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어법 바탕으로 한 우리가락 창조
최종민 /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요몇년 사이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 「국악동요」「국악가요」「국악찬송가」라는 용어가 있다. 국립국악원에서 국악동요 발표회 및 세미나를 하는가 하면 KBS FM이 국악동요 제작과 국악가요 연구회를 가진 바 있다. 지난 4월 16일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는 국악가요 발표회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크게 가진 바 있는데 송창식, 조영남, 정태춘 등을 등장시키고 관객도 많이 동원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기독교계에는 국악선교회라는 것이 있어서 국악찬송과 국악동요를 카세트테이프로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그런데 음악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 그러한 국악가요나 국악동요 또는 국악찬송을 접해보면 아마 틀림없이 이것이 국악가요인가? 도대체 국악가요의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 국악원이 주최하면 국악가요가 되고 국악인이 판을 벌이면 국악가요가 되는지? 국악기로 반주하면 국악가요이고 양악기로 반주하면 양악가요인지? 왜 양악가요라는 말은 없는데 국악가요라는 말은 생겨났는지? 등등 여러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나도 국악가요나 국악동요를 접할 때마다 많은 의문을 가져왔다. 우선 왜 그러한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국악가요나 국악동요는 어떠한 조건을 가져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통하여 국악가요운동이 일어나게 된 우리나라 음악계의 현실을 개관해 보고 국악가요가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하여 얘기해 보고자 한다. 또 어떻게 국악가요를 개발해 갈 것인가 하는 방법론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왜 국악가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전통사회의 노래들은 민요나 잡가, 가곡, 시조 할 것 없이 모두다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고 자연적으로 퍼져 나갔다. 노래를 짓는 사람이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보통사람과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뜻과 능력이 있으면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식이었다. 철저히 인간위주로 음악이 생성되었기에 부르는 사람마다 가사도 다르고 곡조도 다를 수 있었다. 노래는 상황에 따라서도 항상 변하며 인간들의 음악욕구는 충족시켜주는 것이었다. 서양음악을 통하여 음악지식을 얻는 요즈음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너무 질서가 없고 규격에 맞지 않는 노래문화를 만들어 가는 듯한 인상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전통사회의 노래야말로 항상 현재의 음악이었고 또 현장의 음악이었다. 무엇보다 노래하는 사람 각자 각자의 주체적인 자기표현이었다. 육자배기 하나만 보더라도 가사가 얼마든지 여러 가지일수 있고 곡조나 곡의 길이로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고 다르게 부를 수 있다. 수없이 많이 전해지고 시조가 그렇고 각 지방의 민요가 다 그렇다.
이러한 우리의 노래문화 풍토위에 유행가라고 하는 왜색가요가 일제시대에 퍼지기 시작했다. 유행가는 음반과 가수들의 방송활동 등의 작용으로 해서 순식간에 우리가 요를 좀 먹어 들어갔고 학교의 창가교육까지 곁들어져 우리의 노래문화가 위축되게 되었다. 일제시대의 유행가 보급과 일본식 노래인 창가의 확산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당시의 젊은 세대치고 그러한 일본식 문화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리라. 그런데 그러한 일제시대에는 전통음악에 종사하는 이들이 「신민요」라고 하는 전통음악어법의 새노래를 꽤 많이 만들어서 보급하기도 했다. 「아리랑」이니「태평가」니「신고산타령」같은 것이다 그러한 신민요이다. 말하자면 왜색가요인 유행가와 다른 우리식 노래를 만들어 노래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음악풍토에서 해방을 맞은 우리들은 또 다른 대중음악을 접하게 되고 더 본격적인 서양음악 교육을 받게 된다. 소위 미군방송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팝송이라는 것이 대중의 음악감성을 자극하게 되고 학교의 서양음악위주 음악교육이 또한 전통음악과 인연을 멀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중가요계는 소위 왜색가요인 뽕짝조의 유행가와 미국색 가요라고 할 수 있는 팝송계통의 노래가 공존하게 되고 학교교육은 클래식 위주의 서양음악이 판을 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는 일제시대에 많이 나왔던 신민요마저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우리식 음악감상이 메말라 버렸다.
일제 36년과 해방 후 40여 년을 이러한 음악문화 속에서 살아온 우리들은 어느새 음악에 대한 생각과 방법이 많이 달라져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종속문화 속에서 사는 동안 그러한 문화의 수인(囚人)이 된 것이다.
노래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방법으로 만들어 부를 수 있는 것이라는 자주적인 생각마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식의 음악어법도 우리음악 자체도 모르고 그저 남의 음악을 우리 것인 줄 착각하면서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로 위로를 삼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그러한 외래음악문화의 강세에도 불구하고 재래의 전통음악문화가 아직 건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 전체로 보면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국악인들은 각기 자기가 전공한 기악이나 성악에 충실하면서 만난을 무릅쓰고 우리음악을 지켜왔다. 또 오늘날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국악인들이 각 대학의 국악과를 나와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요즈음 일고 있는 국악가요운동은 바로 이 새 국악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이들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다. 이들은 왜색가요나 팝송식 가요가 아닌 우리식 가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결국 국악의 새 세대가 우리 노래문화의 흐름에 대한 어떤 자각을 가지게 되어 우리스러운 새 노래를 보급하고 싶은 마음에서 국악가요나 국악동요 운동을 벌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악가요의 조건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국악가요 운동은 대개 국악 전공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국악전문단체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국악가요를 만들자면 국악을 아는 국악인들이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국악인들이 만들면 그것은 곧 국악가요가 된다는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 국악가요는 그 자체로 국악가요가 되는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사람중심으로 음악을 평가하는 사고가 보편적이었다. 좋은 사람이 하는 음악이면 좋은 음악이고 나쁜 사람이 하는 음악은 나쁜 음악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논어에는「仁而不仁이면, 如禮何也지며 如樂何也리오」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인격이 행실에 우선한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사람 됨됨이 위주로 생각한 근거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까지도 작품 위주로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 위주로 작품을 평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누구의 작품이니까 으레히 좋을 것이고 누구의 연주니까 보나마나 뻔한 것이다 하는 식의 사고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좀 수정되어야 한다. 작품 위주로 평가하는 객관적인 안목을 가지자는 것이다. 국악인이 작곡했더라도 국악가요로서의 조건이 불충분할 수 있고 양악 전공자가 작곡했더라도 국악가요로서의 조건이 충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또 국악기로 반주하는 노래니까 국악가요다라는 생각도 역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악기란 소리를 내는 도구에 불가한 것이기 때문에 그동안 국악에서 사용하던 악기로 국악스러운 노래에 반주를 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통음악의 가곡이나 민요에서는 악기의 소리와 노래의 목소리가 아주 잘 소화되지만 서양 찬송가를 국악기 반주로 부르는 것에서는 노래와 반주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국악기로 연주한다고 해서 다 국악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악이 국악일 수 있고 국악가요가 국악가요일 수 있는 것은 악기만이 기준이 될 수 없다. 일본전통악기인 고도를 가지고 비발디Vivaldi의 사계를 녹음하여 음반을 낸 것이 있다. 그 음악을 듣고 고도를 가지고 연주했단 하여 일본음악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발디의 사계(四季)는 고도로 연주하든 가야금으로 연주하든 서양음악 장르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다시 간단히 정리해 보면 국악인이 하니까 국악가요다 라든지 국악기를 사용하니까 국악가요다 라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악가요는 국악가요로서의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악가요의 조건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음악의 표현양식인 음악어법이 첫째가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국악과 양악은 분명히 다르고 그 다른 차이는 음악어법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색가요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뽕짝리듬에다 일본민요조의 음조직을 사용하면 금방 그것이 왜색가요라는 판단이 오기 때문이다. 팝송식 가요를 알아차리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리듬과 음조직, 꾸밈음, 창법 등을 통하여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다. 결국 음악의 성격을 만들어 내는 것은 사람이나 악기가 아니라 음악자체의 표현양식, 즉 음악어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나의 경험담 한 토막을 들려 드리겠다. 어느날 음악교육에 종사하는 어떤 인사가 나를 찾아왔다. 지금 실시하고 있는 음악교육제도에 대하여 왜 국악을 제대로 안 가르치느냐고 국회의원들이 호통을 치면 큰일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되묻기를 그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음직한데 그전에는 어떻게 답변했었느냐고 하니까, 그전에는 한국사람이 작곡한 작품도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악과 같은 것이므로 한국사람의 작품+국악을 우리나라음악으로 간주하면 우리나라음악=국악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음악교육은 국악을 많이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있다고 답변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한 말이 「한국사람이 영어를 하면 영어가 아니고 한국어입니까? 또 영국사람이 한국어를 하면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고 영어입니까? 국악은 국악으로서의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이지 한국사람이 한다고 다 국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했다. 양악어법이지만 한국사람이 한국적인 무엇을 표현하였으니까 국악과 같은 것이라는 논리는 영어로 한국역사를 얘기하니까 국어라는 논리와 상통하는 것이다. 혹자는 의의를 제기할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통념상 영어와 국어를 구별할 때에는 많은 내용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재료인 단어나 표현방법인 어법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한다. 이 방법에 해당하는 음악의 요소로는 리듬(장단), 음계(調), 발성법(聲音) 등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국악이나 양악이다 하는 구별은 음악어법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된다는 말이다.
언어와 관련시켜 이 이야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해 보면 국어라는 것은 그 속에 외래어를 많이 포함하고 외국의 초현대적인 사건을 서술하더라도 역시 국어이다. 마찬가지로 국악도 국악의 기존 어법을 바탕으로 하면서 외국적인 요소를 소화해 사용하면서 아무리 현대적인 무엇을 표현하더라도 국악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결국 음악교육에서 국악을 가르친다는 것은 국악을 통해서 국악의 음악어법을 가르치고 그러한 국악의 어법을 가르칠 수 있는 새 교재를 개발해 가르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국악가요나 국악동요 또는 국악찬송가는 국악어법으로 된 노래들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방향이 국악가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방향일까?
나는 지금까지 국악가요의 조건이 국악어법으로 된 노래라고 규정했지만 모든 사람이 나의 주장에 동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명칭이야 어떻든간에 현재 우리들의 우리스러운 노래면 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악가요를 그냥 우리스런 노래쯤으로 규정하면 그 어법이 덜 문제시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의 내용이 전통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이 함께 섞여 있는 것처럼 음악도 전통음악과 외래음악이 다같이 우리음악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음악과 오늘날 우리의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현대화랄까 현재화랄까 아무튼 계속 거듭나면서 생명력을 가져야한다. 또 외래음악이 우리의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토착화랄까 한국화랄까 역시 달라지면서 적응해야 한다. 국악이 현대화할 수도 있고 외래음악이 토착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옳은 방향이냐 하는 것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따져보고 나서 어느 한쪽을 택하든지 양쪽을 다 택하든지 아니면 아예 다른 방법을 모색하든지 하는 것이 좋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른 예를 좀 살펴보자. 우리의 역사에서 한문은 외국문자라는 생각이 별로 안들 정도로 깊이 연구하고 토착화시켜 사용하였다. 천년 넘게 많은 힘을 들여 사용한 외국문자와 해방 후부터 맞춤법 띄어쓰기 등 많은 문제를 가진 채 그냥 가르치기 시작한 한글과 비교해 보면 문화의 동질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한글만으로 된 시, 소설, 논문이 얼마든지 있고 무척 아름답고 풍부하게 발전해가고 있다.
이러한 예를 음악에 적용시키는 것이 적당할는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외래음악을 토착화시키는 방향보다는 전통음악을 현대화시키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외래음악으로 우리 음악을 삼으면 그 내용이 경직되고 외국에 대하여 종속적이 되지만 전통음악을 우리음악으로 삼으면 항상 창조적이고 주체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전통과 외래를 섞어 쓰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어느 음악교육가의 의견처럼 어떤 어법을 쓰든 우리가 습득한 것이고 그 방법을 가지고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우리 것을 표현하면 그만이지 그 이상 따질 것이 무어냐 하는 식의 생각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국한문 혼용체의 문장과 같은 것인데 그럴 경우도 기본어법은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 한번 더 생각해 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분들은 전통음악어법은 오랫동안의 전통문화단절로 인하여 잘 소통이 되지 않아 오늘의 우리음악어법으로 적당치 않고 외래음악어법은 우리문화의 동질성과 맞지 않으니 우리음악어법으로 적당치 않다. 우리의 음악경험 모두가 작용하면서 우리문화의 동질성에 맞는 새로운 음악어법이 생겨나야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 음악의 모국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높은 수준의 음악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가 음악의 모국어를 새로 고안해야 한다든지 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까? 또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그러한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한문을 그토록 강요했어도 또 너무나 오랫동안 사용했어도 한글을 쓰게 내버려둔 지 40여 년이 된 지금 한글이 얼마나 풍부해지고 아름다워졌는가? 일제시대 일어를 그토록 강요했어도 우리말을 쓴지 얼마 안되어 일어가 이 땅에서 이상하게 들리게끔 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역사의 제1페이지에서부터 음악 잘하는 민족으로 기록되었고 또 많은 수준높은 음악문화를 창조하며 음악과 함께 살아온 음악적인 문화민족이다. 근세 몇 년동안 외래음악의 영향을 제도적으로 강하게 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음악적 역량이 깡그리채 달아난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잠재해 있기도 하고 다른 형태로 분출하기도 하면서 지금도 음악 잘 하는 민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때문에 우리의 음악은 전통음악을 통하여 다시 그 잠재력을 끌어내고 이를 현대에 사용할 수 있는 음악을 창조하는 데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악을 해야하고 국악어법으로 된 노래를 만들어 불러야 한다.
국악가요를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국악가요를 만드는 묘방(妙方)은 없을까? 국악어법으로 만들면 국악가요가 된다고 했는데 국악어법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시원하게 답변해 줄 내용은 없다. 모든 것은 국악자체에서 배워야 한다. 일반적으로 왜색가요라고 했을 때 그 왜색의 「색」에 해당하는 전통음악 용어는 무슨「조」니 무슨「토리」니 무슨「제」(制)니 하는 것이다. 가령 창부타령조하면 창부타령과 유사한 음악을 가리키고 수심가토리하면 역시 수심가의 곡태와 비슷한 노래를 가리키게 된다. 경제(京制)니 어디제니 하는 것도 역시 그런 종류의 음악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음악어법을 따지기 전에 과거의 음악행위가「토리」나「조」나「제」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이 방법을 활용해 보자는 것이다.
재래음악을 살펴보면「토리」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음악어법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자배기토리는 많은 남도노래의 바탕이 되어있는 데 같은 수준의 민요뿐만 아니라, 잡가나 무가 판소리까지도 육자배기토리와 관계가 있다. 심지어는 기악인 시나위합주나 산조음악까지도 관계가 있다. 음악에 따라서 육자배기토리를 변화시키거나 다른 요소를 첨가하거나 발전시켜서 사용하지 다른 토리를 사용하고 육자배기토리를 버리는 경우는 없다. 서도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서도민요인 수심가토리가 기저를 이루고 그것을 바탕으로 잡가로 만들어 부르고 무가도 만들어 부르는 것 같다. 경기지방은 방아타령조나 창부타령조가 대종을 이루고 경상도나 강원도 메나리토리가 우세하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나라에는 그 지방의 음악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이 토리를 이용한 새 노래를 개발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부타령조의 국악가요도 만들고 육자배기토리의 국악가요도 만들고 메나리토리의 국악가요도 만들면 차차 국악가요 만드는 방법이 발전되어 나오리라고 보는 것이다.
각 지방의 토리를 활용하여 선율을 만들고 창법을 개발하고 다양한 연주형태와 장단까지를 곁들이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스러운 오늘의 우리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참으로 우리스러운 가락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소리내는 창법도 저절로 자연적인 우리식 발성이 나오게 되고 그런 소리와 잘 어울리는 국악악기의 반주가 또한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가사와 곡조와 창법과 반주가 꽉짜여진 국악가요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이런 식으로 완벽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전통사회의 우리노래와 다른 점은 남게 마련이다. 우리식이란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 보통사람이고 그 보통사람들이 노래의 수준을 높이고 종류를 다양하게 하는 창조작업의 주역이다. 또 노래 부르는 사람이 노래라는 작품보다 우선하는 것이어서 사람에 따라 또는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노래를 가사나 곡조 할 것 없이 자유롭게 만들어 변화있게 불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국악가요를 작곡하여 보급할 경우는 작곡가가 작곡한 작품을 연주가가 노래하고 그것을 일반 사람들이 배워 받아들이는 식이 된다. 말하자면 유통과정이 전혀 다르고 작품의 위치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는 가사나 곡조가 언제나 일정한 것만 보급되게 될 테이니까 보통사람들의 창작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 또 그런 식의 노래를 계속하게 되면 창조역량이 계발되지 못한다. 때문에 그렇게 각 지방의 민속음악토리로 작곡을 하더라도 각자가 만들어 부를 수 있는 여백을 남기는 방법을 쓰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표현방식을 작곡에 집어넣어 각자가 선택하여 부를 수 있게 하는 배려도 필요할 것 같다. 아무튼 국악가요를 만드는 방법은 외래음악에서 어법이나 창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전통음악에서 어법이나 창법을 배워야 한다.
국악가요의 필요성
지금 우리에게는 국악가요나 국악동요, 국악찬송가가 필요하다. 우선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식 음악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것이고 다음으로는 우리음악의 동질성은 국악가요를 통해 끄집어 내어서 미래 한국의 음악문화가 국악어법을 바탕으로 전개되게 함으로써 한국음악사의 정통성을 회복해 보고 싶은 것이다.
국악가요의 조건은 국악인이 하는 것, 국악기로 하는 것, 국악어법으로 하는 것, 국악적 정서를 담은 것, 모두가 다 필요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악어법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외래음악어법을 전면 부정하거나 추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국악어법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다른 것을 첨가하든지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예는 우리의 음악사에서 중국음악을 수용한 많은 경험이 있다.
우리의 음악어법은 결국 국악 자체에서 찾아야 하는데 어법을 찾고 따지고 하기 이전에 우리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러는 가운데 국악어법을 터득하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그것도 어려운 상황에서 국악가요를 만들 경우는 우리음악의 <토리>니<조>니 하는 개념을 파악하고 이를 활용하여 새 음악을 만들면서 계속 발전시키면 미래의 우리 음악은 한국음악이 한국문화와 함께 키워온 독창성을 가지면서도 우리의 경험 모두를 통하여 끌어 올린 높은 수준의 안목에 걸맞는 한국음악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