 그러나, 판소리가 창극으로 전개되는 것은 판소리가 갖는 장르적 특성 때문에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창극으로의 전개는 너무 성급하게 진행되었다.
판소리가 갖는 연극적 성격, 내용의 성숙, 민중의식 등을 검토할 기회도 없었고, 새로이 무대위에 올릴 때 여러 변환 가능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모색하거나 토론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바로 이어서 닥쳐온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우리의 문화 전반에 대하여 모든 가능성을 송두리째 뽑아 내버리는 쪽으로 진행되어 갔다.
판소리는 서사문학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음조로 읊조리기만 하는 서사무가와는 달리 다양한 곡조, 너름새, 발림 등의 사용으로 창자의 역할이 서사단락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한다. 판소리의 전체 내용으로 보면 서사적이지만 공연을 할 때의 모습을 보면 창자는 스스로 그 작품속의 인물이 되어서 소리도 하고 몸짓도 함을 알 수 있다.
즉 창자는 작중인물과 강한 정서적 일체감을 이루고있는 셈이다. 창자가 직접 주인공이 되고 구경꾼이 그런 배우를 주인공과 동일시하면서 판소리는 자연히 연극적 공간으로 어울어진다. 등장인물의 대화나 행동묘사에서 창자는 어차피 배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분창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1900년 무렵 판소리가 무대를 얻었을 때 우선적으로 분창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체로 19세기 말 판소리가 공적인 무대인 원각사를 확보하면서 분창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바로 창극으로 대치되었다. 박황은 이 무렵의 창극화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단 창극화되면서 판소리는 판소리대로, 창극은 창극대로 병존하는 것이 그 무렵의 모습이었다. 판소리는 전통적으로 마당에서 불렸는데, 양반이 적극적으로 판소리의 경제적 기반이 되어오면서 방안에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극장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판소리 창자는 자신의 마당에 서면 바탕소리라고 하여 전판을 다 부를 수 있어야 하며, 실제로 시간제한 없이 오랜 시간을 불렀다. 그런데 판소리가 극장양식을 수용하면서 창을 나누어 한부분만을 부른다거나, 어느 한 대목만을 떼어내서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을 토막소리라고 하였다. 실제로 토막소리만 부르는 명창을 토막소리라고 하였다. 실제로 토막소리만 부르는 명창도 행세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대체로 판소리를 그대로 나누어 부를 뿐 연극처럼 대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창환과 강용환이 판소리를 창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후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발족되고, 이 모임에서도 주로 창극의 육성에 힘을 기울여서 발전시켰다. 새로 창극을 짜는데는 정정렬이 주도하였다. 당시에는 신파 연극이 성행하였는데, 김용성이 특히 창극에도 이전처럼 소리로만 부르지 말고 새로운 대사를 집어넣자고 주장하여 그 뒤의 창극은 다시 변모하게 되었다. 다음의 인용은 박황의 「창극사연구」에서 따온 것인데 판소리와 창극 사이의 특징과 거리를 잘 보여주는 삽화이다.
이 삽화는 판소리와 창극과의 거리, 초기의 창극과 1930년대 이후의 창극의 차이점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기왕의 소리에 대한 고집을 보여주는 김창룡과, 그 바탕에서 나름대로 자유롭게 고친 정정렬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명창들이 활발하게 창극운동에 참여하여 대단히 인기를 끌었다. 그 무렵「춘향전」은 다섯시간씩 공연되었다.
sp판은 원래 3분 정도의 소리 내용을 담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원래 소리의 면모대로 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것은 잘라내고, 모자라면 아니리라도 때워넣어서 3분짜리, 혹은 양면 6분짜리의 규격화된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1913년에 이미 송만갑과 반춘재 등의 소리를 실은 sp판의 광고가 신문에 실린 것으로 보아 상당히 일찍부터 상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의 유명한 축음기획사로는 「일본축음기상회」,「일동축음기주식회사」를 들 수 있다, 나중에 콜롬비아와 빅터, 오케 등이 주도하여 시장이 확대되어 간다.
창극조 판소리 전집 음반
주로 1933년에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되면서 판소리를 포함한 국악운동이 활기를 띠게 된다. 사무실이 적선동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판소리에 뜻을 둔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나이든 명창들에게 직접 배우기도 하였다. 정정렬을 중심으로 나이 든 명창들이 특히 창극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으며, 그러한 창극에 대한 열정으로 1930년대에 「춘향가」,「심청가」,「흥보가」,「적벽가」등 중요한 창극조 판소리전집이 여러편 출반된다. 이들 전집 음반의 구성과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춘향가」부터 검토하기로 한다. 춘향가는 전집이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채롭게 판이 만들어져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춘향가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전집으로 빅터판은 19매 3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음반의 녹음은 정정렬, 임방울, 이화중선, 박녹주, 김소희 등 당대 제일의 명창들이었고 장고는 당대 제일의 명고수인 한성준이었다. 다행히 이 음반의 보존상태는 썩 훌륭하며, 나중에 킹스타에서도 그대로 복제하여 간행하였고 지구에서 LP로 다시 출반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정정렬의 주도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그의 창극을 짜는 솜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빛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빅터 1111: 광한루 상/광한루 하
1112: 추천/책방독서
1113: 백년가약 상/백년가약 하
1114: 사랑가 상/사랑가 하
1115: 춘향집 이별1/춘향집 이별2
1116: 춘향집 이별3/춘향집 이별4
1117: 춘향집 이별5/오리정 이별1
1118: 오리정 이별2/오리정 이별3
1119: 신연맞이/기생점고
1120: 신관 춘향을 부름 상/신관 춘향을 부름 하
1121: 형장 1/현장 2
1122: 형장 3/춘향 하옥
1123: 옥중 장탄 상/옥중 장탄 하
1124: 이도령 과거장/어사 남원으로
1125: 농부가 상/농부가 하
1126: 박석티를 올라서서/어사 춘향집을 찾아
1127: 어사 옥중의 춘향을 찾아 상/어사 옥중춘향을 찾아 하
1128: 부사 생일연/어사출도
1129: 이화춘풍 상/이화춘풍 하
한편 오케판 「춘향가」는 빅터판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게 적정렬의 주도로 이루어지지만 음반이 20장, 전부 40면으로 음반 한 장이 더 늘어났으며, 창자는 정정렬, 임방울, 이화중선, 신 숙, 김소희로 박녹주 대신 신숙으로 바뀐 것이 특색이다. 반주도 북은 정원섭이 맡고 신쾌동이 현금을 타서 좀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오케판 춘향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오케 12018: 이도령 광한루행/광한루 경개
12019: 장사승/천자뒤풀이
12020: 이도령 춘향집 당도/서상 가약
12021: 사랑가 상/사랑가 하
12022: 이별가1/이별가2
12023: 이별가3/이별가4
12024: 오리정 이별가1/이별가2
12025: 이별가 3/신관 도임
12026: 기생점고 상/ 기생점고 하
12027: 군노사령/십장가 상
12028: 십장가/옥중가
12029: 이도령 등과/어사 남원 암행
12030: 농부가 상/ 농부가 하
12031: 박석티/춘향모 축원
12032: 어사 춘향모 상봉/옥사방문
12033: 옥창상봉 상/옥창상봉 하
12034: 본관 생일잔치 상/본관 생일잔치 하
12035: 어사 출도/춘향 해칼
12036:
12037: 광한루 잔치/성주풀이
다음은 콜롬비아판으로 된 춘향전을 알아보자. 전부 18장, 36면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두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분량이다. 김창룡, 이화중선, 오비취, 권금수 등 명창이 소리를 나눠 불렀으며 한성준이 북을 잡았다. 각 음반마다 특별한 이름을 붙이는 대신 춘향전의 줄거리에 따라 「연애편」,「이별편」,「재상봉편」등 셋으로 나누어 크게 이름을 붙였다. 역시 잘 짜여진 창극이라고 할 수 있다.
콜롬비아 40540: 연애편(1,2)
40541: 연애편(3,4)
40542: 연애편(5,6)
40543: 연애편(7,8)
40544: 연애편(9,10)
40545: 연애편(11,12)
40546: 이별편(1,2)
40547: 이별편(3,4)
40548: 이별편(5,6)
40549: 이별편(7,8)
40550: 이별편(9,10)
40551: 이별편(11,12)
40552: 재상봉편(1,2)
40553: 재상봉편(3,4)
40554: 재상봉편(5,6)
40555: 재상봉편(7,8)
40556: 재상봉편(9,10)
40557: 재상봉편(11,12)
이보다 앞서서 출발된 것으로 생각되는 일축 조선소리 반의 「고대소설극 춘향전」은 음반이 일부만 남아있어서 전체적인 면모를 알아볼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음반으로 미루어 전부 20장 가량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명창 이동백, 김추월, 신금홍이 소리를 넣고 이흥원이 장고 반주를 맡았다. 이동백이 소리가 특히 시원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일축 K594: 이몽룡 광한루 구경차(1,2)
K595: 이몽룡 광한루 구경차(3,4)
K596: 이몽룡 광한루 구경차(5,6)
K597:
K598:
K599:
K600:
K601:
K602:
K603:
K604:
K605:
K606:
K607:
K608:
K609: 재상봉(1) 춘향모 비는데
K610:
다음은 시에론Chieron에서 박아낸 「춘향전」의 형편을 알아보자. 전부 12장 24면으로 이루어진 이 음반은 동편제의 명창인 김정문과 신금홍이 소리를 맡았으며, 당대의 배우로 추정되는 심영, 남궁선이 아니리 구실을 하는 대사를 넣었다. 심영 등의 대사는 영낙없이 신파조의 율격으로 이루어져서 어설프며 다만, 창을 할 때는 판소리의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 얼핏 들으면 조잡하지만, 그 나름대로 김정문이나 심금홍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음반의 제목도 사뭇 기존의 것에 붙이던 방식과는 근대화(?) 되어 있다.
시에론 501: 남원의 춘색 상/하
502: 광한루의 가연 상/하
503: 원앙침에 사랑가 상/하
504:
505:
506: 피에 젖은 십장가 상/하
507:
508:
509:
510:
511:
512: 이화춘풍 상/하
이밖에도 당시의 토월희 등 연극단체의 배우들이 소리로 박아넣은 춘향전이 음반으로 간행된 것이 몇 개 더 있다. 춘향전은 20세기 전반에 가장 사랑을 받은 판소리로 sp음반으로 출반된 수효도 가장 많았으며, 여러 명창들의 흔적이 가장 잘 스며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심청가」음반의 사정을 알아보자. 폴리돌판 24장짜리(599A-622B, 이 레코드는 뒤에 19235A-19258B로 다시 출반되었다. 현재 이 자료는 일부만 남아있다.) 분창 심청전은 정정렬의 도창으로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조학진, 문현향 등이 함께 불렀다. 당대의 최고 명창인인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이 함께 부른 이 심청가는 기왕의 sp음반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유산이 된다고 본다. 여러 소리를 섞어서 짜면서 심청가 한바탕의 진수적인 내용을 담은 좋은 대목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폴리돌 599: 삯바느질/명산기도
600: 삼십삼천/곽씨부인 유언
601: 곽씨부인 영면/곽씨부인 영결식
602: 심봉사 탄식/심봉사 걸유
603: 심봉사 동냥하는데/심청 구걸
604: 심청 승상댁행/심청답례
605: 심봉사 개천에 빠지는데/화주승 걸 공양미
606: 불전기도/선인들 오는데
607: 심청자탄가
608: 심청 사당 하직/심봉사 자탄
609: 선인따라
610: 선인 뱃노래
611:
612:
613:
614:
615: ? 꽃타령/수궁나오는데
616: 황후자탄(추월만정)/심맹인자탄
617:
618:
619:
620:
621: ? 심봉사 아뢰는데
622: 심봉사 눈뜨는데/뒷풀이
이번에는 오케판으로 된 분창 심청전을 보기로 하자. 전부 16매 32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약 120분 가량의 소리 내용이다. 이 음반의 녹음작성에는 김연수, 박녹주, 김옥연, 정남희, 김준섭 등이 참여했으며, 가야금과 해금 등 관현악 반주를 한 것이 특이하다. 소리의 내용은 김연수의 창본 심청가의 내용과 비슷하며, 특히 그의 역할이 돋보이는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폴리돌판에 비하여 음악적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흠이 있다고 하겠다. 다음은 각 음반의 내용이다. 비워둔 곳은 그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오케 20133:
20134: 심봉사 탄식/상여나가는데
20135:
20136: 심봉사 걸식/심청효행, 심봉사 개천빠지는데
20137: 화주승이 구하는데/삼백석 시주
20138: 심청이 기도/남경상인
20139: 심청 탄식/사당하직
20140: 부모영별/임당수 행선
20142: 심청이 수정궁으로/수정궁에서 모녀상봉
20143: 심황후 자탄/심봉사와 뺑덕이네
20144: 심봉사 황성행/뺑덕이네 도망
20145: 뺑덕이네 못잊어/목욕하다 옷을 잃고
20146: 무릉태수를 만나/방아찧는데
20147: 황후와 심봉사/부녀상봉, 눈뜨는데
20148: 심생원 춤추는데/별궁에 태평연
이번에는「홍보가」의 경우를 알아보자. 홍보가는 오케에서 출판되었는데, 전부 12장 24면으로 짜여져 있다. 임방울, 오수암, 이화중선 등 쟁쟁한 명창이 취입하였으며, 오케 고악단의 관현악 반주로 되어서 특이하다. 특히 오수암의 소리의 면모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이 음반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오케 홍보전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오케 20087:
20088: 홍보 애원
20089:
20090:
20091:
20092: 제비 날아든다/제비노정기
20093:
20094:
20095: 놀부, 흥부집 방문/놀부, 제비 몰아들인다
20096:
20097: 놀부 박타는데(초랭이 나옴)/(거사당패 나옴)
20098:
다음으로 폴리돌 「적벽가」를 검토하기로 한다. 이 적벽가 음반은 전부 18매 36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두시간 분량이다. 앞의 심청가와 마찬가지로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조학진, 임소향, 문연향 등이 소리를 하였으며, 한성준이 북을 맡았다. 이동백의 통성으로 질러대는 맛, 김창룡의 밋밋하면서도 폭이 깊은 장중함, 정정렬의 그늘짙은 애절한 흐느낌들이 한데 어울어져 조화를 이룬 좋은 소리내용을 담은 음반이다.
폴리돌 19260: 삼고초려
19261: 장판파
19262:
19263:
19264:
19265:
19266:
19267:
19268:
19269:
19270:
19271:
19272:
19273:
19274:
19275:
19276:
19277:
(sp판 자료 가운데서 내용이 빠진 부분은 확인되지 않은 곳으로 보완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데는 이보형의 논문「판소리의 제에 관한 연구」와 배연형의 「판소리 오명창」해설을 참고하였으며 sp판 자료는 최동현의 도움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