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관찰과 처방
유종호 / 평론, 이화여대 교수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즐겨 읽는 책에는 외국소설의 번역이 많다. 가령 1987년에 공표된 청소년 독서 실태에 관한 서강대 유재천 교수의 연구보고서는 의지할만한 자료가 된다.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대라는 설문에 응답한 여고생들은 대개 외국소설을 대고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데미안」「부활」「생의 한가운데」「빙점」등이 상위권에 들어 있다. 남자고등학생의 경우「데미안」「어린 왕자」「노인과 바다」「죄와 벌」「갈매기의 꿈」「무기여 잘 있거라」등이 상위권에 올라 있다. 제목에 있어 차이는 나지만 외국소설 번역에 대한 선호 경향은 비슷하다. 남녀학생 모두 제7위까지에 든 작품들이 대부분 외국작품이고 극히 드물게 국내작품이 하나쯤 끼어 있다. 이른바 통속소설이라고 분류되는 국내작품이다. 수준을 낮추어 중학생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정은 엇비슷하다. 외국작품 선호가 압도적이다. 이 조사는 전국 각지의 천명이 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그 신뢰도가 높다. 이러한 조사연구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주의깊이 관찰하면 드러나는 경향을 신빙성 있게 제시했다는 점에 이 보고서의 무게가 있다. 그리고 고등교육 수혜자의 수준에서도 문학서적에 관한 한 번역된 외국작품에 대한 선호도는 높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 국민의 독서생활에 있어 번역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고 생각된다.
학생들 사이에서 문학독서가 독서의 대종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문학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중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서 국어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소홀치 않다. 수학, 제1외국어와 함께 도구교과라는 특성 때문에 많은 역점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국어교육은 문학교육이 아니라는 구실로 적절한 문학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익히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중학교 국어교육의 실상이다. 고등학교 국어과정에서는 또 실제적인 어문생활과 직결되지 않는 고문에 많은 비중이 두어져 있다.
국어교육이 물론 문학교육으로 대체될 수는 없다. 정서법을 익혀야 되고 또 적정한 이해를 위해서 구문이나 문법의 지식 습득도 필요하기는 하다. 국어교과서의 내용을 문학작품 일색으로 채우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사고를 요구하며 사고의 진행이 명료하여 사고의 모형이 될만한 글이 많이 실어야 할 것이다. 또 세계를 이해하고 삶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냉철한 이성의 획득과 그 연마에 기여하는 글이 실려야 할 것이다. 현대세계를 결과시키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한 근대과학과 그 삶에의 적용인 기술공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돋구는 글도 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말의 성질을 활용하고 그 특성이 다양하게 드러나면서 삶에 대한 지혜를 담고 있는 문학의 글이 소홀히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뜻에서 국어교육은 문학교육이 아니라는 말은 적어도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그리 적절한 명제는 되지 못한다.
많지 않은 문학의 글, 시, 단편소설, 수필이 교과서에 실려있지만 문학을 가르치는 방법이나 실제는 문학적 감수성의 세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별로 의미가 없다. 작자에 대한 개인사적 혹은 문학사적 토막 지식, 작품에 대한 규격화된 접근, 작품의 실질적인 이해와 별 상관이 없는 수사적 술어의 해설 등이 기계적으로 전수된다. 이 모든 것이 가상 시험문제와의 관련 속에서 처리된다. 고문에 이르러서는 친숙치 못한 옛말 익히는 일이 중심이기 때문에 문학이 비비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상이한 일종의 외국어 익힘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실제로 청소년기의 독서에서 많은 역점이 주어지는 문학독서에 관한 한 각급 교육기관에서의 문학교육은 이렇게 극히 허술히 방치된 상태에 있다.
문학교육의 소홀과 함께 글쓰기 교육의 완전한 포기가 또 학교교육의 큰 특징이 되어 있다. 글쓰기 교육은 감상문 쓰기나 동요 짓기와 같은 이른바 문언작문 훈련이 아니다. 외국의 경우 각급 학교의 숙제가 일단은 글쓰기 훈련과 직결되어 있다. 사회생활 과목이나 숙제가 글쓰기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자습서나 참고서 베끼기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또 대입학력고사에서 따로 평가한다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고등학교에서 글쓰기 훈련을 과하는 법도 없다. 적절한 글쓰기 훈련은 명료한 사고와 명석한 글쓰기를 지향하게 마련이지만 한편 좋은 글에 대한 판별력을 기르는 데도 중요하다. 글쓰기에 고심한 경험은 잘 씌어진 글을 알아보는 데 극히 계도적이다. 붓글씨를 써본 사람은 전혀 써보지 않고 붓글씨를 구경한 사람보다 한결 세련된 감식안을 발휘한다. 이렇게 글쓰기는 글읽기와 상호보충관계를 맺게 한다. 글쓰기를 염두에 둘 때 글읽기에 대한 태도가 훨씬 세심해지고 자상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교육의 중요성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것은 너무나 새삼스러운 일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상상력 훈련의 중요성이 널리 인정되어 실천되어 왔고 또 문학고전의 친숙이 인문적 훈련의 불가결한 요소로 지목되어 왔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지면과 언어를 절약하기로 한다. 그리고 형성기에 있어서의 문학경험이 때로는 사람에게 가장 기층적인 형성의 뼈대로 작용한다는 사실의 지적으로 자족하려고 한다. 그러면 문학교육에서 핵심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글과 그렇지 못한 것이다. 문학교육에서의 기본은 이러한 선별능력이며 기본적인 선별능력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문학교육에서의 문맹수준을 넘어 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중고등학교 학생사이에서 외국소설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독서경향을 신빙할만한 통계적 연구를 통해서 실증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중고등학교에서 문학교육이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정을 지적하고 문학교육의 핵심은 작품에 대한 적절한 선별능력의 양성에 있다고 말하였다.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판단기준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차이를 쉽게 정의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붓글씨나 그림에도 뛰어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있게 마련이고 그 판단기준도 있게 마련이다. 이제 우리 청소년들의 문학 감수능력을 검토해 볼 차례이다.
필자는 문과대학에 다니는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선호작품을 조사한 적이 있다. 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상위권 내지는 중상위권에 속하였던 외국문학 전공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3학년 2학기에 조사하였다. 학력고사가 특히 문학적 감수서의 세련도에 있어 믿을만한 지표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전국의 학력고사 응시 대상자 가운데 상위권 4퍼센트 안에 들어가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규격화된 규정을 따르면 우수 집단이다. 이들은 대학에서 2개년 반의 수학의 했고 외국문학이기는 하나 일단 어문학도들이다. 대학입시준비에서 해방되어 일단 읽고 씀은 분방한 독서를 이론상으로는 실천할 수 있었던 학생들이다. 조사자가 주요관심으로 삼은 것은 선호작가나 선호 작품의 분포나 그 규명이 아니라 문학적 감수성의 실제에 관한 실증적인 정보였다. 이것은 헤아리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지 획일적인 통계적 처리로 그쳐서는 안될 사안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사항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어떤 지표나 시사는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설문 사항은 다음 5가지였고 넉넉한 시간과 반응의 공간을 주었다.
1)지금까지 읽은 국내작가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2점을 순서대로 적으시오.
2)번역으로 읽은 외국작가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 2점을 역시 순서대로 적으시오.
3)원문으로 읽은 영어작품 중 가장 흥미 있었거나 인상적이었던 작품 2점.
4)국내 시인 중 가장 좋아하는 시인 두 사람을 적고 그 이유를 간단히 적으시오.
5)애송하는 혹은 좋아하는 시가 있다면 기억하는 대로 적으시오. 전부가 아니라면 일부라도 좋고 국어든 영어든 관계없습니다.
되풀이하지만 학생들의 문학감수성의 수준과 실제에 대한 정보를 겨냥했기 때문에 선호되는 작품이나 작품을 굳이 적고 싶은 흥미는 없다. 대중가요의 인기 순의 매기는 것 같아 마음내키지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국내작품으로는 현존작가의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8.15이전의 작품이 새세대에게는 벌써 먼 과거 작품으로 비치는 듯해서 흥미 있었다. 가끔 이광수, 김동인, 채만식의 작품이 섞여 나오지만 그 수는 미미하다.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번역된 외국소설은 고등학교 학생사이에서의 유형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죄와 벌」「부활」「폭풍의 언덕」「데미안」흐름에 약관 변화가 있지만 그 수효는 미미하다. 외국 대중소설이라고 할「대지」등이 첨가되고 국내 번역이 많이 된 크로닌, 루이제 린저 등의 작품이 가미되어 있다. 원작으로 읽은 영미소설에 대한 해답은 대체로 교실에서 배운 것을 적고 있어 사실상 자발적, 선택적인 독서에 의한 선호 구축이란 성향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대학 학부 수준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한다.
설문 조사에서 극히 비관적, 부정적인 지표는 응답자 응답내용의 불균형성이다. 가령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외국 소설로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들고 있는 것은 교실에서 배웠으니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이스에 감명받은 응답자가 국내작품으로 들고 있는 것은 황당 무계하다 대중소설이다. 황당무계한 대중소설을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는 학생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원문으로 읽은 가장 인상적인 외국소설로 적는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허영이다. 그러나 그의 조이스 이해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무엇인가 한 두개 적어야 하겠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적은 것일 수도 있고 또 몇 권 안돼는 원문 독파 소설에서 뽑은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제한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부정적인 지표는 선호하는 국내소설 2편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경우이다. 허황한 대중소설과 가령 김승옥의 단편집이 나란히 적혀 있는 것을 보면 그 감수성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짝짓기도 소홀함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부정적인 지표는 시인과 시에 관한 항목에서 나타난다. 도저히 함께 좋아할 수 없는 시인이 나란히 적혀 있다. 지금껏 읽었던 시가 아니라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적는 항목이기 때문에 현재형임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짝짓기가 많은 것이다. 작품상의 경향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릴케와 브레히트를 똑같이 좋아할 수 있다.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백석(白石)과 도시의 우수가 담긴 김광균(金光均)을 다같이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까지 하다. 그러나 가령 정지용과 황석우를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적어놓으면 그 기묘한 배합에 실소하고 말 것이다. 시와 시가 되지 않은 것 사이의 짝짓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를테면 그 비슷한 결함이 많아서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흔한 짝짓기는 김소월과 윤동주 같은 규격화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교과서적 접근의 결과이니 나무랄 일은 못될 것이다.
시에 관한 설문 가운데서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좋아하는 시를 적어놓는 항목에서다. 전부가 아니면 일부라도 좋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빈 칸도 많았고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적은 경우도 서넛 있었다. 윤동주의 「서시」를 적은 경우가 가장 많아서 80명 중 8명인가 되었다. 그 다음 김소월의「진달래꽃」, 박목월의「나그네」가 몇 명씩 있었다. 그러나 가령 「서시」의 경우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적어놓고 있는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멋대로 줄바꾸기를 하고 있고 탈락이나 첨가가 있고 정서법상으로는 틀린 구석이 많았다. 가장 좋아하는 시라는데도 그렇다. 그러나 어쨌건 틀린대로 전문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가장 대견스러운 경우다. 「나그네」의 경우에도 짤막한 시임에도 마음대로 줄바꾸기와 부분적 변경 혹은 탈락이 있었다. 혼자만 보기가 아까운 것으로는「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바람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변조하고 있는 경우였다. 좋아하는 시라면서도「구름에 달 가듯이」라는 절묘한 이미지는 즐기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시는 우선 소리내어 외게 하는 것으로 학습을 시키는 경우가 외국엔 많다. 노래를 가르치면서 노랫말과 곡조를 외게 하듯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학습과정이다. 그리고 시는 노래나 그림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시에 관한 한 거의 문맹상태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모국어로 되어 있는 당대의 시 하나 변변히 향수하지 못하면서 그 문학 감수성으로 외국문학을 어떻게 향수하고 이해할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기본적 외국어 독해의 수준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극소수의 예외적인 학생만이 문학적 문맹 상태를 벗어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특정 학교의 소수학생을 대상으로만 설문 조사를 기초로 일반론을 작성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모험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의 문학 소비의 현황이나 독서 성향을 고려에 넣고 신중하게 접근할 때 문학 수용과 감수성의 수준을 가리키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고등학교 수준에서의 문학교육이 사실상의 부재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대학의 교양과목이 구태의연한 수박 겉핥기 또 주마간산 격의 어문학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한다. 현행 입시제도와 이에 따른 학교 교육, 글쓰기 교육의 부재 등이 계속되는 한 문학교육의 부재 내지 실패는 계속될 것이며 고등교육 수혜층에 있어서의 문학적 감수성의 장애현상은 극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학교교육 실패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음악과 미술이 교육에 의해서만 향수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자기교육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는 분야가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재미있는 동화나 정감있는 동시는 적절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자동적으로 어린이 마음을 매혹하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끌리게 마련인 것이다. 자기교육이 자연스레 진행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의 조성이 중요하다. 문학교육의 부재와 실패, 고등교육 수혜자에게 있어서 조차 발견되는 문학적 감수성의 장애현상이나 그 문맹성을 시인하면서 그 극복을 위해서 조성해야할 문화적 환경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여러모로 검토될 수 있겠지만 평소의 관찰과 추론을 근거로 하여 몇 가지만 조심스럽게 지적해 보고 싶다.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동요나 동시에 끌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대체로 시에 대해서도 무심하고 더 나아가 문체에 대해서도 대범하다. 시인들은 소설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소설도 많이 읽는 편이나 작가편에서 시를 많이 읽거나 관심을 표명하는 일은 희귀하다고 생각한다. 또 작가들이 시에 대해서 논평하는 것을 보면 대체로 시인이 소설론보다도 한결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동요나 동시는 말놀이의 요소도 많고 해서 말에 대한 감각을 이모저모로 세련시켜 주고 민감하게 해준다. 이 동시와의 친숙과정을 거치지 않고 또 시와 친숙해질 기회를 놓치면 말에 대한 세심한 감각을 훈련시키지 않고 대범하게 된다. 따라서 동화를 읽을 때도 그저 줄거리 중심, 얘기 중심으로만 읽게 된다. 그러다가 접하는 것이 외국동화요 외국작품의 번역소설이다. 공들이고 힘들이는 것 만큼 보답을 얻지 못하는 일이 세상에는 수두룩하게 많지만 번역이라는 것도 그 가운데서 윗쪽에 드는 것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영세한 출판자본의 졸속주의와 연계지어진 번역생산이 신명나는 일이 못됨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본래의 능력 부족도 있지만 번역생산에 전력투구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의 경우 웬만한 의미전달 수준에서 만족하고 만다. 그리하여 번역이 지니는 본래적인 어려움에 편의주의가 겹쳐서 문학작품의 경우 일반 정보전달의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보전달의 일차적 요구만을 충족시켜 주는 게 고작이다. 문학작품에 고유한 또 일급의 문학에 따라붙게 마련인 독자적인 문체는 따라서 희석되어 흔적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진지한 작품도 속절없이 대중적인 작품으로 변형되고 만다.
가령 셰익스피어 작품은 최상급의 문학이면서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널리 선호되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물론 읽는 희곡으로서가 아니라 구경하는 연극으로서 많은 관객을 당대에 끌었었다. 그 비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비근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연극이 관객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재미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셰익스피어 연극에는 살인이나 복수와 같은 격렬한 줄거리가 많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늙은 왕에서부터 원수 집안끼리의 사랑 때문에 아주 어린 나이에 죽어야 하는 슬픈 사랑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고 파란만장한 얘기가 많다. 줄거리만 가지고 따진다면 통속소설의 줄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싸구려 입장료를 지불하고 가장 열악한 자리에 앉아있던 구경꾼들은 이러한 격렬한 장면이나 활극적인 줄거리에 끌렸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상소리나 음담패설에 박장대소를 하였던 것이다. 조금 수준이 높은 관객은 이러한 요소와 함께 작중인물의 성격이나 거동에 대한 흥미를 추가하여 즐겼다. 그리고 가장 수준 높다는 관객은 셰익스피어 진수인 시로 된 대사를 시로 향수했다. 이렇게 구경꾼의 수준에 따라서 다양한 재미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위대하면서 동시에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두루 선호도가 높은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를 서투르게 번역해 놓으면 최고 수준의 관객들의 향유했던 시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진진하고 격렬한 줄거리와 얘기가 남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셰익스피어도 한갖 활극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를 상정해 본 것이지만 대개 진지한 작품일수록 또 일급의 작품일수록 주제의 무게와 함께 문체의 비중이 크다. 따라서 작품 고유의 문체가 증발된 시극이나 소설을 성의없는 번역으로 읽는다는 것은 반쯤은 활극이나 대중소설로 읽는 것이나 진배없다. 증발된 문체의 묘미에도 물론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손실이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문학적 감수성의 형성기에 우수한 동요나 동시를 접할 기회가 없어서 그 이후 시를 통한 모국어와의 섬세한 교섭을 갖지 못하는 경우를 상정해 보자. 이러한 감수성이 다시 전달위주의 번역소설에서 문체에 대한 감응능력을 세련시킬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치자. 이러한 감수성이 장애적 요소를 안게 마련이라는 것은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적 요인을 학교교육이 교정해 줄 기회는 매우 희귀한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자기교육의 가능성과 기회가 가장 많은 문학작품 향수에 있어서의 문맹현상 내지는 준문맹현상의 발생사정의 한 궤적을 필자는 이렇게 상상해 보고 있다.
문학이 뭐 별것이냐, 아무거나 향수자가 재미있게 읽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유서깊은 인문적 전통은 문학의 인간형성력을 중시하면서 그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국문학이든 외국문학이든 일급의 문학작품과 친숙해지는 것이 소망스러운 일이다. 가뜩이나 어른들을 덩치 큰 어린애로 만들어버리려는 저급한 대중문화가 강산을 휩쓸고 있는 터전에서 진지하고 기품있는 문학과의 친숙은 사회의 성숙을 위해서도 권장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리고 모국어로 된 탁월한 시편들을 통해서 문학적 감수성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사항이다. 우리들의 어문생활에 보이는 규격화된 감정이나 사고의 범람, 기품없는 저속취미의 유행, 뜻없고 상투적이며 명확하지 못한 갖가지 축사, 치사, 허식허례도 근본적으로 언어감각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 점 우리 사회가 수행해야 할 기본적 문화노력의 사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 문학의 해외 진출도 필요하고 외국어로의 작품번역도 필요하다. 그러나 문학적 감수성의 일반적 수준 향상을 위해서는 많이 읽히는 외국작품의 엄정하면서도 문체성있는 정성스런 번역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리하여 외국고전이 우리말 속에서도 고전으로서의 위엄을 지킬 수 있는 책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언어와 취향의 타락은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일변 사회풍토를 그만큼 비속화시키는 것이다. 고전을 읽으라고 입버릇처럼 뇌이면서도 책임있고 엄정한 그러면서도 생각과 정감이 절절히 풍기는 번역의 고전이 없다는 것은 검토해 볼만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많은 국민들이 영 졸속적인 전달 위주의 외국 번역작품을 통해서 문학적 자기교육을 과하고 문학 감수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사회적 차원의 연구 과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